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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 이오덕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
이오덕 지음 / 길(도서출판)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오덕 곁에서 / 이오덕 읽는 하루

― 물결을 일으키는 젊은빛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이오덕 글

 길

 2004.4.20.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이오덕, 길, 2004)는 이오덕 어른이 이 땅 젊은이한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온힘을 다하여 여민 꾸러미입니다. 공차기(축구)에는 아무 눈길을 안 두던 이오덕 어른이지만, 2002년에 이 나라 젊은이가 골골샅샅에서 ‘붉은옷’을 입고서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한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직 우리한테는 앞날이 있구나!’ 하고 느끼셨다지요.


  ‘붉은물결 젊은이’는 공차기가 아닌 ‘공을 바라보는 길’에서 새롭게 밀물결이었습니다. ‘이겨야 한다’가 아니고 ‘이기니 좋다’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지 않는 마음’을 펴는 길이고, ‘온마음을 다하여 새롭게 일굴 꿈을 그리면서 나아가는 하루’입니다.


  그때나 더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새뜸(언론)에서는 ‘이기는 쪽’을 높이 삽니다. 겨룸판(스포츠)이기에 이기느냐 지느냐를 따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 눈길을 온통 ‘이겨야 한다’는 쪽으로 밀어붙이는 새뜸이고 나라(정부)이고 배움터(학교)예요.


  겨룸판에서 이기려고 하다 보니 줄을 세웁니다. 줄을 세워서 솜씨나 재주가 낮으면 뒤로 밀릴 뿐 아니라 잘리는데, 얕은 솜씨나 재주로도 앞줄에 끼려고 몰래 돈을 먹이거나 이름값이나 힘으로 욱여넣기도 합니다. 줄세우기 탓에 밀려나는 사람이 있고, 뒷돈이나 몰래질이나 힘질 탓에 떨려나는 사람이 있어요.


  2002년 그날 공차기를 펴도록 이끈 이는 네덜란드사람입니다. 이 네덜란드사람은 네덜란드에서 나고자라던 때부터 ‘어질고 참하게 아이들을 마주하는 길잡이’ 노릇을 익혔습니다. 겨룸판이니 ‘지지 않는 길’을 찾기도 합니다만, ‘지지 않는 길’을 맨앞에 놓지는 않아요. 이이는 어떤 마음에 몸짓으로 겨룸판에 나서려 하는가를 먼저 봅니다. 배움끈(학력·학벌)으로 슬쩍 밀어넣는 짓을 손사래치지요. 나이를 앞세워 억누리는 굴레를 벗겨요.


  이 나라를 가만히 보노라면, 공을 차거나 치거나 때리는 겨룸판 어디에나 배움끈에 뒷돈이 춤을 춥니다. 모든 배움터하고 일터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잘못(부정부패)이 없는 곳은 아예 없다고 할 만합니다. 글판(문학계)도 똑같고, 시골마을조차 눈먼돈을 빼돌리거나 돌라먹는 짓이 가득합니다.


  어떡하면 이 모든 바보짓을 털어낼 만할까요? 그야말로 누구라 할 것 없이 모조리 썩거나 곪았다면 누가 누구를 다스리거나 나무랄 수 있을까요? 골골샅샅 썩고 곪은 나라에서 스스로서기(지방자치·지방분권)를 제대로 이룰까요? 오히려 골골샅샅이 더 썩거나 곪지 않을까요?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가 나온 해부터 스무 해를 돌아봅니다. 누가 우두머리(대통령·권력자) 자리에 앉든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놈도 저놈도 뒤가 구려요. 그놈을 끌어내린들 새로 오르는 이도 나란히 뒤가 구립니다. 착하고 바르게 일하여 땀값으로 살림을 짓는 사람은 어쩐지 벼슬도 감투도 못 받는 듯합니다. 아니, 착하고 바르게 일하여 땀값으로 살림을 짓는 사람은 처음부터 벼슬이나 감투는 조금도 안 쳐다보니, 벼슬이나 감투는 ‘안 착하고 안 바르다’ 싶은 이들이, 땀조차 안 흘리면서 나눠먹기를 하는구나 싶습니다.


  온나라가 썩거나 곪았으면, 그야말로 누구한테서 배울 수 있을는지 까마득할 만합니다. 그러나 길은 뜻밖에 쉬워요. 썩지도 곪지도 않은 사람한테서 배우면 넉넉하고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직 배움터(학교)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한테서 배우면 됩니다. 아직 어린이집에 길들지 않은 아이들한테서 배우면 됩니다. 배움터나 어린이집 모두 안 다니면서 숲빛을 품고 노래하는 아이들한테서 배우면 됩니다.


  푸른별 어느 나라이든 돈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푸른별 모든 나라에는 살림돈이 넉넉하고, 먹을거리에 옷밥집이 모두 넉넉합니다. 그렇지만 푸른별 모든 나라에는 가난한 사람과 가멸찬 사람이 따로 있어요. 넉넉한 돈과 옷밥집을 고르게 나누려는 얼거리가 없을 뿐입니다.


  착하고 참하고 곱고 사랑으로 빛나는 사람이 우두머리나 벼슬이나 감투를 맡는다면, ‘넉넉한 돈과 옷밥집’을 누구나 고르게 나누는 길을 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갔습니다. 두 나라가 부딪히는 싸움연모(전쟁무기)는 무시무시합니다. 얄궂은 러시아한테 맞설 수 있도록 우크라이나로 싸움연모를 대는 나라가 많은데, 싸움연모 하나하나를 보면 값이 무시무시합니다.


  러시아는 왜 그토록 비싼돈을 들여 싸움연모를 만들었을까요? 러시아한테 맞선다는 숱한 나라도 왜 그토록 비싼돈을 들여 그 많은 싸움연모를 만들었을까요?


