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홍연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1

 


아이들 새근새근 재우는 밤에
―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버지니아 리 버튼 글·그림,홍연미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1993.11.25.7500원

 


  자다가 “쉬 마려워!” 하고 외치며 일어나는 씩씩한 큰아이가 요즈음은 “나 쉬 마려워. 아버지하고 함께 갈래.” 하고도 말합니다. 방에서 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와 오줌그릇에 쉬를 누고는 들어오면 되는데, 이 길을 함께 가자 합니다.


  봄날과 여름날에는 오줌그릇을 섬돌에 놓았습니다. 겨울이 코앞이라 춥다 여겨 대청마루로 오줌그릇을 들이기는 했는데, 여름날에는 멧새 노랫소리나 개구리 노랫소리나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별바라기도 하는 오줌누기를 즐기라는 뜻에서 바깥에 오줌그릇을 놓았어요. 그래서 여름날 아이가 아버지랑 같이 오줌 누러 가자고 할라치면, 아이도 나도 깊은 밤 온갖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애써 도시살이를 떠올릴 일은 없지만, 깊은 밤에 아이 오줌누이기를 하며 밤소리를 듣고 밤내음을 맡을 적에는, 큰아이를 낳고부터 세 살이 되던 해까지 지내던 인천 골목동네가 생각나곤 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 적에는, 밤에도 집안으로 갖은 소리가 흘러들었어요. 이를테면, 밤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붕붕 지나가는 오토바이나 자동차 소리가 흘러들고, 누군가 술에 절어 흥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들며, 위층 집 아이들이 밤새 술 마시고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오며 계단 쿵쾅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어요. 아침이 밝으며 멀리 동이 트는 모습을 내다 볼라치면 언제나 비죽비죽 솟은 건물에 가려 구름이 얼마 안 보입니다. 확 트인 하늘을 보기는 쉽지 않아요. 인천에서 골목마실을 즐기며 골목꽃이랑 골목나무랑 골목밭을 늘 마주하기는 하지만, 햇살이 더 깊이 더 넓게 스며들면서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데는 매우 적어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하지만, 도시에서는 집을 다닥다닥 붙여서 짓고, 길이 조금이나마 있으면 집집마다 한두 대쯤 있는 자동차를 세워요. 삶을 스스로 느긋하게 누리기 힘든 얼거리가 도시로구나 하고 늘 느꼈어요.


  울던 아이도 냇물 소리를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치고 조용해집니다. 졸린 아이는 바람 흐르는 소리나 풀벌레·개구리·멧새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사르르 감으며 조용히 잠들곤 합니다. 어른인 나도 고운 소리를 들으며 고운 마음이 되도록 차분히 숨을 고릅니다.


  살아가며 듣고 누리는 소리를 대수롭게 여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살아가며 보고 누리는 모습을 대단하게 여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보금자리도 마을도 숲도 모두 어여삐 돌봐야 한다고 느낍니다.


.. 치치는 손님을 가득 태운 객차들과, 우편물이랑 짐을 가득 실은 화차와 탄수차를 한꺼번에 끌고서,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조그만 역을 출발하여, 대도시에 있는 커다란 역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일을 날마다 되풀이했습니다 ..  (14쪽)

 

 

 


  인천에서 골목마실을 할 적에는 예쁜 손길로 예쁜 밭 보듬는 골목집이 많아 예쁜 마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들마실을 한다든지, 마당에 서거나 앉아 하늘바라기를 한다든지, 마당에 빨래를 널고 아이들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함께 놀고 보면, 나와 아이들 마음 사이에서 시나브로 예쁜 마음이 샘솟는다고 느낍니다.


  살아가는 뜻은 무엇일까요. 살아가는 보람은 무엇일까요. 살아가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학교를 열두 해, 초·중·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아무도 이 대목을 이야기하지 않고 다루지 않았어요. 어느 교사도 살아가는 뜻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어느 어른도 살아가는 보람을 들려주지 않았어요. 어느 동무도 살아가는 사람을 꿈으로 꾸지 않았어요.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이렇게 느꼈는데, 시골에서 나고 자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느꼈을까요. 오늘날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다가 도시로 떠나는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마음과 생각과 꿈과 사랑을 품에 안으며 살아가려나요.


.. 어느 날, 치치는 혼자서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젠 이렇게 무거운 객차들을 모두 끌고 다니는 일은 질려 버렸어. 나 혼자서만 달린다면 훨씬 쉽게,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모두들 멈춰 서서 나를, 그래 맞아, 나만 쳐다볼 거야.” ..  (20쪽)


  아이들 새근새근 자도록 토닥이는 밤에 생각합니다. 아이들 모두 깊이 잠든 밤에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잘 자다가도 칭얼거리며 깨곤 합니다. 잠을 깬 아이는 다시 잠자리 이불을 여며 재우기도 하고, 무릎에 누여 작은 이불 덮여 토닥이며 재우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곁에 따순 손길이 있을 적에 느긋하게 잠듭니다. 아이들은 옆에 너그러운 손길이 있을 적에 차분한 마음 되어 잠듭니다.


  어른도 따순 손길을 느낄 적에 느긋하게 잠들겠지요. 어른도 너그러운 손길을 느끼면서 차분히 잠들겠지요.


  낮에 신나게 뛰놀 때에도 따순 손길을 느끼면 한결 씩씩하게 뛰놀리라 생각해요. 낮에 기쁘게 일할 때에도 따순 손길을 느끼면 한결 기운차게 일하리라 생각해요. 아이도 어른도 모두 사랑을 먹으며 살아갈 테니까요. 아이도 어른도 모두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생각하며 사랑을 누리며 살아갈 테니까요.


