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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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03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순천 할머니 스무 사람

 남해의봄날

 2019.2.1.



하루는 남편이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붙잡아 나는 한 달 동안 뼈빠지게 일하고 왔는데 헛짓거리 하고 있었냐고 했더니 남편은 화를 못 이기고 연탄을 들고 와 나한테 던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연탄에 맞아 걷지를 못했습니다. (31쪽/안안심)


엄마는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습니다. 나는 동생을 업고 젖을 먹이러 다녔습니다. 쌀을 씹어 죽을 끓여 먹이기도 했습니다. 누덕바지로 만든 기저귀에 오줌을 싸서 내 등이 다 젖었습니다. (79쪽/하순자)


남편은 자기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어 밥상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을 새로 안 사고 석 달 동안 땅바닥에 밥을 줬더니 그 뒤로는 상을 안 엎었습니다. (127쪽/김영분)


나는 큰아들이 기특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흙이 너와 잘 맞는 것 같다고 흙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라고 했습니다. (143쪽/권정자)



  오늘 마을에서 마주하는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는 아닙니다. 어느덧 아흔 여든 일흔이란 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도 서른 살이나 스무 살 젊은이였던 나날이 있고, 열대여섯 살 푸른 나날이 있었으며, 예닐곱 살 어린 나날이 있었어요. 어린 나날이나 푸른 나날은 어느덧 지나갔고, 젊은 나이도 지나갔으며, 늘그막을 오래오래 보낼 뿐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 여든 살 할머니가 스무 살 젊은이였던 예순 해 앞서는 1960년대요, 오늘 아흔 살 할머니가 열 살 어린이였던 여든 해 앞서는 1940년대예요. 그무렵에는 어떤 젊거나 어린 하루를 누렸을까요. 그무렵 그분들 어머니나 아버지는 어떤 어른스러움을 보여주었을까요.


  순천에서 늘그막을 누리는 할머니 스무 사람이 쓴 글하고 그린 그림으로 엮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순천 할머니 스무 사람, 남해의봄날, 2019)를 읽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할머니마다 떠올리는 어리거나 젊은 날이 매우 모질거나 아프거나 슬픕니다. 툭하면 맞고, 거친 말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고단하거나 괴롭거나 힘든 나날입니다. 둘째, 모두 시골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인데 이 책에 흐르는 글은 모조리 서울 표준말입니다. 매우 아리송했습니다. 시골말로 살아온 시골 할머니가 왜 서울 표준말로 글을 썼지? 스무 할머니는 스무 가지로 다른 삶길을 걸어왔는데, 서울 표준말에 ‘갇힌’ 글은 다 다른 할머니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삶을 맞닥뜨리면서 헤쳐내거나 이겨내거나 받아들이면서 삭인 숱한 눈물이며 멍울이며 생채기이며 고름이며 앙금을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어렵지 싶더군요.


  이 책이 안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무 할머니 살아온 이야기는 매우 애틋합니다. 더구나 지난날을 미움으로 그리지 않아요. 맞든 거친말을 듣든 언제나 가로막혀서 힘겨워야 했든, 할머니는 어리거나 젊은 나날부터 조용조용 한 걸음씩 내딛었습니다. 이녁 아이들은 ‘이녁이 겪은 짓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매우 크셨지 싶습니다. 이녁 아이들을 어떤 사랑으로 돌보고 아꼈는가를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늘그막에 비로소 한글을 깨치고서 스스로 이녁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도 느낄 만합니다.


  전라남도 한켠에서 벌써 열 해 넘게 나오는 잡지 〈전라도닷컴〉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펴면 시골 할매 할배 삶이 시골말 그대로 흐릅니다. 시골 할매 할배가 읊는 말을 굳이 서울말로 바꾸지 않습니다. 곡성 할매라면 곡성말대로, 화순 할매라면 화순말로, 담양 할매라면 담양말로, 부안 할매라면 부안말대로 담더군요.