  펑펑 쏘고 빠르게 날고 꽝꽝 터뜨리는 모든 싸움연모는 ‘똑똑한 과학자·기술자·학자·전문가’들이 힘을 모으고 뜻을 모아서 만들었습니다. ‘똑똑한 평론가·작가·기자’들은 싸움연모를 널리 알리는 데에 이바지합니다. 어찌된 셈일까요? 바보가 아닌 이들이 왜 바보짓을 할까요? 많이 배워서 많이 안다는 이들은 왜 ‘살림연모’가 아닌 ‘싸움연모’를 어마어마하게 돈을 쏟아부어서 끝없이 만들까요?


  그러니 ‘지식인 아닌 아이들’한테서 배울 노릇입니다. 그렇기에 ‘교사·교수·학자·작가·예술가 아닌 아이들’한테서 배울 일입니다.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하면서 일살림을 익힙니다. 아이들은 소꿉노래를 부르면서 일노래를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소꿉집을 꾸리면서 살림집을 짓는 슬기를 온몸으로 맞아들입니다.


  지난 2002년 ‘붉은물결 젊은이’는 네덜란드사람이 이끈 사람들(축구선수)이 너나없이 어깨동무하면서 온마음으로 겨룸판에 서는 길을 지켜보면서 온몸이 짜르르 울리는 새빛을 누렸습니다. 덩치가 커야 이기지 않는 줄 알아차리고, 힘이나 돈이나 이름값이 아닌 꿈과 사랑을 마음에 담는 길이어야 즐거운 줄 알아챘어요.


  나라가 아름답게 서려면, 우두머리(대통령)부터 흙지기(농사꾼)까지 고르게 일하고 쉬고 어울리는 길을 열면 됩니다. 잘 봐요. 벼슬꾼(공무원)은 1급이니 9급이니 가르는데, 흙지기는 스무 해나 마흔 해나 예순 해를 일해도 그저 ‘흙지기’입니다. 벼슬꾼 자리(급수)가 올라야 할 까닭이 없이, 똑같이 받으면 됩니다.


  밥지기(요리사)로 일하는 사람은 밥집에서 일삯을 얼마 받나요? 살림도움이(가사도움이)로 일하면 일삯을 얼마 받나요? 그러면 집에서 집안일을 도맡아 온 숱한 할머니 어머니는 일삯을 받은 적이 있나요? ‘살림꾼(가사노동자) 밑일삯(기본소득)’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우리나라에 돈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허튼곳에 새는 돈이 많고, 뒤로 빼돌리는 눈먼돈이 넘칠 뿐입니다. 1급 공무원도 9급 공무원도 일삯을 똑같이 받으면 됩니다. 싸울아비(군인)를 모두 치우면 됩니다. 배움수렁(입시지옥)을 걷어내면 됩니다. 썩고 곪은 데를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일으킨 엄청난 붉은물결이 있었어도 새물결로 잇지 않아요. 미워하는 물결이 아닌, 살리는 물결로 거듭날 적에 우리나라도 푸른별도 비로소 아름답게 살아가는 터전으로 빛날 만합니다.


ㅅㄴㄹ


여기서 한 차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앞에서 말한 ‘온 국민’이라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아주 완전한 ‘온 국민’은 아니다. 모두가 열광하고 기뻐하는 이런 잔치판에서도 버림받고 따돌려진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16쪽)


그들은 이런 현상을 반가워하면서도 한편 놀라고 두려워하였고, 온 국민들이 터뜨리는 이 엄청난 힘 앞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저마다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 같다. 입만 떼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마음속에서는 지금까지 언제나 가르치고 계몽하고 이끌어 가려고 하는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던 뭇사람들이 이렇게 놀라운 힘과 슬기를 나타내었으니 그만 그 몸가짐을 다시 고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1쪽)


행정관료와 대부분의 교사들은 아이들이 삶을 정직하게 쓴 감동이 담긴 글을 두려워하고 꺼리는 경향이 있다 … 문인들의 창작이론을 아이들의 글쓰기 지도에 적용한 것도 교육을 크게 그르친 원인이 되었다. (98쪽)


어째서 노동자 출신이 노동부 장관이 되지는 못하는가? 어째서 농사꾼이 농사 정책을 맡는 장관이 되지 못할까? 어째서 꼭 외국의 유명 대학을 나온 학력이 있어야 국무총리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가? 어째서 가장 중요한 기초 교육을 맡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 교육 관계 장관은 될 수 없는가? (216쪽)


지금은 서양말 미국말이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같이 되어 있지만, 사실 이렇게 우리말이 남의 나라 말과 글에 짓밟혀 엉망이 된 근본을 찾으면 그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과 한자말이다. 이 한자말은 천 년 동안 우리말을 죽여 왔고, 지금도 우리말을 어지럽게 하고 병들게 하는 원흉이 되어 있다. (254쪽)


정작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어른들이 그 길을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오랫동안 어떤 힘에 억눌려 살아오는 동안 그만 억누르는 그 질서에 길들여져서 참된 것을 볼 줄 모르고 도리어 그 참된 것을 억누르는 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318쪽)


이렇게 해서 학교생활이고 가정생활을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삶’으로 보내게 된다면 학교를 졸업한 다음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살아갈 것이니, 정치고 경제고 산업이고 사회의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33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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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살리는 문학 - 일생동안 어린이 문학을 일구고 가꾼 이오덕의 유고 평론집
이오덕 지음 / 청년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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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오덕 곁에서 / 이오덕 읽는 하루

― 쓴풀은 마음을 씻고



《삶·문학·교육》

 이오덕 글

 종로서적

 1987.8.20.



  《삶·문학·교육》(이오덕, 종로서적, 1987)은 얼핏 ‘쓴풀’ 같습니다. 그러나 풀을 알고 보면 어디에도 쓴풀은 없습니다. 온누리 모든 풀은 언제나 ‘풀’입니다. 우리 스스로 풀을 풀로 바라보지 않은 탓에 ‘잔풀(잡초)’이라 여기고, ‘몹쓸풀’이라 말하기도 하고, ‘쓴풀’이라고 내치다가 멀리할 뿐입니다.


