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주피터 어센딩
라나 워쇼스키 외 감독, 채닝 테이텀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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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날다 (주피터 어센딩)

Jupiter Ascending, 2015



  ‘별을 나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르는 영화 〈주피터 어센딩〉을 본다. 열두 살부터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열두 살 어린이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어느 만큼 생각하면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실마리를 얻을 만할까. 스물네 삶 젊은이나 마흔여덟 살 어른은 이 영화를 보면서 저마다 생각과 슬기와 셈과 철을 얼마나 곱게 가다듬을 만할까.


  《외계인 인터뷰》라는 책이 있고, 이 책을 놓고 제법 긴 느낌글을 쓴 적이 있다(http://blog.naver.com/hbooklove/220107844847). 《외계인 인터뷰》라는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쓸 적에 ‘새마을운동’과 ‘제도권학교’를 퍽 길게 이야기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채 바보스러운 굴레에 갇히도록 하는 얼거리를 따지지 않고서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 한 사람을 나무라거나 우러른다고 하더라도, 이쪽이나 저쪽 모두 ‘새마을운동’과 ‘제도권학교’ 울타리에서 맴돌 뿐이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똑같이 시멘트를 사랑하고, 대학교에 목을 맨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시골에서 살려고 하지 않으며, 도시를 아름답고 푸른 숲으로 가꾸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대통령 한 사람을 나무라든 우러르든,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사랑스레 짓는 길을 바라보려고 하는 하루를 여는 사람이 퍽 드물다고 느낀다. 왜 그러할까?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사랑스레 삶을 짓는 사람은 대통령을 바라보지 않는다. 삶짓기를 하는 사람은 신문도 방송도 책도 안 본다. 삶짓기를 하는 사람은 대학교도 제도권학교도 졸업장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삶짓기를 하는 사람은 바람을 읽고 흙을 읽으며 나무를 읽는다. 삶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은 별을 읽고 온누리를 읽는다. 삶을 사랑스레 지으려는 사람은, 서로 마음으로 꿈을 읽는다.


  영화 〈별을 날다(주피터 어센딩)〉에서 지구가 어떤 별인가 하는 대목을 참으로 똑똑히 보여준다. 지구는 ‘노예 별’이다. 다만, 스스로 노예인 줄 모르는 노예로 가득한 별이다. 지구는 틀림없이 ‘노예 별’인데, 온누리(은하계)에서 아주 구석진 곳에 있는 별일 뿐 아니라, 온누리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 별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가? 지구라는 별은 대단히 작으면서도, ‘대단히 작은 것 하나’에서 모든 것이 비롯하기 때문이다. 씨앗 한 톨이 우람한 나무가 되듯이, 대단히 자그마한 지구별 하나가 온누리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그러니, 아무리 무시무시한 힘을 뽐내는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사람 하나’가 이 무시무시한 힘과 울타리를 깨부술 수 있다. ‘따스한 숨결이 흐르는 사랑이라는 마음’이라면, 오직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노예인 모습을 떨쳐내고는, 온누리를 뒤흔들 기운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눈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보기’는 하지만,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 제대로 보려는 생각조차 못한다. 도깨비나 도깨비불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마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맨눈으로 ‘옵스’를 보거나 ‘차크라’를 보거나 ‘밴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여느 때에는 머리도 생각도 제대로 열지 않은 탓에 코앞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못 알아보는 사람이니, 사람은 그저 노예에 머문다. 그렇지만, 스스로 머리를 불태워서 불바람을 온몸에 일으키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슬기로운 숨결이 바로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은 별을 날아야 한다. 별을 날지 못한다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노예(종)가 된다. 생각이 없는데다가 별을 날지 않으려는 사람은, 영화 〈주피터 어센딩〉에 나오듯이 ‘다른 외계사람’이 수만 해를 살도록 도와주는 ‘물(생명수)’이 될 뿐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노예인 사람이 ‘다른 외계사람이 수만 해를 살도록 돕는 물’이 된다. 이 기운을 알아차리고 제대로 보아야 한다. 〈주피터 어센딩〉은 〈매트릭스〉 다음을 노래하는 영화이다. 〈매트릭스〉는 ‘나’를 돌아보도록 하는 영화라면, 〈주피터 어센딩〉은 ‘너’를 바라보도록 하는 영화이다. 4348.5.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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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워터 호스
제이 러셀 감독, 에밀리 왓슨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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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호스
The Water Horse : Legend Of The Deep, 2007


