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들을 (도서관일기 2012.10.13.)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이 나라에는 도서관이라 할 곳이 몇 군데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도서관은 대여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도서관이지, 대여점 구실을 하는 데가 아니다.


  베스트셀러나 소설 몇 가지를 빌려주고 돌려받는 데라면 대여점일 뿐이다. 도서관이란 백 해나 이백 해나 오백 해가 흘러도 알뜰히 건사할 책을 갖추면서 사람들이 ‘책으로 삶을 읽고 살피도록 길동무 구실을 하는 데’라고 느낀다. 곧, 이런 구실을 하는 데가 거의 안 보이기에, 이 나라에는 도서관이라 할 곳이 몇 군데 없구나 싶다.


  베스트셀러나 소설 몇 가지를 쉽게 빌리고 돌려줄 만한 곳도 있어야겠지. 그런데 이 몫은 참말 대여점한테 맡기기를 바란다. 도서관에서는 베스트셀러나 소설 몇 가지도 알뜰살뜰 갖추어 자료로 삼도록 할 수 있으면서, 삶을 밝히고 사랑을 빛내는 온갖 책을 꾸준히 두루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아기를 평화롭게 집에서 낳고 싶은 이들이 도움을 받을 만한 책과 자료를 도서관에서 갖출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대학교 아닌 길을 찾고 싶은 푸름이한테 도움이 될 만한 책과 자료를 도서관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삶짓기를 도와줄 길잡이책을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다움을 건사하도록 이끄는 빛줄기를 보듬는 책과 자료를 도서관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사진을 배우려는 이들이 도서관에서 나라 안팎 훌륭한 사진책을 만날 수 있어야겠지. 그림을 배우려는 이들이 도서관에서 나라 안팎 훌륭한 그림책(화집)을 만날 수 있어야겠지. 문학과 문화가 빛날 도서관이어야 한다. 방문객 숫자가 많은 도서관이 아니라, 책손다운 책손이 먼길을 기꺼이 찾아올 만한 도서관이어야 한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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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안학교·귀족학교

 


  심상정 님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겠다고 밝히니, 누군가 심상정 님 아이가 ‘귀족학교’에 다닌다고 꼬투리를 잡는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알아보니, 심상정 님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제도권학교 아닌 대안학교이다. 대안학교 가운데 도시에 있는 이우학교라는 데라 하는데, 이곳은 등록금이 그리 안 비싼 데이다. 왜냐하면 도시에 있는 대안학교라 기숙사를 안 쓰기 때문이다.


  적잖은 대안학교는 시골에 있다. 멧골에 깃든 ‘산촌학교’ 또는 ‘산촌유학센터’라는 곳도 있다. 이곳 등록금은 퍽 비싸다 할 만하다. 왜냐하면 학비 말고 기숙사비도 내야 하니까.


  그런데 대안학교가 왜 ‘귀족학교’ 소리를 들어야 할까. 대안학교는 귀족학교라고 할 만한 곳일까. 귀족학교란 어떤 곳을 가리키는 소리가 될까. 아이들은 모두 여느 제도권학교를 다니면서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시험공부만 해야 하는가.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할 때에 맞돈이 많이 든다고 여길는지 모른다. 그런데, 여느 제도권학교에 보내는 어버이 가운데 오늘날 학원에 안 보내는 집이 있을까. 학원 한두 군데를 다니면 학원삯을 얼마쯤 낼까. 여느 제도권학교 다니며 학원 한두 군데 또는 두어 군데 다니는 아이라 한다면, 대안학교삯보다 훨씬 많은 돈을 다달이 내는 셈이다. 오늘날 이 나라 여느 제도권학교 아이들은 ‘귀족학원’에 다니는 꼴이 아닌가 궁금하다.


  제도권을 거스르면서 새길을 찾는 사람들한테 ‘귀족’이라는 꼬투리를 붙이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참말 귀족이 누구인 줄 모르기에 아무 데나 귀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려 하는가.