  풀은 다 다릅니다. 똑같은 풀은 없습니다. 풀은 저마다 온누리를 푸르게 살리면서 품는 노릇입니다. 크고작은 숱한 풀이 돋아서 땅바닥을 덮기에 빗물이 흘러도 흙이 안 쓸려요. 풀이 흙바닥을 푸근히 덮기에 나무씨앗이 움트고 줄기를 올리면서 숲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모든 풀은 그저 풀입니다. 다 다른 풀을 나물로 삼아 보면, 다 다른 터라 다 다른 맛과 내음과 숨결과 기운을 우리한테 베풀어요. 그런데 오늘날 이 나라를 보면, 다 다르게 돋는 풀을 다 다르게 바라보거나 맞아들이지 않기 일쑤예요.


  가게에 놓는 나물이나 남새를 봐요. 모두 똑같이 생긴 ‘공산품’이지 않나요? 다 다른 땅에서 다 다르게 돋으면서 우리 몸에 다 다르게 이바지할 풀이 아닌, 비닐을 씌운 땅에서 풀죽임물(농약)에 죽음거름(화학비료)에 꼭짓물(수돗물)을 머금으면서 ‘똑같은 크기·빛깔·모습’으로 틀에 짜맞추고 맙니다.


  “몸을 살리는 풀은 입에 쓰다” 같은 옛말이 있습니다만, “살림풀이 입에 쓴 까닭”은 오직 하나예요. 여느때에 ‘살림풀’을 멀리한 터라, ‘살림풀맛’을 잊다가 잃었거든요.


  갓 태어나서 당근이나 배춧잎을 입에 물고서 놀던 아기는 어린이로 자라고 어른이 되면 당근이며 배추를 즐겁고 달게 누려요. 갓 태어나서 맨발에 맨손으로 흙바닥을 뒹굴고 풀밭에서 기어다니며 놀던 아이는 무럭무럭 크는 동안 모든 풀내음이 다 다른 풀빛으로 우리 곁에 있는 줄 온몸으로 알아채고 받아들여서 ‘푸른님’으로 노래하는 살림을 일굽니다.


  한때 ‘설탕수박’ 같은 이름으로 ‘더 달아야 맛난 수박’이라고 여기더니, 어느새 ‘꿀수박’처럼 ‘더더욱 달아야 맛나고 좋은 수박’이라고 여깁니다. 이제는 들딸기나 멧딸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드물어요. 모든 딸기는 첫봄인 3월에 ‘겨울을 난 덩굴줄기’가 새삼스레 옅푸르게 번지면서 한봄인 4월에 천천히 흰꽃을 피운 다음, 늦봄인 5월부터 꽃이 지며 빨갛게 영글어 열매를 맺습니다. 밭딸기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서울나라(도시문명사회)에서는 비닐집을 억지로 만들고 겨우내 기름을 때어 ‘2∼3월’이나 ‘11∼12월’에도 언제나 커다란 딸기알을 맺어서 사고파는 얼거리로 뒤틀렸어요.


  ‘가게딸기’를 딸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가게딸기’는 ‘기름 때는 비닐집’에서 ‘기름과 꼭짓물과 죽음거름과 풀죽임물을 옴팡 뒤집어쓴 공산품’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허울은 딸기 같되, 막상 딸기라고 여길 수 없는 ‘죽음덩이’를 과일이나 열매나 낟알이나 남새라고 잘못 알면서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고 마음도 무너지는 얼거리인 서울나라예요.


  예부터 ‘살림’은 ‘집밥옷 손수짓기’였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살림’이란 우리말을 안 쓰기 일쑤입니다. 한자말 ‘생활(生活)’이 나쁠 수 없습니다. 우리말 ‘살림 = 살리는 일이자 길이나 뜻이자 하루’를 나타내기에, ‘살림’이란 낱말을 안 쓰는 동안, 누구나 스스로 ‘살리는 나’를 잊다가 잃을 뿐입니다.


  《삶·문학·교육》이라는 책은 ‘삶·글·집’을 하나로 마주하면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삶을 담아야 글입니다만, 오늘날에는 ‘삶이라고 여길 삶’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는 ‘딸기 흉내인 공산품’만 넘치듯 ‘삶 시늉인 공산품 사회’인 몰골이지 않을까요? 딸기가 아닌 ‘딸기 흉내’를 아무리 배불리 먹는들 참말로 넉넉하거나 즐겁거나 싱그러울 수 없습니다. ‘흉내’는 삶이 아닌 ‘허울’이요, ‘허물’이거든요.


  한 톨을 머금더라도, 들에서 들빛을 머금으면서 빗물을 마시고 햇볕과 별빛으로 자란 들딸기를 손바닥에 얹고서 바라보는 살림일 적에,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살아날 만합니다. 한 숟가락 밥이든, 한 포기 들나물이든, 숲에서 숲빛으로 어우러진 하루를 살아가는 들꽃과 들풀을 건사하는 살림일 적에, 비로소 누구나 저마다 사랑을 깨달을 만합니다.


  숲을 잊은 사람들이 쓰는 글에 숲내음이 날 턱이 없습니다. 서울나라에 스스로 가둔 사람들이 읽는 글에 숲빛이 흐를 까닭이 없습니다. 겉모습이 사람이기에 사람이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책이기에 책일 수 없습니다. 겉모습은 언제나 ‘허물·허울’이자 ‘시늉·흉내’인 ‘탈’입니다. 탈바꿈을 아무리 하더라도 바탕인 숨결은 고스란하게 마련입니다. 탈바꿈이나 허물벗기가 아니라, 날개돋이를 하는 살림길일 적에 서로서로 사람빛으로 만나서 환하게 웃을 만해요.


