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로켓파크 카르페디엠 32
이시다 이라 지음, 김윤수 옮김 / 양철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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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4

 


청소년은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 날아라 로켓파크
 이시다 이라 씀,김윤수 옮김
 양철북 펴냄,2013.1.2./11000원

 


  바람이 붑니다. 여러 가지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붑니다.


  귀를 기울입니다. 내 귀로 스며드는 여러 가지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바람은 철마다 다 다른 소리와 내음과 무늬와 빛깔로 내 몸으로 스밉니다. 바람은 다달이 다 다른 소리로 찾아들고, 나날이 다 다른 내음으로 찾아들며, 아침저녁으로 다 다른 무늬를 선보이다가는, 때마다 늘 다른 빛깔이 눈부십니다.


  바람은 소리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바람에는 수많은 모습이 서립니다. 시골에서 부는 바람이랑, 숲과 들과 마당과 마을과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사뭇 다릅니다. 대청마루에 앉아 마주하는 바람이랑, 헛간 곁에서 마주하는 바람이랑, 대문 앞에서 마주하는 바람이랑, 마늘밭이나 무논에서 마주하는 바람이 서로 달라요.


  도시에서도 바람은 노상 다릅니다. 찻길에서 마주하는 바람, 거님길에서 마주하는 바람, 높다란 아파트나 건물 곁에서 마주하는 바람, 도시 한켠 공원에서 마주하는 바람, 도시 길가 가녀린 나무 옆에서 마주하는 바람, 골목 어귀에서 마주하는 바람,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바람, 골목밭 앞에서 마주하는 바람, ……, 참말 같은 바람이란 없습니다.


.. 고개를 드니 콘크리트 난간 너머로 도쿄의 하늘이 보였다. 크림처럼 하얀 봄 하늘이다. 요지는 요코하마나 여기나 하늘은 똑같구나 생각했다 … “사람한테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어른이라도 그저 그런 사람이 있고, 아이라도 놀랄 ㅁ나큼 믿음직한 사람이 있어.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똑바른 사람이라서 부탁한 거란다.” ..  (7, 71쪽)


  햇살이 드리웁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안고 햇살이 드리웁니다.


  눈을 감습니다. 내 살결로 젖어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햇살은 철마다 다 다른 이야기로 나한테 다가옵니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우당탕탕 헐레벌떡 거침없이 휘젓듯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햇살이 우당탕탕거릴 수 있느냐고요? 네, 그래요. 햇살을 스물네 시간 바라보셔요. 새벽부터 밤까지 햇살을 찬찬히 느껴 보셔요. 시멘트로 지은 집에서 말고, 흙과 나무와 짚과 돌로 지은 집에 깃들어 햇살을 하나하나 느껴 보셔요. 아니, 시멘트로 지은 집에서도 햇살을 느낄 수 있어요. 마음으로 눈을 뜨며 가만히 헤아려 봐요.

  해가 기운 저녁에도 햇살을 느낄 수 있어요. 지구별 다른 쪽 비추는 햇살을 느껴요. 달에 어리는 햇살을 느껴요. 멀디먼 뭇별에 닿는 햇살을 느껴요. 밤에도 햇살은 우리 마을 우리 집까지 찾아옵니다. 낮에도 아침에도 햇살은 즐겁게 찾아옵니다.


  풀과 나무와 꽃은 햇살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물고기와 들짐승과 풀벌레 모두 햇살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사람 누구나 햇살을 들이켜면서 살아갑니다. 햇살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 숨결을 잇지 못해요. 햇살 한 조각 먹지 않으면 목숨을 건사하지 못해요. 내 즐거운 삶을 빛내는 반가운 햇살을 고맙게 마주하면서 두 팔을 활짝 벌립니다.


.. 다들 한눈으로도 간타를 특이한 아이로 여기는 듯했다. 어른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간타를 특별한 아이 취급하는 사람들은 유치원 선생님만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모두 그랬고, 늘 간타와 함께 있는 요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 “걱정 안 해도 돼. 아빠가 그랬어. 신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하게 만드셨대. 곤란하거나 괴로운 일을 견딜 수 있는, 그래서 우리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래.” … “사람을 심판한다는 건 그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부분까지도 전부 깎아내는 일이야.” ..  (14, 15, 23, 166쪽)


  푸름이는 누구나 즐겁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꿈을 키우는 푸름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푸름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실컷 놀고, 개구지게 달리고 싶습니다. 마음껏 뛰고, 온몸 휘저으며 뒹굴고 싶습니다.


  어느 일터에 몸이 매여 달삯바라기만 하는 푸름이로 살아가는 일은 즐겁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야 할 푸름이가 아닙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어야 할 푸름이가 아닙니다. 자영업자가 될 푸름이가 아닙니다. 푸름이는, 푸름이라는 이름 그대로 푸른 삶 푸른 꿈 푸른 사랑을 꽃피울 수 있는 가슴을 북돋울 때에 푸름이입니다.


  즐겁게 삶을 누리는 어린이가 즐겁게 삶을 빛내는 푸름이가 됩니다. 즐겁게 삶을 빛내는 푸름이가 즐겁게 삶을 일구는 어른이 돼요. 어릴 적 즐겁게 놀지 못하면, 푸른 나날에도 즐겁게 배우지 못해요. 푸른 나날에 즐겁게 배우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거나 짝꿍과 사랑을 나누고 싶을 때에 즐거운 삶길을 걷지 못합니다. 어릴 적에 놀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이녁 아이하고 놀 줄 몰라요. 어릴 적에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짝꿍을 사귀려 할 적에 사랑을 어떻게 나누어야 아름다운가를 몰라요.


  대학입시에 얽매여 즐거운 나날을 누리지 못하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짠 하고 된대서 즐거운 삶을 스스로 일구지 못합니다. 대학입시 공부에 목이 매여 참고서와 교과서와 문제집만 가방 가득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푸름이라면, 꿈도 사랑도 이야기도 모두 짓눌린 채 바보가 된 슬픈 넋일 뿐입니다. 가방에 시집 한 권 챙기지 못한다면, 집에서 만화책 한 권 느긋하게 펼치지 못한다면, 동무들과 바다마실 숲마실 들마실 즐기지 못한다면, 어버이와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우지 못한다면, 푸름이로서 푸름이다운 한삶을 못 누리는 셈입니다. 푸름이일 때에 푸름이답게 한삶을 못 누린다면, 이웃을 아끼거나 뭇목숨을 소담스레 보살피는 손길을 키우지 못해요.


.. 아이들이 자살하는 첫 번째 원인은 학교생활 때문이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는 아이들에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과 같았다 … “한 살 많은 얼간이를 왜 선배라고 불러야 하는데? 난 그런 거 싫어. 운동은 좋아하지만.” … 누가 더 센지 싸우고, 교실에서는 누구 머리가 좋은지 시험 점수로 경쟁한다. 그것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었다 ..  (32, 98, 101쪽)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고, 학교에 안 가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어버이가 아니고,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도 되는 어버이가 아닙니다. 어버이는 누구나 어버이입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어요. 어른들 마음을 보여주어요. 아이들 생각을 쓰다듬어요. 어른들 생각을 활짝 열어요. 아이들 사랑을 돌보아요. 어른들 사랑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요.


  우리가 서로서로 할 일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스럽게 말을 하고, 사랑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스럽게 밥을 지으면 됩니다. 사랑스럽게 빨래를 하고, 사랑스럽게 비질과 걸레질을 하며, 사랑스럽게 웃고 울어요. 사랑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사랑스럽게 들길을 걸으며, 사랑스럽게 나물을 캐고 나무를 어루만져요. 사랑스럽게 책을 읽고, 사랑스럽게 글을 쓰며, 사랑스럽게 사진을 찍어요.


  무엇을 하든 사랑으로 하면 돼요.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든, 집에서 지내며 숲과 바다와 들을 온몸으로 껴안든, 시골에서 시골 아이로 자라든, 도시에서 도시 어른으로 크든, 마음속에 사랑씨앗 한 알 곱게 심으면 돼요.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좋아요. 다만, 어떤 이름값을 떨치거나 얼마쯤 되는 돈을 벌겠다는 뜻을 세우든, 언제나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랑스럽게 이름을 떨치고, 사랑스럽게 돈을 벌며, 사랑스럽게 꿈을 이루면 되지요.


  사랑이 없을 때에는 메마릅니다. 사랑이 없으니 차갑습니다. 사랑하고 등을 돌리면 나 스스로 삶이 고단해요.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다독 자장노래 부를 적에는 목소리만 예쁘게 뽑는대서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지 않아요.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온 사랑 듬뿍 실어 부드러이 부르는 자장노래일 적에 아이는 느긋하게 눈을 감고 즐겁게 웃으며 꿈나라로 날아갑니다.


