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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침묵의 봄


그녀가 쓴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은 감수성 깊은 문학적 수사를 통해 살충제와 농약 등의 피해를 통렬히 경고한 책으로 환경운동의 시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책이다

《달렌 스틸/김형근 옮김-시대를 뛰어넘은 여성과학자들》(양문,2008) 53쪽


침묵(沈默)

1.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음

2. 정적(靜寂)이 흐름

정적(靜寂) : 고요하여 괴괴함



  레이첼 카슨 님은 1962년에 벌써 “입을 다문 채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봄”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이무렵 아직 한국에는 “조용한 봄”이 없었습니다. 얼어붙던 냇물이 와지끈 소리를 내면서 녹고 풀리기 마련이었습니다. 눈이 녹는 소리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소리도 또렷하게 찾아왔습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맑고 밝게 사람들 몸과 마음으로 퍼졌습니다. 그무렵에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봄이나 가을이란 없었습니다. 제비가 아직 서울에도 찾아가던 1950∼60년대이고, 박쥐도 함께 살며, 개구리가 노래하던 한국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조용한 봄”이나 “고요한 봄”이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시끌벅적한 봄이나 왁자지껄한 봄을 맞이했다고 할 만합니다.


 조용한 봄

 고요한 봄


  경제성장율을 따지고 국민소득을 헤아리는 오늘날에는 새나 개구리나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문화와 예술이 흐드러진다는 오늘날에는 냇물이나 바람이나 구름이 들려주는 소리에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조용한 봄”이거나 “고요한 봄”입니다. 봄을 맞이해서 봄노래를 부르거나 봄잔치를 즐기겠노라 외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봄꽃마실을 다니더라도 봄노래잔치를 새랑 개구리랑 풀벌레하고 누리려는 사람을 만나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물도 사다가 마시고, 옷은 사다가 입으며, 밥도 사다가 먹습니다. 집도 돈으로 사서 잠을 잡니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아주 오랫동안 있으며, 삶을 손수 짓는 길하고는 자꾸 멀어집니다. 바야흐로 “말 없는 봄”이요 “노래 없는 봄”이자 “소리 없는 봄”입니다.


 소리 없는 봄

 소리 죽은 봄

 소리가 사라진 봄

 소리가 잠든 봄


  손이 아닌 돈이 빨래를 합니다. 손이 아닌 돈이 밥을 합니다. 발이 아닌 돈이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몸이 아닌 돈이 가방을 나르고 짐을 나릅니다. 


  소리가 없고, 소리가 죽으며, 소리가 사라집니다. 노래가 없고, 노래가 죽으며, 노래가 사라져요. 노랫소리가 잠들고, 노랫소리가 자취를 감추며, 노랫소리가 가뭇없이 메마릅니다.


  새벽나절 이슬이나 서리를 보면서 하루를 여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침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별자리 움직임을 가늠하면서 철을 헤아리거나 날씨를 느끼던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봄소리를 잊고 여름소리를 버리고 가을소리를 멀리하며 겨울소리를 잃습니다. 찻소리를 얻고 기곗소리를 듣습니다.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가득하며, 광고노래가 퍼지는 소리가 넘실거립니다.


 죽은 봄

 싸늘한 봄

 깨어나지 않는 봄

 사라진 봄

 자취를 감춘 봄


  1962년에 미국에서 처음 나온 《침묵의 봄》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탐구당 손바닥책’으로 한 번 옮겨졌으나 거의 안 읽혔습니다. 이러다가 1990년대 첫무렵에 다시 한 번 나왔는데, 이때에도 안 읽혔습니다. 비로소 2000년대로 접어들어서 새로운 옮김판이 나오니 그제서야 조금 읽힙니다만, 깨작깨작입니다.


  이웃 여러 나라에서는 《침묵의 봄》을 일찌감치 읽으면서 삶과 삶터를 새롭게 가꾸려는 몸짓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책을 읽어도 삶과 삶터를 새롭게 다스리려는 몸짓이 좀처럼 안 일어납니다. ‘침묵(沈默)’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까요? 책이름에 붙은 “침묵의 봄”에서 ‘침묵’은 ‘정적’을 뜻한다고 합니다. 한자말 ‘정적(靜寂)’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고요하여 괴괴함”을 뜻한다고 하는데, ‘괴괴하다’라는 한국말은 “쓸쓸한 느낌이 들 만큼 아주 고요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사전 낱말풀이는 엉터리입니다. ‘괴괴하다 = 아주 고요하다’라는데, “고요하여 괴괴함”이라는 낱말풀이라면 “고요하여 아주 고요하다”라는 소리가 되니, 그야말로 엉터리예요.


