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넋 / 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174 손빛책



  어릴 적부터 ‘헌책방’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둘레에서는 ‘고서점·중고서점’이라고 일컫더군요. 1992년부터 ‘책방마실·책방나들이’란 이름을 지어서 쓰니, 둘레에서는 ‘서점순례·책방투어’로 고쳐쓰라고 자꾸 떠밀었습니다. 2007년 즈음부터 ‘책집’이라는 낱말을 섞어쓰고, 2010년 즈음부터 ‘마을책집’이란 이름을 함께쓰다가 ‘책빛숲·책집마실·책빛마실·책숲마실·책꽃마실’ 같은 이름도 지었습니다. ‘책집·새책집·헌책집’에 ‘책숲·책마루숲·책숲집’처럼 여미어 보고요. 여기에 ‘헌책·손길책·손빛책’처럼 새삼스레 가리킬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둘레에서는 수수한 우리말 ‘헌책·새책’을 낮춤말처럼 삼더군요. 한자로 ‘중고서적·고서·신간·신서’라 해야 책맛이 난다고 여겨요. 우리말 ‘허(헌)’는 ‘허허바다’처럼 ‘하늘(가없이 넓고 크며 하나)’을 밑뜻으로 품습니다. 우리말 ‘새’는 ‘새롭다·생각·사이·삶·살림·사랑·사람’을 밑뜻으로 품습니다. 작고 수수한 낱말에 오히려 크며 깊고 너른 숨결이 깃듭니다. 헌책은 손길을 타면서 빛나기에 ‘손빛책’으로 바라볼 만합니다. 수수하게 ‘손길책’이기도 합니다. 새책이라면 ‘새책빛·사잇책’처럼 새록새록 마주할 수 있어요. 모두 책이지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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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넋 / 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173 쓸모



  우리는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르게 살기에, 어느 분은 풀을 보며 ‘김(잡초)’이라고 느껴 김매기(잡초 제거)를 해야 합니다. 어느 분은 모든 풀이 다 다른 곳에 쓰임새가 있는 줄 느껴, 풀마다 이름을 붙이면서 요모조모 알뜰하게 건사합니다. 풀책(식물도감)을 펴면 참말로 모든 풀이 어떤 쓰임새(약효)가 있는가를 밝힙니다. 둘레에 “자, 보셔요. 이 풀은 이렇게 알뜰히 쓴답니다. 그렇게 사납게 죽이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못 쓸 풀(잡초)’이란 없이, 우리가 ‘안 쓰는 풀’일 뿐인걸요.” 하고 이야기하지만, “에그, 그렇게 하면 밭이 다 망가져!” 하는 대꾸가 쏟아집니다. 배추밭이며 마늘밭을 하자니 풀을 모조리 뽑거나 죽입니다. 어쩌면 서울살이(도시생활)라는 길도 김매기 같지 싶어요. 어떤 일을 겪거나 하건 늘 배워요. 배우지 않는 날이란 없어요. 책이나 배움터에서만 배우지 않아요. 밥을 짓다가도, 아기를 안아 어르다가도, 길에서 넘어지다가도, 매캐한 바람에 콜록이다가도, 파랗게 트인 하늘을 보다가도, 문득 이 삶을 배워요. 쓸모만 찾다가는 책을 책대로 못 읽지 싶습니다. 쓸모가 아닌 기쁨을 마음에 품고서 마주할 적에 모든 다른 책마다 일렁이는 즐거운 기운을 맞아들이면서 책읽기를 삶노래로 녹여내리라 생각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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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19:04 

안녕하세요 작가님 사진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저의 부족한 이해로 작가님께 추가적인 질문을 남기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먼저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사진을 찍고 사진책을 낸다는 행위까지 이어지는 것이 어떤의미 이신지 궁금합니다. 둘째는 ... 마지막으로 ˝이제 ‘사진가 시대‘는 끝났습니다˝라는 문단 뒤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며 있어 보이는 듯한 글을 쓰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인가요?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으시다면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숲노래 빛꽃 / 숲노래 사진비평 2023.4.6.



