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훼손 글쓰기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리영희 님 책을 읽었다. 왜일까. 누가 알려주었을까.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리영희 님 책을 읽으라 하는 교사도 벗도 이웃도 없었는데, 나는 참 뜬금없이 리영희 님 책을 읽었다. 리영희 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일까? 어떻게 알 수 있어서 당신 책을 하나하나 알뜰히 장만하면서 읽을 수 있었을까?
리영희 님 책을 읽으며 당신이 밝히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얘기하기도 해서 배우는데, 리영희 님은 당신 책을 이룬 글을 쓰려고, 글 한 줄마다 책 다섯 권씩 읽는다고 했다. 나는 리영희 님 책을 읽을 적에 이와 같은 ‘밝힘말’을 마주하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참 수수하구나, 참 스스로 거리낌없고 홀가분하구나, 하고 느꼈다. 왜냐하면, 글을 한 줄 쓰려면 책 다섯 권 아닌 책 쉰 권을 읽어도 모자랄 뿐 아니라, 책 백 권쯤 읽고서야 비로소 글 한 줄 쓸 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책을 그닥 읽지 못했다. 이때에는 아직 종이책 천 권을 못 읽었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일을 하자면, 글 한 줄에 책 백 권어치 넋과 땀과 숨이 배어야 비로소 글 한 줄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고 느꼈다.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리영희 님에 이어 송건호·이오덕·박경리·박현채·김지하·김수영·김남주·고정희·염무웅 같은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익히고, 당신들 책을 하나하나 장만하여 읽으며 늘 곰곰이 생각을 기울였다. 모두 고등학교 1∼3학년 사이 일인데, 당신들 누구나 글 한 줄을 쓰고자 종이책 다섯 권뿐 아니라 쉰 권 훨씬 넘게 바지런히 읽고 새기며 돌아보는 삶을 갈고닦았구나 하고 느꼈다. 아마 이 때문일 텐데, 나는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글을 쓸 엄두를 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비로소 글 한두 줄 끄적일 수 있었고, 신문배달을 하고, 군대에서 안 죽고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오고, 다시 신문배달을 하고, 출판사에서 일하고, 국어사전을 만들고, 이오덕 님 남은 글을 갈무리하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열고, 아이를 낳고, 시골에서 살고, 흙을 만지면서, 바야흐로 내가 걸어가는 길이 ‘글쓰기’라고 시나브로 느낀다.
내 생각 한 마디를 읊을 수 있으려면 ‘참고도서’를 몇 권쯤 밝혀야 할까. 어떤 이는 책 뒤에 참고도서라며 이런저런 책을 줄줄이 붙이곤 하는데, 나로서는 ‘부록으로 붙인 참고도서 목록’이 너무 허술하거나 허접하거나 허여멀겋다고 느끼곤 한다. 고작 이만 한 책을 읽고 살폈으면서 참고도서랍시고 붙여도 될까.
