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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41] 교사읽기

― 학교교육과 교사와 학생



  지난날 학교에서 교사는 일삯이 무척 적었습니다. 일삯을 무척 적게 받은 교사는 학교에서 ‘돈 걷는 일’을 으레 했습니다. 툭하면 학생더러 이 돈을 내고 저 돈을 내라 했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은 어버이는 ‘학교에 바쳐야 하는 돈’ 때문에 늘 시름을 앓아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아이를 많이 낳았으니, 아이 하나마다 드는 돈이 무척 컸어요.


  가만히 보면, 일삯을 적게 받으면서 ‘아이한테서 돈을 걷는 일’을 하던 지난날 교사는 학생을 손쉽게 때렸습니다. 아이들을 때리고 윽박지르고 다그치면서 ‘돈 걷기’를 했습니다. 이러면서 예전에는 돈봉투도 흔히 받았지요. 돈봉투를 바치는 아이는 교사한테서 미움을 덜 받지만, 돈봉투를 바치지 못하는 아이는 으레 미움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교사는 일삯이 꽤 큽니다. 일삯을 아주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없으나, 퍽 넉넉하게 받고, 연금도 제법 큽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주먹다짐이나 매질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도 이제 학교에서 ‘돈 걷기’를 거의 안 합니다. 다만, 입시지옥 시험공부를 ‘보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키는 학교라면, ‘돈 걷기’를 아직도 하겠지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아이를 가르치려는 일을 맡는 교사입니다. 그러니, 교사는 무엇보다도 ‘제대로 잘 가르칠’ 뿐 아니라 ‘슬기롭고 사랑스레 가르칠’ 줄 아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교사는 돈을 걷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는 시험공부를 윽박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는 행정서류를 꾸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이 교사인 만큼, 교사한테는 다른 일거리를 맡길 수 없습니다.


  교사한테 일삯을 왜 넉넉히 줄까요? 교사는 아이를 슬기롭게 가르치면서 사랑스러운 꿈을 아이가 스스로 짓도록 북돋우는 몫을 맡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으로 일삯을 넉넉하게 줍니다. 돈봉투 따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일삯과 연금을 넉넉하게 줍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을 보면, ‘제도권 학교’에서는 아직 ‘참다운 배움마당’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삶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교육 얼거리가 바르게 서지 않습니다. 중·고등학교는 아주 ‘대학바라기 입시지옥’입니다. 중학교라는 곳이 따로 있으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서 딱히 제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어정쩡한 자리에 있는 중학교이면서, 어정쩡한 교과서 지식을 들려주는 중학교입니다. 초등학교도 여러모로 어정쩡합니다. 많이 어린 나이인 여덟 살부터 이 아이들이 무엇을 익히고 받아들여서 삶을 기쁨으로 짓도록 돌보는가 하는 대목에는 손길을 못 뻗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느니 마느니’를 놓고 말다툼을 벌입니다. 이런 일을 놓고 말다툼을 벌여야 할까요? 정부와 언론과 지식인은 이런 일을 놓고 책상머리 말다툼을 아직도 해야 할까요?


  교과서를 영어로 쓰든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로 쓰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제대로 엮고, 알차게 엮으며, 사랑스레 엮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알차게 엮은 교과서라면 ‘어떤 말’로 된 책이든 우리는 모두 기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교육은 오로지 입시지옥이 되기 때문에 교과서를 한글로만 쓰더라도 아름답지 못하고, 이 교과서에 한자를 넣는다 한들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교사가 학교에서 학생하고 마주하면서 생각해야 할 대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교과서 지식을 아이들이 잘 배워서 시험점수가 잘 받도록 하는 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는 ‘시험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삶을 배우는 곳입니다. 학교를 사랑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사로 서려는 어른이라면, 아이와 함께 학교에서 기쁘게 지을 삶과 사랑을 생각해서 이를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가 맡은 몫은 ‘아이들이 마을에서 서로 아끼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삶을 가꾸는 길을 즐겁게 가도록 돕는 일’입니다.


