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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른입니까 43. 생각

― 어떻게 바라볼까



  모두 생각하기 나름인 줄은 아주 어릴 적부터 느꼈습니다. 또 알았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들겠습니다. 저는 김치나 찬국수를 못 먹는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에 아버지하고 밥자리에 둘러앉아서 김치를 먹기란 매우 고달팠습니다. 김치를 못 먹는 작은아들을 쳐다보는 아버지는 언제나 한숨에 짜증에 불같은 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김치나 찬국수만 못 먹지 않았어요. 달걀도 한 달쯤 안 먹다가 모처럼 먹으면 배앓이를 하면서 바로 게웠고, 요구르트란 마실거리도, 요플레란 먹을거리도 혀에 닿기 무섭에 게웠습니다. 하얗게(크림) 듬뿍 얹은 달달이(케익)도 못 먹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이렇게 몸에 안 받는 먹을거리가 있다면 가만히 눈여겨보면서 비슷한 얼거리를 찾아서 다스릴 수 있을 텐데, 1982∼87년에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나날을 보낸 저로서는 차분한 눈길을 받은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무렵 어른들은 ‘주는 대로 다 먹어야 한다’에다가 ‘아이들은 많이 먹고 무럭무럭 커야 한다’는 생각을 밀어붙였어요. 이때에 뼛속 깊이 느낀 하나는 ‘둘레에서 남들이 아무리 맛있다고 말하는 먹을거리’ 가운데 나한테 맛있을 먹을거리는 없다시피 하다는 대목입니다.


  요즈음은 이따금 김치나 달달이를 슬쩍 맛보곤 합니다. 맛보기는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되는 줄 알거든요. 눈앞에 있는 이 먹을거리는 먹을거리라기보다 그저 입을 거쳐 몸을 지나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여기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삼켜서 내보낼 수 있더군요. 다만, 삼켜서 내보낼 뿐, ‘먹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맛있는 밥을 먹은 일이 없다 보니, 둘레에 맛있는 밥을 차려서 나누는 일도 드뭅니다. 저부터 스스로 밥이 맛있다고 느끼지 않기에, 밥맛을 살려 무언가 차려서 나누기 어려운 길이었다고 할까요.


  그저 지켜봅니다. 사람들은 어떤 밥을 맛있다고 여기는가를 지켜보고, 어떤 간이나 냄새이거나 결일 적에 맛나다고 받아들이는가를 지켜봅니다. 제 몸에는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둘레에서 무엇을 어떻게 즐기는가를 살피는 셈입니다.


  이다음 생각을 들면, 갓난쟁이일 적부터 도깨비를 보았습니다. 이른바 귀신을 늘 보았습니다. 말로 어머니 아버지를 부를 수 없던 0살이나 1살 적에는 도깨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지만, 도깨비를 맨눈으로 볼 수 있다 보니, 어느새 무시무시하게 죽은 모습인 도깨비가 잔뜩 나타나더군요. 그러나 이런 도깨비를 어떻게 물리치거나 다루어야 할는지, 또 이런 도깨비가 왜 이렇게 밤낮으로 보이면서 졸졸 따라다니는지, 또 무슨 말을 끝없이 걸려고 하는가를 알 길이 없었어요. 물어볼 사람이 없고, 묻는들 제대로 짚거나 풀어낼 사람도 없더군요.


  이 도깨비는 서른아홉 살까지 어떻게 다루어야 할는지 몰랐는데, 참 쉽게 끊어냈어요. 알고 보니 쉽더군요. 도깨비 하소연을 듣고 싶으면 “뭣 때문에 이승에서 맴도는가를 밝히고, 앙금을 털어놓았으면 홀가분히 너희 집으로, 네 길로 가.” 하고 말하면 되어요. 도깨비 하소연을 듣고 싶지 않거나 성가시다면 단출히 “썩 꺼져.”라든지 “저리 가.”처럼 한마디를 굵고 짧으면서 기운차게 읊으면 되고요.


