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기독교 - 청소년과 예수의 커뮤니케이션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1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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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9

 


하느님과 성경은 어디에 있는가
― 10대와 통하는 기독교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3.12.25.

 


  아침이 되면 해가 뜹니다. 해가 뜨면서 온누리에 고운 빛이 드리웁니다. 까맣던 하늘은 차츰 파란 빛깔로 바뀝니다. 구름은 새롭게 하얀 빛이 짙고, 겨울에도 짙푸른 나무는 고운 풀빛을 뽐냅니다. 추운 겨울밤이 저물면서 따사로운 아침이 됩니다.


  겨울철에 아침을 맞이할 적마다 봄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밤이 저물고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듯, 추운 겨울이 저물며 시나브로 봄이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달려 면소재지나 다른 마을로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올 때면, 겨울에 참 춥구나 하고 느낍니다. 겨울에 바람만 없어도 한결 나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이 겨울에 찬바람이 없으면 어찌 될까 하고 돌아보며 고개를 젓습니다. 들과 숲과 내를 꽁꽁 얼리는 찬바람이 있어 겨울이 겨울답습니다. 겨울이 겨울답기에 풀이 시들고 벌레가 죽습니다. 겨울이 겨울다우니 겨울잠을 자는 짐승들 있으며, 논밭을 일구는 사람들도 들일을 쉽니다. 겨우내 흙은 포근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에 걸쳐 온갖 풀이 잇달아 자라는 흙이지만, 겨울에 이처럼 포근히 쉴 수 있으니 한결 기름지리라 느껴요. 이 땅에 여름과 함께 겨울이 있으니, 이 누리에 봄과 함께 가을이 있으니, 모두들 즐겁게 밥을 먹고 고맙게 삶을 누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여름만 있다고 할 수 있는 터전이라면? 찬바람이 없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여름이 몹시 짧고 추운 바람과 눈으로 오래오래 덮이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너른 들이 아닌 메마른 벌이 펼쳐지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 사막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에선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에 부응하듯 신의 모습이 다채롭게 나타나죠. 거의 모든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서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 유일신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동을 중시합니다 …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 기독교는 ‘천주교’ 또는 ‘야소교’로 불렸습니다. ‘야소’는 예수의 한자 이름 표현입니다. 그런 가운데 외국 선교사와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은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경외해 온 ‘초월적 대상’이 있다는 사실, 그 대상을 ‘하느님’으로 불러 왔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  (21, 31쪽)


  여섯 살 큰아이가 저녁에 문득 “아버지, 나 그려 주셔요.” 하면서 종이와 연필을 내밉니다. 빙그레 웃음 가득한 얼굴로 얼른 그림을 그려 달라고 말합니다. 네 웃음짓는 얼굴은 그림보다 사진으로 담으면 더 재미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여섯 살 큰아이는 “사진기는 치우고 그림 그려 주셔요.” 하고 덧붙입니다.


  아이 말마따나 사진기를 들려다가 내려놓습니다. 아이 얼굴을 그립니다. 여느 때 얼굴과 달리 웃음을 가득 품은 얼굴은 통통합니다. 어쩜 이렇게 입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웃음을 가득 물 수 있을까 싶은데, 만화책에 흔히 나오는 함박웃음, 하하하 터뜨리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입꼬리만 위로 올린 웃음은 참말 이렇게 짓는 웃음을 그대로 옮겨 그렸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자, 다 그렸어.” 하고 그림을 내밉니다. 아이가 무척 좋아합니다. 아이는 이윽고 “자, 아버지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면 안 돼요.” 하면서 내 모습을 그려 주겠다고 합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는데 끝날 낌새가 안 보입니다. 얼마나 꼼꼼히 그리는데 그런가 하고 살며시 다가가서 들여다봅니다. 한 번 그렸다가 슥슥 지우고 새로 그립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립니다. 이제 다 그렸나 싶더니, 아버지가 앉은 걸상까지 그리겠다며 “아직 안 됐어요.” 합니다.


  나는 아이한테 그림을 가르친 적 없습니다. 아이더러 이렇게 그리라느니 저렇게 그리라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저 스스로 그리고픈 대로 그립니다. 흉내를 내는 그림이란 없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리고, 아이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픈 빛을 그림에 담습니다.


  아이와 함께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이 그림은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그림이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 마음을 그림에 담고, 나는 내 마음을 그림에 담습니다. 마음을 그림에 담아 활짝 웃고 싶습니다. 마음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운 빛이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림이란 예술이나 문화가 아닙니다. 그림이란 오직 그림입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느 그저 사진이지, 예술이나 문화가 아니요, 작품이나 창작이 아닙니다. 글을 쓸 적에도 언제나 글이에요. 문학이 아닙니다.


.. 핵심은 예수가 그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친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와 명성,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게 예수의 가르침이지요 … 예수가 직접 ‘기독교’를 창시하지 않았듯이, 직접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는 제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 예수는 이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걸 믿으라고 거듭 강조하지요 ..  (43, 75, 99쪽)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리면서 풀잎이나 나물을 꼭 올립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니 집 둘레에서 손쉽게 풀을 얻습니다. 때로는 읍내로 나가서 우리 집 둘레에는 없는 풀을 사다가 먹기도 합니다. 이제 찬바람이 드세니 우리 집 까마중풀은 그예 시들어 새까만 까마중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섣달 둘째 주까지만 하더라도 새로운 까마중꽃 하얗게 맺혔지만, 이제 새로운 까마중꽃은 더 없어요. 푸르딩딩한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끝이고, 이듬해에 새롭게 자라는 까마중풀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다시 누릴 수 있습니다.


  까마중풀이 시들어 죽을 요즈음, 집 둘레로 갓풀과 유채풀이 돋습니다. 갓풀은 쓴맛이 퍽 세기에 아직 좀처럼 뜯어먹지 못합니다. 유채풀은 쓴맛이 하나도 없어 신나게 뜯어서 밥상에 올립니다. 따로 배추씨를 심으면 겨울에 겨울배추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배추씨를 심지 않아도 들유채를 얻어요.


  봄이 오면 온갖 나물이 곳곳에서 자랍니다. 아니, 온갖 나물이 아닌 온갖 풀이 자라지요. 온갖 풀은 우리한테 나물이 됩니다. 민들레도 나물이고 씀바귀도 나물입니다. 소리쟁이도 나물이고 미나리도 나물입니다. 질경이도 나물이고 환삼덩굴도 나물이에요.


  원추리도 나물로 먹지만, 새봄 감잎과 느티잎도 나물로 먹습니다. 도깨비바늘풀 잎사귀도 나물로 먹고, 피나물이든 젓가락나물이든 갯기름나물이든 모두 즐겁고 반가운 나물입니다.