  교사가 교사다우면 학교가 학교다울 수 있습니다. 교사가 교사다우면 어떤 교과서를 쓰든 아이들은 기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교사가 교사다우면 일삯을 얼마큼 받든 살림을 알뜰살뜰 꾸리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4348.4.1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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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4-15 08:44   좋아요 0 | URL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예요. 선생이 할 일이 뭔가? `아이들이 마을에서 어깨동무를 하면서 삶을 가꾸는 길을 즐겁게 가도록 돕는 일` 새겨봅니다. ^^

숲노래 2015-04-15 08:47   좋아요 1 | URL
민들레처럼 님은
이 길을 아름답고 슬기롭게
잘 걸어가시리라 생각해요~
 

[당신은 어른입니까 40] 직업읽기 (직업선택의 십계)

― 어떤 일을 하며 돈을 벌까



  거창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는 ‘직업선택의 십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다짐글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찬찬히 읽습니다. 열 가지로 된 다짐글을 하나하나 읽습니다. 이를 슬기롭게 따르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이를 거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테며, 이를 지키기 어렵다 느끼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나는 이 다짐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이러고 나서, 우리 집 아이들한테 들려줄 말을 내가 새롭게 써 보자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내 일 찾기’라는 글을 열 줄로 씁니다.



 * 내 일 찾기 (ㅎㄲㅅㄱ) *

 하나, 하면서 기쁜 일을 하자.

 둘, 하면서 신나는 일을 하자.

 셋, 손수 밥·옷·집 짓는 일을 하자.

 넷, 사랑스러운 일을 하자.

 다섯, 아름다운 일을 하자.

 여섯,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일을 하자.

 일곱,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을 하자.

 여덟, 숲을 짓는 일을 하자.

 아홉, 파란하늘을 보며 바람을 마시는 일을 하자.

 열,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직업’을 찾으라고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직업’을 찾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기쁘게 누릴 ‘일놀이’를 찾아서 마음껏 살찌우기를 바랍니다.


  거창고등학교에서 쓰는 ‘직업선택의 십계’를 보면, 첫째로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라 나옵니다. 나는 이 첫 대목부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찾는데 왜 ‘월급’을 따질까요? 나는 내가 할 기쁜 일을 찾으면 될 뿐입니다. 이 일은 돈이 안 들어올 수 있고, 돈이 많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돈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기쁘게 할 일을 찾으면 됩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둘째는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라 나옵니다. 나는 둘째 대목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나는 내가 신나게 할 일을 합니다. 내가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일 때에 비로소 나는 ‘내 마을’에서도, 내 고장에서도, 내 나라에서도, 어느 한쪽에서 슬기롭게 이바지하는 일꾼이 됩니다. 내가 신나게 하지 못하면서 톱니바퀴가 되는 일이라면, 이러한 일은 안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셋째는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라 합니다. 나는 내가 기쁘고 신나게 하면서 삶을 짓는 일을 하니까, ‘승진’하고는 아랑곳할 까닭이 없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한테는 승진이란 아예 없습니다. 아무래도, 거창고등학교에서는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사람을 헤아려서 이러한 ‘십계’를 지었구나 싶습니다. 고등학교 아이들한테 ‘앞으로 나아갈 길(진로)’을 밝히려 한다면, 도시에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살아갈 길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요. 게다가, 시를 쓰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한테는 ‘승진’이란 없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려는 살림꾼한테도 ‘승진’이란 없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넷째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라 나옵니다. 나는 내가 기쁘면서 신나게 누릴 일을 할 뿐입니다. 모든 조건은 다 갖추어졌을 수 있고,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조건이 있든 없든 대수롭지 않아요.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짓는 일을 기쁘면서 신나게 해야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를 더 보면,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 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 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다른 여섯 가지도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할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다짐글은 ‘삶짓기’나 ‘삶찾기’나 ‘삶사랑’하고는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갑니다. 내가 가는 길에 다른 사람이 있건 없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가는데, 이 길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도 함께 걸을 수 있어요. 게다가, 나는 앞날이 맑고 밝으면서 환한 길을 갑니다. 나는 굳이 어두운 길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길은 내가 밝힐 길이니까요. 내가 스스로 지어서 키우는 길을 가지, ‘장래성이 있든 없든’ 따질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은 삶길이자 사랑길이자 꿈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길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서로 아끼고 좋아할 만합니다. 그러니, 누군가 내 길을 거룩하게 볼 수 있고,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내 둘레에서 나를 북돋우든 말든, 내 언저리에서 나를 깎아내리든 말든, 이를 쳐다볼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내 길을 웃고 노래하면서 갈 뿐입니다.


