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ドラえもん「新·のび太の宇宙開拓史」アニメ版 (てんとう蟲コミックスアニメ版) (コミック)
후지코 F. 후지오 / 小學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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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라에몽 :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

ドラえもん―新のび太の宇宙開拓史, 2009



  아이들은 만화를 보면서 자란다. 오늘날 아이들은 만화를 보면서 자란다. 옛날에는 만화가 따로 없었으니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를 볼 일이 없었으나, 문화나 문명이나 예술이나 책이라고 하는 것이 발돋움하면서 만화가 함께 태어났고, 이무렵부터 아이들한테는 둘도 없이 반가운 동무로 만화가 곁에 있다. 만화는 언제부터 아이들한테 살가운 동무가 되었을까? 아무래도 도시가 생기면서 ‘아이가 뛰놀 자리’를 어른한테 자꾸 빼앗길 뿐 아니라, 마음껏 하늘을 가르지 못하고 냇물을 마시지 못하는 몸으로도 꿈을 키우려는 뜻이 만화에 고이 깃들리라 느낀다. 왜 그런가 하면, 만화가 이 땅이나 이웃나라에 아직 없던 때에는, 모든 아이들이 숲에서 뛰노는 숲아이였고, 모든 아이들이 어버이와 함께 시골살이를 누리는 시골아이였다. 숲을 이루는 시골에서 하늘과 냇물과 흙과 나무와 풀과 꽃과 벌레와 짐승과 새를 마주하면서 푸르고 파란 마음으로 살았으니, 이러한 하루는 언제나 ‘만화와 같’고 ‘영화와 같’다고 할 만하다.


  해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하나씩 태어나는 만화영화로 ‘극장판 도라에몽’이 있다. 이 가운데 2009년에 나온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ドラえもん―新のび太の宇宙開拓史)〉를 보면,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우주 문’ 이야기가 흐른다. 때와 곳을 가로지르는 우주 문이란 무엇인가. 때와 곳은 왜 가로지르는가. 온누리에는 지구별 말고 어떤 별이 더 있고, 다른 별에는 어떤 삶을 짓는 어떤 사람이 이웃으로 있을까. 아름답게 발돋움한 문명은 어떤 모습이요, 온누리를 휩쓸면서 바보스러운 길을 걸어 이웃을 이웃 아닌 종으로 부리려는 사람은 또 어떤 짓을 할까. 지구사람 아닌 별사람도 지구에서 하듯이 바보스러운 짓을 하고, 지구사람 아닌 별사람도 지구에서와 같이 사랑스러운 삶을 지을까.


  때와 곳을 가로지르는 ‘우주 문’은 문짝 모습을 할 수 있지만, 아무런 모습을 안 할 수 있다. 어떤 모습이든 대수롭지 않다. 어린이가 보는 만화영화이기에 한결 쉽게 느끼면서 생각하도록 ‘어디로든 문’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구나 싶은데, 맑은 넋으로 착하게 삶을 지으려 하는 다른 별 사람들 꿈이 잘 녹아드는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라고 느낀다.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를 보면, 진구(노비타)는 이슬이(시즈카)한테 거의 기대지 않고 따로 매달리지 않는다. 이 만화영화에서 진구는 지구별 아닌 다른 새로운 별에서 ‘나다움’과 ‘기쁨’을 누린다. 누군가 저(진구)를 바라거나 기다리는 다른 새로운 별이 그립고 반가우면서 이끌린다. 지구별에서는 늘 퉁퉁이(자이언)한테 얻어맞지만, 다른 새로운 별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놀라운 힘을 길어올려 이웃과 동무를 돕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 누구한테나 놀라운 힘이 있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제대로 느낄 수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놀랍고 새롭게 멋진 힘을 쓴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지 않으면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도 못 쓴다. 장난감 총을 아주 잘 쏘는 진구이지만, 두려움에 떨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마음을 오롯이 모으면 진구도 ‘못 하는 일이 없는’ 아이로 거듭난다. 이슬이는 이런 진구를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랑스러운 아이일 테지. 그래서 이슬이는 언제나 진구와 퉁퉁이·비실이 사이를 따사롭게 이어 준다.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에서 진구가 지구별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새로운 별에 남는다면, 이리하여 다른 새로운 별에 남아서 그곳 우주선을 새롭게 고쳐서 ‘차원 넘나드는 여행’을 해서 지구별로 돌아온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엮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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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に花 (單行本)
太田 蘭三 / 角川書店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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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이 영화는 디브이디가 없구나. 참 아쉽구나...

..

