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티모시 그린의 이상한 삶
피터 헤지스 감독, 제니퍼 가너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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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그린의 이상한 삶

The Odd Life of Timothy Green, 2012



  내가 두 손을 드는 바람에 나는 내 뜻을 못 이룹니다. 네가 두 손을 들면 너는 네 뜻을 못 이루지요. 그리고, 내가 두 손을 들지 않으면, 나 스스로 그만두지 않으면, 내가 기꺼이 씩씩하게 나아가려 하면, 나는 늘 내 뜻을 아름답게 이룹니다. 네가 두 손을 안 들 수 있으면, 네가 스스로 그만두려 하지 않으면, 네가 기꺼이 튼튼하고 의젓하게 거듭나려 하면, 너는 언제나 네 뜻을 사랑스레 이루고요.


  사랑을 받으며 태어나는 아이는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아이는 사랑을 베풀면서 꿈을 키웁니다. 사랑을 못 받으며 태어나는 아이는 사랑을 못 받으며 살밖에 없는데, 사랑을 못 받으며 살던 아이는 앞으로 어른이 되는 동안 사랑을 베풀거나 꿈을 키울 수 있을까요?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웃한테 사랑을 베풀지 못하거나 스스로 꿈을 못 키우지 않을까요?


  오늘날 이 지구별을 가만히 돌아보면, 이웃한테 사랑을 못 베풀거나 안 베푸는 사람을 꽤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둘레에서도, 또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서도, 따스한 사랑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구나 싶은 사람이 으레 나타납니다. 이들은 ‘잘못된 생각을 푼는 바보스럽거나 나쁜 사람’일까요, 아니면 ‘여태 따스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던 탓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못 키운 사람’일까요?


  흙에서 태어난 아이 ‘티모시’가 있습니다. 티모시라는 아이는 ‘몸으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두 어버이’가 ‘마음으로 낳은 숨결’입니다. ‘그린 씨 부부’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병원 진단을 받아요. 그러나 그린 씨 부부는 꿈을 접지 않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고, 꿈을 접을 수 없다고 외칩니다. 이러면서 쪽종이에다가 두 사람 꿈을 하나씩 적어요. 맨 먼저 ‘사랑’을 그립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태어날 아이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이밖에 숱한 꿈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축구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는다는 꿈까지 그려요. 다만, ‘꿈 그리기’는 여기에서 그칩니다. 두 사람이 낳으려고 하는 아이가 오래오래 이녁 곁에서 아름답게 살면서 새로운 아이를 낳고 언제나 기쁨으로 튼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나아가지는 못 합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꿈을 그렸어요. 그리고 그 꿈을 연필상자에 담아서 앞마당에 묻지요.


  영화 《티모시 그린의 이상한 삶(The Odd Life of Timothy Green)》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께끼 같은 ‘티모시 그린’을 보여주고, 알쏭달쏭한 아이 ‘티모시 그린’하고 함께한 나날을 보여주며, 삶은 언제나 오직 사랑으로만 즐겁고 아름다이 가꿀 수 있다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오직 사랑으로 꿈을 심기에 아이가 태어날 수 있고, 두 어버이가 언제나 사랑으로 꿈을 북돋우려 하기에 아이가 자랄 수 있어요.


  혼인잔치를 하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스무 살이 지나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꿈을 꾸며 사랑을 빚을 줄 알기에 어른이 됩니다. 언제나 새롭게 사랑하는 마음결로 거듭나기에 어른이 됩니다.


  나무가 햇볕을 바라듯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햇볕을 쬐어요. 나무가 빗물을 반기듯이 온몸으로 빗물을 맞아요. 나무가 가지를 뻗어 그늘을 베풀듯이 내 곁에 있는 이웃한테 싱그럽고 시원한 그늘을 나누어 주어요. 나무가 온 가지에 꽃을 곱게 피워 향긋한 내음을 나누어 주듯이, 또 나무는 꽃이 지고 나서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모두한테 베풀듯이, 나와 너와 우리 모두한테 꽃이랑 열매 같은 사랑이랑 꿈을 서로 나누어 보아요.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는 우리 가슴에 있습니다. 수수께끼를 여는 열쇠는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서 꿈이라는 열매를 맺어요. 이웃하고 어개동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하루라면, 이 노래는 머잖아 웃음꽃으로 피어나서 바람에 살풋 실려 온누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져 줍니다. 4348.11.18.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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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 한국어 더빙 수록
크리스 벅 외 감독, 크리스틴 벨 외 목소리 / 월트디즈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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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라 (겨울왕국)