  ‘켈트’라는 삶을 이루는 사람들은 ‘워터호스’라고 하는 ‘물님’ 또는 ‘바닷님’을 보기 몹시 힘들다. 그렇지만, 켈트 겨레는 워터호스라고 하는 님(물님·바닷님)을 거룩하게 모시면서 고이 여긴다. 늘 바다를 옆에 끼면서 삶을 잇는 사람들은 바다를 너른 품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한국에서 한겨레라고 하는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은 ‘미르’라고 하는 물님이나 하느님을 보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한겨레는 예부터 미르라고 하는 님을 거룩하게 받들면서 고이 여긴다. 다만, 오늘날 같은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미르를 그리려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도깨비라든지 지킴이를 살피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느낀다.

  워터호스를 본 사람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서로 말을 섞기 힘들다. ‘괴물’이 아닌 ‘물님’을 본 사람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서로 마음이 다르기 마련이다. 가만히 보면, 눈부시게 쏟아지는 밤별을 본 사람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여러모로 다르다. 짙푸른 풀내음이 가득한 숲바람을 쐬는 사람하고 쐰 적 없는 사람도 여러모로 다르다.

  전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랑, 전쟁터에서 장교나 지휘관 노릇을 하면서 노닥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둘은 또 얼마나 다를까. 전쟁터에서 목숨을 거의 잃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하고, 전쟁영웅이 되려는 바보짓을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둘은 또 얼마나 다르겠는가.

  군대나 전쟁무기가 있기 때문에 평화롭지 않다. 이쪽 나라도 저쪽 나라도 모두 군대나 전쟁무기가 아니라 ‘사랑’하고 ‘꿈’이 있어야 평화롭다. 나라를 지키는 힘은 사랑하고 꿈이다. 총이나 칼이나 탱크가 나라를 지켜 주지 않는다. 총이나 칼이나 탱크는 서로 윽박지르는 멍청한 몸짓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서로 동무나 이웃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내가 너한테 총을 겨누는데, 네가 나랑 동무가 될까? 네가 나한테 칼을 휘두르는데, 내가 너랑 이웃이 될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이다. 아무렴, 그렇다. ‘사람’과 ‘워터호스’는 어떻게 서로 동무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마음으로 아끼고 생각으로 그리면서 함께 짓는 사랑을 헤아릴 때에 두 넋은 비로소 동무나 이웃이 된다.

  영화 〈워터호스〉를 보면 합성화면이라든지 그래픽이 이모저모 어설프기는 하다. 아무래도 이런 대목을 조금 더 살피지 못해서 아쉽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첨단장비로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어야 하지는 않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영화이다. 이야기가 없는 책은 책이 아니요, 이야기가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워터호스〉에서는 전쟁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멍텅구리와 같은 짓인가를 넌지시 보여주면서, 두 넋(사람과 워터호스라는 님)이 동무로 지내려면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를 차분히 알려준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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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 [할인행사]
캐롤 발라드 감독, 캠벨 스코트 외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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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Duma, 2005



  아이는 무엇을 배울 때에 즐겁게 살아갈까.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무엇을 보고 배우면서 사랑을 삭일 적에 아름다운 숨결이 될까. 나는 오늘 어른으로 살고, 지난날에 아이였다. 오늘 아이인 숨결은 머잖아 어른이 된다. 곧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날 테고, 곧 새로운 어른들이 나타날 테지. 이들은 저마다 어떤 넋과 숨결과 목숨으로 이 땅에서 삶을 지을 때에 사랑스럽다고 할 만할까?

  영화 〈듀마〉는 그저 영화일 수 있지만, 그저 영화라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고 들과 숲을 이웃으로 삼는 아이한테는 제도권학교가 덧없다. 도시에서 제도권학교를 다니면서 온갖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여서 일자리를 얻는 아이한테는 시골과 들과 숲은 뜻이 없다.

  무늬범(표범)은 어떤 짐승인가? 숲짐승이다. 어떤 숲짐승인가? 스스럼없고 홀가분하게 삶을 가꾸려는 숲짐승이다. 그러니, 영화 〈듀마〉에 나오는 ‘젠’과 ‘듀마’는 서로 동무가 될 수 있다. ‘젠’이라는 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시골일과 삶일을 안다. 이와 달리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학교에는 다니면서 공부는 잘할는지 모르나, 시골일도 삶일도 모른다. 게다가 도시 아이들은 듀마라고 하는 무늬범을 그저 무서워하기만 한다.