  길을 배우고, 길을 알고, 길을 가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어요. 아직 모르기에 두렵고, 모른다는 생각에 젖으니 무서우며, 어찌할 바를 알 턱이 없구나 싶어 손에 땀이 납니다. 이러다가 조금씩 알아차리면서 두려운 마음이 걷히고, 하나하나 깨닫는 동안 무섭다고 여긴 마음이 모두 허깨비인 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할 적에는 갇힐 일이 없으나, 스스로 생각을 안 하고서 다른 사람들 생각에 휘둘릴 적에는 스스로 갇히는 굴레이더군요.


  그리고 말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말하는 대로 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건 스스로 하는 말이 스스로 마음에 심는 생각이면서, 이 생각은 스스로 이루면서 누리려고 하는 길이 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나 “뿌린 대로 거둔다” 같은 오랜 말씀은 아주 쉬우면서 깊은 뜻을 품습니다. 그렇지만 배움터(학교)나 둘레(사회)나 글조각(인문지식)은 이 쉬우면서도 깊은 뜻을 새긴다거나 풀어내어 나누려 하지 않더군요.


  배움터마다 ‘우리말’이 아닌 ‘국어 수업’이 있고, 열린배움터(대학교)에 들어가려고 ‘국어 시험’을 치르며, 요즈막에는 글쓰기 이야기(강의)가 넘칩니다만, 정작 말이 무엇이요 말씨가 어떠하며 말결을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다스려서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노래할 만한가를 다루는 자리하고는 한참 동떨어지곤 한다고 느낍니다.


  글꽃(문학) 하나를 놓고서 셈겨룸(시험문제)으로 내거나 풀 수 있을까요? 노래(시) 한 줄을 네갈래(사지선다)나 닷갈래(오지선다) 같은 셈겨룸으로 풀 수 있을까요? 골라쓰기(객관식)나 풀어쓰기(주관식) 어느 쪽으로도 다룰 수 없는 글꽃이요 우리말일 텐데, 이를 셈겨룸으로 다룬다는 대목부터 어딘가 뒤틀리거나 얄궂을 텐데, 이를 눈치채는 분은 아직 적구나 싶습니다.


  밥·도깨비·말, 이렇게 세 가지는 어릴 적부터 늘 제 곁을 맴돌면서 무언가 보여주거나 일깨우려 했습니다. 먹지 않아도 될 밥이니,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기운일 뿐인 줄 알아차리라고 이끌었어요. 몸뚱이는 또다른 옷이며, 모든 목숨은 빛덩이라는 넋으로 빛나는 줄 알아내라고 이끌었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든 손으로 쓰는 글이든 언제나 삶으로 이루어서 눈앞에서 마주하게 마련이니, 아무 말이나 글을 섣불리 듣거나 쓰거나 읽거나 밝히지 않을 노릇을 배우라고 이끌었어요.


  말만 곱게 한다면 허울만 좋은 삶입니다. 말을 곱게 한다면 찬찬히 속으로 가꾸는 삶입니다. 말이 거칠어 보인다면 얼핏 거친 듯한 겉모습을 짓는 삶입니다. 말까지 거칠다면 겉도 속도 온통 거칠다가 메마른 길로 빠지는 삶입니다.


  생각할 수 있다면 이 푸른별에서 이쪽 끝하고 저쪽 끝에 있어도 외롭거나 쓸쓸할 일이 없습니다. 늘 마음으로 함께 있거든요. 생각할 수 없다면 두 눈을 마주보는 아주 가까운 자리에 있어도 허전하거나 아득하곤 합니다. 손에 닿을 자리에 있어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있거든요.


