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평화로 어깨동무를



  대통령 곁에서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퍽 오랫동안 온갖 곳에서 이녁 밥그릇을 챙기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는 듯하던 그들 몸짓도 하나씩 속살을 드러냅니다.


  다만 아직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얼마나 오래 빼돌렸는지는 다 알아내기 어려울 수 있어요. 이들 말고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권력자 자리나 둘레에 서면서 나랏돈을 몰래 빼냈는가까지 찾아내기는 힘들 수 있어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권력은 사람들을 짓밟거나 억누르면서 이녁 밥그릇을 챙기라고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보살필 줄 아는 따사롭고 아름다운 마음이 되라고 하는 자리가 대통령이나 정치 권력 자리예요.


  이 권력자 자리나 둘레에 서면서 얄궂고 바보스러우면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가 책 한 권이 떠오릅니다. 하승수 님이 쓴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한티재,2015)입니다. 이 책은 온 나라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기본살림’을 할 수 있을 때에 나라가 평화로우면서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일자리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원전을 많이 지어 그곳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처리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대량살상 무기를 더 만들어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사회가 더 불평등해져서 범죄율이 늘어나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교도소도 더 지어야 하고 교도소를 지킬 사람들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79쪽)


  하승수 님은 ‘일자리 만들기’나 ‘일자리 늘리기’는 부질없는 몸짓이 되기 일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핵발전소를 자꾸 지어서 ‘핵발전소 일자리’를 늘리는 일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참다운 일자리를 늘리려 한다면 ‘일자리 갯수’가 아니라 ‘즐겁게 일하면서 즐겁게 돈을 벌어 즐겁게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똑같은 돈을 들이더라도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가 아니라 ‘마을 자가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길에 돈을 들이면 훨씬 더 많은 ‘일자리 늘리기’를 이룰 수 있습니다. 깨끗한 전기를 마을마다 스스로 지어서 쓰도록 하면 먼 앞날을 내다보아도 훨씬 돈을 아끼면서 즐거운 나라가 될 만합니다.


  토목건축을 자꾸 일삼으면서 토목건축 일자리를 늘리는 몸짓도 썩 도움이 되지 않겠지요. 시멘트로 뭔가를 뚝딱거리는 일자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손으로 마을과 나라를 더욱 아름답고 튼튼하며 알차게 가꾸도록 하는 일자리가 되어야지 싶어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낭비되는 공적인 재원들이 너무 많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불필요한 도로를 닦고, 건물을 짓고, 댐을 건설하고, 온갖 부패로 찌든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데 낭비되는 돈이 너무 많다. 이 돈만 줄여도 기본소득을 지급할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종 토건사업에 쓰는 예산이 1년에 40조 원 정도 된다. (117쪽)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정치’가 아닌 ‘권력’으로 여겨서 ‘사람들이 피땀 흘려 모은 돈(세금)’을 제 밥그릇을 채우는 데에 쓴 사람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을 빼돌립니다. 이뿐 아니라 엉뚱한 곳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도록 이끌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살펴본다면 ‘나라(정부)에 돈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에 돈이 없다기보다 ‘나라에 있는 돈을 제대로 된 곳에 슬기롭게 못 쓴다’고 해야 옳구나 싶어요.


  하승수 님이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작은 책에서 밝히는 기본소득은 꿈 같은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아요. 틀림없이 이룰 만하리라 느껴요. 하승수 님은 처음에는 ‘시골사람(농부와 귀촌인)’한테 먼저 기본소득을 펼치고, 이윽고 온 나라 누구한테나 기본소득을 펼치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를 헤아려 보면 아직도 크게 줄어드는 농어민 인구예요. 이러다가는 머잖아 시골사람은 거의 다 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들이 보람을 느끼도록 하고, 시골로 돌아가서 흙을 만지려는 이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도록 누구보다 먼저 이들한테 기본소득을 펼쳐야 한다고 밝힙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조건 없이 65세 이상에게 매월 기초연금 2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일종의 노인기본소득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도 기본소득은 언제든지 기득권 정치세력의 의제가 될 수 있다. 물론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은 진정성 없이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믿을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결국 공약을 스스로 어겼다. (20쪽)


  기본소득을 더 살펴본다면, 온 나라 사람이 다달이 40만 원쯤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이 돈은 그리 큰 돈은 아니지만, 이 돈은 틀림없이 기본살림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느껴요. 두 집 식구라면 80만 원, 세 집 식구라면 120만 원이 되겠지요.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은 기본살림을 ‘한국에서 이 돈으로 살림을 이루려고 쓸’ 테니 저절로 ‘내수시장을 살리는 길’이 됩니다.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이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쓸 일이란 거의 없을 테니까요.