  섣불리 ‘어린이문학’을 안 하기를 바랍니다. 어린이한테 섣불리 ‘명작동화’나 ‘추천동화’를 안 읽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이라면, 서울에서 일하면서 살거나 시골에서 한갓지게 살거나 ‘살림 짓는 하루’를 펴면서 스스로 글을 써서 어린이하고 함께 읽을 수 있기를 바라요.


  ‘문학교육·동화교육’을 받아야 글을 잘 읽거나 쓰지 않습니다. ‘그림책테라피 자격증’이 있어야 그림책을 잘 읽어내거나 어린이한테 읽힐 수 있지 않습니다. ‘교육·자격증’이 아닌 ‘살림·사랑’을 오직 ‘숲·사람’이라는 넋으로 마주하고 품을 적에, 어린이랑 어른이 노래하고 춤추는 기쁘고 신나는 놀이누리를 이뤄요.


  스스로 삶을 짓는 살림을 모르거나 등지기 때문에 베낍(표절·도용·필사)니다. 스스로 사랑을 펴는 숲을 잊거나 멀리하기 때문에 감추고 거짓말을 하고 이웃을 따돌리거나 짓밟습니다. ‘무늬만 딸기인 공산품’을 손사래칠 줄 안다면, ‘무늬만 어린이문학·동화책·그림책인 공산품’을 가볍게 뿌리치면서 아이들하고 이 푸른별을 사랑하는 첫걸음을 내딛겠지요.


ㅅㄴㄹ


아이들이 자연을 몰라도 되는가? 자연을 모르고 자연에서 멀리 떨어져 살 때 사람은 병들고,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 자연을 등지면 어떤 삶도 원천적으로 뒤틀리게 마련이다 … 우리 겨레가 살아남으려면 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쳐야 한다. (14쪽)


사람을 기계로 만들고, 사람의 생각을 없애는 세상이 될수록, 이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생각을 키워 가는 글쓰기 교육을 학교에서고 가정에서고 힘들여 해야겠읍니다. (23쪽)


어린이들에게는 참된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 삶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애타게 구하고 찾도록 해야 한다. (86쪽)


어른들이 덮어씌우는 가르침에 병들지 않는다면 어린이의 눈과 마음은 언제나 명확하게 세상의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닫는다. (118쪽)


어떤 사람은 아동문학에서 교훈성을 경계하면서, 교훈적인 얘기는 동화가 될 수 없고, 아이들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거의 모든 옛이야기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가! (134쪽)


본디 인간의 일은 즐거운 놀이와 같은 것이었다고 본다. (일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애들이 부모가 하는 일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엄마가 빨래를 하는 것을 본 아기는 저도 손수건을 물에 담가 빨고 싶어하고, 아버지가 짐을 져 나르는 것을 보면 저도 지게를 지고 싶어한다. (269쪽)


마을 앞에 높이 달아 놓은 확성기와 일하는 논밭에까지 갖다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박한 노래소리가 새소리와 물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풀잎 흔들리는 소리들을 압도해서 온통 마을을 울리고 골짜기를 뒤흔들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28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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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시론 - 굴렁쇠 생각 3
이오덕 지음 / 도서출판 굴렁쇠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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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헌책집에서 만난 이슬


《兒童詩論》

 이오덕 글

 세종문화사

 1973.1.30.



  《兒童詩論》(이오덕, 세종문화사, 1973)은 아주 잊힌 책이었습니다. ‘내가 이오덕을 잘 아는 제자요!’ 하고 내세우는 분들 가운데 이 책을 읽었거나 건사한 사람을 아예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오덕 제자’라고 내세우는 분들이 《아동시론》을 읽은 적도 구경한 적도 없나 아리송했습니다. 그런데 《아동시론》뿐 아니라 《까만 새》라는 이오덕 어른 노래책(동시집)을 까맣게 모르는 분도 수두룩했습니다. 《별들의 합창》 같은 조금 묵은 노래책은 더더구나 모르더군요.


  말로는 스승이라 여기고 우러른다고 하면서, 정작 ‘스승이 쓴 책’을 곁에 놓지 않을 뿐 아니라 읽지도 않는다면, ‘스승이 펴는 뜻’을 헤아리지 못 하거나 모를 테지요. 스승이 쓴 책조차 사지도 읽지도 않고서 스승 꽁무니만 좇는다면 그야말로 허술하고 엉성하며 뜬구름잡는 셈일 테고요.


  저는 《아동시론》을 헌책집에서 만났습니다. 자주 만났습니다. 저한테는 한 자락만 있으면 되니, 제 몫으로 한 자락을 놓고, 이웃이며 동무이며 동생한테 한 자락씩 사주었습니다. 1999년에 들어가서 일한 보리출판사 편집부에도 사주었고, 2001년부터 들어가서 일한 토박이출판사(《보리 국어사전》을 내놓은 곳)에도 사놓았습니다.


  헌책집을 다니면서 《아동시론》을 척척 찾아내어 건네니 둘레에서는 화들짝 놀랍니다. “아니? 어떻게 이 귀한 책을 그렇게 쉽게 찾아요?” “쉽게 찾는다고요? ○○님이 헌책집을 안 다니니까 안 보일 뿐이에요. 헌책집을 다니면서 스스로 한나절씩 눌러앉아 이 책 저 책 골고루 읽고 누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만날 수 있습니다. 틈이 없어서 헌책집을 못 간다는 핑계는 그만 대셔요. 저녁에 술 좀 그만 마시고 틈을 내어 이틀이나 사흘마다 헌책집에 가서 한나절씩 책을 읽고 누리다 보면 누구라도 다 만날 수 있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음이 있을 적에 만납니다. 마음이 없을 적에 안 만납니다. 마음이 있으면 어느 책이라도 곧 만납니다. 마음이 없기에 못 만날 뿐 아니라, 판이 예전에 끊긴 아름책을 찾아내려고 헌책집을 찾아다니는 발걸음이 없어요.


