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문학을 짓는 사람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문학이 태어납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문학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앞서, 노래와 춤이 늘 우리한테 있습니다. 날마다 기쁘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삶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노래와 춤을 바탕으로 삶을 깊게 들여다보거나 생각합니다.
노래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은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노래 없는 일이란 즐거움이 없는 일이요, 톱니바퀴처럼 얽매인 나날입니다. 춤추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은 삶을 넓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춤 없는 일이란 재미가 없는 일이요, 남한테 종이 되어 짓눌리는 나날입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도, 풀을 벨 적에도, 밥을 지을 적에도, 옷을 기울 적에도, 놀이를 할 적에도, 동무와 길을 나설 적에도, 잠을 잘 적에도, 젖을 물릴 적에도, 가을걷이를 할 적에도, 콩을 털 적에도, 방아를 찧거나 베틀을 밟을 적에도, 우리는 늘 노래와 춤을 함께 누렸습니다. 노래와 춤이 있기에 웃음과 이야기가 있고, 웃음과 이야기가 있기에 노래와 춤이 있습니다. 둘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둘은 외따로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웃지 않고 일만 해서 돈만 벌려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노래와 춤이 없이 교과서 지식만 머릿속에 집어넣어 시험점수를 높이려고 하는 학교교육만 도사립니다. 즐거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 ‘감정노동’이라고 하듯이, 억지로 짓는 웃음으로 억척스럽거나 악쓰면서 돈을 벌어야 겨우 살림을 잇는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이런 모습을 그대로 담는 문학이 나와요. 웃음도 노래도 없는 문학이 태어나고, 이야기도 춤도 없는 문학이 자꾸 나옵니다. 어른문학뿐 아니라 어린이문학도 이와 같습니다.
‘해와 달’ 이야기이든, ‘할미꽃’ 이야기이든, ‘풀개구리’ 이야기이든, 이런 이야기에는 눈물만 서리지 않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삭여서 새로운 웃음과 이야기로 피우려고 북돋우는 사랑이 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원수와 권정생 문학이 아픔과 슬픔을 웃음과 이야기로 삭여서 들려주는 어린이문학이요, 서양에서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나 셀마 라게릴뢰프 문학이 아픔과 슬픔을 웃음꽃과 이야기꽃으로 다시 길어올리는 어린이문학입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헤아리면서 짓는 문학은 우리한테 나 스스로와 이웃을 더욱 곰곰이 살피도록 이끕니다. 어른문학이나 어린이문학을 짓는 사람은 바로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사람이요, 사랑과 꿈으로 삶을 짓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론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학문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과학으로는 문학을 짓지 못할 뿐 아니라, 삶도 못 짓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과 꿈으로 문학을 지을 뿐 아니라, 삶을 짓고, 생각과 숨결을 짓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