  “그런 일을 어떻게 해요?” 하고 말한다면, 이 말을 내뱉는 바로 그때부터 그런 일은 우리한테 될 수도 없게 마련입니다. “그 일을 해볼까요?” 하고 말한다면, 이 말을 읊는 바로 그곳부터 그 일을 이루는 첫걸음을 내딛게 마련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할 수 없네” 하고 말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예요.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하나씩 할래” 하고 말하는 일은 시나브로 해내거나 이룹니다.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잘잘못이란 모두 사라집니다. 잘못한 일도 잘한 일도 모두 사라져요. 그래서 처음부터 할 수 있습니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없기에 누구나 모두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해서 이 잘못을 무덤돌처럼 세우지 않으면 좋겠어요. 잘했다고 해서 이 잘한 일을 기림돌(동상·우상·훈장)처럼 세우지 않으면 좋겠어요. 잘했어도 모두 잊거나 내려놓고서 새롭게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생각을 할 수 있기에 밤에 고이 잠들고서 아침에 기쁘게 일어납니다. 생각을 할 줄 안다면 노상 우리 꿈을 마음에 품고서, 이 꿈을 스스로 신나게 이루는 길을 하나둘 찾아내어 다부지게 나아갑니다.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묻고 아이들한테 묻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떤 꿈을 그렸니? 오늘 하루는 어떤 사랑을 그리니? 오늘 하루는 어떤 웃음빛을 그릴까?” 오르지 못할 언덕이 없다는 말은 그냥 태어나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맞거든요. 오르려 하니까 오르고, 오르려 하지 않으니까 못 올라요. 하려고 생각하니 할 길을 찾아냅니다. 하려고 생각하지 않으니 어떻게든 안 하거나 안 되는 쪽으로만 나아갑니다.


  “저놈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만, 저놈을 믿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해요. 저놈이든 저분이든 저님이든 저치이든,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할 일이며 놀이를 즐겁게 생각해서 이야기하면 되어요. 우리가 나아갈 길을 훨훨 날아오르듯 아름다이 가꾸는 하루를 생각해서 펴면 되고요. 믿지 않고 묻습니다. 생각하면서 마음에 심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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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에 처음 쓰다가 멈춘 [당신은 어른입니까]라는

꼭지가 있다.


2015년에 이럭저럭 매듭을 지었고

2018-19년에 주루룩 고쳐썼는데

다시 너덧 해가 흐른 올해에

이 꾸러미를 새로 추스르고

보태어 쓰려고 한다.


2012년 어느 날,

작은아이가 두 살을 넘어선 무렵

곁님이 나더러

"아이들이 앞으로 스스로 배울 이야기부터 써 봐요." 하고

귀띔을 해서

여러 해에 걸쳐서 쓰고서 손질해 놓았는데,

큰아이가 열여섯 살을 넘긴 이즈음

이 꾸러미를 비로소 새삼스레 가다듬어서

우리 두 아이한테 먼저 읽힐 만하리라 본다.


다시 고쳐쓰는 데에 얼마나 걸릴는지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나아가 보자.


글꼭지 이름은 [우리는 어른입니까]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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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41] 교사읽기

― 학교교육과 교사와 학생



  지난날 학교에서 교사는 일삯이 무척 적었습니다. 일삯을 무척 적게 받은 교사는 학교에서 ‘돈 걷는 일’을 으레 했습니다. 툭하면 학생더러 이 돈을 내고 저 돈을 내라 했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은 어버이는 ‘학교에 바쳐야 하는 돈’ 때문에 늘 시름을 앓아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아이를 많이 낳았으니, 아이 하나마다 드는 돈이 무척 컸어요.


  가만히 보면, 일삯을 적게 받으면서 ‘아이한테서 돈을 걷는 일’을 하던 지난날 교사는 학생을 손쉽게 때렸습니다. 아이들을 때리고 윽박지르고 다그치면서 ‘돈 걷기’를 했습니다. 이러면서 예전에는 돈봉투도 흔히 받았지요. 돈봉투를 바치는 아이는 교사한테서 미움을 덜 받지만, 돈봉투를 바치지 못하는 아이는 으레 미움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교사는 일삯이 꽤 큽니다. 일삯을 아주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없으나, 퍽 넉넉하게 받고, 연금도 제법 큽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주먹다짐이나 매질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도 이제 학교에서 ‘돈 걷기’를 거의 안 합니다. 다만, 입시지옥 시험공부를 ‘보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키는 학교라면, ‘돈 걷기’를 아직도 하겠지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아이를 가르치려는 일을 맡는 교사입니다. 그러니, 교사는 무엇보다도 ‘제대로 잘 가르칠’ 뿐 아니라 ‘슬기롭고 사랑스레 가르칠’ 줄 아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교사는 돈을 걷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는 시험공부를 윽박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는 행정서류를 꾸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이 교사인 만큼, 교사한테는 다른 일거리를 맡길 수 없습니다.