  2023년에 문득 헤아리니 오랜 《아동시론》을 30만 원 값에 파는 헌책집이 있습니다. 이 값은 비쌀까요, 안 비쌀까요? 1999년에 헌책집에서 《아동시론》을 5000원이나 1만 원에 사서 둘레에 건네었는데 “이렇게 낡은 책이 5000원이나 한다고?” 하면서 비싸다고 손사래친 분을 꽤 보았습니다. 이분을 빤히 보다가 “○○님, 이 책에 5만 원 값을 붙이면 헌책집지기를 아주 미친놈으로 여기시겠네요?”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1974년에 나오고서 첫판조차 안 팔리고 사라진 《까만 새》는 값이 얼마여야 안 비싸다고 여기려나요? 1966년에 나온 《별들의 합창》하고 1969년에 나온 《탱자나무 울타리》는 헌책집에서 얼마로 팔아 주어야 안 비싸다고 여길 만한가요? 저는 이오덕 어른이 남긴 책 가운데 아직 《별들의 합창》만 만나지 못 했습니다. 1994년부터 헌책집에서 하나둘 만났습니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도 헌책집에서 찾아내어 볼에 눈물자국을 내면서 읽었습니다. 때로는 이오덕 어른이 누구한테 건네면서 남긴 손글씨가 깃든 판을 헌책집에서 보았고, 어른 손글씨가 있는 책을 이웃한테도 스스럼없이 건넸어요.


  책이란 무엇일까요? 헌책이란 무엇일까요? ‘헌’은 “손길을 거친”을 뜻합니다. ‘새’이기에 좋지 않고 ‘헌’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아직 손길을 안 거친” 살림이니 ‘새’일 뿐이고, “손길을 거치면서 손빛이 흐르”는 살림이기에 ‘헌’입니다.


  ‘새책 = 처음으로 읽힐 책’입니다. ‘헌책 = 새롭게 읽힐 책’입니다. ‘새책 = 낯선책’입니다. ‘헌책 = 손길책·손빛책’입니다.


  ‘새 = 사이’를 가리키고, ‘새 = 멧새’이기도 합니다. 하늘하고 땅 사이에 있기에 ‘새’요, 내가 나로서 나답게 나를 바라보고 사랑할 줄 알아서 날개를 달고서 하늘로 날아오르기에 ‘새’입니다.


  ‘헌 = 한’하고 맞닿습니다. ‘허’라는 말밑은 ‘허허바다’로 잇거든요. ‘허허바다’란 ‘하늘’처럼 가없이 잇는 ‘크고 하나’를 나타내요. 그래서 ‘헌책 = 한책 = 허허바다책 = 하늘책’이기도 합니다.


  겉보기로 허름한 책이기에 꾀죄죄하거나 나쁠 수 없습니다. 겉보기로 가난하거나 글을 모르는 멧골아이라서 모자라거나 나쁠 수 없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서울아이도 대구아이도 아닌 멧골아이 곁에서 멧새가 되어 노래하는 하루를 짓고픈 꿈으로 배움길을 걸었습니다. 이 대목을 좀 헤아려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오덕 어른은 스스로 멧사람이기를 바랐고, 마지막숨을 한 줄기 쉬고 눈을 감을 적에 “나는 멧새로 돌아간다”는 마음을 남겼습니다.


  새로 나오기에 값지지 않습니다. 오래되었기에 낡지 않습니다. 철이 들지 않을 적에만 낡거나 늙습니다. 철이 들 적에는 늙음도 낡음도 아닌 어질거나 슬기로운 눈빛입니다. ‘헌책 = 철빛을 읽는 철든 책’이라고 느낍니다. ‘하늘빛을 담기에 헌책’이요, ‘멧새가 노래하는 숨결을 담기에 새책’이로구나 싶습니다. ‘새책 = 아이다운 눈망울로 하나씩 배우려는 책’이고, ‘헌책 = 어른스런 눈빛으로 하나씩 나누려는 책’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또한 헌책집은 모든 갈래 온갖 책을 두루 품습니다. 새책집은 갓 나온 ‘낯선책’을 건사하는 책터라면, 헌책집은 손길을 거친 모든 ‘새로배움책’을 아우르는 책바다요 책누리요 책잔치요 책숲입니다. 헌책집을 마실하면서 이오덕 어른 예전 책을 찾아나설 뿐 아니라, 사람들 손길을 덜 타거나 새록새록 되읽힐 아름책을 만나는 이웃님이 늘기를 바랍니다. 헌책은 값싼 책이 아니라, 되읽힐 아름책입니다. 새책만 쳐다보다가는 그만 책이 왜 책인가를 잊고 맙니다.


  왼손에 새책을 놓는다면, 오른손에는 헌책을 놓아요. 오늘은 새책을 읽었으면, 모레에는 헌책을 읽어요. 이오덕 어른이 왜 멧골아이 곁에서 노래하는 멧새가 되기를 바랐는가 하는 마음을 읽으면서 헤아리고픈 이웃님이라면, 아무쪼록 자그마한 마을새책집하고 마을헌책집을 나란히 나들이하면서 ‘책숲마실’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책은 헌책입니다. 모든 책은 새책입니다. 모든 책은 숲입니다. 모든 책은 사랑입니다. 모든 책은 바다요 하늘이요 땅이요 풀꽃나무이면서, 모든 책은 살림이고, 모든 책은 사람입니다.


