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 살아있는 교육 5
이호철 지음 / 보리 / 1994년 6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배움책 19

 


재미있게 노는 곳이 학교
―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
이호철 글
보리 펴냄, 1994.5.30. 7000원

 


  교사 이호철 님이 쓴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보리,1994)이라는 책을 처음 읽던 때를 떠올립니다. 1994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을 1998년에 처음 읽었습니다. 나는 1997년 12월 31일에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으며, 1998년 1월에 대학교를 그만두려 하다가 한 해 두 학기를 더 다니고 12월에 그만두었습니다. 대학교라는 곳이 졸업장은 쥐어 주지만, 삶다운 삶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랑다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구나 싶어, 스스로 삶과 사랑을 찾고 싶어 대학교를 그만두었어요.

  학점을 따느라 바쁠 젊은 날일 때에는 안쓰럽다고 느껴요. 교수한테 점수를 따려고 눈치를 보거나 아양을 떨거나 선물을 바쳐야 하는 젊은 날이란 얼마나 슬픈가 하고 생각해요. 대학교에서조차 베껴쓰기 숙제를 내는 교수를 보면서, 이런 대학교는 ‘대’라는 이름도 ‘학교’라는 이름도 부끄러운 노릇이라고 느꼈어요. 생각을 넓히거나 마음을 다스리는 이야기 아닌, 교재 몇 권 외우는 시험만 치르는 대학교란, 얼마나 젊은 넋을 살찌우거나 북돋울 수 있는지 알쏭달쏭했어요.


  배움책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눈높이로 나온 책이지만, 이 책에 깃든 이야기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도 함께 살필 만하다고 생각해요.


.. 아이들이 공책 가득히 쓰는 숙제를 잘 해 온다고 해서,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책을 들고 있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쓰는 양이 많아 머릿속에 넣을 사이가 없거나 머릿속에 넣을 능력이 부족해서도 그렇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스스로 하지 않고 하기 싫은 것을 시킴을 받아서 억지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령 그런 단순한 지식 나부랭이를 머릿속에 잘 넣어서 좋은 점수를 얻고, 입시 경쟁에 이기고,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하여 겉보기에 남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된다 해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공부를 못 한 사람은 오히려 배운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 날마다 보여주고 있다 … 시험 전쟁에서 이겨야 하겠지. 당신 아이 같으면 지금 우리 나라 형편에 시험 공부 하지 말라고 하겠느냐 반문도 하겠지. 그 말이 옳다고 하자. 그런데 어떻게 해서 국민학교 어린 아이들까지 거기에 휘말아 넣어서 들볶느냐 하는 것이다 ..  (5∼6, 10쪽)


  ‘숙제’를 내는 학교가 있는 나라는 지구별에 몇 군데 있을까 궁금해요. 공책에 베껴쓰기 숙제를 내며 아이들 생각힘(상상력·창조력)을 짓밟는 학교가 있는 나라는 지구별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요.


  미국에서도 베껴쓰기 숙제를 낼까요? 일본이나 중국은 어떨까요? 베트남이나 라오스는 어떨까요? 칠레나 브라질은 어떨까요? 쿠바나 도미니카는 어떻지요? 덴마크나 스웨덴은 어떤가요? 네덜란드나 프랑스는 어떻게 할까요?


  베껴쓰기 숙제를 내어 아이들한테 무엇을 시킬 수 있을까요. 교과서 달달 외우는 시험공부를 시키면 아이들이 어떤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까요.


  교사뿐 아니라 어버이 누구나 스스로 생각해야 할 일이에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 무언가 지식을 가르치려 한다면, 교사에 앞서 여느 어버이부터 스스로 생각해야 할 일이에요.


  학교에서 베껴쓰기 숙제를 낸다면, 어버이가 소매를 걷어부치고 이런 숙제 못 내도록 교사를 나무랄 수 있어야 해요. 아이들 스스로 생각힘 북돋우는 ‘공부’를 시키지 않는 학교라면, 교사도 교감도 교장도 학교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쫓아낼 줄 아는 어버이가 되어야 해요. 왜냐하면, 어느 아이라 하든, 모두 다른 아름다운 넋을 품으며 태어나요. 어느 아이라 하든,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맑고 밝은 꿈을 품으며 태어나요. 어느 아이라 하든, 즐겁게 살아가며 기쁘게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누릴 숨결이에요.


