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버릇과 삶버릇
[말사랑·글꽃·삶빛 27] ‘물방울’과 ‘땡땡이’

 


  시는 문학입니다. 수필도 소설도 문학입니다. 시나 수필이나 소설, 또 희곡 모두 ‘말’로 빚는 문학이요, ‘말’로 이루는 예술이며, ‘말’로 드러내는 삶이에요. 그래서 어느 갈래 어느 문학이라 하더라도 말을 어느 만큼 슬기롭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빛깔이 달라져요. 말을 어느 만큼 아름답게 보살피느냐에 따라 무늬가 달라져요.


  시와 수필을 쓰는 신달자 님이 쓴 시집 《열애》(민음사,2007)를 읽다가, 58쪽에서 “아파트 일 층인 내 방 창에는 / 녹음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 사월부터 연둣빛 땡땡이 무늬가 어른거리더니 / 서너 달 지나며 창은 짙푸린 비단으로 출렁거렸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시와 수필을 쓰는 신달자 님은 ‘땡땡이 무늬’라는 말투를 시에 고스란히 담습니다. 신달자 님은 1943년에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나셨는데, 한창 일제강점기로 한겨레 누구나 한국말 아닌 일본말을 쓰고 일본 문화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국민’이 되는 학교교육을 받던 무렵이에요. 신달자 님을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 일본말을 쓰셨겠지요. 해방이 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일본 말투와 말버릇을 털지 못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런 말투와 말버릇은 곳곳에 그대로 남았어요. ‘땡땡(点点, てんてん)’은 숱한 일본 말투와 말버릇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말로 하자면 ‘방울방울’이에요. 물방울이든 이슬방울이든 ‘방울’입니다. 방울을 무늬처럼 수없이 그리기에 ‘방울방울’ 모양이고, 일본사람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점과 점이 수없이 모였다’ 해서 ‘点点’이라는 한자로 적으면서 ‘てんてん’이라고 읽어요. 이 소리값이 ‘텐텐’, ‘땡땡’이 되고 한국사람은 뒤에 ‘-이’를 붙여 ‘땡땡이’라고 써요.


  1944년에 태어난 내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마흔 해를 일하시고는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셨어요. 내 아버지 사는 충청북도 음성으로 아이들과 마실을 가서 내 아버지가 모는 자동차를 얻어 탈 때면, 어디에 차를 대거나 좁은 길을 빠져나올 때,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오라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을 때에도 ‘만땅’이나 ‘이빠이’라고 말합니다. 내 아버지조차 이런 일본 말투와 말버릇을 쓰니 잘못이라거나 슬프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시를 쓰는 신달자 님이든 내 아버지이든, 오늘날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래를 이루는 분들은 어둡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면서 ‘얄궂은 말버릇’이 너무 짙게 몸과 입과 머리와 혀와 마음에 아로새겨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예요. 당신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이러한 일본 말투를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줄 알’아도 입으로는 어느새 술술 이러한 말투가 흘러나와요.


  내 아버지도 ‘오라이’나 ‘이빠이’ 같은 일본 말투뿐 아니라 ‘땡땡이’라는 일본 말투를 쓰시겠지요. 그렇지만 나와 내 옆지기는 이러한 일본 말투를 안 씁니다. 나는 한국 말투를 쓰고 싶어요.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아끼고 싶어요.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쓰는 어버이로서, 아이들이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예쁘게 들으면서 삶을 곱게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좋은 말버릇으로 좋은 삶버릇을 익힌다면 참으로 아름답겠지요. 맑은 말버릇으로 맑은 삶버릇을 들인다면 더없이 어여쁘겠지요.