  시골 할매한테 한글을 가르칠 적에 서울말을 바탕으로 가르치기보다는 할머니마다 어릴 적에 듣고 자란 말씨를 가만가만 받아들여서 그 말씨를 할머니 스스로 그 시골말로, 삶말로, 오랜말로, 사랑이며 아픔이며 이야기가 서린 그 고장말로 나타내도록 북돋우면 한결 좋았으리라 생각해요.


  이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는 빛깔펜으로 담은 그림만 담았는데, 할머니가 연필로 담은 그림이 있는지 궁금해요. 갖은 빛깔을 그야말로 곱게 살려서 빚는 그림이 참으로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연필로도 온갖 빛깔을 나타낼 수 있어요. 때로는 연필로 할머니 이녁 삶이며 눈길을 한결 수수하고 투박하지만 더욱 짙게 나타낼 수 있기도 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자꾸자꾸 이 생각이 들어요. 시골 할매한테 시골말이 ‘자랑스럽다기보다 사랑스럽다’는 대목을 일깨워 주면 좋겠어요. 빛깔펜으로 빚는 그림도 고운데 ‘연필로 사각사각 찬찬히 빚는 그림도 사랑스럽다’는 대목을 넌지시 짚어 주면 좋겠어요. 시골말로 삶을 노래하고, 시골스러운 빛으로 하루를 나누는 새로운 책을 기다립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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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촛불 - 손석춘 칼럼집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4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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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02


《흔들리는 촛불》

 손석춘

 철수와영희

 2019.10.24.



판결문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다시 정색을 하며 묻는다. 항소심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판결문 앞에서 결국 ‘사실이 밝혀졌다’고 정정보도를 냈어야 옳았는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 기자들은 판결이 있고 나서야 인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24쪽)


저 대통령들은 자살하는 사람들, 그 국민들에게 누구였을까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국민을 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보통사람의 시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국민성공시대를 각각 부르댔지요. (39쪽)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할수록, 뉴스 생산구조가 민주적일수록, 그래서 민중이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며 여론을 형성할수록 선거에서 보편적 복지를 공약하는 정당이 집권한다는 원칙을 도출해낼 수 있다. (71쪽)


현장 노동자와 공사 사이에 소통은 없었다. 중간에 외주업체가 있어서다. 현장의 두 사람은 경주 지진으로 지연된 고속열차가 그 시각에 지나간다는 통보를 받지 못했다. (89쪽)


단적으로 묻고 싶다. 왜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가. 고 노무현 대통령 재직 때 ‘인사 폭’을 넓히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성심을 다해 돕고자 한 이들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도 적잖았다. (123쪽)



  한밤에 바라보는 별은 초롱초롱합니다. 별은 가만히 있지 않아요. 언제나 반짝입니다. 밤마다 별을 바라보다가 ‘초롱’이란 말을 문득 혀에 얹고 생각합니다. ‘초롱’은 촛불에서 비롯한 낱말입니다. 별을 볼 때뿐 아니라 초(촛불)를 볼 적에도 둘레를 밝히는 빛살을 느낄 수 있어요. 별은 온누리를 가르면서 퍼지는 빛줄기라면, 초는 둘레를 밝히는 빛줄기라 할 만합니다. 이 밝음, 이 환함은, 눈망울처럼 밝고 샘물처럼 맑은 기운으로 뻗어요. 별빛을 담고 촛불빛을 안는 마음이 된다면 어둠을 사르면서 곧고 곱게 나아가는 기운이 되지 싶습니다.


  《흔들리는 촛불》(손석춘, 철수와영희, 2019)은 흔들리되 흔들리지 않는 길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바른길보다 바르지 않은 길로 기우뚱했던 정치하고 사회하고 언론에 얽힌 이야기를 짚으려 합니다.


  글쓴님이 짚기도 합니다만, 신문이며 방송이며 돈에 맞추어 흘러온 자국이 참으로 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푼푼이 모아서 나누는 돈이 아닌, 몇몇 기업이나 기관(또는 정부)이 광고삯 이름으로 건네는 돈에 맞추어 흘러왔다고 할 만합니다. 신문·방송은 오래도록 짬짜미로 움직였고, 기업하고 기관(또는 정부)은 넉넉히 건넨 광고삯 도움을 톡톡히 입으면서 썩 바르지 않은 길을 나란히 걸은 셈이로구나 싶어요.