  어쩌면, 생활협동조합 매장을 쓰는 이들한테도 ‘귀족음식’을 먹는다고 손가락질할까 걱정스럽다. 시골에서 풀을 뜯어먹는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귀족음식’을 먹는다고 궁시렁거리는 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대안학교도 생협도, 또 도시를 떠나 시골서 살며 풀먹는 사람도, ‘귀족’이라 할 수 있으리라 느낀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섬기고 스스로를 아끼며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애쓰니까. 대학바라기에 목을 매달며 시험공부에 마음과 몸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는 사람이라야 참삶을 누린다고 느낀다. 공장에서 찍어낸 먹을거리를 아무렇게나 먹지 않으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라야 참사랑을 누린다고 느낀다. 도시에서 톱니바퀴 같은 회사원으로 구르지 않고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제 살림을 제 손으로 돌보는 사람이라야 참꿈을 누린다고 느낀다.


  곧, 참학교요 참밥이며 참삶이다. 참다운 길을 살피면서 참다운 넋을 북돋운다. 참다운 하루를 헤아리면서 참다운 말을 빚는다. 이 나라는 다람쥐 쳇바퀴 아닌 참길과 참누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4345.10.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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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한민국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글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도 어른도 놀이가 밥이겠지요
 [사랑하는 배움책 9]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

 


- 책이름 :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글 : 편해문
- 펴낸곳 : 소나무 (2012.9.20.)
- 책값 : 1만 원

 


  어릴 적에 ‘미술학원’이라는 데를 한 해 다녔습니다. 일곱 살 적인 1981년이었는데, 이름은 미술학원이었지만 유치원하고 같은 데였어요. 그림그리기를 조금 더 자주 시키는 대목이 다를 뿐, 국민학교에 들기 앞서 한 해쯤 아이들을 맡겨 ‘놀게’ 하는 데였지 싶어요.


  내 여섯 살 적을 거의 못 떠올립니다. 다섯 살 적이나 네 살 적도 거의 못 떠올립니다. 그무렵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놀았는지 하나도 못 떠올려요. 꼭 일곱 살이던 미술학원 다니던 때부터 떠올려요.


  내가 떠올리는 일곱 살 내 모습은 무척 개구집니다. 틈만 나면 놀고, 틈이 없어도 놉니다. 이것을 하면서 딴생각에 잠겨 놀고, 저것을 할 적에도 딴생각에 빠져 놀아요.


  그림을 그릴 적에도 놀이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 바깥으로 나들이를 간다 하면 그저 뒹굴고 구르고 온갖 법석을 떱니다.


  일곱 살 내 모습에 비추어 여섯 살이나 다섯 살이던 때에 얼마나 개구졌을까 헤아립니다. 얼마나 말썽을 많이 피우고, 얼마나 어머니를 힘들게 했을까 되새깁니다. 집살림이 썩 좋지 않더라도 개구쟁이 막내를 미술학원이라는 데에 넣고는 아침부터 낮까지 ‘신나게 놀리려’ 하지 않았나 싶어요.


..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놀이가 아이들 삶의 전부라는 진리를 숨기고 지우는 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 왕따는 아이들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중독되기 쉬운, 매혹적인 놀이가 되었다. 소비가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 닭장 안에서 조금의 자존감도 느낄 수 없었던 닭들이 다른 닭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이야기다. 왕따는 바로 존중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한 아이들이 벌이는 존재의 드러냄이다 ..  (9, 32, 35쪽)


  놀기는 늘 부산스레 놀지만, 놀이를 잘 했다고는 떠오르지 않아요. 아주 못 하지는 않으나, 퍽 잘 하지는 않았어요. 놀이 가운데 발을 쓰는 놀이는 거의 젬병이었어요. 그래도 공차기를 할 때면 용을 쓰며 달리고 몸싸움을 했어요. 발로 공을 차는 재주는 모자라지만, 그러니까 남들처럼 발끝으로 얹어 발등으로 공을 찰 줄은 모르지만 발을 넓적하게 펴서 차곤 했어요. 문지기 노릇도 곧잘 했고요.


  공치기 놀이를 할 적에도 방망이로 공을 맞히기는 꽤 맞히지만 멀리 보내지는 못해요. 용케 삼진으로 안 죽고, 이래저래 공을 굴리는데, 동무들이 구르는 공을 잘 잡지 못하니 이럭저럭 살아 나가곤 했어요. 다만, 공을 잘 치지는 못하지만, 공은 꽤 잘 잡았고, 투수 자리에 서서 공을 던지는 일을 제법 했어요. 공을 빨리 던질 줄 몰랐으나, 노림수라고 할까, 구석구석 공을 찌른다든지, 때때로 느리게 던져서 박자를 흐트리는 일은 할 줄 알았어요.


