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호들갑 부추기는 이들



  도서정가제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란 없다. 누구한테 달라질 일이란 없을까? 누리책방에 책을 넣을 적에 할인율(출고율)을 언제나 ‘적정선’을 넘어가지 않게 하는 출판사는 달라질 일이 없다. 이들 출판사는 할인율을 따지지 않고 책값을 붙인다. 작가한테 줄 10% 글삯, 출판사에서 들인 인쇄·제작·편집·디자인비, 책을 알릴 적에 들일 홍보비, 출판사 일꾼이 먹고살 돈, 출판사에서 다음 책을 내놓으려고 모을 돈, 이렇게 헤아리는 출판사는 언제나 꼭 알맞춤하게 책값을 매긴다. 누리책방에 책을 넣건 대형서점이나 소형서점에 책을 넣건, ‘적정 할인율’을 지킨다.


  누리책방이나 대형서점은 곧잘 출판사를 꼬드긴다. 여기에 학습지 회사도 출판사를 꼬드긴다. 이를테면 어느 책 하나를 ‘1000부’나 ‘5000부’를 주문한다. 그런데, 누리책방이나 대형서점이나 학습지 회사에서 이렇게 주문하면서 조건을 건다. ‘할인율 40%’라든지, 이보다 더 에누리를 바란다. 한꺼번에 1000부나 5000부를 밀어내면 ‘손해는 아니지만 맞돈을 만질 만한 크기’가 된다. 그런데, 한번 이런 주문을 받아들이면, 이 다음부터 ‘적정 할인율’이 무너진다. 이때부터 출판사는 책값에 거품을 자꾸 붙인다. 1000권에 40%보다 낮추어야 한다면 500권은 얼마로 하고, 300권은, 또 200권은, 또 100권은, 또 50권은 얼마에 넣어야 할까.


  누리책방에서 새책조차 20%나 30%를 에누리해서 팔 수 있는 까닭은, 이런 책은 처음부터 거품으로 책값을 붙였기 때문이다. 한편, 몇몇 이름난 외국 작가 문학책을 선인세 몇 억씩 주고 사들여서 펴내는 책도 이러한 거품값이 붙는다. 거품값을 붙이고 20∼30% 에누리를 하는데다가 덤을 한두 가지 끼우니, 사람들이 눈먼 채 카드를 긁는다. 이런 짓은 한결같이 이어진다. 출판사와 누리책방·대형서점과 눈먼 독자가 서로 하나가 되어 이런 짓이 벌어진다.


  도서정가제가 있건 없건 아름다운 책을 내는 출판사가 있다. 이들 출판사는 도서정가제가 새로 나오건 말건 언제나 똑같이 책길을 곧게 걷는다. 새로운 도서정가제를 앞두고 몇몇 기자와 누리책방과 대형서점이 호들갑을 떨지만, 이들이 호들갑을 떠는 까닭은 ‘매출을 더 높일 생각’일 뿐이다. ‘책’을 걱정하거나 호들갑을 떨 까닭이 없다. ‘책’을 생각한다면, ‘책’을 알리면서 팔면 되지, 반값 후려치기나 엄청난 에누리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장사에 온갖 힘을 쏟을 까닭이 없다. 그동안 몇몇 출판사와 누리책방·대형서점이 서로 짜고 치던 고스톱과 같던 짬짜미 ‘거품값’을 스스로 밝히거나 뉘우치면서, 이제부터 ‘책 즐김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면서 올바로 제길을 걸을 노릇이다.


  책값으로 처음에 팔천 원을 붙여서 팔백 원쯤 적립금을 붙이고 에누리 0%로 팔아도 될 만한 책을, 처음부터 만 원을 붙인 뒤 20% 에누리를 하고 적립금을 천 원 붙이면 무엇이 달라질까? 이렇게 하면 우리가 200원을 버는가? 아니다. 책도 망가지고 출판사도 흔들리며 독자도 어지럽다.


  10% 에누리이건 15% 에누리이건 아예 하지 말고, 책에 적힌 값대로만 책을 팔아야 옳다. 그러니까, 책값을 매길 적에 처음부터 ‘에누리할 값’이 없도록 책값을 매겨야 옳다.


