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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러눕는 책읽기

 


  돌을 막 지난 둘째 아이가 마룻바닥을 뒹굴면서 논다. 아예 드러누워 논다. 서재도서관 마룻바닥은 아이들한테 좋은 쉼터이자 놀이터요 책터이고 삶터 구실까지 한다. 아직 바닥을 깨끗하게 닦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먼지가 좀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기고 뛰고 구른다. 아이들 옷은 금세 지저분해진다. 아이들 옷이며 손이며 금세 까맣게 바뀐다. 마음껏 구르며 논 다음, 신나게 뒹굴며 논 다음, 다 같이 마을 샘가로 간다. 샘가에서 모두 씻는다. 묵은 옷은 벗는다. 햇볕을 조금 쬐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고 또 논다. 놀고 놀며 다시 논다. (4345.5.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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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랑붓꽃 책읽기

 


  우리 집 마당 한쪽에서 노랑붓꽃이 곱게 핀다. 마당 한쪽에 노랑붓꽃이 있는 줄 몰랐다. 꽃이 피고서야 비로소 노랑붓꽃이로구나 하고 깨닫는다. 다른 풀도, 다른 나무도, 잎이 돋거나 꽃이 피지 않고서야 좀처럼 알아보지 못한다. 나뭇가지만 앙상히 있을 때에 어떤 나무인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 아주 조그마해서 티끌이나 흙알 같아 보이는 풀씨를 바라보며 정작 풀씨인지 아닌지 가누지 못한다.


  그러나, 꽃으로 피어나기 앞서도 꽃이요 풀이며 나무이고 목숨이다. 꽃으로 곱게 피어나기 앞서도 어여쁜 꽃이며 풀이고 나무이자 목숨이다.


  가슴속에 품은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 씨앗이다. 마음속에 안은 아리따운 꿈이 있는 목숨이다. 이제 노랑붓꽃은 한창 꽃내음 들려주다가 천천히 지겠지. 노랑붓꽃이 지고 나면, 아하 이 풀잎이 노랑붓꽃잎이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우리 집 마당뿐 아니라 길가에서도, 들판에서도, 멧자락에서도, 이와 비슷한 풀줄기를 바라보면 ‘이 풀줄기는 어떤 꽃을 피울까’ 하고 생각하겠지. (4345.5.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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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읽기
― 무지개빛과 그림자빛

 


  우리 집 어여쁜 아이를 날마다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어떤 뚜렷한 그림을 그리며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어여삐 자라나는 모습을 하루하루 적바림하겠다는 뜻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아이들 어여쁜 모습을 사진책 하나로 꾸며 주고 싶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마주하는 이 아이 빛깔이 참 좋다고 느껴 절로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나는 날마다 우리 아이들 새롭게 마주하며 새롭게 사진으로 옮기면서 내 ‘사진 손길’을 나날이 새롭게 가다듬습니다.


  엊그제 저녁, 아마 일곱 시 즈음인데,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멧등성이 너머로 사라집니다. 그래도 마을은 훤합니다. 네 식구 즐겁게 천천히 마실을 나옵니다. 찔레꽃 내음을 맡고 찔레꽃 몇 닢 따먹을 생각으로 마실을 나옵니다. 해가 넘어간 뒤라 사진기로 아이들 모습을 담을 때에 셔터값이 매우 낮습니다. 감도를 400으로 맞추어도 셔터값 1/15초 나오기 빠듯합니다. 이윽고 감도를 800으로 높이지만 셔터값은 1/8초가 됩니다. 그래도 찔레꽃 내음과 빛깔을 생각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갓난쟁이를 품에 안고 손떨림 없이 사진을 찍습니다.


  늦저녁 찔레꽃 사진을 찍다가 생각합니다. 첫째 아이가 갓난쟁이였을 적, 나는 첫째 아이를 안고 업고 하면서 인천 골목동네를 여러 시간 누볐습니다. 그때에도 아이를 한손으로 안고 다른 한손으로 사진기 쥐어 사진을 찍었어요. 나는 일찍부터 ‘한손 사진찍기’를 가다듬은 셈이었을까요. 더 거슬러 헤아립니다. 옆지기를 만나기 훨씬 앞서, 나 혼자 살림을 꾸리던 풋풋한 신문배달 젊은이였을 적, 한손으로 짐자전거를 몰고 다른 한손으로 바구니 신문을 한 장씩 꺼내어 허벅지에 탁탁 튕기어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은 다음 ‘자전거로 골목을 달리는 채’ 신문 한 장 휙 대문 위쪽 빈틈으로 던져 넣어 골목집 문간에 사뿐히 놓이도록 했습니다. 나는 이무렵부터 ‘한손 아이 안고 한손 사진기 들어 찍기’를 갈고닦은 셈이었을까요.