  나는 언제나 한복판에 섭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별에는 한복판이나 가장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모든 곳은 한복판이면서 가장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두 다리로 우뚝 서서 홀가분하게 노래하는 곳은 ‘내 삶자리’입니다. 나는 내 삶자리에서 내 ‘삶일’을 찾고 ‘삶놀이’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내 곁님이나 이웃이나 동무하고 어깨를 겯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 혼자만 갈 수 없어요. 함께 갑니다. 다만, 함께 가되 억지로 잡아끌면 안 되지요.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래해야지요. 나만 믿고 따르라 해도 안 되고, 나 혼자만 가겠노라 해도 안 됩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노래해야지요.


  무엇보다 나는 단두대로 안 갑니다. 나는 왕관으로도 안 갑니다. 내는 ‘죽음길’이나 ‘허울뿐인 명예’ 어느 곳으로도 안 갑니다. 나는 내 삶으로 갑니다. 오늘 나는 모레로 갑니다. 오늘 나는 내 보금자리로 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일을 물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 된 사람은, 스스로 즐겁고 아이하고 함께 즐거우며 곁님하고도 함께 즐거운 일놀이를 누리면서 삶을 지을 때에 노래가 저절로 샘솟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일 찾기’를 해야지요. ‘직업찾기’나 ‘진로선택’이 아닌, ‘내 일 찾기·내 삶 찾기·내 길 찾기’를 하면서 사랑과 꿈을 가꿀 때에 아름답고 사랑스레 기쁜 하루가 되리라 느낍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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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3-02 02:12   좋아요 0 | URL
꿈을 지위, 돈만 보고 정하는 어른들과 사회의 모습이 안타깝지요. 아이들도 그리 생각하는게 어른들이 그리 만든거겠죠. 꿈보다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하는 기회를 많이 줘야겠어요. 저도 이런 생각을 깊이 한것은 스물 몇해가 지나서 시작했으니 아이들도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요.

숲노래 2015-03-02 05:30   좋아요 0 | URL
민들레처럼 님 말씀대로,
`월급 따지지 말자`나 `지위 따지지 말자` 같은 말도,
정작 돈과 지위에 얽매인 모습이에요.

비판을 한다면서 세운 거창고 직업십계명일 테지만,
막상 `비판`은 되더라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삶`은 되지 못해요.

직업이 아닌 `꿈`을 그려야 하고, 이 꿈을 `삶`으로 이루도록 하는 `길`을
아이와 어른이 저마다 스스로 가꾸도록 도울 수 있는 `말`을
마음에 심을 때에,
비로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찾을 수 있어요.

늦깎이에 이 대목을 알아도 되고, 일찍부터 알아도 돼요.
언제 알아차리든, 이 대목을 알았으면 그때부터
씩씩하게 나아가면 기쁩니다~
 

[당신은 어른입니까 38] 과학읽기

― 삶을 이루는 알갱이



  제대로 살피고 배워야, 이러한 바탕과 넋과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가르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곁님과 나는 여느 어버이입니다만, 시골에서 마을도서관을 꾸리면서, 우리 아이들부터 다닐 수 있는 시골마을 작은학교를 열 생각입니다. 여느 교과서는 쓰지 않고, 제대로 된 지식을 제대로 다루는 책을 즐거운 길동무로 삼아서 아이와 함께 배우는 이야기꾸러미로 삼으려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배울 과학은 교과서에 있는 시험지식이 아닌, 지구와 우주와 사람과 삶을 이루면서 어우르는 알갱이가 무엇인지 헤아리는 길에서 비롯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리나 생물이나 화학을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삶을 가르칩니다. 삶을 과학으로 바라보고 수학으로 바라보며 말(한국말)로 바라봅니다. 삶을 바느질로 바라보고 자전거로 바라보며 책으로 바라봅니다. 삶을 밥짓기로 바라보고 집짓기로 바라보며 옷짓기로 바라봅니다.