  그래도 책값이 비싸다면 어찌해야 할까? 도서관을 써야지. 2000년과 오늘을 견주면 도서관이 무척 많이 늘었다. 지난 열다섯 해 사이에 도서관이 무척 많이 늘었고, 도서관에서 책을 사는 데에 들이는 돈도 꽤 많이 늘었다. 웬만한 책은 도서관에서 사들여서 갖추어 준다. 다만, 다섯 해나 열 해쯤 지난 뒤에도 그 책을 찾기는 어렵다. 도서관에서 새책 사는 돈은 들이지만, 건물을 늘려 책을 건사할 자리를 두는 데에는 돈을 안 쓰기 때문이다.


  전국 모든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씩 장만하면 출판사는 어려울 일이 없다. 전국에 있는 공공도서관이 이제 거의 1000군데에 이르니, 전국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두 권씩 장만하면 출판사는 첫판을 모두 소화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꾸준히 이으면, 출판사로서는 책값에 ‘거품값’을 씌울 일이 그야말로 없다. 출판사가 어렵다면, 전국 공공도서관이 새로 나오는 책을 찬찬히 살펴서 갖추려고 애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벼슬아치는 으레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좀처럼 안 움직인다. 도서관 사서 가운데 스스로 움직여 온갖 책을 골고루 잘 갖추려 힘쓰는 이가 틀림없이 많지만, 이렇게 애쓰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도서관에서 책을 장만할 돈을 넉넉히 갖추도록 하려면, 독자 스스로 도서관에 자꾸 목소리를 내야 하고, 시청이나 군청에도 자꾸 목소리를 내야 한다. ‘목소리 내기’는 독자 스스로 해야지, 국회의원이나 정치 우두머리 따위한테 맡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책을 많이 간직해야 하지 않다. 우리가 장만할 책이란, 나 스스로 즐겁게 읽을 책이요, 이러면서 작가와 출판사와 책방이 모두 잘되기를 바라는 책일 때에 아름다우리라 본다. 4347.11.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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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호들갑



  2014년 11월 21일에 새로운 도서정가제대로 책을 다루어야 한단다. 앞으로 이레 남는다. 그러면, 도서정가제가 있고 없고에 따라 무엇이 달라질까. 여느 동네책방이나 헌책방은 이러한 제도가 있거나 없거나 대수롭지 않다. 그저 ‘책’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몇 곳에서는 이 제도 때문에 흔들릴 만하다. 왜냐하면, 몇몇 출판사는 ‘인터넷 입고율’을 따져서 책값을 뻥튀기로 붙인 다음 ‘큰 에누리’와 ‘적립금’과 ‘덤으로 끼우는 선물’로 사람들을 홀리면서 장사를 했기 때문이고, 여러 누리책방도 몇몇 출판사와 손을 잡고서 ‘큰 에누리’와 ‘적립금’과 ‘덤으로 선물 끼우기’를 마치 ‘거저로 주는 듯’ 빙그레 웃으면서 책을 팔았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때문에 ‘책 읽는 사람’이 고단하거나 힘들 일이란 없다. 왜냐하면, ‘책 읽는 사람’은 ‘싸구려 떨이 물건’을 ‘책’으로 잘못 알고 사들이는 일이란 없을 테니까. 책을 읽는 사람은 그저 ‘책’을 찬찬히 살펴서 읽을 뿐이다. 만 원 값을 붙인 책을 천 원에 후려쳐서 파니까 살 만한가? 이만 원 값을 붙인 책을 만 원에 깎아서 파니까 살 만한가?


  우리가 읽을 만한 책이라면, 이만 원 값이 붙은 책은 이만 원을 치르고 살 만해야 옳다. 우리가 읽어서 마음을 살찌울 책이라면, 만 원 값이 붙은 책은 만 원을 치르고 살 만해야 알맞다. 이렇게 될 때에, 책을 쓴 사람과 책을 만든 사람과 책을 파는 사람 모두 즐겁게 ‘돈을 벌어’서 새로운 작품을 쓸 수 있고 새로운 책을 엮을 수 있으며 새로운 책을 다루어 팔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아주 마땅한 노릇이다. 책을 아주 헐값에 후려쳐서 팔면 누구한테 좋을까? 아무한테도 안 좋다. 만 원짜리 새책을 오천 원에 후려쳐서 팔면, 이 책을 쓴 사람은 글삯(인세)을 어떻게 받나? 이 책을 만든 출판사는 다음 책을 내놓을 돈을 어떻게 모으나? 책을 다루는 책방은 흙 파먹고 사나?


