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순난앵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13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홍재웅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열린어린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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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사랑하는 이야기를
 [어린이책 읽는 삶 21]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리운 순난앵》(열린어린이,2010)

 


- 책이름 : 그리운 순난앵
- 글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그림 : 일론 비틀란드
- 옮긴이 : 홍재웅
- 펴낸곳 : 열린어린이 (2010.3.30.)
- 책값 : 9500원

 


  새벽 여섯 시에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 부시럭거리다가 일어나 슬금슬금 돌아다닙니다. 좀 늦잠을 자면 안 되겠니 싶지만, 이때에 잠에서 깨어 부시럭거리다 일어나겠다 하는데 어찌할 길 없습니다. 어제 일찍 잠들었나 돌아보지만, 썩 일찍 잠들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이들입니다.


  어버이인 내가 늦게 자면서 일찍 일어난다면, 아이들 또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에 맞추어 하루하루 맞이하리라 느낍니다. 어버이인 나부터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면, 아이들 또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버릇할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시골 아이는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납니다. 시골은 밤이 일찍 찾아들고 새벽 또한 일찍 찾아듭니다. 먼동이 트는 새벽 네 시 무렵이면 시골 어른들 누구나 잠을 털고 일어납니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 여덟 시쯤 지나면 시골 어른들 누구나 잠자리에 듭니다. 어른도 아이도 자연이 베푸는 선물을 마음껏 받아들이고, 아이도 어른도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가만히 귀기울여 듣습니다.


.. 순난앵 마을에 살던 마티아스와 안나는 뮈라 마을의 한 농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주 영리해 보인다거나 착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혹은 성실하게 일할 것 같은 작은 손을 가지고 있어서 데려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아이들이 힘겨워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데려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마티아스와 안나를 데려온 농부는 아이들에게 오로지 일을 시킬 생각뿐이었습니다 … 그들(마티아스와 안나)도 짐작했던 것처럼 가난뱅이 잿빛티를 벗어 버리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눈이 숲길을 덮어 버려도, 추위에 발톱이 갈라져서 아파도, 샌드위치와 팬케이크로 도시락을 싸 올 수 없을 만큼 가난해도, 어린 남매는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학교에 나갔습니다 ..  (7, 16쪽)


  어제 하루, 자전거수레에 두 아이 태우고 먼 나들이를 해 보았습니다. 으레 면내까지만 천천히 논둑길을 돌고 돌아 나들이를 했는데, 다음에 옆지기랑 넷이 자전거를 타면 어디로 돌 때에 좋을까 하고 헤아리다가 그만 한 시간 남짓 고흥 시골마을 멧길과 바닷길까지 돌았습니다.


  우리 시골마을에도 자동차 드나들 일이 뜸하지만, 이웃 시골마을에도 자동차 드나들 일이 뜸합니다. 자전거수레에 두 아이를 태우고 달리자니, 이곳도 호젓하고 저곳도 한갓져요. 면 소재지 둘레만 자동차 여러 대 지나갈 뿐입니다.


  자동차도 사람도 없는 조용한 멧길을 자전거로 오르다가 살짝 멈춥니다. 숨을 돌리고 싶다기보다, 찻길로 길게 뻗는 칡덩굴 때문입니다. 새로 뻗는 칡덩굴을 끊거나 잡아뽑으면 집에서 만나게 풀물을 짜서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오르막을 오릅니다. 오르막을 지난 다음에는 싱 하고 내리막을 달립니다. 바다가 펼쳐지면 내리막이더라도 자전거를 멈춥니다. 넓은 바다를 바라봅니다. 넓은 바다 품이 있어, 사람도 다른 목숨도 좋은 숨결 누릴 수 있구나 싶습니다.


.. “오빠, 내 발이 그러는데, 보드라운 모래랑 푹신푹신한 잔디가 너무 좋대.” … “아니야, 같이 가면 좋아하실 거야. 어머니는 모든 아이들을 좋아하시거든.” … 비록 말린의 집이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은 아름다웠고 재미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봄이 오면 창밖에 서 있는 사과나무가 꽃을 피우는 모습을, 그리고 은방울꽃들이 가득 피어난 숲을 말입니다 … 말린은 밤도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뭇잎과 꽃, 잔디와 나무는 살아숨쉬는 봄의 영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손톱만큼 작은 식물과 지푸라기도 영혼과 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26∼27, 39, 57쪽)


  나는 좋은 목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좋은 목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칡덩굴도, 봄풀도 여름풀도, 들새도 멧새도, 개구리도 왜가리도, 모두 좋은 목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밤에 두 아이 토닥이며 재우는 동안 생각해 봅니다. 왜가리가 개구리를 잡아 넙죽 먹을 때에는 날것 그대로 삼킬 텐데, 그 작은 목구멍으로 토실토실 개구리가 꾸물꾸물거리며 들어가다가 천천히 삭겠지요. 개구리는 왜가리가 되고, 왜가리는 개구리가 됩니다.


  시골 흙일꾼이 거둔 벼를 깎은 쌀알을 먹습니다. 쌀알은 내 몸으로 들어와 내가 되고, 나는 쌀알을 먹으며 쌀알이 됩니다.


  비트잎을 먹으며 비트잎이 됩니다. 가지를 먹으며 가지가 됩니다. 달걀을 먹으며 달걀이 되고, 과자를 먹으며 과자가 됩니다. 먹는 그대로 내 몸으로 이루어지고, 내 넋이 이루어지며, 내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 “문이 왜 닫히지 않은 걸까?” 안나가 물었습니다. “이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마티아스가 말했습니다. “응, 이제 기억나. 다시는,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안나가 말했습니다. 마티아스와 안나는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린 남매는 서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문을 아주 조용히, 닫았습니다 … 말린은 자신의 손을 조용히 나무줄기 위에 얹었습니다. 바로 그때, 생명도 없이 혼자서 연주하는 것이 라임오렌지나무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린은 죽어 있는 나무에게 자신의 영혼을 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그렇지만 라임오렌지나무 안에 내가 살아 있을 거야 ..  (34, 58쪽)


  아이들 사랑하는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만 사랑하지 못합니다. 어버이인 내 삶을 사랑할 때에 아이들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한테만 좋다 싶은 밥을 먹이지 못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은 밥을 먹을 때에 아이들 또한 좋은 밥을 먹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은 옷을 입어야 아이들 또한 좋은 옷을 입어요.


  좋은 밥이란 비싼 밥이 아닙니다. 좋은 옷이란 비싼 옷이 아닙니다. 좋은 사랑을 들여 차린 밥이 좋은 밥입니다. 좋은 꿈을 실어 좋은 손길로 보듬는 옷가지가 좋은 옷입니다.


  곧,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이 이룰 보금자리는 ‘회사와 가깝다’거나 ‘나중에 부동산이 될 만하다’거나 ‘편의시설이 가까이 있다’는 대목을 살피며 얻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삶을 누릴 만한 좋은 보금자리를 얻어야 합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에 따라 마련하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내 사랑을 살찌우거나 북돋우거나 보살필 수 있는 보금자리로 마련해야 합니다.


