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찍기
― 알아채지 못한 사진

 


  참 좋다고 느낀 삶 한 자락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누리는 즐거운 꿈과 사랑이 있어, 이 꿈과 사랑을 사진으로 적바림합니다. 스스로 느끼는 즐거운 꿈과 사랑이 없다면 내 손에 사진기를 쥘 수 없습니다. 스스로 깨닫는 좋은 웃음과 이야기가 있어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우리 시골집에 찾아온 손님이 있습니다. 손님은 두 아이를 데리고 왔으며, 우리 집에도 두 아이가 있습니다. 서로 얼크러집니다. 참으로 좋네, 하고 느끼며 시골 들길을 거닐며 우리 집으로 가는 뒷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 적바림합니다. 손님을 치르고 나서 며칠 지난 뒤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뒷모습 사진이기에 뒷모습을 담습니다. 우리 아이가 등에 뭔가를 멨습니다. 뭔가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복주머니’입니다. 옆에 선 언니가 가방을 멨기에 저도 복주머니를 가방처럼 등에 멘 셈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등에 복주머니를 멘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손님네 언니랑 사이좋게 놀면서 언니를 따라합니다. 아이는 즐겁게 놀았겠지요. 어버이가 알아챌 만큼 즐겁게 놀고, 어버이가 미처 못 알아챌 만큼 즐겁게 놀았겠지요.


  사진으로 뒷모습을 찍었기에 나중에 알아보기도 하지만, 사진으로 뒷모습을 안 찍었더라도, 그래서 이런 모습으로 논 줄 몰랐다 하더라도, 아이 얼굴을 보면 웃음이 흐드러지니까 ‘그래, 이런 웃음이 좋아.’ 하면서 새로운 하루를 새롭게 누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웃는 얼굴도 예쁜 뒷모습도 모두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4345.7.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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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7-28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언니와 안헤어지려고 하지 않던가요? 저만할 때 언니를 무척 따를 때인데요.
언니 따라 복주머니 멘 것 보고 혼자 상상해봅니다.

<삶말> 잘 받았어요. 고맙게, 잘 읽겠습니다.

파란놀 2012-07-29 07:50   좋아요 0 | URL
놀이동무 곁을 안 떨어지려고 해요.
그래도 씩씩하게 잘 놀아요....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9) 마찬가지

 

마찬가지로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거야 …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픈 건 우리가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단다
《요시노 겐자부로/김욱 옮김-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양철북,2012) 217, 219쪽

 

  “자신(自身)이 불행(不幸)하다고”는 “스스로 즐겁지 않다고”나 “스스로 슬프다고”로 손볼 수 있고, “느낄 거야”는 “느끼겠지”나 “느낄 테지”로 손봅니다. “마음이 아픈 건”은 “마음이 아픈 까닭은”이나 “마음이 아프다면”으로 손질하고, “정상적(正常的)인 정신(精神) 상태(狀態)에서 벗어났다는 것을”은 “옳은 마음에서 벗어났다고”나 “올바른 마음하고 동떨어졌다고”로 손질해 봅니다. “알려주는 신호(信號)라고”는 “알려주는 뜻이라고”나 “알려주는 셈이라고”나 “알려준다고”로 다듬으면 한결 낫습니다.


  그나저나 이 보기글에서는 이런저런 한자말이나 말투를 다듬는다 해서 글이 매끄럽거나 예쁘지 않아요. 여느 눈길로는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얄궂은 대목이 있습니다. 첫 글월은 첫머리를 ‘마찬가지로’로 엽니다. 다음 글월은 첫머리를 ‘이와 마찬가지로’로 엽니다. 똑같이 ‘마찬가지’라는 낱말을 쓰지만, 두 낱말을 쓴 모양새가 달라요.


  이와 비슷하게 쓸 만한 다른 낱말을 넣어 생각해 봅니다. 이를테면, ‘매한가지’나 ‘비슷’과 ‘같다(똑같다)’를 생각해 봅니다. 이들 낱말을 글 첫머리에 넣는다 할 때에도 “매한가지로 눈이 하나밖에 없는”이나 “비슷하게 눈이 하나밖에 없는”이나 “똑같이 눈이 하나밖에 없는”처럼 적어도 잘 어울릴까요.

 

 마찬가지로 (x)
 이와 마찬가지로 (o)

 

  ‘마찬가지’나 ‘매한가지’나 ‘비슷’이나 ‘같다(똑같다)’를 글 첫머리에 넣을 때에는 앞 글월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를 듭니다. 곧, ‘이와’를 넣어야 글이 이어집니다. “너는 참 예뻐.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참 예뻐.”처럼, ‘이와’라는 말마디가 들어가서 앞에 어떠한 이야기가 나오는가를 밝혀야 올발라요.