  사월부터 연둣빛으로 빛나며 어른거리는 무늬라면 ‘방울방울’이요 ‘동글동글’입니다. ‘물방울’이며 ‘둥글둥글’이에요. 때로는 ‘탱글탱글’이나 ‘통통’ 같은 느낌말로 나타내 볼 만하겠지요. ‘탱글탱글 고욤알 같은 무늬’라든지 ‘통통 튀는 물방울 같은 무늬’처럼 말할 수 있어요. (4345.9.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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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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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1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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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2.8.31.
 : 자전거 손질하러 읍내마실

 


- 시골마을에서 자전거를 손질하기는 몹시 힘들다. 좀 깊이 들어간 시골자락이라면 더 힘들다. 스스로 손질하고 돌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내 자전거를 손질하러 읍내 자전거집으로 가 보기로 한다. 갈아야 할 부속이 있고, 두 아이를 태우고 읍내까지 15킬로미터 길을 달려 버릇해야, 고흥 이곳저곳 신나게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한여름도 늦여름도 모두 저무는 가을 어귀이기에 날이 좋다. 바람도 살랑살랑 분다. 이런 날은 삼십 킬로미터쯤 달려도 괜찮겠지. 물과 먹을거리를 챙긴다. 수레는 여러 가지 챙길 자리가 넉넉해 좋다. 다만, 아이 둘과 수레와 짐을 기운차게 끌 수 있다면야 좋다.

 

- 첫 고개 비봉산 기슭을 오른다. 아이 둘 태우고 몇 차례 넘어서 그런지 오늘은 가뿐하다. 가뿐하네, 하고 생각하면서, 나이와 자전거는 그리 대단한 일 아니라고 느낀다. 스스로 즐길 줄 아느냐가 대단한 일이 되리라.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추스르면 된다. 마음을 좋게 돌보고 몸을 사랑스레 보살피면 된다.

 

- 봉서마을과 봉동마을, 또 고당마을을 지나며 비로소 내리막이 된다. 뒷거울을 보니 작은아이가 어느새 잠들었다. 집에서 개구지게 놀더니 기운이 다한 듯하다. 너는 아버지가 고갯길을 영차영차 오르는 줄 아느냐 모르느냐.

 

- 포두면을 달린다. 내리막이 좋다. 포두면 소재지를 지나면 바야흐로 오르막이 천천히 펼쳐진다. 여기부터 읍내까지 오륙 킬로미터 비스듬히 오르막이다가는 포두면에서 고흥읍으로 바뀌는 고갯마루 언저리에서는 꽤 가파른 오르막이 된다. 잠든 작은아이가 안 깨기를 바라며 씩씩하게 장수마을 지나 호형마을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달리는데 가쁜 숨이 턱에 닿는다. 그냥 더 달리느냐 쉬느냐 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살짝 쉬기로 한다. 나는 안 쉬고 고갯마루를 넘을 수 있지만, 수레에 탄 아이는 햇볕을 고스란히 쬐며 고갯길을 천천히 지나야 한다. 목이 타리라. 마침 작은아이도 잠에서 깬다. 두 아이한테 물을 먹이고 주전부리를 조금 준다. 나는 숨을 고르려고 물을 마시지 않는다.

 

- 고갯마루를 넘으니 살 만하다. 오르막을 지나며 다리가 굳는다면 내리막을 달리며 다리가 풀린다. 고갯길은 고개라서 천천히 달린다. 내리막은 내리막이니 시원스레 싱싱 달린다. 올라가기란 얼마나 오래 걸리며 힘든가. 내려가기란 얼마나 빠르며 수월한가. 멧자락 타는 사람은, 또 무언가 목표를 세우며 달리는 사람은, 왜 더 빨리 더 높이 오르려 할까. 더 빨리 내려오고 싶어서 그렇게 높이 올라가려고 할까. 얼마를 올라갈 수 있든 스스로 즐겁지 않다면,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하나도 안 반가우리라 느낀다.

 

- ‘박지성공설운동장’ 알림판을 본다. 이제 읍내에 거의 다 왔다. 축구선수 박지성이 고흥사람이라며 공설운동장 이름에 ‘박지성’을 넣는다. 고흥에는 김일체육관도 있고, 천경자미술관도 있다. 다만,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기는 하되 얼마나 문화와 예술과 삶을 곱게 맺거나 잇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흥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와 푸름이와 어린이가 고흥에 뿌리내리면서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마련하는 정책이나 모습은 거의 안 보인다. 모두들 서울에 있는 대학교나 회사나 공장으로 가려 한다. 시골 고흥에 남아 시골살이를 누리며 시골마을을 알차며 튼튼히 일구려는 젊은 빛은 잘 안 보인다.