  즐겁게 누릴 삶이지, 돈을 벌 삶은 아니에요. 기쁘게 어깨동무할 이웃이지, 어떤 권력 관계나 잇속으로 사귀는 옆사람이 아니에요.


.. 말린이 부엌에서 부인이 건넨 미음을 먹고 있을 때, 방문이 반쯤 열려 있던 침실에서 어떤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말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듣고 있노라니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말소리는 방문을 지나 말린의 귀에 와 닿았습니다 … 그는 손이 뒤로 묶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했습니다. 그의 눈빛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고,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  (45, 127쪽)


  아이 둘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오르막을 올라가기란 참 벅찹니다. 끙끙대는 아버지는 수레에 탄 아이들한테 말합니다. 오르막 올라가기 힘드니까 뒤에서 잘 올라가라 북돋워 주렴. 아버지 말을 들은 첫째 아이는 수레에 앉은 채 신나게 노래합니다. 노래하고 또 노래합니다. 나는 아이들 노래를 받아먹으며 기운을 냅니다. 시골마을 푸른 숲과 파란 바다를 누리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누렇게 잘 익은 밀밭 앞 전깃줄에 쉰 마리 즈음 줄지어 앉은 참새를 바라봅니다. 밀밭 건너편에 잘 익은 멧딸을 바라봅니다. 멧딸 몇 알 따서 아이들한테 건넵니다. 나는 작은 알 하나만 먹습니다.


  논 옆을 달리면서 논마다 우렁차게 노래하는 개구리들 이야기를 듣습니다. 개구리들은 무논에서 서로서로 어떻게 얼크러질까요. 무논에서 살아가는 개구리는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 집에도 우리 마을에도, 또 이웃 마을에도 이웃이웃 마을에도 제비들이 날아다닙니다. 우리 자전거 앞으로도 날고, 옆으로도 날며, 위로도 납니다. 내가 이름을 알아보는 멧새가 우리 곁을 스칩니다. 내가 이름을 못 알아보는 들새가 우리 둘레에서 지저귑니다. 나는 모든 소리들을 좋게 여기며 맞아들입니다. 바람과 햇살과 흙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가 나란히 들려주는 노래를 곱게 받아들입니다.


.. 그렇지만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없습니다 … 공작의 검은 영혼 속에서 피어난 두려움이 어두운 대지에 뿌린 씨처럼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뒤덮어 버렸습니다. 그저 가난한 악사 하나가 이곳에 왔을 뿐인데 말입니다 … 하지만 망누스 왕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둠 속에서 왕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친구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왕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그 친구의 팔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97, 101, 119쪽)


  사람은 밥만 먹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햇볕도 먹고, 바람도 먹습니다. 사람은 물만 마시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물이 흐르는 길도 함께 먹습니다. 물에 서린 기운도 나란히 먹습니다.


  마늘을 먹을 때에는 마늘이 뿌리내린 흙이랑 마늘이 받아들인 햇살이랑 마늘이 늘 쐬던 바람을 함께 먹는 셈입니다. 벼 한 톨 또한 벼 한 톨을 사랑한 흙이랑 햇살이랑 바람이랑 빗물이랑 골고루 먹는 셈이에요.


  목숨이란 아름답습니다. 나는 내 삶대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삶대로 아름답습니다. 참 예쁘구나 하고 방긋 웃으며 바라본 멧딸이니까, 아이들은 빨간 멧딸을 예쁘게 따서 예쁘게 먹고 예쁜 시골 아이로 자랍니다. 나는 예쁜 아이들 예쁜 웃음짓을 바라보며 늘 같이 지내니까, 나도 예쁜 시골 어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흔들릴 때에 내가 손을 내밀어 붙잡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아이들이 손을 내밀어 붙잡습니다. 서로 믿고 서로 아낍니다.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한식구 되기에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 목청을 가다듬어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 가난한 소작농 오두막집에 다시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은 모두 닐스의 침대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닐스가 세상과 이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족들은 모두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블라인드를 위로 잡아당겨 침실로 따스한 아침 햇살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동생들은 숲에서 딴 산딸기를 닐스에게 주었습니다. 아직 설익어서 산딸기가 줄기에 조그맣게 달려 있었지만, 올해 나온 첫 산딸기였기에 동생들은 기쁜 마음으로 닐스에게 선물했습니다. 동생들은 닐스가 깨어나서 산딸기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  (135쪽)


  우리 집 처마 밑 둥지에서 드디어 새끼 제비가 고개를 내밉니다. 새끼 제비 울음소리를 때때로 듣습니다. 이제 이 새끼 제비는 날갯짓을 익히겠지요. 제 어미 제비한테서 좋은 날갯짓을 물려받겠지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이야기책 《그리운 순난앵》(열린어린이,2010)을 읽습니다. 린드그렌 님이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아이들한테 들려주려고 남긴 이야기책입니다.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살피는 여느 어버이한테 함께 들려주려고 남긴 이야기책입니다.


  아이들은 《그리운 순난앵》을 읽으며 따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아이들 어버이 또한 《그리운 순난앵》을 읽으며 따순 사랑을 나누어 먹습니다. 서로서로 새로운 사랑을 빚습니다. 다 같이 맑은 사랑을 키웁니다. 기쁨을 찾는 넋이 서립니다. 즐거움을 꿈꾸는 얼이 담깁니다. 예쁜 웃음과 아픈 눈물이 어우러지며 삶을 이룹니다. 스웨덴 할머니 순난앵마을은 아름답고, 우리 집 두 아이 동백마을도 아름답습니다. (4345.6.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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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색잉꼬 2
테츠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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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일
 [만화책 즐겨읽기 153] 데즈카 오사무, 《칠색 잉꼬 (2)》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 즐겁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에 안 즐겁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루하루 누릴 때에 사랑스럽고, 하고 싶지 않으나 밥벌이나 돈벌이라서 놓지 못한다면 안 사랑스럽습니다.


- “잠깐, 비켜 줄래, 꼬마 아가씨. 사인은 못 해 줘. 난 대역이거든.” “선생님, 제자로 삼아 주세요!” (7쪽)
- “어떻게 여길 찾았지?” “온 도시의 호텔과 여관을 다 뒤져서. 선생님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손님이 있는지 물어 봤어요.” “저기 말이지, 난 선생도 아니고 스타도 아니야. 스타를 뒤쫓아 다닐 생각이라면 헛다리를 짚은 거야. 사람 잘못 봤다고.” “선생님의 무대를 보고,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감동했어요! 전 배우가 되고 싶어요.” (9쪽)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진을 찍고, 아이들과 살아가며, 옆지기와 살림을 꾸리고, 자전거를 타는 한편, 시골에서 보금자리를 돌보고, 서재도서관을 꾸리며, 늘 풀숲과 멧자락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내 삶대로 내 하루를 느끼고, 내가 느끼는 대로 온누리를 톺아보며, 온누리를 톺아보는 결이 고스란히 내 눈길과 손길로 돌아옵니다.