나는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국어사전 기획실 자료로 이천 권 남짓 되는 책과 사전을 장만해서 갖추었다. 이동안 나 혼자 읽으며 돌아볼 책과 자료를 따로 삼천 권 남짓 갖추었다.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기까지 사전붙이 천 가지 남짓, 한국말 자료 이천 가지 남짓 갖추어 읽고 아로새겼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더하면 팔천 권에 이르는 사전과 책을 살피며 갖춘 셈인데, 국어사전 이름에 걸맞는 국어사전을 엮자면, 적어도 이만 권쯤 자료를 갖추어야 그럭저럭 들출 만한 국어사전이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껏 팔천 권을 읽고 갖추었다 한들 마땅한 국어사전을 빚을 수 없다는 소리가 된다. 적어도 이만 가지 ‘국어학 책과 자료와 사전’을 들추고 갖추어야 ‘초등학생 국어사전’을 엮을 수 있다는 뜻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책을 더 잘 알까? 아니라고 느낀다. 책을 많이 갖추었으니 글을 더 잘 쓸까? 아니라고 느낀다. 한 권을 읽더라도 옳고 바르며 알맞고 슬기롭게 아로새길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쓴 사람이 어떤 넋이요 꿈이고 사랑인가를 제대로 짚을 수 있어야 한다. 밑바탕이 되지 않고서야 백 권이나 천 권이나 만 권을 읽는들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2004년부터 내 이름을 붙인 책을 내놓는다. 내가 내놓은 책에 고맙게 느낌글을 달아 주는 분들이 있다. 어떤 분은 별 열 만점에 열을 주기도 하고, 어떤 분은 예닐곱을 주기도 한다. 별을 얼마나 주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 대수로운 대목이란, 내 책을 읽은 분들이 ‘글을 쓴 내 넋과 꿈과 사랑’을 얼마나 제대로 살피고 삭히며 스스로 누리는가이다. 이렇게 돌아볼 때에, 2004년부터 2012년에 이르기까지 내 책을 읽고 느낌글을 쓴 분 가운데 참다이 삭힌 분은 아직 없다고 느낀다.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내가 글을 써서 책을 내놓았는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렇게 못 헤아리기로는 내 책을 엮어 내놓은 출판사 일꾼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비유’도 ‘유추’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비유도 유추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겪은 이야기, 내가 한 이야기, 내가 느낀 이야기, 내가 본 이야기만 글로 쓸 수 있다. 나는 속리산을 자전거를 타고 넘었기에 속리산을 자전거로 넘으며 느낀 이야기를 글로 쓴다. 속리산을 자전거로 넘었기에 지리산이나 금강산을 자전거로 넘을 때에 어떠할 만한가를 알 수 없다. 속리산과 지리산은 다르다. 속리산과 금강산은 다르고, 속리산이랑 서울 남산 또는 경주 남산하고도 다르다. 나는 바퀴 20인치 작은자전거로 평균속도 42킬리미터로 달린 적 있다. 충북 충주에서 서울까지 평균속도 32킬리미터로 네 시간 오십 분을 한 번도 안 쉬고 달린 적 있으며, 거꾸로 서울에서 충북 충주까지 아홉 시간 반을 두 번 쉬고 달린 적 있다. 서울에서 충북 충주까지 달리며 아홉 시간 반이 걸린 까닭은 자전거수레에 책을 육십 킬로그램쯤 싣고 등에 멘 가방에 이십오 킬로그램, 자전거 짐받이에 십이 킬로그램 책을 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겪은 일을 고스란히 책으로 쓴다. 또한, 아이들 기저귀를 언제나 손으로 빨래하며 살아가니,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 내가 빨래한 기저귀가 몇 만 장인지 모르겠다. 내 손으로 만진 아이들 똥이 몇 톤에 이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글을 썼다 해서 ‘다른 집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하는 이야기를 섣불리 짚거나 다룰 수 없다. 자전거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달려 보았으니, 이를 바탕으로 ‘다른 유추나 비유’를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내 글이나 내 책을 읽은 사람 가운데 ‘내가 안 한 일’과 ‘내가 안 겪은 일’과 ‘내가 안 느낀 일’과 ‘내가 안 생각한 일’일 뿐 아니라 ‘내가 글로 안 쓴 일’을 섣불리 비유와 유추를 들어 글로 새롭게 쓸 뿐 아니라, 아예 책으로까지 내놓는 사람이 있다.
이분들은 글 한 줄을 쓰고자 책을 몇 권쯤 읽었을까. 글 한 줄 쓰는 꿈과 사랑과 믿음이란 무엇일까.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오른다. 나는 이오덕 님 남은 글을 갈무리하면서 당신이 쓴 글 모두를 ‘통독 스무 차례’ 넘게 했다. 꼭 세 해만에 이렇게 했다. 그런데 어느 대학교 교수로 있는 분이 이오덕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글을 쓰면서 딱 두 권만 읽고 비평글을 썼다. 그분을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딱 두 권만 읽고 ‘한 사람 삶과 넋을 비평할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분은 ‘바빠서’ 다른 책은 더 못 읽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두 권 읽었으니 그분이 쓸 비평글로 담을 이야기로는 넉넉히 알 만하다’고 했다.