  광고가 나쁠 일도, 신문이며 방송이 나쁠 까닭도, 기업하고 기관(또는 정부)가 나쁠 길도 없습니다. 다만, 뒷길이 아닌 앞길을 갈 노릇입니다. 뒷자리 짬짜미가 아닌 앞자리 어깨동무를 할 일입니다. 닫힌 사슬이 아닌 열린 마당이 되도록 슬기를 모을 노릇입니다. 반듯하게 일하는 사람이 손가락질을 받을 까닭이 없어요.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쁠 까닭도 없어요. 아름답고 알찬 일꾼은 어디에나 있으나, 이 아름답고 알찬 일꾼이며 이웃을 바라보지 않거나 품지 않는 신문이며 방송이며 기업이며 기관으로 가기만 한다면, 이때에 촛불은 다시 밀물결이 되겠지요. 어쩌면 촛불물결이 다시 일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주저앉을 수 있을 테고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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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과 취향 - 철학의 현장에서 기록한 불화의 목소리
김영건 지음 / 최측의농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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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9


《변명과 취향》

 김영건 

 최측의농간

 2019.9.5.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며, 답답하고 추상적인 논리 풀이나 말장난도 아니다. (17쪽)


나는 우리의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 나는 외국어가 주인이 되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우리말로 된 철학을 하고 싶다. (23쪽)


이런 멋부리는 문장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준다면 그것은 괜찮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종류의 문장은 우리 자유를 몽롱하고 멍청하게 만든다. (80쪽)


도道라는 한자어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획득하는 데 반하여 도道의 우리말 표현인 ‘길’은 심오한 의미가 없는 사소한 일상어로서 낮게 취급된다. 그냥 ‘생각’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사고思考’라는 한자어로 표현한다. ‘나’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자아自我’라고 표현한다. (189쪽)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학문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354쪽)



  한국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역사를 살피면, 한국은 꽤 옛날부터 일본에 이것저것 이어주거나 물려주거나 알려주곤 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가장 가까이에 한국이 있는 터라 으레 한국한테서 얻거나 받거나 배우는 살림이었다고 해요. 요새야 비행기나 인터넷이 있으니 나라하고 나라 사이가 훨씬 가깝다지만, 예전에는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일본은 옛날부터 한국말을 배우는 사람이 무척 많았고, 한국말을 일본말로 옮기는 일을 참으로 오랫동안 했답니다.


  오늘날은 어떠할까요? 오늘날 일본은 한국 문학이나 문화나 과학을 얼마나 받아들이거나 배우는 길일까요? 어쩌면 오늘날 일본은 한국한테서 배우는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나요? 거꾸로 오늘날 한국은 거의 일본 것을 옮기거나 배우는 길이 되지 않았을까요?


  책만 놓고 보아도 일본 문학책이며 그림책이며 만화책이며 인문책이며 과학책이며 …… 갖은 책을 엄청나게 한국말로 옮깁니다. 이제는 한국이 일본한테서 배우는 때라고 할까요? 밉거나 못된 짓을 많이 한 옆나라인 일본이라지만,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더 나아가거나 뻗는 길을 제대로 갈고닦지 못했다고 여겨야지 싶어요.


  《변명과 취향》(김영건, 최측의농간, 2019)을 읽으며 ‘철학자가 늘 부대껴야 하는 근심걱정’을 낱낱이 읽습니다. 틀림없이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말’을 쓴다고 하지만, 무늬로만 한글이기 일쑤라지요. 요새는 한자말을 한자로 새까맣게 쓰는 사람이 없다시피 합니다. 한자말이건 영어이건 그냥 한글로 적습니다. 그런데 철학이란 자리에서 본다면 ‘무늬만 한글’로는 깊거나 넓게 파고들기 어려워요. 한자나 한문이나 영어나 라틴말은 바로 이 나라 한국이라는 터전에 뿌리를 내리고서 태어난 말이 아니니까요.