  무엇보다 책으로 놓고 보자면, 나는 내가 읽고픈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어야 할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읽고픈 책이 되어야 읽습니다. 아름답다 싶은 이야기를 다루든, 놀랍다 싶은 이야기를 다루든, 내 마음속에서 어느 책 하나 읽고프다는 꿈이 피어올라야 비로소 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읽기란 ‘줄거리 읽기’가 아닌 ‘삶읽기’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받아들인 좋은 넋은 고스란히 내 삶으로 스며들어, 내 꿈과 넋과 말이 새삼스레 거듭나도록 이끌어요. 어떤 책을 읽고 싶다 할 때에는, 오늘 내 삶을 한결 아름답거나 알차거나 빛날 수 있게끔 다스리고 싶다는 뜻이에요.


  읽고 싶지 않은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쓰고 싶지 않은 글은 쓸 수 없습니다. 찍고 싶지 않은 사진은 찍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적잖은 사람들은 ‘직업’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채 돈을 벌며 집식구 먹여살린다는 뜻을 내세워 스스로 길을 잃곤 합니다. 이를테면, 직업사진가라든지 신문사 사진기자로 일하는 이들은 ‘사진을 늘 찍’지만, 스스로 가장 좋아할 만한 사진을 못 찍는 이가 너무 많습니다. 회사에서 바라는 사진, 주문한 손님이 바라는 사진, 신문사 편집장이나 사장이 바라는 사진 틀에 얽매이면서 ‘잘 팔릴 만하고 빈틈이 없으며 눈길 끌 만한 사진’으로 기울어져요. 즐겁게 찍는 사진이라거나 사진쟁이 삶을 밝히는 사진을 찍지 못해요.


  기자들이 쓰는 글이나 작가들이 쓰는 글도 이와 비슷해요. 스스로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삶이 드러나는 글이 아니라면 글이라 할 수 없어요. 내 손가락 같은 글이요, 내 발가락 같은 글이고, 내 머리카락 같은 글이에요. 내 허파와 같은 글이며, 내 염통과 같은 글이고, 내 콩팥과 같은 글입니다. 남한테 보여주거나 읽히려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내 삶을 밝히면서 빛내는 글이에요.

 

 


- “부잣집 아가씨라는 건가. 좋은 신분이군. 하지만 명배우는 돈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의사라면 돈의 힘으로 될 수 있겠지만.” (10쪽)
- “남의 흉내만으론 무엇으로도 될 수 없어. 내가 프로 배우가 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지. 나는 왕부터 거지까지 여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어떤 흉내라도 낼 수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배우라고 할 수 없어! 잉꼬나 앵무새처럼 … 흉내라도 감동은 시킬 수 있어. 하지만 너는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아.” (16∼17쪽)


  누구나 스스로 하고픈 일을 할 때에 빛납니다.


  어느 나무나 스스로 맺고픈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낼 때에 빛납니다. 뽕나무는 오디를 맺습니다. 감나무는 감을 맺습니다. 능금나무는 능금을 맺고, 살구나무는 살구를 맺어요. 저마다 스스로 가장 빛날 만하며 좋아할 만한 꽃과 열매와 씨앗입니다. 포도나무는 배를 맺지 않아요. 배나무는 복숭아를 맺지 않아요. 복숭아는 모과를 맺지 않아요.


  장미가 더 예쁘지 않습니다. 민들레가 더 곱지 않습니다. 원추리가 더 맑지 않습니다. 호박꽃이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솜다리가 더 그윽하지 않습니다. 모든 꽃은 저마다 가장 빛나는 무늬요 빛깔이며 결이고 냄새입니다. 탱자꽃은 탱자꽃으로서 가장 아름다우며 빛나요. 찔레꽃은 찔레꽃으로서 가장 어여쁘면서 맑아요. 콩꽃은 콩꽃으로서 가장 아리따우면서 향긋해요.


  사람은 숫자로 따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주민등록번호 같은 숫자로 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은행계좌 길이로 살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성적표 등수라든지 행동발달사항 점수로 매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 사랑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이제부터는 너 혼자의 힘으로 노력하는 거야. 너라면 분명 10년 후에는 대스타가 되어 있을 거야.” (28쪽)
- “자, 덤벼 보게. 알겠나, 응. 진정한 배우는 자신의 훈련을 위해 검술, 승마부터 발레까지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네.” (140쪽)


  나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좋아합니다. 지난겨울 된바람을 견디면서 봄철 개구리 노랫소리를 기다렸습니다. 마음속으로 개구리 노랫소리를 그렸습니다. 봄을 맞이해 여러 달째 보내며, 날마다 개구리 노랫소리를 마음에 담습니다. 아이 둘을 옆에 나란히 누여 재워 자장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귀로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집을 둘러싼 들판마다 거침없이 목청 높이는 개구리 노랫소리는 온 집안을 울립니다. 아이들은 아버지 자장노래에 개구리 노랫소리를 나란히 듣겠지요. 개구리 노랫소리는 아버지 자장노래를 뒷받침하는 결 고운 가락일 테지요.


  나는 들새 노랫소리를 좋아합니다. 지난가을에도 올봄에도 새벽부터 이듬날 새벽까지 쉬잖고 들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까치이든 까마귀이든 좋습니다. 참새이든 노랑할미새이든 좋습니다. 왜가리이든 해오라기이든 좋습니다. 제비도 직박구리도 동박새도 모두 좋습니다. 들새 스스로 가장 빛나는 목청을 돋우면서 들려주는 노래가 아주 좋습니다.


  나는 이 고운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을 다스려요. 나는 이 고운 소리로 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내 곁 고운 살붙이를 아끼고 싶어요. 내 목소리가 개구리와 닮다가는 또다른 개구리처럼 노랫소리 읊을 수 있기를 빕니다. 내 말소리가 들새와 닮다가는 새삼스러운 들새와 같이 노랫소리 종알거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후후, 일본은 신기한 나라군요. 증거만 없다면 나쁜 사람도 대낮에 활보하면서 살 수 있다니 말이죠.” “네, 정치가부터 재판관까지 도둑은 넘치니까요.” “우리 나라에서는 증거 같은 게 없어도 도둑은 바로 참수형이죠. 그래도, 일본은 좋은 나라예요. 누구든 자유롭고, 일본에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자유겠죠. 일본으로 유학 온 나는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가요.” “고국으로 돌아가면 결혼을 하십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말이죠, 아직 여자는 관습에 묶여서 자유가 없답니다. 좋아하는 연극도 아마 할 수 없겠죠. 이게 생에 마지막일 거예요.” (64∼65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칠색 잉꼬》(학산문화사,2011) 둘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칠색 잉꼬’는 스스로 하고 싶어 연극을 합니다. 언제나 대역 배우로 그치는 연극 일이지만, ‘칠색 잉꼬’는 어릴 적부터 ‘대역’이 될밖에 없는 삶을 스스로 굴레로 짊어졌어요. 대역을 훌훌 털고 ‘주역이나 조역이나 단역’과 같이, 무대를 함께 빛내는 자리를 찾아가지 못해요.