  아무튼, ‘정적’이라는 한자말은 ‘고요하다’를 뜻합니다. 그리고, ‘침묵’이라는 한자말도 한국말로 옮기면 ‘고요’입니다.


  그러면, ‘고요·고요하다’는 어떤 모습을 가리칼까요? 소리도 몸짓도 없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며 나타나지 않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숨결이 없고, 힘차게 움직이는 목숨이 없으며, 싱그럽거나 맑은 바람조차 없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래, “입 다문 봄”입니다. 아니, “입 닥친 봄”입니다. “입이 꿰매어진 봄”입니다. “입을 잃은 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입을 다문 사람입니다. 아니, 입 닥치는 사람입니다. 아니, 입이 꿰매어진 사람입니다. 아니, 입을 잃은 사람입니다. 4341.11.2.해/4348.5.6.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책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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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과 얽힌 이야기를 일곱 해 만에 쓴다.

그동안 이 글을 안 썼다.

책이름을 다루는 글이

좀 부질없다고 느꼈다.


이런 글을 쓴대서

책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이 글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없고

이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다.


아무튼, 쓴다.

책이름이 아름답게 붙기를 꿈꾸면서

차근차근 하나씩 쓰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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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두더지의 고민


“우리 이제 뭐하고 놀까?” 두더지와 친구들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어

《김상근-두더지의 고민》(사계절,2015) 36쪽


고민(苦悶) :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움



  어린이와 함께 보는 그림책 《두더지의 고민》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집 아이는 책에 적힌 말을 그대로 읽다가 묻습니다. “아버지, ‘고민’이 뭐야?” 이 그림책을 빚은 어른은 ‘고민’이라는 한자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을 읽을 어린이는 이 한자말을 모르기 마련입니다. 둘레에서 어른들이 이런 낱말을 흔히 쓰더라도 느낌으로 어렴풋하게 헤아릴 뿐,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한국말로는 ‘걱정’이거나 ‘근심’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릴 적부터 ‘걱정’이나 ‘근심’이라는 한국말은 거의 들은 적 없이 ‘고민’이라는 한자말만 들었다면, 아이는 거꾸로 한국말은 모르는 채 한자말로 제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이바이’ 같은 인사말을 떠올릴 수 있어요. 오늘날 어른들은 누구나 흔히 ‘바이바이’ 같은 인사말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바이바이’는 영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 입에 굳었습니다. 그러면, ‘바이바이’는 한국말일까요? ‘들온말(외래어)’로 삼을 한국말일까요? ‘땡큐’는 한국말일까요, 영어일까요?


  곰곰이 따지면, 한국말과 영어를 굳이 가르거나 나누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이니 마땅히 한국말을 쓸 일이지만, 한국사람이어도 영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몇 가지 영어를 섞어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근심하는 두더지 . 걱정 많은 두더지

 근심쟁이 두더지 . 걱정꾸러기 두더지


  책이름 ‘두더지의 고민’을 살펴봅니다. 이 책이름은 그대로 쓸 만한지 가만히 살펴봅니다. 요즈음은 이런 말마디가 널리 퍼졌습니다. ‘무엇의 무엇’이라는 꼴이고, 이 말꼴은 일본 말투입니다.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무엇の 무엇’이라고 아주 흔히 말하지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 말투는 무엇일까요? 한자말 ‘고민’을 한국말 ‘근심’이나 ‘걱정’으로 바로잡는다고 하더라도, “두더지의 근심”이나 “두더지의 걱정”으로 적으면, 아직 ‘한국말이 아닙’니다. 말투가 한국말이 되자면, 더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 말투대로 적자면, “근심하는 두더지”나 “걱정하는 두더지”입니다. 또는 “근심 많은 두더지”나 “걱정 많은 두더지”예요. 그리고, 근심이나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을 두고 ‘-쟁이’나 ‘-꾸러기’를 붙여서 “근심쟁이 두더지”나 “걱정꾸러기 두더지”처럼 쓰기도 합니다.


  한국사람이 영어를 쓰든 일본 말투를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말투를 쓰든 대수롭지 않으나, 제 말투를 잃으면 생각날개를 잃기 마련입니다. 제 말투를 잊으면서 생각날개도 잊어요. 이러면서 마음껏 생각을 키우거나 북돋우는 말투하고 멀어지지요. ‘무엇의 무엇’ 같은 말투를 쓰면서,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생각을 가꾸어 펼치던 말마디가 사라지거나 없어집니다.