시니바나
死に花, Shinibana, 2004


  그루터기에 꽃이 핀다.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뎅겅 베고 나서 그루터기만 남지만, 이 그루터기에 꽃이 핀다. 몸통이 모두 잘렸어도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줄기가 하나 오르고, 새로운 줄기에서는 새로운 잎이 돋으며, 새로운 움이 트니, 그루터기에서도 꽃이 핀다.

  모든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줄기가 오르지는 않는다. 몸통이 뎅겅 잘린 뒤 그만 슬픔에 잠겨 죽거나 깊이 잠드는 그루터기가 있고, 몸통이 뎅겅 잘린 뒤에도 얼마든지 새 줄기를 올려서 새롭게 자라려는 그루터기가 있다.

  영화 〈그루터기꽃(시니바나死に花)〉를 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잔뜩 나오는 영화를 본다. 참말 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이가 많다. 이 영화를 찍을 무렵만 하더라도 거의 다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이러한 영화를 찍었을까. 이 영화는 어떤 숨결을 속삭이려고 우리한테 찾아올까.

  겉보기로는 으리으리하다는 ‘양로원(실버타운)’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하루하루 기쁜 삶일까? 으리으리하니까 기쁠까? 아니면, 으리으리한 곳에 버려진 채 사회와는 동떨어진 하루를 죽음을 바라보면서 걸어야 할까?

  삶은 돈으로 짓지 않는다. 기쁨은 돈이 끌어들이지 않는다. 사랑은 돈이 넉넉하대서 이루지 않는다. 삶과 기쁨과 사랑은 언제나 ‘어린이 같은 마음’이 되어 ‘씨앗 한 톨 심는 신나는 놀이’일 때에 스스로 일으킨다.

  아흔아홉 살을 맞이한 할아버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흔아홉 살을 기뻐할 살붙이가 곁에 없기 때문이다. 아흔아홉 살 할아버지네 살붙이는 어디에 있을까? 땅속에 있다. 왜 땅속에 있는가? 일본이 일으킨 엉터리 전쟁 때문에 방공호에 숨었다가 그만 네 사람이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혼자 어처구니없게 살아남았으니 할 말이 없을밖에 없다. 혼자 살아남은 채 쉰 해 남짓 목숨을 이었으니 그야말로 할 말이 없을 테지. 누구한테 말을 하나.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나.

  양로원(또는 실버타운)에서 가까운 동무로 지내던 할아버지 한 사람이, 아주 튼튼해 보이던 할아버지 한 사람이 갑작스레 일찍 숨을 거둔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는 다른 동무 할아버지한테 꿈을 한 가지 남긴다. ‘은행털이’를 하라는 꿈을 남긴다. 할아버지들은 뜻을 모은다. 양로원(또는 실버타운)에서 할 일이 하나도 없이, 술만 마시거나 여자를 밝히거나 책만 파면서 따분한 하루였는데, 비로소 할 일이 생겼다.

  그루터기에 꽃이 핀다. 그루터기 스스로 꽃을 피우려는 마음이 되기에 꽃을 피운다. 그루터기가 그저 시들시들거리다가 숨을 거둔다. 그루터기 스스로 아무런 꿈을 마음에 담지 못했기에 그대로 숨을 거둔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다. 삶을 생각하기에 삶이요, 죽음을 생각하니까 죽음이다. 목숨이 붙었기에 삶이 아니다. 꿈을 짓는 생각이 있는 사람만 언제나 삶이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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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 런
톰 튀크베어 외 감독, 니나 페트리 외 출연 / 썬엔터테인먼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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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롤라 (롤라 런)
Run Lola Run, Lola Rennt, 1998


  영화 〈달려 롤라(롤라 런, Run Lola Run, Lola Rennt)〉를 보면 세 가지 이야기가 흐른다. 다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다 다른 이야기가 흐른다. 다 같은 사람들이 다 같은 때에 살지만 다 다른 이야기가 흐른다. 왜 그럴까? 세 가지 이야기를 보면, 세 가지 때에 세 가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몸짓이 달라지고, 몸짓이 달라지니 ‘아주 작은 몸짓’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하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침을 하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짓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는가? 아침에 골을 부리거나 이맛살을 찡그리면 하루는 어떻게 될까? 아침에 아이들을 안고 어르면서 입맞추면 하루는 어떻게 될까? 아침에 밭에 가서 풀을 뜯고 맑은 바람을 마시면 하루는 어떻게 될까?

  날마다 똑같은 몸짓으로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내 하루는 늘 똑같을 수밖에 없다. 날마다 새로운 몸짓으로 새로운 생각을 한다면 내 하루는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생각하지 않기에 아무것도 못 하거나 못 이루고 만다. 생각하기에 모든 것을 이룬다. 생각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늘 무엇이든 이룬다.