  만 원짜리 책은 만 원에 사고팔 수 있어야 옳다. 이만 원짜리 책은 이만 원에 사고팔 수 있어야 알맞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러한 얼거리를 ‘큰 출판사’와 ‘돈에 눈먼 출판사’ 두 곳이 앞장서서 깨뜨렸고, 여러 누리책방과 큰 새책방이 서로 손을 맞잡고 허물었다. 그리고, ‘책 즐김이’가 아닌 ‘책 사재기꾼’이 되고 만 우리 스스로 이러한 얼거리를 망가뜨렸다.


  도서정가제가 들어선다고 해서 ‘거품 책’이 사라지거나 ‘거품 출판사’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리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에 붙인 제값대로 책을 사고파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이러한 때에 생각을 슬기롭게 밝혀야 한다. 깎는 값이 아니라 옹근 값으로 살 만한 책인지 아닌지 살펴야 한다. 깎아 주어야 살 만한 책이라면, 이러한 책은 처음부터 안 살 만한 책인 줄 알아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은 안 사야 한다. 출판사와 누리책방이 짝짜꿍이 되어 ‘거품 값을 붙인 뒤 후려치기 해서 우리 눈을 홀리려는 책’은 처음부터 안 사야 한다. 이런 책이 안 팔리고 안 읽히도록 해야 한다.


  도서정가제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제도가 태어난 까닭은, 우리 스스로 ‘책 즐김이’가 아니라 ‘책 사재기꾼’으로 나뒹굴기 때문이다. 반값으로 후려치는 책이라든지 자그마치 90%를 깎아내리는 책은 쳐다보지 말 노릇이다. 숲에서 벤 나무로 지은 책다운 숨결이 깃들지 않은 ‘싸구려 떨이’는 손에 쥐지 말 노릇이다. 책다운 책을 살피도록 눈길을 키울 노릇이다. 스스로 ‘책 즐김이’가 되지 못한다면, 정치 우두머리가 엉뚱한 짓을 일삼아도 무엇이 엉뚱한지 알아채는 눈썰미가 없기 마련이다. 제대로 된 ‘책 즐김이’가 될 때에, 스스로 삶을 지을 수 있고 생각을 가꿀 수 있다. 거품은 걷어내야 한다. 맛난 국을 먹어야지, 어떻게 거품을 먹겠는가. 부질없는 거품은 땅에 뿌리고, 맑고 구수하며 맛난 국을 먹자. 참된 국을 먹자. 참된 책을 읽자. 참된 삶을 일구자. 참된 사람이 되자. 4347.11.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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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1-14 10:11   좋아요 0 | URL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당연한 것이 이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현실이 이상하죠.
참된 책을 읽자...책 즐김이가 되자...마음에 콕 와 닿네요. 도서정가제가 조금이라도 순기능을 했으면 하는데 사실은 읽는 사람이 문제겠지요?
좋은 하루 되세요^^

숲노래 2014-11-14 11:18   좋아요 0 | URL
도서정가제가 있건 없건
아름다운 책을 내는 출판사가 있어요.

도서정가제가 있건 없건
거품값으로 뻥튀기를 하는 출판사가 있고,
이들과 함께 장사만 하는 인터넷책방과 대형서점이 있어요.

이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아` 보이지만,
`거품책`과 `뻥튀기책`에 눈길을 보내지 않는 움직임으로도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꿀 수 있으리라 믿어요.

즐겁게 아름다운 책을 누리시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

stella.K 2014-11-14 11:38   좋아요 0 | URL
물론 님의 말씀에 동의는 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된 데는 인터넷 서점의 책임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싸게 판다는 것을 내세워 가격을 교란시켰습니다.
이젠 독자가 싸게 사지 않으면 웬지 밑지고 사는 것만 같아 이젠 제값 주고
못 사겠다는 거죠. 그게 마약처럼 중독된 느낌이죠.
물론 도서정가제가 잘 정착이 된다면 이런 혼란은 잠시 있다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잘 정착될 거란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인터넷 서점이 최대 15% 싸게 살 수 있는 걸 유지할 거거든요.
이것조차 없어야 정착이 될 것 같은데 이걸 누가 반기겠냐는 겁니다.