  더구나 기본소득을 받아서 살림에 보태는 이들은 ‘먼 곳으로 가서 돈을 쓰지’ 않아요. 바로 ‘우리 마을에서 우리 이웃 가게’에 돈을 써요. 저절로 ‘내수(나라살림)’뿐 아니라 마을살림을 북돋우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기본소득으로 쓴 돈은 다시 나라살림(세금)으로 돌아갈 테고요.


  간추려 본다면, 기본소득은 정치권력이 나랏돈을 엉뚱한 데에 퍼붓지 않도록 막는 구실을 한다고 할 만합니다. 나라살림을 복지와 평화와 민주와 평등에 기울이도록 이끄는 몫을 맡는 기본소득이라고 할 만하겠지요. 이 기본소득을 하루빨리 나라정책으로 펼친다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할 까닭이 없어요.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터무니없는 저임금과 차별이 판치는 곳’이 바뀔 수 있어요. 기본소득이 없는 터라 적잖은 이들은 터무니없는 저임금과 차별을 말없이 참거든요. 기본소득이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한숨을 놓을 만하고, 이때에 기업이나 사업장이나 공장에서도 ‘노동자 기본권리를 제대로 지켜야’ 하는 줄 깨달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가사노동, 돌봄노동 같은 말을 쓴다.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도 임금을 받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여전히 많다. 자기 집의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 자기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일’을 하고 있다. (78쪽)


  기본소득은 ‘집에서 조용히 집안일’을 하던 이들한테 ‘집안일을 하는 보람’을 느끼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틀림없이 늘 일을 하지만 ‘일하는 사람 대접’을 제대로 못 누리는 ‘집지기’도 당차고 의젓한 일꾼이라는 대목을 잊지 말아야 해요.


  평화로 어깨동무하고, 평등으로 손을 잡기를 빕니다. 사람들 손에서 비롯한 나랏돈이 사람들 손으로 돌아와서 마을을 두루 돌 때에 아름다운 평화와 평등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016.11.3.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맛있게 먹는 밥 한 그릇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밥을 맛있게 먹으면 맛있습니다. 삶을 즐겁게 누리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삶을 즐겁게 누리면 즐겁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웃을 사랑하려 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말장난 같으나, 참말 이와 같은 삶 얼거리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묻기만 해서는 실마리를 못 찾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스스로 수수께끼를 내고는 이 실마리를 따라서 나아가야 비로소 실마리를 엽니다.


  삶이 따분하거나 고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따분한 삶하고 고단한 삶을 끌어들인다고 할 만합니다. 삶이 재미있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은 재미와 아름다움을 늘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만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스스로 삶을 짓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어떻고 터전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나중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웃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웃고, 우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울거든요. 돈이 많은 어버이를 두어야 아이들이 웃지 않아요. 웃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이 웃어요. 돈이 없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이 울지 않아요. 우는 어버이를 둔 아이들이 울어요.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 이제는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스스로 밥을 맛있게 짓고, 맛있게 차리며, 맛있게 수저를 들면, 우리 밥상은 언제나 맛있습니다. 남이 차려 주기에 맛있는 밥이 아닙니다. 비싼 밥을 바깥에서 사다가 먹으니 맛있는 밥이 아닙니다. 스스로 삶을 즐겁게 다스리면서 기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하루가 될 때에 비로소 맛있는 밥을 먹어요. 편의점 도시락이든 집밥이든 호텔 밥이든 모두 같아요.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밥맛이 바뀌어요.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리며 사는 틈틈이 《치킨로드》(책과함께,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쓴 앤드루 롤러 님은 ‘닭’ 아닌 ‘닭고기’가 어떻게 수백 억 마리나 우글거리면서 지구별 곳곳을 넘나드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합니다. 오늘날 지구별에서 사람들은 닭을 얼마나 괴롭히면서 고기하고 알을 얻는가 같은 뒷얘기도 파헤치고, 먼먼 옛날부터 지구별 여러 나라와 겨레에서 닭이라는 짐승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닭은 고대 이집트에서 희귀하고 신분 높은 새였는데, 이 사실은 192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54쪽).”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요즈음 들어서야 비로소 알려졌을까요? 아마 그러할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집트라는 나라에서는 예부터 닭이 ‘희귀하고 신분 높은 새’인 줄 잘 알았을 테지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잘 몰랐어도 말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도 닭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어요. 아시아 여러 나라도 닭을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았지요. 평화를 사랑하는 수수한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닭을 비롯해 돼지도 소도 말도 다른 모든 짐승도 함부로 다루거나 아무렇게나 부리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조촐히 살림을 지으면서 수수하게 삶을 가꾸던 사람들은 닭을 비롯한 모든 짐승을 알뜰히 보살피고 고이 돌보았어요.