  곰곰이 떠올리면, 내가 가장 못하는 놀이는 제기입니다. 제기를 하늘에 띄워 발로 차는 재주가 참 없습니다. 서너 번 차면 그럭저럭 차는 셈이요, 대여섯 번 차면 잘 차는 셈이고, 열 번 넘게 차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이러면서도 제기놀이는 왜 이리도 많이 했는지, 할 적마다 술래를 도맡으면서도 제기놀이에 안간힘을 썼어요.


  하다 보면 잘 차리라 생각했을까요. 백 번 천 번 만 번을 차면 조금씩 나아지리라 생각했을까요. 1대1일로 붙는 제기놀이는 으레 술래만 했지만, 여럿이 하는 제기에서는 공격을 잘 했습니다. 수비도 잘 했어요. 제기를 차는 재주는 떨어지지만, 맞은편이 뻥뻥 찬 제기를 잽싸게 좇아가서 붙잡는다든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제기를 손바닥 아픈 줄 모르고 잡아낸다든지, 이런 대목에서 살짝 돋보였어요. 동무들은 제기놀이를 할 적에 ‘제기 차는 점수는 기본만 해라’ 하고 말했어요. 나머지는 저희들이 채울 테니, 공격과 수비 때에 잘 하면 그만이라고 받아들여 주었어요.


  무리지어 하는 제기를 앞두고 연습하던 때, 제기를 잘 차는 가시내가 ‘넌 왜 제기를 그리 못 차나?’ 하면서 ‘이렇게 차면 돼!’ 하고 가르치지만, 나는 몇 번을 보고 숱하게 따라해도 도무지 안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문간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제기차기 연습을 해도 나아지지 않아요.


.. 아이들은 오랫동안 ‘놀이’라는 은혜로운 햇살과 빗줄기를 받고 자랐다 … 아이들 삶이란 것은 놀이로 촘촘히 박음질되어야 나중에 쉽게 터지지 않는다 … 마음껏 놀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아이라야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 … 책 말고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먼저 만나야 한다. 어디까지나 놀고 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 읽는 것이 책이라는 순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  (10, 11, 12, 76쪽)


  나는 발이 퍽 느렸습니다. 몸도 꽤 여렸습니다. 싸움이 붙으면 언제나 먼저 코피가 터지며 우는 쪽이었습니다. 씨름을 붙으면 나보다 몸집이 작은 아이한테도 뒤집어지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런 발에 몸에 몸집이면서 ‘오징어놀이’를 할 때에는 꽤 날렵했습니다. 내가 보아도 놀랍고, 동무들이 보아도 놀라웠어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서른여덟 먹은 오늘, 여덟 살 적 내 모습을 헤아려 봅니다. 열두 살 적 오징어놀이를 하던 때를 그립니다. 서른 해 지난 오늘에도 그무렵을 떠올리면 짜릿짜릿합니다. 돌멩이로 흙땅에 금을 그어 판을 만듭니다. 금을 안 밟으면서 적진을 가로지르던 느낌이라든지 금이 어디가 끝이고 내 발은 어떻게 춤을 추어야 맞은편 손아귀에서 벗어나 두 발을 마음껏 쓰도록 살아나는가 하고 되새길 수 있습니다.


  그때에나 이제에나 늘 매한가지인데, 힘이 세다든지 키가 크다든지 몸집이 좋다든지 하는 동무들은 늘 ‘마음을 놓아’요. 나처럼 몸도 작고 힘도 여리며 발도 느린 아이들이 적진 한복판을 가로질러 ‘외발’에서 ‘두발’이 될 줄은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늘 이런 ‘마음 놓는 동무들 빈틈’을 찌른다고 할까요. 또한, 내 편에서도 나처럼 여리고 어설픈 아이는 ‘죽거나 살거나 그만’이라 여긴다고 할까요. 내가 한복판 가로지르기를 하다가 죽더라도 맞은편 힘센 동무 하나를 붙잡고 늘어져 함께 넘어지면 둘이 같이 죽으니 ‘너 죽고 나 죽자’ 작전이라고 할 텐데, 여린 내가 죽으며 센 동무를 잡으면 우리 편한테 도움이 된다고 여겼어요.


  이런저런 까닭이 얼크러져 오징어놀이에서는 제몫을 단단히 했어요. 마지막에 적진을 달려들어 작은 동그라미에 발을 디딜 적에도 나는 덩치 우람한 동무하고 부딪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동무하고 쿵 부딪히더라도 발이 동그라미에 먼저 닿으면 되니까 그냥 몸을 날렸어요. 몸을 날리다가 튕겨져서 흙땅에 얼굴이 긁히든 몸이 구르든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하다 보니,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나를 만만하게 보지는 않더라고요.