  어쩌면, ‘칠색 잉꼬’로서는 스스로 가장 좋아하면서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대목이 ‘대역’이기 때문에 대역을 할는지 몰라요. 주역이나 조역이나 단역으로 얼크러지기보다는, 스스로 가슴이 불타오르는 때에 대역으로 살짝 찾아들어 녹아들다가는 다시 조용히 사라지는 삶을 사랑하는지 몰라요.


- “뭐야! 모처럼 내가 일부러 왔는데 도망가는 거야? 내 기분을 좀 알아주면 좋잖아, 이 둔탱아.” (135쪽)
- “아이들의 연극은 응, 어른들의 연극하고 달라서 어둠이나 우울함은 필요가 없는 거지, 응. 그 대신 영웅이 필요해. 아이들은 응, 영웅을 동경하고 있으니까. 피터 팬은 응, 강하고 마음 착한 소년이니까 말이지.” “그렇군요.” “자네는 저 아이들을 실망시켜선 안 돼, 응.” (143쪽)

 

 


  ‘칠색 잉꼬’는 슬픈 사람일까요. 어쩌면, 이이는 슬픈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슬픔에 젖고 스스로 슬픔에 갇히는지 몰라요. 그러나, 슬픔은 기쁨과 같습니다. 기쁨은 슬픔과 같습니다. 스스로 아끼는 삶이라 한다면, 기쁨이 되든 슬픔이 되든 좋은 벗님입니다.


  아픔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괴로움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웃음을 먹거나 이야기를 먹어도 좋을 텐데, 자꾸자꾸 고된 길로 나아가고야 마는 사람이 있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스스로 길을 못 느끼거나 못 찾거나 못 알아본다 하겠지요. 어느 모로 본다면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아갈 뿐이라 하겠지요.


  데즈카 오사무 님은 만화를 그릴 수 있으면 좋다고 여긴 한삶이었습니다. 전쟁통에도 가난에도 고단한 일더미에도 늘 만화를 그릴 수 있으면 좋다고 여긴 한삶이었으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칠색 잉꼬’가 되든, 한국땅 아무개가 되든, 스스로 가장 좋다고 여기는 대로 스스로 가장 좋다고 여기는 마을에서 살림을 꾸리리라 느낍니다.


  나로서는 자동차 소리와 배기가스가 싫어 자동차한테서 가장 멀찌감치 떨어질 만한 호젓한 시골에서 살붙이들과 오순도순 어울릴 수 있습니다. 나로서는 개구리와 들새랑 예쁘게 사귈 만한 한갓진 시골에서 살붙이들과 도란도란 삶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참말 하고픈 일을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혁명을 이루고픈 이는 혁명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옳다’거나 ‘바르다’거나 ‘좋다’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가장 ‘사랑하면서 즐기고 누릴’ 만한 일을 할 때에 활짝 웃고 빙그레 웃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4345.6.2.흙.ㅎㄲㅅㄱ)

 


― 칠색 잉꼬 2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학산문화사 펴냄,2011.11.2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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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호각 창비시선 230
이시영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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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삶은 어떤 빛깔인가
[시를 노래하는 시 18] 이시영, 《은빛 호각》

 


- 책이름 : 은빛 호각
- 글 : 이시영
- 펴낸곳 : 창비 (2003.11.20.)
- 책값 : 6000원

 


  예전에 충청북도 음성 멧골집에서 혼자 살던 무렵, 자그마한 자전거를 이끌고 경상남도 하동으로 달린 적 있습니다.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었기에 서울부터 자전거를 달려 충청북도 음성 멧골집에 닿았고, 집에서 가볍게 짐을 꾸려 시골길을 내처 달렸습니다. 길그림 종이를 펼쳐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까 하고 어림했는데, 막상 먼 시골길을 구비구비 돌며 찾아가자니, 킬로미터 숫자하고는 퍽 동떨어질 만큼 오래 걸렸습니다. 자칫 하동까지 너무 늦게 닿겠구나 싶어, 늦게 닿으면 애써 자전거를 몰아 혼례잔치에 가는 보람이 없다 싶어, 저녁나절 남원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이듬날 구례까지 더 달리고서, 구례읍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하동으로 넘어갔어요. 나는 자그마한 자전거를 몰았기에 더 작게 접어 시골버스에 탔고, 시골버스는 구례읍 작은 멧골마을을 구비구비 돌았습니다.


  천천히 읍내를 벗어나 이웃 읍내로 가는 시골버스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시골버스는 오래된 길을 따라 천천히 달렸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타고 내릴 적마다 오래오래 기다린 다음 다시 천천히 달립니다. 외길이라 돌아나와야 하는 어느 멧골마을에 닿아 십 분 남짓 쉰 버스가 다시 달릴 적, 이렇게 외딴 길로 난 멧골마을이라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이 들어와서 조용히 살기에 딱 어울리겠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다만,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오르내리자면 좀 애먹겠다고 느낍니다.


.. “이형, 요즈음 내가 한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원이야, 삼만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  (최명희 씨를 생각함)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어쩌다 무슨 볼일이 생겨 순천 기차역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가, 기차를 갈아타고 서울 쪽으로 갈라치면 으레 구례역을 지납니다. 기차를 타고 구례를 지날 때에는 예전에 자전거와 시외버스로 구례를 지나던 때하고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여기 구례에도 비닐집이 꽤 많다고 느낍니다. 여기 구례도 이곳저곳에서 드나드는 찻길이 많아 여러모로 나그네나 길손이 많이 들락거리겠구나 싶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오늘날 이 나라 땅뙈기 어디라 하더라도 찻길이 아주 잘 뚫립니다. 나라에서뿐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찻길을 자꾸자꾸 새로 놓습니다. 화석에너지를 안 쓰는 자동차는 아직 제대로 굴러다니지 않는데, 화석에너지만 먹는 자동차를 끝없이 만들고, 화석에너지로 구르는 자동차 다닐 길만 끝없이 닦습니다. 자전거로 다니거나 두 다리로 오갈 호젓하며 느긋한 길은 도무지 어느 지자체에서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자전거 관광길’이나 ‘도보 여행길’을 놓는 데에는 목돈을 들이는데, 막상 시골마을 사람들이 ‘찻길 싱싱 내달리는 자동차’한테서 놓여날 만한 느긋하고 좋은 거님길을 닦는 데에는 거의 한푼도 안 들인다고 느껴요.