당연 동네서점은 도서정가제에 대해 관심없을 겁니다.
특별히 이득 볼게 없거든요
물론 산책 삼아 동네서점 활성화를 위하는 의식있는 독자 몇몇은 인터넷에서 살 거
동네서점 가긴 갈 겁니다. 하지만 그 인원수가 몇이나 될까요?
그나마 각 인터넷 서점은 중고샵까지 점령한 상태입니다.

싼게 비지떡이라고 싸게 내놓는 책 뭐 볼 거 있느냐 할지 모르지만
50% 이상 싸게 내놓는 책 아직 쓸만하고 좋은 책 많습니다. 재고정리하느라고.
값만 비싸고 내용없는 책. 뭐 좋은 책이긴 한데 내겐 그다지 안 맞는 책도 더러는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도서정가제 하나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도서정가제 지금으로는 회의적이고,
이게 확실히 된다면 전 지금이라고 좋은 책 있으면 사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 사는 것이 망설여지는 건 저도 읽지 않은 책이 많고,
이거 언젠가 안 지키게될 텐데 지금 쌓아두면 짐되지 않을까 해서 망설여지더라구요.ㅠ

숲노래 2014-11-14 11:50   좋아요 0 | URL
도서정가제라는 제도는
`막나가는 인터넷서점` 때문에 생겼습니다.
인터넷서점을 단속하려는 제도가
오늘날 도서정가제입니다.

그나마 15퍼센트라는 숫자에
정치권력이 타협을 했을 뿐입니다.

동네책방을 `산책하듯이` 간다면
동네책방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동네책방에 `책을 사러` 가야지요.

동네책방이 오늘날에도 있는 까닭은
동네책방에 `책을 사러 가는 사람`이 꾸준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동네책방에 가는 이웃을
stella.k. 님도 즐겁게 사귀실 수 있기를 빌어요.

한 사람씩 힘을 모을 때에
비로소 삶이 바뀝니다.
 

가을을 읽는 책



  가을은 달력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을은 날짜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을은 사람들 옷차림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을은 바람으로 찾아온다. 가을은 햇볕으로 찾아온다. 가을은 빗물로 찾아온다. 가을은 무르익는 곡식과 열매로 찾아온다. 가을은 시드는 풀과 추위에 돋는 풀로 찾아온다. 가을은 더욱 파랗게 눈부신 하늘로 찾아온다. 가을은 손발이 시리도록 차가운 냇물과 샘물로 찾아온다. 가을은 처마 밑에서 벗어나 마을을 훌쩍 떠나 바다를 가로지른 제비와 함께 찾아온다. 가을은 바알갛게 고운 감알로 찾아온다. 가을은 잎사귀를 떨구어 앙상한 나뭇가지로 찾아온다. 그리고, 가을은 한겨울을 맞이해도 푸른 잎을 가득 달며 솨르르솨르르 춤추는 동백나무에 새롭게 돋으며 단단하게 옹크린 꽃망울로 찾아온다.


  경남 진주에 있는 헌책방 책꽂이 한쪽에 감알이 달린다. 나뭇가지에 맺힌 감알을 톡톡 끊어 먹으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감알이지만, 나뭇가지째 책꽂이에 걸어서 두고두고 여러 사람이 감내음을 맡으면서 책내음을 즐길 수 있다. 4347.11.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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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1-13 13:28   좋아요 0 | URL
가지런한 책장이네요

숲노래 2014-11-13 15:09   좋아요 0 | URL
감알도 곱습니다~
 

여기에 있는 책



  오늘 여기에 있는 책을 읽는다. 나는 오늘 여기에서 살며 이 책 하나를 바라본다. 책을 쥐기 앞서 고개를 든다. 나를 둘러싸고 흐르는 바람을 가만히 헤아린다. 어디에서 부는 바람일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바람일까. 지구별에서 부는 바람은 지구를 골고루 흐른다. 브라질에서 비롯한 바람이 한국에 올 수 있고, 한국에서 비롯한 바람이 캐나다에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같은 바람을 쐬면서 같은 바람을 누리는 사람이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책은 어디에서 처음 태어났을까. 내가 오늘 손에 쥐는 이 책은 앞으로 어디로 갈까. 내가 손에 쥔 책을 처음 지은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고, 내가 읽은 이 책을 나중에 손에 쥘 이웃이나 동무는 어떤 마음이 될까.