 두더지와 친구들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어

→ 두더지와 동무들은 이제 즐겁습니다

→ 두더지와 동무들은 이제 기쁘게 놀아요

→ 두더지와 동무들은 다 함께 신나게 놀아요

 …


  한자말 ‘행복(幸福)’은 한국말로 ‘기쁨’이나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행복한 고민”이란 “기쁜 근심”이나 “즐거운 걱정”인 셈입니다. 이와 같이 말할 수도 있을 테니, “기쁜 근심에 빠졌어”나 “즐거운 걱정에 빠졌어”로 글을 써도 됩니다. 다만, 더 생각해 보면, 걱정이나 근심은 기쁨이나 즐거움하고 동떨어집니다. 그래서, “이제 즐겁습니다”라든지 “기쁘게 놀아요”라든지 “신나게 놀아요”처럼 고쳐쓸 수 있습니다. 근심쟁이 두더지이거나 걱정꾸러기 두더지는 이제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는 한껏 즐겁고 기쁘게 논다고 말할 만합니다. 4348.5.6.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책이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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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 외로운 떠돌이 라스무스


 퍽 어릴 적 라스무스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라고만 떠올립니다. 어쩌면 국민학교 3학년 때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그 3학년 때, 또는 4학년 때인데, 학급문고 간수를 맡은 계집아이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하나 있고, 이해에는 모범생으로 착하게 보내 보자는 마음이 있어서 책읽기에 무던히 시간을 쏟았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에는 얌전한 아이로, 2학년 때에는 말썽꾸러기로, 3학년 때에는 다시 얌전한 아이로, 4학년 때에는 또다시 장난꾸러기로 …… 이렇게 한 해 한 해 보냈던 국민학생 때입니다. 아, 그러면 3학년 때로군요.

 ―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계몽사)

 지금도 떠오르는데, 그 3학년 때(1984년), 햇볕이 따사롭게 들어오는 창문가에 앉아서 빠알간 겉싸개로 되어 있는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하나인 ‘라스무스’ 이야기를, 그때는 몰랐고 지금 와서 돌아보니 책이름이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인 어린이책을 읽었습니다. 그 어릴 때 ‘방랑’은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고아’라는 말은 알았습니다. 고아 라스무스가 나오는 이야기라, 퍽 재미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한창 삐삐와 앤으로 우리들 눈시울을 적시던 때입니다. 저는 그레이트마징가 만화영화도 보았지만 삐삐 연속극도 보았고 앤 만화영화도 보았습니다. 미래소년 코난도 보았고요.

 ┌ 방랑아 라스무스 (교연사,1987)
 ├ 라스무스와 방랑아 (민음사,1991)
 ├ 라스무스와 방랑자 (시공주니어,1997)
 ├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계몽사,1981)
 └ 하느님의 굴뚝새 (빛남,1995)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이 외로운 라스무스는 고아원에서 삽니다. 고아원에 살면서 ‘자기 같은 외톨이 아이’를 귀엽게 보아주면서 데려가 줄(입양) 돈 많고 마음 좋은 사람을 기다리는 형편입니다. 그렇지만 라스무스는 번번이 떨어집니다.

 ┌ 방랑(放浪) :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   - 방랑 생활 / 김삿갓은 방랑 시인으로 유명하다 /
 │     발길 닿는 대로 며칠씩 여기저기 방랑도 해 보다가
 ├ 방랑아(放浪兒)
 │  (1) [북녘말]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사는 어린이
 │  (2) 방랑 생활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 방랑자(放浪者) :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


 그러던 어느 날, 라스무스는 고아원에서 벗어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고아원에서 빠져나가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끝내 뜻을 이룹니다. 자칫, 늙어죽는 날까지 고아원 울타리에 갇혀 있어야 했을지 모르는 라스무스는 새 삶을 찾습니다.

 ― 떠돌다 / 떠돌이 . 나그네

 그렇지만 라스무스를 반기는 세상은 어떻든가요. 따뜻했던가요. 넉넉했던가요. 아름다웠던가요.

 생각해 보면, 라스무스가 살았던 먼 옛날 유럽땅에서뿐 아니라 2008년 대한민국 땅에서도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외롭고 힘들고 슬프고 답답한 삶을 보내야 하지 않느랴 싶습니다.

 사회복지 틀거리도 그렇지만, 이 나라 사람들 눈길과 매무새가 어린 떠돌이 아이한테 얼마나 따뜻하게 다가가는지요. 집이 없고 길을 헤매는 어린 양한테 우리들 집 있고 돈 있는 어른들은 어떻게 마주하고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는지요.