  어쩌면, “마찬가지로 나도 참 예뻐”라고만 적으면서 ‘이와’는 살짝 덜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러하지만’이나 ‘그러하지만’이라 적어야 될 자리에 ‘하지만’이라 적어 버릇하거든요. 더군다나, 적잖은 글쟁이나 지식인은 ‘이리해서’나 ‘그리해서’라 적어야 될 자리에 ‘해서’라고만 적기 일쑤예요.


  말길이가 길어지거나 늘어지기에 이처럼 줄여서 쓸 수도 있다고 여길 만하지만, 곰곰이 살피면 말길이 때문에 줄여서 쓴다고 느끼기 힘들어요. 멋을 부리거나 치레를 하려고 자꾸 ‘새롭다 싶은 말투’로 써 버릇하는구나 싶어요. 한동안 ‘쉼표(,)’를 글 사이사이 수두룩하게 집어넣는 문학이 퍼진 적 있어요. 이야기가 새로워야 할 텐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얽매였달까요. 어느 모로 보면, 내 마음을 더 넓고 깊이 보여준다 할 말투라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살피면 서로서로 생각을 주고받고 마음을 여는 길을 가로막는 말투라 할 만하기도 해요.

 

 비슷한 것을 지었다
 노래 비슷한 것을 지었다

 

  더 깊은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끼리라면 “비슷한 것을 지었다”라고만 적어도 무엇을 지었다는 뜻인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낯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노래 비슷한 것을 지었다”라고 적어야 제대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바쁘다 바빠’ 하고 외치는 삶터에서는 “마찬가지로 말하자면” 같은 말투가 자꾸 퍼질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하자면”처럼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꾸 사라지리라 느낍니다.


  뜻을 알고 느낌을 새긴다면 2000년대 또는 2010년대 새로운 말투로 여길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터에서는 새로운 말투라 하듯, 오늘날 바쁘고 힘든 도시 사회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말하자면”처럼 말하는 한국 말투는 이냥저냥 잊어도 될 만하고 여기면서 “마찬가지로 말하자면”처럼 말해 버릇해도 된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와같이”처럼 몽땅 붙여서 쓰는 사람도 제법 있어요.


  한국 말투는 벌써 무너진 지 오래라 하는 사람이 있고, 지구별을 헤아리는 마당에 영어를 배워야지 한국말을 익혀서 무엇에 쓰느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치고 영어 말투를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콩글리쉬’를 쓰면 엉터리라 나무라는데, 정작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슬기롭고 어여삐 가다듬는 사람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참말 한국 말투는 벌써 무너진 지 오래일까요? 참말 한국 말투는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어른들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예전에 무너졌다’고 둘러대는 셈 아닐까요? 참말 한국 말투를 살리거나 살찌우거나 빛낼 오늘날 어른들 스스로 제 할 몫을 안 하며 바보스레 살아가지는 않나요? (4345.7.28.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와 마찬가지로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슬프다고 느끼겠지 …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프다면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고 알려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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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딩동 편지 왔어요 - 우편집배원 일과 사람 2
정소영 지음 / 사계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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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띄우는 마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83] 정소영, 《딩동딩동 편지 왔어요》(사계절,2010)

 


  편지나 택배를 부칠 일이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면 소재지로 갑니다. 비가 모질게 오거나 아이들이 새근새근 자지 않으면 언제나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우체국으로 갑니다. 면 소재지에 우체국 하나 있기에 고맙습니다. 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우체국은 아주 작습니다. 아주 작지만 걸상이 놓이고 화장실이 있습니다. 작은 시골 우체국이지만, 서울이나 도시처럼 땅값이 비싸지 않으니 자리를 넉넉하게 씁니다.


  택배를 부칠 때에는 집에서 종이에 미리 주소를 적어서 붙입니다. 편지를 부칠 때에는 우체국에서 무게를 달고 크기를 잽니다. 편지에 스티커 아닌 우표를 붙이고 싶어 얘기를 해 본 적 있는데, 시골 작은 우체국에는 우표가 없어 붙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우표가 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읍내 우체국에 가면 우표가 있으리라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편지는 모두 스티커를 붙입니다. 들고나는 모든 흐름을 기계에 맡깁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우표를 붙여서 편지를 보내자면 품이 많이 들 뿐더러, 우표 갯수와 값을 날마다 셈해야 합니다. 퍽 번거로운 일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우체국에서 우표를 쓰자고 생각한다면, 우표에 조그맣게 바코드를 새겨서 이 바코드를 읽도록 하면 갯수이든 값이든 셈틀이 알아서 손쉽게 셈할 수 있어요.


