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원

 


  옆지기 여동생이 12월 1일에 혼례잔치를 한다. 전남 고흥에서 경기 일산까지 머나먼 길을 가야 하기에 오늘 새벽에 길을 나서려 했는데, 옆지기랑 아이들 모두 어젯밤 해롱거리며 골골대기에, 오늘 새벽 기차표를 물린다. 시골집에서는 새벽부터 길을 나서고, 순천 기차역에서는 아홉 시 반 즈음 타는 기차인데, 인터넷으로 표를 물리니 400원씩 떼어 돌려준다. 생각해 보면, 인터넷이 있으니 시골집에서도 기차표를 미리 끊는다. 인터넷이 있기에 시골집에서도 기차표를 물린다. 인터넷이 없다면 기차역까지 가서 미리 끊어야 할 뿐 아니라, 차편이 있을까 없을까 모르는 채 기차역까지 가야 한다.


  고흥에서 보면, 날줄이 위쪽인 보성이나 장흥만 하더라도 눈발이 날린다고 할 만한 날씨라지만, 고흥은 눈은커녕 햇볕만 따사롭다. 포근한 바람이 불고 따순 구름이 흐른다. 해남 끝자락이나 강진 끝자락은 어떨까. 그곳도 고흥처럼 포근한 바람과 따순 구름 흐르는 맑은 날을 누리려나.


  기차표를 물리며 짐꾸리기도 안 한다. 짐꾸리기를 안 하며 살짝 멍한 채 새벽을 맞이하다가, 누런쌀을 씻어서 불리고 미역을 끊어서 불린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이면서 밥을 새로 짓는다. 이듬날은 어찌 될까. 이듬날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아니면 모레에 길을 나서야 할까. 아니면 마음으로만 인사를 띄우고 우리 식구는 시골집에 조용히 머물까.


  마을에는 우리 집 아이들 노랫소리만 고즈넉히 울려퍼진다.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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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36] 한국말·이중언어·세 갈래 말

 


  한국사람은 한국글, 곧 ‘한글’로 글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글은 모두 한글이라 할 만한데, 요즈음은 한글 아닌 알파벳으로 글을 쓰는 분이 퍽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름다움’이라 말하지 않고 ‘뷰티’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beauty’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빨강’이나 ‘붉음’이라 말하지 않고 ‘레드’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red’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요.


  한국말이 없기에 영어를 쓰지 않습니다. 한국말보다 영어가 익숙하다고 느끼기에 영어를 씁니다. 한국말보다 영어를 쓸 때에 돋보인다고 여겨 영어를 씁니다. 그래서, 영어가 오늘날처럼 널리 쓰이기 앞서 예전 사람들은 한자를 즐겨쓰곤 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한자를 드러내어 적고, 한자말을 더 많이 쓰면 남보다 돋보인다고 여겼으며, 남보다 잘나거나 똑똑해 보인다고 여겼거든요. 그러니까, 예전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한국말이 있어도 ‘우아’라 말하곤 했으며, 글을 쓸 적에는 ‘優雅’처럼 적기도 했어요. ‘빨강’이나 ‘붉음’ 아닌 ‘적색’을 말하면서 ‘赤色’처럼 적기도 하고요.


  이 같은 말흐름을 살핀다면, 한국사람은 여느 자리에서조차 세 갈래 말을 쓴다고 할 만합니다. 첫째, 한국말. 둘째, 한자말(또는 중국말이나 일본말). 셋째, 영어(또는 미국말).


  그런데 세 갈래 말을 쓰는 한국사람 모습을 살피면, 한자말을 즐겨쓰는 사람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더러 영어를 섞기는 하지만, 한국말보다 한자말을 높이 사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즐겨쓰는 사람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곧잘 한자말을 섞기는 하더라도, 한국말보다 영어를 높이 사며 이야기해요.