Frozen, 2013



  아이들은 놀고 싶다. 아이라면 놀고픈 마음이 무럭무럭 자란다. 놀지 않고 책만 들여다보거나 공부만 해야 한다면, 아이로서 아이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셈이다. 책도 읽을 만하고 공부도 할 만하지만, 놀이가 없는 책이나 공부란 사랑과 꿈이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나라(겨울왕국/Frozen)〉에 나오는 두 아이, 엘사와 안나도 놀고 싶다. 그런데 두 아이는 어느 날부터 놀지 못한다. 끝없이 샘솟는 기운으로 자꾸자꾸 더 새롭게 놀고 싶은 안나가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


  안나는 왜 다쳤을까? 안나로서는 다친다는 생각이 없다. 그래서 눈을 감고 달릴 수 있고, 앞을 안 보면서 달릴 수 있다. 이와 달리 엘사는 마음속에 늘 걱정이 있다. 엘사가 손을 뻗을 때마다 얼음이나 눈이 쏟아져나오는데 이를 ‘억눌러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자칫 제 동생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걱정이 언제나 마음속에서 흐르기 때문에 그만 제 동생이 다친다.


  엘사와 안나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엇을 할까? 두 어버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님인 터라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할 겨를이 없다. 두 아이는 언제나 둘이 놀아야 하고, 다른 심부름꾼이 밥을 지어 주고 옷을 지어 준다. 어버이가 있어도 어버이 자리를 따스히 보듬지 못하는 터라, 두 아이로서는 둘이 가장 믿고 기댈 수 있는 사이일 수밖에 없는 삶이다.


  다친 안나를 고쳐 주는 할아버지 트롤은 엘사한테 ‘얼음손’을 달래거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할아버지 트롤은 ‘능력 조절’을 말할 뿐, 다른 대목을 더 말해 주지 못한다. 이는 엘사와 안나네 아버지와 어머니도 매한가지이다. 엘사를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 ‘얼음손은 저주’라고 여긴다.


  얼음손인 엘사가 ‘저주’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씨앗이라고 한다면, 엘사를 낳은 어버이도 저주일까? 엘사는 그저 엘사이고, 안나는 그저 안나이다. 어릴 적에 함께 뛰놀며 기쁨을 누리던 엘사한테서 기쁨을 빼앗고 만 어버이는 엘사가 가슴속에 키울 ‘사랑’을 한 번도 가르치지 못했고, 보여주지 못했으며, 알려주지 못했다. 안나도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배우거나 보거나 듣지 못했다. 다만, 안나는 어릴 적에 제 언니하고 놀면서 누린 ‘기쁜 사랑’이 가슴속에 있다.


  두 공주님이 이끄는 나라는 “겨울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두 공주님은 겨울나라를 알고 배웠을 뿐, 여름나라라든지 봄나라는 하나도 모른다. 가을나라는 알까?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네 철이 있어서 한 해를 이루듯, 삶도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찬찬히 흐르는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삶인 줄 알기까지 두 아이는 두 아이 나름대로 가시밭길을 걷는다. 먼저 언니 엘사는 “let it go”를 외친다. 이 말대로 언니 엘사는 가야 한다. 가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 가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가도록 하거나 가야 할까. 바로 사랑이 있는 삶이다. 동생 안나는 “open door”하고 “first time in forever”를 외친다. 동생 안나로서는 늘 “닫힌 문”만 보았고, 아무것도 새로운 삶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동생 안나는 “열린 문”을 이루는 꿈을 키우고, “새롭게 처음 겪는 기쁨”을 누리려는 꿈을 함께 북돋우고 싶다.