내가 쓴 글이나 책을 읽고 비평이든 서평이든 느낌글이든 무어든 해 주는 분들이 ‘리영희 님처럼 책을 읽고 글을 써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리영희 님은 가장 밑바탕이 될 만큼만 책을 읽으니까. 글 한 줄을 쓰려면 적어도 다섯 권 책을 읽어야지 네 권이나 한 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니까. 그렇지만, ‘고작 한 권밖에 안 되는 내 책’을 읽어 주는 분들은 왜 ‘고작 한 권에 깃든 이야기’조차 슬기롭고 해맑게 삭히지 못할까.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글흐름과 글결과 글무늬를 맛나게 받아먹지 못할까.
명예훼손이란 무엇인가. 내가 누구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 명예훼손일까. 아니다. 명예훼손이란 바로 스스로 제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다. 글을 쓰건 책을 내건, 이녁 스스로 참답고 착하며 아름답게 책읽기를 하지 못한 채 엉성하거나 서투르게 글을 쓰면, ‘그이가 내 이름을 더럽히’는 꼴이 아니라 ‘그이 스스로 그이 깜냥과 넋이 얼마나 얕은가를 드러내며 그이 이름을 더럽히’는 꼴이 된다.
처음에는 참 얼토당토않구나 싶은 글을 써서 ‘내 책을 엉뚱하게 풀이한 사람과 이런 사람 책을 펴낸 출판사’를 고흥지방법원에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출판금지가처분소송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든 생각이란, 이들은 ‘최종규 내 이름을 더럽힌’ 꼴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 이름을 스스로 더럽힌’ 꼴이더라. 글 한 줄 옳게 읽지 못하고 책 한 권 바르게 삭히지 못한 사람은 당신 스스로를 바보로 망가뜨리는 셈이다. 곧, 내 이름은 하나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내 글을 잘못 읽고 엉뚱한 이야기를 글로 쓴 사람이 더러워진다. 내 책을 뚱딴지처럼 읽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책으로 낸 사람이 더러워진다.
우스개 아닌 우스개라고 할까, 내가 쓴 《사진책과 함께 살기》라는 책에서 부산 자갈치시장 사람들을 사진으로 바지런히 담는 최민식 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나는 이 책 이 글에서 ‘최민식 님 사진이 썩 아름다운 길을 걷지 못한다’ 하는 느낌으로 슬그머니 나무라면서 아무쪼록 앞으로는 최민식 님 스스로 잘 알고 예쁘게 사랑하는 좋은 사진길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을 적었다. 그런데 열이면 열, 아니 서른 사람 가운데 스물아홉 사람은 내가 최민식 님 사진을 아주 칭찬한다고 잘못 읽었다. 서른 가운데 한 사람쯤 왜 그와 같은 글을 썼는가를 잘 읽어 주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글과 책을 엉터리로 받아들이거나 잘못 맞아들이는 모습을 슬프게 생각할 까닭이 없는지 모른다. 쉽게 써도 쉽게 읽지 못하는데 어떡하겠는가. 사람들이 스스로 이녁 이름을 밝히는 길을 걷지 못하고, 스스로 이녁 이름을 더럽히는 길을 걷겠다는데 어떡하겠는가.
대통령선거가 또 닥치면서, 누가 누가를 헐뜯었느니 마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싶은데, 아무개가 다른 한 사람을 헐뜯는 말을 했다면, 정작 ‘헐뜯긴’ 사람은 남을 해코지하려는 그이가 된다.
내 이름을 살리는 사람도, 내 이름을 갉아먹는 사람도, 내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도, 내 이름을 망가뜨리는 사람도,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4345.9.12.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