  한자말이나 영어를 쓰기에 철학을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자나 한문이나 영어는 한국에서 태어난 글이나 말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는 ‘땅’이란 낱말을 종이에 적거나 마음에 띄우면서 이 말이 태어난 깊이하고 너비를 헤아릴 수 있어요. 그러나 ‘地’나 ‘earth·ground’ 같은 낱말을 코앞에 둘 적에는 이 한자나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그곳 사람들이 닦아 놓은 깊이하고 너비를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슬기를 가꾸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철학하는 글쓴님은 책이름 《변명과 취향》으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무래도 핑계(변명)를 댈밖에 없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모로 좋아하기(취향)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핑계를 대면서 그 길을 가고, 좋아한다면서 끊지 못한다지요.


  더 돌아보면 ‘철학’이란 이름도 한국사람 스스로 지어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셈·슬기·헤아림·살핌·봄·여김’ 같은 낱말로 삶을 읽는 길을 안 찾으면서 그냥그냥 쓰는 한자말 이름입니다. ‘철학’ 같은 낱말은 깊거나 넓은 듯 여기면서도 막상 한국 철학자 가운데 ‘생각·셈·슬기·헤아림·살핌·봄·여김’이 어떻게 태어난 말이며, 이 말마다 서린 넋하고 숨결이 얼마나 깊거나 너른가를 따지거나 짚거나 찾아내거나 캐내거나 밝히거나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시피 해요.


  여기에서 살아가려고 생각을 합니다. 새롭게 키우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으로 살림을 짓고 싶기에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길을 걷는 학자도, 수수한 이웃도, 이제는 우리 두 손으로 가꾸면서 빛내는 길로 접어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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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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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8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9.5.



극좌 선동가도 극우 경제학자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교육자는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면 지식을 더 습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산부인과 의사는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으면 자신들이 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9쪽)


평등한 교육을 약속하는 학교는 불평등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고, 평생 교사에게 의존하며 살게 한다 …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무엇을 처방받아야 할지 배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자신의 습관을 관리하는 저명한 전문가의 고객으로 살았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54, 55쪽)


전문가의 자기 규제는 오로지 무능한 전문가를 보호하고 대중이 서비스에 더 의존하도록 만든다. 이 ‘비판적 의사’, ‘급진적 변호사’, ‘공공 건축가’들은 자신들보다 변화에 둔감한 동료들로부터 고객을 가로채는 것이다. (107쪽)


1965년 이후 미국에서만 환자 스스로 병을 고치는 방법에 관한 책이 2700여 종이나 쏟아졌다. 그런 책을 읽으면 의사는 정말로 필요할 때만 만나면 된다. (111쪽)


그렇게 자유가 공정하게 분배되어도 천연자원과 도구, 공공시설에 대한 권리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식량과 연료, 신선한 공기, 삶의 공간은 전문가가 만드는 필요와 상관없이 분배되지 않으면 망치나 일자리보다도 공정하게 분배될 수 없다. (115쪽)



  어느 날 문득 알았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나라에서 여러모로 펴는 복지를 고루 받을 수 있지만, 시골에서 살며 회사를 안 다니는 사람은 그 어느 복지에도 닿지 않는 줄. 도시에서 아파트를 빌려서 사는 사람은 나라에서 펴는 갖은 복지를 두루 받을 수 있지만, 시골에서 시골집을 장만해서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복지에도 안 닿는 줄.


  이런 얼거리를 알거나 느끼려면 시골에서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서 살되, 전원주택 아닌 오랜 시골집, 뼈대가 흙하고 나무요 ‘한 평에 10만 원이 못 되는’ 시골집, 마당까지 해서 100평쯤 되어도 1000만 원 값을 하지 않는 시골집을 장만해서 손질하여 지내는 살림이어야겠지요. 아마 한국에서 이처럼 살림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겠지요.


