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2.9.11.
: 가을바람 가을내음
- 면소재지 우체국으로 간다. 바다 건너 저 멀리 호주로 책을 부치려고 간다. 우표값이 만오천칠백 원인가 나온다. 참 값싸다고 느낀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는데 딱 만오천 얼마밖에 안 나오니까.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려는데, 큰아이가 저기 나비 있다고 말한다.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데 저기라고만 말한다. 가만히 보니, 자전거 옆 길바닥에서 팔랑거리기만 할 뿐 날아가지 못한다. 틀림없다. 우체국에 들른 어느 자동차한테 받혀 다친 나비이다. 사람들은 나비이든 잠자리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자동차를 달린다. 우체국 앞에 자동차를 멈출 때에도 나비가 받치거나 말거나 살피지 않았겠지. 겉보기로는 성하지만 몸속으로는 망가졌으리라. 슬픈 나비를 살며시 쥔다. 나비가 팔딱거리지도 못한다. 아이들한테 자 나비 보렴 하고 말한 뒤, 부디 기운내어 다시 훨훨 날 수 있기를 빌어, 하고 마음속으로 노래한 뒤 풀숲에 예쁘게 내려놓는다. 나비는 풀숲에서 날개를 쫙 펼치고는 비로소 한숨 돌렸다는 몸짓으로 쉰다.
- 우체국 볼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볕과 바람 좋은 가을날, 좋은 내음과 바람을 쐬면서 아이들하고 들길과 멧길을 달리고 싶다. 집에서 미리 길그림을 살피고 나왔는데, 오늘은 이웃 청룡마을과 미후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갈까 싶다.
- 면소재지 보건소 옆 오르막을 탄다. 길가에 석류나무 줄줄이 자란다. 누가 심어 기르는 나무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누가 길가 공유지에 석류나무를 심었을는지 모르지. 이 길가 나무들이 우람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르막을 천천히 천천히 오른다.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는 오르막을 오를 적에 숨이 가쁘기만 했는데, 이제는 나긋나긋 노래를 부를 만하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 할까? 뭐, 그래도 좋다. 수레에 탄 두 아이가 아버지 노래를 들으며 멧길을 천천히 오르며 즐겁다는데, 누가 무어라 한들 대수로우랴.
- 땀이 송송 돋을 즈음 오르막이 끝나는구나 싶더니 또 오르막이 나온다. 왼편으로 멧기슭에서 풀을 뜯는 까만염소와 소가 보인다. 오, 이곳에서는 짐승을 들에 풀어놓고 기르네. 그러고 보니, 소우리와 염소우리가 꽤 있어도 소똥이나 염소똥 냄새가 거의 안 나는구나. 큰아이가 염소와 소를 보더니 둘레에 있는 커다란 우리를 가리켜, “저기 소집 있네.” 하고 말한다. 맞아, ‘우리’이기 앞서 ‘집’이야.
- 이제 슬슬 봉서마을로 빠지는 길이 보여야 하는데 마땅한 길이 안 보인다. 어쩌면 마을을 가로질러서 고개 하나 넘어야 하는지 모른다. 모른다. 그래, 모르니 그냥 달리자. 멀리 돌아가도 다음에 잘 달리면 되지. 다음에 다시 길을 익히면 되잖아. 자전거를 천천히 밟으며 한손을 죽 뻗는다. 바람아, 바람아, 가을바람아, 내 오른팔에 와닿으며 노래를 불러 주렴. 이제 왼팔을 뻗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쥔다. 바람아, 바람아, 들바람 가을바람아, 내 왼팔에 와닿으며 고운 내음을 풍겨 주렴. 큰아이는 수레에 앉은 채 아버지를 따라한다. 미후마을과 장촌마을을 지나고 보니 마복산 가는 길로 접어들고 만다. 오늘 꽤나 애먹을 고개를 넘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고단하지는 않다. 즐겁게 넘어 주지, 뭐. 자전거를 세운다. 저기 팔영산부터 부는 가을 들바람이 우리한테 와닿는다. 무르익는 벼마다 벼내음이 왈칵 풍긴다. 구수하게 익는 벼내음이란! 바로 가을내음이구나! 바야흐로 좋은 가을노래로구나!
- 자전거를 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두 팔을 죽 뻗은 채 가을바람 들내음을 맡는데, 뒤에서 군내버스 한 대 휭 하고 지나간다. 군내버스 일꾼이랑 손님들은 우리 세 식구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려나. 관광객으로 여겼을까? 따지고 보면 관광객이기도 하다. 마을사람이면서 관광객이다. 우리 아이들은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에 가기보다, 이렇게 아버지나 어머니하고 들길이나 멧길을 거닐거나 달리면서 가을을 한껏 들이마시도록 할 때에 훨씬 좋다. 아이도 좋고 어버이도 좋다. 좋은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좋은 시골바람을 쐰다. 맑은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맑은 시골햇살을 쬔다. 고운 시골에서 살아가는 만큼 고운 시골길을 실컷 누린다.
- 세동마을 오르막을 달린다. 처음 이 오르막을 달리던 때에는 허벅지가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 둘 태우고 노래까지 부르면서 오르막을 한갓지게 오른다. 뭐랄까, 오르막을 허둥지둥 빨리 오르려는 생각을 버린 뒤부터, 어느 오르막이든 그리 힘들지 않다. 기울기가 10도가 되는 오르막조차 땀을 줄줄 빼면서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더러 “아버지 힘내셔요, 하고 말해 주렴.” 하고 읊는다.
- 작은아이는 가을햇살 받으면서 잔다. 큰아이도 어느새 잠든다.작은아이는 오른쪽으로 머리를 기대로 큰아이는 왼쪽으로 머리를 기댄다. 예쁜 아이들이 예쁜 마을을 예쁜 바람과 햇살 누리면서 달린 끝에 사르르 잠든다. 나도 졸립다. 차근차근 마지막 마복산 오르막을 오른다. 고당마을부터는 내리막이 된다. 봉동마을과 봉서마을을 지나 우리 동백마을로 접어들 때에는 다시금 오르막이 되지만, 다리힘은 수월하다. 집에 닿아 후박나무 그늘에 아이들을 한동안 둔다. 우리 다음에도 또 이웃마을 달리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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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고흥 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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