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36] 한국말·이중언어·세 갈래 말
한국사람은 한국글, 곧 ‘한글’로 글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글은 모두 한글이라 할 만한데, 요즈음은 한글 아닌 알파벳으로 글을 쓰는 분이 퍽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름다움’이라 말하지 않고 ‘뷰티’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beauty’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빨강’이나 ‘붉음’이라 말하지 않고 ‘레드’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red’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요.
한국말이 없기에 영어를 쓰지 않습니다. 한국말보다 영어가 익숙하다고 느끼기에 영어를 씁니다. 한국말보다 영어를 쓸 때에 돋보인다고 여겨 영어를 씁니다. 그래서, 영어가 오늘날처럼 널리 쓰이기 앞서 예전 사람들은 한자를 즐겨쓰곤 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한자를 드러내어 적고, 한자말을 더 많이 쓰면 남보다 돋보인다고 여겼으며, 남보다 잘나거나 똑똑해 보인다고 여겼거든요. 그러니까, 예전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한국말이 있어도 ‘우아’라 말하곤 했으며, 글을 쓸 적에는 ‘優雅’처럼 적기도 했어요. ‘빨강’이나 ‘붉음’ 아닌 ‘적색’을 말하면서 ‘赤色’처럼 적기도 하고요.
이 같은 말흐름을 살핀다면, 한국사람은 여느 자리에서조차 세 갈래 말을 쓴다고 할 만합니다. 첫째, 한국말. 둘째, 한자말(또는 중국말이나 일본말). 셋째, 영어(또는 미국말).
그런데 세 갈래 말을 쓰는 한국사람 모습을 살피면, 한자말을 즐겨쓰는 사람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더러 영어를 섞기는 하지만, 한국말보다 한자말을 높이 사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즐겨쓰는 사람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곧잘 한자말을 섞기는 하더라도, 한국말보다 영어를 높이 사며 이야기해요.
간추려 말하자면, 한국사람은 세 갈래 말을 쓰는 슬픈 겨레인데, 한 사람씩 따로 놓고 보자면 ‘두 갈래 말(이중언어)’로 살아가며 생각과 마음과 앎조각을 밝힌다고 하겠어요.
체코사람 카렐 차페크 님이 쓰고 한국사람 홍유선 님이 옮긴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이라는 책을 읽다가 102쪽에서 “그러나 그 시간에도 태양열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그 시간’과 ‘태양열’과 ‘점점 더’를 헤아려 보겠습니다.
먼저, ‘시간(時間)’은 “(1)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를 뜻한다는 한자말입니다. 뜻풀이를 더 살피면 “(2) = 시각 (3) 어떤 행동을 할 틈 (4) 어떤 일을 하기로 정하여진 동안 (5) 때의 흐름”처럼 나와요. 곧, ‘시간’은 ‘시각’이라는 한자말하고 이어지면서, ‘틈’과 ‘동안’과 ‘때’라는 한국말하고 이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곰곰이 짚어 보고 싶습니다. 한자말 ‘시간’이 한겨레 말삶에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요. 1800년대에 시골에서 흙을 일구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1400년대에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200년대에 들판을 달리며 뛰놀던 옛 아이들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시간표’라느니 “시간이 몇 시쯤 되었나요” 하는 자리에서는 ‘시간’이라는 한자말을 어찌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내가 1800년대나 1400년대나 200년대를 살아가는 한겨레였다고 생각하면, 그무렵 나는 ‘때’나 ‘틈’이나 ‘겨를’이나 ‘사이’나 ‘동안’이나 ‘참’ 같은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었겠구나 싶어요.
다음으로, ‘태양열(太陽熱)’은 “태양에서 나와 지구에 도달하는 열”이라고 합니다. 문득 궁금해서 ‘햇볕’ 말풀이를 찾아보니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이라고 합니다. 한자말 ‘태양열’을 풀이할 적에는 ‘도달(到達)’과 ‘열(熱)’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쓰고, 한국말 ‘햇볕’을 풀이할 적에는 ‘내리쬐는’과 ‘뜨거운 기운’이라는 한국말을 빌어서 쓰는군요.