.. 정말 그럴까? 간타는 생각했다. 요지와 함께 만든 로켓파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주식이 오르고 이익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아파트 단지 공원에 있는 로켓 미끄럼틀을 탄 적도 없을 뿐더러,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 “이상한 건, 모두 노동이 신성하다고 외치면서 실제로 회사에서는 사람을 기계 부품처럼 취급한다는 거야. 말과 행동이 전혀 달라. 노동은 신성하지만 노동자는 한 번 쓰고 필요없어지면 버리는 일회용이라니 모순이야.” ..  (247, 271쪽)


  푸른문학 《날아라 로켓파크》(양철북,2013)를 읽습니다. 일본사람 이시다 이라 님은 아이들이 어릴 적에 어떤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가에 따라 어른이 되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뭇 달라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쁜 사랑 예쁘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예쁜 이야기 꽃피우는 예쁜 어른으로 살아갑니다. 슬픈 사랑 슬프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슬픈 이야기 주섬주섬 줍는 슬픈 어른으로 살아갑니다.


  어린이인 오늘 즐겁게 살아야, 어른이 된 오늘 즐거운 이야기 나눕니다. 푸름이인 오늘 즐겁게 지내야, 어른이 된 오늘 즐거운 일을 기쁘게 합니다.


  스무 살에 대학생이 되고 스물대여섯 살에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예순두어 살쯤 정년퇴직을 하고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연금 받으며 조용조용 손자 재롱에 깔깔깔 웃는 삶이 즐거운 삶일는지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렇게 지내는 삶이 즐거울까요. 우리 아이들한테 이런 삶을 물려주어야 즐거울까요.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여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어깨동무란 무엇이고, 품앗이랑 두레는 무엇일까요. 마을이란 무엇이고, 보금자리란 무엇일까요. 일이란 참말 무엇이며, 놀이란 참말 무엇일까요.


  도시에서는 숱한 등불과 건물에 가려 밤하늘 별을 바라보기 힘들다고 하지만, 도시 어디에나 별은 뜹니다. 등불이나 건물에 가릴 뿐, 별은 늘 반짝반짝 빛나요. 아이들이 입시지옥과 취업지옥에 시달리거나 들볶인다지만, 이 아이들 가슴에는 사랑을 빛내고픈 작은 씨앗 하나 어김없이 있어요. 작은 씨앗은 사랑을 먹으며 자라고 싶어요. 작은 씨앗은 사랑 어린 손길 받으며 따사로운 마음밭에서 자라고 싶어요.


  아이들이 날게 해 주셔요. 아이들 날개를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셔요. 아이들 마음자리에 사랑이라는 새 날개옷 베풀어 주셔요. 아이들 누구나 스스로 사랑날개 펼쳐 사랑노래 부를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 모두 웃음꽃 피울 수 있기를 빌어요. 4346.2.1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푸른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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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2-1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좋아요. 다만, 어떤 이름값을 떨치거나 얼마쯤 되는 돈을 벌겠다는 뜻을 세우든, 언제나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랑스럽게 이름을 떨치고, 사랑스럽게 돈을 벌며, 사랑스럽게 꿈을 이루면 되지요."

-이 글을 읽으니 칼릴 지브란 저, <예언자>에서‘모든 노동은 사랑이 없는 한 공허한 것.’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사랑으로써 행하기,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깁니다.


숲노래 2013-02-13 07:45   좋아요 0 | URL
삶에는 사랑이 있기에 뜻이 있구나 싶어요.
참 그래요.
 
10대와 통하는 노동 인권 이야기 - 차남호 선생님이 들려주는 노동과 세계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9
차남호 지음, 홍윤표 그림, 이수정 감수 / 철수와영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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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3


내가 할 일은 내가 사랑할 삶
― 10대와 통하는 노동인권 이야기
차남호 글,홍윤표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2013.1.14./13500원


도시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시골로 옮겨 아이들하고 오붓하게 지내면서 흙을 일구는 차남호 님이 이 땅 푸름이를 생각하며 쓴 책인 《10대와 통하는 노동인권 이야기》(철수와영희,2013)를 읽습니다. 푸름이들한테 ‘노동자 되어 일하는 삶’을 들려주는 책이로구나 싶어 반갑기도 하지만, 그저 도시에서만 살아가며 이 얘기를 들려주기보다, 스스로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흙내음 맡으며 살아가는 사랑을 살포시 담아 이 얘기를 들려주니 한결 반갑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태어나 어딘가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간다고 할 적에, 도시살이도 한 갈래 길이요 시골살이도 한 갈래 길이거든요. 도시에서만 살아가며 ‘노동자 되어 일하는 삶’을 얘기할 적에는 모든 푸름이한테 ‘도시에서 살아가는 길’만 들려주어요.


.. ‘노동자는 어렵게 산다’는 편견에 갇혀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어요. 요컨대 ‘노동자로 살아도 괜찮을까’를 놓고 씨름하는 대신 ‘내 꿈을 이루려면 어떤 노동자가 될지’ 깊이 생각하는 게 현명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 10대 아르바이트생한테도 당연히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아니, 어른보다 힘이 약하고 미숙하니까 더 특별히 보호해야죠 .. (12, 14쪽)


사람은 도시에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도시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시골이 없으면 도시는 무너집니다. 시골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어떠한 도시라도 쓰러지거나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시골에서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일구어 거두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도시도 하루조차 버티지 못합니다. 시골 흙일꾼이 있어 도시사람이 먹고삽니다. 시골에 숲이 있어 도시사람이 숨을 쉽니다. 시골에 냇물이 흐르고 들판이 푸르기에 도시사람이 따순 햇볕을 쬘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시골살이’를 안 가르칩니다. 오늘날 교과서는 아이들한테 ‘시골에서 흙일꾼 되기’를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칩니다. 오늘날 교사는 아이들 앞길을 이끌 적에 대학교로 보내거나 직업훈련소로 보내거나 공장으로 보내거나 하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이지, 아이들이 ‘시골로 가서 살아가’도록 돕거나 이끌거나 북돋우지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도 아이들을 시골로 보내지 않습니다. 시골에 있는 학교도 아이들을 시골에서 살아가도록 붙잡지 않습니다. 아마, 제도권교육 울타리에서는 모든 아이를 도시로 보내어 ‘노동자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게끔 이끌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도시에서 노동자가 되든 회사원이 되든 공무원이 되도록 이끌면서도, 막상 ‘일하는 사람’이 무엇이고 ‘일’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슬기롭게 짚지 못해요.


사회를 말하거나 경제를 말하거나 정치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일을 말하거나 놀이를 말하거나 삶을 말하는 사람은 너무 적어요. 돈을 말하거나 연봉을 말하거나 투자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사랑을 말하거나 나눔을 말하거나 꿈을 말하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 전쟁 포로의 노동은 차츰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포로의 공급원인 전쟁이 끊이지 않아요. 자연스레 전쟁의 지도자는 지위가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부족 지도자로, 끝내는 왕으로 변신하죠. 왕은 이제 지배자로서 공동체를 통치하게 돼요. 왕과 그 신하들은 많은 가축과 전쟁 포로를 거느린 대토지 소유자이기도 하죠. 토지는 갈수록 늘어나고 그걸 경작하려면 더 많은 가축과 전쟁 포로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전쟁 포로를 죽일 수도,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킬 수도 있어요. 전쟁 포로는 이제 노예가 되죠 .. (35쪽)


시골에서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살아가며 날마다 조용한 하루를 누립니다. 자동차 거의 안 다니니까 한갓질 뿐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뛰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물이 맑아 몸을 환하게 적시는 물맛을 시원하게 즐깁니다. 바람이 상큼해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이 간질이는 풀잎과 나뭇잎 춤추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마당에 놓은 평상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가깝거나 먼 멧자락 바라보며 눈을 쉽니다. 구름이 흐르는 길을 바라보고, 하늘빛을 품에 안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내 어릴 적, 나한테 풀을 가르친 어른은 없습니다.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더러 ‘이 풀은 맛이 참 좋아. 먹어 볼래?’ 하고 뜯어서 내민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배가 아플 때에 이 풀을 먹으면 배앓이가 낫지.’ 하면서 풀 한 포기로 몸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을 일깨운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골목마다 흐드러지는 풀꽃이 얼마나 싱그럽거나 어여쁜지 들여다보도록 이끈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꽃이라면 꽃집에나 있는 줄 여기고, 들꽃과 메꽃과 바다꽃을 알아보도록 도와준 어른이나 교사가 없어요.