  더 생각하면 요즈음 편지를 부치는 사람들 가운데 봉투에 손수 주소와 이름을 적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공무원이라면 모든 집 주소와 이름을 하나하나 손으로 적자면 너무 힘들다 여길 테니 이렇게 안 할 만합니다. 전기값이나 전화값 내라는 쪽글을 한국전력이나 한국통신 일꾼이 손으로 써서 보낼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맨 처음에는 누구나 으레 마땅히 손수 주소와 이름을 적었으리라 생각해요. 맨 처음에는 편지를 부치려는 사람 누구나 으레 마땅히 손수 우체국을 찾아갔으리라 생각해요.

 

 

 


.. 우편물이 산더미라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몇 배나 더 많아. 처음엔 힘들어서 팔다리가 덜덜 떨렸어. 지금은 가뿐하게 해내. 자꾸 하다 보니 힘이 세졌나 봐 ..  (10쪽)


  나는 국민학생이던 때부터 우체국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우표를 모으며 놀기도 했지만, 편지동무가 있어 편지를 부치려고 우체국을 참 자주 찾아갔습니다. 구멍가게에서 보통우표를 사서 부칠 수 있지만, 부러 우체국에 가서 갓 나온 예쁜 기림우표를 사서 부치고 싶었어요. 내가 편지동무 한 사람한테 부치는 편지는 오직 한 통인 만큼, 오직 한 통에 걸맞게 예쁘게 주소와 이름을 적고, 오직 한 통에 알맞도록 사랑스레 우표를 붙이고 싶었어요.


  우체국에 처음 스티커가 나오던 때를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우체국 일꾼 스스로 스티커가 익숙하지 않다며 잘 안 쓰려 했습니다. 손으로 주소와 이름을 적어서 부치려는 편지에 스티커를 붙이자니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가장 예쁜 기림우표를 찾아서 붙여 주려 했습니다. 스티커 붙이는 기계가 망가져서 못 쓸 때에는 ‘손수 우표값을 헤아려 알맞게 잘라서 붙이’면서 ‘늘 이렇게 해 오던 일’인데 ‘이제는 기계와 셈틀 없으면 일을 못 하’는 흐름이 되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편지가 퍽 줄었다고 합니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기 앞서는 집집마다 뭔가를 광고하는 편지가 꽤 많았습니다. 이제 광고편지는 종이봉투에 담아 보내지 않습니다. 광고편지는 누리편지로 띄웁니다. 광고종이를 사람들이 우체통에 수두룩히 꽂습니다. 도시에서는 우체통마다 광고종이가 넘쳐나서 정작 편지가 묻히거나 버려지거나 휩쓸리기도 합니다.

 

 

 

 

 


.. 여기가 바로 내 구역이야.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지만, 주소를 익히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 이젠 눈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어 ..  (20쪽)


  시골에서 살아가며 광고종이를 하나도 구경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몇 안 되는 집집을 돌며 광고종이를 넣는 사람은 없습니다. 광고종이란 물건을 팔려는 종이요, 물건을 팔려는 사람은 좁다란 도시에 촘촘히 들어서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꼬드겨 물건을 팔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악다구니와 같아요.


  나는 신문배달을 했기에 편지배달을 하는 일을 살짝 어림해 봅니다. 우체국 일꾼이 커다란 가방에 편지나 소포를 잔뜩 담고는 모든 집을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찾아갑니다.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우체국 일꾼이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찾아오면 가까이나 멀리 떨어져서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우리 집에 어떤 편지가 왔을까 하고 기다립니다. 우리 집 우체통에 무언가를 넣는가 하고 바라봅니다.


  도시에 아파트가 처음 생길 무렵 우체국 일꾼은 ‘더 많은 집을 더 수월하게 찾아가서 편지를 넣을’ 수 있기에 홀가분하겠지 하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신문배달을 하는 나는 우체통에 신문을 넣지 못하고 꼭 대문 밑이나 우유주머니에 넣어야 했어요. 신문을 아파트 우체통에 꽂으면 누군가 얌체처럼 훔치곤 해요.


  아마 우체통에 꽂힌 편지를 몰래 훔친 사람도 있겠지요. 제 것이 아니면서 슬쩍하는 사람이 참말 있어요. 우체통에 꽂힌 책이나 잡지를 가로채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보내는 보람과 받는 보람을 앗는 사람 마음에는 어떤 이야기가 싹틀까요.

