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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설의 시대 1 ㅣ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김탁환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은 대여섯 작품쯤 읽었던 것 같다.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한 작가의 작품을 그 정도 읽었다는 건 내게 여간해서 없는 일로 가히 최애 작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난 작가의 대표작은 (이를테면, <방각본 살인사건>이나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같은 작품은) 아직 읽지도 않았다. 하긴, 이건 좀 나의 게으름이 반영된 약간의 전략이자 변명이기도 한데, 내가 만일 이런 주요작부터 읽었다면 일찍 내게서 멀어져 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김탁환 작가를 좋아하는 건, (사람들은 흔히 역사 소설을 좀 낫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조선이란 이 역사적이며 문명사적인 시대를 소설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부지런하게.
내가 이 책에 마음이 끌렸던 건 다름 아닌 소설가의 소설 쓰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난 이 방면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파리 리뷰가 인터뷰했다던 <작가란 무엇인가>나,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같은 책이다. 그건 웬만한 글쓰기에 관한 책 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하다. 여기서 유익하다는 건, 글쓰기에 관한 책은 물론 읽을 필요는 있지만 사실 그다지 재밌거나 아주 많이 흥미로운 건 아니다. 어떤 건 애를 좀 먹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책들을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그리고 나도 왠지 '작가처럼'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받는다. 이 책도 그렇다. 물론 글쓰기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기를 부여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독특한 건, 이 작품은 얼핏 금부도사인 이명방이 화자로 나오고 그의 절친인 김진과 당대 유명한 사람들 이를테면 김홍도니 정약용, 박문수 같은 사람이 나와 남성 서사인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매설가(소설가) 임두와 그의 손녀 승혜와 궁에 사는 왕의 여자들 즉 임금의 후궁들과 책을 필사하는 궁녀들이 다수 나온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를 표방하고 있다.
매설가 임두가 당대 얼마나 유명하냐면 궁에 사는 왕의 여자들(후궁들)과 연줄이 닿아있을 정도다. 왕의 여자니 얼마나 눈이 높겠는가? 웬만한 매설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임두가 소설을 쓸 때마다 필사 궁녀가 그의 작품을 필사하기에 바쁘다. 단순히 그렇게만 표현하기가 약했던지 임두는 약간 신비스러우면서도 무림의 고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무려 23년 동안이나 <산해인연록>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무림의 고수가 맞다. 그런데 그렇게 쟁쟁한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매병(치매)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매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그래서 차라리 어딘가로 숨어 버리는 건 선택한 것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되니 마무리를 져야 하는데, 그 후보로 임두가 키우고 있는 형제인 경문과 수문이 후보로 지목된다, 하지만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지만 그 둘은 아직 그 경지를 넘 볼 정도는 아니다. 이렇듯 작품은 행방불명이던 임두를 찾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경문과 수문의 묘한 인간적 갈등과 금부도사인 이명방이 말을 못 하는 임두의 손녀 승혜를 연모하는 과정 등을 그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어찌 보면 이 작품은 인물을 다룸에 있어서 좀 약하지 않나 싶다. 특별히 악한 사람이 없다. 있다면 수문 정도다. 나중에 형인 경문을 죽이고 발뺌을 하는데, 그가 확실히 죽인 증좌도 없다(맞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끝까지 읽게 만든다. 무엇보다 곳곳에 우리나라와 당나라의 고문학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소설을 각주처럼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의 흥미를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놀라운 건, 소개하고 있는 책들의 분량이 상상을 초월한다. 한 작품이 몇십 권은 축에도 들지 못한다.100권은 넘어가야 가히 대소설이라 불러줄 만하다. 그러니까 임두 같이 한 작품을 평생 쓰는 작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말이다. 솔직히 우리가 고문학을 아는 건 <사씨 남정기>나 <홍길동> 같은 손에 꼽을만하고 그것도 단행본 아닌가?
사실 대소설은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아 어색하고 낯설긴 한데, 오늘 날로 치면 시리즈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과연 한 작가가 23년 동안 한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를 생각해 봤다. 어떻게 한 작가가 한 가지 소설만 쓸 수 있을까? 말이 좋아 23년이지 오늘날처럼 수명이 긴 것도 아니다. 옛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40 전후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인생의 반 이상이다. 그것을 오로지 한 작품에만 바친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시절 책 읽는 것이 가장 지적이면서도 고급한 문화활동이었을 것이다. 이것 외에 무엇을 더 해 볼 수가 있을까?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게 골수에 새겨져 있다는데, TV나 영화를 보겠는가? 라디오를 듣겠는가? 책밖엔 없을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글을 깨우쳐 읽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능력이고, 심지어 권력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읽을 것이 많지 않다면 같은 책을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씩 반복해서 읽었을지 모른다. 또 그런 만큼 한 작가가 20년 넘게 붙들고 쓴다는 건 인생을 다 건다는 의미일 것이다. 쓰다가 병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제자를 키운다는 건 오늘날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즉 원작자 유고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소설도 임두의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지 않고 제자가 이어 쓰도록 한 것이겠지.