 

- 자전거집에 닿는다. 자전거를 손질한다. 오래된 손잡이를 간다. 하도 오래되어 고무가 다 녹던 옛 손잡이를 뗀다. 여덟 해째 내 손과 하나되어 숱한 길을 달린 손잡이여, 이제 고이 쉬려무나.

 

- 읍내 과일집에 들른다. 몇 가지 먹을거리를 장만한다. 슬슬 집으로 돌아간다. 아까 내리막이던 길은 오르막이 된다. 오르막이던 길은 내리막이 된다. 길가에 잠자리와 나비 주검이 매우 많다. 자동차를 모는 이들이여, 잠자리와 나비가 당신 찻머리와 유리창에 부딪혀 얼마나 많이 숨을 거두는 줄 아는가. 당신 차바퀴에 사마귀와 메뚜기와 방아깨비와 개구리와 뱀이 얼마나 많이 밟혀 숨을 거두는 줄 아는가. 작은 짐승과 벌레들 주검을 내 자전거까지 밟지 않으려고 비껴 달리느라 애먹는다.

 

- 포두면 길두리 끝자락에 선 ‘POSCO 패밀리수련원’ 안내팻말을 본다. 아주아주 자그맣게 세운 안내팻말은 뭘까 궁금하다. 안내팻말 구실을 하자면 커다랗게 세워야 하지 않나. 거의 안 보이도록 작게, 또 자잘한 글씨로 세운 안내팻말은 무얼까. 포스코 회사는 포항사람이 반대해서 포항에 지으려 하던 화력발전소를 전남 고흥과 해남에 나누어 지으려는 정책을 꾀하는데, 이 ‘포스코 패밀리수련원’과 화력발전소 정책은 서로 어떻게 이어졌을까.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쓸 전기를 도시에 발전소를 세워서 써야지, 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해맑은 시골마을 한복판에 화력발전소를 세우고 송전탑을 끝없이 박으려 할까. 포항은 발전소 공해가 없어야 하고, 고흥이랑 해남은 발전소 공해가 있어도 되나. 해맑은 시골마을 한복판에 화력발전소와 송전탑이 서면, 이제 도시사람은 김도 바지락도 꼬막도 조개도 해삼도 멍게도 전어도 복어도 갑오징어도 장어도, 또 유자도 석류도 서숙도 유기농곡식도 더는 먹을 수 없는 줄 모르는가. 시골마을 물과 바람과 흙이 더러워지면, 도시사람 먹을 모든 것이 더러워지는 줄 모르는가.

 

- 작은아이는 다시 잠든다. 큰아이도 아주 졸린 눈치이지만 졸음을 꾹 참는다. 집에 닿는다. 두 아이 태운 자전거는 삼십 킬로미터 길을 두 시간 동안 달렸다. 잘 달렸다. 집부터 발포 바닷가까지는 칠 킬로미터이니까, 아이들 데리고 바다로 마실 다녀오는 길은 한결 수월할 수 있겠지. 아이들아, 다음에는 바다로 데려가 줄게. 오늘처럼 읍내 다녀오는 길은 괜히 자동차하고 많이 부대껴야 해서 썩 재미나지 않았을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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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2.9.11.
 : 가을바람 가을내음

 


- 면소재지 우체국으로 간다. 바다 건너 저 멀리 호주로 책을 부치려고 간다. 우표값이 만오천칠백 원인가 나온다. 참 값싸다고 느낀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는데 딱 만오천 얼마밖에 안 나오니까.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려는데, 큰아이가 저기 나비 있다고 말한다.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데 저기라고만 말한다. 가만히 보니, 자전거 옆 길바닥에서 팔랑거리기만 할 뿐 날아가지 못한다. 틀림없다. 우체국에 들른 어느 자동차한테 받혀 다친 나비이다. 사람들은 나비이든 잠자리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자동차를 달린다. 우체국 앞에 자동차를 멈출 때에도 나비가 받치거나 말거나 살피지 않았겠지. 겉보기로는 성하지만 몸속으로는 망가졌으리라. 슬픈 나비를 살며시 쥔다. 나비가 팔딱거리지도 못한다. 아이들한테 자 나비 보렴 하고 말한 뒤, 부디 기운내어 다시 훨훨 날 수 있기를 빌어, 하고 마음속으로 노래한 뒤 풀숲에 예쁘게 내려놓는다. 나비는 풀숲에서 날개를 쫙 펼치고는 비로소 한숨 돌렸다는 몸짓으로 쉰다.