ㅅㄴㄹ


우리의 아동들에게는 시가 없다. 그들의 일상의 말과 행동과 마음속에 충만해 있는 참된 시의 세계는 그릇된 어른들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봉쇄당하여, 대신 시와는 얼토당토 않는 기묘한 흉내내기 놀이를 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답지 못한 원숭이 흉내가 곧 아동들이 쓰고 있는 동시라는 것이다. (9쪽)


윤석중 씨의 동요 세계는 그 후 20여 년 동안 전국의 아동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동요란 이름이 거의 없어진 지금에도 여전히 그 동요적 세계는 판을 치고 있어서 참된 아동시의 발아를 저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아동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생활의 노래를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머리속에서 나온 ‘재미’와 ‘웃음’의 동심이라는 것을 강요할 때, 그것은 골계(滑稽)에 가까운 말재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17∼18쪽)


만일 아동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과 마음을 자기의 말로 쓰게 된다면, 거기 유사 모조품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천 명의 아이가 쓴 천 편의 시는 천의 얼굴처럼 다 다를 것이 당연하다. 또한 같은 아이가 쓴 같은 제목의 시라도 어제 쓴 것과 오늘 쓴 것이 달라야 한다. (25쪽)


전국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상을 타기 위해 다투어 이런 바보놀음을 하여 왔던가? 다투어 어린애의 몸짓이나 재롱을 피워서 그런 것을 좋아하는 어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여 온 것인가? (36쪽)


우리는 아동들이 시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시를 쓰는 직업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이 정직하고 행동이 순진하고, 용감하고, 인간성이 풍부하고, 개성이 뚜렷한 창조적 인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74쪽)


아이들이 쓰는 것이라도 시면 시지, 하필 ‘동’ 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 (210쪽)


‘사투리가 들어 있는 시’, ‘사투리로 쓰는 시’를 써 보자고 한다. 몇 번을 이렇게 사투리로 쓰게 하면 어렵지 않게 동시적인 것을 버리고 그들의 신선한 생활의 세계로 돌아지 않을까 한다. (22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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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 시 쓰기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3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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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너나없이 날아오를 노래님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이오덕

 지식산업사

 1988.10.5.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이오덕, 지식산업사, 1988)라는 책을 처음 만나던 날 온몸으로 번쩍 하고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어린이여야 하늘나라로 간다”는 말을 다르면서 새롭게 들려주는 말이 “어린이는 모두 노래님(시인)이다”라고 느꼈어요. 어린이 마음을 잊거나 잃으면 ‘어른 아닌 늙은이’요, 어린이 마음을 고이 건사하면서 즐겁고 아름답게 설 줄 알기에 ‘철든 사람’으로서 사랑꽃을 피우는 숨결이 되리라 느껴요.


  어린이를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어린이한테서 배우면 됩니다. 어른은 가르칠 몫이나 자리가 아닌, 배우고 사랑할 몫이자 자리입니다. 어린이는 배우는 사람이 아닌, 어버이를 가르쳐 어른으로 거듭나도록 북돋우는 빛살입니다.


  오늘날 배움터를 보면 하나같이 ‘어린이를 가르치려 듭’니다. 이른바 ‘교육·학습·훈육·양육·훈련·양성·육성’ 따위 일본스런 한자말을 함부로 들먹이잖아요? 이 모든 일본스런 한자말로 밀어대는 짓은 어린이 숨결을 짓밟고 어린이 마음을 망가뜨리고 어린이 넋을 들볶는 사나운 칼부림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살림을 짓는 어버이 곁에서 모든 삶을 받아들입니다. 스스럼없이 지켜보고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나비처럼 날고 나무처럼 서지요. 어린이는 ‘어른 아닌 늙은이’처럼 ‘돈·이름·힘’ 앞에서 굽실거리지 않습니다. 어린이 마음을 잊다가 잃은 ‘어른 아닌 늙은이’가 언제나 ‘돈·이름·힘’ 앞에서 굽실거려요.


  우리가 어른이라면, 허울뿐인 늙은이가 참말로 슬기롭고 어질고 참하며 착하고 사랑스레 밝은 어른이라면, 어린이를 안 가르칩니다. 어린이를 돌아보면서 사랑하는 하루를 지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아니기에, 자꾸 어린이를 가르치려 듭니다. 어른이 아닌 늙은이인 탓에 철이 안 든 채 자꾸자꾸 어린이를 길들이려 하지요.


  철든 숨결이자 눈빛이라면 아무도 안 가르칩니다. 보셔요. ‘스승’은 가르치는 자리나 몫이 아니에요. 스승은 스스로 살림을 짓는 삶을 누리면서 사랑을 길어올려서 펴는 사람입니다. 스승도 스님도 안 가르쳐요. 그저 곁에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면서 기쁘게 북돋아 ‘어린이가 놀도록 자리를 내어줄’ 뿐입니다. 어린이가 마음껏 놀도록 마음을 쓰고 보금자리를 가꾸기에 ‘어버이에서 어른이란 이름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가르치려고 닦달하면서 배움터(학교·학원)로 몰아세우기에 ‘어른 아닌 늙은이’예요.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는 어린이한테 노래짓기(시쓰기)를 안 가르칩니다. 어린이가 저마다 하늘빛으로 노래하는 사랑어린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고 차근차근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어른 아닌 늙은이’한테 들볶인 나머지 빛살을 잃고 말아 ‘낡은 굴레에 갇힌 딱한 아이들’이 ‘틀박이(기계)처럼 만들어내는 겉발림 동시’가 무엇인지 가만히 보여줍니다.


  노래하기에 어린이입니다. 놀기에 아이예요. 노래하며 놀기에 어린이요, 노래하며 노는 마음을 고스란히 건사하면서 사랑으로 돌보는 어진 숨빛을 밝혀서 든든하게 자라난 사람이기에 비로소 ‘어른’입니다. 이리하여, 어린이 마음을 고이 잇는 사람인 어른이라면 ‘일하며 안 지쳐’요. 즐겁게 놀이를 하듯 즐겁게 일할 줄 아는 어른은 ‘지치는 일’이 없고 ‘고단한 일’이 없습니다. ‘일 아닌 돈벌이’만 하기에 ‘어른 아닌 늙은이’일 뿐 아니라, 언제나 힘겹고 지치고 나른하고 괴로운 굴레에 스스로 갇혀서 못 헤어나오고 말아요.