그런데 과연 오늘날 그렇게 쓰는 작가가 있나 싶기도 하다. 있어도 뜯어말려야 하지 않을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한 작품만 들이 판단 말인가. 이야기도 작가 따라 늙기 마련이니 그만 쓰고 새것 쓰라고 하지 않을까? 따라서 임두 같은 대소설을 쓰는 작가가 오늘날 21세기를 산다면 크게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생각해 봤더니 <산해인연록>이 오늘날 쓰여진다면 100권까지 안 갈지도 모른다. 그 시절엔 글자 크기 조절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세상에 가장 가는 붓으로 작게 쓴다고 해도 요즘 컴퓨터로 글을 쓸데 흔히 쓰는 10포인트 보다 클 것이다. 더구나 책은 묶기 나름 아닌가? 300이든 400 페이지든 얼마를 한 권으로 할지 등은 만드는 사람이 정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글쎄, 아무리 많아도 30권을 넘을 수 있을까? 지하에 있는 이 모두가 알면 기함할지도 모른다. 그 많던 책들이 어디로 사라진 거냐고.
아무튼 TV나 인터넷만 들어가도 드라마나 영화가 넘쳐나는데 아무리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일지라도 기왕이면 입체적인 것이 좋지 침침하고 칙칙한 책이 좋을까? 그래서 이제 시리즈 (대소설)를 쓰는 소설가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런 최첨단 영상 시대에도 약 30년 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아직도 결말을 내지 않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프리 디버다. 그는 유명한 링컨 라임 시리즈를 1997년에 내기 시작해서 아직도 결말을 내지 않은 채 계속 책만 내고 있다. 내후년이면 진짜 30주년인데 그에 맞혀서 마무리를 지으려나? 1950년 생이라니 이제 노년이다. 그를 좋아하는 어떤 독자는 부디 건강해서 대미를 장식해 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밖에 그에 준하는 또는 그를 뛰어넘는 작가가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런 작품은 어느 시대고 있고 여전히 건재하다. 건재함이란 쓰는 소설가나 읽어주는 독자 모두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임두 작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임두 작가가 그렇게 글을 쓴다는 건, 김탁환 작가가 그렇게 쓰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벅찬 일인가? 모든 작가에겐 이런 체험이 필요한 것 같다. 작가들 중엔 등장인물들이 살아 꿈틀대고, 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자신은 그저 받아 적을 뿐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작가가 늘 그렇기만 할까? 그런 현상에만 의존하면 그건 게 없을 때도 과연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이 잘 써지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뭔가에 안주하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런 체험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순간이 오던 안 오던 늘 언제나 변함없이 쓰는 게 진짜 작가가 아닐까?
앞서도 얘기했지만, 김탁환 작가는 이 작품을 남성 서사로 쓰지 않고 여성 서사로 썼다. 엄밀하게는 남성 서사를 가장한 여성서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대 여성은 모든 면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러니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읽겠는가. 물론 왕의 여자들이니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쓰는 소양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긴긴 나날을 왕이 언제 자신의 처소를 찾아 줄까를 기다리지 않고, 그 시간 책을 읽고 책이 원활히 나올 수 있도록 능동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 역시 아주 적극적여 보이진 않는데 그건 아무래도 여자가 아닌 김탁환 작가의 한계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 90년대 또는 2천 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도서 대여점 (조선 시대로 말하면 세책방이겠지)이란 게 성행했었다. 그 시절 어떤 작가가 시리즈물을 쓰면서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대여점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났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따분한 학교 수업 시간에 교과서 위에 또는 책상 서랍에 애정하는 책 몰래 내놓고 본 경험 있지 않나? 모름지기 책은 그런 맛이 있어야 한다. 책 읽기의 긴박함이랄까? 그러다 선생님의 압수 물품이 될지라도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린 어느새 그때를 잊고 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런 건 좀 부활시켜도 좋지 않을까? 혹시 그런 얘기 알고 있으면 제보를 부탁한다. 이렇게 독자들에게 책은 읽고 싶은 욕망과 긴급성을 필요로 한다. 또 작가들은 자신의 책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쓸고 있을 것이다. 그런 작가들의 꿈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