  닭이 낳는 알 하나를 고맙게 받아들였고, 닭 한 마리를 오래오래 키웠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까도록 했습니다. 어미 닭이 지낼 둥우리를 사람들이 정갈하게 엮어 주었고, 살림집하고 닭우리는 한울타리에 깃들었어요. 추운 겨울에는 사람하고 닭이 한지붕 밑에서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이 섬(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거대한 석상을 조각하지 않을 때에는 곡식을 재배하고 닭을 돌보는 정교한 방식에 따라 닭장을 지은 듯하다. 수백 개에 달하는 닭장이 섬 전체에 퍼져 있다. 이 닭장은 빈틈없이 쌓아올린 돌무더기인데, 닭장마다 돌문이 달린 자그마한 입구가 있다(109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닭을 알뜰히 돌보던 겨레는 모두 평화롭습니다. 닭을 고이 보살피던 수수한 사람들은 전쟁무기 따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는 닭을 공장이나 감옥 같은 곳에 잔뜩 가두어서 달포도 채 안 되는 동안에 ‘고기닭’으로 살찌워서 내다 팔아요. ‘공장 축산’이 널리 퍼진 오늘날 산업 선진국마다 군대와 전쟁무기가 어마어마하며, 산업 선진국(과 산업 후진국) 어디나 군대와 전쟁무기를 없앨 뜻이 없어 보입니다. 평화로 나아가지 않는 모든 나라는 고기닭도 고기돼지도 고기소도 아주 끔찍한 곳에서 무시무시하게 ‘뽑아’냅니다.


  닭 한 마리를 알뜰히 아끼면서 돌보던 지난날에는 닭 한 마리가 열 해도 살고 스무 해도 살았습니다. 이무렵에는 고기 한 점을 함부로 먹지 않았어요. 고기 한 점을 아주 고맙게 먹었을 뿐 아니라, 기쁘게 먹었지요. 오늘날에는 수수한 평화가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고기를 날마다 먹어’도 고마움이나 기쁨을 느끼거나 누리는 사람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른바 채식이냐 육식이냐는 대수롭지 않아요. 아시아를 이룬 수수한 시골마을 시골사람이 키운 짐승은 모두 ‘풀을 먹고 자랐’습니다. 풀을 먹고 자란 짐승 살점은 ‘고기’라 하지만, 막상 이 집짐승 살점은 ‘풀로 이루어졌’어요. 수수한 시골마을 시골사람이 고기를 먹을 적에는 그냥 풀을 먹는 삶하고 같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는 ‘닭도 돼지도 소도’ 풀을 못 먹어요. 오직 사료와 항생제와 촉진제만 먹는 오늘날 ‘고기짐승’입니다. 고이 사랑스레 가꾸어 고맙고 반가운 밥(풀이든 고기이든)을 누리는 삶이 사라지면서, 오직 돈으로 재거나 따지는 문명과 문화예요.


