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 - 왜 전쟁 반대와 평화가 중요할까요?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0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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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5

 


전쟁을 부르는 군대
― 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
 이임하 글
 철수와영희 펴냄,2013.6.25./13000원

 


  군대는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도록 내몰려고 군대라는 데가 생겼습니다. 군대는 사람을 버젓이 죽여도 법으로 아무 잘못을 캐묻지 않습니다. 군대에서는 법에 따라 사람을 때리거나 다치게 하거나 죽여도 딱히 말썽거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하사관이나 소대장이나 중대장이나 대대장 같은 이들이 여느 병사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하더라도, 여느 병사가 ‘하극상’을 일으켰다고 말한다면 그저 ‘하극상’이 될 뿐입니다. 또한, 전방이나 최전방에서 여느 병사가 북쪽으로 넘어가려 했기에 총으로 쏘아 죽였다 하면, 총으로 쏘아 죽인 사람한테 훈장이 떨어집니다. 여느 병사가 군대에서 얻어맞아서 괴롭든, 따돌림을 받아서 괴롭든, 여러모로 괴로워서 군대를 벗어나려고 하면 ‘탈영’이라는 죄를 붙여, 적어도 무기징역이라 하는 군사재판을 붙입니다. 군대를 벗어나면서 총알 하나를 건사했다면, 또는 총알 하나 없더라도 소총을 들고 벗어났다면, 이때에는 언제라도 총으로 쏘아 죽여도 법에서는 따지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해방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군대에서 일어난 모든 ‘의문사’는 이렇게 ‘죽은 사람한테 덤터기 씌워’ ‘죽인 사람은 아무 허물도 죄값도 치르지 않은’ 채 빠져나왔다는 뜻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여느 병사 한 사람을 괴롭히며 두들겨패다가 그만 숨이 끊어지면, 전방이나 최전방에서는 ‘지뢰를 밟아서 주검 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때로는 ‘북쪽으로 넘어갔다’고 둘러댑니다. 그러면, ‘시체 부검’조차 할 수 없지요.


  나는 이 여러 가지 일을 군대에서 몸소 겪었어요. 최전방 철책에서 경계근무를 서는데, 갑자기 옆 부대 소초에서 ‘지뢰 밟아 두 사람이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옆 부대는 우리 소초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데에 있는데, 지뢰 터진 소리는 못 들었어요. 그런데 지뢰 밟아서 두 사람이 죽었다 하더군요. 한여름 어느 날에는 4/5톤 짐차 엔진이 터져서 사람이 죽었다는 보고도 들었으나, 짐차 엔진 터진 소리도 못 들었고, 그런 부스러기도 못 봤어요.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틀림없습니다. ‘개미에 물려서 죽었다’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 어떻게 해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모르는 채 벌어진 ‘의문사’들입니다. 내가 있던 부대 중대장도 이녁 마음에 안 드는 병사가 있으면 “이 개새끼들아, 너희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야. 총으로 너희 머리 갈기고, 이북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다음 시체 갖다 버리면 그만이야.” 하고 소리지르곤 했습니다. 이렇게 소리지르며 얼차려를 주는데, 참말 K-1소총에 실탄 잰 탄창 끼워 장전을 하면 등줄기로 땀이 스르르 흐릅니다. 넋이 나가지요.


.. 교과서는 한국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를 사진을 곁들여 두 쪽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읽고 ‘아이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 중요하다면서도 정작 교과서는 이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는 것 같네요 … 단순하게 사실을 추려서 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실 뒤에 숨은 뜻을 밝혀내는 역사 교육과 사회 교육이라면 좋지 않을까요  ..  (9, 10쪽)

 

 


  군대가 있어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군대가 있기에 전쟁을 벌입니다. 군대가 있는 나라는 언제나 전쟁을 일삼습니다. 군대가 있기 때문에 평화 아닌 전쟁으로 기울어지고, 정치권력은 독재와 봉건과 제국주의로 치닫습니다.


  군대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잘 죽이는 재주’를 가르칩니다. 농사를 짓던 사람이건,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던 사람이건, 집에서 아이를 돌보던 사람이건,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사람이건, 군대에 끌려가면 모조리 ‘사람을 더 빨리 더 많이 죽이는 재주’를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총검술을 보며 멋있다고 말하는데, 총검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빠르게 더 많은 적군 목을 한 칼에 따서 죽이는 재주가 총검술입니다. 한 칼에 한 사람 목을 따서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백병전’이라 해서, 주먹다짐으로 맞붙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한 사람이 백 사람을 죽일 수 있어’야 비로소 살아남는다고 가르칩니다. 총검술을 가르치면서 동작 하나 어긋나거나 느리면 뒤에서 군화발로 뻥뻥 걷어차거나 얼차려를 시키는 까닭은 ‘너 이렇게 엉터리로 하면 네가 죽는다’는 생각을 집어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소총 소염기로 얼굴과 배와 옆구리와 허벅지를 쿡쿡 찌르면서 우리 마음에 ‘너 말이야, 사람을 아주 쉽게 많이 죽일 수 있어야 해’ 하는 생각을 길들이듯 집어넣지요.


  총쏘기 훈련을 할 적에, 영점사격 석 발 쏘며 점수 제대로 안 나오면 언제나 얼차려를 받습니다. 한 시간 동안 죽을 똥 빼면서 얼차려를 받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석 발을 쏘게 하지요. 이때에도 점수 제대로 안 나오면 다시금 얼차려를 죽음과 같이 받아요. 사격훈련 한다면 새벽부터 밤까지 얼차려 받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잘 쏘든 못 쏘든 똑같습니다. 다 함께 똑같이 얼차려를 받아요. ‘군대 갔다 오면 살이 빠진다’고 하는 까닭도, 늘 얼차려를 받고 시달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총은 총자루가 휘어졌기도 하고, 어느 총은 덜컥거리기도 합니다. 조교라든지 교관이라든지 고참이라든지 중대장은 말합니다. ‘싸움터에서 총 탓을 하다가는 네가 죽는다. 엉터리 총이라 하더라도 엉터리 총으로도 영점사격 똑바로 해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요. 전쟁터에서 물불 가릴 수 없고, 옆사람 총을 들고 쏴야 할 수 있으니, 다 망가진 총으로도 백발백중을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총쏘기를 가르치겠습니까. 바로 더 많은 사람을 더 빨리 죽이라는 뜻입니다.


.. 친일파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대중들의 열기에 놀라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친일파들에게 희소식이 들려왔죠. 미군이 38도선 이남 지역에 들어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친일파를 포함한 지주, 자본가들은 재빨리 모여 한국민주당을 만들었어요.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앞장서 협력하면서 새로 세워질 나라의 지도자로 이승만을 지지했답니다 ..  (16쪽)

 

 


  나는 1995년 11월 16일에 논산훈련소로 끌려가서 106 무반동총 주특기를 배운 뒤, 기차로 열여덟 시간을 달려 강원도 춘천 102 보충대에 닿았고, 이곳에서 사흘 지내고 나서 소양호를 배를 타고 한 시간에 걸쳐 가로지른 다음, 4/5톤 짐차에 실려 꼬박 하루를 달리며 21사단 백두산부대 휴양소에 닿아, 이곳에서 사흘 동안 눈쓸기를 하고서야 비로소 강원도 양구 동면 원당리에 있는 21사단 11연대에 떨어졌습니다. 연대 한쪽 막사에서 하룻밤 지내며 또 눈쓸기를 했고, 이듬날 새벽에 다시 4/5톤 짐차에 실려 두 시간쯤 달려 멧골 깊숙하게 들어갑니다. 대암산, 월운리, 천지, 대우산, 도솔산, 이렇게 다섯 군데 비무장지대에서 여느 보병(땅개)으로 뒹굴었고, 1997년 12월 31일에 엄청나게 퍼붓는 눈길을 헤치며 가까스로 전역을 했습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계급장에 따라 바보가 됩니다. 나이가 열 살이 위가 되든 아래가 되든, 계급장에 따라 ‘님’이 됩니다. 똑같은 계급장이라 하더라도 군대밥(짬밥)을 몇 그릇 더 먹었느냐에 따라 ‘님’이 달라집니다. 하루라도 일찍 군대밥 먹었으면 ‘님’이 되지요.