  다 다른 풀을 뜯으면서 다 다른 풀내음을 맡습니다. 다 다른 풀을 밥상에 올리면서 다 다른 풀빛을 먹습니다. 다 다른 풀은 다 다른 풀숨입니다. 다 다른 풀은 다 다른 넋입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한 해 내내 언제나 다른 풀을 뜯어서 먹으며 생각합니다. 이 지구별에는 얼마나 다른 풀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 다른 풀은 어떻게 해서 다 다른 풀이 되었을까요. 어쩜 이렇게 다 다른 풀이 골고루 돋으며 자랄 수 있을까요.


  온갖 풀이 자라듯이 온갖 벌레가 살아갑니다. 온갖 벌레 곁에는 온갖 짐승이 있습니다. 온갖 버섯이 돋고, 온갖 새가 납니다. 온갖 물고기가 살고, 온갖 갯것과 갯풀이 있어요. 사람 또한 온갖 사람이 있어요. 마을과 고을마다 사람들 삶자락이 다르고, 고장마다 사람들 삶자락이 달라요. 또, 나라와 겨레마다 사람들 삶빛이 다릅니다.


.. 마침내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1099년 7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참혹한 유혈극이 벌어집니다. 십자군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 성경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입을 통해서 해석되고 유포되었지요. 더러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전달했고, 심지어 성경에 없는 말까지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 개신교의 모든 교파 각각이 ‘오직 성경’을 강조하며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문제는 교파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들과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을 이단시하고, 자신만 ‘성경을 믿는 사람들’로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이후 초기 50년 사이에 아메리카 원주민 1500만∼20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  (122, 165, 170, 197쪽)


  풀을 먹는 사람은 풀숨으로 살아갑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고기숨으로 살아갑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밥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먹는 대로 우리 몸을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우리 몸에 넣는 대로 우리 몸은 새로운 빛이 됩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이란, 햄버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과 다릅니다. 흙을 일구고 살아가는 사람들 넋이란, 자가용을 몰거나 펜대를 굴리는 사람들 넋과 다릅니다. 시장이나 군수라는 자리에 서는 사람들 넋은, 바다에서 고기를 낚거나 바닷가에서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 넋과 다릅니다.


  대학입시만 바라보면서 입시공부에 매달리는 푸름이하고, 시골 어버이 일손을 거들며 흙을 만지는 푸름이는 넋이 서로 다릅니다. 대학바라기로 살아가며 새벽부터 밤까지 교실에 갇혀 시험공부만 하는 푸름이하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기도 하고 집일을 거들기도 하는 푸름이는 넋이 사뭇 다릅니다.


  맞벌이를 한다면서 두 어른이 바깥일에 매달리느라 아이하고 보내는 나날이 짧은 집안과, 아이하고 하루 내내 얼크러지면서 살아가는 집안은 서로 넋이 달라요. 손수 밥을 차리고 옷을 빨며 집살림 꾸리며 아이하고 지내는 어버이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교에 아이를 맡긴 채 아이 얼굴은 아침과 저녁에만 겨우 보는 어버이는 서로 넋이 달라요.


  어느 한쪽이 더 아름다운 넋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슬프거나 안타까운 넋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에 서서 살아가더라도 스스로 즐거운 마음빛이 못 된다면 즐겁지 않고 아름답지 않아요. 어느 쪽에 서서 삶길을 걷더라도 스스로 기쁜 사랑빛이 못 된다면 사랑스럽지도 기쁘지도 않아요.


.. 기독교는 단일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기독교가 있는 거죠. 기독교 가운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은 물론, 예수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유이지만, 분명한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 권의 단일한 또는 통일된 책이 아니라 여러 책을 모아 놓은 ‘여러 책들’ 또는 ‘책들’입니다 … 2세기에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비로소 그 책들을 묶는 데 나섭니다. 신의 언약과 관련된 모든 책이 묶인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신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글들을 ‘엄선’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그 판단을 했느냐입니다 … 〈도마복음〉을 비롯해 탈락되어 폐기된 문서들은 개개인이 자기 안에 있는 신을 만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  (157, 158, 161쪽)


  손석춘 님이 쓴 이야기책 《10대와 통하는 기독교》(철수와영희,2013)를 읽습니다. 푸름이한테 들려주는 기독교 이야기라니. 푸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푸름이는 온통 대학바라기에 얽매이는데, 이 책에 깃든 이야기를 얼마나 삭히거나 받아들이면서 제 넋을 살찌울 만한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푸름이가 이 책을 맞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 책을 읽는대서 예수나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는 않아요. 마음이 있는 푸름이가 이 책을 집어들 테지요. 마음이 있는 어버이과 이녁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겠지요. 마음이 있을 적에는 대학입시지옥에 휘둘리면서 숨가쁘거나 힘들더라도 이 책 하나 가슴에 포옥 안으면서 삶빛과 넋빛을 가꾸겠지요. 푸름이로 지내는 나날에는 미처 못 읽는다 하더라도, 대학입시를 마친 뒤 스무 살 풋풋한 젊은이로 꿈을 키우면서 이 책을 두 손에 살포시 쥘 수 있어요.


.. 루터는 뮌처와 정반대쪽에 섰습니다. ‘강도와 도적 같은 폭동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직접 글을 쓰고 발표합니다. 루터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어겼고, 강도와 도적질로 공공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했으며,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하려고 성경의 복음을 끼워 맞춰 “신을 비방하는 죄”를 범했다고 몰아세웠습니다. 이어 ‘공권력’을 가진 정부는 농민들의 ‘폭동’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라며 “미친개를 죽이듯 목을 졸라 죽이고, 찔러 죽이라”는 살벌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지요 … 자신이 ‘신의 뜻’을 알았다고 ‘확신’하는 사람, 자신이 ‘신의 선택’ 또는 ‘명령’을 받았다고 믿는 기독교인의 공통적 문제는 교만이고 오마입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국가적 차원이든 국제적 차원이든 그런 오만은 다른 사람, 다른 국가의 불행을 불러오지요. 끝내는 자신의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  (181, 215∼216쪽)


  서양에서 태어나 온 지구별로 퍼진 천주교와 개신교입니다. 서양사람은 이녁 삶터에 맞게 이녁 종교를 세웠는데, 이녁 삶터를 넓혀 권력과 돈과 이름을 떨치려고 전쟁무기를 끝없이 만들었어요. 전쟁무기로 시골 흙지기를 내리누르거나 괴롭힙니다. 한손으로는 종교개혁을 한다고 나서던 이조차, 다른 한손으로는 시골 흙지기를 깎아내리고 짓밟는 일을 저질렀어요. 한손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외친 종교 우두머리들조차, 다른 한손으로는 돈과 권력과 이름에 끄달리면서 참삶하고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너무 마땅한 노릇 아니랴 싶습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우면서 삶을 곱게 빛내는 길이 아니라면, 착하지도 참답지도 않아요.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성공회이든 정교회이든 침례회이든 감리회이든 대순진리회이든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다 다른 나라와 다 다른 겨레가 바라보는 하느님이란 다 다를밖에 없어요. 삶터에 따라, 고장에 따라, 날씨와 철에 따라, 흙과 풀과 물에 따라, 하늘과 바람과 숲과 들에 따라, 가슴으로 맞아들이는 숨결이 모두 다를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마주합니다. 다 다르게 마주하지만 빛은 하나입니다. 이 빛은 저 높은 하늘에서 드리울 수 있고, 내 마음에서 샘솟아 퍼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드리우는 빛이 나한테 찾아와 내가 아늑하면서 너그러운 삶 될 수 있는 한편, 나 스스로 내 마음속에서 빛 한 줄기 길어올려 내 둘레로 곱게 퍼뜨릴 적에 나를 비롯해 내 이웃과 곁님과 동무 모두 포근하면서 따사로운 삶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두 가지 빛이 하나로 만나야겠지요. 두 가지 빛은 언제 한 줄기 빛으로 어우러져야겠지요.