 

 

 


.. 하지만 마을로 들어오면 나를 기다리는 분들이 참 많아. 여기는 읍내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밖에 없어. 차도 사람도 별로 없어서 어르신들이 읍내 나가기가 힘들어. 그래서 내가 오고 가며 심부름도 해 드려 ..  (34쪽)


  편지를 띄우는 마음은 그리운 사랑을 띄우는 마음입니다. 가까이 떨어진 곳에 살든 멀리 떨어진 곳에 살든 조그마한 편지 한 통이 다리가 되어 서로 만납니다. 종이 몇 장에 연필로 눌러 적은 글이 숱한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편지를 보내며 이 편지를 언제 받으려나 하고 설렙니다. 편지를 받은 뒤에 답장을 쓰겠지 하고 생각하며 두근두근합니다. 내가 보낸 이야기에 어떤 이야기가 돌아올까 하고 기다립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살가운 벗한테는 편지가 없어도 서로 이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 마음은 너한테 바람처럼 날아서 찾아갑니다. 네 마음은 나한테 햇살처럼 따사로이 찾아옵니다. 굳이 종이에 글을 써서 보내지 않아도 서로서로 예쁘게 만납니다. 따로 편지라는 틀이 없어도 서로서로 기쁘게 어울립니다. 종이에 부러 글을 써서 보낸 까닭이라면, 서로를 그리고 아끼며 생각하는 좋은 마음을 오늘 하루 기쁘게 누리고 싶기 때문이었으리라 느낍니다. 편지를 쓰면서 내 하루를 더 사랑하고 더 즐기며 더 보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 하지만 나는 내 일이 좋아. 날마다 빨간 우체통을 열고 이런저런 사연이 담긴 편지들을 만나는 게 좋아.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참 좋아. 나는 우편집배원이니까 ..  (44쪽)


  정소영 님이 빚은 그림책 《딩동딩동 편지 왔어요》(사계절,2010)를 읽습니다. “일과 사람”이라는 큰 틀거리에서 오늘날 지구별 사람이 ‘돈버는 일자리(직업)’로 삼는 여러 갈래를 살피는 그림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딩동딩동 편지 왔어요》는 우체국 얼거리를 보여주고, 편지나 소포를 가르는 흐름을 보여주며, 우체국 일꾼이 어떻게 편지나 소포를 나르는가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책을 읽는 어린이는 우리 둘레 수많은 이웃 가운데 한 사람을 한결 깊이 헤아릴 만합니다. 어쩌면 어느 어린이는 ‘나는 우체국 일꾼이 되고 싶어’ 하고 생각할 만합니다.


  좋습니다. 스스로 좋게 품는 생각이라면 좋게 누리는 삶이 될 테니까 좋습니다. 편지를 나르는 일꾼은 사람들이 즐겁게 품고 좋게 돌보려는 뜻이 담긴 편지를 두 손 가득 살뜰히 어루만지면서 집집마다 나르니까 좋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일 텐데, 어느 회사에서 돈을 더 벌어들이려는 뜻으로 광고종이를 잔뜩 찍어 보내려 할 때에는 이 짐덩어리를 나르느라 고단하겠지요. 사랑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편지를 손에 쥐며 사랑스러움이 자랍니다. 사랑스러운 기운이 없는 광고편지를 손에 쥐며 일이 고됩니다.


  가난한 달동네 마을에 ‘토지강제수용’ 알림편지를 돌려야 할 때에는 얼마나 슬플까요.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나 송전탑을 맞아들이지 않으려는 시골마을 사람들 집에 정부나 기업에서 보내는 ‘압류장’이나 ‘고소장’을 돌려야 할 때에는 얼마나 힘겨울까요. ‘군대 징집영장’을 돌릴 때에도 얼마나 아플까요.


  온누리에 웃음이 가득한 삶이면서 웃음이 가득한 편지를 부치고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요. 전쟁 아닌 평화를 담고, 광고 아닌 사랑을 담는 편지를 서로서로 오붓하게 주고받으면 얼마나 예쁠까요.


  문득 돌아보면, 세금고지서는 편지로 띄울 일이 아니지 싶어요. 한국전력이든 한국통신이든 건강보험공단이든, 이곳 일꾼이 다달이 스스로 마을을 두루 돌면서 집집마다 사람을 얼굴을 마주보면서 세금을 받아야지 싶어요. 돈으로 흐르거나 전산처리라는 허울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얼크러지는 삶터로 달라져야지 싶어요. 우체국 일꾼이 하는 일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살가운 징검돌 구실이라고 생각해요. (4345.7.28.흙.ㅎㄲㅅㄱ)

 


― 일과 사람 02 : 우편집배원, 딩동딩동 편지 왔어요 (정소영 글·그림,사계절 펴냄,2010.4.30./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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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과 발과 글

 


  옆지기가 작은아이한테 신을 신긴다. 열넉 달째 함께 살아가는 작은아이는 이제 말을 얼마나 잘 알아듣고 예쁘게 움직여 주는지 모른다. 아마 더 어릴 적에도 작은아이는 옆지기와 내가 하는 말을 몽땅 알아들었으리라. 알아듣기는 하더라도 몸이 작고 여리니까 따르지 못했을 뿐이리라 생각한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바깥에 나가려 하면 저도 데리고 나가 달라면서 으끙으끙 하고 소리를 낸다. 작은아이를 번쩍 안아 섬돌에 앉히면 옆에 있는 제 신을 한손으로 들고는 제 발에 신기라는 시늉을 한다. 때로는 발을 들고는 얼른 신겨 달라 한다.