  이제 이 땅에 없고 책이 남은 이반 일리치 님이 남긴 글을 엮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반 일리치/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를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만,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복지나 문화나 교육으로 이바지를 많이 받습니다. 이와 달리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한다면 그 어느 이바지하고도 멀리 떨어집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안 넣고 집에서 돌보면 열 몇 해 앞서나 요즈음이나 다달이 10만 원을 받지만(8살까지), 어린이집에 넣으면 얼추 50만 원을 어린이집에 주는 나라 얼개입니다. 아이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 교육·문화비를 꽤 이바지하지만, 아이가 집에 머물며 스스로 배우는 길을 갈 적에는 0원을 이바지합니다.


  이는 돈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다니든 집에서 스스로 배우든, 이 아이하고 어버이는 똑같이 세금을 냅니다. 똑같이 세금을 내되, 나라에서 펴는 복지나 문화나 교육 이바지에서 따돌림을 받지요. 나라는 누구한테서나 세금을 고스란히 가져가지만, 이 세금이 누구한테나 고루 복지나 교육이나 문화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을 안 쓰는 얼거리인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이반 일리치 님이 남긴 글을 묶은 책에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이처럼 여러 행정에서 따돌림을 받는 자리에 있는 이웃들은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기 쉽고, 이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 꽤 많은데, 아직 나라 얼개는 바뀔 낌새가 잘 안 보입니다.


  ‘준법·적법’이라는 말이 함부로 쓰이는 오늘날입니다. ‘법을 지키는·법에 알맞은’인 뜻일 텐데, ‘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뒷일이나 뒷돈이 오가는 흐름’이 꽤 불거지지만, ‘법에 어긋나지 않은 터’라 말썽이 되지 않습니다. 법그물을 살살 빠져나가면서 사회를 주무르거나 흔든다고 할까요.


  지역자치라고 하지만, 이 ‘지역자치’란 이름 때문에 오히려 ‘시골 공무원’이 너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인구가 2만쯤인 시골 지자체조차 공무원이 1000에 가까운 숫자요, 인구가 4∼5만쯤인 시골 지자체는 공무원이 1000을 웃도는 숫자입니다. 시골 지자체는 인건비로 너무 많이 돈을 쓰는데, 이 공무원 숫자는 거꾸로 더 늘고, 시골 지자체 인구는 빠르게 줄어듭니다. 참다운 자치라면 공무원 숫자를 줄이면서 마을마다 집집마다 스스로 참되고 바르며 곱게 살아가는 길이리라 봅니다. 국회의원도 줄이고, 판·검사도 줄이고, 공무원도 줄이는, 공단 일꾼이며 군인이며 관리자란 자리를 줄이고 줄여, 스스로 삶이며 땅을 가꾸는 길로 가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늦가을 햇볕에 귤이며 유자가 무럭무럭 익습니다. 귤나무나 유자나무뿐 아니라 모든 나무는 해하고 비하고 바람하고 이슬을 머금으면서 매우 놀랍도록 달콤한 열매를 베풉니다. 사람이 거름을 주지 않을 적에 외려 더 달콤하며 알찬 열매를 오래오래 맺습니다. 가지를 휘어서 쇠그물에 붙들어맨 채 거름이며 비료를 듬뿍 먹이는 과일나무는 열 몇 해쯤 열매를 맺으면 힘이 다하여 뽑아내고 새로 심는다지요.


  어쩌면 오늘날 문명사회는 ‘가지를 휘어서 쇠그물에 붙들어맨 체 거름하고 비료하고 농약을 먹여 겉보기로 굵어 보이는 열매를 맺는 나무’와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흐름을 멈추고, 저마다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가 되도록, “사회에서 쓸모있고 쓸모없고란 틀”이 아니라 “다 다르게 어우러지는 숲”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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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 스님의 코끼리 - 본래 나로 사는 지혜 용수 스님 시리즈
용수 지음 / 스토리닷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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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6


《용수 스님의 코끼리》

 용수

 스토리닷

 2019.9.28.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만듭니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15쪽)


우리가 이미 완벽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좋은 것을 갈망하고 안 좋은 것을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31쪽)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보다는 ‘지금까지 참 잘했네’ 충분히 인정하고 칭찬해 주세요. (43쪽)