  “오늘날의 양계 산업은 예전에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규모와 범위로 실험을 하고 있다. 오염된 수로, 노동자에게 위험한 환경, 식품 안전에 관한 우려, 형편없는 동물 복지 문제 등은 활기찬 국제무역의 그림자 속에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399쪽).” 같은 이야기는 미국과 유럽과 한국 모두 똑같다고 할 만합니다. 아름다움이 사라지면서 산업이 되고, 사랑스러움이 사라지면서 문명이 됩니다. 기쁨이 사라지면서 경제발전이 되고, 즐거움이 사라지면서 현대사회가 됩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차려서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밥상을 누리는 자리에서 늘 스스로 묻습니다. 오늘 하루도 맛있는 밥인가? 오늘 하루도 기쁜 밥인가? 오늘 하루도 노래하는 밥인가? 오늘 하루도 웃음잔치 같은 밥인가? 이 물음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면 언제나 맛있는 밥입니다. 이 물음에 스스로 고개를 젓는다면 아무래도 맛없는 밥이 되고 맙니다. 언제나 나 하기에 달린 일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삶이요 하루입니다. 4348.12.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마음속에 빚은 그림처럼 사랑해



  언젠가 ‘우리는 모두 잊혀진 하느님이다’ 하고 외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었어요. 더없이 마땅한 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뭔가 아리송했어요. 아니, 이 말대로 우리가 모두 잊혀진 하느님인 줄 알았다면, 이 말을 예전부터 알았다면, 나는 왜 스스로 ‘아름다운 하느님’으로서 ‘아름다운 하느님’답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잇달았어요. 골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거나 시샘을 하거나 거친 말을 한다면, 이때에 나는 스스로 ‘하느님 아닌 바보스러운 몸짓’을 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잊혀진 하느님이다’ 하고 외치는 말을 들을 적까지 나는 이 말을 제대로 몰랐을 뿐 아니라 제대로 헤아린 일조차 없는 셈입니다. 너하고 내가 다른 목숨이 아니요, 너만 아름답거나 나만 아름답지 않은 줄 안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정작 삶이 어떻게 흐르고 사랑이 어떻게 피어나는가를 조금도 모른 셈이지요.


  가을이 저물며 새삼스레 겨울이 찾아옵니다. 새삼스레 겨울이 찾아오면 마당 한쪽 동백나무는 새삼스레 꽃봉오리를 터뜨리려고 합니다. 이무렵 마당 한복판 후박나무도 봉오리를 야물게 맺어요. 다만. 동백나무는 겨울 한복판에 꽃송이를 하나씩 터뜨린 뒤에 봄에 흐드러지고, 후박나무는 봄에도 봉오리를 단단히 웅크리다가 여름으로 접어들려고 할 즈음부터 한꺼번에 꽃하고 새 잎을 터뜨리지요. 오늘은 터질까 모레에는 맺힐까 하고 두근두근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비로소 새 꽃하고 잎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맞아요. 바로 이 얼굴. 코는 킁 하고 바짝 치켜 올라가고, 눈은 반짝반짝 빛나며, 엷은 주근깨로 뒤덮인 장난기 가득한 얼굴! 이 얼굴을 보면 기쁨이 몰려와요. 왜냐하면 이제부터 평소와 다른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거든요(10쪽).” 하고 첫머리를 여는 《달라도 친구잖아!》(개암나무,2012)라는 어린이문학을 읽으며 새로운 철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책을 쓴 다카도노 호코 님은 그림을 그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살며시 풀어냅니다. 그림쟁이는 빈둥빈둥 노는 게으름뱅이일까요? 그림쟁이처럼 글쟁이나 사진쟁이는 ‘먹고사는 일’에는 어수룩한 어리보기일까요?


  가만히 돌아보면 어린이는 어른하고 여러모로 다릅니다. 어린이는 어른처럼 바깥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하는 일은 놀이예요. 어른이 보기에 아무것이 아니라 할 만한 것을 장난감으로 삼고, 어른이 보기에 아무것도 안 하는 듯하더라도 모두 놀이로 누립니다.


  어른은 빨래나 걸레질이나 설거지나 밥하기 같은 집안일을 모두 일로 여깁니다. 어른은 논일이나 밭일이나 바깥일(회사나 공장이나 일터에서 일삯을 받고 하는 일)을 모두 일로만 여깁니다. 참말 어른은 늘 ‘일’투성이예요. 이와 달리 어린이는 늘 ‘소꿉’투성이입니다. 어린이는 모든 삶을 놀이로 바꾸기에 소꿉이 되고, 어른은 모든 삶을 일로 바꾸기에 그냥 일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린이는 어리보기일까요? 어린이는 게이름뱅이일까요? 어린이는 철부지일까요?