  영화에 나오는 아이 ‘젠’은 어릴 적부터 무늬범을 한식구로 삼아서 함께 살았으니 무서워하지 않는다고도 하겠으나,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왜 두려움이 있어야 하는가? 왜 숲이나 들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왜 삶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우리는 저마다 즐겁게 삶을 짓는다. 우리는 스스로 기쁘게 사랑을 노래한다. 나는 영화 〈듀마〉를 보면서 바로 이 대목을 읽는다. 그래서 나 혼자서도 이 영화를 기쁘게 보고, 여덟 살과 다섯 살 두 아이와 함께 차근차근 함께 본다. 얼마나 아름다운 영화인가.

  삶은 객관도 주관도 아니다. 삶은 교육도 훈육도 아니다. 삶은 정석도 비주류도 아니다. 삶은 오로지 삶이다. 삶은 사랑으로 빚는 아름다운 하루이다. 하늘은 파랗고 들은 푸르다가 누렇다. 숲은 언제나 푸르고, 모든 목숨은 뜨거운 피로 끓으면서 따스하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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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마니 대원 애니메이션 아트북 20
조앤 G. 로빈슨 지음, 선우 옮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 대원키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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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가 있던 자리 (추억의 마니)

思い出のマ-ニ-, When Marnie Was There, 2014



  ‘안나’라는 아이와 ‘마니’라는 아이가 나오는 만화영화를 본다. 두 아이는 여느 이름이 아니다. 영어로 붙인 이름이라고 할까. 가만히 보면, 안나도 마니도 눈알이 파랗다. 안나는 까만 기운이 도는 파랑이라면, 안나는 맑게 파랗다. 안나는 머리카락이 밤빛이나 흙빛이라면, 마니는 머리카락이 샛노랗다.


  둘은 어떤 사이일까. 둘은 어떤 삶을 지냈을까. 둘한테는 언제나 가시밭길인 삶일까. 둘은 기쁨도 즐거움도 없이 늘 괴롭거나 고단한 하루를 누려야 했을까.


  안나는 마니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고, 마니는 안나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내 둘은 누가 누구를 부럽게 여길 까닭이 없이 스스로 삶을 새롭게 일구면 되는 줄 알아차린다. 서로서로 아끼고 기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어디에서나 언제나 스스로 가슴속으로 사랑을 지필 수 있는 줄 깨닫는다.


  여느 자리에서는 웃음도 보이지 않고 눈물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오직 둘이 있는 동안에는 함께 웃고 함께 운다.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둘 사이에만 맺는 따사로운 믿음과 꿈과 이야기가 흐른다.


  마니가 있던 자리는 바로 안나가 있던 자리이다. 마니가 생각하는 꿈은 바로 안나가 생각하는 꿈이다. 마니가 바라는 사랑은 바로 안나가 바라는 사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있다. 두 사람은 활짝 열어젖힌 마음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다. 마음을 닫으면 못 만나지만, 마음을 열기에 만난다.


  안나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웃음을 짓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낫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는 할머니 숨결을 이어받은 새로운 사랑이다. 그리고, 마니도, 아마 먼 옛날에 마니를 낳은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그러니까 마니한테 할머니가 되는 분한테서 사랑스러운 숨결을 이어받은 바람과 같은 넋이리라.


  바람이 한삶을 거쳐 이 다음 삶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꽃이 한살이를 거쳐 이 다음 한살이에서 새롭게 자란다. 사람이 한사랑을 거쳐 이 다음 사랑에서 새롭게 무르익으면서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나는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았을까. 우리 집 아이들은 내 어버이(아이들한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을까.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앞으로 낳을 새로운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 숨결이 될까. 푸르게 우거지는 숲과, 파랗게 빛나는 못물과 하늘, 여기에 두 아이 맑은 눈망울이 파랗게 눈부신 모습을 가만히 헤아린다.