구름빛을 느끼면서 구름결을 살피도록 알려준 어른이나 교사가 없습니다. 구름빛과 구름결을 살피면 날씨를 읽을 수 있습니다. 늘 흐르는 바람내음을 맡으면 비가 언제쯤 찾아오는지, 또 날이 얼마나 가물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름을 읽거나 바람을 읽는 길을 가르치거나 이야기한 어른이나 교사는 아직 못 보았어요.


우리 어른들은 우리한테 무엇을 가르치나요. 어른이 된 나는 이 땅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나요. 우리 어른들은 우리한테 무엇을 보여주나요. 어른이 된 나는 이 땅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면서, 사랑이나 꿈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요즈음 들어 귀촌이나 귀농이라는 이름으로 시골살이를 찾아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늘어납니다. 도시에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다고 느껴 도시를 떠날 텐데, 왜 처음부터 도시 아닌 시골에서 살아갈 수 없었을까 싶어 쓸쓸합니다. 왜 학교와 교과서와 언론과 책은, 온통 도시 이야기로만 가득해서, 이 땅 모든 아이들이 도시바라기가 되도록 할까요. 아이들 만화영화에는 왜 시골살이 이야기가 없을까요. 아이들 만화영화는 몽땅 도시살이 이야기만 다루어야 하나요. 도시에서 자동차를 타고, 도시에서 로봇이나 기계를 만지며, 도시에서 소꿉놀이 하는 이야기 아니면 만화영화를 만들 수 없을까요.


..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도 소외됩니다. 노동의 결실은 모두 자본가가 챙겨 가고, 노동자에게는 애초 노동력을 팔면서 계약했던 ‘쥐꼬리’만 한 임금만 지급될 뿐이죠. 그래서 자본가는 나날이 부를 쌓아 부자가 되는 반면, 노동자는 열심히 노력해도 살림살이가 늘 빠듯하기만 합니다 … 자본가는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자신이 소비하는 게 아니라 모두 시장에 내다 팝니다. 아니, 처음부터 팔기 위해 만들죠 … 노동자들이 착취에 시달리는 건 자본가들의 본성이 사악해서가 결코 아니에요. 자본가는 자신의 의지, 양심과 무관하게 자본의 생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죠. 비록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거꾸로 자본에 매인 존재가 자본가예요. 양심 때문에, 또는 인정에 끌린 나머지 자본의 명령을 뿌리친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본주의의 약육강식 원리에 따라 도태되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어요 .. (62, 63, 68쪽)


학교에서 역사나 문화를 가르치는 자리에서, 먼먼 옛날 사람들은 ‘수렵·채취’를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몹시 힘들게 열매를 따서 먹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교사들 말을 들으며 무척 알쏭달쏭합니다. 먼먼 옛날 사람들은 겨울을 어떻게 났을까, 먼먼 옛날 사람들은 어떤 열매를 먹었을까, 먼먼 옛날 사람들은 몇 살까지 살았을까, 먼먼 옛날 사람들뿐 아니라, 풀을 먹는 짐승들은 삶을 어떻게 누렸을까 ……. 그런데, 내 궁금함을 풀어 주는 어른이나 교사는 없습니다. 어떤 책도 내 궁금함을 풀지 못합니다. 먼먼 옛날 사람들은 ‘고기 먹는 사람’이 아니라 ‘풀 먹는 사람’이었을 텐데, 들과 숲에서 ‘풀 먹는 짐승’이 오늘날로서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았을 먼먼 옛날인데, 그때 그 옛사람 삶이 참말 힘들었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가며 몸으로 깨닫고 배웁니다. 네 식구 먹을 풀은 다섯 평 밭으로 넉넉합니다. 네 식구 먹을 곡식은 쉰 평 논으로 넉넉합니다. 굳이 어디에 내다 팔 생각이 아니라면, 구태여 돈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다면, 다섯 평 밭이랑 쉰 평 논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 해 먹을거리가 남아요. 그러니까, 먼먼 옛날 사람들은, 이른바 ‘수렵·채취’로 살아갔어도 굶는 사람이 없었으리라 느껴요. 오히려 오늘날 사람보다 훨씬 튼튼했을 테고, 훨씬 홀가분했을 테며, 훨씬 기쁜 하루였겠지요.


풀을 뜯어서 먹느라 몸을 움직일 때를 빼놓고는 무엇을 했을까요. 먼먼 옛날 사람들은 풀을 뜯거나 열매를 따는 한때를 보낸 다음, 하루 나머지를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나 스스로 먼먼 옛날 사람이 되어 봅니다. 고속도로와 아파트와 공장과 발전소와 골프장과 공항과 야구장과 청와대와 갖은 공공기관 따위 하나도 없는 먼먼 옛날을 떠올립니다. 자동차 없고 오직 풀밭과 풀숲과 풀길만 있는 먼먼 옛날을 떠올립니다. 아하, 맛난 풀 싱그러이 자라는 들판에 드러누워 한손으로 풀을 뜯어 입에 넣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는군요. 추위가 찾아들면 따스한 터, 그러니까 남쪽으로 걸어가서 들판에서 어우러지고, 다시 새로운 봄이 찾아들면 북쪽으로 걸어와서 들판에서 어우러지는군요. 제비가 가을에 강남으로 갔다가 돌아오듯, 사람들도 북쪽과 남쪽을 마음껏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가며 삶을 누렸군요.


풀짐승은 풀을 뜯어먹느라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풀을 뜯어먹지 않을 적에는 풀밭이나 숲에서 뒹굴며 놉니다. 실컷 놀고 난 다음에는 숲에서 들려주는 노래, 이를테면 바람이 풀잎 간질이는 소리나 멧새와 들새가 지저귀는 노래,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를 얌전히 듣습니다. 총칼을 들며 지키는 군인이 없지만 평화입니다. 탱크도 잠수함도 없지만 평화입니다. 핵무기나 인공위성 하나 없지만 평화입니다.


.. 여성은 ‘유급 직장 노동-무급 가사 노동’ 구조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맞벌이를 하더라도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 노동을 더 많이 합니다 … 여기에는 남성은 밖에서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성차별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전통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 우리나라 이주 노동자 문제의 핵심은 정부와 자본이 이들을 오직 노동력으로만 보는 데 있어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애써 외면하는 거예요 … 눈여겨볼 것은 헌법에는 분명 ‘국민의 권리’가 있는데, 유독 노동자에게만 노동 기본법을 따로 부여했다는 사실이에요 .. (88, 91, 149쪽)


먼먼 옛날 사람들은 사내와 가시내가 똑같이 일했겠지요. 아이 낳는 몫은 가시내만 맡을 수 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젖을 물릴 때 빼고는 사내와 가시내가 나란히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폈겠지요.


먼먼 옛날 사람들은 어버이가 바로 교사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삶을 익히면서 아이들한테 어버이 꿈과 사랑을 물려줍니다. 어버이 스스로 온누리를 부대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배우고, 아이들한테도 날마다 새로운 꿈과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오늘날 모습으로 돌아와 생각합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일찌감치 보육원에 넣고 어린이집에 보냅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스스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어버이 자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어버이 스스로 교사인 줄 모르는 나머지, 집에서 아이들한테 삶을 물려주어야 하는 줄 못 느낍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이어받을 꿈이나 사랑을 보여주는 어른이 거의 안 보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이녁 어버이 모습을 고스란히 따르겠지요. 오늘날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이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은 이녁 어버이가 했듯이 똑같이 보육원에 넣고 어린이집에 보내겠지요. 쳇바퀴처럼 돌고 돌면서, 어버이 스스로 아이를 아끼며 보살피는 손길을 못 느낄 테지요. 모든 교육과 보육은 학교가 맡도록 하고, 사회복지가 있어야 하는 줄로만 여길 테지요.


평등교육과 사회복지는 있어야 합니다. 다만, 사람들마다 여느 살림집에서 아이들과 나눌 참사랑 참꿈 참배움 참삶이 있어야 합니다. 여느 살림집에서 아이들이 참사랑 참꿈 참배움 참삶을 누리지 못한다면, 학교에 다니더라도 슬기롭게 배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노동자’란 바로 내 어버이입니다. 나를 낳고 돌보는 어버이가 바로 노동자입니다. 아이들이 배우는 노동자 모습이란, 바로 내 어버이 모습입니다. 어버이인 오늘날 어른들 스스로 어떤 몸가짐이나 매무새인가에 따라, 아이들 앞날 모습이 달라져요.