  “누군가가 그림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일이 때때로 있어. 정말 들어가 보고 싶은 멋진 그림인 경우에만 그렇겠지만 말이야(26쪽).”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참으로 아름답게 그린 그림이 있으면 그만 이 그림에 빨려듭니다. 영화 〈메리 포핀스〉를 보면 길바닥에 빚은 그림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대목이 나와요. 그림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여길 만하니 이 그림으로 신나게 들어가서 실컷 논 뒤에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스스로 아름다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아름다이 빚은 그림이기에, 이 그림에 나부터 스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랑스레 생각하면서 스스로 사랑스레 이룬 그림이기에, 그 그림에 너랑 내가 손을 맞잡고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아름다운 꿈에는 나부터 기쁘게 들어갑니다. 내가 지은 아름다운 꿈에 너를 불러서 함께 들어가서 웃습니다. 네가 지은 아름다운 사랑에는 너부터 기쁘게 들어갈 테지요. 네가 지은 아름다운 사랑에 함께 들어가자고 네가 나를 부르니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가서 노래합니다.


  삶이란 웃음하고 노래가 어우러진 잔치라고 느낍니다. 삶에서 웃음하고 노래를 뺀다면 재미도 보람도 없으리라 느낍니다. 삶에 웃음하고 노래가 고이 어우러지면서 춤이 태어나니, 이러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남달리 웃음꽃을 터뜨리고 웃음바다를 펼치리라 느껴요. 웃으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춤추기에 우리 스스로 사랑을 새롭게 지어서 온누리에 아름다운 꿈을 퍼뜨릴 만하다고 느껴요.


  “창문으로 들어온 산들바람과 빛의 타래 속에서 아주 작은 먼지들이 반짝반짝 춤을 추고 있었어요. 정말 말할 수 없이 즐거워 보였어요(61쪽).” 같은 이야기가 흐르면서 《달라도 친구잖아!》라는 어린이문학은 천천히 끝을 맺으려 합니다. 그야말로 티끌이나 먼지라고도 여길 수 있는 조그마한 이야기를 차곡차곡 여미는 이 작은 책에는 산들바람하고 빛타래 같은 노래가 잔잔히 흐릅니다. 물결치거나 너울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산들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거나 구름하고 동무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버이가 아이하고 나누는 사랑은 늘 조그맣다고 여길 만합니다. 대수롭지 않다 싶은 조그마한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와 아이입니다. 작은 사랑에서 작은 꿈을 길어올리고, 작은 꿈에서 작은 삶을 지으면서, 작은 삶으로 작은 웃음을 나누는 작은 살림이라고 할 만해요.


  마음속에 빚은 그림처럼 사랑합니다. 마음속에 지은 그림처럼 노래합니다. 마음속에 아로새긴 그림처럼 꿈꿉니다. 마음속에 씨앗 한 톨로 심은 그림처럼 웃습니다. 마음속에 고요히 깃들어 잠자는 하느님처럼 살아갑니다.


  먼 옛날부터 누구나 그림을 그렸고, 먼 옛날부터 누구나 삶을 지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여느 어버이 누구나 아이한테 사랑스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여느 아이 누구나 여느 어버이한테서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물려받으면서 삶을 새롭게 지었습니다. 책도 없고 인터넷이나 컴퓨터도 없고 사전이나 도서관이 없었어도, 여느 보금자리에서 여느 어버이와 여느 아이는 늘 새로우면서 아기자기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아마 먼 옛날부터 누구나 마음속에 꿈을 씨앗으로 심었기 때문이리라 느껴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는 모두 고운 숨결로 거듭나면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넋으로 마음자리에 새로운 생각을 그렸으리라 느껴요. 4348.12.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삶에 숨결을 베푸는 말 한 마디



  봄에는 봄노래를 듣습니다. 봄노래란 무엇인가 하면 봄에 듣는 노래로, 봄에 찾아오는 제비가 들려주는 노래라든지, 새봄에 새로 깨어난 개구리가 우렁차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봄에 부는 바람도 봄노래를 들려줍니다. 겨울과 다른 바람결이기에 느낌과 결과 무늬가 모두 다른 봄바람입니다.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도 봄노래입니다. 새봄에 깨어나는 겨울눈과 봄꽃을 봄바람이 살랑살랑 간질이는 소리도 봄노래예요.