‘누’가 ‘말’을 하는가

― 사진길에 접어든 이웃님한테



  시골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시골을 모릅니다. 시골에서 안 살면서 시골을 안다고 할 수 없겠지요? 시골에서 안 살더라도 시골을 자주 오간다면 얼핏설핏 시골빛을 느끼거나 누리면서 헤아릴 만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지만 시골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시골이라는 터전을 사랑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습니다. 또는 시골이라는 터전에서 돈·이름·힘을 거머쥐거나 돌라먹으려고 하는 뒷짓이며 검은짓이며 막짓을 일삼는 이도 시골을 모를밖에 없습니다.


  숲에서 안 살면 숲을 모르겠지요. 숲에서 살더라도 숲을 안 사랑하면 숲을 모를 테고요. 서울에서 안 살면 서울을 모릅니다. 서울에서 살더라도 서울을 안 사랑하면 서울을 모를 테고요.


  그런데, 시골이나 숲이나 서울에서 안 살더라도 시골이며 숲이며 서울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왜 ‘그곳에서 안 살아도 그곳을 알’ 수 있을까요?


  실마리는 매우 쉽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시골을 안 사랑하면 시골을 모르게 마련이듯, 시골에서 안 살더라도 시골을 사랑하면 시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숲이나 서울에서 안 살더라도 숲이며 서울을 사랑하면 숲이며 서울을 알 수 있어요.


  다만, 살지 않는 몸으로는 속속들이 알지는 않습니다. 살지 않을 적에는 ‘기운·숨결·빛·마음’으로 압니다. 몸을 깃들여서 살아갈 적에는 ‘삶·살림·사람·터전’을 알게 마련입니다.


  사진을 누가 알까요? 사진기를 쥐기에 사진을 알까요? 사진을 찍기에 사진을 알까요? 사진찍기를 서른 해나 쉰 해쯤 해왔으면 사진을 알까요? 사진을 찍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사진을 알까요? 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기에 사진을 알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사진사랑’을 하는 분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사진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여럿 있으며, 사진강의·사진강좌도 꽤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야기가 오가는 사진은 ‘사진사랑’보다는 ‘사진기술·사진예술·사진문화’와 ‘사진계 학맥·인맥’하고 얽힙니다.


  ‘기술·예술·문화’가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예술·문화’만 한다면 ‘사랑’하고 동떨어지거나 등지게 마련이니, 사진을 오래 했다지만 오히려 사진을 모르고 맙니다. 시골에서 아흔 해를 살았어도 시골을 모르는 분이 숱하고, 서울에서 여든 해를 살았어도 서울을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차근차근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모두 꿰뚫어볼 수 있고, 알아차릴 수 있으며, 삶을 지을 수 있고, 사진은 사진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글은 글대로 한껏 빛내면서 꽃피우는 길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진 가운데 ‘노래하고 춤추면서 어깨동무하는 마음’이 깃든 ‘작품’은 몇이나 될까요? ‘기술·예술·문화’를 뽐내는 사진은 흘러넘칩니다만, ‘즐겁게(노래하고 춤추며) + 사랑을 스스로 짓고 나누면서’ 꿈을 씨앗으로 심는 홀가분한 사진은 뜻밖에도 거의 모두라 할 웬만한 그림밭(갤러리·전시관)에 안 걸리더군요. 그림밭에 걸리는 사진을 보셔요. 다들 ‘작품’이나 ‘예술’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수수하게 ‘사진’이라는 이름조차 붙이려 하지 않습니다. 수수하게 ‘삶’이란 말도 붙이지 않고, ‘살림’이나 ‘사랑’이나 ‘사람’이란 말도 못 붙입니다.


