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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코의 술 애장판 7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마음을 고스란히 담는 손길
[만화책 즐겨읽기 162] 오제 아키라, 《나츠코의 술 (7)》
처음부터 도시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숲이었습니다. 풀과 나무가 마음껏 우거지던 들판과 멧자락이었습니다. 사람은 풀과 나무 사이에서 꾸밈없이 살림자리를 얻었고, 이 살림자리에서 하루하루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새벽녘에는 새들이 잠을 깨웁니다. 아침에는 푸른 내음으로 온갖 들풀이 밥잔치를 베풀고, 바아갈 내음으로 온갖 나무들이 열매를 베풉니다. 사람들은 좋은 목숨을 좋게 꾸리려고 사냥을 한다거나 농사를 지어야 한다거나 하지 않았어요. 숲이 베푸는 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넉넉했어요.
풀과 나무는 사람하고 동무였습니다. 풀과 나무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랐어요. 풀잎은 따사로이 흔들리고, 나뭇잎은 보드라이 흔들렸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풀잎을 따사로이 쓰다듬고, 나뭇잎을 보드라이 어루만졌어요.
- “말 안 해도 알겠습니다.” “뭘 아는데요? 알긴 뭘 아냐고요, 쿠사카베 씨!” “아, 네에.” “아, 네에 좋아하네. 당신은 화나지도 않아요? 할아범한테서 배워서 이제 조금은 술 만드는 방법을 알았어요?” “아니요, 그게 좀처럼.” “답답헤 죽겠네. 어서 어엿한 도지가 되라고요!” (18쪽)
- “우린 품평회를 위해 술을 빚는 게 아니야. 도지에게 있어 가장 큰 상은 뭐니 뭐니 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의 즐거운 얼굴이지.” (44쪽)
- “할아범, 도지란 참 아이러니한 예술가야. 아무리 훌륭한 도지도 결국은 외지로 돈벌이를 나섰다 만들어지니 말이야. 농가의 남자들이 겨울 동안 놀고 있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일거리를 찾아 술 곳간의 일꾼이 됐지. 그래서 사람들 살림이 풍요로워지면서 외지로 일을 찾아 떠나는 경우도 줄어들고 있으니, 도지가 사라지는 건 시대의 흐름일지 몰라. 어쩌면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술 곳간도 술 곳간 일꾼도 없어질지 모르지.” (225쪽)
아이를 어르는 어버이 손길이 따뜻합니다. 어버이한테 내미는 아이들 손길이 부드럽습니다. 서로서로 가장 좋은 사랑을 가슴에 품으며 손길을 내밉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가장 홀가분하면서 가장 기쁜 몸짓을 드러내어 나눕니다. 미운 마음이란 덧없습니다. 샘을 내는 넋이란 부질없습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좋아합니다. 서로 믿고 서로 기댑니다. 풀은 나무한테 기댑니다. 나무는 풀한테 기댑니다. 이러면서 저마다 튼튼히 뿌리를 내립니다. 흙은 풀과 나무를 살찌우면서, 풀과 나무는 흙을 단단히 움켜쥐며 싱그러이 북돋웁니다.
사랑이기에 어깨동무입니다. 사랑이기에 품앗이입니다. 사랑이라서 따스합니다. 사랑인 만큼 너그럽습니다.
풀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 또한 풀을 사랑했습니다. 나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 또한 나무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생겨 숲을 밀면서, 사람들은 차츰차츰 풀을 잊고 나무를 잊습니다. 도시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이 늘면서, 사람들은 시나브로 풀을 아끼거나 나무한테 기대던 넋을 잊습니다. 사람들은 공장만 있으면 되는 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회사만 있으면 되는 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 말대로 술의 매력은 숙성이 관건.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는 게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분해요.” “신주도 숙성주도 모두 훌륭해요. 비센은 그런 것 같더군요.” “역시 쌀?” “네에.” (33쪽)
- “맛있어요! 이런 술은 처음 마셔 봐요! 신선하고 향기도 진하고.” “으음.” “왜 그러냐 진키치.” “아니, 우리가 이제 지을 쌀이, 이렇게 맛난 술이 될 거라 생각하니.” (41쪽)
- “흙 한 번 만지지 않고, 모 한 번 손대지 않고, 기계로 심어 버려서야 작물에 대한 애정이 솟겠어?” (129쪽)
사람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나무는 기꺼이 온몸을 맡겨 잘립니다. 나무는 제 몸뚱이를 사람한테 스스럼없이 내줍니다. 사람은 풀을 뽑아 밭을 일굴 수 있습니다. 풀은 기꺼이 제 목숨을 내주어 밭에서 몇 가지 푸성귀가 새롭게 자라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잊습니다. 나무와 풀이 저희 온 목숨을 사람한테 맡기는 줄 잊습니다. 온 사랑을 담은 온 목숨으로 땔감이 되어 주고 밥과 반찬이 되어 주는 줄 잊습니다. 나무로 집을 지은 사람들 몸과 마음에 ‘나무 한 그루 넋과 얼’이 찬찬히 깃드는 줄 느끼지 않습니다. 풀을 뜯어 먹을 때에 ‘풀 한 포기 넋과 얼’이 곱게 스미는 줄 느끼지 않습니다.