  놀이하는 아이가 일하는 어른으로 피어납니다. 노래하는 아이가 사랑하는 어른으로 깨어납니다. 놀며 노래하는 아이가 살림을 짓고 숲을 품는 어른으로 눈뜹니다.


  놀지 못 한 아이는 그만 늙은이로 시들시들합니다. 노래를 못 부른 아이는 어느새 팍삭 늙어서 아프고 맙니다. 놀지 못 하고 노래하지 못 했으니 사랑이 아닌 ‘짝짓기’만 하려고 눈먼 몸짓에 허덕입니다.


  어린이는 누구나 노래님입니다. 어린이가 입으로 읊는 모든 말은 노래입니다. 어린이가 읊는 즐겁거나 슬픈 모든 말을 글로 옮기니 저절로 노래(시)를 이룹니다. 따로 글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읊는 말씨를 글씨로 담아내면 됩니다. 구태여 종이에 글을 얹어야 하지 않습니다.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을 잇고 살려서 이야기로 여미니 어느새 글자락으로 태어날 뿐입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노래하는 아이 곁에서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낳은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이’를 모두 상냥하게 마주하면서 하루를 짓는 빛나는 살림꽃을 도란도란 이야기로 들려주면서 환하게 웃을 테지요.


  아이들은 ‘직업훈련’이 아닌 ‘살림짓기’를 보고 듣고 함께하면서 자랄 적에 어른으로 섭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일자리(직업)를 알려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놀이판을 마련하고, 노래판을 갖추어서, 마당이 넉넉한 보금자리를 가꾸면 됩니다. 나무를 심을 마당이 있어야 어른이라 할 살림입니다. 풀꽃을 곁에 두고 벌나비를 부르는 오늘을 지어야 어른스럽다고 할 삶입니다. 풀벌레랑 개구리하고 동무하면서 같이 노래하고 춤추기에 바야흐로 어른답게 빛나는 눈망울입니다.


  노래는 숲에서 흐릅니다. 살림은 숲에서 얻습니다. 말은 숲에서 태어납니다. 마음은 숲을 품으면서 푸릅니다. 생각은 숲하고 한동아리로 흐르면서 빛납니다. 사랑은 숲하고 사람이 한몸에 한마음인 줄 깨닫는 자리에서 씨앗 한 톨로 돋아납니다.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쓰고, 노래를 읽기로 해요. ‘시·동시·문학’이 아닌 ‘노래’를 함께 부르고 나누기로 해요.


ㅅㄴㄹ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참기쁨도 모릅니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없읍니다. 어른들은 생명을 짓밟고 죽이기를 예사로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차츰 나이 많을수록 사람은 이상하게 되어 갑니다. (4쪽)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연 속에 살면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들가 함게 개구리소리도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로 느끼고 들었읍니다. 그런데 요즘 어린이들은 자연을 모르고 자연에서 떠나, 사람이 만들어 낸 기계적인 환경에서 기계들이 내는 소리만 들으면서 살지요. (12쪽)


“여자 놓든 남자 놓든 / 엄마 마음대로 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하고 한탄하다가도 결연한 말로 “설움만 받고 크는 아기 / 어째서라도 나는 / 아기를 키우고야 말겠다.” 이처럼 맺고 있는 이 아이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74쪽)


만약 어른들이 아이들을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여 삭막한 콘크리트 집 안에 가둬 놓고는, 온갖 잡동사니 지식을 공부라고 하여 머리에 쑤셔넣고, 점수따기 경쟁을 채찍질로 시켜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모조리 병들게 하지만 않는다면, 어린이는 모두 시인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이치를 저절로 느껴 아는 놀라운 시인이 된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137쪽)


생활을 얘기하는데 자연이 저절로 나타나 있고, 자연을 얘기하는데 삶이 그 속에 저절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지요. (159쪽)


머리로 시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되고, 사실과 진실을 정직하게, 즉 가슴으로 온몸으로 써야 하지만, 아직도 어른들은 머리로 글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199쪽)


여기에는 시 같은 것을 써 보이려고 어떤 몸짓을 하거나 말재주를 부린 흔적이 없읍니다. 시는 이런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정직한 마음, 이것이 시의 마음입니다. 시의 길이 곧 사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0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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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산처럼 - 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 나무처럼 산처럼 1
이오덕 지음 / 산처럼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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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해를 품은 하루


《나무처럼 산처럼》

 이오덕

 산처럼

 2002.10.10.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 산처럼, 2002)이 나오던 무렵, 저는 서울 종로구 교동이라는 골목마을 작은집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서울 종로구 교동’은 길그림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잿더미(아파트단지)로 바뀌었습니다만, 2002년 무렵 서울 한복판이라 할 그곳에 ‘밑돈(보증금) 1000에 달삯 10’인 오랜 나무집(목조주택)이 있었어요.


  아직 서울에서 살던 그무렵 둘레에서는 제가 살던 달삯집을 못 믿었습니다. “임마, 서울 종로구 한복판에 어떻게 보증금 1000에 월세 10짜리 집이 있냐?” 하고 따지더군요. 그러나 이렇게 따지던 분들을 데리고 저희 집으로 부르니 “와, 어떻게 이런 골목이 다 있고, 이런 골목에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이 남았어? 저 앞 경교장보다 여기 이 적산가옥이야말로 근대문화유산 아니냐? 서울에 화장실 없는 적산가옥이 있다고?” 하면서 놀라더군요.


  이른바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에 서울 종로구 교동 옆 ‘서대문구 냉천동·현저동’에도 ‘뒷간 없는 작고 값싼 달삯집’이 꽤 있었습니다. 그 작고 값싼 달삯집은 ‘밑돈 300에 달삯 10’이라든지 ‘밑돈 500에 달삯 10’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작고 가난한 살림칸을 용케 알아본다며 혀를 내두르는 분들한테 “저기요, 가난한 살림으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작고 값싼 집이 잘 보여요.” 하고 얘기했습니다.