  무지개빛 사진으로 찍다가 까망하양 두 가지 빛깔인 그림자 사진으로 찍습니다. 퍽 오랜만에 그림자 사진을 찍는다고 느낍니다. 새삼스럽고 남다르다 느낍니다.


  그리고, 문득 떠올립니다. 다른 분들이 어떤 낱말을 쓰든 나는 그닥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학자나 전문가나 비평가께서 어떤 낱말로 사진 이야기를 펼치든 나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씁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시골마을에서 네 식구 조용히 살아가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 삶을 내가 사랑할 만한 작은 사진기로 날마다 즐거이 아로새깁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나름대로 ‘사진말’을 갈무리합니다.


  나는 ‘칼라’ 사진이라고 말하기보다 ‘무지개(빛)’ 사진이라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칼라(color)’ 또는 ‘컬러’는 영어라 할 수 없습니다. 워낙 널리 쓰는 낱말입니다. ‘color’는 한국말 아닌 외국말이지만, 이 낱말을 외국말로 느끼거나 여기는 젊은이나 어린이는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집 아이들한테 ‘컬러’이든 ‘칼라’이든 따로 가르치거나 들려주고 싶지 않아요. 우리 집 아이들이 나중에 영어를 배우며 이 낱말을 익히거나 들으면 모르되, 어버이인 나부터 아이들 앞에서 이 낱말을 읊고 싶지 않아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니, 굳이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환하게 떠오릅니다. 나는 “무지개 사진을 찍겠어!” 하고.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든,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든, 숲과 들판을 사진으로 담든,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든, 내 눈으로는 ‘무지개처럼 고운 빛깔’을 봅니다. 이리하여, 나는 으레 ‘무지개(빛)’ 사진을 찍어요.


  엊그제 모처럼 까망과 하양이 어우러지는 사진을 찍으며 새롭게 생각합니다. ‘무지개(빛)’ 사진과 나란히 서는 ‘까망하양’ 사진이라 말할 수 있는데, ‘까망하양’이란 ‘그림자(빛)’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햇볕을 받건 형광등을 받건, 사람이든 제비이든 박쥐이든 옷장이든 치마이든 모두 ‘똑같은 빛깔 그림자’입니다. 이른바 ‘흑백(黑白)’이라 일컫는 사진은 ‘그림자빛’을 찍는 셈이라 할 만해요.


  그림자빛은 까망이거나 하양이지 않습니다. 같은 까망이라도 그림자 자리마다 짙기가 다릅니다. 어느 곳은 더 짙고 어느 곳은 더 옅습니다. 같은 하양이라도 그림자 자리마다 더 밝거나 더 어둡습니다.


  깊은 밤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가 그림책 읽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며시 무지개빛 사진을 찍습니다. 환한 낮 개구지게 뛰놀다가 글씨 쓰기를 익히려고 방바닥에 엎드린 아이가 연필을 놀리는 모습을 말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그림자빛 사진을 찍습니다. 참 좋은 하루를 날마다 기쁘게 누립니다. 사진은 나한테 늘 고마우면서 예쁜 삶벗입니다. (4345.5.24.나무.ㅎㄲㅅㄱ)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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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밭 3

 


  마을 할머니들이 ‘새내끼(새끼)’로 마늘을 엮는다. 처음에는 나한테 쇠끈으로 묶도록 이야기하셨는데, 이제 마늘을 크기에 따라 다 고르고 나서 당신들도 마늘엮기를 해야 하다 보니, 손가락과 손바닥이 아플 뿐더러 어깨가 결리는 쇠끈은 안 쓰고 새내끼를 쓴다. 나는 아직 새내끼 쓸 줄 모른다. 그러나 새내끼 엮는 손길을 천천히 떠올리며 나 스스로 한두 차례 해 보면 이내 익숙할 수 있으리라 본다.