  사랑은 사랑일 뿐, 전쟁이나 전쟁무기가 아닙니다. 전쟁무기를 든 하느님은 없습니다. 남을 짓밟아 죽이는 하느님은 없습니다. 전쟁무기는 전쟁무기일 뿐입니다. 남을 짓밟아 죽이는 짓은 죽임일 뿐입니다. 한손에 커다란 예배당을 지었으면, 이들은 커다란 예배당일 뿐입니다. 한손에 엄청난 돈을 쥐었으면, 이들은 엄청난 돈일 뿐입니다. 믿음은 믿음일 때에만 믿음이 되어, 나와 이웃 모두를 살찌웁니다. 사랑은 사랑일 때에만 사랑이 되어, 서로 어깨동무하는 맑은 숨결 됩니다.


  풀빛을 마음으로 담고, 풀내음을 몸으로 담으면서, 풀숨으로 온 넋 살찌울 수 있기를 빌어요. 겨울바람을 마시고 봄바람을 들이켜면서, 이 지구별 어디에서나 함박웃음 퍼지기를 빌어요. 성경이란 책이 아니에요. 성경에 담긴 말씀이란 바로 아름답게 살아온 사람들 빛입니다. 성경으로 옮긴 말씀이란 곧 사랑스럽게 살아온 사람들 꿈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가꿀 적에 성경이 태어나고, 삶을 사랑스레 나눌 적에 성경이 빛납니다. 4346.12.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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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2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함세웅 신부님과의 대화 <껍데기는 가라>를 쓰신 분의 책이로군요.
함께살기님의 좋은 느낌글에 힘입어 감사히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3-12-27 09:27   좋아요 0 | URL
청소년 눈높이뿐 아니라,
부모와 교사 눈높이에도 잘 맞춘
참 잘 쓴 책이라고 느꼈어요.

이런 책들을 교회 지도자들이
차근차근 읽으며
생각을 깨우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숲으로 가자 - 숲유치원과 숲학교를 위한 자연물 놀이 108가지
안드레아 에르케르트 지음, 장희정 옮김 / 호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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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0

 


철없는 어른들 살리는 맑은 빛
― 숲으로 가자
 안드레아 에르케르트 글
 장희정 옮김
 호미 펴냄, 2012.10.20.

 


  달빛이 드리웁니다. 달빛은 시골집 마당에도 드리우고, 큰도시 아파트 꼭대기에도 드리웁니다. 달빛은 비무장지대 아닌 무장지대 쇠가시그물과 군인들 총구멍에도 드리우고, 사냥터가 된 시골마을 숲에서 덜덜 떨며 밤잠조차 못 이루는 숲짐승 가녀린 눈망울에도 드리웁니다.


  햇볕이 내리쬡니다. 햇볕은 시골집 아름드리 나무에도 내리쬐고, 큰도시 길가에 줄기 뭉텅뭉텅 잘리는 가녀린 버즘나무 아픈 몸통에도 내리쬡니다. 햇볕은 축구장과 야구장에도 내리쬐고, 농약으로 범벅이 된 시골마을 논밭에도 내리쬡니다.


  겨울이 가면서 봄이 옵니다. 봄이 지나면서 여름입니다. 여름이 흐르면서 가을로 접어듭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겨울이 찾아듭니다.


  가만히 보면, 도시에는 봄도 가을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여름도 겨울도 없습니다. 도시에는 아무 철이 없습니다. 도시사람은 철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스물네 절기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낮과 밤이 없고 아침과 저녁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오직 숫자만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둘까지, 하나부터 서른까지, 하나부터 스물넷까지, 도시에는 오로지 숫자만 넘칩니다.


  도시사람은 숫자에 맞추어 숫자를 챙기는 일을 합니다. 도시사람은 숫자에 따라 숫자를 챙기는 교육을 합니다. 도시사람은 숫자를 살펴 숫자로 움직이는 집살림을 꾸립니다. 도시사람은 숫자를 헤아려 숫자로 사귀는 사랑을 속삭입니다.


.. 노래가 끝나면, 술래는 “나는 ○○에게 꽃 인사를 전하고 싶어”라고 말하며 함께 춤추고 싶은 친구 이름을 부른다. 호명된 친구가 원 안으로 들어가 꽃을 받으면 아이들은 다시 노래를 부르고 술래는 춤을 춘다 … 나무와 나무 사이에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줄을 치고, 줄에 솔방울 두 개를 매단다. 교사가 신호를 보내면 솔방울 앞에 선 두 아이는 뒷짐을 지고 코로 솔방울을 건드린다 ..  (28, 49쪽)


  섣달 그믐이 가까운 시골마을에서 유채를 뜯습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언제부터 겨울유채가 돋았나 모르겠지만, 제주뿐 아니라 온 나라에서 ‘경관사업’을 한다며 시골마을마다 유채씨를 어마어마하게 뿌립니다. 유채는 자라고 자라 씨를 날립니다. 봄에 논갈이를 할 무렵 모두 목아지 잘리기도 하지만, 유채씨를 건사하려고 하는 시골 흙지기 더러 있어, 유채씨는 바람 따라 고샅에도 마당에도 꽃밭에도 숲속에도 살몃살몃 내려앉아 뿌리를 내립니다. 나라에서는 ‘꽃만 보려’고 뿌리는 씨앗인 유채이지만, 이 씨앗이 들판에서 찬바람 먹으며 농약에 시달리며 자라는 동안 어느덧 들유채로 거듭납니다. 한겨울에도 씩씩하게 돋습니다. 가을걷이 마친 논둑에서 뜬금없다 할 만큼 돋습니다. 시골버스 지나가는 길가에서 돋습니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들마실을 다니다가 이곳에서 조금 저곳에서 살짝 들유채를 뜯습니다. 웬만한 다른 시골에서는 한겨울에 날푸성귀 얻기 힘들 테지만, 겨울이 포근한 고흥에서는 조금만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로 마실을 하더라도 싱그러이 푸른 들풀을 얻습니다. 숲이 있어 푸른 숨결을 베풀고, 들이 있어 푸른 밥을 나누어 줍니다. 숲이 있어 푸르게 우거진 나무가 아름답고, 들이 있어 앙증맞은 작은 들꽃이 알록달록 어여쁩니다.