 

- 우체국 볼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볕과 바람 좋은 가을날, 좋은 내음과 바람을 쐬면서 아이들하고 들길과 멧길을 달리고 싶다. 집에서 미리 길그림을 살피고 나왔는데, 오늘은 이웃 청룡마을과 미후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갈까 싶다.

 

- 면소재지 보건소 옆 오르막을 탄다. 길가에 석류나무 줄줄이 자란다. 누가 심어 기르는 나무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누가 길가 공유지에 석류나무를 심었을는지 모르지. 이 길가 나무들이 우람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르막을 천천히 천천히 오른다.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는 오르막을 오를 적에 숨이 가쁘기만 했는데, 이제는 나긋나긋 노래를 부를 만하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 할까? 뭐, 그래도 좋다. 수레에 탄 두 아이가 아버지 노래를 들으며 멧길을 천천히 오르며 즐겁다는데, 누가 무어라 한들 대수로우랴.

 

- 땀이 송송 돋을 즈음 오르막이 끝나는구나 싶더니 또 오르막이 나온다. 왼편으로 멧기슭에서 풀을 뜯는 까만염소와 소가 보인다. 오, 이곳에서는 짐승을 들에 풀어놓고 기르네. 그러고 보니, 소우리와 염소우리가 꽤 있어도 소똥이나 염소똥 냄새가 거의 안 나는구나. 큰아이가 염소와 소를 보더니 둘레에 있는 커다란 우리를 가리켜, “저기 소집 있네.” 하고 말한다. 맞아, ‘우리’이기 앞서 ‘집’이야.

 

- 이제 슬슬 봉서마을로 빠지는 길이 보여야 하는데 마땅한 길이 안 보인다. 어쩌면 마을을 가로질러서 고개 하나 넘어야 하는지 모른다. 모른다. 그래, 모르니 그냥 달리자. 멀리 돌아가도 다음에 잘 달리면 되지. 다음에 다시 길을 익히면 되잖아. 자전거를 천천히 밟으며 한손을 죽 뻗는다. 바람아, 바람아, 가을바람아, 내 오른팔에 와닿으며 노래를 불러 주렴. 이제 왼팔을 뻗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쥔다. 바람아, 바람아, 들바람 가을바람아, 내 왼팔에 와닿으며 고운 내음을 풍겨 주렴. 큰아이는 수레에 앉은 채 아버지를 따라한다. 미후마을과 장촌마을을 지나고 보니 마복산 가는 길로 접어들고 만다. 오늘 꽤나 애먹을 고개를 넘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고단하지는 않다. 즐겁게 넘어 주지, 뭐. 자전거를 세운다. 저기 팔영산부터 부는 가을 들바람이 우리한테 와닿는다. 무르익는 벼마다 벼내음이 왈칵 풍긴다. 구수하게 익는 벼내음이란! 바로 가을내음이구나! 바야흐로 좋은 가을노래로구나!

 

- 자전거를 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두 팔을 죽 뻗은 채 가을바람 들내음을 맡는데, 뒤에서 군내버스 한 대 휭 하고 지나간다. 군내버스 일꾼이랑 손님들은 우리 세 식구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려나. 관광객으로 여겼을까? 따지고 보면 관광객이기도 하다. 마을사람이면서 관광객이다. 우리 아이들은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에 가기보다, 이렇게 아버지나 어머니하고 들길이나 멧길을 거닐거나 달리면서 가을을 한껏 들이마시도록 할 때에 훨씬 좋다. 아이도 좋고 어버이도 좋다. 좋은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좋은 시골바람을 쐰다. 맑은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맑은 시골햇살을 쬔다. 고운 시골에서 살아가는 만큼 고운 시골길을 실컷 누린다.