.. 놀이는 머리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을 미래가 아닌 오늘 당장 만나기 위해 하는 것이다 … 놀이는 끝났어도 놀이감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 이게 놀이다 …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물건을 함부로 사주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텔레비전을 보라. 텔레비전은 아이들을 울타리 안에 묶어두는 일을 한다 … 아이한테 알맞은 일을 거들 수 있게 하자. 아이들은 세상을 일과 놀이를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데, 어른들은 조각난 지식만을 억지로 먹이려 하니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  (21, 22, 42, 50, 98쪽)


  내가 공을 치거나 차는 일은 잘 못하지만, 두 가지나 못하다 보니 ‘받기’ 하나만큼은 잘 해내자고 생각하고 다짐했어요. 생각과 다짐에다가 기나긴 연습이 있은 까닭인지, 발야구를 하든 야구를 하든, 또 오재미를 하든 피구를 하든, 수비를 하며 늘 악착같았어요. 오재미를 할 때에는 일부러 맞은쪽 끝줄에서 몸을 옹크려요. 그러면 저쪽 끝줄에서 오재미를 이쪽 끝줄로 던지며 나를 잡으라고 할 적에, 나는 펄쩍 뛰어올라 이 오재미를 잡곤 했어요. 저쪽에서는 ‘아차!’ 하지만 때는 늦지요. 나는 이 꼼수를 ‘최종규 작전’이라고 내 이름을 붙여서 선보였어요. 맞은편에서 내가 이러는 줄 안다 하더라도, 막상 우리 편 아이들 두엇이 옹크릴 적에는 ‘그리 높이 안 던져도 우리 편이 받아서 저 녀석들을 잡을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마는가 봐요. 그래서, 우리들이 옹크리면서 기다리면 그리 안 높게 오재미가 날아오고, 우리들은 이 오재미를 펄쩍 뛰어서 잡아내지요.


  그렇지만, 이런 놀이 저런 놀이는 국민학교를 마치며 거의 다 사라집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에서 놀이를 즐기는 동무가 사라집니다. 중학생이 된 동무들은 농구를 하느니 축구를 하느니 할 뿐입니다. 놀이를 하지 않아요. 때로는 게임기를 학교에 가져온다든지, 미팅을 한다든지, 벌써 당구장에 간다든지, 담배를 태운다든지, 하는 쪽으로만 흐릅니다. 더군다나, 중학생이 된 사내들은 패싸움도 하고 깡패짓까지 합니다. 열셋에서 열넷이 되었을 뿐인데, 숱한 놀이를 스스로 몽땅 버려요. 아니, 몽땅 빼앗긴다고 해야겠지요. 중학생 때부터 오직 대학바라기 입시공부만 시키니까요. 중학생한테조차 밤 열 시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니, 놀 겨를이 없어요. 운동장에서 금긋기를 하고 땅놀이를 할라치면 어느새 이런 교사 저런 주임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두들겨패거나 욕설을 하거나 손찌검을 해요. 이렇게 ‘놀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문제집 하나라도 더 풀라’고 닦달을 해요.


.. 대한민국은 작은 골목을 없애 도로를 만들고 동네 마당을 메꾸어 큰 건물을 지어, 이제는 아기자기한 골목도 마당도 보기 쉽지 않다.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니 아이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 정말 무서운 것은 게임에 가까워질수록 동무와 형제와 부모 같은 사람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 사랑한다는 것, 가슴 아프다는 것, 힘들다는 것, 눈물겹다는 것, 관계라는 것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아이들을 중독에 빠트려 돈을 벌려는 게임 개발업자들을 장려하고, 상을 주지만 그 피해자인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나라를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  (53, 55∼56, 70쪽)


  중학교 다니면서 구슬치기도 딱지치기도 사라집니다. 제기차기는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오재미나 묵찌빠는 애들 놀이로 여깁니다. 중학생이 묵찌빠를 할 때에는 돈 놓고 돈 먹기를 할 생각일 뿐, 즐거운 놀이로 삼지 않습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무척 외롭습니다. 외로울 뿐 아니라 힘듭니다. 놀지 못하고 놀이를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놀이동무가 없습니다. 다른 동무도 나와 같았을까 궁금한데, 몽둥이에 길들고 시험성적에 주눅듭니다.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목이 매이고, 체벌과 괴롭힘에 몸이 얽힙니다.