  수식이나 기호가 과학이 아닙니다. 연산이나 조합이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은 삶이 태어나는 바탕을 살핍니다. 과학은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살면서 두 발을 디딘 지구별이 온누리에 어떠한 터로 있는지를 살핍니다. 과학은 사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피고, 과학은 나무와 풀과 꽃이 어떻게 어우러지는가를 살핍니다.


  풀잎과 풀뿌리가 몸 어느 곳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짚는 과학입니다. 물 한 방울이 몸에 어떻게 스미면서 돌고 돌아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지를 돌아보는 과학입니다. 두 눈으로 무엇을 보고, 두 손으로 무엇을 만지며, 두 발로 어느 곳을 밟으며 돌아다니는가를 헤아리는 과학입니다.


  삶을 이루는 알갱이를 찾을 때에 과학입니다. 삶을 이루는 알갱이가 너와 나 사이에 어떻게 흐르는지를 깨달을 때에 과학입니다. 과학은 지식이 아닌 슬기입니다. 지식이 아닌 슬기로 밝히는 과학입니다. 책을 덮고 눈을 뜰 때에 볼 수 있는 과학입니다. 비행기나 엔진이나 핵무기나 발전소가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무기나 잠수함이나 미사일이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과학입니다. 풀 한 포기 과학입니다. 밥 한 그릇이 과학입니다. 실 한 오라기가 과학입니다.


  과학을 제대로 읽을 때에 삶을 제대로 읽습니다. 과학을 똑바로 바라볼 적에 사랑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과학을 옳게 배울 때에 꿈을 옳게 배웁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과학을 곱게 익혀서 기쁘게 북돋울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4347.12.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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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37] 책읽기

― 책을 왜 읽고 읽히는가



  누군가 나한테 묻습니다. ‘융’이란 사람을 얼마나 잘 아느냐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융’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을 스무 해쯤 앞서 읽은 일이 떠오르지만, 막상 이분이 쓴 책에서 어떤 이야기가 흘렀는지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융’이라는 사람을 모르는 셈입니다. 요즈막에 이분 책을 읽은 사람이야말로 이분을 안다고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요즈막에 융을 읽은 사람은 융과 얽혀서 무엇을 알까요. 융이라는 사람이 책에 적은 줄거리를 알까요. 융이라는 사람이 이녁 삶으로 녹여서 펼친 이야기를 알까요. 융이라는 사람이 걸어간 길을 알까요. 융이라는 사람이 펼친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으로 녹여서 삶을 즐길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알까요.


  책을 읽는 까닭은 ‘내가 아직 모르는 이야기를 새롭게 배워서 내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씩씩하게 가꿀 기운을 내가 스스로 길어올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다만, 다른 사람은 책읽기를 달리 바라보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기 때문입니다. 시골내기는 시골내기요, 도시내기는 도시내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숲과 하늘과 들을 바라보는 사람과 오늘 이곳에서 자가용을 몰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책이란 무엇일까요. 책은 왜 읽어야 할까요. 어른들은 아이들더러 책을 읽으라고 신나게 말하지만, 정작 어른들은 책을 얼마나 읽을까요. 아이들이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 입시지옥에 갇히도록 하는 어른들은 책을 얼마나 아름답게 엮어서 아이들한테 베풀까요.


  아름다운 책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책을 못 알아보는 사람도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한편, 아름다운 책을 읽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길어올리지 못하거나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도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고 읽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안 알아보고 안 읽기에 안 훌륭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읽는 사람은 그저 ‘아름다운 책을 읽은’ 사람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일구는 사람은 그저 ‘삶을 아름답게 일구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사랑을 아름답게 나누는 사람은 그저 ‘사랑을 아름답게 나누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아름다운 책을 찾아서 읽지만, 삶을 일구지 못하거나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책이 있는 줄 모르지만, 삶을 아름답게 일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가까이한 적이 없으나, 사랑을 아름답게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안 거들떠보는 책에 깃든 아름다움을 길어올리면서, 사랑을 아름답게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면, 책을 왜 읽는지 먼저 생각하고 느끼면서 헤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는, 밥을 먹을 적이나 길을 나설 적이나 학교를 다닐 적이나 흙을 일굴 적이나 나무를 심을 적에도 모두 같습니다.