 

- 세동마을 오르막을 달린다. 처음 이 오르막을 달리던 때에는 허벅지가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 둘 태우고 노래까지 부르면서 오르막을 한갓지게 오른다. 뭐랄까, 오르막을 허둥지둥 빨리 오르려는 생각을 버린 뒤부터, 어느 오르막이든 그리 힘들지 않다. 기울기가 10도가 되는 오르막조차 땀을 줄줄 빼면서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더러 “아버지 힘내셔요, 하고 말해 주렴.” 하고 읊는다.

 

- 작은아이는 가을햇살 받으면서 잔다. 큰아이도 어느새 잠든다.작은아이는 오른쪽으로 머리를 기대로 큰아이는 왼쪽으로 머리를 기댄다. 예쁜 아이들이 예쁜 마을을 예쁜 바람과 햇살 누리면서 달린 끝에 사르르 잠든다. 나도 졸립다. 차근차근 마지막 마복산 오르막을 오른다. 고당마을부터는 내리막이 된다. 봉동마을과 봉서마을을 지나 우리 동백마을로 접어들 때에는 다시금 오르막이 되지만, 다리힘은 수월하다. 집에 닿아 후박나무 그늘에 아이들을 한동안 둔다. 우리 다음에도 또 이웃마을 달리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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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고흥 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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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는 책

 


  ‘책을 말하는 책’이 요즈음처럼 유행이 되어 자주 나오는 적은 없었다. 사람들 누구나 책을 손쉽게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글도 즐겁게 쓸 수 있으니까 ‘책을 말하는 책’이 유행처럼 나올까? 그러나 그렇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책을 말하는 책’이 유행처럼 나오는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요즈음 이러한 책은 ‘돈벌이가 될 만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책을 말하는 책’을 바지런히 그러모으며 읽었다. 이제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사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책을 말하는 책’이 매우 드물었다. ‘책읽기’나 ‘글쓰기’를 말하는 책마저 아주 드물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책읽기나 글쓰기를 말하는 책 또한 아주 봇물처럼 쏟아진다. 왜? 돈벌이가 될 만하니까.


  초등학생과 중학생과 고등학생한테는 대학입시를 앞둔 논술시험 교재로 쓰이도록 이 같은 세 갈래 책이 쏟아진다. 대학생한테는 취업을 앞둔 면접 교재로 쓰이도록 이 같은 세 갈래 책이 쏟아진다.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사람들한테는 교양을 북돋운다든지 상식을 늘린다든지 가벼운 읽을거리가 되어 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골에서 흙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읽을 만한 ‘책을 말하는 책’은 없다.


  그런데 말야, 참 알쏭달쏭한 일이란, 《테스》를 스스로 읽어야 《테스》를 알지, ‘《테스》를 읽은 느낌을 다룬 글이 모인 책’을 읽는들 《테스》를 느끼거나 알 수 있을까. 스스로 《테스》를 읽지 않고 ‘《테스》를 읽은 느낌을 다룬 글이 모인 책’을 읽을 때에 《테스》를 알게끔 아주 빼어나거나 훌륭하게 쓴 ‘책느낌글’은 있을까. 있다면 몇이나 있을까. 이와 같은 글이 있다면 이 글은 책느낌글이 아니라 오롯이 문학이다. 새로 태어난 문학이다.


  요즈음 유행처럼 나오는 ‘책을 말하는 책’은 하나같이 ‘자기계발’ 갈래에 들 만하다고 느낀다. 참말 도시사람 누구한테나 ‘자기계발 잘 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말하는 책’이기 일쑤이다. ‘책을 말하는 책’에서 다루는 책은 이 책이나 저 책이나 엇비슷하다. 평론가가 다루는 책이 이 평론가이든 저 평론가이든 하나같이 엇비슷하듯, ‘책을 말하는 책’을 쓴다는 사람 또한 ‘스스로 이녁 삶을 새롭게 일구는 사랑스러운 책’을 읽으며 ‘책을 말하는 책’을 쓰지는 못하기 일쑤이다.