자녀들에게 알려주세요.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고요.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바꾸려고 하면 아이는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86쪽)


남의 마음보다 자신의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든 말든 우리 일이 아닙니다. 칭찬하든 비난하든 이미 죽은 사람을 말하듯이 신경 쓰지 마세요. (157쪽)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저절로 고요해지고 맑아집니다. (213쪽)



  아무리 흙이 많이 섞였구나 싶은 물이라 해도 가만히 지켜보면 어느새 찬찬히 가라앉습니다. 고요한 물이 되면 흙물 아닌 맑은 물로 바뀝니다. 마음이 어수선하다면 이 어수선한 가닥을 한 올씩 느끼면서 풀어내면 되어요. 서두른다면, 더 바빠게 몰아친다면 어수선한 마음은 자꾸 엉키기만 합니다. 가득 쌓인 빨래나 설거지도 하나씩 하노라면 어느새 끝납니다. 섣불리 “이 많은 걸?” 하고 여기면 제풀에 지치거나 짜증이 일지만 “천천히 하나씩 해야지” 하는 마음이면 사뭇 달라요.


  사전이라고 하는 책을 짓다 보면 처음에는 언제 저 고개를 넘느냐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해도 걸리고 세 해도 걸리고 열 해도 걸릴 테지 하고 여기면, 스무 해나 서른 해쯤 걸릴 수 있겠지 하고 여기면, 이 고개가 그리 가파르지 않습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 스스로 서른 해쯤 이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고개를 꽤 올랐네’ 싶어 곧잘 놀라요.


  이런 마음으로 《용수 스님의 코끼리》(용수, 스토리닷, 2019)를 손에 쥐었습니다. 스님 한 분은 《용수 스님의 곰》이란 책을 여미어 내기도 했어요. 이제 곰에 이어 코끼리를 곁에 두면서 마음읽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숲에서 그 어느 짐승보다 날렵할 뿐 아니라, 숲살이를 모두 꿰뚫는 곰이라고 해요. 더구나 곰은 풀열매를 아주 좋아하고 꿀도 매우 반겨요. 우리는 곰한테서 숲길을 배울 만하지 싶습니다. 덩치가 커서 무서워할 곰이 아니라, 숲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을 배울 수 있달까요.


  코끼리한테서도 이와 같겠지요. 코끼리도 그저 덩치만 큰 짐승이 아니에요. 어른 코끼리는 어린 코끼리를 온몸으로 아끼고 돌보면서 사랑으로 가르친다지요. 그 커다란 덩치를 뽐내는 일이 없이 언제나 넉넉하면서 푸근하게 들판을 아낄 줄 아는 코끼리요, 들살이를 바로 코끼리한테서 배울 만하구나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 곁에는 사람을 일깨우거나 타이르는 숨결이 가득합니다. 개미 한 마리도 사람을 일깨울 수 있어요. 파리나 모기도 사람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나비랑 벌 한 마리도 사람을 가르칠 만하고, 작은 애벌레하고 풀벌레도 사람이 배울 만한 대목이 가득해요.


  들풀이 길잡이가 될 만합니다. 들꽃이며 나무 한 그루가 길벗이 될 만해요. 그러니까 들풀을 보면서 ‘들풀도 사람도 똑같이 아름답고 거룩한 넋’인 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됩니다. 들꽃을 보면서 ‘들꽃도 사람도 나란히 어깨동무하는 사랑스러운 숨결’인 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어요.


  스님 한 분은 《용수 스님의 코끼리》라는 책으로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어려운 경전이나 지식을 머리에 담으려 하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면 넉넉할 뿐이라고, 아이들을 타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 스스로도 깎아내림질을 거두고 스스로 활짝 기지개를 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말에 휘둘리지 않기를, 남말에 춤추지 않기를, 이리하여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고운 말을 입에서 터뜨리며 훨훨 날아오르듯 춤추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구나 싶어요. 아무렴, 이렇게 하면 다 될 테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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