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소매·반바지 차림이면 못 가르칠까?

― 겉치레에 얽매인 낡은 틀을 깨부술 때




  학교는 왜 머리에 구멍을 냈을까


  저는 처음부터 머리카락을 기를 뜻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인데, 제 머리카락이 ‘두발 규정’에서 0.1센티미터 어긋난다면서 어느 교사한테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긴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운 ‘학생 두발·복장 규정’에서 0.1센티미터, 그러니까 1밀리미터가 어긋난다고, 고작 1밀리미터 길이로 머리카락이 길다면서 머리카락을 바리깡으로 쥐어뜯더군요. 이때가 1991년입니다. 전두환이라는 군사독재자는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나 또다른 군사독재자가 대통령 자리에서 으르렁대던 무렵입니다. 이때에 저는 교사한테 딱히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리깡으로 밀린 자리’를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머리통에 구멍이 생기거나 고속도로가 난 동무들은 그날 바로 이발소에 가서 박박 머리를 밀었습니다만, 저는 머리통에 구멍이 난 그대로 ‘학교옷을 멀쩡히 입고 돌아다니’기로 했습니다. 머리통이 바리깡으로 밀린 모습은 저 한 사람한테 창피한 모습이 아닌, 학생을 이 따위 모습으로 몰아세우는 학교와 교사와 어른들이 창피한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구멍난 자리에 머리카락이 새로 나기까지는 오래 걸립니다. 더욱이 저는 머리카락이나 털이 아주 천천히 나는 몸이에요. 이러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에 마지막으로 머리통에 구멍이 난 뒤, 이 구멍을 메우기까지 여섯 달이 넘게 걸렸고, 이동안 제 머리카락은 ‘단발머리’가 되었어요. 1994년이지요. 그즈음 사내 가운데 단발머리인 사람이 매우 드물어, 이 머리 길이를 두고 손가락질하거나 막말을 퍼붓는 사람이 매우 많았어요. 어느 때에는 ‘시내버스 승차거부’까지 받았습니다. 어느 버스 기사는 ‘사내녀석이 머리가 길어서 이 버스에 태울 수 없다’고 하더군요. 안 믿을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이 모든 일을 몸으로 겪었기에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길지’도 않고, 그저 뒷목을 덮을 길이일 뿐인데, 알바 자리를 어느 곳에서도 못 얻었습니다. ‘사내가 뒷목을 덮도록 머리카락을 기르면 불량하다’고 하는 사회의식이 짙게 깔린 1994년이었습니다.


  옷차림 규정을 내세운 강의 취소


  하루하루 흘러 어느덧 2018년입니다. 2018년 6월 어느 날, 전라남도 어느 고등학교에서 불쑥 ‘강의 취소’ 연락을 했습니다. 그 고등학교는 7월 어느 날에 저더러 ‘북콘서트’ 강사로 와 주십사 하고 연락을 했는데, 저한테 ‘강사 복장 규정’을 내밀었습니다. 저더러 민소매 웃옷을 입지 말고, 반바지를 입지 말라 하더군요.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와 달라고 말해요.


  저는 1998년부터 강의를 다녔습니다. 1998년에는 신문배달을 하며 살던 무렵이라, 그때에는 ‘신문배달을 하는 차림새’로 강의를 했습니다. 웬만하면 신문배달 자전거를 타고 강의장으로 가는데, 제 일터하고 강의터 사이가 꽤 멀면 전철로 갔습니다. 신문배달 자전거로 가든 전철을 타고 가든, 저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는 차림새로 멀쩡히 강의를 잘 했습니다.


  이때부터 스무 해 동안 여러 곳에서 강의를 했는데요, 국어교사모임에 강의를 갈 적이든, 국립국어원에서 전국 공무원을 상대로 여섯 달 동안 하던 국어문화학교 강의를 할 적이든, 대안학교나 일반학교 어디로 강의를 가든, 국공립도서관이나 개인도서관에 강의를 가든, 절집에 강의를 가든, 제 차림새는 ‘제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살림을 짓고 일을 하는 차림새’ 그대로예요.