  여느 회사에서도 이와 같아요. 회사와 군대는 위계질서가 똑같습니다. 회사와 군대는 서로 똑같이 전쟁을 합니다. 내가 안 죽으려면 너를 죽여야 하듯 다툽니다. 내가 살겠다며 내 밥그릇을 챙깁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안 찾는 회사요 군대이지요. 중앙정부에서 꾀하는 경제개발을 생각해 봐요. 경제개발이란 다 함께 잘 살아 보자는 뜻이 아닙니다. 어느 한쪽을 파헤쳐서 돈을 더 많이 얻어내려는 뜻입니다. 지구별을 아름답게 돌보면서 꾀하는 경제개발 내놓는 중앙정부는 아직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골 농사꾼을 보살피면서 꾀하는 경제개발 이끄는 중앙정부는 지구별 어디에 있을까요.


  누군가는 군대에서 보낸 일을 ‘추억’이라느니 ‘낭만’이라느니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추억도 있고 낭만도 있겠지요. 군대에서라고 추억이나 낭만을 말하지 말란 법은 없어요. 감옥에서도 추억과 낭만 찾을 수 있고, 먹을 것 없어 쫄쫄 굶는 가난한 집에서도 추억과 낭만 찾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군대는 전쟁을 일으키려고 만들었어요. 전쟁을 일으켜서 ‘이웃’ 아닌 ‘적군’을 죽이려고 만들었어요.


  전쟁이 터지면, 이쪽에서는 저쪽을 적군으로 삼고, 저쪽에서는 이쪽을 적군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봐요. 이쪽에서 군인이 되는 사람은 누구요, 저쪽에서 군인이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군인이 되는 사람은 모두 ‘여느 사람’, 곧 백성입니다. 서민입니다. 민중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군인이 되는 사람은 언제나 ‘여느 사람’이에요. 예전에는 모두 다 ‘농사꾼’이 군대로 끌려왔겠지요. 1950년부터 벌어졌다고 하는 한국전쟁에서도 군인은 죄 농사꾼이었고, ‘우리 편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적군’도, ‘적군’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저쪽 군인’도 모두 농사꾼이었어요.


  농사꾼이 왜 총을 들어야 했을까요. 농사꾼이 왜 흙이 아닌 총을 만져야 했을까요. 농사꾼이 왜 사랑스러운 이웃을 돌보지 않고, 온통 적군만 생각하며 ‘사람 죽이는 짓’을 해야 했을까요.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람을 죽인’ 이들도 군인입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면서 ‘사람을 죽인다’고 느끼지 않도록 배웁니다. 군인은 ‘사람 아닌 적군’을 죽인다고 배웁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여도 법으로 벌을 받지 않고 죄값을 따지지 못합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 죽이는 특권(?)’을 받는 군인 또한 ‘사람 대접 못 받는’ 셈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삶을 못 배우고,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며 때리는 재주만 배우는데, 군인이 사람다운 넋을 건사할 수 없습니다.


.. 이 전쟁 이야기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쓰인 듯하지만, 사실은 미국의 입장만 도드라져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는 해방 뒤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다양하고 격렬한 사람들의 이야기, 해방의 기쁨, 새 나라를 향한 열정, 군중의 물결 따위는 아예 나와 있지도 않잖아요 … 이 삐라들은 한강을 건너오는 모든 민간인을 적이라고 말하네요. 실제로 미군에게는 피난민에게 총을 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어요 … 미군은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한 월미도 동쪽 전체를 집중 폭격했답니다. 민간인 희생을 줄이려는 어떠한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폭격하고 눈으로 식별 가능한 높이에서 주민에게 기총 소사가 행해졌죠 ..  (34, 43, 54쪽)

 

 


  전쟁을 부르는 군대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군대입니다. 평화를 짓밟는 군대입니다. 평화를 깔아뭉개는 군대입니다. 군대를 거느리느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퍼붓습니다. 군대에서 쓰는 전쟁무기를 만들고, 전쟁무기를 보살피며, 전쟁무기를 새로 만드는 데에 돈을 끔찍하게 많이 쏟아붓습니다.


  전쟁이 왜 터지는가를 생각해 보셔요. 서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돈과 자원과 보배와 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돈이나 자원이나 보배나 땅을 빼앗으려고 할까요? 첫째, 정치권력자가 돈과 자원과 보배와 땅을 혼자 차지하면서 배불뚝이가 되려는 꿍꿍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저희 나라가 배고프기에 배고픈 사람들 먹여살리려고 전쟁을 일으킨다고 내세웁니다.


  생각해 봐요. 전쟁무기와 군대에 들이는 돈을 이웃나라한테 나누어 준다고 생각해 봐요. 전쟁 날 일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서로서로 ‘군대와 전쟁무기’ 아닌 ‘나눔과 사랑’에 돈과 품과 땀을 들인다면, 지구별은 아름답고 평화롭습니다. 중앙권력자가 사람들을 바보로 길들이려고 군대를 거느리지요. 중앙권력자가 스스로 권력을 지키려고 군대를 더 단단히 갖추지요.


  평화를 바란다면 총칼 아닌 호미와 쟁기를 들 노릇입니다. 평화를 꿈꾼다면 탱크나 전투기나 잠수함이나 미사일 아닌 꽃과 풀과 나무와 숲을 보살필 노릇입니다. 권력이 생기고 군대가 나타나면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생깁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짓을 ‘법으로도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이 되니, 주먹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짓이 자꾸 불거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내녀석이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지요. 군대에 가서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우는 사내녀석이 어떻게 사람이 되겠습니까. 다만, 집에서 어리광쟁이로 지내다가 군대에서 규율에 얽매여 쉬지 못하게 채찍질 받으니까 그제서야 ‘집에서 얼마나 느긋하고 즐겁게 보냈는가’를 돌아보면서 게으른 버릇을 고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집에서 어버이가 이녁 아이 게으른 버릇을 바로세우지 못한 잘못을 깨닫지 않고 ‘군대에 보내면 끝’이라고 여기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바보스러운 마음이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사내녀석은 군대에 가서 주먹질과 ‘사람 죽이는 재주’에 길들여져서 쉽게 주먹다짐을 하고 가정폭력 일으키며 사회범죄를 일으키는 한편, 위계질서에 따라 척척 생체기계처럼 움직이고 맙니다.


  명령과 지시에 따라 복종을 하면 사람 아닌 생체기계예요. 사람은 창조와 상상으로 움직이는 목숨이에요. 사랑과 꿈으로 삶을 지을 때에 사람입니다. 창조도 상상도 빼앗기고, 사랑과 꿈도 잃는다면, ‘사람 죽이는 재주로 스스로 죽이는 노예’ 노릇밖에 못합니다.


.. 고지 쟁탈전은 북한군과 중국군의 죽음만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라는 명령으로 한국군도 고지 쟁탈전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죽어 갔습니다 … 고지 뺏기는 자기의 공적만을 생각한 장군들의 무모한 작전으로,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켰답니다. 그런데도 이를 지휘한 장군들은 곧잘 국군의 용감함과 자신의 공적으로 고지 뺏기를 미화하곤 하죠 … 과거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의 즉시 독립을 원하지 않았죠. 이렇게 살펴보니 미국의 정의가 반드시 한국인에게 정의는 아닌 것 같네요. 오히려 미국은 자기들의 이익과 맞물려 있으면,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그것을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  (70, 71, 190쪽)

 

 


  이임하 님이 일군 《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철수와영희,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나라 푸름이한테 들려주는 ‘남녘과 북녘 사이에 일어났던 생채기’ 이야기입니다. 정치권력자와 학자는 ‘한국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이들한테나 ‘전쟁’이지 ‘전쟁 당사자’한테는 전쟁이 아닌 ‘생채기’입니다.


  내 아이가 죽고 내 옆지기가 죽으며 내 이웃과 동무가 모두 죽은 생채기입니다. 정치권력자끼리 꿍꿍셈 키워 남쪽과 북쪽을 갈랐어요. 정치권력자끼리 꿍꿍속 키워 사회 제도를 나누었어요.