  재미난 아이야, 하고 말하다가도, 큰아이도 작은아이처럼 천천히 무럭무럭 자랐지, 하고 되새긴다. 작은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큰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이요, 큰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어버이인 옆지기와 내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사람은 어떻게 얼마나 발돋움하는 목숨일까 생각한다. 사람은 손과 발을 얼마나 마음껏 놀리면서 씩씩하게 크는 목숨일까 헤아린다. 아름다운 꿈을 북돋우는 사람일까. 사랑스러운 믿음을 일으키는 사람일까. 사람은 두 손으로 무엇이든 빚을 수 있다. 사람은 두 발로 어디이든 갈 수 있다. 사람은 글을 써서 어떠한 빛이든 그릴 수 있다. (4345.7.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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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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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시골에 ‘농업고등학교’가 없을까
 [푸른책과 함께 살기 98] 요시노 겐자부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양철북,2012)

 


- 책이름 :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 글 : 요시노 겐자부로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12.6.28.)
- 책값 : 12000원

 


  아이 둘을 재웁니다. 뜨거운 여름 한낮 햇살을 쬐며 면 소재지 우체국을 함께 다녀온 다섯 살 첫째 아이는 만화영화를 보고는 그동안 쌓인 졸음을 참지 못해 아버지 자장노래를 들으며 살포시 잠듭니다. 자전거수레에서 넉넉히 잔 둘째 아이는 집에서 마루에 시원스레 응가를 누고는 한손에 부채와 파리채를 갈마들어 쥐며 이래저래 온 집안을 쏘다니며 놀다가 천천히 잠듭니다.


  두 아이를 재우고 나서 아버지도 한동안 같이 잡니다. 햇살이 저녁으로 넘어가는구나 하고 느끼며 일어납니다. 마당에 넌 옷가지를 걷습니다. 마당에 넌 이불도 걷습니다. 여러모로 집일을 건사합니다. 이러구러 삼십 분 즈음 지나 셈틀을 켜려 하는데 두 아이가 잠에서 깹니다. 이제 아이들은 자고 싶은 만큼 잤습니다.


  잠자리를 털고 나란히 일어난 두 아이를 일으켜 ‘조금 걷자’고 얘기합니다. 만화영화를 보여 달라 하는 첫째 아이한테 바깥에 다녀와서 보자고 달랩니다. 세 사람은 저녁햇살을 누리며 마을 어귀로 걷습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오랜 빨래터로 갑니다. 빨래터에서 셋이 물놀이를 합니다.


  마을 빨래터는 두 군데 있습니다. 빨래터에는 멧골에서 흐르는 물이 네 철 끊이지 않고 시원스레 흐릅니다. 집집마다 물꼭지가 달린 요즈음에는 모두 집에서 빨래하고 물을 쓰지만, 마을에서 아이들이 자라던 때에는 모두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물을 길었다고 합니다. 1980년대까지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여름철 물놀이를 즐겼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을 앞에는 흥양초등학교가 있는데, 1990년대에 문을 닫았지만, 아마 이곳이 문을 닫을 무렵 집집마다 물꼭지가 들어왔을 테고, 물꼭지가 들어오면서 빨래터는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남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우라가와가 자신을 괴롭힌 아이를 볼 때는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눈빛에서 증오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에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장난을 친 아이들은 씁쓸해진다. 장난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 “그럼 이번에는 집이 가난하다는 걸 떠나서 우리가와하고 너희들이 다른 점은 뭘까?” … 가난해서 열등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직 사람답게 성장하지 못했다는 증거란다 ..  (37, 114, 117쪽)


  스물아홉 집이 살아가는 마을에 아이가 있는 집은 오직 우리 집입니다. 우리가 이 마을에 새로 들어오며 ‘마을에 아이들 목소리’가 흐릅니다. 우리 마을에도 옆 마을에도 옆옆 마을에도 어린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면 소재지로 가야 비로소 어린이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면 소재지에서 구경하는 어린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열 해쯤 지나면 거의 모두 사라질는지 몰라요. 아직까지 시골 면 소재지 언저리에 아이들이 있다지만, 이 아이들이 자라서 초등학교를 거쳐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한결같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버는 삶’으로 바뀌리라 생각해요.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라남도 고흥은 군민 거의 모두 흙을 일구거나 고기를 잡습니다. 관공서는 있으나 여느 회사나 공장이 거의 없어요. 골프장도 기차역도 따로 없으며, 이른바 ‘돈을 번다는 시설’이 없는데, 달리 말하자면 ‘돈을 벌되 공해를 내뿜는 위해시설’이 없습니다. 고흥사람은 거의 모두 땅과 하늘과 바다와 햇볕과 나무와 풀과 바람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고흥이라는 곳은 오롯한 시골이요, 시골사람답게 시골내음이 솔솔 피어나는 터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골 고흥인 만큼, 고흥에는 ‘농업고등학교’나 ‘농업중학교’가 있을 법합니다만, 막상 농업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인문계 학교 아니면 실업계 학교인데, 실업계 학교는 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 솜씨를 가르칠 뿐이에요. 고향인 시골마을에서 흙이나 바다를 사랑하며 살아갈 길을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이끌지 못해요.