  교사한테 일삯을 왜 넉넉히 줄까요? 교사는 아이를 슬기롭게 가르치면서 사랑스러운 꿈을 아이가 스스로 짓도록 북돋우는 몫을 맡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으로 일삯을 넉넉하게 줍니다. 돈봉투 따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일삯과 연금을 넉넉하게 줍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을 보면, ‘제도권 학교’에서는 아직 ‘참다운 배움마당’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삶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교육 얼거리가 바르게 서지 않습니다. 중·고등학교는 아주 ‘대학바라기 입시지옥’입니다. 중학교라는 곳이 따로 있으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서 딱히 제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어정쩡한 자리에 있는 중학교이면서, 어정쩡한 교과서 지식을 들려주는 중학교입니다. 초등학교도 여러모로 어정쩡합니다. 많이 어린 나이인 여덟 살부터 이 아이들이 무엇을 익히고 받아들여서 삶을 기쁨으로 짓도록 돌보는가 하는 대목에는 손길을 못 뻗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느니 마느니’를 놓고 말다툼을 벌입니다. 이런 일을 놓고 말다툼을 벌여야 할까요? 정부와 언론과 지식인은 이런 일을 놓고 책상머리 말다툼을 아직도 해야 할까요?


  교과서를 영어로 쓰든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로 쓰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제대로 엮고, 알차게 엮으며, 사랑스레 엮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알차게 엮은 교과서라면 ‘어떤 말’로 된 책이든 우리는 모두 기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교육은 오로지 입시지옥이 되기 때문에 교과서를 한글로만 쓰더라도 아름답지 못하고, 이 교과서에 한자를 넣는다 한들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교사가 학교에서 학생하고 마주하면서 생각해야 할 대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교과서 지식을 아이들이 잘 배워서 시험점수가 잘 받도록 하는 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는 ‘시험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삶을 배우는 곳입니다. 학교를 사랑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사로 서려는 어른이라면, 아이와 함께 학교에서 기쁘게 지을 삶과 사랑을 생각해서 이를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가 맡은 몫은 ‘아이들이 마을에서 서로 아끼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삶을 가꾸는 길을 즐겁게 가도록 돕는 일’입니다.


  교사가 교사다우면 학교가 학교다울 수 있습니다. 교사가 교사다우면 어떤 교과서를 쓰든 아이들은 기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교사가 교사다우면 일삯을 얼마큼 받든 살림을 알뜰살뜰 꾸리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4348.4.1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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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4-15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예요. 선생이 할 일이 뭔가? `아이들이 마을에서 어깨동무를 하면서 삶을 가꾸는 길을 즐겁게 가도록 돕는 일` 새겨봅니다. ^^

숲노래 2015-04-15 08:47   좋아요 1 | URL
민들레처럼 님은
이 길을 아름답고 슬기롭게
잘 걸어가시리라 생각해요~
 

[당신은 어른입니까 40] 직업읽기 (직업선택의 십계)

― 어떤 일을 하며 돈을 벌까



  거창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는 ‘직업선택의 십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다짐글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찬찬히 읽습니다. 열 가지로 된 다짐글을 하나하나 읽습니다. 이를 슬기롭게 따르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이를 거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테며, 이를 지키기 어렵다 느끼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나는 이 다짐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이러고 나서, 우리 집 아이들한테 들려줄 말을 내가 새롭게 써 보자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내 일 찾기’라는 글을 열 줄로 씁니다.



 * 내 일 찾기 (ㅎㄲㅅㄱ) *

 하나, 하면서 기쁜 일을 하자.

 둘, 하면서 신나는 일을 하자.

 셋, 손수 밥·옷·집 짓는 일을 하자.

 넷, 사랑스러운 일을 하자.

 다섯, 아름다운 일을 하자.

 여섯,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일을 하자.

 일곱,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을 하자.

 여덟, 숲을 짓는 일을 하자.

 아홉, 파란하늘을 보며 바람을 마시는 일을 하자.