  자, 밥을 왜 먹는가요? 길을 왜 나서는가요? 학교를 왜 다니나요? 흙을 왜 일구나요? 나무를 왜 심나요?


  남이 이 까닭을 밝혀서 나한테 알려주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이 까닭을 알아내야 합니다. 밥을 왜 먹는지 남이 나한테 알려주어야 ‘밥을 왜 먹는지’ 안다면, 이런 사람은 바보입니다. 여행길이든 마실길이든 왜 길을 나서려 하는지 스스로 모르면서 남한테 묻는 사람은 여행도 마실도 다니지 못합니다. 학교를 왜 다니는가 하는 까닭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사람은 학교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흙을 왜 일구는지 모른다거나 나무를 왜 심는지 모른다면,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까닭을 하나도 모르는 셈입니다.


  책을 찾아서 읽는 까닭은 언제나 스스로 찾아야 환하게 깨닫습니다. 책을 찾아서 읽는 즐거움은 늘 스스로 살펴서 느껴야 제대로 깨닫습니다. 어떤 책을 찾아서 읽을 때에 기쁘거나 재미있는가 하는 대목은 노상 스스로 짚고 되새길 수 있어야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이야기를 곱게 깨닫습니다.


  삶을 스스로 짓는 길에 동무로 삼는 책입니다. 어느 책이든 동무로 삼을 수 있지만, 아무 책이나 동무로 삼지 않습니다. 모든 책을 동무로 삼을 수 있지만, 가슴에 담는 책은 한결같이 하나입니다.


  빛이 되고 숨이 되며 노래가 되는 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꿈이 되고 사랑이 되며 삶이 되는 책은 어떻게 알아볼까요. 이야기가 되고 바람이 되며 햇살이 되는 책은 누가 쓸까요. 내 가슴속에서 자라는 씨앗을 들여다봅니다. 내 마음자리에서 크는 나무를 바라봅니다. 내 넋으로 살찌우는 숲을 껴안습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눈을 뜨고, 스스로 사랑스럽게 다시 태어나면서 스스로 사랑스럽게 책 하나에 손길을 따숩게 내밉니다. 4347.1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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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34] 빛읽기 (윤 일병 죽음을 생각하며)

― 삶이 빛이 되도록 꿈을 꿉니다



  미국은 틈만 나면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미사일과 폭탄을 쏟아붓고 사람을 죽입니다. 이런 전쟁놀이를 지켜보면서 ‘폭력은 이제 그만!’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고, ‘평화를 지키는 군대!’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사람들이 죽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기도 하지만, 자동차에 치여서 죽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기도 합니다. 오늘날 지구별에서는 전쟁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입시지옥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대단히 많아요. 이와 함께, 한국에서는 군대에서 죽는 젊은이가 무척 많습니다. 그런데, 입시지옥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죽는 아이들 이야기하고 군대에서 웃사람한테 얻어맞아서 죽는 젊은이들 이야기는 도무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바깥에 이 이야기를 퍼뜨려야 알려집니다. 끔찍하게 죽은 아이들이어야 비로소 신문이나 방송에 나옵니다.


  나는 군대에서 내 웃사람한테 얼마나 얻어맞으면서 지냈는지 돌아봅니다. 내 ‘웃사람’이라는 이들은 나를 비롯해 ‘아랫사람’을 얼마나 자주 많이 두들겨패거나 괴롭혔는지 돌아봅니다. 훈련소에서도, 훈련소를 마치고 들어가는 자대에서도, 언제나 주먹다짐과 욕지꺼리와 얼차려입니다. 하루에 적어도 한 차례씩 맞거나 욕을 듣거나 얼차려를 안 받고 지나가는 일이란 없다고 할 만합니다. 군대에서 가장 자주 들으면서 가장 듣기 싫던 낱말은 ‘집합’입니다. 모이라는 뜻으로 쓰는 이 한자말이 누군가 입에서 살그마니 터져나오면, 맞고 뺑뺑이를 돌면서 허우적거려야 합니다. 처음 군대에 발을 들여놓는 날부터 군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전역날까지, 누구라도 군대에서는 주먹다짐과 욕지꺼리와 얼차려에 시달립니다.