  저희는 잘 모릅니다만, 우리 보금자리 고흥뿐 아니라, 고흥하고 이웃한 보성이나 장흥도 엇비슷하리라 느껴요. 참말 시골이지만, 시골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한테 농업이나 어업을 가르치지 못해요. 시골학교 교사가 학생한테서, 또 학부모한테서 농업이나 어업을 배우면서 아이들이랑 삶을 나누려 하지 못해요.


.. 마지막 열쇠는 코페르, 바로 너 자신이란다. 너 말고는 아무도 없어. 네가 인생을 살고, 인생에서 여러 가지를 체험하고, 체험하면서 생각한 것을 위대한 사람들이 남긴 지혜와 견주어 볼 때 비로소 그 사람들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인생에서 중요한 건 어느 때나 네가 느낀 진심, 네 마음을 움직이는 생각이란다 … 네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는 세상이 인정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자립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 진심으로 네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해.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때도, 네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때도 그 감정은 언제나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단다 ..  (50, 52쪽)


  한국에서 ‘농업고등학교’ 이름을 건사하는 학교가 아직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농업고등학교치고 아이들이 농사일을 배우는 데는 거의 없습니다.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씩씩하게 흙일꾼으로 살아가는 아이가 매우 적습니다.


  요즈음 한여름을 맞이해 서울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는 ‘전기 예비율’이 아주 낮다며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참말 도시는 전기를 많이 쓰니까 나날이 전기를 걱정할밖에 없어요. 그러나, 전기를 많이 쓰는 도시는 스스로 전기를 빚지 않아요. 적어도 아파트 옥상에 햇볕전지판을 붙이지 않을 뿐더러, 아파트이든 높은 건물이든 유리창이 햇볕전지판 노릇을 하도록 과학기술을 일구지 않아요. 조금만 생각하고 조금만 과학기술을 슬기롭게 쓴다면, 자동차도 지붕뿐 아니라 앞뒤 유리를 햇볕전지판 노릇을 하도록 만들면서 기름(석유) 아닌 햇볕으로 구르도록 할 수 있어요. 서울처럼 커다란 도시 찻길을 가득 메운 거리등불도 햇볕으로 켜지도록 할 수 있어요. 빗물을 받아서 쓰는 길을 얼마든지 열 수 있어요. 도시사람 똥오줌이 쓰레기로 버려지지 않고 좋은 거름이 되도록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도시사람은 지구별을 아끼거나 사랑하며 보살피는 길을 좀처럼 생각하지 않아요.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인천 같은 도시에는 아예 농업고등학교는 생기지 않아요. 시골에도 농업고등학교가 없지만, 도시에도 농업고등학교는 없어요.


  왜 시골 아이가 몽땅 도시로 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노릇을 해야 할까요. 왜 시골 아이가 흙일꾼이나 고기잡이가 되면 안 되고, 모조리 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해야 할까요. 왜 도시 아이 가운데 한둘이라도 시골로 가서 흙일꾼이나 고기잡이가 되도록 이끌지 않을까요. 왜 대학교 농업과학 학과 아이들은 대학교를 마친 다음 시골로 가서 흙일꾼이 될 마음을 품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면, 출판사이든 신문사이든 도시에만 있어요. 시골에는 없어요. 농민이 읽는 신문을 만든다는 사람도 도시에 신문사가 있을 뿐, 스스로 시골에서 일하면서 신문을 만들지는 않아요. 농업이나 어업을 다루는 공무원도 서울이나 커다란 도시에서 건물에서 펜대나 셈틀만 붙잡을 뿐, 정작 흙이나 물을 만지면서 시골사람이랑 어깨동무를 하지 않아요.