  따지고 보면, 이런 모습은 시골이나 도시나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도시사람 살아가는 동네에서도 자동차 다닐 길만 널따랗지, 정작 사람들 기쁘게 오갈 여느 거님길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유치원이나 학교를 오가기 힘들어요. 아이 손 잡는 어버이가 느긋하게 길을 거닐기 힘겨워요.


  요사이는 시골에도 자동차 굴리는 이가 많다지만, 허리 굽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으레 두 다리로 걷습니다. 때로 경운기를 몰고 때로 오토바이나 전동휠체어를 몬다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밑길이라 한다면 ‘걷는 길’이 되어야 하는데, 걷는 길만큼은 찬찬히 놓이지 못합니다.


.. 잠실시영아파트가 재건축으로 곧 헐린다고 한다. 베란다에 저보다 큰 장독대들을 이고 장장 삼십년을 버텨온 13평짜리 공중 시멘트 집. 언제 한번 지나면서 보니 빈민굴도 그런 빈민굴이 없었는데 싯가가 3억 7천이라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  (잠실시영아파트)


  걸을 수 없는 길이라 하면, 이러한 길이 닿는 데에서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느긋하게 걸을 만한 길이 없다면, 이러한 데에서는 사람이 살아가기 팍팍하거나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걸을 만한 들길이며 멧길이 있을 때에, 사람이 즐거이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걸을 만한 길이 호젓하고 느긋한 곳이라면, 사람이 살아가기 아름답거나 좋거나 빛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기 좋은 데가 있습니다. 오토바이 함부로 달리지 못하는 구불구불 호젓한 골목이 있는 동네는 도시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기 좋다고 느낍니다. 자동차 새된 소리에서 홀가분한 동네라면 도시에서도 이웃과 이웃이 어깨동무하기에 좋고, 아이들이 씩씩하게 뛰놀며 자라기에 좋다고 느낍니다.


  자동차가 끝없이 드나들며 새된 소리를 자꾸자꾸 들어야 한다면, 이러한 시골은 시골답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시골이라 하더라도 들새와 멧새 노래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동차 붕붕거리는 새된 소리라 할 때에는, 사람들 넋과 얼을 곱게 건사하기 힘들구나 싶어요.


.. 어렸을 적 석양녘이었다. 따스한 참새들의 알을 꼭 한 알만 얻겠다고 가만가만 새들이를 타고 올라간 여동생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처마밑에 막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콩닥거리는 참새들의 알 대신 차고 미끄러운 것이 쓰윽 고개를 내밀고 나왔다. 굵고 긴 구렁이였다 ..  (집지킴이)


  시집을 읽습니다. 집식구 먹을 밥을 마련하면서 시집을 읽습니다. 밥물 올린 냄비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국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도마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밥상을 닦는 동안 시집을 읽지 못합니다. 밥냄비 국냄비 모두 올리고 설거지 한 차례 마치고 나서 슬며시 한숨을 돌릴 무렵, 손가락에 물기가 다 말랐다 싶으면 슬그머니 시집을 읽습니다.


  이시영 님 시집 《은빛 호각》(창비,2003)을 읽습니다. 책이름으로 붙은 ‘호각’을 놓고 “호각이 뭐지?” 하고 혼잣말로 묻습니다. 호루라기인가? 서로 힘이 어슷비슷하다는 소리인가? 만주사람 뿔피리인가? 굴 껍데기인가?


  시집에 붙은 이름은 아랑곳하지 않기로 합니다. 시를 쓰는 분들이 으레 선보이는 말잔치는 들여다보지 않기로 합니다. 나는 싯말에 깃든 이야기를 읽고 싶습니다. 나는 싯말에 깃든 이야기를 읽으며 내 삶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내 둘레 이웃들이 어떤 좋은 삶을 누리며 시 하나 적바림하여 나한테 좋은 노래를 선물해 줄까 하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시영 님 시집 《은빛 호각》은 전라남도 구례와 서울특별시를 꾸준히 갈마듭니다. 먼먼 옛날, 어린 이시영 꼬마가 전남 구례에서 뛰놀거나 뒹굴던 이야기가 흐르다가는, 늙은 이시영 할아버지가 평양에도 갔다가 서울 언저리 어디에도 살다가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 통일을 염원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김정숙휴양소 건너편 비탈진 밭에서는 작은 감자알들이 땡볕 아래 탱탱히 익어가고 있었고 ..  (장외場外)


  한참 시집을 읽다가 문득 헤아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옛 시골마을 그리는 노래’를 적바림했을까 하고. 이렇게 옛 시골마을 그리는 노래를 적바림하고 싶다면, 스스로 도시를 떠나 꿈에도 그리는 좋은 시골마을로 돌아가면 될 텐데 하고.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시골을 꿈꾸며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날을 버틸 수 있을 테지만, 시골에서 어여삐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마음껏 누리며 스스로 더 환하게 빛날 수 있을 텐데 하고.


.. 봄이 오면 / 자운영 장다리 꽃피고 / 탱자꽃 바람에 흩날리는 / 그런 고향 다시는 없으리 ..  (고향 생각)


  봄이 오면 어느 시골이건 자운영 장다리 꽃핍니다. 유채 찔레 꽃핍니다. 유월로 접어든 전남 고흥 시골마을 밭자락이나 멧자락에는 바알간 들딸이나 멧딸이 흐드러집니다. 쉴새없이 따먹고 다시 따먹습니다. 찔레꽃 하얗게 눈부신 사이사이 돈나물 노랗고 자그마한 별꽃이 빛나고, 고샅길 돌울타리 누비는 마삭줄은 흰바람개비 꽃내음 물씬 퍼뜨립니다.


  이제 감자는 하얗거나 보얀 꽃망울 맺습니다. 뽕나무는 바알갛게 익는 오디를 내놓습니다. 노란 감꽃과 고욤꽃은 천천히 지면서 푸르게 푸르게 익습니다. 매화나무 열매는 차츰 굵은 알로 바뀝니다. 함박꽃 지고 후박꽃 떨어집니다. 마을마다 논물 가득 찰랑이고, 새벽부터 이듬날 새벽까지, 아침부터 이듬날 아침까지, 저녁부터 이듬날 저녁까지, 무논 개구리는 신나게 노래합니다.


.. 송아지가 볼이 미어져라 상큼한 햇짚을 넣고 씹는다 ..  (가을)


  시인 이시영 님은 시집 《은빛 호각》에서 당신 시골집 구례와 당신 살림집 서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갑니다. 사이사이 북녘땅 어딘가를 마실합니다. 무슨무슨 손님으로 북녘땅을 마실할 수 있은 듯합니다. 그러면, 이시영 님한테 ‘그리운 터’는 세 군데가 될까요. 구례, 서울, 북녘.


  이제 시집을 덮습니다. 시집을 덮고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시인 이시영 님이 지나온 나날은 어떤 빛깔이라 할 만할까요. 가을빛일까요. 봄빛일까요. 자운영빛일까요. 송아지빛일까요.