  영화 〈달려 롤라〉에서 처음에는 롤라가 아무 생각이 없다. 무턱대고 아버지한테 기대고, 무턱대고 짝꿍한테 다가가려고만 한다. 이리하여 롤라가 죽는다. 이때, 죽음 문턱에 닿는 롤라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끝없이 생각하면서 온힘을 쏟고, 이 힘에 따라 롤라는 ‘둘째 길’에 들어선다. 둘째 길에서 롤라는 조금 더 생각한다. 무턱대고 아버지한테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이 얕다. 얕은 생각으로 뜻을 이루려 하니, 어이없이 짝꿍이 차에 받혀 죽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때 롤라는 다시금 가없는 생각을 한다. 다시금 이대로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젖 먹던 힘을 짜내고, 어머니 뱃속에 있던 기운까지 쏟아내면서 ‘셋째 길’에 들어선다. 셋째 길에서 롤라는 서두르지 않는다. 셋째 길에 들어선 롤라는 앞선 두 길에서와 ‘똑같이’ 달리지만, 처음부터 달림새가 다르다. 외곬에서 사나운 개와 장난꾸러기 위로 훨훨 날아서 계단을 가로지른다. 둘레를 가만히 살피면서 달린다. 롤라 혼자만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신나게 달린다. 롤라는 생각하고 다시 생각한다. 철없이 아버지한테만 기대려 하던 ‘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본다. 나를 나대로 바라볼 수 있는 롤라는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스스로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이제 롤라는 ‘롤렛 게임’을 하는 카지노에 들어간다. 카지노라는 곳은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바보스레 휩쓸리면 온 집안을 들어먹지만, 온마음을 쏟으면 온갖 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롤라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한탕을 얻으려’는 생각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리하여, 첫 열매를 얻는다. 첫 열매를 얻고 나서 롤라는 이제 ‘내 길’을 안다. 처음 카지노에 들어설 적부터 ‘그런 차림’이면 안 된다고 하지만, 롤라한테는 ‘안 된다는 생각’이 없고, 100마르크에서 돈이 모자라지만 ‘모자라다는 생각’이 없다. 게다가, 카지노에 들어선 다음 롤라를 내쫓으려는 사람들한테 ‘나는 내가 할 것이 있다’는 뜻을 다부지면서 가볍게 보드라운 말로 읊는다. 이러고 나서 롤라는 꼭 한 가지를 한다. 이제껏 롤라한테 있던 모든 기운을 한꺼번에 쏟아서 숨을 내뱉는다. 숨을 외친다. 숨을 터뜨린다. 롤라가 내뱉고 외치며 터뜨리는 숨은 카지노에 있는 모든 유리잔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들이 귀청이 떨어지도록 할 만큼 놀랍다. 새롭다. 이리하여 롤라가 바라는 숫자대로 롤렛이 끝나고, 롤라는 이녁 짝꿍을 살릴 돈을 얻는다.

  그러면 영화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롤라가 다 했으니 이대로 끝날까? 아니다. 롤라는 둘레 사람들을 바꾸면서 제 삶을 바꾸었다. 이리하여, 롤라 짝꿍도 롤라가 내뿜은 사랑스러운 기운을 받아서 스스로 바뀌었다. 총을 내려놓는다.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 그리고, 깨끗하게 손을 씻는다. 어둠에서 빛이 되고, 빛에서 새로운 길로 간다. 롤라와 짝꿍은 가볍게 다시 만나고, 모든 앙금을 털었으니 홀가분하게 웃으면서 손을 맞잡고 아주 새로운 길을 걷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어서 보여주는 영화인 〈달려 롤라〉이다. 달리면 된다. 무턱대고 달리면 안 되지만,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면서 사랑을 가슴에 담아서 달리면 다 된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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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인터스텔라 : 한정판 스틸북 (2disc) (+SEM 초도한정)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마이클 케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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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Interstellar, 2014



  ‘고전 문학’은 읽을 까닭이 없다. 굳이 읽으려 한다면 읽어도 되지만, 삶을 밝히고 싶은 사람은 ‘고전 문학’을 읽을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고전’은 ‘낡은’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낡은 문학을 읽는다면 내 마음이 새로울 수 있을까? 새로울 수 없다. 우리가 읽을 문학이라면 ‘새로운 문학’이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문학은 무엇인가? 갓 나온 문학이 새로운가? 아니다. 지난해에 나온 문학이라면 새로운가? 아니다. 천 해나 만 해를 묵은 문학이라 하더라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서 새로운 넋으로 이끌 만한 문학일 때에 비로소 ‘새로운 문학’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을 문학은 ‘새로운 문학’이면서 ‘읽을 만한 문학’이어야지, ‘고전 문학’이라든지 ‘명작’이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여서는 삶이 발돋움할 수 없다.