.. 느티나무 위로  펼쳐진 밤하늘은 빨려들 것처럼 짙은 쪽빛이었다. 별은 바늘 끝에 색을 묻혀 하늘에 찍어 놓은 것처럼 높은 곳에서 작게 빛나고 있었다 … ‘너와 상관없는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당연히 분자와 분자가 교류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따뜻하게 만나야 한단다’ … ‘사람이 사람에게 좋은 감정으로 친절을 베풀고, 그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처럼 아름다운 관계는 이 세상에 없단다’ ..  (65, 88∼89쪽)


  저녁을 차립니다. 두 아이를 먹입니다.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을 씻깁니다. 아이들을 씻기면서 빨래를 합니다. 빨래기계가 있으나, 나는 손빨래가 한결 익숙합니다. 이불을 빨 때에는 빨래기계를 쓰지만, 여느 때에는 틈틈이 아이들을 씻기거나 내 몸을 씻으며 손빨래를 합니다. 다 씻은 아이들하고 저녁에 뜬 반달을 구경합니다. 반달을 구경하고 세 사람이 둘러앉아 만화영화를 봅니다. 아이들 어머니는 홀가분하게 바깥마실을 나갔습니다. 아이들 어머니가 이틀을 바깥잠을 자기로 하고, 아이들 아버지가 홀로 아이들하고 복닥입니다. 아이들 어머니가 집에 있어도 모든 집일을 아버지가 도맡았는데, 아이들 어머니가 없이 집일을 하자니 한결 바쁘기도 하면서, 온통 ‘아이바라기’만 하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렇지만, 혼자 아이들을 바라보며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고 하는 하루는 일찍 마무리합니다. 아홉 시가 안 되어 두 아이가 졸립다며 불을 끄고 자자고 부릅니다. 자장노래를 삼십 분 남짓 부르며 밤잠을 재웁니다. 큰아이는 어머니 왜 안 오느냐고 묻습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말미를 얻어 마실을 갔다고 여러 차례 얘기하며 부채질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재웁니다.


  무르익는 한여름 밤에는 풀벌레 노랫소리 고즈넉하게 들립니다. 자동차 다니는 소리 없고, 시끄러운 노래 트는 가게 없으며, 술에 절은 사람들 얄궂은 소리 없습니다. 전철 소리도 버스 소리도 없습니다.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는 저녁 여덟 시 즈음 마지막으로 지나갑니다. 군내버스가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깜깜한 저녁부터 이듬날 아침에 첫 군내버스가 지나갈 때까지 그야말로 차소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밤잠을 자며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아니, 아이들은 밤잠을 자며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한갓집니다. 때때로 개구리도 노래를 하고, 멧새도 노래를 합니다. 바람이 나뭇잎과 풀잎을 건드리며 풀노래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 “얼마나 연습한 거야?” 코페르가 물었다. “연습?” “너무 잘하니까.” “연습 같은 건 안 했어. 엄마를 도와주다 보니 이렇게 됐어. 하나를 잘못 튀기면 3전 손해거든. 그래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 그런데 우리가 머리 숙여 칭찬하고 떠받드는 그 위대한 사람들은 그 타고난 재능으로 어떤 일을 해낸 걸까. 또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  (98, 162쪽)


  나는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시골마을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날마다 새롭게 들여다보는 들판을 사진으로 담고 글로 옮깁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느낀 이야기를 쓰고, 처마 밑에 둥지를 틀어 새끼를 깐 제비들을 바라본 이야기를 씁니다. 뭉게구름 이야기를 쓰고,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워 논둑길을 달리며 느낀 이야기를 씁니다.


  우리 식구는 신문을 안 읽습니다. 텔레비전을 안 봅니다. 가끔 면내나 읍내에 나갔을 적에 어느 가게에 들를 때면 신문을 들추기도 하지만, 신문을 들춘다 해서 우리들 시골에서 살아가며 도움이 되거나 귀를 기울일 만한 이야기를 찾지 못합니다. 시골사람이 시골마을에서 예쁘게 살아가며 웃음꽃 피우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는 적이란 거의 없어요. 시골사람이 시골마을에서 착하게 살아가며 사랑꽃 피우는 이야기가 방송에 나오는 적이란 아주 드물어요. 곰곰이 살피면, 도시사람이 도시에서 예쁘거나 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 또한 신문이나 방송에는 거의 안 실려요. 정치꾼 이야기, 주식 이야기, 경제발전과 군대 이야기, 미국과 일본 이야기, 자동차나 백화점 이야기, 운동경기나 영화 이야기가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뿐이에요.


  봄이 되어 들판에 흐드러지는 들풀 이야기가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지 않아요. 봄까지꽃이나 할미꽃에서 비롯하는 한 해 숱한 꽃누리 이야기를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지 않아요. 벚꽃놀이 이야기나 가끔 다루지만, 사람들이 날마다 먹는 밥이 되어 주는 벼가 이삭을 패는 이야기는 신문에도 방송에도 나오지 않아요. 어쩌면, ‘이삭이 팬다’는 말조차 모를 수 있겠지요. 개구리밥이 얼마나 작으며 예쁜 풀인지를 모를 수 있겠지요. 얼마나 많은 잠자리와 나비가 자동차한테 치이거나 밟혀서 죽는지 모를 수 있겠지요.