  밥을 말하는 책을 쓴다고 생각해 보라. 꽃을 말하는 책을 쓴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책을 쓰겠는가? 내가 맛있게 차려서 먹는 밥 이야기를 쓰겠는가? 남들이 보기에 멋스럽거나 예뻐 보이는 밥 이야기를 쓰려는가? 내가 좋아하는 꽃 이야기를 쓰려는가? 남들이 예쁘다고 할 만한 꽃 이야기를 쓰려는가? (4345.9.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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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훼손 글쓰기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리영희 님 책을 읽었다. 왜일까. 누가 알려주었을까.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리영희 님 책을 읽으라 하는 교사도 벗도 이웃도 없었는데, 나는 참 뜬금없이 리영희 님 책을 읽었다. 리영희 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일까? 어떻게 알 수 있어서 당신 책을 하나하나 알뜰히 장만하면서 읽을 수 있었을까?


  리영희 님 책을 읽으며 당신이 밝히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얘기하기도 해서 배우는데, 리영희 님은 당신 책을 이룬 글을 쓰려고, 글 한 줄마다 책 다섯 권씩 읽는다고 했다. 나는 리영희 님 책을 읽을 적에 이와 같은 ‘밝힘말’을 마주하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참 수수하구나, 참 스스로 거리낌없고 홀가분하구나, 하고 느꼈다. 왜냐하면, 글을 한 줄 쓰려면 책 다섯 권 아닌 책 쉰 권을 읽어도 모자랄 뿐 아니라, 책 백 권쯤 읽고서야 비로소 글 한 줄 쓸 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책을 그닥 읽지 못했다. 이때에는 아직 종이책 천 권을 못 읽었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일을 하자면, 글 한 줄에 책 백 권어치 넋과 땀과 숨이 배어야 비로소 글 한 줄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고 느꼈다.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리영희 님에 이어 송건호·이오덕·박경리·박현채·김지하·김수영·김남주·고정희·염무웅 같은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익히고, 당신들 책을 하나하나 장만하여 읽으며 늘 곰곰이 생각을 기울였다. 모두 고등학교 1∼3학년 사이 일인데, 당신들 누구나 글 한 줄을 쓰고자 종이책 다섯 권뿐 아니라 쉰 권 훨씬 넘게 바지런히 읽고 새기며 돌아보는 삶을 갈고닦았구나 하고 느꼈다. 아마 이 때문일 텐데, 나는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글을 쓸 엄두를 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비로소 글 한두 줄 끄적일 수 있었고, 신문배달을 하고, 군대에서 안 죽고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오고, 다시 신문배달을 하고, 출판사에서 일하고, 국어사전을 만들고, 이오덕 님 남은 글을 갈무리하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열고, 아이를 낳고, 시골에서 살고, 흙을 만지면서, 바야흐로 내가 걸어가는 길이 ‘글쓰기’라고 시나브로 느낀다.


  내 생각 한 마디를 읊을 수 있으려면 ‘참고도서’를 몇 권쯤 밝혀야 할까. 어떤 이는 책 뒤에 참고도서라며 이런저런 책을 줄줄이 붙이곤 하는데, 나로서는 ‘부록으로 붙인 참고도서 목록’이 너무 허술하거나 허접하거나 허여멀겋다고 느끼곤 한다. 고작 이만 한 책을 읽고 살폈으면서 참고도서랍시고 붙여도 될까.