  간추려 말하자면, 한국사람은 세 갈래 말을 쓰는 슬픈 겨레인데, 한 사람씩 따로 놓고 보자면 ‘두 갈래 말(이중언어)’로 살아가며 생각과 마음과 앎조각을 밝힌다고 하겠어요.


  체코사람 카렐 차페크 님이 쓰고 한국사람 홍유선 님이 옮긴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이라는 책을 읽다가 102쪽에서 “그러나 그 시간에도 태양열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그 시간’과 ‘태양열’과 ‘점점 더’를 헤아려 보겠습니다.


  먼저, ‘시간(時間)’은 “(1)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를 뜻한다는 한자말입니다. 뜻풀이를 더 살피면 “(2) = 시각 (3) 어떤 행동을 할 틈 (4) 어떤 일을 하기로 정하여진 동안 (5) 때의 흐름”처럼 나와요. 곧, ‘시간’은 ‘시각’이라는 한자말하고 이어지면서, ‘틈’과 ‘동안’과 ‘때’라는 한국말하고 이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곰곰이 짚어 보고 싶습니다. 한자말 ‘시간’이 한겨레 말삶에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요. 1800년대에 시골에서 흙을 일구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1400년대에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200년대에 들판을 달리며 뛰놀던 옛 아이들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시간표’라느니 “시간이 몇 시쯤 되었나요” 하는 자리에서는 ‘시간’이라는 한자말을 어찌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내가 1800년대나 1400년대나 200년대를 살아가는 한겨레였다고 생각하면, 그무렵 나는 ‘때’나 ‘틈’이나 ‘겨를’이나 ‘사이’나 ‘동안’이나 ‘참’ 같은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었겠구나 싶어요.


  다음으로, ‘태양열(太陽熱)’은 “태양에서 나와 지구에 도달하는 열”이라고 합니다. 문득 궁금해서 ‘햇볕’ 말풀이를 찾아보니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이라고 합니다. 한자말 ‘태양열’을 풀이할 적에는 ‘도달(到達)’과 ‘열(熱)’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쓰고, 한국말 ‘햇볕’을 풀이할 적에는 ‘내리쬐는’과 ‘뜨거운 기운’이라는 한국말을 빌어서 쓰는군요.


  나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하기에 언제나 ‘햇볕’과 ‘햇살’과 ‘햇빛’과 같은 낱말을 씁니다. ‘해’와 ‘해님’과 ‘햇무늬’와 ‘햇결’과 ‘해구름’ 같은 낱말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마지막으로, ‘점점(漸漸)’은 “조금씩 더하거나 덜하여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일본 한자말입니다. 말풀이에 나오듯 ‘조금씩’으로 바로잡을 낱말인데, 다른 한국말로는 ‘차츰’과 ‘자꾸’와 ‘꾸준히’와 ‘지며리’ 들이 있어요. 그러나,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알맞고 아름다이 쓰는 매무새를 스스로 잃는 한국사람은 자꾸 ‘점점’이나 ‘점차(漸次)’나 ‘차차(次次)’ 같은 한자말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차츰·자꾸·꾸준히’ 같은 낱말로 이야기를 하면 잘 알아듣기는 하되, 스스로 이러한 한국말을 쓸 줄 몰라요. ‘햇볕·햇살·햇빛’이라는 말을 누군가 쓸 때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막상 스스로 이러한 낱말로 이야기를 엮지 못해요.


  두 말을 쓰는 한국사람이지만, ‘알아듣기만 두 말’일 뿐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셈입니다. ‘알아듣기로는 세 말’인데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꼴입니다.