  날마다 들유채 한 줌씩 뜯어 밥상에 올리기로 합니다. 섣달 막바지까지 씩씩하게 까만 열매 맺는 까마중 있으면 까마중 열매를 훑어 밥상에 함께 올립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들풀을 뜯어서 먹을 수 있기에 고맙습니다. 한겨울에는 들유채를 뜯을 수 있기에 반갑습니다.


  누군가는 밭자락에서 배춧잎을 뜯겠지요. 누군가는 밭뙈기에서 무잎을 뜯겠지요. 배추는 배춧잎을 먹어도 맛나고, 배추뿌리를 캐서 먹어도 맛납니다. 무는 무뿌리를 먹어도 맛나지만, 무청을 먹어도 맛나요. 무청은 시래기가 되도록 말리지 않아도 돼요. 그때그때 한 뿌리씩 뽑아서 무잎을 날푸성귀로 맛나게 누릴 수 있어요. 당근과 함께 당근잎을 먹어요. 참말 숲과 들은 우리를 살찌우는 고마운 님입니다.


.. 자연 숲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활발한 움직임 말고도 주변 환경의 변화나 곤충의 움직임이나 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정적인 동작과 함께 정신 집중이 요구된다 … 아이들은 숲에서 다양한 놀잇감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 놀이를 통해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넓혀 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나무뿌리를 뛰어넘고, 그루터기 위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네 발로 기어 다닌다 ..  (42, 60쪽)


  바람이 붑니다. 겨울에 겨울바람이 붑니다. 겨울바람 부는 마당이나 들이나 바닷가에 가만히 서면, 온몸이 오들오들 떨립니다. 그렇지만, 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기에 내 몸은 한결 씩씩하고 튼튼할 수 있습니다. 겨울바람 먹고 봄바람 먹으며 여름바람 먹다가 가을바람 먹고, 다시 겨울바람 먹으면서 즐거운 삶이 되어요. 겨울풀 먹고 봄풀과 여름풀과 가을풀 먹듯이, 바람도 물도 모두 철 따라 새로운 빛으로 맞아들입니다.


  새봄 찾아와 동백나무에 짙붉은 꽃잔치 흐드러질 무렵이면, 발갛고 고운 꽃송이를 줍습니다. 동백꽃은 꽃송이 덩이째 떨어져요. 곱게 떨어진 동백꽃송이를 주으면, 꽃잎을 살살 떼어 꽃부침개를 합니다. 달걀말이를 하면서 살포시 얹습니다. 튀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날잎을 살살 씹어서 먹어도 돼요. 감꽃을 먹고 참꽃을 먹듯 동백꽃을 먹어요. 찔레꽃을 먹고 민들레꽃을 먹듯 동백꽃을 먹습니다.


  냉이꽃도 먹지요. 봄까지꽃도 먹어요. 별꽃도 먹으며, 꽃다지꽃이랑 꽃마리꽃도 먹습니다. 꽃을 풀잎과 함께 먹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예쁜 꽃이 내 몸으로 들어오면서 내 넋과 삶 또한 꽃처럼 곱고 맑게 거듭나는구나 하고. 이 고운 꽃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내 눈빛과 말 또한 꽃처럼 상냥하고 착하게 추스르는구나 하고.


.. 아이들은 보통 이야기를 많이 한다.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기도 하고, 또래끼리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배를 잡고 웃고 즐거워한다. 아이들한테는 이야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 … 아이들의 조그마한 손이 자연물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위대한 예술가의 독창적 발상과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  (78, 104쪽)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숲이 있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숲 아닌 곳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이 될는지 모르지만, 숲이 없으면 숲 아닌 곳에서 살더라도 제대로 살지 못해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서 살아가더라도, 숲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맑은 물 흐르고 싱그러운 바람 부는 시골이 있어야, 도시에서 넘쳐나는 온갖 지저분한 물과 바람을 걸러 내요. 바보스러운 토목건설 공무원과 정치꾼은 인천 앞바다 갯벌을 메워 덩그러니 공항을 지었는데, 인천 앞바다에 갯벌이 있어야 서울사람이 버리는 온갖 쓰레기와 똥오줌을 이곳 갯벌에서 걸러내지요. 갯벌이 없으면 서울과 경기도는 온통 쓰레기밭, 쓰레기구덩이가 되고 말아요. 그리고, 시골이 없으면, 숲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시골이 있고 숲이 있기에 숨을 쉬어요. 시골이 있고 숲이 있어 도시사람이 안 굶습니다. 시골이 있고 숲이 있으니 도시사람이 목마르지 않습니다.


  브라질 열대숲만 지켜야 하지 않아요. 이 나라 시골숲도 지켜야 해요. 국립공원에 하늘차를 함부로 놓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라든지 국립공원이 아닌 작은 멧자락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구멍을 뚫어 고속철도나 고속도로를 놓지 말아야 하는 까닭을, 도시사람부터 깨달아야 하고 시골사람도 알아야 해요.


  돈으로 사서 다시 심을 수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아닙니다. 우리 숨을 살리는 나무 한 그루입니다. 나무가 없으면 지구별에서 누가 살아갈 수 있겠어요. 나무를 모조리 베어 공장과 도시와 관광지와 골프장과 경기장 따위만 만들면, 참말 도시사람조차 어떻게 문화나 문명을 누리겠어요.


  흙이 있기에 똥과 오줌을 받아들여 삭힙니다. 흙이 있기에 온갖 밥찌꺼기를 맞아들여 삭힙니다. 숲에서 나무가 우거져야 하고, 들에서 흙이 싱그러워야 합니다. 아무리 커다란 도시라 하더라도 동네 곳곳에 작은 숲이나 공원이 있어야 합니다. 시골마을에서는 고샅이나 밭둑이나 논둑을 섣불리 시멘트로 덮지 말아야 합니다. 바닷가에 함부로 해변도로랍시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퍼붓지 말아야 합니다. 크고 작은 숲과 멧골에 관광도로랍시고 함부로 나무를 베고 숲을 밀어 찻길 넓히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자연의 소리는 여러 가지 음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특별히 집중하는 경우만 한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순간순간 다르면서도 항상 들리는 시냇물 소리는 가끔 들리는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들, 그리고 친구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소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 숲에서 하는 놀이는 그야말로 끝이 없다. 아이들은 숲에서 끝없이 만지고 보고 듣는데 이러한 감각을 놀이로 가져갈 수 있다.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해 보자. “누가 밝은 초록색 또는 어두운 초록색을 발견할 수 있을까?” ..  (144, 176쪽)


  안드레아 에르케르트 님이 쓴 《숲으로 가자》(호미,2012)를 읽습니다. ‘숲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숲에서 할 수 있는 놀이 108가지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이야기책입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백여덟 가지 놀이는 ‘숲 유치원’에서 즐기는 놀이라고 하는데, 꼭 숲 유치원 아니더라도 다른 유치원에서도 할 수 있는 놀이요, 유치원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에서나 할 수 있는 놀이입니다. 살짝살짝 바꾸거나 손질해서 새롭게 놀 수 있어요. 깊은 숲이 아닌 자그마한 동네 숲에서도 즐길 수 있어요. 나무 한 그루하고도 놀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와 풀 한 포기하고도 놀 수 있어요.


