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헤아린다 ― 그림책을 누가 읽을까

 


  그림책은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곧, 그림책은 글을 모르더라도 누구나 읽는 책이 됩니다. 한국사람이 빚은 그림책을 몽골사람이 읽을 수 있습니다. 베트남사람이 빚은 그림책을 일본사람이 읽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사람이 빚은 그림책을 핀란드사람이 읽을 수 있습니다.


  사진책은 ‘나라와 겨레가 달라’도 누구나 읽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림책도 이와 엇비슷합니다. 그림책은 어느 나라 어느 겨레라 하더라도 ‘그림을 읽으’면 되니까, 허울도 울타리도 틀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알알이 아로새기거나 받아들이거나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어린이부터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이라 하지만, 막상 어린이가 찬찬히 느끼거나 좋아하거나 맞아들이지 못하기도 합니다.


  문은 누구한테나 활짝 엽니다. 다만, 문이 열렸대서 아무나 들어오지는 않아요. 열린 문에 들어가려면 열린 몸과 마음이어야 해요. 그러니까, 그림책은 누구한테나 열린 생각문이지만, 이 생각문으로 들어오자면 어린이가 되든 어른이 되든 먼저 스스로 생각과 마음과 사랑과 꿈과 믿음부터 활짝 열어야 합니다.


  읽는이부터 열린 생각이 아닐 때에는 그림책 줄거리조차 옳게 살피지 못합니다. 읽는이 스스로 열린 마음이 아닐 때에는 그림책 고갱이를 하나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읽는이가 열린 사랑이 아닐 때에는 그림책 속살을 맛나게 받아먹지 못합니다. 읽는이한테 열린 꿈이 없을 때에는 그림책 하나가 천천히 빚는 아름다운 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읽는이 나름대로 열린 믿음을 품지 못할 때에는 그림책 하나가 첫 끈이 되어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일굴 좋은 보금자리를 건사하지 못합니다.


  돈이 있으면 누구라도 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장만한 사람 누구나 책을 읽지는 않아요. 책을 읽은 사람 누구나 책에 서린 넋을 알뜰히 받아먹지 못해요. 돈이 있으니까 장만하는 책이 아닙니다. 틈을 내어 책을 훑었대서 ‘읽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생각·마음·사랑·꿈·믿음, 이렇게 다섯 가지를 추스를 수 있어야 해요. 이 다섯 가지를 추스른 다음에야 어린이가 되든 어른이 되든, 그림책을 읽는 사람이 됩니다. 이 다섯 가지 모두 알차게 꾸린다면 가장 아름답고, 이 다섯 가지 모두 꾸리지 못하더라도 한 가지라도 꾸린다면, 그림책 한 권으로 나눌 이야기를 조금씩 맛볼 수 있어요.


  삶이란 이야기예요. 삶이란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나누는 이야기예요. 그림책이란 삶이면서 이야기예요. 그림책이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나누는 삶을 담는 이야기예요. 이 그림책 이야기는 지식이나 정보로 삼을 수 없어요. 머리속에 가두는 정보나 지식이 된다면, 그림책을 백 권이나 천 권이나 만 권을 ‘읽었다’고 말하더라도 막상 ‘읽기’가 아닌 ‘지식 쌓기’나 ‘지식 가두기’로 그치고 말아요.


  아이들을 학교에 넣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도록 했으니, ‘아이 가르치기’를 다 해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어서 스스로 숟가락질 하도록 시켰으니, ‘아이 키우기’를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나요?


  학교에 넣어 졸업장을 따는 일은 배움(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들한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며 잠을 재우는 일은 돌보기(육아)가 아닙니다. 그림책을 마주하는 어른들은 슬기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림책을 주머니 털어 장만해서 집안 한쪽에 그럴듯하게 꽂았기에 ‘책을 장만했다’고 할 수 없어요. 날마다 한두 시간 즈음 그림책 몇 가지를 ‘입으로 들려주었다’고 해서 ‘책읽기’를 했다 할 수 없어요.