  이리하여, 동생 안나는 언니 엘사한테서 ‘무시무시해 보이는 얼음손’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고, 어릴 적 그랬듯이 아무 걱정이 없다. 더군다나 처음 보는 이 새로운 모습과 몸짓에 기뻐한다. 언니하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기만 해도 새로우면서 기쁘다. 마음속에 새로움이란 터럭만큼도 키우지 못하고 ‘두려움을 눌러야 한다’는 생각만 어버이한테서 물려받고 만 언니 엘사는 두려움에 떨면서 혼자 동떨어져서 홀로 새 나라를 지으며 비로소 웃었다. 다만, 한몸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 안나하고 떨어져야 하기에 이 웃음을 나누지 못한다.


  바람과 하나가 되고, 바로 여기에 있으면서, 언제나 이곳에서 바람처럼 날아오를 수 있는 마음이기를 바라는 언니 엘사는 제 마음속에 늘 사랑이 있는 줄 나중에 처음으로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사랑이 ‘얼어붙은 동생 안나’를 깨운다. 동생 안나는 온몸이 얼어붙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저와 언니 사이에 맺는 기쁜 사랑이 하나로 모여서 곱게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고, 이 바람대로 언니는 새로운 길을 걷는 눈을 떠서, 둘은 이제 한집에서 한마음으로 웃는 삶을 펼친다.


  영화 〈겨울나라〉에 흐르는 이야기는 예쁘다. 다만, 이 예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다 보니 어설프거나 바보스러운 사람이 함께 나오고, 줄거리도 이모저모 엉성하게 꿰어맞출 수밖에 없구나 싶다. 그러나, 삶을 따지고 보면, 사랑을 슬기롭거나 참되게 깨닫기까지 참말 거의 모두로구나 싶은 사람들이 어설프거나 바보스러운 길을 구태여 가시밭길로 걸어가곤 한다. ‘여름을 누리고 싶은 꿈’을 키운 눈사람 아이가 이 영화에 안 나왔다면, 이 영화는 아주 재미없었으리라 느낀다. 꿈을 키우다가 꿈을 이룬 눈사람 아이가 〈겨울나라〉를 이쁘장하게 잘 살려 주었다. 4348.11.1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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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그랜딘
믹 잭슨 감독, 데이빗 스트래던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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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그랜딘
Temple Grandin, 2010


  삶을 사랑하고 꿈을 노래하자, 같은 말을 늘 되새긴다. 이러한 말을 책상맡이며 집안 곳곳에 붙인다. 다만, 글로 써서 붙이지 않는다. 그림으로 그려서 붙인다.

  사람한테는 마음을 나타내는 길이 여러 가지 있다. 맨 먼저 마음이 있다. 사람은 맨 처음에는 그저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 이윽고 눈을 뜨면서 눈빛으로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 이 다음에는 손짓이랑 몸짓이랑 낯빛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이러고서 한참 뒤에 입을 열어 말을 지은 뒤, 말로 마음을 나누었다.

  말로 마음을 나눌 수 있던 때부터 노래를 지었다. 노래에는 가락만 흐르는 노래가 있고, 말을 얹은 노래가 있다. 이즈음, 말이 노래로 거듭나면서 손짓이랑 몸짓은 춤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림이 태어난다. 손놀림으로 어떤 모습이나 무늬나 결을 나타내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곧 글을 짓는다. 그림을 더 간추려서 나타내려고 하면서 글이 나왔다. 이리하여, 온누리 여러 나라와 여러 겨레 사람들을 살피면, 글을 모르고 책을 읽은 적이 없으면서도 마음을 넉넉히 나누는 이웃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굳이 글을 쓰거나 배우거나 알아야 하지 않는다. ‘말’을 알면 되고, ‘그림’을 보면 된다. 글은 언제나 그림을 간추려서 담는 이야기요, 글은 늘 말을 고스란히 옮기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글에 앞서 말과 그림을 알아야 한다. 말과 그림을 모르고서야 글을 알 수 없다. 책이나 종이에 찍힌 ‘간추린 기호’만 잘 읽을 줄 안다고 해서 ‘말이나 그림’을 잘 헤아릴 수 없고, ‘간추린 기호일 뿐인 글’을 제법 읽거나 많이 읽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마음을 알려면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내 마음을 너한테 보여주고, 네 마음을 내 마음으로 담을 때에 비로소 마음을 안다.