  한국말은 ‘마음’이지만, 한자말을 쓰는 분들이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을 널리 쓰면서, 한국말 ‘마음’은 쓰임새가 줄거나 뜻 테두리가 오므라듭니다. 이런 말흐름에서 ‘마인드(mind)’라는 영어가 스며들고, 요즈음에는 ‘멘탈(mental)’이라는 영어가 새롭게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마음’이라는 낱말조차 들을 일이 매우 드물어, 누군가 ‘마음’이라는 낱말을 쓰면 그럭저럭 알아듣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떻게 ‘마음’이라는 낱말을 넣어 제 이야기를 펼쳐야 할는지를 몰라요. “심적(心的)으로 괴롭다”고 말하면서 “마음이 괴롭다”고 말하지 못하며, 두 말이 사뭇 다르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멘탈 붕괴”라고 말하기는 하되, “마음 붕괴”나 “마음이 무너짐”이나 “마음이 뒤죽박죽”처럼 말할 줄 모르며, 이들 말이 서로 다르다고 여기고 맙니다. “마음을 하나로 다스리”려고 애쓰면서 입으로는 “정신통일(精神統一)”이라고 읊어요.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글을 어떻게 쓸 때에 아름다울까요. 내가 쓰는 내 글은 내 넋과 내 삶을 어떤 ‘내 말’로 담을 수 있을까요. 내 말이 곱게 빛나도록 나 스스로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거나 생각을 쏟는가요.


  한쪽에서는 ‘잔치(생일잔치,마을잔치)’를 하고, 한쪽에서는 ‘연회宴會(피로연披露宴,회갑엽回甲宴)’를 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파티party(생일파티,커플파티)’를 합니다. 한겨레라 하지만 말은 두 말 세 말, 어쩌면 네 말 다섯 말 자꾸 쪼개집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갈래 말을 합니다. 이쪽은 ‘모둠’이나 ‘모임’이지만, 저쪽은 ‘조(組)’나 ‘부서(部署)’이고, 그쪽은 ‘파트(part)’나 ‘팀(team)’입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자면 몇 가지 말을 할 줄 알아야 할까요. 한국에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면 우리는 ‘똑같은 한 가지’를 놓고 얼마나 다른 여러 나라 말을 익히거나 머릿속에 지식으로 집어넣어야 할까요.


  껍데기는 ‘한글’이라지만, ‘한국글’이라 할 만한 글은 차츰 사라집니다. 귀로 듣기로는 ‘한말(한겨레 말)’이라지만, ‘한국말’이라 할 만한 말은 꾸준히 잊혀집니다. 말은 어떻게 해야 하고,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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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마리 님 <이치고다 씨 이야기> 다음 작품이 드디어 한국말로 나옵니다. 참 오래오래 기다렸어요. 아무쪼록 한국에도 오자와 마리 님 보드라운 만화결과 사랑스러운 손길을 아끼며 누리는 분들이 차츰 늘어나기를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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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숟가락 1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2년 11월
5,000원 → 4,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2년 11월 2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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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홍연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1

 


아이들 새근새근 재우는 밤에
―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버지니아 리 버튼 글·그림,홍연미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1993.11.25.7500원

 


  자다가 “쉬 마려워!” 하고 외치며 일어나는 씩씩한 큰아이가 요즈음은 “나 쉬 마려워. 아버지하고 함께 갈래.” 하고도 말합니다. 방에서 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와 오줌그릇에 쉬를 누고는 들어오면 되는데, 이 길을 함께 가자 합니다.


