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한민국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글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도 어른도 놀이가 밥이겠지요
 [사랑하는 배움책 9]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

 


- 책이름 :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글 : 편해문
- 펴낸곳 : 소나무 (2012.9.20.)
- 책값 : 1만 원

 


  어릴 적에 ‘미술학원’이라는 데를 한 해 다녔습니다. 일곱 살 적인 1981년이었는데, 이름은 미술학원이었지만 유치원하고 같은 데였어요. 그림그리기를 조금 더 자주 시키는 대목이 다를 뿐, 국민학교에 들기 앞서 한 해쯤 아이들을 맡겨 ‘놀게’ 하는 데였지 싶어요.


  내 여섯 살 적을 거의 못 떠올립니다. 다섯 살 적이나 네 살 적도 거의 못 떠올립니다. 그무렵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놀았는지 하나도 못 떠올려요. 꼭 일곱 살이던 미술학원 다니던 때부터 떠올려요.


  내가 떠올리는 일곱 살 내 모습은 무척 개구집니다. 틈만 나면 놀고, 틈이 없어도 놉니다. 이것을 하면서 딴생각에 잠겨 놀고, 저것을 할 적에도 딴생각에 빠져 놀아요.


  그림을 그릴 적에도 놀이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 바깥으로 나들이를 간다 하면 그저 뒹굴고 구르고 온갖 법석을 떱니다.


  일곱 살 내 모습에 비추어 여섯 살이나 다섯 살이던 때에 얼마나 개구졌을까 헤아립니다. 얼마나 말썽을 많이 피우고, 얼마나 어머니를 힘들게 했을까 되새깁니다. 집살림이 썩 좋지 않더라도 개구쟁이 막내를 미술학원이라는 데에 넣고는 아침부터 낮까지 ‘신나게 놀리려’ 하지 않았나 싶어요.


..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놀이가 아이들 삶의 전부라는 진리를 숨기고 지우는 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 왕따는 아이들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중독되기 쉬운, 매혹적인 놀이가 되었다. 소비가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 닭장 안에서 조금의 자존감도 느낄 수 없었던 닭들이 다른 닭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이야기다. 왕따는 바로 존중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한 아이들이 벌이는 존재의 드러냄이다 ..  (9, 32, 35쪽)


  놀기는 늘 부산스레 놀지만, 놀이를 잘 했다고는 떠오르지 않아요. 아주 못 하지는 않으나, 퍽 잘 하지는 않았어요. 놀이 가운데 발을 쓰는 놀이는 거의 젬병이었어요. 그래도 공차기를 할 때면 용을 쓰며 달리고 몸싸움을 했어요. 발로 공을 차는 재주는 모자라지만, 그러니까 남들처럼 발끝으로 얹어 발등으로 공을 찰 줄은 모르지만 발을 넓적하게 펴서 차곤 했어요. 문지기 노릇도 곧잘 했고요.


  공치기 놀이를 할 적에도 방망이로 공을 맞히기는 꽤 맞히지만 멀리 보내지는 못해요. 용케 삼진으로 안 죽고, 이래저래 공을 굴리는데, 동무들이 구르는 공을 잘 잡지 못하니 이럭저럭 살아 나가곤 했어요. 다만, 공을 잘 치지는 못하지만, 공은 꽤 잘 잡았고, 투수 자리에 서서 공을 던지는 일을 제법 했어요. 공을 빨리 던질 줄 몰랐으나, 노림수라고 할까, 구석구석 공을 찌른다든지, 때때로 느리게 던져서 박자를 흐트리는 일은 할 줄 알았어요.


  곰곰이 떠올리면, 내가 가장 못하는 놀이는 제기입니다. 제기를 하늘에 띄워 발로 차는 재주가 참 없습니다. 서너 번 차면 그럭저럭 차는 셈이요, 대여섯 번 차면 잘 차는 셈이고, 열 번 넘게 차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이러면서도 제기놀이는 왜 이리도 많이 했는지, 할 적마다 술래를 도맡으면서도 제기놀이에 안간힘을 썼어요.