  남녘과 북녘은 남남이 아닙니다. 그저 한겨레일 뿐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남남이 아닙니다. 서울과 경기도는 남남이 아닙니다.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는 남남일까요. 인천과 부천은 남남일까요. 서로 다른 삶 일구는 이웃이자 동무입니다. 서로 다른 삶터에서 다른 사랑 보듬는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 세계를 서로 적대하는 두 세계로 나누어 바라보는 방식은 소련과 북한 또한 미국과 다르지 않았어요. 두 손바닥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 냉전의 세계관은 서로 마주보고 귀를 막은 채 자기만 옳다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곧 냉전의 세계관은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상대가 있어야만 성립하는 세계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소개된 삐라를 읽다 보면, 냉전이 한국 전쟁의 명분으로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 왜 전쟁 반대와 평화가 중요할까요 …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상대를 힘으로 누르거나 굴복시키려 할 게 아니라,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와 교류로 이해해야 합니다 ..  (184, 198, 199쪽)

 


  이야기책 《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가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않습니다. 남녘 정치권력자와 북녘 정치권력자와 미국 정치권력자가 서로 어떤 속셈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괴롭히고 들볶으며 닦달했는지를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정치권력자 틈바구니에서 생체기계처럼 휘둘리거나 휩쓸린 채 죽고 죽이며 스스로 아프고 만 가녀린 사람들 이야기를 조용히 밝힙니다. 누가 전쟁을 불렀고, 누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도록 부추겼으며, 누가 이 나라를 이토록 망가뜨렸는가 하는 뿌리를 가만히 속삭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슬픈 전쟁이나 슬픈 노예나 슬픈 군대나 슬픈 ‘삐라 공작’이 아닌, 즐거운 평화와 아름다운 사랑과 따사로운 꿈을 키우자는 이야기를 천천히 펼칩니다.


  군대는 전쟁을 부릅니다. 군대는 죽음을 부릅니다. 군대는 미움과 주먹다짐과 따돌림을 부릅니다. 평화가 평화를 부릅니다. 사랑이 사랑을 부릅니다. 꿈이 꿈을 부릅니다. 이 나라 예쁜 아이들이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를 빕니다. 이 나라 예쁜 어른들이 하루빨리 군대를 훌훌 털어내어 평화로운 삶 일구기를 빕니다. 이 나라 예쁜 아이들이 전쟁 아닌 평화를 생각하고, 죽음 아닌 사랑을 헤아리며, 미움·주먹다짐·따돌림 아닌 웃음·노래·춤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빕니다. 4346.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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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6-2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긴 글을 쓰시다니, 하실 말씀이 많으셨나 봐요.


"군대는 전쟁을 부릅니다. 군대는 죽음을 부릅니다. 군대는 미움과 주먹다짐과 따돌림을 부릅니다. 평화가 평화를 부릅니다."
- 세계인이 모두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군사력에 들어가는 비용이 전부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잘 보고 갑니다. ^^

숲노래 2013-06-21 14:50   좋아요 0 | URL
군대와 전쟁 이야기는 그닥 하고 싶지 않지만,
모르는 사람, 제대로 모르는 사람, 올바로 알려고 안 하는 사람, 잘못 아는 사람...
너무 많아서,
또 책이 아름답기 때문에
이래저래 그럭저럭 이야기를 붙였어요.

부디 '군대와 전쟁'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똑똑히 알기를 바랍니다......
 
늑대 숲, 소쿠리 숲, 도둑 숲 동화는 내 친구 19
미야자와 겐지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이종미 그림 / 논장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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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32

 


맑은 눈빛 숲아이
― 늑대 숲, 소쿠리 숲, 도둑 숲
 미야자와 겐지,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2000.10.10./7000원

 


  숲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숲노래를 부릅니다. 숲노래에는 숲내음 실리고, 숲빛 감돌며, 숲무늬 어여쁩니다. 숲노래는 숲사람 누구나 듣습니다. 숲노래는 숲벌레와 숲짐승도 함께 듣습니다.


  들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들노래를 부릅니다. 들노래에는 들내음과 들빛과 들무늬 곱게 어우러집니다. 들노래는 들사람이라면 누구나 듣고, 들벌레와 들짐승도 나란히 듣지요.


  바다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바다노래를 불러요. 멧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멧노래를 불러요. 아이들은 저마다 이녁 삶터에서 노래를 부르지요. 가장 고운 목청을 뽑아 가장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 겐쥬는 항상 새끼줄을 허리에 매고, 싱글벙글 웃으며 숲속이나 밭고랑을 느릿느릿 걸어다녔습니다. 빗속의 푸른 대숲을 보면 좋아서 눈을 깜박깜박하고, 푸른 하늘을 끝없이 날아가는 매를 발견하면 깡충거리며 손뼉을 쳐서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겐쥬를 몹시 얕잡아보고 놀려댔기 때문에, 겐쥬는 점점 웃지 않는 척하게 되었습니다 … “겐쥬, 오늘도 숲을 지키고 있군.” 도롱이를 입고 지나가던 사람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삼나무에는 짙은 밤색 열매가 열리고, 당당한 초록빛 가지 끝에서는 차갑고 맑은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습니다. 겐쥬는 입을 한껏 벌리고 하아하아 가쁜 숨을 쉬었습니다. 겐쥬의 몸이 빗속에서 김을 내며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  (8, 15∼16쪽)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깊은 두멧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거의 안 남았습니다. 마을은 시골이라 하더라도 읍내나 면소재지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많아요. 호젓한 두멧자락에서 멧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닫고 새벽을 여는 아이가 매우 드뭅니다. 이제, 이 나라 아이들 거의 모두는, 숲이나 들이나 바다나 멧골이 들려주는 노래를 알지 못한다 할 만해요. 이제, 이 나라 아이들 거의 모두는, 스스로 숲노래도 들노래도 바다노래도 멧노래도 부르지 못해요.


  그런데, 아이들 어버이부터 숲노래를 안 부릅니다. 아이들 어버이부터 들노래를 잊고 바다노래를 잊으며 멧노래를 잊어요. 어른들 스스로 시골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지 못해요. 어른들 스스로 시골에서 놀고 일하는 웃음꽃 피우지 못해요. 어른들부터 맑은 숨결 누리지 않으면, 아이들은 맑은 숨결 받아먹지 못합니다. 어른들부터 밝은 눈빛 밝히지 않으면, 아이들은 밝은 눈빛 어떻게 밝히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함께 걸어가는 길이에요. 같이 손을 잡는 길이에요. 서로 어깨동무하는 길이지요. 나란히 춤을 추며 노래하는 길입니다.


  삶을 노래합니다. 사랑을 노래합니다. 꿈을 노래합니다. 오직 이 세 가지를 노래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찾아오는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을 즐겁게 맞이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마시는 바람을 고마이 들이켭니다. 늘 새삼스레 내리쬐는 햇살을 따사로이 받아먹습니다. 노상 푸르게 피어나는 풀과 나무와 꽃을 싱글벙글 웃으며 들여다봅니다.


.. 네 명의 농부들은 저마다 저 좋은 쪽에 대고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에 밭을 일구어도 괜찮소오?” “괜찮소오.” 숲은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집을 지어도 괜찮소오?” “괜찮소오.” 숲은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네 사람이 또다시 한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여기에 불을 피워도 괜찮소오?” “괜찮소오.” ..  (81쪽)


  아이들한테 숲소리를 돌려주셔요. 그리고, 어른들 스스로 숲소리를 되찾아요. 자동차에 열쇠 꽂아 부릉거리는 소리 말고, 새벽을 여는 소리를 되찾아요. 아이들한테 자동차 부릉거리는 소리 말고 멧새 소리를 돌려주셔요. 자동차 발판을 꾸욱 밟으며 부릉거리며 달리는 소리 말고 냇물 쪼르르 흐르는 소리를 돌려주셔요. 자동차 끼익 세우는 날선 소리 말고 풀벌레와 개구리 노래하는 소리를 돌려주셔요.