오얏을 먹으면 오얏이 나한테 스며듭니다. 오얏은 내가 되고 나는 오얏이 됩니다. 세겹살을 구워 먹으면 세겹살이 된 돼지는 나한테 스며듭니다. 돼지는 내가 되고 나는 돼지가 됩니다. 늘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가공식품을 먹는 사람은 가공식품에 깃든 화학조합물을 먹는 셈이라, 화학조합물이 내가 되고 내가 화학조합물이 됩니다.
자동차가 뿜는 배기가스에 둘러싸이는 사람은 배기가스를 마십니다. 배기가스가 내가 되고 내가 배기가스가 됩니다. 맑은 들바람이나 멧바람이나 바닷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맑은 숨을 마시겠지요. 곧, 들바람이 내가 되고 내가 들바람이 돼요.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스스로 전쟁을 꿈꿀 때에는 내 생각과 삶이 온통 전쟁이 돼요. 갖가지 무기와 폭탄으로 나라를 지키는 평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면, 내 넋과 삶과 말은 ‘갖가지 무기와 폭탄’처럼 바뀝니다. 밥 한 그릇 나누는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어 이웃과 어깨동무하자고 생각한다면, 내 넋과 삶과 말은 ‘밥 한 그릇’처럼 되고 ‘사랑’이 천천히 감돌아요.
- “진키치, 집어서 수분을 확인해 봐라.” “엑? 이걸? 농담해요? 소 오줌 뿌린 걸 어떻게 만지라고.” “네가 그러고도 농사꾼이냐? 퇴비도 제대로 못 만지면서 용케 여태 벼농사를 지었구나! 이게 다 타츠니시키의 밥이 되는 거야! 재배회의 첫 거리라고 생각해!” (49쪽)
- “농작물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 든다면 그건 이미 농업이 아니야. 장사지.” “그,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럼 우리 농사꾼은 돈을 벌면 안 된다는 거야?” “안 되지!” “고다 씨, 그건 너무 깐깐한 거 아니야?” “넌 농사가 대충대충 해도 되는 일 같냐?” … “원래의 목적이란 게 뭔데.”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농작물은 굶주릴 때나 배부를 때나 서로 나눠야 하는 거야! 하물며 나라나 기업의 이익 추구의 수단이 되어선 절대 안 되지! 농업에 돈과 물질의 논리를 끌어들여선 안 돼! 생명의 논리를 바탕으로 자연에 감사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 그게 농사꾼의 조건이다!” (53∼55쪽)
내 손길에는 내 마음이 담깁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따사로이 돌보는 나날이라면, 내 넋과 말은 언제나 따사롭습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따사로이 돌보지 못할 적에는, 내 넋과 말이 늘 따사롭지 못해요. 너그러이 돌보는 마음일 때에 너그러운 숨결 가득한 넋이요 말입니다. 아름다이 꾸리는 마음일 때에 아름다운 꽃빛 가득한 넋이자 말이에요.
생각이 삶이요, 마음이 삶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고, 마음을 기울이는 대로 삽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마음을 기울이는 대로 아이는 어버이한테 마음을 기울입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다가오는 넋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돌아갑니다. 내가 동무한테 쏟는 마음은 동무가 나한테 쏟는 마음이 되고, 동무가 나한테 보내는 사랑은 내가 동무한테 보내는 사랑이 돼요.
마음은 메아리와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삶은 메아리라 할 만합니다.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는 맑은 목소리 되어 돌아오고, 거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는 거친 목소리 되어 돌아와요.