.. 그런데 선배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게 정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판단하는 것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네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은 교풍을 어지럽히는 놈들이며 손봐야 할 녀석들이라고 판단했다 … 다른 학교와 운동경기를 할 때 응원하러 오지 않았다고 국민이 아니라는 낙인을 찍어 버리는 무서운 선배들이 있는 학교를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 “학교를 위해 폭력을 써야 한다는 건 모두 거짓말이야.” … ‘사람이 사회에서 느끼는 불행과 고통을 생각해 보면,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증오하거나 적으로 만들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어.’ ..  (146∼147, 150, 219∼220쪽)


  나는 시골사람입니다. 한자말로 적자면 ‘촌민(村民)’입니다. 요샛말로 고쳐서 말하자면 ‘촌사람’이나 ‘촌놈’입니다. 오늘날 한국땅에는 도시사람이 99요, 시골사람은 1이라 합니다. 나는 99:1 가운데 ‘하나(1)’라는 자리에 섭니다. 그러나, 시골마을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면 소재지나 읍 소재지에 나들이를 가 볼 때면, 때때로 시외버스를 타고 이웃 순천시에 가 볼 때면, 도시와 시골은 99:1이 아니라 99.99:1쯤 되지 않으랴 싶어요. 부산이나 인천이나 서울을 가 볼 때면, 도시와 시골은 99.999:1쯤 되겠구나 싶기도 해요.


  사람들이 도시에 지나치게 몰린 채 살아가요. 너무 좁은 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요. 너무 좁은 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니, 사람들 스스로 숨이 가빠요. 풀이나 나무 자랄 빈틈이 없어요. 자동차 댈 자리조차 없다고 하지만, 자동차에 앞서 사람이 느긋하게 눕거나 앉을 자리마저 없어요. 열 층이건 스무 층이건 겹겹이 포개어도 모자라다고 하는 판이에요. 땅밑으로 파고 들어가서 집을 지어요. 지붕을 뚫고 옥탑까지 집으로 마련해야 해요.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나요. 돈을 언제까지 벌어야 하나요. 돈을 왜 벌어야 하나요.


  돈을 벌어서 밥과 옷과 집을 사나요. 그러면, 돈을 벌지 말고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하면 되지 않을까요. 돈을 벌어서 유기농 곡식조차 아닌 화학약품에 찌든 곡식이나 가공식품을 사먹지 말고, 마음을 벌고 사랑을 벌며 삶을 버는 하루를 누리면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밥을 스스로 일구어 먹으면 아름답지 않을까요.


  농업은 경제가 아니에요. 농업은 삶이에요. 어업도 경제가 아니에요. 어업도 삶이에요. 돈을 많이 벌어 도시에서 유기농 곡식을 사먹으면서 아이들을 영어 잘 가르치는 학원과 학교에 넣으면 앞으로 무슨 보람을 누릴 수 있을까요. 아이들도 나(도시 어른)처럼 도시에서 돈 잘 벌어 유기농 곡식 사다 먹을 만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야 하나요.


.. 코페르는 그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코페르 자신은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의 내 마음 … “사람이 살면서 만나는 사건들은 모두 한 번뿐이며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을 돌층계 사건에서 배웠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 있는 좋은 생각과 아름다운 감정들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  (187, 214쪽)


  요시노 겐자부로 님이 1930년대에 일본에서 내놓은 푸른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양철북,2012)를 읽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이웃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을 뿐 아니라, 중국까지 쳐들어가며 슬픈 바보짓을 일삼던 때에, 요시노 겐자부로 님을 비롯해 생각과 마음과 사랑을 활짝 연 사람들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책을 내놓았다고 해요. 1930년대 일본도 2010년대 한국처럼 처세와 자기계발을 일삼자는 책이 판치면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 어둠고 슬픈 굴레에서도 생각을 빛내고 마음을 일으키며 사랑을 나누자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씩씩하고 꿋꿋하게 있었다고 해요.


.. 내가 사람다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말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 내가 좋은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예요 ..  (259쪽)


  요시노 겐자부로 님은 중일전쟁이 한창일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던 일본제국주의가 어린이와 푸름이를 망가뜨리는 꼴을 지켜보면서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물었어요. 또 둘레 어버이와 어른한테 똑같이 물었어요. ‘여보시오, 당신들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오?’


  이 물음은 2012년 한국에서까지 이어집니다. 아마 2022년 한국에서도, 2032년이나 2112년 한국에서도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참말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린이와 푸름이와 어른 모두 어떠한 생각을 일구고 어떠한 마음을 빛내어 어떠한 사랑을 꽃피울 때에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어떻게 살고 싶나요. 무엇을 하며 살고 싶나요. 어떤 꿈을 꾸고 싶나요. 어떤 길을 걷고 싶나요. 어떻게 웃고 싶나요. 내 고운 목숨을 어떻게 빛내고 싶나요. (4345.7.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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