  아스팔트와 시멘트 걷고 흙땅을 되찾아 주셔요. 흙땅에 온갖 들풀 흐드러지도록 돌려주셔요. 흙땅에 나무들 씩씩하게 뿌리내려 오백 해 오천 해 우람하게 자라도록 돌려주셔요. 새벽과 멧새와 개구리와 푸나무 모두,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 스스로 기쁘게 누려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름다움이에요. 돈으로 사로잡지 못하는 사랑이에요. 돈으로 홀리지 못하는 꿈이에요. 아름다운 삶은 사랑과 꿈으로 일구어요.


  돈으로는 도시를 지어 물질문명사회 이룩하겠지요. 돈으로는 높은 건물 시멘트와 쇠붙이로 척척 올리겠지요. 돈으로는 더 비싸고 커다란 자가용 만들겠지요. 돈으로는 더 커다랗고 번쩍거리는 놀이공원이나 관광단지 짓겠지요.


  그러면, 돈으로 무엇을 누리나요. 돈으로 닦고 세우고 만들고 놓고 지은 곳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누리나요. 수천 억원 들인 길다란 다리를 수천만 원 자가용 몰아 씽 하고 건너면 무엇을 누리나요. 수천 억원 들인 고속도로를 수천만 원 자가용 몰아 쌩 하고 달리면 무엇을 누리나요.


  마음을 기울여 보살핀 숲길을 걸어요. 주머니에 든 것 모두 내려놓고 맨몸으로 아이 손을 잡고 숲길을 걸어요. 숲은 우리한테 돈을 내라 하지 않아요. 숲은 우리더러 신분증이나 졸업장을 보여주라 하지 않아요. 숲은 우리한테 잘생기고 못생기고 따지지 않아요. 숲은 우리더러 사내냐 가시내냐 금을 긋지 않아요.


.. 그 새벽녘 하늘 밑, 낮에는 새들도 가지 않는 높은 곳을 날카로운 서리 조각이 바람에 실려 사락사락 사락사락 남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 희미한 소리가 언덕 위의 한 그루 은행나무한테도 들릴 만큼 맑은 새벽입니다. 은행 열매는 모두 한꺼번에 눈을 떴습니다. 모두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오늘은 진짜로 여행을 떠나는 날입니다. 다들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  (118쪽)


  미야자와 겐지 님 어린이문학을 그러모은 《늑대 숲, 소쿠리 숲, 도둑 숲》(논장,2000)을 읽습니다. ‘숲아이’ 겐쥬가 나오고, ‘숲동무’한테서 노래를 배우는 고슈가 나옵니다. 숲아이 겐쥬는 마을에 없는 숲을 스스로 돌보고 건사하면서 아끼다가 아주 어린 나이에 몸져눕다가 숨을 거둡니다. 숲동무를 만나며 쳇쳇거리던 고슈는 숲동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이녁이 억지로 악기를 켤 때에는 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지 못하는가를 깨닫습니다. 고슈는 어느새 ‘숲어른’으로 거듭납니다.


  겐쥬도 고슈도, 곧 숲아이도 숲어른도, 마음속에 사랑을 채울 때에 그지없이 사랑스러워요. 마음속에 꿈을 실을 때에 더없이 홀가분히 날갯짓하는 꿈노래 불러요.


.. “다르긴 뭐가 달라.” “그럼, 당신이 모르는 거예요. 우리 뻐꾸기는 뻐꾹 하고 만 번을 울어도, 그 만 번이 저마다 다른걸요.” … 고슈는 처음에는 짜증스러웠지만, 한참 켜다 보니 어쩐지 새의 음이 진짜 도레미파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37, 140쪽)


  맑은 눈빛이 될 적에 맑은 사랑을 합니다. 맑은 사랑을 할 적에 맑은 삶을 가꿉니다. 맑은 삶을 가꿀 적에 맑은 노래를 불러, 맑은 마음 품은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맑은 마음 품은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니, 시나브로 맑은 말마디로 맑은 이야기 나누겠지요.


  온누리를 밝히고 지구별 보살피는 힘은 바로 맑은 눈빛으로 꿈꾸는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숲을 생각해요. 숲에서 살아요. 숲을 돌봐요. 숲을 가슴으로 포옥 얼싸안으면서 환하게 웃어요.


  미야자와 겐지 님은 ‘숲어른’으로 살아가면서 ‘숲아이’를 꿈꾸듯 글을 썼어요. 지식으로 쓴 글이 아니라 숲어른으로 살아가면서 쓴 글이에요. 교육이나 훈육이나 감동이나 교훈 같은 것을 내세우는 동화가 아닌, 숲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어요.


  시골에서 살며 숲을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시골에서 흙을 사랑하기를 꿈꾸면서 숲을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숲바람 마시고 숲동무 사귀면서 이야기꾼이 됩니다. 먼먼 옛날부터 시골사람은 멧새 새벽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열었고, 멧새 저녁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닫았어요. 4346.6.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맑은 어린이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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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6-20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살기님! 이 책 너무 좋을 듯 해요~^^
제목도 책표지 그림도 내용도 다 막~끌리네요.
감사히 잘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3-06-20 10:47   좋아요 0 | URL
미야자와 겐지 님 동화책은 다 좋아요.
그런데 출판사에 따라
이리저리 뒤죽박죽이더라고요.
또한, 번역자에 따라 이래저래 뒤숭숭하고요.

저는 이 책을 사기는 했지만
번역이 그렇게까지 아름답지 못했어요.

앞으로 누군가 겐지 동화선집이나 동화전집을
제대로 번역해서 어린이 눈높이로 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답니다..
 
동심에서 건져 올린 해맑은 감동, 동시 쓰기 새로운 글쓰기의 보고 세상 모든 글쓰기 (랜덤하우스코리아) 13
이준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32

 


동시쓰기와 동시읽기는 무엇인가
― 동심에서 건져올린 해맑은 감동, 동시쓰기
 이준관 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207.12.7./7500원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이라 할 때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떠한지 모릅니다. 나는 내 느낌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나는, 맨 처음으로 ‘따스함’이 떠오릅니다. 다음으로, ‘좋다’가 떠오르고 ‘웃음’이 떠오릅니다. ‘기쁨’이 뒤따릅니다. ‘환한 빛’이 떠오르고 ‘무지개’와 ‘빗방울’과 ‘개구리 노랫소리’와 ‘제비 먹이 물리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꿈을 생각합니다. ‘꿈’이라 할 때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찬찬히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꿈을 어떻게 바라볼는지 모릅니다. 나는 내 느낌만 짚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햇살’이 떠오릅니다. 다음으로, ‘즐겁다’가 떠오르고 ‘노래’가 떠오릅니다. ‘어깨동무’가 떠올라요. ‘빛살’과 ‘노을’과 ‘새벽’이 떠오릅니다. ‘보람’과 ‘땀방울’이 나란히 떠올라요.


.. 사랑은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남의 아픔을 달래고 감싸 주려는 마음이다. 동시를 쓰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남의 아픔을 달래고 감싸 주려는 사랑의 마음이어야 한다 ..  (35쪽)


  동시쓰기를 가르치는 분도 제법 있고, 동시쓰기 강의를 하거나 책을 내는 분이 더러 있는데, 나는 동시쓰기를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뿐 아니라 어른시도 ‘어른시쓰기’를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동시읽기도 가르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어른시읽기’도 가르칠 수 없으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동시이든 어른시이든, 시를 쓸 적에는 ‘마음’을 ‘글’로 옮기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그리라고 가르치거나 알려줄 수 없어요. 글을 쓴 사람 마음이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따지거나 재거나 나무라거나 추켜세울 수 없어요.


  오직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시 즐기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느 것도 가르칠 수 없지만, ‘시를 즐겁게 쓰기’하고 ‘시를 즐겁게 읽기’, 이렇게 두 가지만 가르칠 수 있다고 느껴요.


  이준관 님이 쓴 《동심에서 건져올린 해맑은 감동, 동시쓰기》(랜덤하우스코리아,2007)라는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동시쓰기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책을 다 쓰는가 싶어 궁금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준관 님은 ‘사랑’이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라고 적바림하는데, 또 아픔을 달래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적바림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사랑’을 너무 작고 좁게 바라보는 결이지 싶습니다. ‘사랑’ 가운데 이런 마음이 한 자락 있을 테지만, 사랑은 품이 한결 넓어요.