  그나저나, 일본에서는 이 만화영화에 〈思い出のマ-ニ-〉라는 이름을 붙였고, 영어로는 〈When Marnie Was There〉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국에서는 〈추억의 마니〉로 적는데, 〈마니가 있던 자리〉로 옮겨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니를 생각할 때”나 “마니를 생각하며”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안나는 마니를 생각할 때에 마니를 만난다. 안나 스스로 마니를 생각하지 않으면 마니를 만나지 못한다. 한편, 영어로 옮긴 이름을 마음에 그리니 “마니가 그곳에 있던 때”라는 이름도 떠오른다. 한자말 ‘추억(追憶)’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을 뜻한다. 그나저나 ‘추억의 마니’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추억 어린 마니’나 ‘추억에 남은 마니’처럼 고쳐써야 맞다. 말뜻을 살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다. 한국말로 제대로 옮겨야지. 일본말 ‘の’는 ‘-의’로 적는대서 번역이 되지 않는다. 4348.4.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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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Song Of The Sea (바다의 노래)(한글무자막)(Blu-ray)
Universal Studios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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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노래 (바다의 노래)

Song of the Sea, 2014



  바닷가에 서면 오직 ‘바닷노래’만 흐른다. 바닷물은 끝없이 물결치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잠재운다. 드넓은 바다가 함께 일으키는 파란 노래를 들려준다. 들에 서면 오직 들노래만 흐른다. 들풀은 가없이 한들거리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녹인다. 푸르게 퍼지는 들녘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푸른 노래를 베푼다. 멧골에서는 멧노래를 듣는다. 시골에서는 시골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도시노래를 듣는다.


  도시노래는 무엇일까? 도시에서 어우러지는 모든 소리가 터뜨리는 노래이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공장과 자동차와 온갖 기계가 들려주는 노래가 가장 클 테지. 이 모든 노래가 노래 같지 않다고 여겨서 귀를 막는 사람도 막을 테고.


  노래는 어디에나 있다. 지구별 어디에나 노래가 있다. 더 나은 노래나 멋진 노래는 없다. 덜떨어지거나 나쁜 노래는 없다. 그저 ‘노래를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노래일 뿐이다.


  만화영화 〈바닷노래(Song of the Sea)〉는 아일랜드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한국에도 찾아왔다. 언제나 바다와 함께 삶을 짓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노래가 고이 흐르는 만화영화이다. 줄거리를 살짝 살피면, ‘셀키’라고 하는 ‘바다님’은 뭍사람과 함께 살면서 아이를 둘 낳고는 바다로 돌아간다. 셀키가 낳은 아이 가운데 큰아이는 여느 뭍사람하고 같으나, 작은아이는 여느 뭍사람하고 사뭇 다르다. 사람 피도 흐르지만 셀키 피도 흐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바닷내음이 그리워서 뭍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 말을 안 한다. 이 아이는 노래를 부르면서 살고 싶지만, 도무지 노래를 터뜨리지 못한다.


  셀키하고 마음을 섞은 등대지기는 셀키가 바다로 떠난 뒤 왜 ‘뭍에 남은 두 아이’는 바라보지 못하면서 술만 마실까. 셀키가 바다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둘이 사랑으로 맺은 새로운 두 아이가 있는데, 왜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까. 곰곰이 돌아보면, 이 사회에서 아이를 낳는 수많은 여느 어버이도 만화영화 등대지기하고 비슷한 모습이다. 아이들을 낳아서 학교와 학원에 보내기는 하지만, 막상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겨를이 없이 하루를 보내기 일쑤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보더라도 중학교 문턱만 들어서면 얼굴 보기도 어렵고,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이제부터 얼굴 아닌 목소리 듣기조차 어렵다.


  삶은 어떻게 해서 삶이 되겠는가. 사랑은 어떻게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겠는가. 마냥 그리워해서는 삶도 사랑도 되지 않는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스스로 웃고 노래할 때에 삶도 되고 사랑도 된다. 셀키가 낳은 아이가 ‘어머니를 따라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겠다’고 말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뭍이든 바다이든 똑같은 지구인데, ‘여기’는 참말 어디인가? 작은아이가 말하는 ‘여기’를 등대지기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을까? 오빠인 큰아이도 이제 동생이 말하는 ‘여기’를 따사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귀를 기울이면 바닷노래를 언제 어디에서나 듣는다. 귀를 기울이면 들노래와 멧노래와 숲노래뿐 아니라, 하늘노래와 바람노래와 꽃노래도 언제 어디에서나 듣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서로 부르는 사랑노래와 삶노래를 우리가 스스로 터뜨리면서 서로 따사롭게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 4348.4.1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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