  강의를 한 지 스무 해가 되는 2018년 올해 여름까지, 제 차림새를 놓고 ‘재미있다’거나 ‘놀랍다’는 말은 곧잘 듣지만 ‘그런 차림새로는 강의를 하면 안 된다’는 말로 강의를 취소한 곳은 없습니다.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말


  저는 강의터에 나서서 ‘말과 삶과 넋, 사전과 한국말, 말을 짓는 살림, 시골에서 숲을 사랑하며 새롭게 짓는 말’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한테서 이야기를 들으려는 분은 늘 ‘말이 삶하고 어떻게 잇닿고 만나면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며 어떤 말을 어떻게 쓸 적에 삶이 즐거울 수 있는가?’를 궁금히 여깁니다.


  그렇다면 말과 삶과 넋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이란 무엇이고, 한국말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서로 겉치레로 의사소통을 하면 되는 사이일까요? 겉치레 의사소통으로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열지 않고 서로 겉치레로 나선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만할까요?


  어린이나 푸름이가 거친 말을 마구 쓴다면서 걱정하는 어른이 많습니다만, 어른부터 스스로 말을 ‘안 거칠’ 뿐 아니라, 상냥하고 아름답고 즐겁게 쓰지 않는 터라,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이런 ‘어른들 거친 막말’을 고스란히 따릅니다. 학교에서 청소년폭력이 있기 앞서 사회에 ‘어른폭력’이 도사립니다. 어른 사회에서 어른 스스로 폭력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아요. 어른 사회에 따돌림하고 괴롭힘이 있지요. 이른바 차별입니다. 사회차별이 단단하니, 학교에서도 따돌림하고 괴롭힘이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지 않는다면, 또 아직도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또 학력과 신분과 계급으로 세운 질서를 허물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이 서로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짓도 사라질 수 없습니다.


  말이란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담습니다. 우리 삶터에 흐르는 온갖 모습이 사랑스럽거나 아름답지 않은데, 말만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 수 없어요. 우리 삶터에 흐르는 얄궂거나 아픈 모습을 고치거나 바로잡기보다는 감추거나 숨기려 하는 어른들 몸짓은 ‘말살림’에서도 똑같이 나타나요. 밑바닥을 갈아엎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버릇은, 말살림에서도 속으로 가꾸는 길을 멀리하고 겉으로 예의를 차리는 몸짓으로 불거집니다.


  옷차림을 놓고 따지는 버릇은, 중국 한자말을 섬기던 낡은 버릇하고 맞물리고, 서양말인 영어를 높이던 버릇하고 맞닿아요. 우리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길어올린 삶말·숲말·살림말을 제대로 바라보고 살리면서 마음을 새로 가꿀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소매하고 반바지 옷차림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는 마음이란, 삶을 삶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말을 말 그대로 가꾸지 않는 우리 어른들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는구나 싶습니다.


  강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의에 어긋나는 차림새라서 학생·교사·학부모를 앞에 두고 강의를 시킬 수 없다’고 밝힌 분들한테 한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강사한테 옷차림을 두고 발목을 잡으려 한다면, 무엇을 말하거나 들을 수 있을까요? 강사를 불러서 이야기를 들을 적에 ‘강사 구실을 하는 사람이 이제껏 갈고닦아서 이룬 열매를 속알맹이로 받아들이려는 뜻’인가요, 아니면 ‘겉으로 번드레레하게 보이는 차림새나 얼굴이나 몸매를 구경하려는 뜻’인가요?


  참말로 여쭙고 싶어요. 강의나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어떤 옷차림이어야 잘 가르치고, 아이는 어떤 옷차림이어야 잘 배울까요? 옷차림이나 생김새 때문에 못 가르치거나 못 배우는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을 겉모습이나 몸매나 옷차림으로 따지거나 가르는 일은 얼마나 올바를까요?


  눈이 나쁘거나 아파서 햇볕하고 햇빛뿐 아니라 형광등 불빛을 가리려고 언제나 ‘검은안경’을 써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강의를 하려면 검은안경을 벗어야 할까요?