  이웃사랑, 지구사랑, 아이사랑, 책사랑, 만화사랑, 놀이사랑, 하늘사랑, 바다사랑, 숲사랑, 마을사랑, 나라사랑, 노래사랑, 밥사랑, …… 들을 헤아려 봅니다. 어떤 사랑이 되든 ‘맞은편 마음 헤아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걱정해 주기’란 ‘걱정’이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얕습니다. 달래기, 어루만지기, 감싸기, 같은 느낌도 ‘달램’과 ‘어루만짐’과 ‘감쌈’에서 맴돌 뿐, ‘사랑’으로 와닿기에는 어쩐지 동떨어집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해요. 할아버지가 흙을 사랑하고 할머니가 나무를 사랑해요. 나무가 사람을 사랑하고, 숲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숲을 사랑하고, 사람이 하늘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한결 넓으면서 깊게 바라볼 때에, 동시를 쓰는 마음이란 어떠한 결인가를 새롭게 깨닫거나 느끼리라 봅니다.


.. 동시를 쓰는 사람들이 가장 고심하는 것이 바로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소재는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시의 소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주변에 있다 ..  (53쪽)


  나는 글을 쓰면서 ‘걱정’하는 일이 없습니다. 걱정을 하자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너무 마땅합니다. 걱정이 넘치는 사람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까 걱정한다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글을 쓰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도 없는데 ‘글 쓸 거리’를 찾거나 끌어당긴대서 ‘글이 되’지 않아요.


  곧, 동시이든 어른시이든, 그러니까 ‘글’을 쓰려면 ‘쓸거리(소재)’ 아닌 ‘이야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이웃과 동무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깨달을 때에 글을 씁니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알아차릴 때에 글을 읽습니다.


  글읽기(책읽기)는 아무나 못 합니다. 글읽기(책읽기)는 참말 아무렇게나 못 합니다. 누군가 베스트셀러나 권장도서나 추천도서를 선물해 주었기에 하는 글읽기(책읽기)가 아니에요. 글(책)을 읽으려 한다면, 그 글(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을 스스로 먼저 느껴야 하고, 그 글(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어떻게 다스려서 새롭게 거듭나고 싶은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글(책)로 읽고 싶은 ‘이야기’를 모르는 채 글(책)만 붙잡는다면 아무것도 못 얻어요. 얻을 수 있는 한 가지라면 ‘아무것도 못 얻는다’는 대목만 얻지요.


  다시 말하자면, 쓸거리는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쓸거리는 “생활 주변에 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쓸거리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쓸거리란 바로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니, 내 마음속에서 길어올려야 합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내 삶 언저리’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머나먼 곳에 있는 낯선 나라 낯선 마을 모습과 삶’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찾든,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일 때에 글(동시, 어른시, 동화, 소설, 산문)을 쓸 수 있어요.


.. 눈으로 보는 것은 구경꾼이나 관찰자에 불과하다. 한발 비켜서 있는 구경꾼의 글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 어렵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했거나 해 본 일은 그 감동이나 느낌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  (74쪽)


  나는 눈으로 바라보기를 좋아합니다. 눈만큼 ‘큰 경험’이 없습니다. 씨앗을 눈으로 보고, 밥물 끓는 모습을 눈으로 봅니다.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하루 내내 눈으로 지켜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 아이들과 함께 달리면서, 우리 보금자리 깃든 전남 고흥 어여쁜 마을살이를 눈으로 살펴봅니다.


  눈으로 실컷 누리면서 코로 맡습니다. 씨앗내음을 맡고, 밥물 끓는 내음을 맡습니다. 아이들 머리카락 사이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들 옷에 때나 땀이나 얼룩이 얼마나 묻었나 냄새를 맡습니다. 시골길 다니며 들내음과 숲내음과 바다내음 맡습니다.


  그리고, 살갗으로 헤아립니다. 마음으로 살핍니다. 나를 둘러싼 이 아름다운 누리를 모든 세포를 깨워서 낱낱이 느낍니다. 좋은 느낌을 찾고, 즐거운 빛을 살피며, 반가운 꿈을 돌아봅니다.


  눈으로 바라본대서 ‘구경꾼’이 아닙니다. 구경꾼이란 ‘뒷짐 진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인데, 아이를 돌보는 몫을 어머니한테만 떠맡기고 바깥으로만 나돌거나 집에서 아이들 보살피는 몫 건사하지 않는 여느 아버지들이 바로 ‘구경꾼’입니다. 빨래 안 하고, 밥 안 지으며, 청소 안 하고, 아이들 자장노래 안 불러 주는 수많은 여느 아버지들이 바로 ‘구경꾼’이에요.


.. 생활 속에 시가 있다. 생활하면서 느낀 것, 또는 하고 싶은 말을 시로 써 보라. 아이들의 생활을 눈여겨보고 시로 써 보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시로 써 보라. 우리 생활 주변에 있는 사물과 동식물들도 재미있게 시로 옮겨 보라 ..  (167쪽)


  글로 쓸 거리란 ‘사람들 마음속에 다 있다’고 느낍니다. 글을 읽어 얻을 생각도 ‘사람들 마음속에 다 있다’고 느껴요. 그래서 동시나 어른시 모두 “생활 속에 시가 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삶에 시가 있다’기보다 ‘내 마음속에 시가 있다’고 말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삶이란 무엇이겠어요. 삶이란 내가 누리는 하루가 모여 이루어지는 이야기예요. ‘이야기’가 ‘삶’이에요. 그러면, 이야기란 또 무엇이겠어요.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이야기예요. 곧 ‘마음’이 ‘이야기’입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라 하는 이야기란 또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지요.


  사랑을 들려주고 싶기에 글(시)을 씁니다. 사랑을 듣고 싶기에 글(책)을 읽습니다. 실마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름답구나 싶은 글(시)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이 실마리를 잘 깨우친 분이라고 느낍니다. 윤동주 님도, 이원수 님도, 권정생 님도, 임길택 님도, 바로 이 같은 실마리를 슬기롭게 깨우쳤어요. 이분들은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고픈 ‘마음’을 살찌우고 아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고픈 마음을 살찌우고 아끼는 하루를 가다듬으며 ‘삶’을 일구었어요. 언제나 스스럼없이 글(시)이 샘솟지요. 꾸며서 쓰는 글(시)이 아니라, 싱그럽게 노래하며 쓰는 글(시)이에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현덕, 백석, 권태응 같은 분들이 노래한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삶노래’이고 ‘사랑노래’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넘실거리는데, 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사로잡히는가요. 마음속에서 샘솟는 사랑노래가 자꾸자꾸 넘치는데, 굳이 “생활 주변에 있는 사물과 동식물들도 재미있게” 옮기는 글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삶을 써야 글이 맞습니다. 삶을 쓸 때에 시가 됩니다. 그러면, 글이 맞고 시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부터 또렷이 살펴야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마음,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는 하루와 하루가 모여 ‘삶’이 됩니다.