  사진찍기란, 그림그리기나 글쓰기하고 똑같습니다. 그저 찰칵이(사진기)를 손에 쥔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사진찍기란, 밥짓기나 빨래하기나 바느질하고 똑같습니다. 오직 찰칵이를 손에 잡은 몸짓이 다를 뿐입니다. 사진찍기란, 걷기나 자전거타기나 버스타기하고 똑같습니다. 오로지 찰칵이 하나가 다를 뿐입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오직 사랑이라는 마음이 흐를 적에 아이를 사랑으로 품으면서 함께 보금자리를 아름답고 아늑하게 짓는 살림빛을 키웁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모든 어버이는 ‘살림꾼(살림님·살림지기)’입니다. 예부터 우리말로는 ‘살림꾼’이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바람에 갑자기 들어온 뜬금없는 ‘주부·가정주부’는 우리말 아닌 일본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보금자리를 짓고 가꾸는 ‘살림꾼’이라는 자리와 이름과 말과 몸짓을 스스로 잊거나 잃으면서, 사진찍기라는 길에서도 엉뚱한 샛길로 쉽게 빠져버리고 맙니다.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어버이는 수수하게 밥을 짓습니다. ‘집밥(가정식 백반)’이 아닙니다. 그저 ‘밥’입니다. 찰칵이를 손에 쥐어 사랑으로 눈뜨는 우리는 수수하게 찰칵 누릅니다. ‘기술·예술·문화’가 아닙니다. ‘삶·살림·사랑’입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삶·살림·사랑’을 서울빛이 아닌 숲빛으로 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찰칵이를 손에 쥐어 스스로 새롭게 무언가 이야기를 짓고픈 마음을 일으킨다면, ‘숲빛으로 푸르게, 하늘빛으로 파랗게, 삶·살림·사랑을 그리는 꿈씨앗을 한 자락 심는 열매’를 문득 하나 옮겨내어 나눌 만합니다.


  후다닥 찍든 더디게 찍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루 만에 다 찍을 수 있고, 쉰 해에 걸쳐 찍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길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실타래를 읽고서 스스로 새록새록 여미어 본다면, ‘사진이란 무엇이고, 사진이란 어떻게 하고, 사진이란 누가 누구한테 이바지하고, 사진이란 스스로 어떻게 거듭나려는 몸짓이고, 사진이란 왜 하고, 사진은 어떤 삶인가’ 하는 아주 쉬우면서 즐거운 씨앗 한 톨을 손바닥에 얹을 만합니다.


  이제는 누구나 사진을 찍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에 안 들어가도 사진을 찍습니다. 세 살 아이도 사진을 찍습니다. 여든 살 시골 할매도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나 할매는 누가 안 가르쳤어도 어찌저찌 손전화를 눌러 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동안 글밭이나 그림밭은 몇몇 예술가만 차지하는 얼거리였고, 사진밭도 몇몇 예술가끼리 나눠먹기를 하는 얼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지요. 그리고 누구나 글님이자 그림님이자 사진님인데, 기성 주류 기득권 집단은 ‘어깨동무하며 누구나 누리는 길’이 아니라, ‘그들이 거머쥔 돈·이름·힘을 안 빼앗기려는 마음’으로 더 단단히 틀어쥡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진밭은 하나도 안 발돋움합니다. 그나마 글밭은 조금 허물어졌으나 그래도 큰 출판사가 크게 거머쥔 틀은 안 바뀌었습니다.


  요새는 그야말로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내지요. 그런데 사진을 놓고 보면, ‘누구나 사진을 찍기’는 하는데 누구나 ‘사진책을 내지는 못하’고 ‘사진전시도 못합’니다. 사진은 찰칵이만 장만해서 스스로 찍어 보면 누구나 스스로 배웁니다. 그저 즐겁게 스스로 배우시기 바랍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사진계 인맥·학맥’을 얻기에는 좋습니다만, 대학교에 들어가는 젊은 분들이 하나같이 ‘윗사람(선배·교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를 못 하더군요. ‘내 빛’은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보고 사랑할 적에 가꿀 수 있습니다. 글쓰기도 그림그리기도 사진찍기도, 대학교나 외국유학으로는 못 배웁니다. 스스로 쓰고 그리고 찍기를 삶으로 녹이고 살림을 하면서 하고 사랑을 담아서 할 적에 누구나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펴고 나눕니다.