  어리거나 늙다고 하는 나이란 없다고 느껴요. 나이가 많다고 훌륭하거나 슬기롭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이가 적다고 안 훌륭하거나 안 슬기롭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말 언제 어디에서나 꽃을 봅니다. 꽃밭에 있으면서도 꽃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꽃을 헤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군부대에서도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꿈을 건사하는 사람은 주먹질이나 욕지꺼리나 얼차려를 시키지 않습니다. 여느 사회에서도 아름다운 삶이나 사랑이나 꿈을 안 건사하는 사람은 여느 사회에서도 으레 주먹질을 하거나 욕지꺼리를 일삼거나 남을 해코지하는 짓을 일삼습니다.


  나는 군대라는 곳에 늦게도 이르게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학교라는 곳이 사람을 사람답게 가르치는 배움터가 아니로구나 하고 느껴서 일찌감치 ‘군 입대 희망서’를 내기는 했는데, 내가 ‘군 입대 희망서’를 낼 즈음에는 군대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드물었는지, 참말 아주 빨리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대에 들어가 보니 나와 나이가 같으면서 웃자리(고참)에 있는 사람은 딱 하나였습니다. 나로서는 숨을 돌릴 만한 일일 텐데, 나보다 어리면서 웃자리에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서 아랫자리에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95년 11월에 군대에 들어가서 상병 6호봉이 될 때까지, 나는 늘 맞는 쪽과 욕지꺼리 듣는 쪽과 얼차려를 받는 쪽에 있었습니다. 상병 6호봉이 된 어느 날, 상병 4호봉이면서 나와 나이가 같은 아랫자리 아이가 ‘계급이 좀 높아졌다’면서 그 아이가 맡을 사역과 경계근무를 이등병한테 떠넘긴 일을 알아차립니다. 나는 그길로 소대에서 이럭저럭 높은 자리에 있는 그 아이한테 찾아가 말 한 마디 없이 그 아이를 군홧발로 10분쯤 밟았습니다. 병장 4호봉이던 어느 날, 병장 1호봉이면서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 아이가 사역과 경계근무를 일병한테 떠넘긴 일을 알아채고는, 이 아이 후임병과 선임병이 있는 자리에서 얻드려뻗쳐를 시키고 배를 군홧발로 걷어찼습니다. 아파서 쓰러진 아이를 다시 일으켜서 엎드려뻗쳐를 시키고는 끝없이 배를 걷어찼습니다. 얼마 뒤 다른 병장 2호봉 아이를 또 군홧발로 내무반에서 밟았습니다. 이 아이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딱 세 차례, 군대에서 내 아랫자리 아이를 두들겨팼습니다. 그때 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주먹다짐을 했을까, 왜 다른 군인들과 똑같이 욕지꺼리를 퍼부었을까 하고 돌아보면, 보드라운 말씨와 얼차려가 없이는 말귀를 듣지 않는 군대 얼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는 평화가 깃들지 않습니다. 군대에서는 오직 주먹다짐과 신분과 위계질서와 욕지꺼리로 모든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전역을 할 즈음, 나보다 두 살 위이자 여섯 달 아래인 아랫자리 아이가 병장 계급장을 달 무렵까지 군대에서 ‘거친 욕지꺼리’도 ‘누군가를 주먹이나 군홧발로 때린 일’도 없는 줄 알아차립니다. 전역을 며칠 앞두고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나한테 거수경례를 하는 아이한테 “아이고, 며칠 뒤면 전역하는 사람한테 무슨 경례를 해. 밖에 나가면 내가 당신한테 형이라고 해야 할 텐데. 밖에 나가서 길에서 마주치면 형이라고 할 테니, 그때에는 나한테 말 놓아요.” 하고 말한 뒤, “그나저나 어떻게 ○ 병장은 욕 한 마디도 안 하고 때리지도 않고 얼차려도 안 시킬 수 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이는 “내가 싫어서 그렇지요. 다 귀엽고 착한 아이들인데 말로 해야지요. 말로 안 되면 그냥 내가 하면 되고요.” 하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늘 160명이 넘는 중대원이 복닥거리는 강원도 양구 비무장지대 멧골짝 부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겪었는데, 스스로 ‘나다움’을 지키려는 사람을 꼭 하나 만난 셈입니다. 참말 이 사람은 늘 눈에 뜨였습니다. 나이가 많으면서 몸이 꽤 여려, 무엇을 하든 으레 뒤처지거나 어설펐는데, 그래도 말없이 땀만 흘리면서 끝까지 견디곤 했어요. 저보다 못 하는 후임병한테도 퍽 살갑고 부드럽게 타이를 줄 알았습니다. 참 멋지구나 싶어 이녁한테 휴가증을 하나 선물로 주었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내 몫으로 나온 휴가를 보름치 안 써서, 전역할 때까지 보름치 휴가증이 남았고, 이 가운에 이레치를 이녁한테 건넸어요.