  긴소매에 긴바지가 예의를 차리거나 지키는 차림이 될까요? 예의란, 옷차림이나 겉모습이 아니라, 몸짓이 아닐까요? 예의뿐 아니라, 참다움 착함 아름다움 모두 겉차림이나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이 아닐는지요?


  인권과 자유를 규정으로 눌러도 될까


  더운 여름에 민소매하고 반바지를 안 입는다고 해서 예의를 차리는 강사 옷차림이 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차림이 되는 탓에 에어컨을 실내에 빵빵하게 트는 살림이란 무엇일까요? 더운 날씨에 맞추어 옷을 가볍게 입고 에어컨을 즐겁게 끌 줄 아는, 이러면서 창문을 활짝 열고 싱그러이 바람을 맞아들이는 몸짓이 될 적에, 우리는 스스로도 숲한테도 ‘참다이 예의를 차리는 즐겁고 아름다우며 상냥한 살림길’이 되지 않을까요?


  더운 나라에서는 경찰도 공무원도 반바지를 입습니다. 더운 나라가 아니어도 사람마다 몸이 달라요. 누구는 여름에도 긴옷을 입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추위를 타고, 누구는 겨울에도 맨발에 홑옷으로 다닐 만큼 추위를 안 탑니다. 다 다른 사람한테 다 같은 옷차림을 밀어붙이려 한다면, 이는 또다른 폭력, 이른바 인권 침해나 자유 침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적게 먹어야 배가 홀가분한 사람한테 ‘평균 권장 식사’를 들이밀 수 없습니다. 누구는 하루 두끼로도 배가 부르는데, 억지로 세끼를 먹이면 배앓이를 하며 괴롭습니다. 또, 누구는 하루 한끼로도 넉넉한데 억지로 세끼를 먹이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달걀을 못 먹’거나 ‘우유를 못 마시’는 아이한테도 억지로 달걀을 먹이거나 우유를 마시도록 한 학교요 사회입니다. 그러나 2018년이라는, 2020년대를 바라보는 오늘날이라면, 사람마다 다른 몸과 터전과 결을 헤아리면서 ‘다 다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맞아들이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걷는 슬기롭고 즐거운 몸짓으로 거듭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이 그림책은 ‘꽁치’라는 아이가 치마를 매우 좋아해서 늘 치마를 입으려 하는데, 아이 어버이나 학교 교사나 마을 어른은 ‘꽁치가 치마를 입을 적에 매우 못마땅해’ 하는 줄거리가 흐릅니다. 꽁치는 어떤 아이일까요? 이 아이를 ‘꽁치라는 사람’이 아닌 ‘남성·여성’으로 굳이 갈라서 ‘남성 = 바지, 여성 = 치마’라는 틀에 가두어야 할까요? 여성한테 치마뿐 아니라 바지도 마음껏 입을 권리가 있듯이, 남성한테도 바지뿐 아니라 치마를 마음껏 입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평등이자 평화뿐 아니라 민주이자 통일(참다운 통일)입니다. 획일이 아닌 통일이란, 다 다른 결을 다 달라서 아름답구나 하고 여기는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라는 책이 새삼스럽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폭력을 휘두릅니다. 학교폭력이나 성폭력이나 정치폭력도 있습니다만, 민소매나 반바지를 ‘인권과 자유’라고 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서 ‘예의에 어긋난 나쁜 옷차림’이라는 눈으로 옭아매려고 하는 폭력도 있어요.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나라에서도, 서로 다르면서 서로 아름다운 길을 슬기로이 밝혀서 손을 맞잡고 상냥하게 노래를 부르는 배움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고등학교 푸름이가 ‘겉으로 보이는 차림새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거나 가르는 바보스러운 틀’이 아닌 ‘마음을 열어 서로 어깨동무하는 즐거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한말씀을 더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눈을 감고 서로 바라보면 좋겠어요. 정 눈을 감기 어렵다면 눈가리개를 두 눈에 씌워 보고서 서로 이야기를 해 보면 좋겠어요.


