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호각 창비시선 230
이시영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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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삶은 어떤 빛깔인가
[시를 노래하는 시 18] 이시영, 《은빛 호각》

 


- 책이름 : 은빛 호각
- 글 : 이시영
- 펴낸곳 : 창비 (2003.11.20.)
- 책값 : 6000원

 


  예전에 충청북도 음성 멧골집에서 혼자 살던 무렵, 자그마한 자전거를 이끌고 경상남도 하동으로 달린 적 있습니다.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었기에 서울부터 자전거를 달려 충청북도 음성 멧골집에 닿았고, 집에서 가볍게 짐을 꾸려 시골길을 내처 달렸습니다. 길그림 종이를 펼쳐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까 하고 어림했는데, 막상 먼 시골길을 구비구비 돌며 찾아가자니, 킬로미터 숫자하고는 퍽 동떨어질 만큼 오래 걸렸습니다. 자칫 하동까지 너무 늦게 닿겠구나 싶어, 늦게 닿으면 애써 자전거를 몰아 혼례잔치에 가는 보람이 없다 싶어, 저녁나절 남원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이듬날 구례까지 더 달리고서, 구례읍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하동으로 넘어갔어요. 나는 자그마한 자전거를 몰았기에 더 작게 접어 시골버스에 탔고, 시골버스는 구례읍 작은 멧골마을을 구비구비 돌았습니다.


  천천히 읍내를 벗어나 이웃 읍내로 가는 시골버스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시골버스는 오래된 길을 따라 천천히 달렸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타고 내릴 적마다 오래오래 기다린 다음 다시 천천히 달립니다. 외길이라 돌아나와야 하는 어느 멧골마을에 닿아 십 분 남짓 쉰 버스가 다시 달릴 적, 이렇게 외딴 길로 난 멧골마을이라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이 들어와서 조용히 살기에 딱 어울리겠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다만,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오르내리자면 좀 애먹겠다고 느낍니다.


.. “이형, 요즈음 내가 한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원이야, 삼만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  (최명희 씨를 생각함)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어쩌다 무슨 볼일이 생겨 순천 기차역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가, 기차를 갈아타고 서울 쪽으로 갈라치면 으레 구례역을 지납니다. 기차를 타고 구례를 지날 때에는 예전에 자전거와 시외버스로 구례를 지나던 때하고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여기 구례에도 비닐집이 꽤 많다고 느낍니다. 여기 구례도 이곳저곳에서 드나드는 찻길이 많아 여러모로 나그네나 길손이 많이 들락거리겠구나 싶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오늘날 이 나라 땅뙈기 어디라 하더라도 찻길이 아주 잘 뚫립니다. 나라에서뿐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찻길을 자꾸자꾸 새로 놓습니다. 화석에너지를 안 쓰는 자동차는 아직 제대로 굴러다니지 않는데, 화석에너지만 먹는 자동차를 끝없이 만들고, 화석에너지로 구르는 자동차 다닐 길만 끝없이 닦습니다. 자전거로 다니거나 두 다리로 오갈 호젓하며 느긋한 길은 도무지 어느 지자체에서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자전거 관광길’이나 ‘도보 여행길’을 놓는 데에는 목돈을 들이는데, 막상 시골마을 사람들이 ‘찻길 싱싱 내달리는 자동차’한테서 놓여날 만한 느긋하고 좋은 거님길을 닦는 데에는 거의 한푼도 안 들인다고 느껴요.


  따지고 보면, 이런 모습은 시골이나 도시나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도시사람 살아가는 동네에서도 자동차 다닐 길만 널따랗지, 정작 사람들 기쁘게 오갈 여느 거님길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유치원이나 학교를 오가기 힘들어요. 아이 손 잡는 어버이가 느긋하게 길을 거닐기 힘겨워요.


  요사이는 시골에도 자동차 굴리는 이가 많다지만, 허리 굽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으레 두 다리로 걷습니다. 때로 경운기를 몰고 때로 오토바이나 전동휠체어를 몬다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밑길이라 한다면 ‘걷는 길’이 되어야 하는데, 걷는 길만큼은 찬찬히 놓이지 못합니다.


.. 잠실시영아파트가 재건축으로 곧 헐린다고 한다. 베란다에 저보다 큰 장독대들을 이고 장장 삼십년을 버텨온 13평짜리 공중 시멘트 집. 언제 한번 지나면서 보니 빈민굴도 그런 빈민굴이 없었는데 싯가가 3억 7천이라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  (잠실시영아파트)


  걸을 수 없는 길이라 하면, 이러한 길이 닿는 데에서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느긋하게 걸을 만한 길이 없다면, 이러한 데에서는 사람이 살아가기 팍팍하거나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걸을 만한 들길이며 멧길이 있을 때에, 사람이 즐거이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걸을 만한 길이 호젓하고 느긋한 곳이라면, 사람이 살아가기 아름답거나 좋거나 빛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기 좋은 데가 있습니다. 오토바이 함부로 달리지 못하는 구불구불 호젓한 골목이 있는 동네는 도시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기 좋다고 느낍니다. 자동차 새된 소리에서 홀가분한 동네라면 도시에서도 이웃과 이웃이 어깨동무하기에 좋고, 아이들이 씩씩하게 뛰놀며 자라기에 좋다고 느낍니다.