  생각이 자랄 수 없습니다. 생각이 뻗칠 수 없습니다. 생각이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우리한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학교는 나와 동무 누구나 생각 없이 주어진 틀에 맞추라고 윽박지릅니다. 배우는 터인 학교가 아니라 길들여지는 터인 학교요, 삶을 누리면서 빛내는 학교가 아닌 톱니바퀴 되는 길을 걸어가는 학교입니다.


.. 학교가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이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려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그 속에 부모들로부터 손쉽고 길게 노동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 아이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고, 껴안으면 가슴이 따듯해지는 실제의 것을 만나고 싶어 한다 … 마을 공동체의 중심인 (시골) 학교의 문을 닫고, 제가 사는 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차를 타고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며 사이버 세계와 유행과 도시를 동경하게 만드는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인가 ..  (78, 87, 147쪽)


  편해문 님이 쓴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를 읽습니다. 편해문 님은 우리더러 텔레비전을 버리고, 인터넷은 줄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른 스스로 텔레비전하고 헤어지면서 인터넷하고도 살짝 멀어질 수 있을 때에, 아이들하고 놀 수 있거든요. 어른들 스스로 놀고픈 마음을 북돋울 때에 아이들도 실컷 놀 수 있어요. 어른들은 안 놀면서 아이들만 놀라 할 수 없어요. 어른 스스로 옭매이지 않는 가벼운 몸과 마음일 적에, 아이들 또한 가벼운 몸과 마음 되어 신나게 뛰놀 틈과 겨를과 터와 동무한테 길을 열 수 있어요.


  참 마땅한 말인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토록 마땅한 말이 거의 안 받아들여집니다. 어른들 스스로 밥벌이 일에 얽매일 적에 아이들도 입시학원에 얽매여요. 어른들 스스로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느라 하루 내내 시달리니, 아이들 또한 집 바깥에서 학원을 빙빙 돌면서 입시공부에 허덕이고 말아요.


  놀아 본 어버이가 아이들을 놀게 한다지만, 놀아 본 어버이라 하더라도 ‘오늘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버는 톱니바퀴 기계 구실’을 한다면 아이들을 놀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눈이 빠지게 들여다봐요. 텔레비전에 길든 어른들은 텔레비전에 길드는 아이들을 낳아요. 텔레비전 없이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어른들은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아이들을 돌봐요.


.. 모든 것을 과외와 암기, 그리고 부모의 기획력에 의존해 오로지 등수에만 몰두한 아이들이 도대체 스스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 즐거운 것을 만든 것은 언제나 놀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생명의 기운을 몸에 담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옮긴다 …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폭력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는 곳이 이미 싸움터요 전쟁터란 말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유기농도 무엇도 아닌 누구랑 먹느냐이다. 혼자 밥 먹기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이것은 혼자 놀기의 어려움을 짐작하면 이해할 수 있다. 골방에서 유기농 혼자 먹으면 오래 못 산다 ..  (200, 201, 209, 214쪽)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아이들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을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놀아야 하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마음껏 땅을 박찰 아이들이요, 아이들은 개구지게 뒹굴거나 구르다가 무릎이 까지고 얼굴이 긁힐 아이들이에요. 무릎이나 어깨나 볼에 핏자국 멍자국 있는 일은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라면 마땅히 온몸에 지는 멋진 무늬예요. 아이다운 그림이요, 아이다운 빛살이에요.


  아이는 아이답게 살아야 해요. 그리고, 어른은 어른답게 살아야 해요. 돈을 잘 벌어다 준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밥을 잘 차리고 빨래를 잘 한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망치질을 잘 하거나 톱질을 잘 하니까 어른일까요. 삶을 사랑하고 삶을 꿈꾸며 삶을 지을 때에 어른이라고 느껴요. 삶을 사랑하기에 하루하루 즐겁게 놀겠지요. 삶을 꿈꾸기에 날마다 기쁘게 놀 이야기를 찾겠지요. 삶을 짓기에 언제나 아름다이 보살피는 놀이를 이루겠지요.