.. 자, 이제 눈을 뜨고 두 주먹을 꼭 쥐어 보렴. 그리고 머리 위로 힘차게 기지개를 켜 보렴.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으며 외쳐 보렴. “나는 꽃으로 가득한 들판처럼 상쾌하다!” ..  (171쪽)


  다 함께 눈을 떠요. 참다운 삶에 다 함께 눈을 떠요. 다 같이 손을 잡아요. 돈과 졸업장은 내려놓고, 다 같이 맨손을 잡아요. 모두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요. 자가용은 내려놓고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요. 다리 아픈 이웃 있으면 업어 주셔요. 바퀴걸상에 앉히고 뒤에서 밀 수 있어요. 흙을 만지고 흙내음을 맡아요. 빗물을 마시고 냇물에 낯을 씻어요.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도록 어른들부터 즐겁게 일해요.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 만한 보금자리가 되도록 어른들부터 즐겁게 일할 터전을 가꾸어요.


  숲으로 가야지요. 아파트가 아닌 숲으로 가야지요. 숲으로 가야지요. 극장도 경기장도 아닌 숲으로 가야지요. 숲내음을 맡아야지요.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닌 흙밭 숲길에서 흙내음이랑 숲내음을 맡아야지요.


  철없는 어른들 살리는 맑은 빛이 드리웁니다. 달빛이 포근하게 드리웁니다. 철없는 어른들 살리는 밝은 볕이 내리쬡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4346.12.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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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 책놀이터 3
나가사키 나쓰미 글, 하세가와 도모코 그림, 주혜란 옮김 / 서울교육(와이즈아이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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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42

 


아버지가 차리는 밥상
― 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
 나가사키 나쓰미 글
 하세가와 토모코 그림
 주혜란 옮김
 와이즈아이 펴냄, 2009.5.20.

 


  느즈막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작은아이가 꽁꽁거립니다. 작은아이에 이어 낮잠에서 깨어난 큰아이가 “아버지, 빵?” 하고 묻습니다. 여섯 살 큰아이한테 “벼리야,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배고프니?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다고 말해야지. 밥을 먹고 나서 빵을 먹고 싶으면 그때에 빵을 달라고 하렴.” 하고 이야기합니다. 큰아이는 “응, 알았어. 배고파요. 밥 주세요.” 하고 얘기해 줍니다.


  밥은 있고 국을 덥히면 됩니다. 국을 덥히면서 곤약 한 덩이를 잘라 국에 넣습니다. 달걀 다섯 알을 삶습니다. 달걀이 익고 국이 끓는 사이 양배추를 썰고 나물을 헹구어 나물부침을 마련합니다. 오이와 무를 채 썰어 꽃접시에 얹습니다. 물고기묵을 네모낳게 잘라 보글보글 끓는 국에 꼬치로 꿰어 담가 놓습니다. 국냄비는 불을 끄고 가위로 김을 한 장 잘라 흰접시에 담습니다. 아이들을 부르고, 밥과 국을 퍼서 밥상에 척척 올립니다. 큰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수저를 밥상에 놓습니다. 곤약을 토막토막 잘라 작은 질그릇에 담습니다. 국에 끓인 두부를 꺼내어 칼로 썰어 흰접시에 담습니다. 달걀 삶은 냄비는 아까 불을 껐습니다. 달걀은 조금 식은 뒤에 내주어야지요.


  천천히 저녁을 먹습니다. 작은아이는 부엌으로 오다가 문고리에 머리를 박아 징징 웁니다. 작은아이를 달래면서 수저로 밥과 반찬을 떠서 먹여 줍니다. 부아가 난 작은아이는 떠먹여 달라 합니다. 큰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 보라는 왜 먹여 달라고 해?” “응, 머리가 문고리에 부딪혀서 부아가 났나 봐.” “그래? 보라는 젓가락질 못 해?” “할 수 있는데, 아직 하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 기다리면 할 테야.”


.. “나는 고양이가 밥 먹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물 먹는 소리도 듣기 좋고.” 마리도 “맞아, 맞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참 포근해지는 느낌이야.” “맞아.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이 들까?” ..  (8쪽)


  아이들이 밥그릇을 4/5쯤 비웠다 싶을 즈음, 달걀을 꺼내기로 합니다. 아직 뜨거운 물은 설거지를 기다리는 그릇에 찬찬히 붓습니다. 찬물에 두 차례 삶은달걀을 헹굽니다. 그러고는 큰아이와 작은아이한테 따로 작은 접시를 내주면서 삶은달걀을 통째로 줍니다. 스스로 껍질을 벗기도록 합니다.


  알맞게 잘 삶았기에 껍질이 아주 잘 벗겨집니다. 두 아이 모두 예쁘게 벗깁니다. 노른자도 맑은 노랑 빛깔이 곱습니다. 달걀 한 알로 남은 밥을 말끔히 비웁니다. 나물무침도 그릇을 싹싹 비웁니다. 그야말로 배부르게 잘 먹었지?


  저녁을 다 먹은 두 아이는 빵 달라는 소리를 더 하지 않습니다. 다른 무언가 먹고 싶다는 말도 없습니다. 꼭 알맞춤하게 배가 고플 즈음 밥을 차려서 즐겁게 함께 먹으면 됩니다.


  이런 밥차림은 힘들까요? 힘들다면 힘들는지 모르지만, 수월하다면 수월하다고 느껴요. 우리 어머니도 내가 어릴 적에 퍽 수월하게 밥상을 차려서 주셨어요. 뚝딱뚝딱 아주 빠르게 밥을 내어주셨어요.


  미리 갖추거나 마련한 먹을거리는 없어도, 몇 차례 손길을 타면 어느새 보기에도 예쁘고 먹기에서 고소한 밥이 되어요. 어릴 적부터 이런 어머니 손길을 돌아보면서 ‘나도 이렇게 사랑스레 밥을 차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내 어릴 적이나 오늘날이나 아직도 ‘밥은 가시내(어머니나 할머니)가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짙은 우리 사회이지만,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가장 따사로운 넋을 담아 밥을 차리면 즐거운 살림이 되리라 느꼈어요. 성평등이나 일나눔을 떠나, 서로 즐겁게 노래하는 삶이 되기를 바랐어요.


.. 집 밖까지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옆집 시미즈 아저씨네 할머니.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양이다. 오늘 나는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늦잠만 안 잤어도 엄마랑 말했을 텐데 ..  (26쪽)


  어린이책 《나가사키 나쓰미/주혜란 옮김-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와이즈아이,2009) 를 읽습니다. 책이름을 보고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한테 밥을 곱게 차려 주는 이야기가 흐르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읽고 보니 ‘밥 먹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바깥일을 하느라 집을 으레 비우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바깥일을 하면서 커다란 주먹밥을 싸 주기만 할 뿐, ‘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하고 함께 놀 겨를이 얼마 없습니다.


