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책 장만 : 스스로 책 한 자락을 즐거이 장만해서, 조곤조곤 소리를 내어, 가만가만 누려 보면 좋겠다. 그러면 다 알 수 있다. 겉치레인지 속사랑인지, 겉꾸밈인지 사랑씨앗인지 하나하나 알아챌 수 있다. 모든 꽃은 스스로 피어나며 아름답다. 모든 나무는 스스로 뿌리를 뻗고 자라면서 우람하다. 모든 풀은 스스로 새싹을 틔워 푸르게 노래하기에 사랑스럽다. 치를 값을 아끼면 얻을 수 없다. 2009.10.20.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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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 1999∼2000년에 출판사 영업부 막내일꾼으로 지내며, 2001∼2003년 어린이 국어사전 편집장으로 일하며, 이러하든 저러하든 그때에는 꽤 나이가 적은 사내이다 보니, 언제나 술자리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이무렵 출판사 편집부 일꾼이나 사장은 으레 밤 열한두 시 즈음이나 새벽 한 시 언저리이면 달아난다. 이들은 이무렵 달아나면서 ‘영업부가 알아서 끝까지 챙기라’고 이른다. 영업부에서도 막내였으니 새벽 두어 시까지 곁을 지키면서 ‘제발 작가 선생님이 술자리에서 깨어나서 집주소를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있기 마련. 겨우 넋을 차리고 집이 어디인가 말할 수 있구나 싶으면 어깨동무를 하고서 택시를 부르고, 같이 택시에 타서 그 ‘거나한 작가 선생님 집’으로 끌고 가서, 문을 어찌저찌 열고, 자리에 눕히고, 양말을 벗겨 주고, 웃옷 단추를 끌러서 숨통이 트이게 하고, ‘그나저나 난 집에 어떻게 돌아가지?’ 하고 근심하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이곳이 어떤 마을인지 하나도 모르잖아?’ 하면서 눈을 감았다. 이 여러 해 사이에 매우 지저분한 술버릇으로 영업부 막내일꾼이자 사전 편집장을 들볶은 이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무슨무슨 띠 시인이거나 화가이거나’였다. 그때 그분들은 왜 그랬을는지, 또 이제는 달라졌을는지, 또 그무렵 다른 데에서는 어떠했을는지 하나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는 어림해 본다. 부디 그분들이 어느 한 가지에 푹푹 절어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되기로 한다. 그 사람, 그분, 그 ‘작가 선생님’은 그때에 아직 철이 하나도 안 든 몸짓이었을 테니, 철이 안 든 모습이란 무엇인가 하고 되새기면서 내가 스스로 철이 들면서 나아가는 길을 곰곰이 짚기로 한다. 2019.10.20.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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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광 무표백 종이·휴지 : 글을 그렇게 써대느라 종이를 그렇게 써대고 살면서도 종이를 어떻게 빚는가를 제대로 살핀 지 얼마 안 된다. 곁님이 문득 이야기를 했기에 비로소 깨달았는데, 나한테 핀잔을 하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책이며 글을 그렇게 껴안는 주제에 어떻게 연필 하나 종이 하나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그렇게 안 쳐다볼 수 있었느냐고. 곰곰이 생각하니, 나 스스로도 놀라운 노릇이다. 어떻게 나는 종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또 종이에 어떻게 형광물질이나 표백제를 비롯한 화학약품을 그렇게 써대는 줄 하나도 안 헤아렸을까? 아이가 태어나기 앞서 천기저귀를 살피며 이때에 이르러서야 형광물질하고 표백제가 우리를 곳곳에서 둘러싼 줄 알아챘다. 곁님이 덧붙이지 않아도 갸우뚱한 일이 있다. 여느 흰종이가 몽땅 형광물질하고 표백제 범벅이라면, 형광물질이며 표백제를 안 쓴 누런종이(크라프트지 또는 똥종이 또는 갱지)가 값이 눅어야 할 텐데, 오히려 누런종이가 흰종이보다 비싸다. 흰종이는 값이 싸다. 우리는 더 값이 싸고 ‘하얘서 보기 좋다’는 말에 휘둘린 채, 어느새 ‘숲에서 살던 나무하고 가까운 숨결’인 누런종이하고 멀어진 오늘이 되었구나 싶다. 2007.5.1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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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그냥 : 어제 두 분한테 연필을 두 자루 빌려주었는데 못 받은 줄 아침에 깨닫다. 연필을 쓰려고 찾는데 여기도 저기도 없네. 그렇지만 여러 주머니에 연필을 늘 잔뜩 챙겨서 다니기에 두 자루를 돌려받지 못했어도 걱정이 없다. 내 손에서 사랑을 받던 연필은 어느 이웃 손으로 건너가서 새롭게 사랑을 받겠지. 앞으로 새로운 연필이 나한테 찾아올 테니, 내 연필을 그냥 가져간 분이 있더라도 좋다. 내 연필을 그냥 가져간 분은 어쩌면 깜빡 잊었을 테고, 어쩌면 글힘을 얻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내가 쓰던 연필을 이웃님한테 슬쩍슬쩍 드리고서 잊은 척해 볼까 싶기도 하다. 나야 새 연필을 장만하면 그만이니까. 내 곁에서 글힘이며 글사랑을 받은 연필이 고루고루 퍼지면, 글쓰기란 언제나 즐거운 놀이요 살림이자 사랑이라는 기운이 씨앗처럼 차츰차츰 퍼질는지 모른다. 2019.10.1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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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했으니 : 어제 했으니 오늘은 잊거나 미룬다면, 오늘은 ‘죽은날’이 되기를 바라는 셈일까. 어제 하던 길을 오늘은 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쳇바퀴에 뒷걸음이 되기를 꿈꾸는 판일까.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인 줄 스스로 알아차리면서 날마다 번쩍 눈을 뜨는 기쁨을 누린 그때부터 신나게 새로 하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어제 한 멋진 길을 오늘은 새롭게, 어제 지은 아름다운 길을 오늘은 사랑스럽게, 어제 걸은 즐거운 길을 오늘은 휘파람을 불면서 늘 처음이라는 마음이 되어 하면 넉넉하다. 1993.12.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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