  나는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국어사전 기획실 자료로 이천 권 남짓 되는 책과 사전을 장만해서 갖추었다. 이동안 나 혼자 읽으며 돌아볼 책과 자료를 따로 삼천 권 남짓 갖추었다.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기까지 사전붙이 천 가지 남짓, 한국말 자료 이천 가지 남짓 갖추어 읽고 아로새겼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더하면 팔천 권에 이르는 사전과 책을 살피며 갖춘 셈인데, 국어사전 이름에 걸맞는 국어사전을 엮자면, 적어도 이만 권쯤 자료를 갖추어야 그럭저럭 들출 만한 국어사전이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껏 팔천 권을 읽고 갖추었다 한들 마땅한 국어사전을 빚을 수 없다는 소리가 된다. 적어도 이만 가지 ‘국어학 책과 자료와 사전’을 들추고 갖추어야 ‘초등학생 국어사전’을 엮을 수 있다는 뜻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책을 더 잘 알까? 아니라고 느낀다. 책을 많이 갖추었으니 글을 더 잘 쓸까? 아니라고 느낀다. 한 권을 읽더라도 옳고 바르며 알맞고 슬기롭게 아로새길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쓴 사람이 어떤 넋이요 꿈이고 사랑인가를 제대로 짚을 수 있어야 한다. 밑바탕이 되지 않고서야 백 권이나 천 권이나 만 권을 읽는들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2004년부터 내 이름을 붙인 책을 내놓는다. 내가 내놓은 책에 고맙게 느낌글을 달아 주는 분들이 있다. 어떤 분은 별 열 만점에 열을 주기도 하고, 어떤 분은 예닐곱을 주기도 한다. 별을 얼마나 주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 대수로운 대목이란, 내 책을 읽은 분들이 ‘글을 쓴 내 넋과 꿈과 사랑’을 얼마나 제대로 살피고 삭히며 스스로 누리는가이다. 이렇게 돌아볼 때에, 2004년부터 2012년에 이르기까지 내 책을 읽고 느낌글을 쓴 분 가운데 참다이 삭힌 분은 아직 없다고 느낀다.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내가 글을 써서 책을 내놓았는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렇게 못 헤아리기로는 내 책을 엮어 내놓은 출판사 일꾼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비유’도 ‘유추’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비유도 유추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겪은 이야기, 내가 한 이야기, 내가 느낀 이야기, 내가 본 이야기만 글로 쓸 수 있다. 나는 속리산을 자전거를 타고 넘었기에 속리산을 자전거로 넘으며 느낀 이야기를 글로 쓴다. 속리산을 자전거로 넘었기에 지리산이나 금강산을 자전거로 넘을 때에 어떠할 만한가를 알 수 없다. 속리산과 지리산은 다르다. 속리산과 금강산은 다르고, 속리산이랑 서울 남산 또는 경주 남산하고도 다르다. 나는 바퀴 20인치 작은자전거로 평균속도 42킬리미터로 달린 적 있다. 충북 충주에서 서울까지 평균속도 32킬리미터로 네 시간 오십 분을 한 번도 안 쉬고 달린 적 있으며, 거꾸로 서울에서 충북 충주까지 아홉 시간 반을 두 번 쉬고 달린 적 있다. 서울에서 충북 충주까지 달리며 아홉 시간 반이 걸린 까닭은 자전거수레에 책을 육십 킬로그램쯤 싣고 등에 멘 가방에 이십오 킬로그램, 자전거 짐받이에 십이 킬로그램 책을 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겪은 일을 고스란히 책으로 쓴다. 또한, 아이들 기저귀를 언제나 손으로 빨래하며 살아가니,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 내가 빨래한 기저귀가 몇 만 장인지 모르겠다. 내 손으로 만진 아이들 똥이 몇 톤에 이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글을 썼다 해서 ‘다른 집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하는 이야기를 섣불리 짚거나 다룰 수 없다. 자전거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달려 보았으니, 이를 바탕으로 ‘다른 유추나 비유’를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내 글이나 내 책을 읽은 사람 가운데 ‘내가 안 한 일’과 ‘내가 안 겪은 일’과 ‘내가 안 느낀 일’과 ‘내가 안 생각한 일’일 뿐 아니라 ‘내가 글로 안 쓴 일’을 섣불리 비유와 유추를 들어 글로 새롭게 쓸 뿐 아니라, 아예 책으로까지 내놓는 사람이 있다.