  “‘누’가 ‘말’을 하는가”를 헤아리시기를 바라요. 누구나 말을 하지 않나요? 그런데 누구나 말을 하도록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몇몇만 말할 자리일 뿐이고, 언제나 비슷비슷한 무리인 사람들끼리 말을 한다면, 그곳은 고인물조차 아닌 썩은물입니다.


  집에서 아버지 혼자만 말하거나 어머니 혼자만 말한다면, 이 집에는 사랑도 어깨동무(평화)도 없습니다. 집에서 모든 사람이 도란도란 떠들고 웃고 이야기를 할 적에 비로소 사랑이자 어깨동무입니다. ‘사진가’란 이름을 붙이려 하거나 내세우려 하는 분들만 끼리끼리 모인 곳에서 ‘누가 말을’ 하는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왜 고이다가 썩어가는지를 헤아리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인물도 썩은물도 아닌, 샘물에 냇물에 바닷물에 빗물에 골짝물이라는 숨결로 다 다르게 빛나는 즐거운 물길로 노래하고 춤추면서 나아가면 넉넉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겨우내 시든 풀줄기에 앉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비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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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3.4.5. 앓다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엊그제 ‘자리’ 말밑찾기(어원분석)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제 《새로 쓰는 삶말 꾸러미 사전》을 펴냄터로 보낼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보태면 됩니다. 하나는 ㄱㄴㄷ로 벌인 찾아보기요, 둘은 ‘곁책 꾸러미(참고도서 목록)’입니다. 어제그제에 오늘도 우리 책숲에서 곁책 꾸러미를 모으는데, 적잖이 품이 듭니다. 그동안 사서 읽기만 했을 뿐, 느낌글을 쓴다든지 벼리(목록)를 갈무리해 놓지 않기 일쑤였던 터라, 책을 하나하나 끄집어서 책자취(간기)를 옮겨적습니다. 이럭저럭 1400자락을 옮겨적었으나 갈 길이 멉니다.


  어제 하루는 몸앓이를 실컷 했습니다. 아침부터 갑자기 어지럽더니 몸살이 올라왔고, 몸살을 부여안고서 읍내 우체국을 다녀왔습니다. 몸살인 채 자전거를 달리기는 어렵거든요. 시골버스에서 노래꽃(동시)을 둘 쓰고, 우체국 앞에서 하나 씁니다. 대구에서 마을책집을 꾸리는 이웃님이 아기를 낳아 돌보십니다. 그분 집안 세 사람한테 하나씩 건네려는 노래꽃을 썼어요. 몸살을 씻어내고서 노래꽃을 쓰고 부쳐도 되지만, 어제는 굳이 ‘앓는 몸인 채 마음을 가다듬어 글결을 살리자’ 싶었어요. 몸살일 적에는 으레 드러누워 끙끙거리면 하루이틀쯤 땀을 쪽 빼고서 말짱하게 일어나는데, 몸살인 날은 셈틀을 켜서 글쓰기는 못 하지만, 붓을 쥐어 종이에 쓸 수 있더군요.