 → 외로운 떠돌이 라스무스
 → 쓸쓸한 나그네 라스무스
 → 외로운 길을 걷는 라스무스
 → 라스무스는 홀로 길을 걷네


 책을 읽으면, 라스무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외톨이입니다. 그렇지만 라스무스는 어느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머물 곳이 없는 어린 나그네이건만, 늘 웃으면서 살고 언제나 밝게 살아갑니다. 이런 라스무스한테는 더없이 반가운 벗(어른 : 오스카)이 있어요.

 그러고 보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할머님이 지은 이 이야기책 ‘라스무스 이야기’는 “외로운 떠돌이 라스무스”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한편, “씩씩한 나그네 라스무스”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멋진 떠돌이 라스무스”인지 모릅니다. “야무진 나그네 라스무스”인지 모르고요. (4341.3.3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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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 Good Morning INCHEON


 - 1 -

 부산에 ‘인디고서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INDIGO+ING》라는 잡지를 펴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책쉼터 이름을 나라밖 말로 지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내는 잡지이름도 나라밖 말로 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인디고서원’이라는 말은 한글로 적어 주니 낫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이곳 인디고서원에서는 오는 8월에 닷새에 걸쳐서 ‘인디고 유스 북페어(INDIGO YOUTH BOOK FAIR)’를 연다고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 ‘청소년 책’을 함께 모두어 내는 ‘세계잔치’로 꾸린다는군요.

 생각해 보면, 책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서울국제도서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 책잔치 이름은 한글로 ‘서울국제도서전’이고, 알파벳으로 적으면 ‘SEOUL INTERNATIONAL BOOK FAIR’입니다. 한국사람한테는 ‘도서전’이고, 나라밖 사람한테는 ‘BOOK FAIR’입지요.

 ┌ 국제도서전 / INTERNATIONAL BOOK FAIR
 └ 유스 북페어 / YOUTH BOOK FAIR


 해마다 치르는 서울국제도서전 행사를 가 보면, 날이 갈수록 ‘국제’라는 이름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타까움은 잠깐 접어 놓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이 나라 안팎에 있는 사람들을 모시고 잔치를 나눈다고 할 때에, 이와 같은 잔치판을 알리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야 알맞을까요. 아니, 어떻게 붙여야 좋을까요.

 ┌ 청소년 책잔치
 └ 푸름이 책잔치


 우리 말은 ‘청소년’입니다. 또는, ‘푸름이’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말은 “책으로 벌이는 잔치”, 곧 ‘책잔치’입니다. ‘책’을 ‘圖書’라는 한자로 옮기고, ‘잔치’를 ‘典’이라는 한자로 옮기면 ‘圖書典’이 됩니다.

 인천시는 준비가 안 된 ‘도시엑스포(-expo)’를 치른다고 나섰다가, 세계엑스포위원회한테 쓴소리를 듣고는 잔치 크기와 이름을 모두 바꾸면서 ‘도시축전(-祝典)’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자로 적어서 ‘祝典’인데, 이 ‘축전’이란 ‘엑스포’하고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우리 말로는 ‘잔치(또는 한마당)’이고, 한자말로는 ‘祝典(또는 祝祭)’이고, 영어로는 ‘Expo(또는 festival)’이며, 이탈리아말로는 ‘biennale’입니다.

 ┌ 인디고 청소년 세계 도서전
 └ 인디고 푸름이 세계 책잔치


 나라밖 사람을 불러들이는 잔치판이라고 해서 잔치이름을 아예 알파벳으로 적을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한국사람 누구한테나 글을 쓰는 자유가 있고, 이름을 붙이는 자유가 있습니다. 알파벳 아닌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로 적는다고 한들, 한자로 적는다고 한들 어느 누가 법으로 따지겠으며, 어느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다.

 한국사람만 즐기는 잔치판 이름을 외국말로 지어서 쓰든, 온통 알파벳으로 적바림하든, 누가 무어라 탓하겠습니까. 나라밖 사람을 모으든 안 모으든, 이리하여 서울시에서 ‘Hi Seoul Festival’이라고 외친들, 쑹얼쑹얼 따질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영어에 온마음을 바치는 밑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한국땅을 찾아와서 한국사람을 만나는 나라밖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은 이 잔치를 어떤 한국말로 가리킬까’ 하고 궁금해 하지 않겠느냐고. 어쩌면 한국땅까지 찾아오는 그 나라밖 사람들이 ‘한국말-한국 문화-한국 삶터-한국 이야기’에는 눈길 한 번 안 둘 수 있습니다. 영어로 ‘thank you’를 한국말로 ‘고맙습니다(고마워/고맙네/고맙구나/…)’라고 하는 줄 모르고, ‘good-bye’를 한국말로 ‘잘 가(잘 가렴/잘 가게/…)’라고 하는 줄 모르더라도, 그 나라밖 사람한테는 아무 피해 될 일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한국말과 한국글이 있어서, 영어로 ‘BOOK FAIR’를 한국사람들은 ‘책잔치’로 적고 있음을 모른다고 하여, 이 사람들로서는 무어 아쉬울 노릇조차 없습니다.