  더 큰 도시에서 살아야 하지 않아요. 공무원이 되거나 고시에 붙거나 큰회사 달삯쟁이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굳이 자가용을 몰려고 하지 말아요.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 자가용이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희랑 손을 잡고 거니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저희를 안거나 업으며 걷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함께 헤엄을 치며 함께 멧골을 오르내리는 어른을 좋아해요.


  살아온 이야기를 구성지게 들려주며 살아갈 기운을 북돋우는 어른을 반기는 아이들이에요. 살아온 나날을 기쁘게 돌아보며 이야기꽃 피우는 어른을 달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에요.


  고무줄놀이는 어린이만 하던 놀이가 아니에요. 공기놀이는 어린이만 할 놀이가 아니에요. 고누도 두고 오목도 두어요. 장기도 두고 장기알 따먹기도 해요. 흙놀이도 함께 즐기고, 풀밭에서 풀놀이도 함께 누려요. 꽃 한 송이 꺾어 서로 꽃순이 꽃돌이가 되어 주셔요. 해맑은 눈빛으로 햇살을 올려다보며 밝고 따사로운 기운을 우리 가슴에 살포시 안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0.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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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꺾는 마음

 


  큰아이는 꽃을 꺾습니다. 꽃을 꺾으면 네 목아지나 팔뚝을 꺾는 일과 같다고 이야기를 해 본 적 있으나, 아직 아이한테는 씨알이 안 먹히지 싶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밥으로 먹으려고 풀을 뜯습니다. 풀 목아지를 뎅겅뎅겅 꺾어요. 때로는 칼로 석석 베고요. 풀줄기를 꺾는 일이나 꽃줄기를 꺾는 일이나 서로 매한가지로 여길 만합니다. 아이한테 달리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생각하기를, 풀줄기를 꺾으면 내 숨결을 이으려고 밥으로 삼지만, 꽃줄기를 꺾으면 눈으로 바라보고 몇 차례 만지며 한두 시간 즈음 지나면 시들어서 그만 내팽개치게 돼요. 그예 눈으로 바라보고 지나가도 즐거우며, 마음속에 담으며 오래오래 떠올려도 기쁠 텐데, 꽃줄기를 꺾으면 꽃 한 송이 숨결을 끊는 셈이 돼요.


  언제나 꽃이 가득 피어나는 시골마을에서 함께 살던 네 식구가 부산으로 여러 날 마실을 다녀왔습니다. 부산은 서울 못지않게 커다란 도시요, 길거리에는 나무가 드물고 풀이나 꽃도 드뭅니다. 관청에서 돈을 들여 심은 눈부셔 보이는 꽃이 있지만, 이 꽃은 함부로 꺾을 수 없습니다. 큰아이는 예뻐 보이는 꽃이 잔뜩 보이니 이 꽃들을 꺾으려 하는데, 차마 이 꽃은 꺾으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시골에서는 꽃을 꺾을 때에 안 말렸지만(아니, 못 말렸지만), 도시에서는 말립니다. 그런데, 계단이 가파른 골목동네를 오르내리며 조그마한 골목집에서 조그마한 꽃그릇에 심어 기르는 조그마한 꽃을 보고는, 아이가 스스로 “이 꽃은 안 꺾을래.” 하고 말해요.


  아이가 문득 읊은 말마디를 듣고는 퍼뜩 새 생각이 샘솟습니다. 그래, 시골에서는 어디에서나 흐드러진 꽃을 꺾고 놀다가 흙에 내려놓으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도시에서는 골목꽃 한 송이를 꺾으면 이제 더 꽃이 없어요. 도시에서는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꽃이요, 시골에서는 손으로 만지며 하루 내내 즐기는 꽃이에요. 입에 넣어 냠냠 하고 씹어도 밥이지만,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으로 쓰다듬고 머리에 꽂을 때에도 밥이에요. 몸밥도 밥이요 마음밥도 밥이니까요.


  꽃을 꺾고 싶은 아이더러 나긋나긋 말합니다. 꽃송이 하나만 꺾자. 네 몫 하나랑 동생 몫 하나, 이렇게 두 송이만 꺾자.


