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번째 사진책 - 프레임 구성의 달인 되기
곽윤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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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재주 바라는 사진이란
 [찾아 읽는 사진책 102] 곽윤섭, 《나의 두 번째 사진책》(한겨레출판,2007)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즐겁게 사진으로 담을 때에 활짝 웃습니다. 나는 다른 어느 대목도 더 살피지 않습니다. 내가 사진으로 담고 싶은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살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일구는 삶’인가를 살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즐겁게 바라보며 한마음이 되느’냐를 살펴요. 그래서, 곽윤섭 님이 빚은 《나의 두 번째 사진책》(한겨레출판,2007)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무엇을 찍으려고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22쪽).”라 나온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기를 든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을 찍으려 하는가만큼 내가 생각하거나 마음을 기울일 대목은 더 없어요.


  “중요한 것은 배경을 보는 눈이 있어야 더 좋은 사진을 위해 기다릴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34쪽).” 같은 대목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그렇지만, 그닥 내키지 않습니다. ‘뒤를 볼’ 수 있대서 ‘앞도 잘 보지’는 않거든요. 나는 ‘더 잘 찍을 사진을 바라며 기다리기’를 하지도 않아요. 기다리는 사진이 아니라, 그때그때 즐겁게 찍는 사진일 뿐이에요. 어떤 ‘그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누리는 좋은 삶을 좋아하는 사진으로 담을’ 뿐이에요.


  그래서 “나는 실수하거나 실패한 사진은 결과물로 내놓지 않기 때문에 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나의 실패를 모른다(41쪽).” 같은 대목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갸웃거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곽윤섭 님 사진에서 ‘실패하거나 잘못한 대목’을 못 알아챌까요? 빈틈이 없거나 초점이 잘 맞거나 틀이 새롭다 하더라도 ‘즐겁게 읽을 사진이 되지’는 않아요. 곽윤섭 님으로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실패한 사진이 아니라’고 여기더라도,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로서는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때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곽윤섭 님만 모르는 ‘아쉽거나 아픈 대목’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는 사진을 찍는 기계가 무엇이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1회용 사진기라도 좋고, 1000만 원짜리 사진기라도 좋습니다. “사진의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어떤 명칭으로 사진의 종류를 규정하진 못한다(89쪽).”는 대목처럼,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찍은 사진이면 좋습니다. 다큐사진이라서 더 좋거나 패션사진이라서 더 예쁘지 않아요.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담을 때에 나한테 좋고 나한테 예쁜 사진이 돼요. 곧,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름난 출사지를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201쪽).”라 말할 만합니다.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을 찍자면, 스스로 좋아할 만한 곳에서 일하고 놀고 어울리고 살아가면 돼요.


  그나저나, 즐겁게 읽고 싶은 사진책이기에 즐겁게 장만해서 읽으려 하지만,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읽으면서 자꾸자꾸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고 맙니다. 사진찍기는 손재주 놀이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는 삶찍기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더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이 아닌 ‘내가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삶’을 찍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모든 사진가들은 본능적으로 전에 못 보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사진가의 의무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사진책을 많이 접하고 뉴스사진도 찾아보면서 사진 보는 눈을 녹슬지 않게 해야 한다. 새로워야 살아남는 뉴스사진에는 신선한 시각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196쪽).” 같은 대목이 못마땅합니다. 다른 사진쟁이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왜 “본능적으로 전에 못 보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예전에 본 모습을 찾으면 안 되나요? 늘 바라보는 모습을 늘 찍으면 안 되나요? 사진은 왜 ‘새 모습 찍기’가 되어야 할까요? 더구나, ‘좋은 사진책’을 많이 읽는대서 ‘새 모습을 보는 눈을 기른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게다가, 신문이나 잡지 ‘뉴스사진’을 읽으며 ‘새 눈길’을 느낄 수 있다고 느끼기 힘들어요.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뉴스사진은 ‘새 눈길’이라기보다 ‘신문이나 잡지를 사서 읽을 사람들 눈을 확 사로잡으려 하는 사진’이라 할 만하니까요.


  “새로워야 살아남는”다는 뉴스사진이라 한다면, 이 같은 사진을 읽는 사진쟁이는 ‘살아남으려는 사진’을 읽을 뿐, ‘사랑하려는 사진’을 읽지 못합니다.

 

 

 

 

 


  나는 사랑하려는 사진을 읽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하려고 사진을 찍고, 사랑하려고 사진을 나누며, 사랑하려는 삶이 좋아 사진을 찍어요.


  곽윤섭 님은 《나의 첫 번째 사진책》에 이어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내놓습니다만, 사진책이란 무엇일까요. 사진 찍는 솜씨나 손놀림을 밝히는 줄거리를 담으면 사진책이 될까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넋으로 사진을 찍으니까, 어느 책은 사진솜씨나 사진재주를 말할 수 있겠지요. 사진강의를 하면서 사진기를 잘 다루도록 이끌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곽윤섭 님은 사진강의를 하거나 사진책을 내면서 ‘이론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진이론이란 무엇일까요. “빗자루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이대로도 충분히 좋은 사진이다(123쪽).” 하는 말마디 또한 사진이론 아닐까요. 사람들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을 찾도록 돕는 말마디가 아니라, 기계를 잘 다루면서 ‘잘 찍은’을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은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았다 해도 먼저 제외시킨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게 찍었다면 별개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초점은 맞아야 한다(42쪽).” 같은 대목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야 맙니다. 이 말마디는 곽윤섭 님 스스로 밝힌 “사진의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어떤 명칭으로 사진의 종류를 규정하진 못한다.” 같은 대목하고 아주 어긋납니다.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가 대수롭다면, 초점이 맞거나 맞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를 먼저 살펴야지, 초점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살필 수 없어요.