  이분들은 글 한 줄을 쓰고자 책을 몇 권쯤 읽었을까. 글 한 줄 쓰는 꿈과 사랑과 믿음이란 무엇일까.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오른다. 나는 이오덕 님 남은 글을 갈무리하면서 당신이 쓴 글 모두를 ‘통독 스무 차례’ 넘게 했다. 꼭 세 해만에 이렇게 했다. 그런데 어느 대학교 교수로 있는 분이 이오덕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글을 쓰면서 딱 두 권만 읽고 비평글을 썼다. 그분을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딱 두 권만 읽고 ‘한 사람 삶과 넋을 비평할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분은 ‘바빠서’ 다른 책은 더 못 읽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두 권 읽었으니 그분이 쓸 비평글로 담을 이야기로는 넉넉히 알 만하다’고 했다.


  내가 쓴 글이나 책을 읽고 비평이든 서평이든 느낌글이든 무어든 해 주는 분들이 ‘리영희 님처럼 책을 읽고 글을 써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리영희 님은 가장 밑바탕이 될 만큼만 책을 읽으니까. 글 한 줄을 쓰려면 적어도 다섯 권 책을 읽어야지 네 권이나 한 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니까. 그렇지만, ‘고작 한 권밖에 안 되는 내 책’을 읽어 주는 분들은 왜 ‘고작 한 권에 깃든 이야기’조차 슬기롭고 해맑게 삭히지 못할까.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글흐름과 글결과 글무늬를 맛나게 받아먹지 못할까.


  명예훼손이란 무엇인가. 내가 누구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 명예훼손일까. 아니다. 명예훼손이란 바로 스스로 제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다. 글을 쓰건 책을 내건, 이녁 스스로 참답고 착하며 아름답게 책읽기를 하지 못한 채 엉성하거나 서투르게 글을 쓰면, ‘그이가 내 이름을 더럽히’는 꼴이 아니라 ‘그이 스스로 그이 깜냥과 넋이 얼마나 얕은가를 드러내며 그이 이름을 더럽히’는 꼴이 된다.


  처음에는 참 얼토당토않구나 싶은 글을 써서 ‘내 책을 엉뚱하게 풀이한 사람과 이런 사람 책을 펴낸 출판사’를 고흥지방법원에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출판금지가처분소송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든 생각이란, 이들은 ‘최종규 내 이름을 더럽힌’ 꼴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 이름을 스스로 더럽힌’ 꼴이더라. 글 한 줄 옳게 읽지 못하고 책 한 권 바르게 삭히지 못한 사람은 당신 스스로를 바보로 망가뜨리는 셈이다. 곧, 내 이름은 하나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내 글을 잘못 읽고 엉뚱한 이야기를 글로 쓴 사람이 더러워진다. 내 책을 뚱딴지처럼 읽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책으로 낸 사람이 더러워진다.


  우스개 아닌 우스개라고 할까, 내가 쓴 《사진책과 함께 살기》라는 책에서 부산 자갈치시장 사람들을 사진으로 바지런히 담는 최민식 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나는 이 책 이 글에서 ‘최민식 님 사진이 썩 아름다운 길을 걷지 못한다’ 하는 느낌으로 슬그머니 나무라면서 아무쪼록 앞으로는 최민식 님 스스로 잘 알고 예쁘게 사랑하는 좋은 사진길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을 적었다. 그런데 열이면 열, 아니 서른 사람 가운데 스물아홉 사람은 내가 최민식 님 사진을 아주 칭찬한다고 잘못 읽었다. 서른 가운데 한 사람쯤 왜 그와 같은 글을 썼는가를 잘 읽어 주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글과 책을 엉터리로 받아들이거나 잘못 맞아들이는 모습을 슬프게 생각할 까닭이 없는지 모른다. 쉽게 써도 쉽게 읽지 못하는데 어떡하겠는가. 사람들이 스스로 이녁 이름을 밝히는 길을 걷지 못하고, 스스로 이녁 이름을 더럽히는 길을 걷겠다는데 어떡하겠는가.


  대통령선거가 또 닥치면서, 누가 누가를 헐뜯었느니 마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싶은데, 아무개가 다른 한 사람을 헐뜯는 말을 했다면, 정작 ‘헐뜯긴’ 사람은 남을 해코지하려는 그이가 된다.


  내 이름을 살리는 사람도, 내 이름을 갉아먹는 사람도, 내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도, 내 이름을 망가뜨리는 사람도,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4345.9.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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