  하다 보면 잘 차리라 생각했을까요. 백 번 천 번 만 번을 차면 조금씩 나아지리라 생각했을까요. 1대1일로 붙는 제기놀이는 으레 술래만 했지만, 여럿이 하는 제기에서는 공격을 잘 했습니다. 수비도 잘 했어요. 제기를 차는 재주는 떨어지지만, 맞은편이 뻥뻥 찬 제기를 잽싸게 좇아가서 붙잡는다든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제기를 손바닥 아픈 줄 모르고 잡아낸다든지, 이런 대목에서 살짝 돋보였어요. 동무들은 제기놀이를 할 적에 ‘제기 차는 점수는 기본만 해라’ 하고 말했어요. 나머지는 저희들이 채울 테니, 공격과 수비 때에 잘 하면 그만이라고 받아들여 주었어요.


  무리지어 하는 제기를 앞두고 연습하던 때, 제기를 잘 차는 가시내가 ‘넌 왜 제기를 그리 못 차나?’ 하면서 ‘이렇게 차면 돼!’ 하고 가르치지만, 나는 몇 번을 보고 숱하게 따라해도 도무지 안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문간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제기차기 연습을 해도 나아지지 않아요.


.. 아이들은 오랫동안 ‘놀이’라는 은혜로운 햇살과 빗줄기를 받고 자랐다 … 아이들 삶이란 것은 놀이로 촘촘히 박음질되어야 나중에 쉽게 터지지 않는다 … 마음껏 놀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아이라야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 … 책 말고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먼저 만나야 한다. 어디까지나 놀고 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 읽는 것이 책이라는 순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  (10, 11, 12, 76쪽)


  나는 발이 퍽 느렸습니다. 몸도 꽤 여렸습니다. 싸움이 붙으면 언제나 먼저 코피가 터지며 우는 쪽이었습니다. 씨름을 붙으면 나보다 몸집이 작은 아이한테도 뒤집어지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런 발에 몸에 몸집이면서 ‘오징어놀이’를 할 때에는 꽤 날렵했습니다. 내가 보아도 놀랍고, 동무들이 보아도 놀라웠어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서른여덟 먹은 오늘, 여덟 살 적 내 모습을 헤아려 봅니다. 열두 살 적 오징어놀이를 하던 때를 그립니다. 서른 해 지난 오늘에도 그무렵을 떠올리면 짜릿짜릿합니다. 돌멩이로 흙땅에 금을 그어 판을 만듭니다. 금을 안 밟으면서 적진을 가로지르던 느낌이라든지 금이 어디가 끝이고 내 발은 어떻게 춤을 추어야 맞은편 손아귀에서 벗어나 두 발을 마음껏 쓰도록 살아나는가 하고 되새길 수 있습니다.


  그때에나 이제에나 늘 매한가지인데, 힘이 세다든지 키가 크다든지 몸집이 좋다든지 하는 동무들은 늘 ‘마음을 놓아’요. 나처럼 몸도 작고 힘도 여리며 발도 느린 아이들이 적진 한복판을 가로질러 ‘외발’에서 ‘두발’이 될 줄은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늘 이런 ‘마음 놓는 동무들 빈틈’을 찌른다고 할까요. 또한, 내 편에서도 나처럼 여리고 어설픈 아이는 ‘죽거나 살거나 그만’이라 여긴다고 할까요. 내가 한복판 가로지르기를 하다가 죽더라도 맞은편 힘센 동무 하나를 붙잡고 늘어져 함께 넘어지면 둘이 같이 죽으니 ‘너 죽고 나 죽자’ 작전이라고 할 텐데, 여린 내가 죽으며 센 동무를 잡으면 우리 편한테 도움이 된다고 여겼어요.


  이런저런 까닭이 얼크러져 오징어놀이에서는 제몫을 단단히 했어요. 마지막에 적진을 달려들어 작은 동그라미에 발을 디딜 적에도 나는 덩치 우람한 동무하고 부딪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동무하고 쿵 부딪히더라도 발이 동그라미에 먼저 닿으면 되니까 그냥 몸을 날렸어요. 몸을 날리다가 튕겨져서 흙땅에 얼굴이 긁히든 몸이 구르든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하다 보니,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나를 만만하게 보지는 않더라고요.