 열,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직업’을 찾으라고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직업’을 찾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기쁘게 누릴 ‘일놀이’를 찾아서 마음껏 살찌우기를 바랍니다.


  거창고등학교에서 쓰는 ‘직업선택의 십계’를 보면, 첫째로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라 나옵니다. 나는 이 첫 대목부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찾는데 왜 ‘월급’을 따질까요? 나는 내가 할 기쁜 일을 찾으면 될 뿐입니다. 이 일은 돈이 안 들어올 수 있고, 돈이 많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돈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기쁘게 할 일을 찾으면 됩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둘째는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라 나옵니다. 나는 둘째 대목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나는 내가 신나게 할 일을 합니다. 내가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일 때에 비로소 나는 ‘내 마을’에서도, 내 고장에서도, 내 나라에서도, 어느 한쪽에서 슬기롭게 이바지하는 일꾼이 됩니다. 내가 신나게 하지 못하면서 톱니바퀴가 되는 일이라면, 이러한 일은 안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셋째는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라 합니다. 나는 내가 기쁘고 신나게 하면서 삶을 짓는 일을 하니까, ‘승진’하고는 아랑곳할 까닭이 없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한테는 승진이란 아예 없습니다. 아무래도, 거창고등학교에서는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사람을 헤아려서 이러한 ‘십계’를 지었구나 싶습니다. 고등학교 아이들한테 ‘앞으로 나아갈 길(진로)’을 밝히려 한다면, 도시에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살아갈 길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요. 게다가, 시를 쓰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한테는 ‘승진’이란 없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려는 살림꾼한테도 ‘승진’이란 없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넷째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라 나옵니다. 나는 내가 기쁘면서 신나게 누릴 일을 할 뿐입니다. 모든 조건은 다 갖추어졌을 수 있고,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조건이 있든 없든 대수롭지 않아요.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짓는 일을 기쁘면서 신나게 해야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를 더 보면,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 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 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다른 여섯 가지도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할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다짐글은 ‘삶짓기’나 ‘삶찾기’나 ‘삶사랑’하고는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갑니다. 내가 가는 길에 다른 사람이 있건 없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가는데, 이 길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도 함께 걸을 수 있어요. 게다가, 나는 앞날이 맑고 밝으면서 환한 길을 갑니다. 나는 굳이 어두운 길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길은 내가 밝힐 길이니까요. 내가 스스로 지어서 키우는 길을 가지, ‘장래성이 있든 없든’ 따질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은 삶길이자 사랑길이자 꿈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길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서로 아끼고 좋아할 만합니다. 그러니, 누군가 내 길을 거룩하게 볼 수 있고,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내 둘레에서 나를 북돋우든 말든, 내 언저리에서 나를 깎아내리든 말든, 이를 쳐다볼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내 길을 웃고 노래하면서 갈 뿐입니다.


  나는 언제나 한복판에 섭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별에는 한복판이나 가장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모든 곳은 한복판이면서 가장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두 다리로 우뚝 서서 홀가분하게 노래하는 곳은 ‘내 삶자리’입니다. 나는 내 삶자리에서 내 ‘삶일’을 찾고 ‘삶놀이’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내 곁님이나 이웃이나 동무하고 어깨를 겯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 혼자만 갈 수 없어요. 함께 갑니다. 다만, 함께 가되 억지로 잡아끌면 안 되지요.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래해야지요. 나만 믿고 따르라 해도 안 되고, 나 혼자만 가겠노라 해도 안 됩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노래해야지요.


  무엇보다 나는 단두대로 안 갑니다. 나는 왕관으로도 안 갑니다. 내는 ‘죽음길’이나 ‘허울뿐인 명예’ 어느 곳으로도 안 갑니다. 나는 내 삶으로 갑니다. 오늘 나는 모레로 갑니다. 오늘 나는 내 보금자리로 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일을 물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 된 사람은, 스스로 즐겁고 아이하고 함께 즐거우며 곁님하고도 함께 즐거운 일놀이를 누리면서 삶을 지을 때에 노래가 저절로 샘솟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일 찾기’를 해야지요. ‘직업찾기’나 ‘진로선택’이 아닌, ‘내 일 찾기·내 삶 찾기·내 길 찾기’를 하면서 사랑과 꿈을 가꿀 때에 아름답고 사랑스레 기쁜 하루가 되리라 느낍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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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3-02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지위, 돈만 보고 정하는 어른들과 사회의 모습이 안타깝지요. 아이들도 그리 생각하는게 어른들이 그리 만든거겠죠. 꿈보다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하는 기회를 많이 줘야겠어요. 저도 이런 생각을 깊이 한것은 스물 몇해가 지나서 시작했으니 아이들도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요.