  시집을 읽는 나는 어떤 빛깔로 꾸리는 삶일까요. 내 삶빛은, 내 넋빛은, 내 몸빛은, 내 사랑빛은 어떠한 무늬와 결과 내음을 풍기며, 오늘 하루 새로우며 즐겁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시 한 줄 쓸 수 있는 사람은 삶자락 한켠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4345.6.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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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번째 사진책 - 프레임 구성의 달인 되기
곽윤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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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재주 바라는 사진이란
 [찾아 읽는 사진책 102] 곽윤섭, 《나의 두 번째 사진책》(한겨레출판,2007)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즐겁게 사진으로 담을 때에 활짝 웃습니다. 나는 다른 어느 대목도 더 살피지 않습니다. 내가 사진으로 담고 싶은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살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일구는 삶’인가를 살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즐겁게 바라보며 한마음이 되느’냐를 살펴요. 그래서, 곽윤섭 님이 빚은 《나의 두 번째 사진책》(한겨레출판,2007)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무엇을 찍으려고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22쪽).”라 나온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기를 든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을 찍으려 하는가만큼 내가 생각하거나 마음을 기울일 대목은 더 없어요.


  “중요한 것은 배경을 보는 눈이 있어야 더 좋은 사진을 위해 기다릴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34쪽).” 같은 대목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그렇지만, 그닥 내키지 않습니다. ‘뒤를 볼’ 수 있대서 ‘앞도 잘 보지’는 않거든요. 나는 ‘더 잘 찍을 사진을 바라며 기다리기’를 하지도 않아요. 기다리는 사진이 아니라, 그때그때 즐겁게 찍는 사진일 뿐이에요. 어떤 ‘그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누리는 좋은 삶을 좋아하는 사진으로 담을’ 뿐이에요.


  그래서 “나는 실수하거나 실패한 사진은 결과물로 내놓지 않기 때문에 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나의 실패를 모른다(41쪽).” 같은 대목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갸웃거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곽윤섭 님 사진에서 ‘실패하거나 잘못한 대목’을 못 알아챌까요? 빈틈이 없거나 초점이 잘 맞거나 틀이 새롭다 하더라도 ‘즐겁게 읽을 사진이 되지’는 않아요. 곽윤섭 님으로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실패한 사진이 아니라’고 여기더라도,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로서는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때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곽윤섭 님만 모르는 ‘아쉽거나 아픈 대목’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는 사진을 찍는 기계가 무엇이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1회용 사진기라도 좋고, 1000만 원짜리 사진기라도 좋습니다. “사진의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어떤 명칭으로 사진의 종류를 규정하진 못한다(89쪽).”는 대목처럼,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찍은 사진이면 좋습니다. 다큐사진이라서 더 좋거나 패션사진이라서 더 예쁘지 않아요.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담을 때에 나한테 좋고 나한테 예쁜 사진이 돼요. 곧,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름난 출사지를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201쪽).”라 말할 만합니다.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을 찍자면, 스스로 좋아할 만한 곳에서 일하고 놀고 어울리고 살아가면 돼요.


  그나저나, 즐겁게 읽고 싶은 사진책이기에 즐겁게 장만해서 읽으려 하지만,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읽으면서 자꾸자꾸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고 맙니다. 사진찍기는 손재주 놀이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는 삶찍기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더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이 아닌 ‘내가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삶’을 찍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모든 사진가들은 본능적으로 전에 못 보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사진가의 의무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사진책을 많이 접하고 뉴스사진도 찾아보면서 사진 보는 눈을 녹슬지 않게 해야 한다. 새로워야 살아남는 뉴스사진에는 신선한 시각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196쪽).” 같은 대목이 못마땅합니다. 다른 사진쟁이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왜 “본능적으로 전에 못 보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예전에 본 모습을 찾으면 안 되나요? 늘 바라보는 모습을 늘 찍으면 안 되나요? 사진은 왜 ‘새 모습 찍기’가 되어야 할까요? 더구나, ‘좋은 사진책’을 많이 읽는대서 ‘새 모습을 보는 눈을 기른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게다가, 신문이나 잡지 ‘뉴스사진’을 읽으며 ‘새 눈길’을 느낄 수 있다고 느끼기 힘들어요.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뉴스사진은 ‘새 눈길’이라기보다 ‘신문이나 잡지를 사서 읽을 사람들 눈을 확 사로잡으려 하는 사진’이라 할 만하니까요.


  “새로워야 살아남는”다는 뉴스사진이라 한다면, 이 같은 사진을 읽는 사진쟁이는 ‘살아남으려는 사진’을 읽을 뿐, ‘사랑하려는 사진’을 읽지 못합니다.

 

 

 

 

 


  나는 사랑하려는 사진을 읽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하려고 사진을 찍고, 사랑하려고 사진을 나누며, 사랑하려는 삶이 좋아 사진을 찍어요.


  곽윤섭 님은 《나의 첫 번째 사진책》에 이어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내놓습니다만, 사진책이란 무엇일까요. 사진 찍는 솜씨나 손놀림을 밝히는 줄거리를 담으면 사진책이 될까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넋으로 사진을 찍으니까, 어느 책은 사진솜씨나 사진재주를 말할 수 있겠지요. 사진강의를 하면서 사진기를 잘 다루도록 이끌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곽윤섭 님은 사진강의를 하거나 사진책을 내면서 ‘이론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진이론이란 무엇일까요. “빗자루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이대로도 충분히 좋은 사진이다(123쪽).” 하는 말마디 또한 사진이론 아닐까요. 사람들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을 찾도록 돕는 말마디가 아니라, 기계를 잘 다루면서 ‘잘 찍은’을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은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았다 해도 먼저 제외시킨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게 찍었다면 별개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초점은 맞아야 한다(42쪽).” 같은 대목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야 맙니다. 이 말마디는 곽윤섭 님 스스로 밝힌 “사진의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어떤 명칭으로 사진의 종류를 규정하진 못한다.” 같은 대목하고 아주 어긋납니다.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가 대수롭다면, 초점이 맞거나 맞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를 먼저 살펴야지, 초점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살필 수 없어요.