  철마다 새로운 노래를 듣습니다. 철마다 새로운 목숨이 깨어나니, 언제나 새로우면서 맑은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새로운 철에 새로운 노래를 듣기에 만만하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언제나 똑같이 흐르는 자동차 소리라든지, 텔레비전이나 손전화 소리라든지, 온갖 기계가 내는 소리에 휩싸이다 보면, 철 따라 다른 ‘철소리’나 ‘철노래’하고 멀어질 만합니다.


  시골에서는 밤하늘 별빛을 철마다 새롭게 누릴 수 있습니다. 낮하늘 구름결도 철마다 새롭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더라도 밤하늘이나 낮하늘을 느긋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흙을 쪼면서 들일을 하지 않고, 비닐이나 농약을 만지면서 일을 해야 하면 하늘을 볼 겨를이 없습니다. 기계를 부려서 흙을 갈거나 엎거나 닦자면, 하늘뿐 아니라 밭둑에 돋는 풀꽃을 볼 틈이 없습니다.


  아무리 배기가스나 매연으로 매캐한 도시라 하더라도, 내 마음이 곱게 눈을 뜰 수 있다면, 손바닥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빛과 구름빛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람은 시골에만 불거나 도시에는 안 불지 않습니다. 바람은 지구별을 골고루 어루만집니다. 그러니, 먼 데에서 울리는 봄바람 노랫소리를 도시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제비가 서울 시내로 찾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개구리 노랫소리나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기 어렵다 하더라도, 서울을 둘러싼 숲과 들과 바다와 냇물에서 퍼지는 곱고 보드라운 봄노래에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 가득 넉넉하고 짙푸를 수 있습니다.


  미우치 스즈에 님이 빚은 만화책 《유리가면》(학산문화사,2010) 가운데 열둘째 권을 읽으면, ‘헬렌 켈러’를 다룬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연극이기에 무대에 설 때마다 말(대사)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는데, 설리번 님이 헬렌 켈러한테 ‘말’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외치는 이야기가 있어요.


  만화책에 나오는 연극 무대에서 한 번은 “난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거야! 이 땅의 모든 것을! 언어란 빛에 비추면 오천 년이나 옛날의 것도 볼 수 있단다!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언어 속에 있는 거란다! 단 한 마디의 말로써 넌 그 손으로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게 되는 거야(12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보다가 한참 멎었습니다. 다음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되읽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빛(말빛)’으로 비추면 어제와 오늘이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우리가 알 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말 한 마디’로 갈무리해서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말 한 마디를 터뜨릴 때에 온누리(세계)를 두 손으로 움켜쥘 수 있다는 이야기를 가만히 되씹습니다.


  만화책을 조금 더 읽으면,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 그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이 언어 속에 있는 거야. 언어만 있으면 인간은 암흑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 무덤 속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되는 거란다. 단 한 마디의 언어로, 넌 그 손에 세상을 움켜잡게 되는 거야(152쪽).” 같은 이야기도 흐릅니다. 설리번 님이 헬렌 켈러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앞 대목하고 몇 군데가 다르지만 줄거리는 같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느낌과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을 여는 실마리’가 ‘말 한 마디’에 있다고 밝힙니다. 이러면서, ‘말을 손에 쥔’ 사람은 ‘무덤에 갇히지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말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싱그럽게 삶을 누린다’는 뜻이 됩니다. 말을 하기에 살고, 말을 못 하기에 죽는다고 하겠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바람을 마십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들짐승과 바닷짐승도 바람을 마십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도 바람을 마십니다. 바닷물에 녹아든 바람을 마시지요. 바람이 없으면 뭍짐승뿐 아니라 물짐승 모두 죽습니다. 더욱이 풀과 꽃과 나무도 바람을 마셔야 삽니다. 바람이 없으면 풀과 꽃과 나무도 몽땅 죽습니다.


  바람이 있기에 지구별이 푸르다고 할 만합니다. 바람이 있으니 하늘과 바다가 파랗다고 할 만합니다. 바람은 이 지구별에 푸르면서 파란 숨결로 흐릅니다. 사람을 비롯한 뭇목숨은 바람을 맞아들이면서 온몸을 푸르면서 파란 넋으로 가꿉니다.