  봄날과 여름날에는 오줌그릇을 섬돌에 놓았습니다. 겨울이 코앞이라 춥다 여겨 대청마루로 오줌그릇을 들이기는 했는데, 여름날에는 멧새 노랫소리나 개구리 노랫소리나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별바라기도 하는 오줌누기를 즐기라는 뜻에서 바깥에 오줌그릇을 놓았어요. 그래서 여름날 아이가 아버지랑 같이 오줌 누러 가자고 할라치면, 아이도 나도 깊은 밤 온갖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애써 도시살이를 떠올릴 일은 없지만, 깊은 밤에 아이 오줌누이기를 하며 밤소리를 듣고 밤내음을 맡을 적에는, 큰아이를 낳고부터 세 살이 되던 해까지 지내던 인천 골목동네가 생각나곤 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 적에는, 밤에도 집안으로 갖은 소리가 흘러들었어요. 이를테면, 밤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붕붕 지나가는 오토바이나 자동차 소리가 흘러들고, 누군가 술에 절어 흥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들며, 위층 집 아이들이 밤새 술 마시고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오며 계단 쿵쾅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어요. 아침이 밝으며 멀리 동이 트는 모습을 내다 볼라치면 언제나 비죽비죽 솟은 건물에 가려 구름이 얼마 안 보입니다. 확 트인 하늘을 보기는 쉽지 않아요. 인천에서 골목마실을 즐기며 골목꽃이랑 골목나무랑 골목밭을 늘 마주하기는 하지만, 햇살이 더 깊이 더 넓게 스며들면서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데는 매우 적어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하지만, 도시에서는 집을 다닥다닥 붙여서 짓고, 길이 조금이나마 있으면 집집마다 한두 대쯤 있는 자동차를 세워요. 삶을 스스로 느긋하게 누리기 힘든 얼거리가 도시로구나 하고 늘 느꼈어요.


  울던 아이도 냇물 소리를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치고 조용해집니다. 졸린 아이는 바람 흐르는 소리나 풀벌레·개구리·멧새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사르르 감으며 조용히 잠들곤 합니다. 어른인 나도 고운 소리를 들으며 고운 마음이 되도록 차분히 숨을 고릅니다.


  살아가며 듣고 누리는 소리를 대수롭게 여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살아가며 보고 누리는 모습을 대단하게 여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보금자리도 마을도 숲도 모두 어여삐 돌봐야 한다고 느낍니다.


.. 치치는 손님을 가득 태운 객차들과, 우편물이랑 짐을 가득 실은 화차와 탄수차를 한꺼번에 끌고서,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조그만 역을 출발하여, 대도시에 있는 커다란 역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일을 날마다 되풀이했습니다 ..  (14쪽)

 

 

 


  인천에서 골목마실을 할 적에는 예쁜 손길로 예쁜 밭 보듬는 골목집이 많아 예쁜 마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들마실을 한다든지, 마당에 서거나 앉아 하늘바라기를 한다든지, 마당에 빨래를 널고 아이들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함께 놀고 보면, 나와 아이들 마음 사이에서 시나브로 예쁜 마음이 샘솟는다고 느낍니다.


  살아가는 뜻은 무엇일까요. 살아가는 보람은 무엇일까요. 살아가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학교를 열두 해, 초·중·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아무도 이 대목을 이야기하지 않고 다루지 않았어요. 어느 교사도 살아가는 뜻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어느 어른도 살아가는 보람을 들려주지 않았어요. 어느 동무도 살아가는 사람을 꿈으로 꾸지 않았어요.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이렇게 느꼈는데, 시골에서 나고 자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느꼈을까요. 오늘날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다가 도시로 떠나는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마음과 생각과 꿈과 사랑을 품에 안으며 살아가려나요.


.. 어느 날, 치치는 혼자서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젠 이렇게 무거운 객차들을 모두 끌고 다니는 일은 질려 버렸어. 나 혼자서만 달린다면 훨씬 쉽게,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모두들 멈춰 서서 나를, 그래 맞아, 나만 쳐다볼 거야.” ..  (20쪽)


  아이들 새근새근 자도록 토닥이는 밤에 생각합니다. 아이들 모두 깊이 잠든 밤에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잘 자다가도 칭얼거리며 깨곤 합니다. 잠을 깬 아이는 다시 잠자리 이불을 여며 재우기도 하고, 무릎에 누여 작은 이불 덮여 토닥이며 재우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곁에 따순 손길이 있을 적에 느긋하게 잠듭니다. 아이들은 옆에 너그러운 손길이 있을 적에 차분한 마음 되어 잠듭니다.


  어른도 따순 손길을 느낄 적에 느긋하게 잠들겠지요. 어른도 너그러운 손길을 느끼면서 차분히 잠들겠지요.