 

 

 

 


  삶을 사랑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2012년 5월 31일 낮 12시 12분에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 담는 사진은 바로 이때에 꼭 한 번입니다. 6월 1일에도 7월 1일에도 다시 찍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업사진을 찍는다면, 모델더러 ‘내가 마음속으로 그린 모습’을 보여주도록 수없이 바랄 수 있고, 끝없이 다시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업사진은 ‘사람들한테서 어떤 느낌을 끌어내도록 만드는 사진’이기 때문에, ‘따로 모델을 써서 그림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곽윤섭 님은 어떤 넋으로 사진강의를 열고 사진책을 내는가 궁금합니다. ‘상업 사진작가’를 키우는 사진찍기를 하지는 않겠지요. 상업사진을 하자는 강의를 열지는 않았겠지요. 사람들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는 삶을 누리도록 이끌 테지요. 이른바 ‘생활사진가’를 북돋우는 사진강의를 마련해서 사진책까지 내는 곽윤섭 님이에요. 그러면, 곽윤섭 님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의 위치가 못내 아쉽다. 그늘과 겹치는 바람에 존재의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조금 안쪽에 있었다면 밝은 바깥쪽을 배경으로 눈에 잘 들어왔을 것이다(24쪽).” 같은 말은 안 해야 옳으리라 느껴요. 이 사진을 찍은 분한테 ‘이 사진 찍으며 어떤 느낌이었나요?’ 하고 물어야 알맞으리라 느껴요. ‘이 사진 찍으며 마음이 흐뭇했나요?’ 하고 물어야지 싶어요. 아니, 이렇게 묻기 앞서, 곽윤섭 님 사진강의를 듣는 분이 찍은 사진을 바라볼 때에 ‘아, 이 사진을 찍은 이분은 어떤 마음이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 대목을 찬찬히 짚고 이야기밭을 꾸려야지 싶어요.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읽으며 슬픈 마음을 지우지 못합니다. 곽윤섭 님은 자꾸자꾸 ‘사진이론 내세우기’로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인물의 위치는 아주 좋다. 표정도 좋아서 재미있는 사진이 되었다. 그러나 왼쪽의 선이 깔끔하지 못하여 전체 완성도를 높이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17쪽).”라든지 “누군가 좋다고 했던 사진은 잘 기억하고 있으므로 다시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힐 확률이 높다. 나쁜 사진은 안 찍고 좋은(혹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사진만 찍으므로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6쪽).” 같은 말마디는 너무 부질없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왜 ‘전체 완성도’를 살펴야 할까요. ‘전체 완성도’란 무엇일까요. 또 ‘나쁜 사진’이나 ‘좋은 사진’은 무엇인가요.


  이리 살피고 저리 돌아봅니다. 사진역사는 덧없습니다. 사진문화는 뜻없습니다. 사진예술은 값없습니다. 사진은 사진이지, 역사도 문화도 예술도 아닙니다. 사진은 그예 사진이면서 삶입니다. 삶은 삶이기에, 삶을 누리면서 사진 하나 나란히 곁에 두고 즐깁니다. 사진은 사진인 까닭에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면서 내 삶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살아가는 꿈이 하나하나 사진입니다.


  손재주 바라는 사진이란 손재주일 뿐,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손재주라고 가리킬 수 없습니다. 《나의 두 번째 사진책》에서 말하는 사진이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사진’이라고 못 느끼겠습니다. 이 사진책에 나오는 사진은 온통 ‘손재주’로구나 싶습니다. 곽윤섭 님은 사진강좌를 열며 사진을 이야기한다고 밝히지만, 슬프게도 사람들한테 ‘사진사랑’이 아닌 ‘사진이론’에 빠지도록 내몰고, ‘사진삶’이 아닌 ‘사진재주’로 흐르도록 이끄는구나 싶어요.


  들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좋겠어요. 서울을 벗어나 시골 어디로든 찾아가, 자동차 불빛도 아파트 불빛도 없는 무논 앞에서 개구리 노랫소리 흐드러지게 들으면 좋겠어요. 삶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어요. 사랑을 먼저 느끼면 좋겠어요. 셔터값이나 조리개값이 부질없듯, 사진장비 값이나 사진경력은 부질없어요. 사진구도나 사진소재가 부질없듯, 사진이론이나 사진강의는 모두 부질없어요. 뜻있는 삶을 느낄 때에 뜻있는 사진을 이루어요. 멋있는 삶을 누릴 때에 멋있는 사진을 누려요. 해맑게 빛나는 웃음으로 하루하루 가꿀 때에, 해맑게 빛나는 손짓으로 한 장 두 장 사진을 빚어요. (4345.5.31.나무.ㅎㄲㅅㄱ)

 


― 나의 두 번째 사진책 (곽윤섭 글·엮음,한겨레출판 펴냄,2007.3.15./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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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꽃들아 - 최병관 선생님이 들려주는 DMZ 이야기
최병관 글.사진 / 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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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에서 꽃을 바라본다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14 : 최병관, 《울지 마, 꽃들아》(보림,2009)

 


  봄이 한창 해맑은 오월에, 전라남도 고흥에서 햇마늘이 나왔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바지런히 마늘을 캐고 엮어 실어 나릅니다. 마을에는 온통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이라, 늙은 어르신끼리 서로 품앗이를 하거나 혼자 밭뙈기에 주저앉아서 천천히 캐고 천천히 엮습니다. 경운기나 짐차에 실을 때에도 당신들 몸에 맞추어 천천히 싣습니다.


  샛장수가 시골마을로 찾아와 마늘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농협 일꾼이 시골마을을 돌며 마늘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샛장수이든 농협 일꾼이든 늘 ‘늙은 흙일꾼’이 ‘모든 일을 빠짐없이 끝마치고 갖다 주기’까지 해야, 가지고 온 마늘을 살피며 등급을 매깁니다.


  샛장수와 농협 일꾼은 가만히 앉아서 ‘흙일꾼이 흙에서 거두는 곡식이나 열매를 내다 팔아 얻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에 있는 일터에서 돈을 벌어 곡식이나 열매를 사다 먹습니다. 이웃집 마늘밭 일을 조금 거들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시골 어르신들이 도시 젊은이들한테 곧바로 마늘을 내다 팔 수 있으면 샛장수나 농협 일꾼한테보다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겠지요. 도시 젊은이들이 시골 어르신들한테서 곧바로 마늘을 장만할 수 있으면 가게나 마트에서 장만할 때보다 한결 싸게 장만할 수 있겠지요.


  마늘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뽑힙니다. 마늘이 마늘꽃을 피우면 마늘은 아마 ‘상품’으로 값어치가 없으리라 봅니다. 양파도 파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양파는 양파꽃을 피우고 파는 파꽃을 피우지만, 내다 파는 상품이 되자면, 마늘도 양파도 파도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배추도 무도 당근도 온통 꽃을 피울 수 없어요.

 

 


  450일 동안 비무장지대를 세 차례 가로질렀다고 하는 최병관 님이 찍은 사진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엮은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보림,2009)를 읽습니다. 남녘에서든 북녘에서든 비무장지대라 하는 무쇠가시울타리는 ‘아픈’ 전쟁, ‘슬픈’ 전쟁, ‘괴로운’ 전쟁, ‘나쁜’ 전쟁을 잘 보여줍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서로한테 총부리를 들이대며 언제 무슨 일이 터지면 곧바로 총알이며 미사일이며 폭탄이며 들이부으려고 하는 ‘비무장 아닌 비무장’지대 무쇠가시울타리는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어른들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남녘과 북녘은 서로 ‘비무장지대’라는 이름으로 군인이나 무기를 안 두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비무장지대’에는 남녘이든 북녘이든 온갖 무기를 갖춘 군인이 잔뜩 있습니다. 인구통계로 잡히지 않을 뿐이나, 남녘도 북녘도 수십만에 이르는 젊은 사내가 군인옷을 입고 총을 든 채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봅니다.