.. 동시를 쓰려면 준비 단계가 필요하다.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 세계와 동심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아이들을 잘 알고 좋아해야 한다. 자기가 쓰려고 하는 아이들과 친해야 한다. 아이들과 만나서 친할 기회가 없으면 아이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해야 한다 ..  (19쪽)


  이준관 님이 쓴 《동심에서 건져올린 해맑은 감동, 동시쓰기》라는 책에는 다른 어느 동시작가 작품보다 이준관 님 작품을 아주 많이 다룹니다. 이준관 님 스스로 동시를 쓰시니, 이녁 작품을 보기로 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동시쓰기 일반론을 펼치려 한다면, 이녁 작품은 되도록 한두 꼭지로만 다루고, 다른 동시작가 작품을 다루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이녁 작품을 보기로 들면서 ‘잘 쓴 글’이라는 말까지 거듭 덧붙이는데, 이렇게 ‘스스로 칭찬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자주 보여주는 일은 좀 남우세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붙이자면,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아이들을 잘 알고 좋아해야” 하기는 할 텐데, 동시를 쓰려는 사람이 “아이들과 만나서 친할 기회가 없”을 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게다가 “아이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해야” 한다는 말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이들하고 만나면 되지, 왜 아이들 세계 연구를 하고, 왜 아이들 세계를 학문으로 밝힌 책을 읽으라고 하는가요. 이런 책읽기야말로 ‘구경꾼’ 되는 노릇이지 싶습니다. 스스로 몸으로 겪지 않은 일을 써서는 ‘감동’을 할 만한 동시를 못 쓴다고 책에 밝힌 이준관 님인데, 동시를 쓰려는 사람들한테 책 첫머리부터 ‘구경꾼’이 되라고 말하는 대목은 좀 아찔합니다. 우리 둘레에 아이들이 없어서 ‘책으로 아이들을 연구’해야 할까요.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동시를 쓰는 사람은 모두 어른입니다만, 어른이라는 사람 누구나 어린이였습니다. 어린이에서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사람은 몸뚱이가 어린이하고는 사뭇 멉니다. 그러나, 어린이로 살아온 나날이 몸속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스스로 내 몸을 돌아볼 수 있다면, ‘내 마음속에 깃든 어린이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이 마흔이나 예순이라 하더라도 나이 여섯이나 아홉 아이들과 똑같이 어울려 뛰놀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속 어린이 모습’을 찾아내어 둘레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면 곧바로 ‘어린이마음(동심)’이 되어요.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스스로 어린이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이웃하고 나누고 싶은 사랑’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갈무리하면서 ‘스스로 어린이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찾지 말아요.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서 찾지 말아요. 아이들을 ‘우리 집’에서 찾아요. 아이들을 우리 삶터와 우리 마을에서 찾고, 다른 어느 곳보다 ‘우리 마음속’에서 아이들을 찾아요. 4346.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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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장터 이야기 - 세상과 만나는 작은 이야기
정영신 지음, 유성호 그림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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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34

 


고무신 꿰는 시골아이
― 시골 장터 이야기
 정영신 글,유성호 그림
 진선출판사 펴냄,2002.3.15./8000원

 


  나는 운동신이나 구두를 못 신습니다. 서른 살까지 어찌저찌 이런 신 저런 구두를 신으며 이럭저럭 버티었는데, 서른 살 때부터 고무신을 만나, 이때부터 언제나 고무신만 신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고무신을 신으며 즐겁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고무신 신을 일이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내 둘레 아이나 어른 모두 운동신이나 구두를 발에 꿰니 나도 이런 신만 익숙하게 신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도시라 하더라도 저잣거리로 마실을 가면 고무신 만날 수 있어요. 서울이든 인천이든 부산이든, 큰길에 있는 신집 말고 저잣거리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신집으로 찾아가면 어김없이 고무신을 다룹니다.


.. 농사에 필요한 연장을 파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립지다. 호미와 낫을 비롯하여 이토록 많은 연장이 시골 농사에 필요하다는 것을 장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들입니다 ..  (36쪽)


  요사이에는 ‘고무’로 만든 고무신 말고 플라스틱을 눌러 만든 ‘이름만 고무신’인 ‘플신(플라스틱신)’이 아주 많습니다. 고무로 만든 고무신은 딱딱해서 뒷굽과 앞꿈치 자꾸 까진다며 사람들이 꺼리면서 이제는 예전 고무신은 더는 나오지 않아요. 그나마 고무신 공장이 모두 중국에 있는데, 딱딱한 고무신은 중국에서만 사고팔리는 듯해요.


  서른 살부터 서른아홉 살 오늘까지 줄곧 고무신만 신으며 둘레를 돌아보면, 내 또래 가운데 고무신 발에 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엇비슷합니다. 고무신 발에 꿰는 사람은 시골 할매와 할배 빼고는 없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저씨나 아주머니조차 내 고무신을 바라보며 “그 고무신 어디서 사요?” 하고 묻기까지 합니다. 읍내 신집이든 면내 신집에 가면 다 있는 고무신인데, 나한테 묻는 사람이 참 알쏭달쏭합니다. 아니, 요즈음 같은 이 나라에서 저잣거리 신집 찾아가는 젊은 사람 없을 테니, 고무신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모두들 모른다고 할 만하겠지요.


  시골 아닌 도시에서 지낼 적에도 그래요. 도시에서도 오래된 도심 저잣거리 찾아가면 그곳 신집에 고무신 있는걸요. 어른 고무신도 있고 아이 고무신도 있어요. 아이 고무신은 130미리부터 있어요. 우리 아이들 신는 고무신은 도시에서도 사고 시골에서도 사요. 어디에든 다 있어요.


.. 몇 십 년 동안 뻥튀기 장사를 해 온 아저씨의 꿈은 시골마을에 뻥튀기 기계를 마련해서, 장날이 아니라도 아이들이 뻥튀기를 먹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동구 밖에서 아이들의 함성과 함께 기계를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  (45쪽)


  전남 순천에는 아랫장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큰 저잣거리 있어요. 이곳에서는 저자가 날마다 열려요. 시외버스 타고 순천에 갈 적에 으레 아랫장을 스치는데, 아랫장에는 사람 아주 많아요. 시외버스 타고 고흥에서 순천으로 나오는 길에 벌교를 지나고 보면, 벌교 저잣거리에도 사람이 매우 많아요. 구경하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무척 많아요. 고흥하고 고작 한 시간 거리인데, 순천도 벌교도 사람 참 많구나 싶어 놀라요. 왜냐하면, 고흥에서는 오일장이라 하는 장날에도 장터 장사꾼 얼마 없고, 장터 구경꾼 얼마 없거든요. 장날에 볼일 보러 읍내로 나가면 군내버스에 할매와 할배 바글바글 넘쳐 때로는 버스를 못 타기까지 해요. 그렇지만 군내버스에만 사람 가득할 뿐, 저잣거리에도 마을에도 읍내에도 사람은 얼마 없어요.


  도시로 마실을 가서 커다란 가게, 이른바 마트라 하는 데에 들어가면 사람 아주 많아요. 숨이 막히도록 사람이 많아요. 도시에서는 시내라는 데에도 사람 참 많아요. 버스에도 전철에도 온통 사람물결이에요. 그러고 보면, 도시에서는 스무 층이건 마흔 층이건 높다라니 층집 세우지 않고서는 사람들 지낼 보금자리 마련하지 못하지요. 너무 많은 사람을 너무 좁은 곳에 몰아놓는 바람에, 도시에서는 사람들 스스로 서로를 알뜰히 여기거나 보살피려는 마음 옅어요. 사람 많아 장사하기 좋다 하기도 하고, 사람 많으니 일거리 많다 여기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외려 사람내음 맡기 어렵기 일쑤예요.


  그러면, 시골에서는 사람내음 구수할까요. 시골이기에 사람내음 따사로울까요.


  잘 모르겠어요. 시골이라서 더 구수하거나 따사롭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어디에서건 사람들 스스로 구수한 마음 되려 애쓸 때에 구수한 내음 흐르고, 어디에서라도 사람들 스스로 따사로운 사랑을 가꿀 때에 따사로운 사랑 감돌아요.


  도시에 있는 마트라서 나쁠 수 없고, 시골에 있는 저잣거리라서 좋을 수 없어요. 일하는 사람 마음이 좋을 때에 좋고, 장사하는 사람 마음이 나쁠 때에 나쁠 뿐이라고 느껴요.


.. 이름이 다른 씨앗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한 톨의 씨앗이 훗날엔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어떤 마술사도 하지 못할 일을 자연만은 말없이 해내고 있습니다. 땅을 지키며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의 정직함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65쪽)


  오늘날 시골에서 고무신 꿰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아예 없다고 해도 좋아요. 군내버스 타고 읍내에 나갈 적이든, 자전거 타고 면내에 나갈 때이든, 고무신 꿴 어린이나 어른은 거의 못 봐요. 마을에서 흙 만지는 할매와 할배는 으레 고무신이거나 맨발이지만, 읍내나 면내를 돌아다니는 분들은 모두 운동신이거나 구두예요. 군내버스 타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상표 있는 운동신이거나 구두예요. 때때로 시골 초·중·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아이들 바라보아도 하나같이 상표 있는 운동신이거나 구두예요. 아마, 이 시골 아이들 낳아 키우는 시골 어버이도 모두 상표 있는 운동신이거나 구두일 테지요. 흙을 만져도, 시골 젊은 어른들은 고무신하고 사귀지 않아요.


