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있는 책



  오늘 여기에 있는 책을 읽는다. 나는 오늘 여기에서 살며 이 책 하나를 바라본다. 책을 쥐기 앞서 고개를 든다. 나를 둘러싸고 흐르는 바람을 가만히 헤아린다. 어디에서 부는 바람일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바람일까. 지구별에서 부는 바람은 지구를 골고루 흐른다. 브라질에서 비롯한 바람이 한국에 올 수 있고, 한국에서 비롯한 바람이 캐나다에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같은 바람을 쐬면서 같은 바람을 누리는 사람이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책은 어디에서 처음 태어났을까. 내가 오늘 손에 쥐는 이 책은 앞으로 어디로 갈까. 내가 손에 쥔 책을 처음 지은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고, 내가 읽은 이 책을 나중에 손에 쥘 이웃이나 동무는 어떤 마음이 될까.


  헌책방에서 묵은 만화책을 바라본다. 스무 해를 묵은 만화책은 이제 헌책방에만 있다. 한국에 있는 도서관은 만화책을 안 갖추기도 하지만, 갓 나온 만화책이 아니라면 새책방 책꽂이에서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스무 해를 묵은 만화책은 해적판이다. 일본 만화책을 몰래 훔쳐서 한국에서 펴낸 판이다. 한국에서는 일본 그림책과 만화책과 동화책과 소설책을 엄청나게 훔쳐서 몰래 팔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 텐데, 한국 대중노래는 일본 대중노래를 엄청나게 훔쳐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잘못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한국사람인데, 정작 한국사람은 오늘 이곳에서 일본 것을 아주 많이 훔쳤다. 게다가, 새우깡이라든지 빼빼로라든지 초코파이라든지, 3.4우유라든지 온갖 일본 것을 이름을 훔치고 모양까지 흉내내어 파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 한켠에서 ‘혐한류’라는 말을 할밖에 없다. 요새는 한국에서 ‘십칠차’라는 마실거리가 있는데, 일본에서 일찌감치 ‘십육차’라는 마실거리를 내놓았다. 참으로 창피한 노릇이지만, 하나도 안 바뀔 뿐 아니라, 버젓이 고개를 들면서 장사를 한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말할 까닭은 없다. 바람은 이 지구별을 고루 감싸면서 흐른다. 오늘 이곳에서 내 앞에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온갖 생각이 스친다. 아마 이 책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 나한테 왔기 때문이리라. 이제 이 바람은 앞으로 어디로 흘러 어떤 이야기를 더 퍼뜨릴까. 4347.11.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