  여느 사람들은 비무장지대가 어떠한 곳인지 잘 모릅니다. 최병관 님은 자그마치 450일씩이나 비무장지대 안팎을 넘나들며 한겨레 아픈 생채기를 들여다보았다고 하나, 이렇게 기나긴 나날 촘촘히 넘나든다 하더라도 볼 수 없으며 담을 수 없는데다가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 매우 많아요. 이를테면, 남녘이든 북녘이든 비무장지대에 어떠한 무기를 얼마나 갖추어 서로를 노리는가 하는 대목을 사진으로 찍지 못합니다. 글로 쓰지 못합니다. 이야기로 풀어내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 나라 아이들은 이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를 넘기면서 전쟁보다 평화를 생각할 만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사랑하고 가꾸며 지킬 만한 평화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볼 만합니다.


  구태여 ‘비무장지대에 가득한 전쟁무기’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지요. 굳이 ‘비무장지대 지뢰밭에서 지뢰를 밟고 다리가 잘린 사람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지요. 지뢰를 밟고 다리가 잘린 노루를 찾아내어 사진을 찍어 보여주어야 하지는 않아요. 군인들이 내다 버리는 짬밥을 주워먹는 독수리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줄 까닭은 없어요.


  전쟁이란 무엇일까요.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죽을까요. 전쟁은 왜 일으킬까요. 왜 서로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까요. 왜 서로서로 치고박으면서 ‘사랑스러운 목숨’이 꽃피우지 못한 채 죽도록 내몰까요. 전쟁을 북돋우거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쟁에서 이긴다 하는 일이란 무엇이고, 전쟁에서 진다 할 때에는 어떻게 될까요.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남북녘 수십만 젊은이는 왜 비무장지대에서 한창 푸른 삶을 군화발과 총칼로 지새워야 할까요.

 


  최병관 님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는 무쇠가시울타리 밑에서도 곱게 꽃을 피우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들꽃이나 멧꽃은 무쇠가시울타리가 있든 지뢰가 있든 불발탄이 있든 무명용사 무덤이 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고 어디에나 꽃씨를 퍼뜨립니다. 어디에서나 줄기를 올리고 어디에서나 열매를 맺어요.


  사람 손길이 안 닿는 데에서 숲은 조용히 살아납니다. 사람 발길이 안 닿는 곳에서 숲은 천천히 살아납니다.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를 넘기면, 겹겹이 이어지는 높다란 멧줄기가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 가득합니다. 눈이 소복히 내려앉은 숲이고, 꽃과 풀이 흐드러진 숲이에요. 참말 이곳에서는 ‘꽃들이 울며 지새우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누군가 운다면, 아마 남녘땅 앳된 스무 살 군인이 울겠지요. 누군가 운다면, 아마 북녘땅 늙수그레한 마흔 살 쉰 살 군인이 울 테지요. 남녘 정부나 정치꾼은 ‘북으로 보낸 쌀’을 북녘 주민 아닌 북녘 군인이 먹는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북녘에서도 남녘에서도 ‘군대로 끌려가서 군인이 된 사람’이란 여느 사람, 곧 ‘주민’이에요. 지난날 남녘에서는 집에서 굶지 않으려고 하사관(직업군인)으로 들어간 사람이 꽤 많았어요. 오늘날 북녘에서는 집에서 굶지 않으려고 직업군인이 되려는 사람이 꽤 많으리라 느껴요. 군인이 되어 배를 곪지 않을 수 있다면, 또 직업군인으로서 달삯을 이럭저럭 받아 이녁 어버이나 살붙이한테 보낼 수 있다면, 북녘에서는 너나없이 젊고 푸른 넋들이 군인이 되려고 하리라 느껴요.


  그나저나, 남녘도 북녘도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굶지 않습니다. 남녘도 북녘도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도 따로 배움삯을 들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입시지옥은 사라지고 끔찍한 경쟁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남녘도 북녘도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끝없이 경제개발에 목을 매달지 않아도 돼요. 서로서로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남녘에서는 4대강사업이든 무슨무슨 토목사업이든 벌일 까닭이 없습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만들 뿐 아니라, 한결같이 건사하려 하니까 곳곳에 새롭게 군부대를 만들려 해요. 전쟁무기를 자꾸 만들기 때문에 전기가 모자라 발전소를 또 짓고 새로 지어요.

 

 


  참말 사람들이 웁니다. 꽃은, 풀은, 나무는, 새는, 노루는, 기러기는, 냇물은, 하늘은, 구름은, 무지개는, 빗방울은 울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웁니다. 남녘땅 사람들이 울고 북녘땅 사람들이 웁니다.


  전쟁은 북녘사람이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전쟁통에 사람을 죽인 짓은 북녘사람도 남녘사람도 똑같이 저질렀습니다. 전쟁은 ‘북녘’이 아니라 ‘정치꾼’이 일으켰고, 정치꾼 뒤에서 입김을 불어넣는 또다른 ‘검은 돈꾼’이 일으킵니다. 지구별에 평화 아닌 전쟁이 자꾸 터지는 까닭은, 사랑 어린 삶보다 돈을 홀로 거머쥐려는 ‘검은 돈꾼’이 있기 때문이에요.


  최병관 님이 아이들한테 보여주려고 엮은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는 그지없이 예쁩니다. 군인들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사진은 그지없이 예쁩니다. 군인들 모습이 나타나는 사진은 참 밉상스럽습니다. 편지 한 장 손에 쥐고 잠든 앳된 군인 모습 또한 그리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슬픈 얼굴입니다. 총칼을 들고 누군가를 적으로 삼아 ‘널 죽이겠어!’ 하는 생각에 길들어야 한다면 너무 슬퍼요.

 

 


  그렇지만, 꽃은 무쇠가시울타리도 총칼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그저 피어요. 그저 고운 내음 퍼뜨려요. 그저 고운 잎사귀 선보여요. 그저 알찬 열매 베풀어요.


  꽃들은 기다립니다. 꽃들은 쉰 해가 되든 백 해가 되든 기다립니다. 꽃들은 꽃들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사랑할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꽃들은 울지 않습니다. 꽃들은 빙그레 웃으면서 기다립니다. 꽃들은 사람들 누구나 어여쁜 꽃웃음을 지으면서 아리땁게 꽃사랑을 나눌 날을 기다립니다. 이 땅 아이들이 비무장지대 지뢰밭 아닌 너른 숲 고운 꽃밭과 풀밭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 아이들이 전쟁놀이나 총놀이나 칼놀이가 아니라 텃밭을 돌보고 흙땅에서 맨발로 뒹굴며 신나게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5.5.31.나무.ㅎㄲㅅㄱ)

 


― 울지 마, 꽃들아 (최병관 글·사진,보림 펴냄,2009.5.1./1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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