  그리고, 시골 젊은 어른들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아요. 시골 젊은 어른들은 자가용 몰아 ‘시골 마트’를 다녀요. 또는 자가용 몰아 가까운 도시 ‘큰 마트’를 찾아가요. 도시와 가까운 시골이든 두멧자락 시골이든, 젊은 어른들은 자가용하고 사귀어요. 시골마을 젊은 어른들은 시골일 그닥 좋아하거나 즐기지 않아요. 텔레비전을 좋아하고 손전화(요새는 스마트폰)를 즐기지요. 도시나 시골이나 거의 같아요. 도시나 시골이나 흙하고는 멀어져요. 도시나 시골이나 학교에서는 흙을 보여주지 않고 말하지 않으며 가르치지 않아요. 도시 학교나 시골 학교나 흙운동장 그대로 두지 않고, 인조잔디나 아스콘을 깔려고 해요.


.. 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 많아서 아주머니들은 철따라 나는 산나물을 가지고 나와서 팝니다. 주변 마을의 소식이 궁금한 아주머니들은 빙 둘러앉아서 그간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는 모습이 다정해 보입니다 ..  (87쪽)


  정영신 님 글과 유성호 님 그림으로 이루어진 《시골 장터 이야기》(진선출판사,200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에 깃든 유성호 님 그림은 아무래도 ‘정영신 님이 찍은 사진’을 고스란히 옮겼구나 싶습니다. 정영신 님은 2012년 8월에 《한국의 장터》(눈빛)라는 사진책 내놓았어요. 그러니까, 《시골 장터 이야기》라는 책은 정영신 님이 스스로 쓴 글이랑 손수 찍은 사진으로 엮을 수 있었어요. 굳이 ‘사진을 베낀 그림’을 넣지 않아도 돼요.


  아이들 보는 책이라서 사진 아닌 그림을 넣었을까요. 아이들 보는 책에는 사진을 넣으면 안 될까요. 시골 저잣거리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 한다면, 그림보다는 오히려 사진이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정영신 님은 사진을 구수하니 곱게 찍어요. 구수하니 곱게 담은 시골 저잣거리 사진하고 수수하니 투박하게 빚은 글을 잘 엮으면, 어른도 아이도 즐겁게 읽을 《시골 장터 이야기》 되리라 느껴요.


  시골 저잣거리 누리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젊은이도 사라지는 오늘날로서는 《시골 장터 이야기》와 《한국의 장터》처럼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사람들 어울리는 이야기’ 보여주는 책은 더 없으리라 느껴요. 지나간 옛 모습이나 사라진 지난 모습 아닌, 바로 오늘 시골사람 누리는 시골 저잣거리 이야기로는 정영신 님 책 두 가지만 있구나 싶어요. 이 이야기책 곱게 아끼는 손길로 시골마을 또한 곱게 돌보는 사람들 하나둘 태어나면 좋겠어요. 4346.5.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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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2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불쑥 집에 들린, 친구와 그림책들을 보며 이야기하다가
<한이네 동네 이야기>에 골목 담옆에서 목마 타는 아이들 그림을 보며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나중에 이런 목마 태우는 사람이 되어, 타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다 목말을 태워주면 그것도 참 재밌겠다.~' 저는 이구, 이 목마아저씨는 생업이야. 너는 낭만이고.
'그러니 더 즐거울 것 아니야' 합니다. ^^

숲노래 2013-05-28 14:37   좋아요 0 | URL
한이네 동네 이야기라는 그림책
한번 찾아보아야겠군요~

동무와 그림책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란
참 즐거우리라 느껴요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바바라 아몬드 지음, 김윤창.김진 옮김 / 간장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아버지가 아이 돌보기
[사랑하는 배움책 17] 바바라 아몬드,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간장,2013)

 


- 책이름 :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 글 : 바바라 아몬드
- 옮긴이 : 김진, 김윤창
- 펴낸곳 : 간장 (2013.4.11.)
- 책값 : 15800원

 


  아이들은 시외버스를 타면 갑갑해 합니다. 좁은 걸상에 꼼짝 않고 앉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버티기 힘드니까요. 아이들 아닌 어른도 시외버스에서 견디기 벅찹니다. 시외버스에서 여러 시간 견디기 힘드니, 어른들은 시외버스에 텔레비전을 붙여서 들여다보곤 합니다. 그런데, 시외버스에 붙인 텔레비전에서는 ‘어른들이 보는 연속극이나 영화나 쇼’만 흐르지, ‘아이들이 볼 만한 영화나 만화나 이야기’는 흐르지 않아요. 아이들은 어른들 사이에서 괴롭고 슬프게 낑겨야 합니다.


  시외버스에서 창문이라도 열 수 있으면, 바깥바람 조금 쐬면서 버스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멧자락이든 들판이든 숲이든 시골이든 구경하겠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 시외버스는 모두 통유리입니다. 아이들은 바람놀이도 창밖놀이도 즐길 수 없습니다. 과자를 우걱우걱 먹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꼼지락꼼지락 이리저리 움직일밖에 없어요.


  아이를 낳아 돌본 어른이라면, 이리하여 아이들 데리고 시외버스를 타며 돌아다닌 적 있는 어른이라면, 시외버스에 아이들 태우고 움직일 때에 얼마나 고단한가 알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젊은 날 아이를 낳아 돌보았어도 나이들며 이런 고단함을 잊는 어른이 많아요. 아직 많이 젊은 사람들이나 푸름이 들도 이런 대목을 제대로 못 짚기도 해요. 저희가 어릴 적에도 ‘시외버스에서 소리 지르거나 우는 아이’ 모습인 줄 떠올리지 못하지요.


  두 아이 데리고 고흥에서 일산까지, 또 일산에서 음성으로, 다시 음성에서 고흥으로, 이렇게 여러 날 걸쳐 시외버스를 타고 움직이며 생각합니다. 두 아이 어버이는 아이들 옷가지와 여러 짐을 커다란 가방과 작은 가방에 나누어 담고 나릅니다. 아이들 보듬습니다. 이래저래 온몸 쑤십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듭니다. 시외버스에서 세 시간 남짓 신나게 놀다가 드디어 마지막 한 시간 즈음 달게 잠들기도 하지만, 대여섯 시간 넘는 시외버스 마실길 내내 몸이 간지럽고 좀이 쑤셔서 이리저리 뒤척거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우리 둘레에 ‘아이를 데리고 태운 어버이’ 있으면 반갑습니다. 아마 그분도 우리가 반가우리라 생각해요. 그분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내가 반갑고, 우리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그분이 반갑겠지요. ‘아이를 데리고 태운 어버이’가 시외버스에 여럿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합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눈 마주치며 잘 놀기도 하고, 어느 아이 하나 소리를 지르더라도 한결 가붓하게 아이들 보듬을 만합니다.


.. 50년 전에는 조부모, 숙모와 삼촌, 그리고 형과 언니들이 종종 아이 키우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확대가족의 붕괴는 이제 자녀보육의 부담을 온전히 부모에게, 대개는 어머니에게 지운다 …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마음은 온 사랑을 쏟고 모든 것을 다 주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를 이상화하며, 거기에는 양가감정 같은 정상적인 감정 반응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 확대가족의 도움 없이도 모두 다 해내고자 하는 것, 즉 일도 하고, 아이들도 ‘제대로’ 키우고, 남편과 친밀한 관계도 지속하고, 취미와 사회생활, 운동 일정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어머니들이 품고 있는 기대치이다. 양가감정은 오직 그런 목표들이 야기하는 기력 소진과 불가피한 실패에 의해 악화될 수 있을 뿐이다 ..  (35, 58, 165쪽)


  아버지 혼자 아이 둘 데리고 마실을 다니거나 저잣거리 나들이를 하면, 둘레 어른들이 자꾸 “애 어머닌 어디 갔수?” 하고 묻습니다. 할매가 묻든 할배가 묻든, 이런 물음을 들으면 나는 아무 대꾸를 않습니다. 대꾸할 값어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이 있으면 조용히 자리를 옮깁니다. 아이들 귀에도 이런 말이 흘러들거든요.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 있어요. 누런소와 검은소 두 마리를 바라본 어느 양반네가 흙일꾼한테 큰소리로 물었다지요.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느냐고. 이 소리 들은 흙일꾼은 논에서 소 두 마리 부리다가 말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양반네를 데리고 멀리 자리를 옮기면서 귀엣말로 그런 소리 함부로 말라고, 소가 다 알아듣는다고 했다지요.