  눈을 감고서 말을 하면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요? 눈을 감고 서로 바라볼 적에 겉모습이나 옷차림이 대수로울까요? 눈을 가리고서 이야기를 할 적에 서로 ‘어떤 신분·계급·지위·재산’인가 하는 모습이 대수로울까요?


  값비싼 자가용을 몰면 훌륭하고, 자전거를 달리거나 두 다리로 걸으면 안 훌륭할까요? 까만 양복을 차려입으면 멋지고, 민소매에 반바지를 걸치면 안 멋질까요? 강사나 교사나 교수는 어떤 차림새일 적에 잘 가르칠까요? 아니,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사람은 겉모습으로 학생을 가르치나요, 아니면 마음에 흐르는 슬기로운 생각을 찬찬히 갈무리하여 들려주는 숨결로 학생을 가르치나요?


  듣기 좋게 꾸미는 말을 펼쳐야 학생이 훌륭히 배울까요? 더듬거리는 말씨로 가르치면 학생이 못 배울까요? 말솜씨가 빼어나야 학생이 훌륭히 배울까요? 말을 더듬을 뿐 아니라 목소리가 낮거나 작으면, 또 말솜씨가 없어서 쭈뼛거리는 사람은 학생을 못 가르칠까요? 혀짤배기인 사람은 말할 적마다 소리가 새니까 학생을 못 가르칠까요?


  겉치레라는 낡은 틀을 깨자


  2020년대를 바라보는 이 나라에서, 거짓스러운 우두머리를 촛불로 끌어내린 이 나라에서, 앞으로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운 평등·평화·민주·통일을 슬기롭게 갈고닦으면서 이룰 이 나라에서, 모든 어른하고 교사한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과 몸짓으로 아이들 곁에 서서 손을 맞잡고 배우거나 가르칠 적에 참다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나누면서 살림을 지을 하루일까요?


  민소매·반바지 차림이면 손사래를 치겠다는 교사·교장 모두한테 조용히 말씀을 여쭙니다. 이제, 겉치레에 얽매인 낡은 틀을 깨부술 때입니다. 겉치레를 털어내고 속을 가꾸는 길을 아이들하고 새롭게 가꿀 때입니다. 2018.7.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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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이 301. 겨울풀 (2017.12.26.)



  우리가 밟는 땅에는 우리 발자취가 남아. 겨울에 시든 잎을 밟으면 새봄에 우리 발자취를 떠올리면서 새로운 풀이 돋고, 흙은 새롭게 숨을 쉬지. 겨울풀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천천히 걷자.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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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아이 191. 2017.11.11. 억새꽃



  억새꽃이 곱다. 흔들흔들 씨앗을 날린다. 눈부시게 하얀 빛깔이 춤을 춘다. 억새꽃빛이나 억새씨빛 같은 이름으로 하양을 새롭게 나타낼 만하겠구나 싶다. 하루하루 깊는 가을이 정갈하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꽃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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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이 300. 춤추는 억새 (2017.10.3.)



  억새는 아이 손에서 함께 춤을 춘다. 아이 손을 타지 않아도 들에서 바람이랑 춤을 추고, 아이 손을 타면서 새삼스레 따스한 기운을 얻어 한결 보드라이 노래하면서 춤을 춘다. 억새를 쥔 아이도 억새가 해님하고 바람하고 흙하고 풀벌레하고 동무하면서 살아온 나날을 고이 느끼면서 노래하고 춤춘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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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아이 190. 2017.10.3. 풀꽃아이



  억새를 한 포기 꺾어서 살살 흔들며 춤짓으로 걷는 누나를 본 꽃돌이는 누나처럼 억새 한 포기를 끊고 싶다. 그렇지만 어찌해야 잘 끊어지는가를 제대로 모르니 용만 실컷 쓴다. 풀꽃아이야, 억지를 쓰지 말고 억새한테 차근차근 말을 걸고 나서 끊으면 톡 끊어진단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꽃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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