  새내끼란 예부터 벼를 거두고 난 짚으로 꼬았다. 마늘엮기를 하자면 먼저 짚을 꼬아 새내끼를 삼아야 한다. 새내끼를 잔뜩 삼아 놓고서 이 새내끼를 알맞게 끊어 마늘을 엮는 셈이다. 시골 흙사람은 짚으로 삼은 신을 신었고, 바나 멜빵이나 질빵도 짚으로 엮어 마련했다.


  쇠끈으로 마늘을 엮으며 생각한다. 쇠끈으로 엮은 마늘을 짐차에 실으며 생각한다. 쇠끈은 아주 세게 조여 준다. 그러나, 쇠끈은 마늘줄기를 짓눌러 갈라지거나 끊어지게 한다. 새내끼도 무척 세게 조여 주지만, 새내끼는 마늘줄기를 갈라지거나 끊어지게 하지는 않는다.


  시골사람이 마늘을 장만해서 마늘을 먹는다면, 마늘줄기나 마늘껍질은 흙으로 돌아간다. 도시사람이 마늘을 장만해서 마늘을 먹는다면, 마늘줄기나 마늘껍질은 ‘음식물쓰레기’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짚신은 다 닳으면 밭이나 논에 거름 되어 돌아가고, 바나 멜빵이나 질빵 또한 다 닳으면 밭이랑 논으로 거름 되어 돌아간다.


  쇠끈은 어디로 가야 할까. 비닐봉지는 어디로 가야 하나. 플라스틱과 화학제품은 어디로 가야 하지. (4345.5.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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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밭 2

 


  땡볕을 고스란히 쬐며 마늘밭에서 일한다. 마늘밭에는 햇볕을 가릴 데가 없다. 논이든 밭이든 볕이 잘 들도록 마련하는 만큼 그늘 지는 자리가 없다. 밭둑 한켠에 잎사귀 우거지는 나무 한 그루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하지만, 잎사귀 우거지는 나무 한 그루 있으면 옆 밭이나 논에 그늘을 드리우겠지.


  한 조각이라도 더 논이나 밭으로 삼으려고 애쓴 끝에 나무그늘 없는 논둑과 밭둑이 되었는지 모른다. 먼먼 옛날에는 논둑이나 밭둑에 으레 나무가 줄을 짓고, 논일이나 밭일을 하는 틈틈이 나무그늘에 앉아 시원스레 부는 바람을 맞으며 땀을 훔쳤을는지 모른다.


  전쟁도 부역도 세금도 없이, 작은 마을 작은 살림집 조용하면서 따사로이 살아갔을 지난날을 돌이킨다. 흙에 깃들며 흙을 먹고 흙을 만지는 사람들한테 얄딱구리한 ‘병’이 생길 까닭이 없다. 따지고 보면, 한겨레 말마디에 ‘병(病)’은 없다. 이 낱말은 중국에서 건너왔고, 한자를 쓰는 임금님이나 권력자와 부자한테만 쓰일 뿐이었다. 흙사람은 때때로 ‘앓이’가 있었고 ‘아프’곤 했다. 정부가 서고 세금이 생기며 전쟁과 부역을 자꾸 일으키니, 수수하고 투박한 흙사람은 ‘일이 고된 나머지’ 앓고 아파야 했다.


  쑥과 마늘을 백 날 동안 먹은 곰은 사람이 되었다 했다. 쑥이며 마늘은 한겨레 삶에서 얼마나 오래된 먹을거리일까. 시골 어른들은 쑥을 그냥 쑥이라 일컫지 않고 ‘약쑥’이라 일컫는다. 그러고 보면, 비료나 항생제나 풀약을 안 쓰고, 나아가 비닐까지 안 쓰며 거두는 마늘이라 한다면 참말 ‘약마늘’이리라 생각한다. 먼먼 옛날, 나라도 정부도 권력자도 부자도 없이, 작은 마을 작은 살림집으로 이루어졌을 흙터에서는 미움도 생채기도 아픔도 전쟁도 없이, 온통 사랑과 꿈과 믿음과 어여쁜 노랫소리 가득했으리라 느낀다. 마늘밭에서 뒹굴던 내 발바닥이 이 흙밭에 서린 옛이야기 한 자락 들려준다. (4345.5.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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