.. 놀이는 머리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을 미래가 아닌 오늘 당장 만나기 위해 하는 것이다 … 놀이는 끝났어도 놀이감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 이게 놀이다 …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물건을 함부로 사주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텔레비전을 보라. 텔레비전은 아이들을 울타리 안에 묶어두는 일을 한다 … 아이한테 알맞은 일을 거들 수 있게 하자. 아이들은 세상을 일과 놀이를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데, 어른들은 조각난 지식만을 억지로 먹이려 하니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  (21, 22, 42, 50, 98쪽)


  내가 공을 치거나 차는 일은 잘 못하지만, 두 가지나 못하다 보니 ‘받기’ 하나만큼은 잘 해내자고 생각하고 다짐했어요. 생각과 다짐에다가 기나긴 연습이 있은 까닭인지, 발야구를 하든 야구를 하든, 또 오재미를 하든 피구를 하든, 수비를 하며 늘 악착같았어요. 오재미를 할 때에는 일부러 맞은쪽 끝줄에서 몸을 옹크려요. 그러면 저쪽 끝줄에서 오재미를 이쪽 끝줄로 던지며 나를 잡으라고 할 적에, 나는 펄쩍 뛰어올라 이 오재미를 잡곤 했어요. 저쪽에서는 ‘아차!’ 하지만 때는 늦지요. 나는 이 꼼수를 ‘최종규 작전’이라고 내 이름을 붙여서 선보였어요. 맞은편에서 내가 이러는 줄 안다 하더라도, 막상 우리 편 아이들 두엇이 옹크릴 적에는 ‘그리 높이 안 던져도 우리 편이 받아서 저 녀석들을 잡을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마는가 봐요. 그래서, 우리들이 옹크리면서 기다리면 그리 안 높게 오재미가 날아오고, 우리들은 이 오재미를 펄쩍 뛰어서 잡아내지요.


  그렇지만, 이런 놀이 저런 놀이는 국민학교를 마치며 거의 다 사라집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에서 놀이를 즐기는 동무가 사라집니다. 중학생이 된 동무들은 농구를 하느니 축구를 하느니 할 뿐입니다. 놀이를 하지 않아요. 때로는 게임기를 학교에 가져온다든지, 미팅을 한다든지, 벌써 당구장에 간다든지, 담배를 태운다든지, 하는 쪽으로만 흐릅니다. 더군다나, 중학생이 된 사내들은 패싸움도 하고 깡패짓까지 합니다. 열셋에서 열넷이 되었을 뿐인데, 숱한 놀이를 스스로 몽땅 버려요. 아니, 몽땅 빼앗긴다고 해야겠지요. 중학생 때부터 오직 대학바라기 입시공부만 시키니까요. 중학생한테조차 밤 열 시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니, 놀 겨를이 없어요. 운동장에서 금긋기를 하고 땅놀이를 할라치면 어느새 이런 교사 저런 주임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두들겨패거나 욕설을 하거나 손찌검을 해요. 이렇게 ‘놀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문제집 하나라도 더 풀라’고 닦달을 해요.


.. 대한민국은 작은 골목을 없애 도로를 만들고 동네 마당을 메꾸어 큰 건물을 지어, 이제는 아기자기한 골목도 마당도 보기 쉽지 않다.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니 아이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 정말 무서운 것은 게임에 가까워질수록 동무와 형제와 부모 같은 사람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 사랑한다는 것, 가슴 아프다는 것, 힘들다는 것, 눈물겹다는 것, 관계라는 것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아이들을 중독에 빠트려 돈을 벌려는 게임 개발업자들을 장려하고, 상을 주지만 그 피해자인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나라를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  (53, 55∼56, 70쪽)


  중학교 다니면서 구슬치기도 딱지치기도 사라집니다. 제기차기는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오재미나 묵찌빠는 애들 놀이로 여깁니다. 중학생이 묵찌빠를 할 때에는 돈 놓고 돈 먹기를 할 생각일 뿐, 즐거운 놀이로 삼지 않습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무척 외롭습니다. 외로울 뿐 아니라 힘듭니다. 놀지 못하고 놀이를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놀이동무가 없습니다. 다른 동무도 나와 같았을까 궁금한데, 몽둥이에 길들고 시험성적에 주눅듭니다.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목이 매이고, 체벌과 괴롭힘에 몸이 얽힙니다.


  생각이 자랄 수 없습니다. 생각이 뻗칠 수 없습니다. 생각이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우리한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학교는 나와 동무 누구나 생각 없이 주어진 틀에 맞추라고 윽박지릅니다. 배우는 터인 학교가 아니라 길들여지는 터인 학교요, 삶을 누리면서 빛내는 학교가 아닌 톱니바퀴 되는 길을 걸어가는 학교입니다.