  1997년 12월 31일 새벽에 펑펑 쏟아지는 눈밭을 헤치며 멧골짝에서 전역을 하고 군대를 떠나는 길에 내내 이녁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세 차례 주먹다짐을 했고 툭하면 욕지꺼리를 내뱉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 거친 말 때문에 마음이 다쳤을까 하고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많은 아이들은 주먹다짐과 거친 말을 대물림해요. 받은 만큼 물려주거나 받은 것보다 더 크게 물려줍니다. 모두 그뿐입니다. 쳇바퀴를 돕니다. 이런 바보짓 쳇바퀴를 거스르는 빛이 하나 있었지요. 그때 그 사람은 오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성도 잊었습니다. 그 사람이 보여준 눈빛과 몸빛만 내 마음에 남았습니다.


  평화로운 곳에 있어도 마음을 평화롭게 건사하지 않으면 평화롭지 않습니다. 전쟁터에 있어도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리면 평화롭습니다. 남이 나를 사랑해 주기도 할 테지만, 내가 스스로 나를 사랑할 때에 사랑이 태어납니다.


  아이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면, 군대를 이 나라에서 없애면 될 테지요. 전쟁훈련과 살인훈련을 시키는 군대가 이 나라에서 사라져야, 이 땅에 평화가 싹틀 수 있을 테지요. 그런데, 군대를 없애더라도 우리 마음자리에 사랑스러운 평화가 먼저 자라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믿고 아끼면서, 내 이웃과 동무를 함께 믿고 아낄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꽃에서 흐르는 냄새와 빛을 누릴 때에, 꽃밭이 아닌 눈밭에 있을 때에도 꽃내음과 꽃빛을 떠올리면서 즐겁게 웃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 학교는 ‘군대 조직’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 아이들은 군대에 가지 않은 몸이어도 학교에서 동무를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군대에서도 폭력이 이루어지지만 학교에서도 똑같습니다. 회사라고 다르지 않아요. 마을에서도 똑같아요. 군대에 있기에 사람이 더 바보처럼 주먹다짐을 하지 않아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가슴 아픈 주먹다짐이 벌어집니다.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는 해롱거리면서 싸움을 벌입니다. 서로 밟고 일어서려고, 서로 더 잇속을 챙기려고 괴롭히거나 윽박지릅니다.


  입시경쟁과 시험지옥을 없애지 않고서는 학교폭력과 청소년자살을 막을 수 없습니다. 취업경쟁과 경제개발을 없애지 않고서는 사회차별과 온갖 불평등을 뿌리뽑지 못합니다.


  학교와 회사와 군대와 감옥은 너무 얄궂게 서로 닮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와 회사와 군대와 감옥은 사람들 스스로 바보스러운 쳇바퀴에 갇히도록 내몹니다.


  사랑에 눈을 뜨지 않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삶을 바로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빛을 읽으면서 품고 아끼며 보살필 때에 비로소 모든 실타래를 풀면서 잘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4347.8.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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