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그래?’ 하고 큰아이가 묻다
면소재지나 읍내에는 쓰레기를 알맞게 나누어 내놓도록 하는 그물주머니가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이곳에 유리병이나 플라스틱이나 다 쓴 건전지나 형광등이나 깡통을 나누어 내놓으려고 가지고 나오는데, 언제 보아도 ‘쓰레기 그물주머니’에는 온갖 쓰레기가 뒤죽박죽입니다. 큰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 여기는 플라스틱 버리라고 하는 데 아니야? 그런데 왜 여기에 병을 버리는 사람이 있어?”
나는 유리병을 플라스틱 자리에 버린 적이 없어서 어떻게 이렇게 버릴 수 있는지, 이처럼 버린 사람 마음을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다시 묻습니다.
“아버지, 여기는 유리병 버리라고 적혔잖아. 그런데 왜 여기에 비닐하고 깡통을 버리는 사람이 있어?”
나는 유리병 버리는 데에 깡통이나 비닐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렇게 버리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알 노릇이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떤 말을 들려주어야 할까요? 사람들이, 그러나 알고 보면 모두 우리한테 이웃인 사람들이, 이렇게 ‘한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말해야 할까요? 한글을 읽을 줄 모를 뿐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버리든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다고 말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그냥 어디에든 버리면 ‘나 알 바 아니야’ 하고 여긴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렇구나. 참 엉뚱하게 버린 사람이 많네. 이를 어쩐다. 이렇게 하면 치우는 분도 매우 힘들 텐데. 그런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우리는 제대로 하자. 다른 사람이 길에 쓰레기를 버린다고 해서 우리도 따라서 버리면 어떨까?” “아니야. 난 그렇게 안 해.” “그렇지? 우리부터 제대로 하고 똑바로 살면 차츰차츰 온누리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해.” “그래, 그러면 되겠네. 우리가 좋은 씨앗이 되기로 해요.”
좋은 씨앗이 되기로 하는 아이는 작은 촛불로 아름다운 삶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겠지요. 아이들하고 읍내마실을 할 적에 이 고장 어린이나 푸름이가 빵이나 과자를 먹고 나오는 빈 껍데기를 그냥 휙 던져서 버린다거나, 음료수 깡통을 발로 뻥 걷어차면서 낄낄거린다거나, 때로는 도랑에 멀리 던지는 내기를 한다거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뽑기를 하고서 뽑기 선물을 담은 플라스틱 구슬을 발로 콰직 밟아서 깨뜨리며 깔깔대는 모습을 으레 봅니다. 한두 아이가 아닌 대단히 많은 아이들이, 또 푸름이까지 이런 몸짓이라서 이제 이 고장 아이들한테 지청구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군내버스를 탈 적에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어 먼저 타겠다는 어린이나 푸름이, 여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늘 마주칩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무엇을 보면서 배울까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우리가 함께 나누면서 생각할 슬기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나 터전은 어떤 그림일 적에 즐거울까요?
“사람들은 왜 그래?” 하고 묻다가 “좋은 씨앗”으로 스스로 마무리를 짓는 아이한테서 즐거우면서 밝은 바람 한 줄기를 느끼는 겨울 문턱입니다. 2017.12.1.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