  아픈 몸으로 글을 쓴 숱한 이웃이며 어른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저는 비록 하루만 앓으면서 글을 쓸 뿐이지만, 이 하루를 고이 품자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뼈마디와 살점이 녹아들고 타들듯 끓어오르는 몸을 낱낱이 느껴 보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워 두나절 즈음(5∼6시간) 앓다가 “아, 애벌레가 나비로 몸을 바꾸려고 스스로 고치에 틀어앉아 녹고서 새로 태어날 적에 이렇겠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어릴 적부터 자주 앓고 툭하면 앓고 심심하면 앓는 몸을 건사하며 살아옵니다. 으레 앓으면서 살아왔기에 ‘앓음’이 나쁜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좋은 일이 아니지만, 무슨 뜻일까 하고 내내 곱씹었습니다. 자주 앓거나 늘 앓는 사람이란, 언제나 ‘허물벗기·날개돋이’를 하는 나날이로구나 싶습니다. 앓지 않아 본 사람은 살림을 꾸리기 어렵고, 앓지 않은 사람은 글을 쓰기 어렵구나 싶어요. 앓아 보기에 살림을 여미는 손길을 스스로 배우고, 앓고 또 앓기에 글빛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익힐 만합니다.


  작고 작지만 뜻깊게 어린이책과 삶책을 꾸준히 선보이는 ‘지양사’에서 《빙하기》라는 그림책을 곧 낸다고 합니다. 책도르리(북펀딩)를 하는군요. 기꺼이 한 손을 거듭니다. 저는 일곱째 도르리벗이 됩니다. 새로 태어날 책도, 새로 책을 여미는 펴냄터에서 그동안 선보인 책도, 새록새록 손길과 눈길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https://tumblbug.com/jiyangsa_ice_age_book


  작은 펴냄터에서는 ‘서평단 5∼10사람’쯤 모으고, 이럭저럭 큰 펴냄터에서는 ‘서평단 20∼30사람’쯤 모으고, 큰 펴냄터에서는 ‘서평단 100∼500사람’쯤 모읍니다. 서평단이란 이름으로 책을 알리는 일이 나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돌아볼 노릇 아닐까요? 큰 펴냄터에서 ‘서평단 100∼500사람’쯤 거느리면서 알리는 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더구나 큰 펴냄터는 서평단이 아니어도 ‘큰책집 일꾼’하고 ‘마을책집 지기’한테 책을 보내 줍니다. 그들은 그만큼 책을 돌리거나 뿌려도 돈이 많고 돈을 잘 벌기 때문입니다. 큰 펴냄터에서 내는 책이라고 해서 나쁠 책은 없을 터이나, 이렇게 돌리거나 뿌리는 책을 구태여 읽어야 할는지 생각하는 마음인 이웃님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책을 책으로 바라보면서 나누려는 마음이 있다면, ‘책읽기 운동’을 안 일으켜도 됩니다. 책장사는 하나도 안 나쁘되, 책장사로 기울어버린 여러 큰 펴냄터 책만 읽고 나누는 책모임을 자꾸 펴거나 연다면,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 생각씨앗이 사그라들고 마음밭이 쪼그라들지 않을까요? 서평단 없이 책을 알리고, 언론홍보 없이 책을 나누고, 덤(굿즈) 없이 책을 팔고, 이름값 없이 쓰고 엮고 펴는 길에 서는 책이 무척 많습니다. 미처 제대로 안 알려진 책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마음을 가꾸어 이 별과 보금자리와 마을과 나라를 어떻게 바꾸려는가를 헤아려 봐요. 작은 책 하나를 고르는 손길로도 이 별과 나라를 바꿀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 짓는 일에 길동무 하기