나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하기에 언제나 ‘햇볕’과 ‘햇살’과 ‘햇빛’과 같은 낱말을 씁니다. ‘해’와 ‘해님’과 ‘햇무늬’와 ‘햇결’과 ‘해구름’ 같은 낱말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마지막으로, ‘점점(漸漸)’은 “조금씩 더하거나 덜하여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일본 한자말입니다. 말풀이에 나오듯 ‘조금씩’으로 바로잡을 낱말인데, 다른 한국말로는 ‘차츰’과 ‘자꾸’와 ‘꾸준히’와 ‘지며리’ 들이 있어요. 그러나,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알맞고 아름다이 쓰는 매무새를 스스로 잃는 한국사람은 자꾸 ‘점점’이나 ‘점차(漸次)’나 ‘차차(次次)’ 같은 한자말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차츰·자꾸·꾸준히’ 같은 낱말로 이야기를 하면 잘 알아듣기는 하되, 스스로 이러한 한국말을 쓸 줄 몰라요. ‘햇볕·햇살·햇빛’이라는 말을 누군가 쓸 때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막상 스스로 이러한 낱말로 이야기를 엮지 못해요.
두 말을 쓰는 한국사람이지만, ‘알아듣기만 두 말’일 뿐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셈입니다. ‘알아듣기로는 세 말’인데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꼴입니다.
한국말은 ‘마음’이지만, 한자말을 쓰는 분들이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을 널리 쓰면서, 한국말 ‘마음’은 쓰임새가 줄거나 뜻 테두리가 오므라듭니다. 이런 말흐름에서 ‘마인드(mind)’라는 영어가 스며들고, 요즈음에는 ‘멘탈(mental)’이라는 영어가 새롭게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마음’이라는 낱말조차 들을 일이 매우 드물어, 누군가 ‘마음’이라는 낱말을 쓰면 그럭저럭 알아듣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떻게 ‘마음’이라는 낱말을 넣어 제 이야기를 펼쳐야 할는지를 몰라요. “심적(心的)으로 괴롭다”고 말하면서 “마음이 괴롭다”고 말하지 못하며, 두 말이 사뭇 다르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멘탈 붕괴”라고 말하기는 하되, “마음 붕괴”나 “마음이 무너짐”이나 “마음이 뒤죽박죽”처럼 말할 줄 모르며, 이들 말이 서로 다르다고 여기고 맙니다. “마음을 하나로 다스리”려고 애쓰면서 입으로는 “정신통일(精神統一)”이라고 읊어요.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글을 어떻게 쓸 때에 아름다울까요. 내가 쓰는 내 글은 내 넋과 내 삶을 어떤 ‘내 말’로 담을 수 있을까요. 내 말이 곱게 빛나도록 나 스스로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거나 생각을 쏟는가요.
한쪽에서는 ‘잔치(생일잔치,마을잔치)’를 하고, 한쪽에서는 ‘연회宴會(피로연披露宴,회갑엽回甲宴)’를 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파티party(생일파티,커플파티)’를 합니다. 한겨레라 하지만 말은 두 말 세 말, 어쩌면 네 말 다섯 말 자꾸 쪼개집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갈래 말을 합니다. 이쪽은 ‘모둠’이나 ‘모임’이지만, 저쪽은 ‘조(組)’나 ‘부서(部署)’이고, 그쪽은 ‘파트(part)’나 ‘팀(team)’입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자면 몇 가지 말을 할 줄 알아야 할까요. 한국에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면 우리는 ‘똑같은 한 가지’를 놓고 얼마나 다른 여러 나라 말을 익히거나 머릿속에 지식으로 집어넣어야 할까요.
껍데기는 ‘한글’이라지만, ‘한국글’이라 할 만한 글은 차츰 사라집니다. 귀로 듣기로는 ‘한말(한겨레 말)’이라지만, ‘한국말’이라 할 만한 말은 꾸준히 잊혀집니다. 말은 어떻게 해야 하고,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