  몸을 살리는 숨결이 바람이라고 한다면, 마음을 살리는 숨결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몸이 새롭게 거듭난다면, 말을 먹고 나누면서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다고 느낍니다.


  말이 있기에 생각을 짓습니다. 말이 있어서 생각을 마음에 심습니다. 말이 있으니 생각을 마음에 심어서 삶을 이룹니다. 말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마음에 심어 삶을 이룬 사람이 사랑을 꽃피워 아름답게 하루를 누립니다.


  만화책 《유리가면》은 연극을 하는 삶길을 걷는 두 아이가 나오는 줄거리를 보여줍니다.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마야)는 ‘보랏빛 장미로 찾아오는 사람’을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보랏빛 장미로 찾아오는 사람’도 마야라고 하는 수수한 아이를 마음으로 넓게 사랑합니다. 연극을 이루는 바탕은 ‘말’과 ‘말로 지은 몸짓’입니다. 사랑을 잇는 끈은 ‘마음’과 ‘마음을 담은 말’입니다.


  우리가 읽는 책은 ‘글을 종이에 얹어서 빚’습니다. 글이란 ‘말을 옮긴 그릇’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말을 읽는다’는 셈이요, 말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삶을 갈무리하고 아우른 이야기’를 ‘말빛’으로 비추어서 스스로 받아먹는 셈입니다. 책읽기는 글읽기이면서 말읽기요, 말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삶읽기는 생각읽기나 마음읽기나 사랑읽기입니다.


  바람이 있기에 모든 목숨이 숨을 쉬면서 새롭게 하루를 맞이합니다. 말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눈을 뜨면서 귀를 열고 머리를 가꿉니다. 말 한 마디로 생각을 지어서 온누리에 아름다운 삶이 드리우도록 북돋웁니다. 바람 한 줄기가 흐르는 봄날에, 말 한 마디를 새삼스레 읊습니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양물감 2015-05-10 06:22   좋아요 0 | URL
유리가면 참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어요. 일본드라마로 보았는데 배우들도 멋졌구요. 곱씹을만한 대사들이 많은것같아요

숲노래 2015-05-10 06:29   좋아요 1 | URL
요새 천천히 첫 권부터 다시 읽으면서
그동안 미뤄둔
`1권부터 모든 낱권책에 느낌글 쓰기`를 해 봅니다 ^^;;

낱권마다 하나씩 느낌글을 붙일 만한
멋진 작품이라고 느껴요~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동이 트는 새벽에



  요즈막에 우리 집 작은아이가 새벽 다섯 시부터 잠에서 깹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노는 아이라서 이처럼 시골스럽게 새벽 일찍 일어나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겨울에는 새벽 여섯 시나 아침 일곱 시에도 일어났고, 때로는 아침 여덟 시 즈음에 일어나기도 한 다섯 살 작은아이인데, 나날이 동이 일찍 트니, 이러한 결에 맞추어 아주 일찍 잠을 깨는구나 싶습니다.