.. 농경 사회에서는 비록 생산력은 낮았지만 생산의 목적이 소외된 돈벌이가 아니라, 여유롭게 누리는 것이었어요. 이때, 여유라는 것은 지금처럼 일하고 남은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노동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었죠 … 이들 자본은 돈이 된다면 생태계 파괴와 기후 변화 따위는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 또한 자신의 일자리와 임금 때문에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생태 파괴 사업체를 세우고 운영해 온 자본에게 있어요. 노동자 또한 단지 실행만 하는 부차적 위치였다 하더라도 책임을 면키 어려워요.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책임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노동자의 생계가 달려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생태 파괴를 지속할 순 없는 노릇이죠 .. (123, 140쪽)


일이란 즐겁습니다. 일이기에 즐겁습니다. 놀이는 신납니다. 놀이이기에 신납니다. 일은 삶입니다. 일하지 않고서는 먹을 수 없습니다. 풀을 뜯고 열매를 따야 먹고삽니다. 놀이는 삶입니다. 놀지 않고서는 웃을 수 없습니다. 까르르 노래하고 펄쩍펄쩍 뛰고 달리고 해야 비로소 아름다운 하루입니다.


일은 삶이고 놀이는 삶입니다. 곧, 일과 놀이는 똑같은 삶입니다. 일이란 놀이와 같고, 놀이란 일과 같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는 먹고살 수 없다면, 놀이를 하지 않고는 먹고살 수 없습니다. 놀이를 하지 않고서는 웃을 수 없다면, 일을 하지 않고는 웃을 수 없습니다.


일과 같은 놀이요, 놀이와 같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삶이거든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거든요.


노동자란 일하는 사람이면서 놀이하는 사람입니다. 즐겁게 웃으면서 할 만한 일일 때에, 즐겁게 노래하면서 누릴 만한 놀이입니다. 일터에서 즐겁게 웃으며 땀흘리기 어렵다면, 나한테 반갑거나 알맞다 싶은 일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면서 함께 놀 수 없다면, 이 일은 나한테 안 맞거나 안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 우리는 기아자동차가 노동에 종사해 온 실습생을 6년 동안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교육 과정을 돕거나 ‘우수 인력 발굴’을 위해 현장 실습을 유치한 게 아니란 얘기죠. 고분고분하면서도 임금은 싸게 먹히고, 게다가 법적 책임까지 거의 없는 노동력이 필요했던 거예요 .. (309쪽)


하루 여덟 시간을 일한다든지, 주 닷새를 일한다든지, 이런저런 틀이나 숫자는 덧없습니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하루 열여섯 시간도 일합니다. 즐겁게 놀이하는 사람은 한 주 내내 놉니다.


일을 어떤 틀로 따질 수 없습니다. 놀이를 어떤 규범이나 제도로 묶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돈을 벌려고 일하거나 놀지 않아요. 사람은 살아가려고 일하거나 놀아요. 삶을 누리는 일이면서 놀이입니다.


그러면, 왜 노동권이나 노동법 같은 말이 태어날까요? 바로 사회가 제도권으로 구르기 때문이에요. 사회가 사람들을 톱니바퀴처럼 다루고 쳇바퀴 구르도록 내몰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하루 몇 시간 일하고 달삯 얼마 받을 부속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온 하루를 누리면서 어른과 아이가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삶을 북돋울 사람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 이 나라 시골마을마다 ‘공동체’라는 이름이 따로 없었어도 두레를 하고 품앗이를 하며 울력을 했어요. 아이나 어른 모두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했어요. 시골에 학교 하나 없어도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삶을 물려받고, 어른들은 스스로 아름답게 일하면서 삶을 물려주었어요.


양반이나 상놈이라고 하는 신분이 없을 때, 지주와 소작농이라 하는 계급이 없을 때, 사람들 누구나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 잔치마당을 이루었어요.


자, 생각해 봐요. 오늘날 이 나라 어디에 잔치마당이 있나요. 이 나라 어느 일터에 노래꽃이 피어나는가요. 이 나라 어느 일터에서 어른과 아이가 뒤섞여 까르르 웃으면서 일할 수 있나요. 어느 공장이나 사무실이나 시계와 시간표에 따라 착착 움직여야 하는 기계와 같지 않나요. 공장 노동자이든 사무직 노동자이든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몸짓에 똑같은 말투로 ‘주어진 일감’을 떠맡아야 하지 않나요. 이런 삶이 아름다울까요. 이런 삶이 즐거울까요. 이런 삶이 사랑스러울까요.


.. 우선,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노동을 존중해야 합니다 .. (262쪽)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나 스스로 내 일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좋아할 수 있어야, 나 스스로 내가 한껏 즐길 놀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자란 무엇이고 인권이란 무엇이며 노동권은 또 무엇일까요. 왜 오늘날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억눌려야 하고,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못 누리는 한편, 비정규직이라든지 대졸실업자가 넘쳐야 할까요. 시골에는 젊은이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데, 왜 도시에는 일손 놓고 멍하니 있는 젊은이가 넘치고 넘쳐야 할까요. 시골에서 조금만 손을 놀려도 모든 사람이 밥 굶을 일이 없는데, 왜 도시에서는 어느 한쪽은 돈이 넘치고 어느 한쪽은 돈이 없어서 틈이 자꾸 벌어질까요.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사랑하면서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를 모두 사랑할 수 있기를 빌어요.


풀내음을 맡아요. 바람소리를 들어요. 하늘빛을 헤아려요. 그리고, 눈을 살며시 감고 꿈을 꾸어요. 서로서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하고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요. 사람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짐승과 새와 물고기 모두 예쁘게 얼크러질 삶자락을 그려요.


내가 할 일이란, 내가 즐길 놀이이면서 내가 누릴 삶입니다. 4346.1.3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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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 상상을 현실로 만든 혁신학교 이야기
에냐 리겔 지음, 송순재 옮김 / 착한책가게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답게 배우며 살아가는 꿈
 [사랑하는 배움책 11] 에냐 리겔,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

 


- 책이름 :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 글 : 에냐 리겔
- 옮긴이 : 송순재
- 펴낸곳 : 착한책가게 (2012.2.20.)
- 책값 : 15000원

 


  ㄱ. 교사는 배우는 사람


  2012년 가을, 전라남도 고흥군 주민들은 고흥군에 화력발전소가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전라남도 해남군 주민들도 해남군에 화력발전소가 못 들어오게 막았어요. 몇 해 앞서는, 고흥군과 해남군에 핵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여러 권력자와 기업자가 똘똘 뭉쳤지만, 이때에도 주민들이 막아내어 고흥과 해남이 정갈한 시골로 이어가도록 지켰습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시골이기에, 시골에 발전소 하나 들어서는 일이란 아주 끔찍합니다. 사람들 먹을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거두는 들이요, 사람들 먹을 물고기와 김과 파래와 미역과 매생이를 얻는 바다입니다. 들판 한쪽에 공장이 있으면, 곡식이 어떻게 될까요. 양식장이나 갯벌 곁에 발전소가 있으면, 양식장이나 갯벌은 어떻게 될까요.


  돼지우리나 소우리 곁에 공항이 있으면, 돼지와 소는 시끄러워서 죽습니다. 사람도 비행기 끔찍한 소리에 귀가 찢어지거나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자꾸자꾸 커지는 도시인 탓에 공항을 새로 짓고,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자꾸 놓으며, 공장은 끝없이 늘어납니다.


  무엇이 삶일까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보람은 무엇일까요. 학교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학교는 아이와 어른한테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학교는 이 나라 이 땅 이 마을에 어떤 구실을 하는가요.


.. 아이들이 집에서 읽기와 쓰기가 정말 중요하고 쓸모있으며 심지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배우려 한다 … ‘읽기’와 ‘쓰기’는 죽은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읽는 것’을 배운 사람은 혼잡스러운 텔레비전 영상이나 심지어 이른바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인쇄 매체를 안심하고 대할 수 있다 … 학생들의 사회적 책임감을 키우는 교육을 행하고 있는 학교가 너무도 적다 ..  (19, 30, 77쪽)


  2013년에 접어들면서, 중앙정부는 이 나라에 새 화력발전소를 열여덟 곳 짓겠다고 외칩니다. 전기가 모자라 화력발전소가 더 있어야 한다고 밝힙니다. 핵발전소는 너무 아슬아슬하니까 더 안 지을 듯하고, 핵발전소만큼 아슬아슬하지 않다고 하면서 화력발전소를 짓는다고 합니다.


  화력발전소가 들어선다는 곳을 들여다보면, 일찌감치 다른 화력발전소가 깃든 곳이요, 또는 ‘발전소 지으며 시나 군에 준다는 돈’을 노리는 곳입니다. 삶에 따라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돈에 따라 어떤 일을 꾀한달까요. 더군다나, 발전소에서 나오는 매연과 공해와 전자파를 끊거나 줄일 길이 없는데, 화력발전소를 자꾸 더 지으려는 움직임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얼마 안 보입니다.