  나무디딤칸(나무계단)을 오르내릴 적마다 삐걱거리던 오랜 달삯집에는 모기그물조차 없고, 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즐거웠어요. 봄부터 가을까지 ‘골마루 미닫이’를 다 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이던 나무집은 2층에 골마루가 있고, 이 골마루에 붙은 오래된 미닫이를 열면 밤새 하얗게 밝은 을지로나 종각까지 훤히 보였습니다. 가까이 ‘경희궁’이 있는데, 이 경희궁 작은숲에는 다람쥐나 오소리나 족제비도 살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여름날에 골마루 미닫이를 활짝 열고서 책을 읽을라 치면 으레 다람쥐나 오소리나 족제비가 불쑥 창턱에 올라앉아 빼꼼 들여다보다가 휙 사라졌거든요.


  작고 값싼 삯집에 깃드는 사람들은 나란히 작고 가난합니다. 그무렵 1층에 살던 가난한 이웃은 아주머니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더라도 살림을 잇기 벅찼고, 그 집 아이는 하루 내내 혼자 토끼우리에 있는 토끼한테 배춧잎을 먹이면서 심심하게 놀았어요. 그 집 아저씨는 일을 않고 핀둥핀둥 놀기만 하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아주머니를 때리면서 싸움이 불거지고, 이틀마다 경찰이 찾아와서 아저씨를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런 살림집에서 하루를 보내던 저는 서울 내발산동으로 일하러 다녔습니다. 한창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자료조사부장으로 일했어요. ‘국어사전 집필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너무 허름한 살림집에서 지낸다고 여긴 분들이 “그래도 그렇지, 사전 편집장이나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너무 가난한 집에서 살지 않는가? 월급이 그렇게 적나?” 하고 물으셨고, “몸뚱이 하나를 누이면 집이면 됩니다. 달삯은 많지도 적지도 않습니다. 저는 더 크거나 좋은 집에 돈을 쓸 마음이 없어요. 낱말책을 새롭게 쓰는 편집장이기에 ‘집에 들일 돈이 있다’면 ‘책을 사는 돈으로 쓰려’고 합니다.” 하고 대꾸했어요.


  낱말책을 여미든 이야기책을 쓰든 글꽃(문학)을 밝히든, 배부르게 살지 말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부른 돈이 아닌 넉넉한 마음이 되어 하늘을 보고 별을 바라고 풀꽃을 품고 나무를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잿집(아파트)에서 사는 몸이라면 낱말책을 여밀 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글을 쓸 수 없고,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며, 빛꽃(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잿집(아파트)은 발바닥이 땅바닥에 안 닿아요. 배부른 몸으로는 이웃을 읽지 못 하고 만나지 않아요.


  《나무처럼 산처럼》은 책이름대로 나무처럼 살아가기를 바라고 멧숲처럼 푸르게 노래하기를 꿈꾸는 마음을 들려줍니다. 나무가 들려주는 말을 듣는 마음을 속살이고, 멧새가 알려주는 노래를 나누는 길을 밝혀요. 시골에서 살든 서울에서 살든 우리 마음밭을 나무빛으로 보듬는 하루를 이야기합니다.


  해를 품으니 햇살처럼 눈부십니다. 해를 안으니 햇빛처럼 무지개입니다. 해를 그리니 햇볕처럼 포근합니다. 해바람비는 뭇목숨을 살립니다. 해바람비가 깃든 낟알하고 열매로 밥살림을 지으니 누구나 든든하면서 푸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땅밑길을 지나는 전철을 아침저녁으로 타고서 일터를 오가던 2002년에 이오덕 어른 책을 읽고 거듭 읽는 동안 ‘아무리 매캐하고 시끌벅적하고 별빛을 만나기 어려운 서울 한복판이어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온몸을 휘감고 미리내가 밤마다 가만히 토닥여 주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글 한 줄로 티끌을 훅 씻어내는 길을 보았습니다. 글 두 줄로 먼지를 싹 걷어내는 살림을 만났습니다. 글 석 줄로 앙금을 털어내는 사랑을 느꼈습니다. 글 넉 줄로 생채기가 아물도록 가꾸는 사랑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무처럼 서고 싶습니다. 나는 나비처럼 날고 싶습니다. 나는 나로서 나답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나는 너랑 도란도란 어우러지는 살림살이를 지피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숲빛이고 싶습니다. 내가 쓰는 글은 숲글이요, 내가 읊는 말은 숲말이며, 내가 부르는 노래는 숲노래이도록 온마음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ㅅㄴㄹ


그분들은 모두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쓰는 분들이었는데 매미 소리를 모르고 있었다. (5쪽)


사람이 그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개나 소나 돼지만큼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싶다. 사람이 무슨 학문이고 철학이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떠벌리면서 거짓과 속임수로 살지 말고, 저 풀숲에서 우는 벌레만큼 고운 울림으로 자연 속에 어울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것이 내 꿈이었는데. (52쪽)


세상에서 사람의 아이치고 어른들 개 잡는 것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구경할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아이들 마음이고, 하늘이 준 자연의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하도 그런 어른들의 행동을 자주 보게 되고 그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질서 속에 살다 보니 그만 그 아이들도 차츰 감각이 둔해지고 본성이 흐려지고 길이 들여져서 어느새 병든 어른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81쪽)


이것이 모두 어린이들과 삶을 같이 하지 못 하고 책만 읽어서 시를 쓰고, 아이들을 멀리서 한갓 풍경으로 바라보고 생각만으로 썼기 때문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155쪽)


글쓰기만 해도 그렇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시나 소설 같은 것, 동화 같은 것이 아니면 글이 아닌 줄 압니다. 가치가 없는 글로 여깁니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각처에서 문학강좌 같은 것을 열고 있는데, 그런 자리에 가 보면 참 가관입니다. (180쪽)


지루한 글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 쓴 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소름끼치는 인간들의 끝장을 부디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18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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