숲노래 2015-03-02 05:30   좋아요 0 | URL
민들레처럼 님 말씀대로,
`월급 따지지 말자`나 `지위 따지지 말자` 같은 말도,
정작 돈과 지위에 얽매인 모습이에요.

비판을 한다면서 세운 거창고 직업십계명일 테지만,
막상 `비판`은 되더라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삶`은 되지 못해요.

직업이 아닌 `꿈`을 그려야 하고, 이 꿈을 `삶`으로 이루도록 하는 `길`을
아이와 어른이 저마다 스스로 가꾸도록 도울 수 있는 `말`을
마음에 심을 때에,
비로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찾을 수 있어요.

늦깎이에 이 대목을 알아도 되고, 일찍부터 알아도 돼요.
언제 알아차리든, 이 대목을 알았으면 그때부터
씩씩하게 나아가면 기쁩니다~
 

[당신은 어른입니까 38] 과학읽기

― 삶을 이루는 알갱이



  제대로 살피고 배워야, 이러한 바탕과 넋과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가르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곁님과 나는 여느 어버이입니다만, 시골에서 마을도서관을 꾸리면서, 우리 아이들부터 다닐 수 있는 시골마을 작은학교를 열 생각입니다. 여느 교과서는 쓰지 않고, 제대로 된 지식을 제대로 다루는 책을 즐거운 길동무로 삼아서 아이와 함께 배우는 이야기꾸러미로 삼으려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배울 과학은 교과서에 있는 시험지식이 아닌, 지구와 우주와 사람과 삶을 이루면서 어우르는 알갱이가 무엇인지 헤아리는 길에서 비롯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리나 생물이나 화학을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삶을 가르칩니다. 삶을 과학으로 바라보고 수학으로 바라보며 말(한국말)로 바라봅니다. 삶을 바느질로 바라보고 자전거로 바라보며 책으로 바라봅니다. 삶을 밥짓기로 바라보고 집짓기로 바라보며 옷짓기로 바라봅니다.


  수식이나 기호가 과학이 아닙니다. 연산이나 조합이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은 삶이 태어나는 바탕을 살핍니다. 과학은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살면서 두 발을 디딘 지구별이 온누리에 어떠한 터로 있는지를 살핍니다. 과학은 사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피고, 과학은 나무와 풀과 꽃이 어떻게 어우러지는가를 살핍니다.


  풀잎과 풀뿌리가 몸 어느 곳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짚는 과학입니다. 물 한 방울이 몸에 어떻게 스미면서 돌고 돌아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지를 돌아보는 과학입니다. 두 눈으로 무엇을 보고, 두 손으로 무엇을 만지며, 두 발로 어느 곳을 밟으며 돌아다니는가를 헤아리는 과학입니다.


  삶을 이루는 알갱이를 찾을 때에 과학입니다. 삶을 이루는 알갱이가 너와 나 사이에 어떻게 흐르는지를 깨달을 때에 과학입니다. 과학은 지식이 아닌 슬기입니다. 지식이 아닌 슬기로 밝히는 과학입니다. 책을 덮고 눈을 뜰 때에 볼 수 있는 과학입니다. 비행기나 엔진이나 핵무기나 발전소가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무기나 잠수함이나 미사일이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과학입니다. 풀 한 포기 과학입니다. 밥 한 그릇이 과학입니다. 실 한 오라기가 과학입니다.


  과학을 제대로 읽을 때에 삶을 제대로 읽습니다. 과학을 똑바로 바라볼 적에 사랑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과학을 옳게 배울 때에 꿈을 옳게 배웁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과학을 곱게 익혀서 기쁘게 북돋울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4347.12.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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