  이 나라에 왜 전기가 모자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도시는 자꾸 커지며 전기를 더 쓰려고 합니다. 시골은 더 작아지며 전기 쓸 일이 자꾸 줄어듭니다. 전기가 모자라다면 도시에서 전기가 모자라지만, 도시 한복판에 발전소를 지어 송전탑 갯수라도 줄이려는 움직임조차 없습니다. 전기가 모자란 까닭을 캐내어, 전기를 안 쓰거나 덜 쓰려는 움직임마저 없습니다. 무한동력 에너지를 빚어서 공해도 매연도 없이, 아름답고 알차게 전기를 쓰려는 움직임 또한 없습니다.


  화력발전소 사업은 어마어마한 돈덩이 사업입니다. 건설회사는 건설회사대로 발전소를 짓고 전기를 (중앙정부한테) 팔면서 돈덩이를 거머쥐고, 중앙정부는 중앙정부대로 세금을 거두고 전기를 (사람들한테) 팔면서 돈덩이를 거머쥐는 사업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얼거리를 교과서에서는 안 다룹니다. 제도권교육 울타리 안쪽에서는 발전소 사업 밑뿌리를 캐거나 밝히지 않습니다. 교과서로서는 ‘발전소 반대’를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세울 뿐이요, 전기와 도시와 산업 문제를 슬기롭게 바라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 단지 말로 듣기만 할 때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학교 수업에서는 무언가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기를 마다하는가 … 수업시간에 말을 해도 되는 것, 나아가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침묵해야 하는 상황이야말로 오히려 낯설고 이상한 것이다 … 어떤 학교에서는 음악을 모두 함께 즐기고 우리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교에서는 그저 배운 것을 누가 몇 주 후에 더 잘 기억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어떻게 점수를 매길 것인가에 온 정신을 쏟기도 한다 ..  (43, 48, 62∼63쪽)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교사는 교과서 지식을 한 해에 걸쳐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구실을 맡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학생은 교과서 지식을 한 해에 걸쳐 교사한테서 물려받는 몫을 맡습니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지식을 제대로 외워야 시험문제를 잘 풉니다. 시험문제를 잘 풀어야 대학입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습니다. 대학입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어야, 더 등급 높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등급 높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더 연봉 높은 공공기관이나 큰회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오거나 문예창작학과를 나와야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학과를 나와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미술대학을 나와야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구울 수 있지 않습니다.


  삶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삶을 배우면 됩니다.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시를 쓰면 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 될 테지요. 시를 쓰는 자격증은 없어요. 그림을 그리는 졸업장은 없어요.


  그러면, 학교란 무엇일까요. 학교는 왜 있어야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왜 다녀야 하나요. 어른들은 왜 교사가 되어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길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보살펴야 즐거운가 하는 삶을 가르치는 교사는 없습니다. 나무를 아끼는 사랑을 가르치는 교과서는 없습니다. 풀을 어루만지고 멧새와 노래를 즐기는 삶을 이야기하는 교사는 없어요.


  교과서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바람이 나뭇잎 간질이는 소리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훤한 달밤에 빛나는 구름 이야기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함박눈 펑펑 내리며 고요한 시골마을 한켠에서 붉은 꽃망울 어여쁜 동백꽃 이야기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젖을 어떻게 물리는가 하는 몸가짐, 젖을 아기한테 물리는 기쁨, 젖을 먹는 아기가 얼마나 좋아하면서 무럭무럭 자라는가 하는 이야기도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제비가 찾아드는 시골집 처마 밑 이야기 또한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씨앗을 갈무리해서 이듬해에 밝은 웃음빛 지으며 뿌리는 이야기 또한 안 실려요.


..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예술은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좋은 예방책이다 … 사람들은 아름답고 정돈된, 정성껏 만들어진 공간에 있을 때는 황량하고 볼품없고 애정 없이 대충 만들어진 공간에서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 같다 … 많은 학교 공간은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공간 같지 않고 그저 어떤 기관 같은 느낌을 줄 따름이며 …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그저 인간애에 대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어르신들을 씻겨 드리고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아픈 친구를 병원에 데려가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경험들이야말로 수업을 몇 시간 빼먹어도 좋을 만큼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도 남는 일이다 ..  (88, 89, 95쪽)


  교사가 되려면 대학교를 나와야 한답니다. 교육대학교이든지 사범대학이든지 마치면서 교사자격증을 거머쥐어야 교사가 될 수 있다고 해요. 그러면, 대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 교사가 되도록 키우는가요. 교사자격증 따도록 하는 시험제도는 어떤 이야기를 물어 보면서 교사가 되도록 북돋우는가요.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는 교사로서 어떤 넋·마음·얼·사랑을 품으며 활짝 웃는 어른인가요. 교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교사 스스로 무엇을 꾸준하게 익히거나 배우면서 이녁 삶을 아름답게 갈고닦을는지요.


.. 청소년들은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끝없이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면서 사실은 아이들의 인생에 우리가 책임지지 못할 짐을 지워 주며 방관하고 있다 … 하루에 단어 스무 개 외우고 공식 몇 개 외우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일은 청소년들의 입장에서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학교가 아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전부라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미쳐 가는 것을 보고 놀랄 까닭이 전혀 없다 … 학교 스스로가 수없는 규범과 규칙에 얽매여서 스스로의 자유를 차단하고 이해할 수 없는 교육의 길을 택하는 현실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과 도전정신 그리고 학교운영자들의 연대 없이 이 같은 학교구조가 변화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  (100∼101, 107쪽)


  흔히,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사가 가르치는 사람이기만 할 때에는 참교사하고는 동떨어지리라 느껴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기 앞서 배우는 사람이기에 교사라고 느껴요. 아이들을 가르친대서 교사가 아니라, 삶을 먼저 즐겁게 배운 다음, 이녁 스스로 즐겁게 배운 삶을 아이들한테 너그러이 나눌 수 있기에 교사로구나 싶어요. 아이들한테 온갖 지식 베푼대서 교사가 아니라, 사랑을 늘 흐드러지게 빛내면서, 이녁 스스로 빛내는 사랑을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새롭게 꽃피울 때에 바야흐로 교사로구나 싶습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가르칩니다. 배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가르칠 줄 압니다. 배우는 마음이기에 가르치는 마음이 돼요.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기에 가르치는 즐거움을 나눠요.

  배우는 사람은,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지 않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배운 모두를 삶으로 녹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새 삶으로 거듭나면서 날마다 새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똑같은 지식을 똑같은 틀에 맞추어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모습을 한 아이들한테 똑같은 시간에 맞추어 줄줄 외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겠지요.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웃음으로 들려주면서, 새로운 얼굴빛을 짓는 아이들하고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르듯 어깨동무하면서 새로운 삶을 북돋우는 새로운 사랑을 속삭일 때에 비로소 교사라 하겠지요.

 


  ㄴ.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기에 학생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배운 대서 학생이 아니라,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를 말할 줄 알기에 학생이라고 느껴요. 곧,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이에요. 학생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어른한테 ‘당신이 나한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교사는 늘 배우는 사람이지요. 학생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하는 대목은 늘 배워야 하니까 교사는 늘 배울밖에 없어요. 학생은 늘 가르칠밖에 없고요.


.. 교사에게 모자란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과목을 연구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동기부여만 있다면, 이는 학생들에게 굉장한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 … 아이가 가진 능력에 대해 학교는 그저 잘해야 ‘기특한 재능’ 정도로 여길 뿐 졸업성적을 평가할 때 이런 것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다 … 학교는 학과목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학생들의 재능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  (144, 167쪽)


  아이들은 어른들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사랑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꿈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밥을 지어 아이들한테 차려 주어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옷을 지어 아이들한테 입혀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집을 지어 아이들과 함게 살아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낳으며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하는 말을 까닭이 있어요.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늘 곁에 있기에, 이 아이가 어버이를 늘 새롭게 가르쳐요. 어버이가 된 사람은 아기가 옹알거리는 목소리와 몸짓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어버이는 자꾸자꾸 배워야 합니다. 아기 똥오줌 흥건한 옷가지를 빨래하면서 빨래를 새로 배웁니다. 아기 똥오줌을 가리게 하면서, 아기한테 젖과 죽과 미음과 밥을 먹이면서, 아기한테 말을 가르치면서, 아기한테 마을과 이웃과 숲과 새와 짐승을 가르치면서, 아기한테 풀과 나무와 들과 바다를 가르치면서, 어버이 된 사람은 이녁 스스로 온누리를 모두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깨달으며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아이와 언제나 함께 지내면서 언제나 새로운 삶을 배웁니다.


