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한 권은 언제까지 읽히는가
한때 백만 권이 팔리는 소설책이나 시집이 있습니다. 한때 수많은 독자나 평론가를 거느리면서 사랑받는 문학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책이나 시집 가운데 백 해나 이백 해를 거뜬히 읽히는 작품은 얼마나 될까 하고 손을 꼽아 보면, 몇 가지를 들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설책이나 시집은 사회 흐름과 맞물리면서 읽힌다고 느낍니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문학과 달리 사회 흐름과 거의 맞물리지 않습니다. 백 해 넘게 사랑받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사회 흐름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바로 ‘사랑’을 생각하고, ‘꿈’을 생각하며, ‘삶’을 생각합니다. 사랑과 꿈과 삶을 이야기로 엮어서 들려주려는 그림책이요 동화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새로 나오는 퍽 많은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생활 이야기’라는 이름을 빌어, 이를테면 ‘생활동화’ 같은 이름을 빌어 사회 흐름을 좇기 일쑤입니다. 이를테면 지하철 이야기나 버스 이야기를 다룬다든지, 학교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부부싸움과 이혼 때문에 아픈 아이들 이야기를 다룬다든지, 학교폭력이라든지 숱한 사회 흐름과 맞물리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이때마다 ‘생활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여요.
무엇이 삶일까요? 싸움과 다툼이 삶일까요? 입시지옥과 따돌림과 폭력이 삶일까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하루가 삶이 아닌지요?
생활동화 같은 작품이 어느 한때 잘 팔리거나 읽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한때에 읽힐는지 모르나, 스무 해를 잇기 어렵고, 서른 해나 마흔 해는 이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흐름은 스무 해가 아닌 열 해 만에 달라지기도 하고, 다섯 해 만에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회 흐름은 한 해 만에 달라지기도 하고, 다달이 달라지거나 날마다 달라질 수 있어요. 이런 흐름을 좇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이라면 ‘유행을 좇아 장삿속을 살피는 작품’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읽히는 소설책이나 시집은 사회 흐름을 좇거나 건드리지 않습니다. 조지 오웰 같은 사람이 쓴 작품은 언뜻 보기에 사회 흐름을 좇거나 건드린다고 여길는지 모르지만, 외려 이분 작품은 사회 흐름하고 동떨어집니다. 삶이 어디에서 흐르는가를 살피려고 밑바닥을 돌아보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꿈으로 지어서 그립니다. 삶과 꿈과 사랑이 내내 흐르는 글을 썼기에 조지 오웰 같은 분들 작품은 두고두고 읽힙니다.
사회 흐름을 좇는다고 해서 나쁜 작품이 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사회 흐름을 좇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회 흐름을 좇는 작품에서는 삶이나 사랑이나 꿈을 찾기 어려우니, 이러한 작품으로는 아이들과 삶이나 사랑이나 꿈을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뿐입니다.
아이들은 ‘사회성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회성을 길러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야 하고, 둘레 다른 어른한테서도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교육을 받을’ 아이들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아이들입니다. ‘점수따기 시험지옥에 휩쓸릴’ 아이들이 아니라 ‘꿈을 지어서 삶을 가꿀’ 아이들입니다. 그러니, 먼 옛날부터 아이들한테 오직 삶·사랑·꿈 세 가지만으로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줍니다. 오래도록 사랑받는 그림책과 동화책은 언제나 삶·사랑·꿈 세 가지만 이야기로 엮어서 보여줍니다. 4348.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