  오늘날 물리학(과학)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고전 물리학’이고, 둘째 ‘양자 물리학’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블랙홀 같은 구멍을 말한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온갖 첨단장비를 써서 우주선을 만든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한정된 연료’로 ‘한정된 우주’만 ‘한정된 여행’을 해서 ‘한정된 정보’만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참모습이다. 고전 물리학으로는 우주여행을 할 수 없고, 고전 물리학으로는 지구별을 새롭거나 아름답게 가꾸는 길을 엿볼 수 없다. 고전 물리학으로는 전쟁무기를 끝없이 만들어서 지구별에 전쟁과 경쟁과 경제개발만 끝없이 되풀이할밖에 없다.


  우주로 가려면 달라져야 한다. 아니, 우주로 가려면 거듭나야 한다. 아니, 우주로 가려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어떻게 해야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아주 쉽고 수수하면서 또렷하게 밝힌다. 우주로 가려면 ‘stay’를 하라고 외친다. ‘스태이’는 무엇인가? ‘있으라!’는 소리이다. ‘여기 있으라!’는 소리이다. ‘여기 나한테 있으라!’는 소리이다. 여기 이곳에서 나를 보면서, ‘내가 나’인 줄 바라보라는 소리이다.


  ‘양자 물리학’은 바로 ‘내가 나’인 줄 바라보도록 이끄는 과학이다. 양자 물리학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인 줄 바라볼 수 없으며, 내가 나인 줄 바라보지 못하기에 ‘새로 태어나’는 길로 가지 못한다. 내가 나인 줄 모르는데 어떤 모습이 되겠는가? 참모습을 알 수 있을까? 슬기롭게 머리를 깨우칠 수 있을까?


  내가 나인 줄 바라보지 못했을 적에,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아저씨는 그저 ‘일류 비행사’일 뿐이다. 내가 나인 줄 바라보았을 적에,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아저씨는 그야말로 ‘내’가 되어, 또 다른 나이면서 새로운 나인 이녁 ‘딸’한테 말을 걸 수 있다. 바로 내가 나한테 말을 거는 셈이요, 내가 너한테 말을 거는 셈이다.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바로 오늘 여기’를 찾아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나인 줄 바라보면서 깨닫기에, 비로소 넷째 조각(넷째 차원, 4차원)이 열리고, 넷째 조각이 열리면서 ‘때와 곳을 넘어서’니,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며, ‘오롯한 사랑’이 된다. 오롯한 사랑이 되면, 이제부터 ‘낡은(고전)’ 것은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따사로운 숨결이 되니, 이제부터 언제나 평화이다. 전쟁도 경쟁도 경제발전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웃이 늘기를 빈다. 멋진 화면과 줄거리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슬기로운 깨달음으로 빛에서 어둠을 짓고 어둠에서 빛을 짓는 기쁜 삶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동무가 늘기를 바란다. 4348.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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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 일반판 (1disc)
이안 감독, 이르판 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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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



  ‘파이’라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지었다. 어릴 적부터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하루를 지었고, 어른이 된 뒤에도 언제나 하루를 새롭게 지었다. 다만,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을 뿐인데, ‘파이’는 드넓은 바다에서 꽤 오랫동안 떠돌아야 하던 무렵에 천천히 철이 든다. 삶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면서 이제껏 겪거나 누리지 못한 숨결을 헤아린다.


  밥이란 무엇인가. 목숨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이고, 이 지구별은 무엇인가. 하늘은 어떤 빛이고, 바다는 어떤 물결인가. 나와 범은 서로 어떤 사이요,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는 또 어떤 사이인가.


  ‘파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름이 있지만, 이 이름 말고 스스로 제 넋을 담은 이름을 새롭게 짓고는, 이 이름에 걸맞게 스스로 씩씩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이 다른 길은 파이가 스스로 거듭나는 철든 사람이 되는 길이요, 이 길을 걸어가면서 파이는 다른 어느 누구도 겪거나 누리지 못한 새로운 빛물결을 맞아들인다.


  그러니까, 파이한테는 파이 이야기가 있다. 파이로서 이녁 삶이 있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나한테는 내 삶이 무엇이라 할 만한가. 내가 걷는 길은 어디이고, 내가 걷는 길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듣고 겪고 헤아리는가.


  하늘이 열리는 길을 걸어간 파이는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는가. 내가 겪는 삶은 내 이웃한테 ‘하늘이 열리는 길’을 밝히거나 알릴 만한 이야기가 흐르는가. 비쩍 말라 뱃가죽이 들러붙은 범을 무릎에 누이고 머리를 쓰다듬는 파이는 두 손에 따스한 사랑을 지어서 아름답게 다시 태어났다.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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