  교사는 어버이와 같아요. 어버이는 갓 태어난 아기들을 한결같이 보살피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운다면, 교사는 제법 자란 아이들을 하루 내내 보살피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웁니다. 지식을 가르칠 때는 교사가 아니라 독재자나 폭압자나 권력자 굴레에 갇힙니다. 아이들한테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울 때에, 비로소 교사가 됩니다. 교과서 진도를 나가며 대학입시에 걸맞을 학생으로 길들일 때에는 교사가 아니라 바보나 멍청이나 얼간이가 됩니다. 아니, 노예가 되겠지요. 기계처럼 되고 말겠지요. 아이들하고 삶과 사랑과 꿈을 나누는 길동무가 될 때에, 비로소 교사가 돼요.


.. 학생들은 이 시간(수다 떨기)을 통하여 자신이 단지 영어나 수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며,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는 모든 경험이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 학교가 그곳에 속한 이들이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공부만 하기 위해 임의로 모여 있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 학생들이 학교라는 곳에 대해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고 싶어서’ 있는다.” 하고 느끼기를 바란다 ..  (195, 208, 230쪽)


  독일사람 에냐 리겔 님이 쓰고, 한국사람 송순재 님이 옮긴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라고 하는 책은 ‘교사’와 ‘학생’과 ‘학교’와 ‘마을’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습니다. ‘가르침’과 ‘배움’과 ‘삶’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조곤조곤 다룹니다.


  교사가 할 몫은 배움이요 학생이 할 몫은 가르침이라면, 학교가 할 몫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웃으로 만날 수 있는 쉼터요 숲이 될 일입니다.


  학교는 쉼터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쉬고 생각을 쉬며 몸을 쉬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숲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살찌우고 생각을 북돋우며 몸을 일으키는 숲이 되어야 합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일을 합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즐겁게 뛰놉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서로 까르르 웃고 떠듭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노래와 춤과 문학과 예술을 누립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꿈을 키웁니다.


  숲에서 하늘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나무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새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벌레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구름과 바람과 흙과 풀과 짐승과 냇물과 어우러집니다.


.. 아이 방에 텔레비전을 들여놓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은 부모라면 아이를 우리 학교에 등록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을 하나의 기본원칙으로 세웠다. 자기 아이에게 어떤 능력을 키워 주고 이를 계발하도록 이끌어 줄지는 부모가 직접 결정할 문제라 생각했다 … 그나마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는 학부모도 드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에게 군것질을 못 하게 했을 때 생길 난리법석을 감당하느니 하루 종일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젤리와 크림과자가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광고를 믿어 버리고 말자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  (263, 265쪽)


  도시에 짓는 학교를 보면 어디에서나 감옥이 떠오릅니다. 똑같은 칸, 똑같은 골마루, 똑같은 차림새, 똑같은 말투, 똑같은 시간표,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몸가짐, 똑같은 신분과 계급과 서열, …… 오늘날 학교에서는 폭력과 따돌림이 춤출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학교인걸요. 꿈이 없는 학교인데요. 삶이 없는 학교에 폭력과 따돌림이 감돌밖에요.


  학교에는 칸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건물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운동장이 따로 없어도 됩니다. 학교는 풀과 나무가 마음껏 자라는 숲이면 되고, 냇물이 흐르고 골짜기가 이루어지는 멧자락이면 됩니다. 밥을 얻고 옷을 기우며 집을 짓는 삶터가 학교입니다. 이야기보따리를 꾸리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이야기샘이 흐르는 데가 학교입니다.


  학교라고 하는 시설이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풀이름과 나무이름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제도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집짓기·옷짓기·밥짓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교육이나 복지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이랑 꿈이랑 믿음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울타리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춤과 노래와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이제 학교가 서면서 아이도 어른도 풀이름과 나무이름을 하나도 모릅니다. 이제 학교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집도 옷도 밥도 지을 줄 모릅니다. 이제 학교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사랑도 꿈도 믿음도 속삭이지 않습니다. 이제 학교가 퍼지면서 사람들은 춤도 노래도 이야기도 스스로 빚지 않습니다.


  아름답게 배우며 살아갈 때에 교육입니다. 아름답게 가르치며 어깨동무할 때에 교육입니다. 교육은 아주 쉬워요. 삶이면 교육이에요. 삶을 나누기에 교육이고, 삶을 즐기기에 교육입니다. 삶이 아니라면 모두 거짓입니다. 삶하고 동떨어지면 모두 껍데기입니다. 삶을 말할 때에 교육을 말할 수 있고, 삶을 나눌 때에 참배움이 이루어집니다. 4346.1.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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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벽화 높새바람 3
김해원 지음, 전상용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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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28

 


아이들이 빚은 그림
― 고래 벽화
 김해원 글
 바람의아이들 펴냄,2004.4.14./6800원

 


  아이들은 그림을 그립니다. 따로 그림쟁이라는 이름이 붙거나 예술쟁이라는 이름을 누리려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은 없으나, 아이들은 즐겁게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종이에도 그림을 그리지만, 손바닥에도 그림을 그리고, 팔뚝이나 볼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벽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세금고지서나 책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방바닥에도 그림을 그리며, 밥상이나 책상에도 그림을 그려요. 그리고, 흙바닥이나 모랫바닥에도 그림을 그리지요.


.. 원시 시대 고래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마을에 짜하게 퍼졌다. 덕수 삼촌마저도 자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한 양 떠들며 다녔으니 못 들은 사람이 없었을 거다. 저녁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땅끝교회 뒷산에 올라 우리 비밀 본부를 보고 왔다 ..  (50쪽)


  그리고 싶어 그리는 그림입니다. 곧, 부르고 싶어 부르는 노래입니다. 노래꾼이 되려고 노래를 부른다면 몹시 슬픕니다. 그러니까, 글꾼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면 얼마나 서글플까요. 사진꾼이 되려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정치꾼이 되려고 정치를 하면 얼마나 안쓰러울까요.


  공무원이 되려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시험공부 하는 젊은 넋은 매우 딱합니다. 회사원이 되려고 영어를 죽어라 배우며 학원을 다니는 어른 또한 참말 가엾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누리지 않을 때에는 불쌍합니다. 스스로 사랑할 삶을 찾지 않을 때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웁니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사랑스럽게 살아야 사람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꿈을 꾸어야 목숨입니다. 어른이랑 아이는, 따사롭게 눈빛 나누며 이야기를 속삭여야 푸른 숨결 건사합니다.


.. “우, 우리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어. 내,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더 심각해. 어, 어, 어떡하지.” ..  (54쪽)


  2013년을 맞이해 여섯 살이 된 우리 집 큰아이가 글을 씁니다. 재미 삼아서 씁니다. 아이는 제 이름 넉 자 ‘사름벼리’를 예쁘장하게 씁니다. 아버지랑 어머니한테 이런 글 저런 글 써 달라고 종이를 들고 달려옵니다. 아이는 그림책이나 이런저런 종이를 들고는 무슨 글이 적혔는지 묻습니다.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먼저 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가 궁금해 할 때에만 알려줍니다. 어버이로서 아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우리 아이가 즐겁게 뛰놀고픈 이 나이에 즐겁게 뛰놀기를 바랍니다. 한창 개구지게 놀다가 살며시 쉴 적에 그림책도 들추고 글놀이도 하면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릴 적에 딱히 이렇게 그리라 저렇게 그리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그리고픈 이야기를 종이에 한 가득 담습니다. 나는 나대로 아이 곁에서 내고 그리고픈 이야기를 종이에 한 가득 담아요.


  아이 그림이 예술품이 되어야 할 까닭 없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찍는 사진이 예술품이 되어야 할 일 없습니다. 그림은 즐거운 이야기 담는 그릇입니다. 사진은 재미난 삶 담는 접시입니다.


  그림에 점수를 매길 일 없고, 글씨쓰기에 점수를 붙여야 할 까닭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한테 시험을 치르도록 할 일이 없으며, 아이가 시험에 빠져야 할 까닭이 없어요.


.. 우리 사총사는 가짜 벽화를 진짜 벽화인 줄 알고 좋아하는 어른들이 좀 우스웠다. 애들만 보면 뭐든지 가르치려 드는 잘난 어른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니 솔직하게 말해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고 진실을 묻어 둘 수는 없었다 ..  (59쪽)


  김해원 님이 쓴 창작동화 《고래 벽화》(바람의아이들,2004)를 읽습니다. 어느 시골마을, 아마 ‘땅끝교회’라는 이름이 나오니, 전라남도 해남을 헤아리며 쓴 창작동화로구나 싶은데,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읽으면서, 이 창작동화를 아이들하고 왜 읽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골마을에 뭔가 남다른 일(사건)이 생기고, 시골마을 어른들이 돈에 눈이 먼 일 때문에 다툼(사고)이 벌어지며, 마지막에 아이들이 참을 털어놓으며 어영부영 마무리됩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말썽쟁이 아이들더러 학교 벽그림을 그리라고 이야기한다는데, 한편으로는 있을 법하구나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애써 창작해서 동화로 써서 읽히면서 어떤 빛과 꿈을 나눌 만한지 잘 모르겠어요.