  그림책을 읽었다고 한다면, 그림책마다 다 다르게 감도는 생각·마음·사랑·꿈·믿음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그려야 합니다. 내 가슴에 찬찬히 아로새기면서 내 삶을 찬찬히 새롭게 일구어야 합니다. 아이들도 아이들 나름대로 새롭게 꾸리며 거듭나는 하루가 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책을 많이 장만해서 아이한테 선물한다고 ‘책을 잘 읽는 한식구’가 되지 않습니다. 그림책 하나란 삶책 하나인 만큼, ‘그림책 읽기 = 삶책 읽기’입니다. 그러니까, 종이에 앉힌 그림으로 엮은 그림책만 들여다본대서 ‘(책)읽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노릇입니다. 넋을 추스르고 얼을 돌보며 꿈을 빚을 때에 ‘(책)읽기’가 이루어져요.


  한 평짜리 밭이라도 마련해서 아이와 함께 씨앗을 심어 보셔요. 자그마한 꽃그릇 하나에 흙을 담아 아이와 나란히 씨앗을 심어 보셔요. 자그마한 꽃그릇에 나무씨앗을 심었으면 한두 해나 서너 해 집안에서 키운 다음, 너른 들판이나 멧등성이에 올라 옮겨 심을 수 있습니다. 한 평짜리 밭에서 아이랑 같이 심어 거둔 무, 배추, 당근, 토마토, 오이를 아이하고 즐겁게 먹어 보셔요.


  삶을 누리는 나날일 때에는 언제나 ‘(책)읽기’를 해요. 아이와 손을 맞잡고 들길을 거닐어 보셔요. 도시에서라면 골목길을 거닐어 보셔요.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길을 거닐어 보셔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새 소리에 마음을 가누어 보셔요. 바람결에 나뭇잎과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를 살피셔요. 구름이 흐르는 소리와 별이 움직이는 소리를 헤아리셔요. 빗방울이 지붕이나 땅바닥에 닿기까지 하늘에서 어떻게 날았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그리셔요.


  스스로 삶을 그릴 때에 그림책 이야기를 찬찬히 읽습니다. 스스로 삶을 지을 때에 그림책 이야기를 하나하나 아로새깁니다. 스스로 삶을 일굴 때에 그림책 이야기를 흐뭇하게 누립니다. 2012.4.7.

 

(최종규 . 2013 - 그림책 헤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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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그림책을 헤아린다
 그림책이란
 그림책을 누가 읽을까
 그림책을 누가 만들까
 그림책을 읽는 어른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린이
 그림책에 담는 이야기
 그림책이 태어나는 밑바탕

 

ㄴ. 어린이 삶을 생각한다

ㄷ. 그림쟁이 넋을 돌아본다

ㄹ. 옛날 한국 그림책

 

그림책을 헤아린다
― 그림책이란

 


  그림책은 그림으로 이룬 책입니다. 오늘날 ‘그림책’이라 말하면, 으레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빚은 책으로 여깁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기 앞서까지만 하더라도 ‘그림책’이라는 낱말을 꺼내기 수월하지 않았고, 이러한 낱말을 받아들이는 어른이 썩 많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도 그림책이 나왔고, 한국에서도 그림책을 그리는 어른이 있었지만 아직 몇 분 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읽히기 몹시 힘들었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으레 ‘글로만 엮고 그림은 사이사이 곁들이는’ 동화책만 읽히면 된다고 여겨 버릇했거든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이들한테 동화책 읽히는 일도 아이들로서는 고맙게 여길 만했습니다. 1980년대나 1970년대에는 아이들 책이라 하면 흔히 ‘전집’만 생각했으니까요. 더욱이, 1970년대나 1960년대를 헤아리자면, 집안에 전집을 들여놓을 만한 살림이 되는 아이가 매우 적었어요. 돌이키면, 1960년대나 1950년대에는 아이들한테 ‘책을 읽힌다’는 일부터 꿈꾸기 어려웠구나 싶어요. 이무렵에는 ‘교과서 한 권 사 주기’조차 만만하지 않다고 여기던 살림이기 일쑤였어요.