  가을이 무르익어 겨울이 찾아들고, 바야흐로 겨울을 지나고 새봄이 찾아들면, 이제 온 들판에 새 봄꽃이 가득하겠지요. 그때가 되면 큰아이도 나도 ‘가을날 주고받던 얘기’를 몽땅 잊고는 들꽃을 꺾으며 풀숲에서 뒹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오늘도 아이는 꽃 한 송이를 꺾어서 놉니다. 밥상에도 올려놓고 머리에도 꽂습니다. 이러다가 꽃송이는 잊고 다른 데에서 놀고 흙을 뒤집으며 놉니다. 마당이며 텃밭이며 논둑이며 들판이며 마을이며 온통 꽃누리입니다. 꽃이 나요, 내가 꽃이고, 아이가 꽃이면서, 꽃이 아이입니다. 그래, 꽃꺾기를 놓고 무어라 할 까닭이 없겠구나. 내 모습이 꽃송이로 나타나고, 꽃송이가 나한테 스미잖아. (4345.10.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자전거 이야기하는 글에 이 사진을 썼지만, 꽃 든 아이 모습이 좋아 다시금 이 사진을 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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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2.10.11.
 : 꽃을 든 어린이와 자전거

 


- 아이들 어머니가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간다. 꽃을 보러 가자며 두 아이를 이끌고 천천히 걷는다. 논밭이 따로 없는 우리 식구는 가을에도 느긋하게 마실을 다닌다. 논밭을 일구는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가을걷이와 나락 말리기로 바쁘다. 모두들 바쁘게 일손을 놀리면서 논둑이나 밭둑에서 흐드러지는 꽃을 바라보실까. 꽃내음을 함께 맡으며 나락내음을 맡으실까. 이렇게 한가을에 비지땀 쏟으며 온몸이 나락먼지로 뒤덮이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먹는 쌀이 태어난다.

 

- 아이들 어머니는 여느 코스모스보다 훨씬 큰 꽃이 잔뜩 핀 곳에서 멈춘다. 아이들은 꽃을 보랴 논둑길을 달리랴 바쁘다. 큰아이는 꽃이 예쁘다고 만지작거리다가 잎사귀 하나를 그만 똑 끊는다. 꽃아, 미안해, 하면서 떨어진 잎사귀를 꽃잎 위쪽에 얹는다. 한참 놀고 나서 자전거를 태운다. 작은아이는 낮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노는 터라 자전거를 태우면 곧 잠들리라 생각했다. 참말, 자전거에 태우고 1분을 채 달리지 않았는데 작은아이가 스르르 잠든다. 면 소재지까지 달렸다가 돌아오려 했는데, 이래서는 작은아이를 데려가면 안 되겠구나 싶다.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간다. 집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작은아이를 안는다. 천천히 잠자리에 눕히고 기저귀를 대고는 이불을 덮는다. 잘 놀고 잘 뛰고 잘 보낸 하루이니? 이따 저녁 먹을 무렵 배고파서 일어나겠지? 그때까지 새근새근 잘 잠들어 주렴.

 

- 큰아이하고 면내로 간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텃밭 돗나물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제 텃밭에서 돗나물 뜯어서 먹는 기쁨은 거의 끝난 듯하다. 그래도 집 둘레로 가을쑥은 씩씩하게 자란다. 가을쑥은 날마다 내키는 대로 뜯어서 여러 푸성귀하고 무쳐서 먹는다. 쑥은 날쑥으로 먹을 때에 가장 향긋하면서 고소하리라 생각한다. 이러저러해서 면내 가게에서 시금치랑 푸성귀 한두 가지를 장만한다. 면내 가게에는 푸성귀가 몇 가지 없다. 이듬날 읍내로 가서 큰 가게나 저잣거리에서 푸성귀를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할 적까지 먹을 푸성귀는 모두 이웃 시골마을 비닐집에서 거둔 푸성귀일 테지. 맨땅에서 거두는 푸성귀는 이제 마지막일까. 올가을까지 기쁘게 즐겼으니 이듬해 봄을 다시금 기쁘게 기다리자.

 

- 큰아이는 머리에 꽃을 꽂는다. 꽃을 들다가 꽂다가 꽃순이가 되며 달린다. 꽃순이를 태운 자전거는 꽃자전거가 된다. 꽃자전거는 꽃길을 달린다. 이제 가을걷이에 바쁜 할머니 할아버지는 논둑이나 밭둑 풀을 베지 않는다. 논둑이나 밭둑에서는 가을꽃이 흐드러진다. 내가 이름을 아는 꽃, 내가 이름을 모르는 꽃, 누군가 이름을 붙인 꽃, 누군가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음직한 꽃, 온갖 꽃이 저희 마음껏 자라며 한들거린다. 꽃내음을 듬뿍 마시면서 시골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온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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