  낮에 신나게 뛰놀 때에도 따순 손길을 느끼면 한결 씩씩하게 뛰놀리라 생각해요. 낮에 기쁘게 일할 때에도 따순 손길을 느끼면 한결 기운차게 일하리라 생각해요. 아이도 어른도 모두 사랑을 먹으며 살아갈 테니까요. 아이도 어른도 모두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생각하며 사랑을 누리며 살아갈 테니까요.


  맛난 밥을 먹어도 나쁘지 않을 테고, 멋진 옷을 입어도 나쁘지 않을 테며, 무언가 재미난 영화를 보아도 나쁘지 않을 텐데, 이러거나 저러거나 하루를 기쁘게 누리도록 이끄는 힘은 바로 따순 손길, 곧 사랑에 있지 싶어요.


  나부터 내 보금자리에 따순 말이 샘솟을 때에 즐겁습니다. 내 이웃집에서 따순 소리가 흘러들 때에 즐겁습니다. 이 마을에 따순 소리가 감돌 때에 즐겁습니다.


  바람이 풀잎과 나뭇잎을 간질이며 속삭입니다. 멧새와 들새가 하늘을 파랗게 빛내며 날갯짓합니다. 풀벌레는 풀숲에 깃들어 풀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은 숲속에 깃들어 조그마니 살림을 꾸리며 사랑을 짓습니다.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 저마다 천천히 흘러 지구를 감쌉니다.

 

 

 


..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말했습니다. “빨리요! 빨리! 빨리 가서 더 말썽을 부리기 전에 도망간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를 붙잡아 오세요.” ..  (38쪽)


  버지니아 리 버튼 님이 빚은 그림책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시공주니어,1993)를 읽습니다. 참 오래된 그림책이로구나 싶군요. 이제 한국에서는 기관차를 구경할 수 없는데,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은 ‘기관차’를 어떻게 생각하려나 궁금합니다. 기관차는 말괄량이처럼 개구지게 놀며 도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외딴 시골길에 처박히는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 말괄량이 기관차처럼 도시 한복판을 개구지게 가로지르며 두루 구경하는 하루를 누리겠지요.


  말괄량이 기관차는 외진 시골길에 처박힌 뒤 한동안 조용히 잠드는데, 도시 한복판에서는 그렇게 펄펄 날더니, 외진 시골길에서는 기운을 잃습니다. 어쩔 수 없겠지만, 기차나 기관차는 ‘철길 놓인 데’에서만 펄펄 날거든요. 도시에서는 여기로도 저기로도 철길이 빽빽히 놓이는데, 시골에서는 철길이 뜸하게 한 줄만 있는데다가, 이마저도 끊겨요. 곧, 기차이든 기관차이든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아갈 기차는 없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는 기차라 하더라도 시골마을은 차츰 줄어들다가 사라지고 마니까, 시골 기차도 몽땅 서울로 삶터를 옮겨요.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치치는 짐 아저씨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도망가지 않을래요. 별로 재미가 없어요. 난 손님들이 많이많이 탄 객차와 화물차를 끌고 작은 마을에서 대도시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을 계속할 거예요.” ..  (48쪽)


  말괄량이 기관차는 작은 마을에서 큰도시를 오가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늘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다가 어쩌다 한 번 슬쩍 ‘굴레(길)를 벗어나’ 보았구나 싶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큰도시를 오가기는 했다지만, 이 말괄량이 기관차는 숲을 누리거나 느낀 적 없겠지요. 들을 느끼거나 바다를 누리거나 멧골을 마주한 적 없겠지요.


