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17] ‘이식(移植)’과 ‘착근’

 


  시를 읽습니다. 나는 내가 쓴 시를 나 스스로 좋아하며 읽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쓴 시를 나 스스로 찾거나 살피며 읽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스미는 시가 좋습니다. 마음을 달래거나 북돋우거나 쓰다듬는 시가 좋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거나 기쁨으로 춤춘대서 반갑다고 느끼는 시는 아닙니다. 슬픔이나 울음이나 눈물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아픔과 고단함과 생채기가 가득하다 하더라도, 삶을 따사로이 보듬는 맑은 손길을 만날 적에 참 반갑구나 하고 느끼는 시입니다.


  목사이면서 어린이책 번역도 하는 고진하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얼음수도원》(민음사,2001)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토지문학공원 2〉이라는 시에서 “이식(移植)된 지 얼마 안 된 듯 / 착근을 위한 안간힘이 보이는 듯했다”와 같은 싯말을 읽다가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시인 고진하 님은 왜 ‘이식’이라는 한자말은 묶음표까지 붙이다가는, 왜 ‘착근’이라는 한자말에는 묶음표를 안 붙였을까 궁금합니다. ‘이식’이라는 낱말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이렇게 시를 썼을까요. 〈토지문학공원 2〉이라는 시는 이처럼 한자말을 밝혀서 적어야 빛나겠다고 느끼기에 이와 같이 시를 썼을까요.


  싯말은 시를 쓰는 사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곧, 시인 ‘마음대로’ 싯말을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쓰고픈 대로 쓰는 싯말일 테고, 시인이 살아가는 마음이 그대로 담기는 싯말일 테지요. 한 마디로 하자면 ‘자유’를 누리며 쓰는 시요,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쓰는 시입니다.


  시인 고진하 님으로서는 한자말 ‘이식’이랑 ‘착근’이 손과 입과 눈과 귀에 밴 낱말이리라 느낍니다. 딱히 한자말이라 느끼지 않으면서 여느 때에 흔하게 쓰는 낱말이리라 느낍니다. 한자말이건 아니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낱말이기도 하리라 느낍니다.


  시집을 살짝 덮습니다. 국어사전을 들춥니다. 한자말 ‘이식(移植)’을 찾아봅니다. 뜻풀이에 “= 옮겨심기. ‘옮겨심기’로 순화.”라 적힙니다. 곧이어 한자말 ‘착근(着根)’을 찾아봅니다. 뜻풀이에 “(1) 옮겨 심은 식물이 뿌리를 내림. (2)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자리를 잡고 삶. (3) 어떠한 것이 기반을 잡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적힙니다.


  낱말풀이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식’이나 ‘착근’은 한자말인데, 한자말이기 앞서 한국말이 아니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쳐서 써야 한다는 낱말이라면, 또 뜻풀이에서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말투가 나타난다’면, 이때에는 이러한 한자말은 그냥 한자말이 아닌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삶말로 으레 쓰는 낱말일 뿐, 한국사람이 삶말로 여길 만한 낱말이 아니라는 소리라고 느껴요.


  곧, 한국말은 ‘옮겨심기’요 ‘뿌리내리기’ 또는 ‘자리잡기’입니다. 한국사람은 예부터 옮겨서 심었기에 ‘옮겨심기’라 말했습니다. 한국사람은 옛날부터 뿌리를 내리거나 자리를 잡는다고 했기에 ‘뿌리내리기’나 ‘자리잡기’라 말했습니다.


  다시 시집을 집습니다. 다른 시를 천천히 읽습니다. 시를 고즈넉히 읽으며 싯말이 내 혀나 눈이나 입이나 귀에 감기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내 혀나 눈이나 입이나 귀에 감기는 싯말은 무엇이고 도무지 안 감기고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싯말은 무엇인지 헤아려 봅니다.


  시는 누구나 씁니다. 지식인도 시를 쓰고, 흙일꾼도 시를 씁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마친 이도 시를 쓰지만, 공장에서 기계를 붙잡고 기름밥을 먹는 이도 시를 씁니다. 문학을 꽃피우는 이도 시를 쓰지만, 집에서 아이를 낳아 보살피고 밥과 빨래와 청소로 하루를 보내는 이도 시를 씁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다 다른 자리에 걸맞게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책으로 많이 배워서 지식이 한껏 도드라지는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책으로 배운 적 없이 늘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으로 받아들인 이야기를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한 말투로 시를 씁니다. 어느 쪽 시가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 시가 더 훌륭하거나 좋거나 빛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거든요. 나는 나대로 예쁘고 당신은 당신대로 예뻐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당신은 당신 삶을 사랑해요. 금을 긋거나 가를 수 없어요. 이 말은 좋고 저 말은 나쁘다고 못박을 수 없어요.


  다만 한 가지뿐이에요. 나는 내가 어떤 말을 사랑하면서 내 넋을 아끼고, 나는 어떤 삶을 꿈꾸면서 내 노래를 시로 담는가 하고 생각하면 될 뿐이에요. 누군가는 ‘환희(歡喜)’를 시로 노래하겠으나, 누군가는 ‘원더풀(wonderful)’을 시로 노래할 테고, 누군가는 ‘놀랍도록 기쁨’을 시로 노래할 만합니다.


  시는 삶으로 씁니다. 누구라도 시는 삶으로 씁니다. 삶에 지식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지식으로 쓰는 시’가 이녁한테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삶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사랑으로 쓰는 시’가 이녁한테 ‘삶으로 쓰는 시’예요.


  나는 시를 읽거나 쓰면서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꿈을 꿉니다. 나는 시를 읽거나 쓰면서 시골마을 이웃집 할매 할배하고 함께 즐길 꿈을 꿉니다. 내 삶과 내 이웃 삶을 생각하면서 내 싯말을 아낍니다. 내 하루와 내 이웃 하루를 돌아보면서 내 싯말을 짓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살아가는 꿈이 고이 깃든 말마디가 내 싯말입니다. (4345.7.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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