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홀림길에서>(텍스트,2009)에 실은 글. 

 

90. Audubon's Birds of America (Audubon 그림/Artabrasm,1981)

 인천상륙작전을 했다는 날, 하루 내내 집에만 있던 아기와 자유공원으로 밤마실을 다녀온다. 마침 맥아더동상 옆을 스쳐 지나간다. 동상 앞에는 온갖 군부대 별들이 보내 온 꽃들이 놓여 있다. 나이든 아저씨들이 동상을 한참 올려다보며 ‘나라를 지켜 주었다’는 미국 장군을 기린다. 젊은 짝꿍도 꽃이 놓인 동상 앞에 한동안 서며 코 큰 흰둥이 장군을 기린다. 아기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랑곳 않고 둘레 꽃밭 앞에 쭈그려앉아 꽃잎에 살며시 손을 대면서 놀다가 쉬를 한다. “그래, 녀석아, 아빠가 여기에 쉬를 할 수 없으니 네가 아빠 몫으로 해 주는구나.” 해마다 이맘때에는 무슨무슨 관변단체에서 ‘베낭 3000개 선착순 선물 증정’을 한다면서 ‘맥아더동산 수호 궐기대회’를 연다. 지난 2008년에 이어 올 2009년에도 김동길 씨가 강연자로 나와서 ‘빨갱이 때려잡자’는 목소리로 핏대를 세웠다고 한다. 맥아더동상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얼추 열 해 앞서부터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훨씬 더 앞서에도 있었겠지), 인천에는 한국전쟁 때 미국을 우러르는 동상이 여럿 있고 기념관도 있으며 미국이 개화기 때 군함으로 밀고 들어오며 맺은 한미수호통상을 기리는 높은 탑마저 있다. 개화기 때 일본집 또한 많이 남아 있으니, ‘다른 나라한테 짓밟힌 자취로 가득한’ 도시라 할 만하다. 고은 시인 같은 이는 ‘이제 와서 맥아더동상 허물어 무엇하느냐, 이 동상에도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옳은 소리이다. 김영삼 씨가 허문 총독부 건물에도 역사가 깃들어 있었겠지. 그런데 총독부 건물은 헐어도 되고 맥아더동상은 허물지 않아도 될까? 맥아더동상은 그대로 두면서 인천땅 수수하고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골목동네는 깡그리 헐어도 될까? 목소리를 내려면 고르게 내야 하지 않을까? 장님한테 빛줄기가 된 한글 점글을 만든 박두성 님 집은 교회에서 주차장으로 쓴다며 허물렸고, 박두성 님 따님이 살며 수채화집으로 가꾸는 오랜 벽돌집(예전에는 병원이었고 예전에 쓰이든 병원기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은 재개발구역에 들어가 있다. 인천뿐 아니라 나라를 빛낸 큰별이라는 이름을 뒤늦게 받은 박두성 님이라지만, 또 미국에 ‘모세 할머니’가 있다면 한국에 ‘수채화 할머니 박정희’가 있는데, 이런 분들 삶자락 또한 함께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함께 내야 하지 않을까? 맥아더만 지키자고 목소리를 내면 그만인가? 미국에서는 ‘오두본’ 새 그림을 거룩하게 여기며 크고 멋진 책으로 꾸준히 새로 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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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홀림길에서>(텍스트,2009)에 실은 글. 

 

91. 까마귀의 죽음 (김석범 씀,김석희 옮김/소나무,1988)

 국민학교를 다닌 여섯 해에 걸쳐 학교에 갖다 내야 하는 돈이 참으로 많았다. 무어를 짓는다며 돈을 모으고, 교실에 ‘시청각교육’을 하겠다며 텔레비전을 놓는다고 할 때에도 돈을 모았다. 대놓고 돈을 모으는 일이 너무 잦아 때로는 ‘국화 화분을 사라’고 우리들한테 몇 그릇씩 몫을 나누어 주었고, 폐품수집은 학급과 학년마다 끝없이 싸움을 붙여 서로 옆 반 빈병과 신문지와 책을 훔쳐 오게까지 내몰았다. 다달이 방위성금을 내고 저축통장에 돈을 내라 했으며 전투기성금이 있었다. 동무들 가운데에는 ‘불량식품’이라는 문방구 먹을거리를 사먹느라 돈이 없는 녀석이 있기도 했지만, 주마다 한두 가지씩 있는 모금과 성금에 돈을 내기가 빠듯한 살림인 집안이 훨씬 많았다. 너무나 많은 성금이요 모금이었기 때문에 한 번에 500원을 내는 동무란 드물었다. 어쩌다 한둘이 500원을 성금으로 내거나 저축으로 내면 “우와!” 하면서 놀라 했고, 1000원을 내면 “이야!” 하며 기가 죽었으며, 부잣집 동무가 5천 원이나 1만 원을 내기까지 하면 끽소리를 하지 못했다. 명절을 치러 친척 어른한테서 돈을 얻은 다음에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저축에 내기도 했는데, 이렇게 돈을 낼라치면 “바보야, 곧 또 돈을 내야 하는데, 500원씩 나눠서 내면 두 번을 채우고 300원씩 나눠도 세 번이 되는데!” 하면서 옆 짝꿍이 나무랐다. 그런데 이런 성금과 모금은 담임교사한테 매를 맞으면서 겨우겨우 메꾸고 채우고 했지만, 1986∼87년에 냈던 ‘평화의 댐 모금’은 죽을맛이었다. 나와 동무들은 텔레비전 소식을 들으며 홀랑 넘어가 “엄마 엄마 우리가 돈을 안 내어 평화의댐을 못 지으면 다 물에 잠겨 버린대요!” 하면서 졸라댔다. 그렇지만, 다른 성금은 ‘기본 300원 넘게’ 내도록 했고 전투기성금도 500원 넘게 내도록 했으나, 평화의댐 성금은 5천 원이었다. 5천 원이라니! 바나나 한 송이 아닌 한 가닥이 500원을 하던 때요, 짜장면 한 그릇이 150∼200원을 하던 때였는데. 이무렵 대통령은 퍽 자주 ‘카 퍼레이드’를 했고, 경인고속도로 들머리인 우리 학교는 틈나는 대로 길에 나란히 서서 대머리 대통령한테 손을 흔들어야 했다. 시위나 데모라는 말을 모르던 국민학생 때, 남동공단이나 만석동 쪽을 버스 타고 지나갈 때 으레 최루탄 냄새로 재채기를 했고, 동인천역 앞에 버스가 뚝 끊기고 고갯마루에 돌이 어마어마하게 깔린 모습에 등골이 오싹했다. 학교와 집과 신문방송에는 한 마디도 안 나온 ‘민주찾기 싸움’이 벌어지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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