  거짓말을 하던 아이들은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면서, 어른들만 거짓스러운 이름값에 얽매인다고 눈을 흘기는 줄거리를 보여주어야 하니까, 이 동화책을 읽혀야 할까요. 시골마을 아이들이 깊은 멧골에 ‘놀이터(아지트)’를 꾸려서 재미나게 노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어, 이 동화책을 읽혀야 할까요.


  글쎄, 우리 식구는 전라남도 고흥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데, 이 시골마을 둘레 아이들 가운데 깊은 멧골에 깃들며 노는 아이는 아직 못 봅니다. 시골 아이들도 학원 가랴 바쁘고, 면내나 읍내 쏘다니느라 바쁘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보느라 바빠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어버이 일 거드느라 바쁘고, 학교 언저리와 집 둘레에서 하루를 보내곤 합니다.


  어쩌면, 시골 아이조차 시골스러운 꿈과 사랑을 빚지 못하는 슬픈 한국 사회에서, 시골 아이들부터 기운을 차려 숲을 누비고 들을 달리기를 비는 마음으로 창작동화 하나 내놓았을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고래 벽그림’이란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려야 할까요. 아이들은 어떤 그림을 즐겁게 누리면서 아이들 생각과 마음을 살찌우는가요. 어디서 본 대로 따라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아이들 나름대로 아이들 마음자리를 빛내는 그림을 그리는 길을 보여주는 창작동화로 거듭날 수는 없을까요.


.. 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벽화를 그리라는 벌을 주고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 문을 나갔다. 교장 선생님은 가면서 여전히 벽 앞에서 서 있느 우리에게 “어여 가!”라며 손까지 흔들었다 ..  (95쪽)


  시골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칩니다.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도시 전문가’가 만들어서 ‘도시 이야기’를 배우도록 이끕니다. 시골 아이가 시골을 사랑하면서 시골에서 보금자리를 일구도록 돕는 교과서는 아직 없고, 시골학교 교사 또한 시골 아이가 시골에서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사랑을 들려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시골 아이는 어떤 어른을 바라보며 삶을 배울 만할까요. 시골 아이는 ‘시골 사람’으로 자라야 할까요, ‘도시 사람’으로 자라야 할까요. 아니, 시골 아이는 ‘사람다운 삶’과 ‘사람다운 숨결’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듣고 보고 느끼면서 하루를 빛낼 수 있을까요.


  요즈음에도 시골 교사나 교장 가운데 ‘낡은 자전거’를 끄는 분이 있을까 궁금하지만, 아이들더러 학교 벽에 그림을 그리라 할 만한 분이라면 ‘낡은 자전거’를 끌 테지요. 그렇지만, 책을 덮으면서도 한숨은 자꾸 나옵니다. 글쓴이는 충청도에서 태어났고, 동화책 사이사이 ‘충청도 고장말(사투리)’로 보이는 말씨가 더러 나오지만, 주인공 아이들도 웬만한 어른들도 고장말을 안 씁니다. 아무래도 요새 아이들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익숙해서 서울말(표준말)을 쓴달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골 아이들은 저희끼리 어울리면, 또 시골 어른들도 이녁끼리 어울리면, 다 고장말을 써요. 여러모로 아쉽고 쓸쓸합니다. 4346.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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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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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2

 


독재정권과 싸우며 나라를 떠나다
―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박진숙 글
 이후 펴냄,2013.1.4./16500원

 


  나는 언제부터 하늘 올려다보기를 좋아했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국민학교에 처음 들어가던 1982년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고, 중학교에 들어가던 1988년과 군대에서 흰눈 멧자락 바라보던 1995년∼1997년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습니다.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할 수 있는 너덧 살 아이였을 적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두어 살 아이였을 적에도 아장걸음 걸으면서 골목동네에서 하늘을 곧잘 올려다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어린 날, 충청남도에 있는 외가집에서 밤하늘 별을 쏟아질 듯 보았습니다. 외가집 형과 누나는 늘 보는 별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는 저렇게 쏟아지는 별을 늘 보고 싶었습니다. 그무렵, 1980년대 첫머리에는 인천에서도 별을 제법 볼 수 있어, 이럭저럭 별자리를 그릴 만했지만,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별자리를 이야기하거나 달빛을 이야기하는 동무는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한낮에 소나기 쏴아 지나가고 찾아드는 무지개를 좇는다며 달리기를 하던 동무는 몇 없습니다. 소나기가 쏴아 지나갈 때면 소나기가 빠른지 내가 빠른지 땀 줄줄 흘리며 달리기를 했습니다. 언제나 소나기한테 따라잡히지만, 꼭 한 번,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비를 안 맞고 앞서 달린 적 있어요. 그날, 빗물에 안 젖은 몸으로 바라본 무지개는 몹시 싱그러웠습니다.


  중학교라는 데에 들어가서 밤늦게까지 붙잡히느라 낮도 저녁도 모르던 하루에 시달리기 앞서까지, 국민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으레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한여름에는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 이 세 가지는 내 벗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공장마다 굴뚝에서 끝없이 매연을 쏟아내지만, 그런 인천 하늘에서도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를 보았어요.


  내 마음이 이들 세 벗,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를 바랐기 때문일까요. 나한테만 이들 세 벗이 보였을까요. 다른 학교동무나 동네 놀이동무는 이들 세 벗을 바라거나 생각하지 않았기에 뭉게구름도 소나기도 무지개도 얘기를 안 하며 어울렸을까요.


.. 콩고는 내전과 독재를 거치며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초원과 정글을 뛰어다니는 철부지에 불과했다 … 밤늦게 기숙사로 들어가면 한 벌뿐인 티셔츠를 열심히 빠는 게 내 일과의 끝이었다. 그래도 거리낌이 없었다. 고향에서도, 기숙사에서도 금욕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 킨샤사 국립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 패인 갈등의 골은 깊었다. 킨샤사를 비롯한 도시 출신의 부유한 학생들과 나 같은 지방 출신 고학생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  (19, 40쪽)


  국민학교 3학년이던 1985년은 나로서는 열 살이 되는 나이입니다. 그해 인천에는 가을비가 어마어마하게 퍼부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서울 아닌 인천 이야기를 퍽 오랫동안 들려준 적은 그때 빼고는 거의 없었지 싶습니다. 이제는 아파트가 높직하게 들어선, 예전 인천 시외버스역에는 찰방찰방 물결치는 빗물에 잠긴 버스들이 수두룩했고, 시외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어른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는데, 나는 동무하고 이 앞에서 ‘공짜 헤엄터 생겼다!’고 여기며 물장구 치고 놀았습니다. 빗물에 잠긴 버스 지붕에 올라타 앉은 버스 일꾼 멍한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물놀이를 그쳤어요.


  그리고 이해 팔월이었나 구월이었나, 또는 칠월이었나, 아버지 사진기를 살짝 빌려서 구름 사진을 열 장 남짓 찍습니다. 모처럼 집에서 하늘바라기를 하며 놀다가, 저 하늘 어여쁜 구름을 먼먼 뒷날에는 못 볼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앞으로는 우리 나라가 더욱 지저분해지고 매캐한 바람이 불며, 이 어여쁜 구름은 내 마음속에만 남으리라 느낍니다.


  좋은 사진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완전자동으로 찍는 사진기 단추를 찰칵찰칵 누릅니다. 아무튼 누르면 찍을 수 있는 사진기였어요. 이 구름도 예쁘니 찍고, 저 구름도 예쁘니 찍습니다. 5층짜리 나즈막한 아파트 4층집에서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 장 두 장 찍습니다.


  그러고서 스물아홉 해 지난 2013년 오늘, 참말 나는 어릴 적 보던 어여쁜 구름을 좀처럼 다시 보지 못합니다. 열 살 어린이가 인천 바닷가 공단 가까이에서 보던 구름조차, 고흥 시골마을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어요.


.. 과거 로랑 카빌라는 모부투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면서 무력의 상당 부분을 콩고 인근의 르완다와 우간다에서 빌려 왔다. 그러면서 대통령궁에 입성하게 되면 콩고 영토 일부를 르완다와 우간다에 떼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분할을 약속한 지역은 각종 천연자원의 보고였다. 그곳을 떼어 준다는 것은 황금알 낳는 거위를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로랑 카빌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르완다와 우간다 세력이 들고 일어난 게 그 유명한 제2차 콩고 내전(1998년∼2003년)이다. 4천 명에 이르는 투치족 군인들이 킨샤사 시내까지 침입해 들어오기도 했다 ..  (67쪽)


  늘 고흥 시골집에서 네 식구 오순도순 지내다가, 때때로 도시로 볼일을 보러 마실을 합니다. 인천에도 가고 부산에도 가며 순천에도 갑니다. 서울에도 가다가는 청주에도 갑니다. 크고작은 도시에 가는 길에 으레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까운 시골인 장흥에 갈 적에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고흥자락에서 돌아다닐 때에도 마을마다 어떤 하늘을 누릴 수 있는가 헤아리며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어느 마을에서 바라보더라도 구름이 다릅니다. 구름빛이 다르고 구름무늬가 달라요. 햇살이 다르고 햇볕이 달라요. 바람이 다르고 바람내음이 다릅니다.