  맛난 밥을 먹어도 나쁘지 않을 테고, 멋진 옷을 입어도 나쁘지 않을 테며, 무언가 재미난 영화를 보아도 나쁘지 않을 텐데, 이러거나 저러거나 하루를 기쁘게 누리도록 이끄는 힘은 바로 따순 손길, 곧 사랑에 있지 싶어요.


  나부터 내 보금자리에 따순 말이 샘솟을 때에 즐겁습니다. 내 이웃집에서 따순 소리가 흘러들 때에 즐겁습니다. 이 마을에 따순 소리가 감돌 때에 즐겁습니다.


  바람이 풀잎과 나뭇잎을 간질이며 속삭입니다. 멧새와 들새가 하늘을 파랗게 빛내며 날갯짓합니다. 풀벌레는 풀숲에 깃들어 풀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은 숲속에 깃들어 조그마니 살림을 꾸리며 사랑을 짓습니다.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 저마다 천천히 흘러 지구를 감쌉니다.

 

 

 


..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말했습니다. “빨리요! 빨리! 빨리 가서 더 말썽을 부리기 전에 도망간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를 붙잡아 오세요.” ..  (38쪽)


  버지니아 리 버튼 님이 빚은 그림책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시공주니어,1993)를 읽습니다. 참 오래된 그림책이로구나 싶군요. 이제 한국에서는 기관차를 구경할 수 없는데,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은 ‘기관차’를 어떻게 생각하려나 궁금합니다. 기관차는 말괄량이처럼 개구지게 놀며 도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외딴 시골길에 처박히는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 말괄량이 기관차처럼 도시 한복판을 개구지게 가로지르며 두루 구경하는 하루를 누리겠지요.


  말괄량이 기관차는 외진 시골길에 처박힌 뒤 한동안 조용히 잠드는데, 도시 한복판에서는 그렇게 펄펄 날더니, 외진 시골길에서는 기운을 잃습니다. 어쩔 수 없겠지만, 기차나 기관차는 ‘철길 놓인 데’에서만 펄펄 날거든요. 도시에서는 여기로도 저기로도 철길이 빽빽히 놓이는데, 시골에서는 철길이 뜸하게 한 줄만 있는데다가, 이마저도 끊겨요. 곧, 기차이든 기관차이든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아갈 기차는 없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는 기차라 하더라도 시골마을은 차츰 줄어들다가 사라지고 마니까, 시골 기차도 몽땅 서울로 삶터를 옮겨요.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치치는 짐 아저씨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도망가지 않을래요. 별로 재미가 없어요. 난 손님들이 많이많이 탄 객차와 화물차를 끌고 작은 마을에서 대도시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을 계속할 거예요.” ..  (48쪽)


  말괄량이 기관차는 작은 마을에서 큰도시를 오가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늘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다가 어쩌다 한 번 슬쩍 ‘굴레(길)를 벗어나’ 보았구나 싶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큰도시를 오가기는 했다지만, 이 말괄량이 기관차는 숲을 누리거나 느낀 적 없겠지요. 들을 느끼거나 바다를 누리거나 멧골을 마주한 적 없겠지요.


  도시에서는 자주 멈추어 사람들이 타고내리도록 하지만, 들에서는 그저 싱싱 달리기만 해요. 바다 곁을 달릴 때에도 기차가 멈출 일이란 없어요. 너른 바다를 느긋하게 누릴 만큼 기차가 멈출 일이란 없어요. 멧골에서도 이와 같아요. 아니, 멧골에서는 기차가 멧자락을 천천히 빙빙 돌며 달리지 않아요. 멧골마다 구멍을 깊이 파고는 더 빨리 더 씽씽 더 쌩쌩 달리기만 해요.


  그림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집 아이는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를 그닥 재미나게 읽지 않습니다. 이 도시 저 도시 가로지르는 모습은 어른인 내 눈에도 그닥 재미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말괄량이 기관차는 ‘말괄량이’라 하면서도 쉴 틈이 없이 일만 해야 해요. 늘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기만 해야 해요. 한갓지게 숲에서 머물 일이 없고, 나무그늘에서 멧새 노랫소리를 누릴 겨를이 없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모두 이 같은 삶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굴레(길)를 벗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굴레를 벗어났다가 일자리를 잃거나 돈벌이를 빼앗길까 걱정하지 않나 싶어요. 도시 아이들은 입시지옥이 모질고 괴로우며 갑갑한 줄 느끼기는 하되, 이 ‘굴레(길)에서 벗어나다’가는 그만 혼자 외톨뱅이(낙오자)가 될까 두렵게 여기지 않나 싶어요.


  숲을 달리는 즐거움을 아예 모르는 요즈음 어른이요 아이가 아닐까 싶어요. 숲에서 뒹굴며 한갓지게 하늘바라기 볕바라기 바람바라기 나무바라기를 하는 사랑을 아예 잊은 요즈음 어른이요 아이가 아닌가 싶어요.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볼따구니에 살랑살랑 푸른바람 찾아들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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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28 19:06   좋아요 0 | URL
요즘, 동화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게 되는 좋은 점이 있어서
어른들이 동화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책도 좋겠군요. ^^

숲노래 2012-11-29 11:41   좋아요 0 | URL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어른들이 먼저 잘 읽고
사랑과 꿈을 새록새록 키운다면
얼마나 기쁠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