  곧, 한국땅에서 아이들이 그림책을 누린 때는 2000년대부터라 할 만합니다. 1980년대까지는 거의 아무런 싹이 없었고, 1990년대에 비로소 싹이 조금씩 움트며 2000년대에 줄기가 부쩍 올랐다 할 만합니다.


  오늘날 둘레를 살피면 큰 책방에서 가장 널따랗게 자리를 얻는 데는 ‘교과서·참고서’ 다음으로 ‘어린이책’ 칸입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교과서와 참고서 자리가 가장 널따랗기 때문에 무척 슬프지만, 입시지옥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찌할 길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무튼, 어린이책 칸 가운데에서는 그림책이 가장 널따랗게 자리를 얻습니다. 그림책이 싹을 트고 줄기를 높이 올린 지 고작 스무 해가 안 된 한국 책마을이라 할 만한데, 그림책 마당은 아주 빨리 매우 넓게 퍼집니다.


  한국과 이웃한 일본은 그림책 마당이 꽤 일찍부터 열렸고, 몹시 넓고 깊게 뿌리내렸습니다. 일본만 돌아보더라도 ‘어린이책 전문서점’이 튼튼할 뿐 아니라, 어린이책을 빚는 크고작은 출판사가 아주 많습니다. 한국 출판사에서 내놓는 그림책 가운데 적잖은 부피를 일본 그림책이 차지합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유럽 같은 서양 또한 그림책 뿌리가 깊으며 그림책 마당이 넓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해마다 ‘좋은 그림책’을 뽑아서 상을 주기도 하며, 이렇게 상을 받는 그림책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고 읽혀요.


  한국에서도 여러 해 앞서부터 ‘좋은 그림책’을 뽑아서 상을 주는 제도가 생깁니다. 아쉽다면 출판사마다 제가끔 마련한 상이기에 더 넓고 깊게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출판사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해요. 어린이책을 아끼고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어른과 어린이 모두)이 모여 해마다 새로 나오는 그림책 가운데 몇 가지를 손꼽으면서 북돋우는 자리가 있으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이만 한 밑바탕이 서자면 더 기다려야 걸맞다 싶기도 합니다. 너무 일찍, 또는 섣불리, ‘좋은 그림책 북돋우는 자리’만 마련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어른과 어린이 스스로 ‘그림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짚고 살펴야 한다고 느껴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림책은 그림으로 이룬 책입니다. 만화책은 만화로 이룬 책일 테고, 글책은 글로 이룬 책일 테지요. 사진은 사진으로 이룬 책이 될 테고요. 그런데 그림책이든 만화책이든 글책이든 사진책이든, 이 가운데 ‘어린이부터 즐겁게 보도록’ 헤아리며 엮는 책은 오직 그림책 하나입니다.


  그림책 가운데에는 ‘어른이 함께 읽는’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그림책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뺀 어른만 읽는’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그림책은 따로 없어요. ‘푸름이(청소년)가 읽는’ 그림책 또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아니, 아직 한국에는 ‘푸름이 그림책’은 없다 할 수 있겠지요. 푸름이 문학조차 제대로 서지 못하거든요.


  만화책은 아이들도 즐겨 읽는다지만, 푸름이 즈음부터 읽을 수 있는 만화가 따로 있고, 어린이부터 읽을 만한 만화가 따로 있으며, 열아홉 살 넘은 나이부터 읽는 만화가 따로 있어요. 만화책은 금이 아주 또렷합니다. 글책과 사진책도 엇비슷해요. 읽히는 나이를 또렷하게 갈라 내놓습니다.


  그림책은 오직 어린이를 헤아리며 빚습니다. 더군다나, 그림책은 어린이를 ‘갓난쟁이’부터 열서너 살 나이까지 촘촘히 살피며 빚습니다. 세 살 아이까지 즐길 그림책, 다섯 살 아이까지 즐길 그림책, 일고여덟 살까지 즐길 그림책, 열 살까지 즐길 그림책, 열두어 살까지 즐길 그림책, 으레 이처럼 눈높이를 가누면서 엮어요. 그림책 겉이나 간기 자리를 살피면, 어느 나이 아이들한테 읽히면 좋은가 하고 밝히곤 해요.