- “나츠코나 도지가 일본 최고의 술을 만들려 하는 마음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해.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줬으면 한다. 술의 원료인 쌀과 물은, 자연의 은혜 없인 생기지 않아. 그 은혜는 무상의 봉사로 양조장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그 사실을 명심하고 모쪼록 돈벌이에만 급급한 양조장은 되지 마라.” (57쪽)
- “양조장 사장 따님에게 술을 먹인 도지는,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헤헤.” “왜 그랬어? 할아범, 어째서 내게 술을 가르쳤던 거야?” “이런 이런 벌써 잊었나? 9살 때 술을 마시게 해 달라며 목 놓아 울었던 게 누군데? 게다가 벌컥벌컥 맛깔나게 마셨던 건 또 어떻고. 1년 내내 양조장 안을 헤집고 다니며 놀면서, 술밥 냄새며 모로미 냄새를 좋아라 했던 어린애가 누군데? 그런 어린애도 세상에 또 없을 게다. 넌 어쩌면 모로미에서 태어난 건지도 몰라. 너와 야스오 씨(술 신)는. 그래 나츠코는 모로미에서 태어나 자란 효모다. 나츠코 효모야.” (174∼175쪽)
오제 아키라 님이 빚은 만화책 《나츠코의 술》 일곱째 권을 읽습니다. ‘모로미에서 태어난 아이’를 이야기하는 《나츠코의 술》 일곱째 권인데, ‘모로미에서 태어난 아이’는 술맛만 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술로 담가 술이지만, 술은 ‘쌀’이 없으면 빚을 수 없어요. 쌀은 흙이 없으면 얻지 못해요. 흙은 기름지게 돌보지 않으면 벼를 심어 거둘 수 없어요.
곧, ‘모로미에서 태어난 아이’는 술을 빚는 일만 꿸 수 없습니다. 술맛을 아는 ‘술 하느님’은 술이 태어나는 밑자리인 ‘쌀’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술 한 방울 맑고 곱게 빚고 싶은 꿈이란, 술이 될 쌀을 맑고 곱게 얻고 싶은 꿈이요, 술이 될 쌀을 맑고 곱게 얻고 싶은 꿈이란, 술이 될 쌀이 맨 처음 볍씨에서 볏모가 되어 논에 꽂혀 자라기까지 맑고 곱게 자라도록 땀흘리고 싶은 꿈입니다.
흙이 있어 벼가 있고, 벼가 있어 쌀을 얻으면서 술이 있습니다. 해가 있어 지구가 있으며, 지구가 있어 숲과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흙도 벼도 쌀도, 해도 지구도 숲도, 모두 가장 따사로운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마음이 있어야 예쁘게 얽힙니다. 가장 따사로운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마음이 없다면 조금도 어여쁠 수 없는 해요 지구요 흙이요 숲입니다.
- “어떻게 보면 보다 좋은 술을 빚을 수 있을지만 궁리했어요. 술밥이며 누룩, 효모에 모로미만. 하지만 벼농사를 모르는 도지는 없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들 농사를 지으니까요. 매년 벼를 키우고 쌀을 피부로 느끼죠. 역시 그걸 모르면 어엿한 도지는 될 수 없어요. 술을 빚는 건 우선 벼농사와 흙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 퇴비부터 공부할 거예요.” (63쪽)
-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사에코. 벼농사 따위 지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 그런 고생은 나 하나 하는 것으로 족해. 하물며 넌 여자다. 여기서 더 잘못되면 어쩌려고. 내 바람은 그저 네가 평범한 회사에 들어가 일하다 평범한 남자를 만나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뿐이야. 그게 그렇게 과한 욕심이냐, 사에코!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너만!” (137쪽)
사랑은 서로를 헤아리는 좋은 마음입니다. 사랑은 아파트 열쇠나 자동차 열쇠로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땅문서나 집문서나 은행계좌 숫자로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얼굴 생김새나 몸 생김새로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오직 서로를 헤아리는 가장 맑으면서 곱고 착한 마음으로 이룹니다.
정치를 하든 문화를 하든 경제를 하든 사회운동을 하든 늘 이와 같아요. 서로를 헤아리는 가장 맑으면서 곱고 착하며 참답고 싱그러운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정치가 서고 문화가 서며 교육이나 경제나 사회가 설 수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술을 빚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흙을 일굽니다. 사랑 깃든 손길로 밥을 짓습니다. 사랑 어린 손길로 아이들 손을 맞잡고 서로 즐거이 노래부릅니다. (4345.7.5.나무.ㅎㄲㅅㄱ)
― 나츠코의 술 7 (오제 아키라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11.25./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