http://blog.naver.com/hbooklove/220188525158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지기(최종규)가 쓴 책을 즐거이 장만해 주셔도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길을 아름답게 도울 수 있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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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3.4.3. 젖다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우리말 ‘자리’를 언제 곰곰이 생각했는가 하고 되새기면, ‘곳·데·자리·터’가 비슷하면서 다른 낱말이라고 느끼던 무렵입니다. 처음은 아마 열 살 무렵이고, 열여덟 살 즈음 얼핏 다시 생각하다가 잊은 뒤, 스물다섯 살에 새롭게 짚어 보았고, 서른아홉 살에 가만히 가누다가 마흔여덟 살에 이르러 갈무리를 마칩니다. ‘자리’를 알려면 ‘자’를 알아야 했고, ‘자다’를 알아야 했으며, ‘잠그다·잠기다’를 알아야 했는데, 돌고돌아 ‘자주·자꾸’에 ‘잦다·젖다’를 지나 ‘잣·젓’까지 알아야 매듭을 짓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기를 살리는 밥은 ‘젖’이라는 ‘물’입니다. 따로 ‘자리’랑 ‘젖’을 놓고 보면 둘은 그저 동떨어질 뿐이지만, 말밑을 하나씩 짚으면 둘은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살’을 입고서 ‘살아’가는데, ‘사랑’이 아니고서는 아이를 못 낳습니다. 참 수수께끼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사랑은 ‘사르는’ 불꽃이지 않아요. ‘살리는’ 길일 적에 사랑이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모든 말하고 마음하고 몸짓은 ‘산들바람’처럼 ‘산뜻’할 노릇이면서 ‘생생·싱싱·시원’할 노릇인데, ‘시원’이나 ‘시골’은 ‘심다·심·힘’으로 맞물립니다. ‘심다·심’은 ‘기르다·기운·기름’하고 비슷하면서 다르지요. ‘기르다’는 ‘자라다·잠·잠기다·자리·젖’하고 비슷한 결이 있으나 다릅니다. 하나를 보아야 하나를 알 수 있되, 하나만 보아서는 하나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말은 다 다르면서 하나이고, 수수께끼이면서 실마리이자, 노래이면서 놀이입니다. 이 얼거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순이돌이(남녀)는 겉몸이 다른 하나인 숨빛인 사랑인 줄 깨달을 테고,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새로운 하늘빛(하느님)인 줄 눈뜰 만합니다. 종교·교육은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눈뜨는 길을 가로막는 굴레입니다. 굴레는 바퀴 사이에 이어서 굴리면 부드러이 굴러가는 바탕이지만, 아무렇게나 끼우면 못 굴러가게 가로막는 틀입니다. 틀은, 사랑으로 세우면 새롭게 틔우는 튼튼한 자리이되, 억지로 붙잡으면 꽉 막힌 고약한 고린내일 뿐입니다. 좋음하고 나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음하고 나쁨을 가르려 하면서 “저놈은 나빠. 이쪽이 좋아.”하고 갈라치기를 하는 모든 짓은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사랑스러운 사람인 줄 못 보도록 억누르는 고약한 우두머리 뒷짓입니다. 왜 “쉬운 말”이 모든 사람을 깨울까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쉬운 말”을 듣고 자라면서 눈을 뜨고 마음을 가꾸거든요. 아이들한테 “어려운 말”을 집어넣어 자꾸자꾸 졸업장을 들이밀려는 이들은 ‘어른’이 아닌 ‘늙은 권력자’입니다. ‘쉽다 = 수수하다 = 숲’입니다. ‘쉬운말’은 ‘숲말’이고, ‘숲말’은 ‘사람말·사랑말’입니다. 쉬운 말을 안 쓰는 이들은 스스로 사람답지 않게 갇히면서, 이웃도 사람빛을 잃고 나란히 갇힌 종(노예)으로 나뒹굴기를 바라는 괘씸한 짓일 뿐입니다. 다만, 스스로 종인 줄 잊은 채 이웃을 종살이에 가두는 짓을 하더라도 나쁜놈은 아닙니다. ‘나쁜놈’이 아닌 ‘철이 들지 않아 눈을 뜨지 않은 몸’일 뿐입니다.


ㅅㄴㄹ


*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 짓는 일에 길동무 하기

http://blog.naver.com/hbooklove/220188525158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지기(최종규)가 쓴 책을 즐거이 장만해 주셔도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길을 아름답게 도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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