  저도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에 그림책을 참 많이 장만해서 읽히고 읽습니다만, 아이들과 살아가며 그림책을 읽히고 읽다 보면, ‘아이 나이에 따라 가른 눈높이’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갓난쟁이부터 세 살 아이한테까지 읽힐 만한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다섯 살 어린이한테도 즐겁기 마련이고, 열 살 어린이나 스무 살 젊은이도 즐겁게 읽을 수 있어요. 일고여덟 살이나 열두어 살 어린이한테 걸맞도록 엮었다는 그림책이라지만, 두 살이나 세 살 아이가 재미나게 읽기도 합니다. 다만, 두어 살 아이가 그림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글을 읽지’는 않아요. ‘그림을 읽’어요.


  그러니까, 그림책이란 “그림을 읽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글책은 글을 읽는 책이고, 사진은 사진을 읽는 책입니다.


  그림책은 그림을 읽는 책인데, 그림책에서 읽는 ‘그림’이란, 사람이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갈무리해서 나누려 하는 넋입니다. 그림책은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인 만큼, 열 살이든 서른 살이든 쉰 살이든 쉽고 즐거이 읽을 수 있는데, 누구보다 가장 어린 나이일 어린이가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쉽고 즐거이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책인 셈입니다.


  그림으로 담는 이야기는 모두 “지구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수학 원리를 알려주든, 과학 지식을 보여주든, 이웃사랑이나 꿈나라를 들려주든, 모든 이야기는 “사람 삶”이라는 데에 눈길을 맞춥니다. 어린이가 어버이 사랑을 차근차근 받으면서 아름다운 넋으로 씩씩하고 착하게 설 수 있도록 “사람 삶”을 슬기롭고 예쁘게 보여주는 그림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삶”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그림책이란 ‘현실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오늘 바라보는 이곳 모습을 고스란히 담는 그림책이 아니라, 어린이가 하루하루 새롭게 자라나면서 누리는 한삶을 언제나 즐겁고 아리땁게 스스로 사랑하도록 돕는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에서 대수롭게 살필 대목은 ‘현실이냐 판타지이냐’가 아닙니다. ‘교훈이냐 재미이냐’가 아닙니다. ‘철학이냐 과학이냐’가 아닙니다. ‘정보냐 지식이냐’가 아닙니다. ‘예쁜 그림이냐 멋진 그림이냐’가 아닙니다. 그림책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맺는 아름다운 삶을 사랑스레 보여줄 수 있을 때에 그림책이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사랑스레 보여주는 그림책”은 어느 한 갈래에 따로 매이지 않습니다. 그림책은 아이들한테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고, 신나는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깊은 생각이나 슬기로운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일구거나 빚는 힘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림 솜씨를 뽐낸 작품이라 해서 아이들이 즐겁게 맞아들일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대단한 밥 솜씨를 뽐내어 밥을 차려 준다고 아이들이 맛나게 먹지 않아요.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이 담긴 밥을 맛나게 먹어요. 아이들은 비싸게 치른 밥이라서 더 맛나게 먹지 않아요. 아이들은 값싸게 차린 밥이라서 더 맛없게 여기지 않아요. 아이들은 사랑 담은 좋은 밥을 맛나게 먹어요. 아이들은 사랑 담은 좋은 그림책을 오래도록 수없이 되풀이해서 읽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을 시나브로 익혀요.


  또 한 번 이야기하지만, 그림책은 그림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림 하나로 온 넋과 꿈과 사랑과 믿음과 삶과 말을 보여줍니다. 쪽수가 제법 되는 그림책이 더러 있으나, 웬만한 그림책은 쪽수가 퍽 적습니다. 그림 한 장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담거든요. 그림 하나에 짙고 깊은 이야기를 알알이 싣거든요.


  훌렁훌렁 넘길 때에는 그림책을 읽지 못합니다. 꽃 한 송이를 오래도록 들여다볼 줄 알고, 풀 한 포기를 날마다 새롭게 들여다볼 줄 아는 어린이 매무새처럼, 그림책 그림 한 칸은 오래오래 차근차근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맛과 멋을 알아챈다 할 만합니다.
 (4345.4.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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