  그러면 책이름이 왜 “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일까 갸우뚱하면서 책을 읽습니다. 주인공 아이는 아버지나 어머니하고 함께 지내는 때보다 혼자 지내는 때가 깁니다. 때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한 마디 할 겨를이 없기도 합니다. 홀로 생각에 잠기는 때가 길고, 어머니가 싸 주는 주먹밥도 그리 예쁘지 않습니다. 그저 커다랗고 투박하기만 합니다.


  이러던 어느 날, 바깥일 때문에 퍽 오래 집을 비운 아버지가 깜짝잔치를 하듯이 집에 왔어요. 그러고는 주인공 아이와 함께 기차를 타고 바다로 갑니다.


.. 드넓은 우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별들. 나는 그 많은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다. 아빠 엄마는 물론, 마리도 함께 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그런 느낌 ..  (38쪽)


  주인공 아이 아버지는 ‘돌을 살피는 사람’이에요. 돌마다 어떤 무늬이고 빛깔이며, 이 돌을 사람들이 어떻게 쓸는지 살피는 일을 합니다. 아이와 함께 바다로 왔으면서도 이곳에서까지 돌을 들여다봅니다. 이러다가 문득 아이한테 이야기를 해요. “두 손 가득 움켜쥐고서, 볼이 미어터지게 먹다 보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단다(54쪽).” 아버지가 들려준 말 한 마디로 아이는 마음을 살짝 풀었을까요. 두 사람은 바닷가에서 나긋나긋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 “돌멩이가 재미있어요?” “돌멩이에는 지구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 있단다.” 지구의 역사? 나는 돌멩이 하나를 손에 들고서 쳐다보았다. 하얗고 평범하게 생긴 돌멩이였다 ..  (66쪽)


  커다랗고 투박하기만 한 주먹밥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커다랗고 투박한 주먹밥일 테지요. 그런데 이 못생겼다는 주먹밥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온 발자국’이 깃들어요. 두 어버이가 바쁘다면서 얼렁뚱땅 크고 투박한 주먹밥을 도시락으로 싸 줄 수 있지만, 두 어버이가 처음 만나서 사귈 무렵, 이런 모양 주먹밥하고 얽힌 애틋한 이야기 있을 수 있어요. 아직 아이한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서로 살가이 나눈 이야기 있으니, 오래오래 크고 투박한 주먹밥을 즐길 수 있어요.


  돌멩이 하나에 지구 역사가 깃들고, 풀씨 한 톨에 우주 역사가 깃들어요. 눈물 한 방울에 수많은 이야기 서리고, 노래 한 가락에 온갖 꿈 서립니다. 눈짓 하나에 깊은 사랑 감돌고, 손길 한 번에 너른 빛 감돌아요.


  즐겁게 차려서 즐겁게 먹는 밥입니다. 즐겁게 꾸리면서 즐겁게 가꾸는 살림입니다. 즐겁게 배우고 즐겁게 가르칩니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아요. 아름답게 빛내는 우리 이야기이고 꿈이며 삶입니다. 4346.1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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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끼 사계절 1318 문고 18
게리 폴슨 지음, 김민석 옮김 / 사계절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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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8

 


아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손도끼
 게리 폴슨
 김민석 옮김
 사계절 펴냄, 2001.3.28.

 


  게리 폴슨 님이 쓴 《손도끼》(사계절,200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줄거리가 미국과 캐나다 사이 아닌, 한국 아이가 한국에서 겪는 일이라면 어떨까 하고. 한국 아이 가운데 설악산이나 오대산, 지리산이나 한라산, 아니면 북녘 묘향산이나 백두산 같은 데에서 길을 잃으면 어떨까 하고.


.. 법원은 브라이언이 어머니와 지내도록 판결을 내렸다. 판사는 법률이 정하는 ‘방문권’에 따라 여름방학 동안에는 브라이언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모든 게 형식적이었다. 브라이언은 변호사들 못지않게 판사들도 미웠다 ..  (10쪽)


  한국에서는 작은 비행기를 함께 타고 어디론가 날아갈 아이들이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작은 배를 타고 가다가 그만 배가 뒤집혀 어디인지 모를 외딴섬에 갈 아이들도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깊은 숲속은 아니더라도 외딴섬에 아이 하나 똑 떨어졌다고 한다면, 외딴섬 둘레로 지나가는 배가 없고, 뭍하고도 제법 떨어졌다면, 이 외딴섬 아이는 어떻게 지낼까요.


  외딴섬에는 전화기가 터지지 않고, 물꼭지라든지 작은 집이라든지 아무것 없습니다. 편의점도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 한국 아이는 무엇을 할까요. 한국에서는 손도끼를 갖기는 힘들 테고, 주머니칼 하나 있다고 치면, 열세 살 한국 아이는, 아니 열세 살 아닌 열아홉 살이나 스무 살 한국 아이는 어떻게 지낼까요.


  한 끼니라도 무언가 먹을 수 있을까요. 하룻밤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을까요. 목마름을 채울 물을 얻을 수 있을까요. 신이 해지고 양말이 구멍나며 온몸에서 땟국물 흐를 적에 잘 견딜 수 있을까요.


..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서지고, 찢어지고, 울부짖는 소리뿐이었는데. 어떻게 새들은 저렇게 한가로이 지저귈 수 있을까?’ … 믿을 수가 없었다. 야외 생활에 관한 책이나 텔레비전 영화에서는 모기나 파리에 대해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연에 관한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건 아름다운 경치나 즐겁게 뛰노는 동물들뿐이었다 … 브라이언은 한동안 멍하니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경치가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한 볼거리가 많았지만 모든 게 초록색과 파란색을 띤 얼룩으로만 보였다. 브라이언에겐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색과 검정색이 눈에 익었다. 그리고 차들이 내는 소음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찬 도시의 소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  (35, 39, 42쪽)


  어린이책을 살피면 ‘○○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이 꽤 나오고 제법 읽힙니다. 아이들은 책이나 만화나 영화나 다큐방송으로 깊은 숲속이나 외딴섬 이야기를 구경합니다. 학교에서는 그나마 ‘○○에서 살아남기’를 들려주지도 않아요.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불을 어떻게 피우는지 가르치지 못하며, 물을 어떻게 얻고, 밥을 어떻게 짓는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기껏 가르치는 한 가지라면 대학입학시험뿐입니다.


  아이들도 학교와 똑같습니다. 으레 어머니가 밥을 차려 주겠거니, 또 학교에서는 급식을 먹으면 되겠거니, 정 안 되면 돈으로 사다 먹거나, 전화로 시켜서 카드로 긁으면 되겠거니, 하고 여깁니다. 밥을 짓는다 하더라도 전기밥솥 단추 누를 생각만 하지, 쌀을 헹구어 불려서 물을 맞추어 안칠 줄 몰라요. 아무도 안 가르치고, 아무도 안 보여줘요. 이런 아주 작은 한 가지마저 학교에서는 가르칠 줄 모르는데, 어쩌면 학교 교사부터 밥짓기를 할 줄 모르거나 안 하기에 못 가르친다 할 만합니다. 학교 교사부터 두 다리로 걸어다니지 않으니, 아이들더러 걷는 즐거움을 느끼라 하지 못해요. 학교 교사부터 골목동네 작은 사람들 삶하고 동떨어지니, 이웃을 사랑하거나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삶을 가르치지 못해요.