  제아무리 자동차 북적거리며 시끌벅적한 서울이라 하더라도, 달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서울이나 부산 같은 데에서는 달빛이 스밀 틈 거의 없지만, 가녀린 달은 숱한 등불과 전깃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밉니다. 드높은 건물 사이에서 달을 찾을 때면 ‘이야, 반갑네.’ 하고 인사를 합니다. 손을 들어 달한테 ‘잘 있었니?’ 하고 말을 걸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달을 살짝 보고 더는 못 보기 일쑤입니다. 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이 건물에 가리고 저 건물에 막혀 안 보이거든요. 시골에서는 하염없이 걸어도 해하고 속닥속닥 이야기꽃 피울 수 있지만, 시골에서는 이 들길 저 멧길 걸어도 달이랑 도란도란 이야기잔치 벌일 수 있지만, 조그마한 도시에서마저 달하고 벗삼기는 꽤 힘듭니다.


  도시사람은 달을 안 좋아할까요. 도시사람은 달이 안 반가울까요. 어쩌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지 몰라요. 도시살이란, 달하고 등지는 삶일는지 몰라요. 도시에서 돈벌이 하느라 바쁘고, 도시에서 일자리 지키느라 바쁩니다. 도시에서 자가용 모느라 바쁘고, 도시에서 자가용 댈 빈 구석 찾느라 바쁩니다. 도시사람은 달이고 별이고 해이고 무지개이고 구름이고 찾아볼 틈이 없어요.


.. 마리는 콩고민주공화국 옆에 있는 콩고공화국 사람이었다 … 외국인들이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공화국’을 헷갈리듯, 나 역시 ‘북한’과 ‘남한’을 헷갈렸던 것이다 … 마음에 입은 상처는 쉬 사라지지 않았다. 상처를 치유할 힘이 모두 바닥나 버린 것 같았다. 모멸감 섞인 시선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늘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으로 일하고 생활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아프리카 노동자’ 아니면 그냥 ‘깜둥이’일 뿐이었다 ..  (87, 100, 190, 200쪽)


  아침이면 파르스름한 빛이 살며시 걷히며 노르스름한 하늘이 열리고 이내 불그스름한 햇덩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나 또한 이 새 아침을, 이 새 햇살을, 도시에서는 거의 못 느꼈어요. 다만, 어릴 적 인천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는 날마다 보기는 했어요. 나는 국민학생 때에도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학교로 걸어갔어요. 중·고등학생 때에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학교로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갔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삶터를 옮겨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고 그만두기까지 신문배달을 하며 아침해를 봅니다. 대학교 그만두고 신문배달을 잇는 내내 으레 아침해를 봅니다. 신문배달은 그만두고 출판사 일꾼으로 들어갈 적에도 새벽 일찍 일터로 가는 버릇을 이으며 언제나 아침해를 봅니다.


  구름이 짙게 끼어 해가 보이지 않더라도 해가 뜰 자리를 바라봅니다. 햇살 기운이 어떻게 스미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부는가를 눈을 감고 살갗으로 느껴 봅니다. 하늘이 밝게 열리며 내 눈자위를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느낌을 즐깁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어디에서나 어떤 건물에 깃들어 일을 해야 하니, 어느새 해를 잊고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잊어요. 사무실에서는, 또 지하상가나 지하철에서는, 낮도 밤도 잊습니다. 네 식구 함께 고즈넉한 고흥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가면서 바야흐로 새벽·아침·낮·저녁·밤이 흐르는 결을 살핍니다. 먼저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으로 아로새깁니다.


.. 침대에 누워 서울이 콩고의 정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빌딩과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정글 말이다 … 한국 사람들은 왜 자기들 좋은 문화를 외국인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나중에 나이지리아 친구를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가 정답인지도 모른다. “한국 공장에서 바뀌지 않는 게 있어. 한국 사람은 무조건 왕이야. 그 다음이 조선족이고, 그 다음이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 온 사람들이지. 아프리카? 아프리카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내 경험에서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한국 공장의 카스트 제도는 국적에 따라, 피부색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했다 ..  (109, 155쪽)


  집안에 텔레비전을 안 들이고, 신문을 끊은 지 열 해가 넘는 우리 집에서는, 사회 흐르는 이야기를 거의 모릅니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들을 값이 없고 알아야 할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어느 정치꾼이 어떤 말을 했건,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터졌든, 우리 삶하고는 참으로 동떨어집니다. 수출이 얼마요 새 대통령이 누구요 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주식시세표나 연예인 뒷이야기를 왜 들어야 할까요.


  우리 식구한테는, 올겨울에도 우리 집 마당 한켠 동백나무에서 몇 송이쯤 일찌감치 피어날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언제부터 봄꽃을 논둑과 밭둑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올봄에는 제비가 몇 월 몇 일에 처마 밑으로 돌아와서 반가운 인사를 건넬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큰아이는 얼마나 씩씩하게 뛰놀고, 작은아이는 얼마나 말문을 환하게 틀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그런데, 2013년 1월 겨울 한복판에 한국땅 크고작은 도시에 ‘스모그’가 덮쳤다고 하는군요. 1월 한복판에 청주로 마실을 와서 밥집에서 밥 한 그릇 먹다가 옆에 놓인 신문을 문득 바라보니 1쪽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어요. 중금속 잔뜩 머금은 스모그라 하는데, 도시사람은 어른도 아이도 모두 이런 바람을 마시며 살아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흥에서 청주로 오는 동안, 어둑어둑 뿌연 밤하늘이었지만, 하늘이 꽤 칙칙했어요. 왜 하늘이 이토록 뿌옇거나 칙칙하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어요. 달이 어슴푸레 보이기는 하지만, 흐리멍덩한 빛이었어요. 그렇구나, 스모그로구나.


  그나저나, 도시사람 가운데 스모그 낀 하늘이 얼마나 아슬아슬하며 끔찍한가를 살갗으로 느낄 사람이 있을까요. 스모그가 왜 생기는 줄 알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모그 끼는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거나 즐거운가를 돌아볼 사람이 있을까요.


.. 콩고에서 받은 경제학 석사 학위와 정보요원 경력 따위는 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해야 하는 그런 삶을,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난민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면 안 되는가? 왜 난민은 배움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가 ..  (280쪽)


  욤비 토나·박진숙, 두 분이 일군 이야기책 《내 이름은 욤비》(이후,2013)를 읽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그만 한국(남한)이라는 나라로 ‘정치 망명’을 해야 했다던 욤비 토나라고 하는 아저씨가, 한국에서 겪은 일을 찬찬히 되새기는 이야기책입니다. 망명은커녕 이주노동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슬프고 힘겹게 살아야 하던 나날을 담은 이야기책입니다.


  책을 다 읽고 한참 생각에 잠깁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도 지난날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피울음 뱉으며 이 나라 떠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도 지난날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다친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아니, 어떤 이들은 벌건 대낮에 총을 맞아 죽었어요. 어떤 이들은 훤한 대낮에 몽둥이를 맞아 죽었어요.


  2013년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일까요. 한 해가 더 흐르면 자유 물결이 넘실거린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한 해 새로 찾아오면 평화 날갯짓 춤출 만할까요. 한 해 새삼스레 찾아들면 평등 꽃노래 흐드러질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민주요, 자유요, 평화요, 평등인지, 참말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 길가에도 뿌리를 내려 작은 잎사귀 틔우는 들풀 한 자락 사랑스레 쓰다듬을 겨를 없는 이 나라 수많은 사람들 가슴에 민주나 자유나 평화나 평등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뿌리내린 채 춤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며 흐느껴 울거나 동무들을 따돌리거나 괴롭히느라 바쁜,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얼마나 민주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아끼거나 보살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이름은 욤비》를 쓴 욤비 토나 아저씨는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하루’를 보낸다 하는데, 곰곰이 따지면, 한국사람 가운데 고향 살뜰히 지키거나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고향을 잊거나 등지거나 모르거나 빼앗긴 채, 돈을 버느라 힘들고 일자리 지키느라 버거우며 아이들을 대학교 보내느라 등골 휘는 쳇바퀴 삶 아닌지, 참말 잘 모르겠습니다. 4346.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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