  아이들은 다 알아들어요. 아이들은 다 알아보아요. 어른들이 엉터리로 하는 말을 아이들은 다 알아들어요. 어른들이 엉터리로 하는 짓을 아이들은 다 알아보아요.


  어머니 혼자 아이 둘 데리고 마실을 다닐 적에, 아이 어머니더러 “애 아버진 어디 갔수?” 하고 묻는 어른은 없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어디를 다녀야 한다면, 아주 마땅히 ‘아이 어머니’가 도맡아서 움직여야 하는 줄 여깁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뿌리내렸을까 알쏭달쏭합니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돌볼 줄 모른다거나, 아이 아버지는 아이들 돌보지 않아도 된다거나, 아이 아버지는 아이들 돌보는 삶을 안 배우고 지내도 되는듯 잘못 흐르는 삶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 찾아보기 참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는 사람일까요. 아버지는 어떤 어버이인가요. 아버지는 아이들하고 어떻게 지낼 때에 아름다울까요. 아버지는 집안일과 집살림을 어떻게 꾸려야 슬기로운가요.


.. 내 친구는 자신의 아이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상상해야만 했다. 아이가 자신과 꼭 닮았기 때문에 아이를 잘 안다고 여기는 것은 그녀에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 어머니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나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일 뿐만 아니라, 예전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제공한다 …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이면에는 늘 어머니 자신이 유아기와 아동기에 겪었던 경험이 깔려 있다 ..  (46, 67쪽)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야 합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밥도 옷도 모두 놀이로 여기며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호미질도 흙일도 설거지도 빨래도 놀이하듯 어버이한테서 배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놀자면 어른부터 홀가분한 삶이어야 합니다. 어른 스스로 삶을 재미나게 일굴 때에,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놀도록 잘 풀어놓을 만합니다. 어른 스스로 어떤 굴레에 매이거나 어떤 수렁에 갇히면, 아이들이 예쁘게 놀도록 지켜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아버지나 어머니 되는 사람들은 어떤 삶 일구는가요. 오늘날 아버지나 어머니 되는 젊은이는 ‘어버이 자리’로 오기까지 어떤 일 하고 어떤 놀이 하면서 마흔이 되고 서른이 되며 스물이 되는가요.


  입시지옥을 거치면서 사람다운 사람살이 배운 젊은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대학교를 마치고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된 젊은이는 아버지다움이나 어머니다움, 아울러 어버이다움을 누구한테서 어느 만큼 배웠을까요. 사랑하는 짝을 만나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돌보고 가르치며 키울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배운 적 한 차례라도 있을까요.


  어린이와 푸름이를 가르치는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를 맡는 이들은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다니면서 어떤 삶 배우고 어떤 삶 누리며 어떤 삶 사랑하는가요.


.. 여자들이 일에서 얻는 만족은 그들을 더 좋은 어머니로 만들고, 스스로에 대한 안도감을 키워 주고, 자신의 가치를 찾고자 아이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을 줄여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갈등과 원망, 죄책감을 유발하여 어머니 노릇을 쉽사리 어긋나게 만들 수도 있다 … 자연스러운 수유 방법인 모유 수유는 1930년대 중·상류층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에 뒤떨어진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모유 수유를 했을, 그리고 모유 수유가 제공하는 친밀감과 보살핌의 느낌을 즐길 수 있었을 여자들이, 모유 수유는 곧 하류층을 뜻하며 옳은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아기에게서 그런 경험을 박탈했을지도 모른다 ..  (154∼155, 156쪽)


  바바라 아몬드 님이 쓴 배움책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간장,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배움책은 ‘어머니’ 이야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어버이 가운데 어머니 이야기만 할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뿐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도 아이들 낳고서 ‘돌보고 가르치며 키우는 몫’은 온통 어머니한테 떠넘기니까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즐겁고 흐뭇하며 사랑스레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며 키우지 못하잖아요. 아니, 한국 사회나 미국 사회나 두 어버이가 어깨동무하면서 삶과 사랑과 믿음과 꿈을 북돋우도록 이끌지 않잖아요.


  복지제도가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교육문화가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복지제도이든 교육문화이든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제도나 문화가 있건 없건, 아이들 삶과 어른들 삶이 그리 살갑지 못해요. 아이들은 갓 태어나서 스무 살 되기까지 시험지옥과 입시지옥에 갇혀요. 홀가분하게 놀 겨를이 없고, 즐겁게 놀 터가 없어요.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이나 유치원이다 학원이다, 게다가 학교이다 하면서, 자꾸 여기저기 얽매이며 들볶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몽땅 얽매이며 들볶이니, 서로서로 동무 되지 못해요. 아이들은 놀이동무가 없어요. 아이들은 손전화나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이 ‘동무’ 구실을 해요.


  이렇게 큰 아이들이 스무 살 되고, 스물다섯 서른 서른다섯 마흔 되어 ‘아이를 낳는 어버이’ 되면 어찌 될까요. 게다가, ‘아이를 낳는 어버이’ 되는데, 아버지 자리에 설 사람은 회사에서 돈 버는 일 맡는다며 ‘아이 돌보는 몫’을 나누어 맡지 않거나 함께 하지 않으면, 어머니 자리에 서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자신의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어머니는 대체 어찌해야 할까?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는 아이는 대체 어찌해야 할까 … 어머니의 부재는 어떤 면에서 증오보다도 더 좋지 않다. 증오는 적어도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무언가가 살아 있는 것이니 말이다 … 오늘날 전문 직종과 기업계에 대거 진출한 교육받은 여자들은, 탁아소와 유모들이 아무리 좋고 배려 깊다 해도 자신들이 직접 함께 있을 때만은 못하다는 점(어머니 본인에게도, 또 아이들에게도)을 알아 가고 있다 ..  (206, 215, 349쪽)


  바바라 아몬드 님은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라 하는 배움책에서,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미워한다고 밝힙니다. 그럴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자,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미워한다는 ‘두 마음’을 품는다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떤 마음일까요?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롯이 있기나 할까요?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이나마 조금이라도 있기나 할까요? 아버지라는 자리에 서는 사람은 이런 마음도 저런 마음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엉성하게 흘리는 모습 아닐까요? 아버지라는 사람은 ‘두 마음’은커녕 ‘한 마음’조차도, 아니 ‘아무 마음’마저 없는 수렁에서 허덕이는 나날 아닌지요?


.. 나이 든 부모를 기꺼이 돌보고자 하는 딸(또는 아들)의 마음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들의 초기 관계가 어떠했는가와 많은 관련이 있다. 양가감정과 원망의 응어리가 충분히 풀려서 자녀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선뜻 보살핌을 준비하고 제공하는가? … 그저 남을 모방하기만 할 경우에는, 좋지 못한 자녀양육 관행들(사탕을 뇌물로 사용하거나 TV를 보모로 사용하는 것, 또는 과도한 신체적 훈육)을 영속시킬 수도 있다 ..  (345, 354쪽)


  아버지는 아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이한테 밥을 차려 먹일 줄 알아야 하고, 아버지는 아이를 씻기고 옷을 빨래하며 집안을 쓸고 닦으며 치울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텃밭 일굴 줄 알아야 하고, 아버지는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가용 몰 줄 알기보다는 숲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달빛과 별빛과 햇빛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풀꽃을 들여다보며 개구리와 제비 노랫소리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이 돌볼 줄 모르는 사회에서, 어머니 혼자 아이를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사랑하며 따스하게 품기를 바란다면, 참 쓸쓸하고 슬픕니다. 4346.5.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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