  교과서 진도는 잘 나가는 학교입니다. 대학교에 붙이는 일은 잘 하는 학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답게 사람을 키운다거나, 사람다운 빛을 누리도록 돕는 일하고는 아주 멀리 떨어진 학교예요.


.. 친구가 된 모닥불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땔감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전 내내 숲에서 일했다. 부러뜨린 나뭇가지들을 쪼개거나 잘라 은신처 돌출부 아래에 차곡차곡 쌓았다 … 놀랍게도 배가 불렀다. 다시는 배가 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허기만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배가 불렀다. 거북알 한 개와 나무딸기 몇 움큼밖에 먹지 않았지만 배가 불렀다 … 자신이 직접 만든 활과 화살로 음식을 장만했다는 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브라이언은 활, 화살, 물고기, 손도끼, 하늘을 생각하며 기뻐 날뛰었다 ..  (102, 109, 121쪽)


  학교는 아이들을 시험기계와 입시바보로 만든다고 느껴요. 학교는 아이들마다 다 다른 빛을 살리지 않는다고 느껴요. 아니, 학교는 아이들한테 서린 다 다른 빛을 짓밟거나 깔아뭉개는 일에 앞장선다고 느껴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남녀가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길을 걷는다고 느끼지 못하겠어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민주와 통일과 평등과 평화로 나아간다고 느끼지 못하겠어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얼마나 이 땅을 올바로 읽거나 살피는가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글 한 줄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쓰는가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동무를 어떻게 아끼고 이웃과 어떻게 품앗이를 하는가요.


  오늘날 한국에서 《손도끼》에 나오는 줄거리처럼 깊은 숲속에 혼자 떨어지는 아이가 있다면, 이 아이는 틀림없이 굶고 추위에 떨다가 죽으리라 느껴요. 아무도 모르게 죽어 숲을 살찌우는 거름이 되리라 느껴요.


  풀을 뜯어서 먹을 줄 모르니까요. 나뭇잎을 뜯어서 먹는 줄 모르니까요. 가랑잎을 그러모으고 땅을 파서 몸을 따뜻하게 할 줄 모르니까요. 아이들이 시냇물이나 골짝물을 마실 줄 알까요. 아이들이 늘 숨을 쉬며 살아가는 줄 느끼기나 할까요. 바람이 싱그럽지 못하면 죽는 줄, 공장과 발전소가 늘고 자동차가 넘치는 삶이란, 사람을 살리는 삶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삶인 줄, 얼마나 깨닫거나 느낄까요. 학교는 아이들한테 삶을 어떻게 보여주고, 아이들이 삶을 어떻게 사랑하도록 이끌까요.


.. 호수로 마음을 돌리니, 자신이 있는 곳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폭죽처럼 터지며 호수와 나무들을 붉게 물들였다. 브라이언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놀라운 경치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 라이터로 불을 피우면서 불 피우는 게 너무 쉬워 놀랐다. 하지만 라이터는 브라이언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기회를 빼앗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터만 있으면 어떻게 불을 지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  (161, 177쪽)


  청소년문학 《손도끼》는 주인공 아이가 숲속에서 씩씩하게 살아남는 줄거리를 그립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글쎄, 모를 노릇이에요. 웬만한 아이라면 그냥 죽지 않았을까요. 숲에서 악을 쓰고 용을 쓰다가 죽는 모습을 그려야 올바르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스스로 해 보지 않고 어른들 손에 이끌려 입시지옥에 휘둘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숲에서 마흔이레만에 ‘숲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열세 살밖에 안 된 아이이기 때문에, 그동안 도시 물질문명 때가 많이 탔다 하더라도, 몸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지식 아닌 몸으로 숲을 껴안으며 살아가는 빛을 되살려 아름답게 살아남는다고 할 수 있어요.


  다만, 청소년문학 《손도끼》에서는 이 열세 살 아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훌륭히’ 숲에서 살아남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이 아이가 부딪히거나 겪는 고단함과 괴로움과 어려움이 제대로 안 나타납니다. 기껏 모기에 물리는 이야기쯤? 숲에서 처음으로 하룻밤 새며 얼마나 춥고 얼마나 몸이 얼어붙는지 제대로 그리지 않아요. 나무딸기가 맺힌다면 구월이 저물 무렵일 텐데, 구월 캐나다 깊은 숲에서 아이가 얼어죽지 않는다거나 이가 덜덜 떨리지 않는다니, 이래저래 알쏭달쏭해요.


  아무튼, 아이는 살아남으면서 《손도끼》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아이는 살아남아서 숲에서 지낸 달포쯤 되는 나날을 오래도록 가슴에 새긴다고 합니다. 이 일이 밑거름 되어 이 아이는 아름다운 빛과 사랑스러운 꿈을 오래오래 나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6.1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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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우리시대의 인물이야기 8
김남일 지음, 김병하 그림 / 사계절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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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47

 


남북녘 하나되는 길은
―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김남일 글
 사계절 펴냄, 2002.10.29.

 


  소설을 쓰는 김남일 님이 쓴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사계절,2002)을 읽습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쓴 위인전입니다. 어린이한테 읽히는 위인전이라면 지난날에는 이순신이라든지 강감찬, 또는 세종대왕이나 이율곡 같은 사람들 이야기였지만, 우리 사회가 차츰 발돋움하면서 문익화 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동화를 쓰던 권정생 님은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살가이 써낸 적 있어요. 언제나 마음속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이야기꽃 베푸는 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고 할까요.


  김남일 님이 쓴 문익환 님 이야기는 ‘통일 할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남녘과 북녘으로 갈린 이 나라 이야기입니다. 남녘에서도 푸대접과 따돌림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진 이야기입니다. 참말, 학교나 회사나 군대에서 따돌림이 그치지 않아요. 돈있는 이가 돈없는 이를 괴롭혀요. 힘있거나 이름있는 이가 힘없거나 이름없는 이를 들볶아요.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님은 언제나 힘도 돈도 이름도 없는 이 자리에 서서 다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는 나라를 바랐어요. 힘으로도 돈으로도 이름으로도 서로를 누르지 않기를 바랐어요.


.. 익환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 문재린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집 안팎의 온갖 일이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른들을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혼자서 고된 밭일도 했습니다. 밤이면 식구들이 입을 옷을 짓기 위해서 다시 베틀에 앉아야 했습니다. 그러느라 지금도 어머니의 무릎에는 삼을 쪼갤 때 베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  (32쪽)


  남녘이 북녘을 손가락질한다면 서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북녘이 남녘을 해코지하면 서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녘은 남녘대로 북녘을 손가락질하거나 해코지합니다. 북녘은 북녘대로 남녘을 손가락질하거나 해코지해요. 이래서야 둘이 하나될 수 있을까요?