  일찌감치 잠이 깨는 아이를 다시 재우지 못합니다. 다섯 살 아이한테 ‘너무 일찍 일어났구나. 쑥쑥 크고 튼튼하게 자라려면 잠을 더 자야지’ 하고 이야기를 한들, 이 아이는 이 말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니, 곰곰이 따지면, 시골스러운 아이는 동이 트는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놀고, 낮에 한두 시간 즈음 실컷 낮잠을 누린 뒤, 저녁밥을 먹고 별빛과 함께 잠들면 될 만하구나 싶습니다. 새벽 일찍 깨는 만큼 저녁 일찍 잠들 테니까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아이들은 누구나 ‘오늘’을 삽니다. 아이들은 먼 ‘앞날’을 바라보면서 자란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이 앞날(모레)로 나아가려면 바로 이곳에서 오늘 즐겁게 뛰놀고 기쁘게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오늘 맛난 밥을 먹고 개구지게 뒹굴면서 하하호호 노래잔치와 웃음꽃을 누려야 합니다.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4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빙그레 웃음짓습니다. 이 말은 거의 옳지만, 한 군데에서 안 옳습니다. 어느 대목이 안 옳은가 하면, 아이들은 ‘1000년에 걸쳐’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1000년이 아니라 10만 해나 100만 해, 아니 맨 처음부터 늘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웠어요. 고작 1000년이라는 틀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아이를 지켜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한테도 이 사람을 낳은 어버이가 있습니다. 아주 마땅히 둘레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구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작은 집안(핵가족)’을 이룬 지 얼마 안 됩니다. 지구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작은 집안’을 이룰 즈음부터 마을이 무너졌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가 커지는 곳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마을 이야기’가 사라집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예술가와 작가와 전문가와 교사 같은 사람들이 따로 생깁니다. ‘큰 집안’이었고 ‘오순도순 복작거리는 마을’이 있을 적에는 따로 예술가나 작가나 전문가나 교사가 없었어도, 모든 어른이 다 함께 예술가였고 작가였으며 전문가인데다가 교사였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모든 어버이는 예술가이면서 교사요, 작가이면서 전문가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더라도 아이들은 언제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늘 배웁니다. 학교에서는 교사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고, 집에서는 어버이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지요. 마을에서는 마을 이웃이라고 하는 어른 둘레에서 배워요.


  교사자격증이 있는 사람도 교사이지만, 여느 어른도 누구나 교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이녁 삶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낱낱이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지 않는 어른들 누구나 아이 앞에서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노릇이요, ‘아무 짓이나 섣불리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루를 짓고 누리는 착하고 참다운 사람으로 설 노릇이에요.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140쪽).”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날 사회와 학교에서는 ‘주의력 결핍’이라든지 ‘선천성 장애’ 같은 이름을 아이들한테 함부로 붙입니다. 아이들이 왜 떠돌거나 아프거나 힘겨운가를 살펴서, 아이들이 웃음을 되찾고 기쁘게 놀 수 있는 터전으로 사회와 학교를 바로세우기보다는 자꾸 땜질 같은 처방만 합니다.


  제도나 정책이 없어서 아이들이 아프지 않습니다. 지원금이나 복지기금이 모자라서 아이들이 힘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힘들다면, 사랑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는 마땅히 보육정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만, 아이들을 참답게 사랑하려는 슬기로운 숨결이 없이 정책만 바라본다면, 아이들은 외롭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비싼 옷이나 밥이나 집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진 장난감이나 놀잇감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제 어버이한테 오직 하나, ‘사랑’을 바랍니다. 모든 아이는 언제나 ‘사랑’을 받아서 ‘꿈’을 스스로 키워서 가꾸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효과적인 육아법을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적인 통찰이나 이론, 사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이다(193쪽).”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육아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돌보지 않습니다. 교수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돌봅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가르칩니다. 사랑이어야 밥을 맛있게 짓습니다. 사랑이어야 글을 아름답게 씁니다. 사랑이어야 장사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이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마을살림을 멋지게 가꿉니다.


  천천히 날이 밝아 아침입니다. 밤새 벼락을 이끌고 퍼붓던 비가 그칩니다. 비와 바람과 벼락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쿵쿵 울릴 때마다 우리 집도 쩌렁쩌렁 흔들렸습니다. 마을 가까이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졌구나 싶습니다. 땅에 벼락이 떨어지면 가까운 곳도 땅이 흔들흔들 울리는구나 하고 새롭게 느낍니다. 마당에는 밤새 떨어진 나뭇잎이 수북합니다. 네 철 언제나 푸른 후박나무는 봄마다 가랑잎을 떨구면서 새 잎이 돋습니다. 날마다 쓸고 또 쓸어도 여름이 될 때까지 다시 쓸고 거듭 쓸어야 합니다. 사랑스럽게 자라는 아이들도 날마다 사랑을 받고 거듭 받으면서 이튿날에 또 새롭게 사랑을 기다리리라 느낍니다. 어버이는 날마다 사랑을 길어올리는 사람이요, 아이는 날마다 사랑을 찾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밝은 햇살이 차츰 퍼집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천천히 드리웁니다. 처마 밑에서 제비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짓습니다. 아침을 함께 먹고 오늘 하루도 새로운 웃음으로 신나게 놀자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제 놀이’를 잊고 ‘오늘 놀이’를 야무지게 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