  도시에서는 자주 멈추어 사람들이 타고내리도록 하지만, 들에서는 그저 싱싱 달리기만 해요. 바다 곁을 달릴 때에도 기차가 멈출 일이란 없어요. 너른 바다를 느긋하게 누릴 만큼 기차가 멈출 일이란 없어요. 멧골에서도 이와 같아요. 아니, 멧골에서는 기차가 멧자락을 천천히 빙빙 돌며 달리지 않아요. 멧골마다 구멍을 깊이 파고는 더 빨리 더 씽씽 더 쌩쌩 달리기만 해요.


  그림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집 아이는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를 그닥 재미나게 읽지 않습니다. 이 도시 저 도시 가로지르는 모습은 어른인 내 눈에도 그닥 재미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말괄량이 기관차는 ‘말괄량이’라 하면서도 쉴 틈이 없이 일만 해야 해요. 늘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기만 해야 해요. 한갓지게 숲에서 머물 일이 없고, 나무그늘에서 멧새 노랫소리를 누릴 겨를이 없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모두 이 같은 삶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굴레(길)를 벗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굴레를 벗어났다가 일자리를 잃거나 돈벌이를 빼앗길까 걱정하지 않나 싶어요. 도시 아이들은 입시지옥이 모질고 괴로우며 갑갑한 줄 느끼기는 하되, 이 ‘굴레(길)에서 벗어나다’가는 그만 혼자 외톨뱅이(낙오자)가 될까 두렵게 여기지 않나 싶어요.


  숲을 달리는 즐거움을 아예 모르는 요즈음 어른이요 아이가 아닐까 싶어요. 숲에서 뒹굴며 한갓지게 하늘바라기 볕바라기 바람바라기 나무바라기를 하는 사랑을 아예 잊은 요즈음 어른이요 아이가 아닌가 싶어요.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볼따구니에 살랑살랑 푸른바람 찾아들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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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28 19:06   좋아요 0 | URL
요즘, 동화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게 되는 좋은 점이 있어서
어른들이 동화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책도 좋겠군요. ^^

파란놀 2012-11-29 11:41   좋아요 0 | URL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어른들이 먼저 잘 읽고
사랑과 꿈을 새록새록 키운다면
얼마나 기쁠까 싶어요...
 

자전거쪽지 2012.11.25.
 : 손이 시린 자전거

 


- 아이들한테는 담요 한 장과 두꺼운 겉옷을 덮어 주면서, 정작 나는 장갑을 안 낀 채 늦가을 자전거를 달리니, 손이 무척 시린다.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달린다. 천천히 달린다. 논둑길로 달리려고 이웃마을 쪽으로 넘어가는데, 저녁나절 자전거 달리는 할머니 한 분 보인다. 짐받이에 무얼 싣고 어디로 가시는 길일까. 자동차 드물고 길 잘 닦인 이곳에서는 굳이 짐차를 몰 까닭이 없으리라 느낀다. 저마다 자전거를 천천히 몰며 마을숲을 누리고 마을길을 즐기면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 마늘밭마다 잎이 제법 오른다. 바야흐로 겨울이 다가올 테고, 겨울날 찬바람을 먹으며 마늘은 한결 씩씩하게 알이 굵겠지. 겨울을 먹고 자라는 풀과 나무는 참 씩씩하고 튼튼하구나 싶다. 사람도 겨울을 먹고 자라면서 한결 씩씩하면서 튼튼하게 크지 싶다.

 

- 가을무늬를 한껏 누리며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아이가 잠든다. 큰아이가 아버지를 부른다. “이제 노래 그만 불러요. 보라(동생) 자니까요.” 하고 말한다. 큰아이도 아버지도 호젓한 시골 들길을 천천히 달리며 한참 노래를 불렀다. 이제 둘은 말없이 조용히 달린다. 뉘엿뉘엿 기울며 어둑어둑 바뀌는 저녁놀을 누린다. 집에 닿아 작은아이를 방에 눕힌다. 큰아이는 집에 닿아 어딘가 아쉬운지 세발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빙빙 돈다. 성에 찰 만큼 세발자전거를 타고는 방으로 들어온다.

 

(최종규 . 2012 -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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