  헌책방에서 묵은 만화책을 바라본다. 스무 해를 묵은 만화책은 이제 헌책방에만 있다. 한국에 있는 도서관은 만화책을 안 갖추기도 하지만, 갓 나온 만화책이 아니라면 새책방 책꽂이에서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스무 해를 묵은 만화책은 해적판이다. 일본 만화책을 몰래 훔쳐서 한국에서 펴낸 판이다. 한국에서는 일본 그림책과 만화책과 동화책과 소설책을 엄청나게 훔쳐서 몰래 팔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 텐데, 한국 대중노래는 일본 대중노래를 엄청나게 훔쳐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잘못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한국사람인데, 정작 한국사람은 오늘 이곳에서 일본 것을 아주 많이 훔쳤다. 게다가, 새우깡이라든지 빼빼로라든지 초코파이라든지, 3.4우유라든지 온갖 일본 것을 이름을 훔치고 모양까지 흉내내어 파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 한켠에서 ‘혐한류’라는 말을 할밖에 없다. 요새는 한국에서 ‘십칠차’라는 마실거리가 있는데, 일본에서 일찌감치 ‘십육차’라는 마실거리를 내놓았다. 참으로 창피한 노릇이지만, 하나도 안 바뀔 뿐 아니라, 버젓이 고개를 들면서 장사를 한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말할 까닭은 없다. 바람은 이 지구별을 고루 감싸면서 흐른다. 오늘 이곳에서 내 앞에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온갖 생각이 스친다. 아마 이 책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 나한테 왔기 때문이리라. 이제 이 바람은 앞으로 어디로 흘러 어떤 이야기를 더 퍼뜨릴까. 4347.11.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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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읽는 사람



  한 사람이 쓴다. 다른 사람이 읽는다. 한 사람이 그린다. 다른 사람이 본다. 한 사람이 조곤조곤 말을 건다. 다른 사람이 빙긋빙긋 말을 듣는다. 한 사람이 가르친다. 한 사람이 배운다. 한 사람이 통통 도마질 소리를 내며 밥을 짓는다. 다른 사람이 밥상맡에 앉아서 기쁘게 밥 한 그릇 받는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 다른 사람이 노래를 듣다가 가슴이 뭉클 울려 눈물 한 줄기 흐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모두 다른 날인 줄 아는 사람이다. 글을 읽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모두 다르면서 기쁘게 맞이하려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다. 글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게 거듭나는 사람이다.


  삶을 가꾸는 넋을 슬기롭게 다스릴 수 있기에, 글 한 줄을 사랑스레 쓰고, 말 한 마디를 사랑스레 읊으며, 노래 한 가락을 사랑스레 부르고, 밥 한 그릇을 사랑스레 지으며, 이야기 한 꾸러미 사랑스레 풀어낸다. 삶을 일구는 마음을 슬기롭게 북돋우기에, 글 한 줄을 사랑스레 읽고, 말 한 마디를 사랑스레 들으며, 노래 한 가락을 사랑스레 맞이하고, 밥 한 그릇을 사랑스레 먹으며, 이야기 한 꾸러미 사랑스레 나누어 받는다.


  너와 다는 다른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이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랑이면서 같은 사랑이다. 너와 나는 다른 숨결이면서 같은 숨결이다. 이리하여 우리 사이에 예쁜 빛이 흐르고, 고운 바람이 불다가, 맑은 해님이 따사롭게 비춘다. 4347.11.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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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1-10 14:00   좋아요 0 | URL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 팔랑팔랑 종이 넘어가는 소리, 노랫가락 제 귀에도 들리는듯해 저도 읽는 동안 잠시 행복해집니다.

숲노래 2014-11-10 15:36   좋아요 0 | URL
연필 사각소리란 참으로 예쁘면서
아름다운 소리로구나 싶어요.
마치 피아노가 또르르 구르는 소리라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