  동무 사이를 생각해요. 동무와 동무가 서로를 손가락질한다면 어깨동무를 못해요. 서로 아끼지 않는데 어찌 어깨동무하겠어요.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에 어깨동무를 해요. 서로 돕고 보살펴야 어깨동무를 합니다.


  이웃 사이를 헤아려요.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푸대접한다면 어찌 되나요. 이웃이라면서 이를 갈거나 눈을 부라리면 어찌 되나요. 이래서야 이웃사촌 될 수 있겠습니까.


  남북녘 하나되는 길은 아주 쉬워요.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해야지요. 서로서로 돌보고 보듬어야지요. 정치 우두머리가 만난대서 통일을 이루지 못해요. 정치 우두머리는 없어도 돼요. 재벌 우두머리 또한 없어도 돼요. 남북녘 이루는 여느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만나면 돼요. 이렇게 하면 남녘과 북녘은 사랑스레 한 나라 한 겨레가 될 수 있어요.


.. 문익환 얼굴은 그만 홍당무처럼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무조건 남의 생각이 틀리다고 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에야 발전이 있다. 다 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늘 옳다고 생각하면 도대체 공부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 “얼음이 녹아야 봄이 오는 게 아닙니다. 봄이 와야 얼음이 녹는 것입니다. 통일도 바로 이런 자연의 이치와 다를 게 없습니다.” ..  (79, 185쪽)


  남북녘이 하나되지 못하는 까닭은 아주 쉬워요. 서로서로 아끼지 않기 때문이에요. 서로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런 잘못 저런 허물 따사로이 감싸야지요. 아이들을 떠올려 봐요. 아이들이 무엇 하나 잘못했대서 아이들을 두들겨패겠습니까. 아이들이 접시를 깨뜨렸대서 윽박지르겠습니까. 잘못은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앞으로 잘 하도록 북돋으면 돼요. 깨진 접시는 치우고 새 접시 마련하면 돼요. 싸운다 하더라도 싸운 뒤에 사이좋게 앙금을 풀어야지요.


  언제까지 남녘은 북녘을 손가락질하면서 해코지해야 하나요. 언제까지 북녘은 남녘을 손가락질하면서 해코지해야 하나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치 우두머리와 끄나풀과 몇몇 기자와 지식인 들이 자꾸 쑤석이면서 서로 손가락질하거나 해코지하도록 부추기는지 몰라요. 여느 사람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려는 마음인데, 정치 우두머리와 끄나풀과 몇몇 기자와 지식인 들만 남북이 하나되기를 안 바라면서 일을 틀어 버리려 하는지 몰라요.


  참말, 서로 하나되려 한다면 서로를 높여야 합니다. 잘 한다고 북돋우고, 사랑스럽다며 웃음으로 맞이해야지요. 저쪽더러 고개를 숙이고 이쪽으로 오라 하면 누가 오겠어요. 예부터 익은 벼가 고개를 숙여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남녘이나 북녘이나 서로 ‘익은 벼’라 한다면, 먼저 맞은편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려 해야 옳아요.


.. “내 말은, 내용이 아니라 성서가 옛날 말 그대로 적혀 있다는 말입니다. 너무 어려워요. 우리한테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떻겠어요?” 사실이었습니다. 성서는 기독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올 때 선교사들이 번역한 것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나 쓰던 말들이 버젓이 씌어 있었지요. 그런 말들은 대개 한자말이 많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문익환은, 말과 글에는 반드시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묻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말과 글을 바르게 쓰지 않고 일본어와 영어만 즐겨 쓴다면 나중에는 민족 정신도 흐릿해질 게 분명하다고 믿었습니다 ..  (105, 108쪽)


  문익환 님이 걸어온 발걸음은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삶빛이었으리라 생각해요. 높은 자리도 낮은 자리도 아닌 아름다운 자리를 찾으려 하셨지 싶어요. 거룩하거나 훌륭한 자리가 아닌 사랑스러운 자리를 찾으려 했다고 느껴요.


  그래서, 문익환 님은 ‘통일 할아버지’ 이기에 앞서 ‘예쁜 할배’요 ‘사랑 할배’로구나 싶어요. 예쁘게 노래하고 사랑스레 춤추면서 우리 삶을 아름답게 빛내고픈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분이라고 느껴요.


.. 문익환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땀을 줄줄 흘리면서 산꼭대기까지 찾아갔습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작업장에서 일하다가 수은 중독에 걸린 어린 노동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치 자기 손자가 그런 사고를 당하기라도 한 듯 펑펑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값이 폭락하여 성난 농민들이 소를 몰고 시위를 하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리 높여 싸웠습니다.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으면 가족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  (164쪽)


  소설을 쓰는 김남일 님은 문익환 님 삶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어릴 적 태어난 마을, 어릴 적 이녁을 돌본 어버이, 어릴 적부터 함께 얼크러지며 자란 동생,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만나거나 사귄 동무와 이웃, 기나긴 삶을 단출하게 갈무리해서 이 책 하나로 보여주는구나 싶어요.


  그런데, 좀 힘알이가 없습니다. 어딘가 고갱이가 안 드러나는구나 싶어요. 아름다운 삶을 아름답게 적바림하려고 애썼구나 싶지만, 문익환 님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살아오며 어떤 꿈을 펼치려 했는지, 차근차근 낱낱이 알뜰살뜰 풀어내지는 못했다고 느껴요. 한 사람 발자국을 좇으며 이런 일 저런 일 있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크고 작은 일들이 서로 어떻게 얽히고 이어져 한 갈래 아름다운 빛이 되었는가까지 밝히지는 못했다고 느껴요.


  1970년에 몸을 불사른 전태일 님 이야기를 듣고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며 삶길을 크게 바꾼 문익환 님 삶을, 노래하는 빛이 서린 성경을 읽고 밤하늘 별로 살아간 벗 윤동주를 그리는 마음으로 시를 쓰던 문익환 님 삶을, 발바닥을 아낄 줄 알 때에 이웃을 아낄 줄 아는구나 하고 감옥에서 깨달은 문익환 님 삶을, 너무 많은 이야기조각 엮으려 하다가, 외려 두루뭉술하게 얼거리가 흐트러졌다고도 느껴요.


  ‘간추려서 살을 조금 붙인 해적이’는 위인전이 되지 못합니다. 위인전도 동화책 한 권과 똑같이 오롯이 엮고 짠 문학책이 되어야 합니다. 4346.12.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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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10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익환 목사님의 <목 메는 강산 가슴에 곱게 수놓으며>를
절실하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숲노래 2013-12-10 23:52   좋아요 0 | URL
네, 문익환 목사님 위인전이나 전기인데,
김남일 님쯤 된다면
제대로 깊고 넓게 다룰 만한데,
책을 읽는 내내 왜 이렇게 아쉬울까 하는 생각
지울 길 없었어요.

틀림없이 뜻있는 책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