.. 학교가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이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려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그 속에 부모들로부터 손쉽고 길게 노동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 아이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고, 껴안으면 가슴이 따듯해지는 실제의 것을 만나고 싶어 한다 … 마을 공동체의 중심인 (시골) 학교의 문을 닫고, 제가 사는 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차를 타고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며 사이버 세계와 유행과 도시를 동경하게 만드는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인가 ..  (78, 87, 147쪽)


  편해문 님이 쓴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를 읽습니다. 편해문 님은 우리더러 텔레비전을 버리고, 인터넷은 줄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른 스스로 텔레비전하고 헤어지면서 인터넷하고도 살짝 멀어질 수 있을 때에, 아이들하고 놀 수 있거든요. 어른들 스스로 놀고픈 마음을 북돋울 때에 아이들도 실컷 놀 수 있어요. 어른들은 안 놀면서 아이들만 놀라 할 수 없어요. 어른 스스로 옭매이지 않는 가벼운 몸과 마음일 적에, 아이들 또한 가벼운 몸과 마음 되어 신나게 뛰놀 틈과 겨를과 터와 동무한테 길을 열 수 있어요.


  참 마땅한 말인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토록 마땅한 말이 거의 안 받아들여집니다. 어른들 스스로 밥벌이 일에 얽매일 적에 아이들도 입시학원에 얽매여요. 어른들 스스로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느라 하루 내내 시달리니, 아이들 또한 집 바깥에서 학원을 빙빙 돌면서 입시공부에 허덕이고 말아요.


  놀아 본 어버이가 아이들을 놀게 한다지만, 놀아 본 어버이라 하더라도 ‘오늘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버는 톱니바퀴 기계 구실’을 한다면 아이들을 놀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눈이 빠지게 들여다봐요. 텔레비전에 길든 어른들은 텔레비전에 길드는 아이들을 낳아요. 텔레비전 없이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어른들은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아이들을 돌봐요.


.. 모든 것을 과외와 암기, 그리고 부모의 기획력에 의존해 오로지 등수에만 몰두한 아이들이 도대체 스스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 즐거운 것을 만든 것은 언제나 놀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생명의 기운을 몸에 담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옮긴다 …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폭력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는 곳이 이미 싸움터요 전쟁터란 말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유기농도 무엇도 아닌 누구랑 먹느냐이다. 혼자 밥 먹기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이것은 혼자 놀기의 어려움을 짐작하면 이해할 수 있다. 골방에서 유기농 혼자 먹으면 오래 못 산다 ..  (200, 201, 209, 214쪽)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아이들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을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놀아야 하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마음껏 땅을 박찰 아이들이요, 아이들은 개구지게 뒹굴거나 구르다가 무릎이 까지고 얼굴이 긁힐 아이들이에요. 무릎이나 어깨나 볼에 핏자국 멍자국 있는 일은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라면 마땅히 온몸에 지는 멋진 무늬예요. 아이다운 그림이요, 아이다운 빛살이에요.


  아이는 아이답게 살아야 해요. 그리고, 어른은 어른답게 살아야 해요. 돈을 잘 벌어다 준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밥을 잘 차리고 빨래를 잘 한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망치질을 잘 하거나 톱질을 잘 하니까 어른일까요. 삶을 사랑하고 삶을 꿈꾸며 삶을 지을 때에 어른이라고 느껴요. 삶을 사랑하기에 하루하루 즐겁게 놀겠지요. 삶을 꿈꾸기에 날마다 기쁘게 놀 이야기를 찾겠지요. 삶을 짓기에 언제나 아름다이 보살피는 놀이를 이루겠지요.


  더 큰 도시에서 살아야 하지 않아요. 공무원이 되거나 고시에 붙거나 큰회사 달삯쟁이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굳이 자가용을 몰려고 하지 말아요.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 자가용이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희랑 손을 잡고 거니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저희를 안거나 업으며 걷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함께 헤엄을 치며 함께 멧골을 오르내리는 어른을 좋아해요.


  살아온 이야기를 구성지게 들려주며 살아갈 기운을 북돋우는 어른을 반기는 아이들이에요. 살아온 나날을 기쁘게 돌아보며 이야기꽃 피우는 어른을 달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에요.


  고무줄놀이는 어린이만 하던 놀이가 아니에요. 공기놀이는 어린이만 할 놀이가 아니에요. 고누도 두고 오목도 두어요. 장기도 두고 장기알 따먹기도 해요. 흙놀이도 함께 즐기고, 풀밭에서 풀놀이도 함께 누려요. 꽃 한 송이 꺾어 서로 꽃순이 꽃돌이가 되어 주셔요. 해맑은 눈빛으로 햇살을 올려다보며 밝고 따사로운 기운을 우리 가슴에 살포시 안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0.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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