  처음부터 다시 얘기하자면, 모든 기호는, 이를테면 글이나 그림이나 말은, 또 춤이나 노래는, 또 손짓이나 몸짓이나 낯빛은, 언제나 마음을 나타내려고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삶이란 마음으로 짓는 하루요, 삶은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이다.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은 무엇을 짚거나 보여줄까? 영화에만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1947년에 태어나 오늘날에도 꾸준하게 제 발걸음을 씩씩하게 내딛는 템플 그랜딘이라는 분은 무엇을 보여주거나 어떤 마음을 나타내려 하는가? 바로, 언제나, 사랑이다. 소와 마음을 나눌 줄 안다는 얘기는 무엇을 뜻할까? 소가 잡혀서 죽어 고기가 된다고 하더라도, 소우리에서 소가 소다운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우리한테 어떤 얘기를 들려주려 하는가?

  템플 그랜딘 님은 우리더러 소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소고기를 먹고 싶으면 먹되, 소를 어떻게 키우는지 소우리(축산 농장)에 가서 지켜보라고 말한다. 밥 한 그릇을 먹을 적에, 밥 한 그릇이 어떻게 태어나서 밥상에 놓이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왜 알아보라고 할까? 삶을 이루는 바탕은 바로 사랑이고, 이 사랑을 마음에 담을 수 있을 때에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노래를 부르는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자폐증이 아닌 사람’이 보기에 템플 그랜딘 님은 ‘자폐증’일 테지만, ‘자폐증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이 보기에 ‘자폐증이라는 이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소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폐증 아닌 사람’한테는 어떤 ‘질병 이름’을 붙여 주면 좋을까?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못 듣는 사람한테는,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못 알아채는 사람한테는, 꽃과 풀이 읊는 노래를 못 듣는 사람한테는, 흙과 냇물과 골짜기가 외치는 소리를 못 알아보는 사람한테는, 참말 ‘어떤 질병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할까? 4348.11.10.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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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어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제이든 스미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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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지구 (애프터 어스)

After Earth, 2013



  2013년을 사는 사람으로서 3072년을 생각할 수 있을까? 2015년을 사는 사람이라면 3074년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앞으로 한두 해쯤 뒤가 아닌 천 해쯤 뒤를 생각할 수 있을까? 오늘날 과학기술 물질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돋움한다고 하는데, 백 해나 오백 해나 천 해쯤 뒤에는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지을까? 천 해쯤 뒤에도 바보스러운 전쟁이나 따돌림 따위가 그대로 있을까? 천 해쯤 뒤에도 멍청한 입시지옥이나 졸업장 따위가 고스란히 있을까? 천 해쯤 뒤에도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쳇바퀴를 돈다든지, 정치 우두머리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뒤흔들려는 짓을 안 멈추고 할까?


  영화 〈다음 지구(애프터 어스 After Earth)〉를 본다. ‘천 해를 어떻게 사느냐’라든지 ‘천 해 뒤를 어떻게 아느냐’ 따위를 묻지 않고 영화를 본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영화를 본다.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는 멍청한 별이 된 지구를 그리지 않고 영화를 본다. 사람이 빼곡하다가 사람 그림자를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한 별이 된 지구는 더 생각하지 않으면서 영화를 본다.


  이 지구는 왜 지구일까? 사람이 살기에 지구일까? 사람만 살기에 지구일까? 사람이 안 살아도 지구는 지구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살지 않는 지구하고 사람이 사는 지구는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사람이 빼곡하게 살던 지구에서 사람이 모조리 죽어서 사라져야 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이 대목을 모를 만한 ‘현대 문명인’은 없으리라. 지구에서 오직 사람만 살겠다면서 다른 이웃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짓을 하니까 사람조차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풀 한 포기를 함부로 뽑고, 벌레 한 마리를 함부로 밟으며, 냇물이나 멧자락을 함부로 파헤치기 때문에 지구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앞날이 다가온다.


  파리 한 마리가 무엇을 할까. 지렁이 한 마리가 무엇을 할까. 파리가 사라지거나 지렁이가 없는 지구에서 사람은 며칠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개미가 사라지거나 나비나 참새가 없는 지구라면 이런 곳에서 사람은 며칠이나 살아남을 만할까.


  영화 〈다음 지구〉에 나오는 아이는 스스로 두려움이 없다고 외치지만, 아직 스스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 한 어린 숨결이다. 왜 그런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난 두렵지 않아!” 하고 외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아직 가득하기에 “난 두렵지 않아!” 하고 외치고 만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같은 생각을 한다.