 - 책 / 書籍,圖書,冊 / book

 우리들한테는 ‘책’입니다. 한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書籍,圖書,冊’입니다. 영어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book’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나라밖 사람들이 한글로 ‘책’을 쓰고 있음을 모른다고 해서, ‘한국 관광’이 빛을 잃지는 않아요.



 - 2 -

 인천시에서 시 살림돈으로 엮어서 거저로 보내주는 잡지가 있습니다. 인천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볼 수 있고, 인천사람이 아니어도 받아볼 수 있는 줄 압니다. 이달 2008년 5월로 173호가 나온 이 잡지는 《Good Morning INCHEON》입니다. 이 잡지는 나라밖 사람한테는 보내지 않고 나라안 사람한테만 보냅니다. 한글판만 찍으니까요.

 그러나, 잡지 이름에는 한글이 하나도 없습니다. 겉장을 넘겨 차례를 봅니다. 틀림없이 차례이지만 ‘차례’라는 말은 없습니다. ‘CONTENTS’라는 말만 있습니다. 그 옆으로, “May 2008 통권 173호”라고 적혀 있습니다. 응? ‘5월’이 아닌 ‘May’로 적는다면, ‘통권’이 아닌 ‘vol’을 적어야 하지 않나?

 ‘차례’ 아닌 ‘CONTENTS’는 모두 세 갈래로 크게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 갈래는 ‘Fly Incheon’입니다. 둘째 갈래는 ‘Incheon Life’입니다. 셋째 갈래는 ‘Incheoner’입니다.

 ┌ 날자 인천 / Fly Incheon
 ├ 인천 삶 / Incheon Life
 └ 인천사람 / Incheoner


 글꼭지를 보니, “Fly Incheon News”, “시의회 Zoom in”, “Eduport Incheon”, “Healthy Life 건강백세”, “Info Box” 같은 말이 보입니다.

 잡지를 덮습니다. 이와 같은 잡지 꾸밈새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인천시 한 곳 모습만도 아닙니다. 대구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을 가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울이라고 남다를 모습은 없습니다. 대전은? 광주는? 울산은? 우리 나라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딱히 새로울 만한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아직 법으로 ‘영어 함께쓰기’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전국 여러 도시마다 ‘영어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원어민 영어강사가 모셔지고 이 나라 아이들은 이 영어마을에 영어체험을 하러 찾아갑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영어마을을 만드는 까닭이라면, 우리 나라 적잖은 사람들이 영어마을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마을을 바라는 사람이 드물다면, 또는 없다면, 굳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으며 만들 까닭이 없습니다. 공문서에도 버젓이 영어를 집어넣고, 동사무소는 어느 날 아침에 ‘주민센터’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동사무소 간판과 지도와 길알림판 갈아치우는 데에 들어간 큰돈을 놓고 예산낭비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거의 못 들었습니다. 한글학회에서나 잠깐 외쳤달까.

 ┌ 안녕하셔요, 인천입니다
 ├ 어서 오셔요, 인천입니다
 ├ 반가워, 인천
 └ …


 우리들이 우리 삶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쏟을 수 있다면, 또한 공무원들이 동네사람들 삶터에 살짝이나마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면, 나아가 이 나라 지식인들이 이 나라 문화에 털끝만큼이나마 마음을 둘 수 있다면, 지자체에서 주민들한테 보내주는 홍보잡지 이름을 붙일 때에도 《반가워, 인천》쯤으로 붙인 다음에, 이 글월 밑에다가 ‘Good Morning INCHEON’을 집어넣었으리라 봅니다. 영어로 이름을 붙이고 알파벳으로 적는 글월을 꼭 넣어야 한다고 해도, 《어서 오셔요, 인천입니다》쯤으로 잡지이름을 삼은 다음에, 이 밑이나 오른쪽에 넣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문화잔치조차 ‘INDIGO YOUTH BOOK FAIR’인걸요. 책이름도, 책방이름도, 이름쪽에 적는 이름도, 물건에 붙이는 이름도, 우리가 몸담은 일터이름도, 길거리 빵집에서 파는 빵조각에 붙는 이름도, 모두모두 영어로 되어 있고 알파벳으로 적는걸요. (4341.5.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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