  자동차가 끝없이 드나들며 새된 소리를 자꾸자꾸 들어야 한다면, 이러한 시골은 시골답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시골이라 하더라도 들새와 멧새 노래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동차 붕붕거리는 새된 소리라 할 때에는, 사람들 넋과 얼을 곱게 건사하기 힘들구나 싶어요.


.. 어렸을 적 석양녘이었다. 따스한 참새들의 알을 꼭 한 알만 얻겠다고 가만가만 새들이를 타고 올라간 여동생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처마밑에 막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콩닥거리는 참새들의 알 대신 차고 미끄러운 것이 쓰윽 고개를 내밀고 나왔다. 굵고 긴 구렁이였다 ..  (집지킴이)


  시집을 읽습니다. 집식구 먹을 밥을 마련하면서 시집을 읽습니다. 밥물 올린 냄비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국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도마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밥상을 닦는 동안 시집을 읽지 못합니다. 밥냄비 국냄비 모두 올리고 설거지 한 차례 마치고 나서 슬며시 한숨을 돌릴 무렵, 손가락에 물기가 다 말랐다 싶으면 슬그머니 시집을 읽습니다.


  이시영 님 시집 《은빛 호각》(창비,2003)을 읽습니다. 책이름으로 붙은 ‘호각’을 놓고 “호각이 뭐지?” 하고 혼잣말로 묻습니다. 호루라기인가? 서로 힘이 어슷비슷하다는 소리인가? 만주사람 뿔피리인가? 굴 껍데기인가?


  시집에 붙은 이름은 아랑곳하지 않기로 합니다. 시를 쓰는 분들이 으레 선보이는 말잔치는 들여다보지 않기로 합니다. 나는 싯말에 깃든 이야기를 읽고 싶습니다. 나는 싯말에 깃든 이야기를 읽으며 내 삶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내 둘레 이웃들이 어떤 좋은 삶을 누리며 시 하나 적바림하여 나한테 좋은 노래를 선물해 줄까 하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시영 님 시집 《은빛 호각》은 전라남도 구례와 서울특별시를 꾸준히 갈마듭니다. 먼먼 옛날, 어린 이시영 꼬마가 전남 구례에서 뛰놀거나 뒹굴던 이야기가 흐르다가는, 늙은 이시영 할아버지가 평양에도 갔다가 서울 언저리 어디에도 살다가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 통일을 염원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김정숙휴양소 건너편 비탈진 밭에서는 작은 감자알들이 땡볕 아래 탱탱히 익어가고 있었고 ..  (장외場外)


  한참 시집을 읽다가 문득 헤아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옛 시골마을 그리는 노래’를 적바림했을까 하고. 이렇게 옛 시골마을 그리는 노래를 적바림하고 싶다면, 스스로 도시를 떠나 꿈에도 그리는 좋은 시골마을로 돌아가면 될 텐데 하고.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시골을 꿈꾸며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날을 버틸 수 있을 테지만, 시골에서 어여삐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마음껏 누리며 스스로 더 환하게 빛날 수 있을 텐데 하고.


.. 봄이 오면 / 자운영 장다리 꽃피고 / 탱자꽃 바람에 흩날리는 / 그런 고향 다시는 없으리 ..  (고향 생각)


  봄이 오면 어느 시골이건 자운영 장다리 꽃핍니다. 유채 찔레 꽃핍니다. 유월로 접어든 전남 고흥 시골마을 밭자락이나 멧자락에는 바알간 들딸이나 멧딸이 흐드러집니다. 쉴새없이 따먹고 다시 따먹습니다. 찔레꽃 하얗게 눈부신 사이사이 돈나물 노랗고 자그마한 별꽃이 빛나고, 고샅길 돌울타리 누비는 마삭줄은 흰바람개비 꽃내음 물씬 퍼뜨립니다.


  이제 감자는 하얗거나 보얀 꽃망울 맺습니다. 뽕나무는 바알갛게 익는 오디를 내놓습니다. 노란 감꽃과 고욤꽃은 천천히 지면서 푸르게 푸르게 익습니다. 매화나무 열매는 차츰 굵은 알로 바뀝니다. 함박꽃 지고 후박꽃 떨어집니다. 마을마다 논물 가득 찰랑이고, 새벽부터 이듬날 새벽까지, 아침부터 이듬날 아침까지, 저녁부터 이듬날 저녁까지, 무논 개구리는 신나게 노래합니다.


.. 송아지가 볼이 미어져라 상큼한 햇짚을 넣고 씹는다 ..  (가을)


  시인 이시영 님은 시집 《은빛 호각》에서 당신 시골집 구례와 당신 살림집 서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갑니다. 사이사이 북녘땅 어딘가를 마실합니다. 무슨무슨 손님으로 북녘땅을 마실할 수 있은 듯합니다. 그러면, 이시영 님한테 ‘그리운 터’는 세 군데가 될까요. 구례, 서울, 북녘.


  이제 시집을 덮습니다. 시집을 덮고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시인 이시영 님이 지나온 나날은 어떤 빛깔이라 할 만할까요. 가을빛일까요. 봄빛일까요. 자운영빛일까요. 송아지빛일까요.


  시집을 읽는 나는 어떤 빛깔로 꾸리는 삶일까요. 내 삶빛은, 내 넋빛은, 내 몸빛은, 내 사랑빛은 어떠한 무늬와 결과 내음을 풍기며, 오늘 하루 새로우며 즐겁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시 한 줄 쓸 수 있는 사람은 삶자락 한켠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4345.6.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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