  영화 〈다음 지구〉에 나오는 아이는 어떻게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이 영화에 나오는 아이는 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야 했을까? 괴물을 물리친 까닭은 마음속에 ‘두려움’이나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나 ‘내가 사랑할 삶은 무엇인가’ 같은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반 즈음 되는 영화는 바로 이 대목을 우리한테 들려주려고 한다. 지구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구를 살릴 생각’이 아니라 ‘오늘 내가 사는 이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가꾸면서 기쁘게 웃을 꿈’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면 된다. 4348.10.24.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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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카페 UE (무삭제 확장판) - 아웃케이스 없음
퍼시 애들론 감독, 마리안느 제게 브레히트 외 출연 / 에이나인미디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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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까페

Out Of Rosenheim, Bagdad Cafe, 1987



  네 식구가 함께 볼 만한 영화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리면서 〈바그다드 카페〉를 본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열다섯 살부터’ 볼 수 있다는 딱지가 붙는다. 알쏭달쏭하다. 왜? 영화를 보니 할배 그림쟁이가 아줌마를 그림으로 그릴 적에 젖가슴이 나오기도 하고, 처음에 아줌마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모습에서 젖가슴이 나오기도 한다. 이 때문인가? 아무튼 나는 이 딱지를 못 본 척하기로 하면서 여덟 살 다섯 살 두 아이하고 나란히 이 영화를 본다.


  로젠하임을 떠나 바그다드 아닌 미국 ‘바그다드 카페’에 똑 떨어진 아줌마는 가야 할 곳이 없으며 갈 곳도 없다. 그러나, 아줌마는 뚜벅뚜벅 걷는다. 다른 신도 없이 뾰족구두 한 켤레뿐이지만 이 구두로 그야말로 씩씩하게 걷는다. 아줌마를 사막과 같은 곳에 내버린 채 자동차를 몬 아저씨는 어떤 마음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렇지만, 사람은 성이 나면 그야말로 바보가 된다. 성이 나는 바람에 스스로 사람다움을 잃고 바보짓을 한다.


  〈바그다드 카페〉에서 모든 일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아줌마도 늘 성이 난 마음이요 몸이다. 늘 성을 부리면서 살아야 하니, 성을 내고 난 뒤에 눈물을 흘리고, 성을 내고 나니 기운이 없어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늘 똑같은 성풀이랑 괴로움이랑 눈물이 되풀이된다. 남이 풀어 줄 수 없는 실타래인데 어디부터 어떻게 꼬였는가를 모르는 채 늘 바보짓을 하고야 만다.


  땅은 드넓지만 사람들이 머물 자리는 너무 좁다. 할 일은 많다지만 정작 아무도 어떤 일부터 손에 잡아야 하는지 모른다. 알뜰한 살림살이인지 아니면 쓰레기인지조차 살피지 않으면서 그저 쌓는다. 버려야 하는지 건사해야 하는지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그저 내팽개친다. 이러한 자리에 독일 아줌마가 들어온다. 독일 아줌마로서는 삶도 죽음도 아닌 하루이지만, 아니 하루하루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나날이지만, 문득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줄 알아차린다. 삶은 성을 내기만 해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줄 느낀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찾고 즐기면서 살자는 생각을 천천히 피운다. 그래, 그렇지. 마치 꽃을 피우듯이 생각을 피운다. 모든 꽃이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 스스로 햇볕과 바람과 빗물과 흙을 먹으면서 깨어나듯이, 독일 아줌마는 스스로 꽃이 되어 찬찬히 깨어난다. 그리고 이 독일 아줌마가 스스로 꽃이 되어 피어날 적에 이 독일 아줌마 둘레에 있는 사람들도 꽃내음을 함께 맡으면서 천천히, 그야말로 모두들 천천히, 그렇지만 고운 꽃내음을 풍기는 새로운 숨결로 거듭난다.


  웃으려 하기에 웃는다. 노래하려 하기에 노래한다. 아주 쉽다. 울려고 하니 울고, 성을 내려고 하니 성을 낸다. 자,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을 하면 될까? 4348.10.14.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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