 

 

 

 


  삶을 사랑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2012년 5월 31일 낮 12시 12분에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 담는 사진은 바로 이때에 꼭 한 번입니다. 6월 1일에도 7월 1일에도 다시 찍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업사진을 찍는다면, 모델더러 ‘내가 마음속으로 그린 모습’을 보여주도록 수없이 바랄 수 있고, 끝없이 다시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업사진은 ‘사람들한테서 어떤 느낌을 끌어내도록 만드는 사진’이기 때문에, ‘따로 모델을 써서 그림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곽윤섭 님은 어떤 넋으로 사진강의를 열고 사진책을 내는가 궁금합니다. ‘상업 사진작가’를 키우는 사진찍기를 하지는 않겠지요. 상업사진을 하자는 강의를 열지는 않았겠지요. 사람들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는 삶을 누리도록 이끌 테지요. 이른바 ‘생활사진가’를 북돋우는 사진강의를 마련해서 사진책까지 내는 곽윤섭 님이에요. 그러면, 곽윤섭 님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의 위치가 못내 아쉽다. 그늘과 겹치는 바람에 존재의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조금 안쪽에 있었다면 밝은 바깥쪽을 배경으로 눈에 잘 들어왔을 것이다(24쪽).” 같은 말은 안 해야 옳으리라 느껴요. 이 사진을 찍은 분한테 ‘이 사진 찍으며 어떤 느낌이었나요?’ 하고 물어야 알맞으리라 느껴요. ‘이 사진 찍으며 마음이 흐뭇했나요?’ 하고 물어야지 싶어요. 아니, 이렇게 묻기 앞서, 곽윤섭 님 사진강의를 듣는 분이 찍은 사진을 바라볼 때에 ‘아, 이 사진을 찍은 이분은 어떤 마음이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 대목을 찬찬히 짚고 이야기밭을 꾸려야지 싶어요.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읽으며 슬픈 마음을 지우지 못합니다. 곽윤섭 님은 자꾸자꾸 ‘사진이론 내세우기’로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인물의 위치는 아주 좋다. 표정도 좋아서 재미있는 사진이 되었다. 그러나 왼쪽의 선이 깔끔하지 못하여 전체 완성도를 높이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17쪽).”라든지 “누군가 좋다고 했던 사진은 잘 기억하고 있으므로 다시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힐 확률이 높다. 나쁜 사진은 안 찍고 좋은(혹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사진만 찍으므로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6쪽).” 같은 말마디는 너무 부질없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왜 ‘전체 완성도’를 살펴야 할까요. ‘전체 완성도’란 무엇일까요. 또 ‘나쁜 사진’이나 ‘좋은 사진’은 무엇인가요.


  이리 살피고 저리 돌아봅니다. 사진역사는 덧없습니다. 사진문화는 뜻없습니다. 사진예술은 값없습니다. 사진은 사진이지, 역사도 문화도 예술도 아닙니다. 사진은 그예 사진이면서 삶입니다. 삶은 삶이기에, 삶을 누리면서 사진 하나 나란히 곁에 두고 즐깁니다. 사진은 사진인 까닭에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면서 내 삶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살아가는 꿈이 하나하나 사진입니다.


  손재주 바라는 사진이란 손재주일 뿐,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손재주라고 가리킬 수 없습니다. 《나의 두 번째 사진책》에서 말하는 사진이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사진’이라고 못 느끼겠습니다. 이 사진책에 나오는 사진은 온통 ‘손재주’로구나 싶습니다. 곽윤섭 님은 사진강좌를 열며 사진을 이야기한다고 밝히지만, 슬프게도 사람들한테 ‘사진사랑’이 아닌 ‘사진이론’에 빠지도록 내몰고, ‘사진삶’이 아닌 ‘사진재주’로 흐르도록 이끄는구나 싶어요.


  들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좋겠어요. 서울을 벗어나 시골 어디로든 찾아가, 자동차 불빛도 아파트 불빛도 없는 무논 앞에서 개구리 노랫소리 흐드러지게 들으면 좋겠어요. 삶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어요. 사랑을 먼저 느끼면 좋겠어요. 셔터값이나 조리개값이 부질없듯, 사진장비 값이나 사진경력은 부질없어요. 사진구도나 사진소재가 부질없듯, 사진이론이나 사진강의는 모두 부질없어요. 뜻있는 삶을 느낄 때에 뜻있는 사진을 이루어요. 멋있는 삶을 누릴 때에 멋있는 사진을 누려요. 해맑게 빛나는 웃음으로 하루하루 가꿀 때에, 해맑게 빛나는 손짓으로 한 장 두 장 사진을 빚어요. (4345.5.31.나무.ㅎㄲㅅㄱ)

 


― 나의 두 번째 사진책 (곽윤섭 글·엮음,한겨레출판 펴냄,2007.3.15./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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