.. 시멘트 건물과 아스팔트 바닥과 희뿌연 하늘로 둘러싸인 길로 해서 학교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다시 학원에 갔다가 또 집에 돌아가 베끼고 외우는 숙제를 하고, 잠을 자고, 조그마한 틈이 생기면 텔레비전 앞에 앉거나 전자오락을 하고 있으면 거기서 무슨 살아 있는 글이 나올까? 도시 아이들이 농촌 아이들보다 더 싱싱한 글을 쓸 수 없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을 게다 … 손은 손을 가진 자신이 하루에도 여러 번 씻지만 발은 발을 가진 자신도 하루에 한 번 씻을까 말까 한다.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이런 발을 씻어 드리는 숙제를 내어 보자. 때가 있고, 냄새가 나고, 갈라지고, 거친 부모님의 발이 얼마나 귀한 발인가 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  (23, 38쪽)


  아이가 왜 대학교에 가야 할까요? 아이가 대학교에 다니면 아이한테 무엇이 좋거나 즐겁거나 보탬이 될까요? 대학교를 마친 아이는 무슨 일을 하면서 삶을 누릴 때에 즐겁거나 아름답다고 느낄까요? 대학교를 마친 아이는 스스로 어떤 일을 찾아나설까요?


  아이는 왜 고등학교에 다니며 입시공부만 해야 할까요? 아이는 왜 중학교에서 예비 고등학생 되어 예비 입시공부에 시달려야 할까요? 아이는 왜 초등학교에서 예비 중학생 되어 ‘예비에 예비인’ 입시공부에 들볶여야 할까요?


  초등학생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지구별 이웃과 아름다이 어깨동무하도록 이끌려고 영어를 가르치나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왜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나요? 아이들이 캄보디아 동무나 필리핀 동무나 수단 동무나 포르투갈 동무를 사귈 수 있도록 이끌고자 영어를 가르치나요?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고, 스스로 옷을 기을 줄 모르며, 스스로 집을 지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시험성적 뛰어나다면 삶을 얼마나 잘 가꿀 수 있을까 궁금해요. 입시교육이란 삶교육이 아니고, 성교육이란 사랑교육이 아니에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봐요. 전쟁무기를 개발해서 공장을 짓고 엄청나게 만들어 사고팔 뿐 아니라, 이웃나라에 이 전쟁무기 갖추라며 들볶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봐요.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 한 사람들이 누구요, 온갖 차별과 불평등 낳는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해 봐요.


  삶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삶을 망가뜨리는 짓을 해요. 사랑을 익히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깨는 짓을 저질러요. 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꿈을 짓밟는 길을 걸어요. 이야기를 꽃피우지 못한 사람이 이웃이나 동무와 어깨동무하는 길하고 등을 돌려요.


.. 시멘트 문화에 찌들고 딱딱한 기계에서 나는 소리만 들어 마음이 메마른 우리 아이들에게 자연의 소리를 스스로 내면서 듣는 즐거움을 주자.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자연의 소리만 할까. 자연의 소리는 언제나 마음을 맑게 해 준다 … 우리 아이들에게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버리는 휴지나 담배꽁초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담기를 재미있는 숙제로 내어 주었다. 또 버리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주워 보도록 해 보았다. 아이들이 쓴 글을 보니 참 재미있는 일이 많다 ..  (53, 113쪽)


  배움책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에는 초등학교에서 1월부터 12월까지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숙제’를 여러 가지 들려줍니다. 교사 이호철 님이 몸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재미있는 숙제’를 내고는 아이들이 이 숙제를 치르며 겪은 이야기를 스스로 글로 남기도록 이끌어서, 아이들이 남긴 글을 ‘재미있는 숙제’마다 붙입니다. 아마, 아이들로서는 여느 베껴쓰기 숙제가 훨씬 쉬우리라 생각해요. 그냥 베껴쓰면 그만이거든요. ‘재미있는 숙제’를 하자면 1분만에 끝날 수 있기도 하지만 며칠이 걸릴 수 있어요. ‘재미있는 숙제’를 마치고도 스스로 못내 아쉬워 여러 날 더 생각을 기울이기도 해요. 한 번으로 그치기에는 아쉽거나 모자란 ‘재미있는 숙제’도 많아요.


  이를테면, 내 어머니와 아버지 손발 주무르고 발 씻기는 숙제는 한 번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늘 할 ‘집일’이면서 ‘우리 식구 사랑’이에요. 어머니는 아이 발을 씻기고는 주물러 줍니다. 아이는 어머니 발을 씻기고는 주물러 줍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면서 누릴 삶이자 살림이고 하루예요.


  날마다 먹는 밥은 어머니 혼자 도맡아서 차릴 밥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함께 차릴 밥이며, 아이들도 초등학교 3∼4학년쯤이면 스스로 도시락 꾸리도록 밥짓기를 슬기롭고 알뜰하게 할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빨래와 청소도 이와 같아요. 언제나 스스로 삶이 되어야 할 모습이요 매무새입니다. ‘재미있는 숙제’라기보다는 ‘재미있는 삶’, 아니 ‘즐거운 삶’과 ‘아름다운 삶’으로 받아들일 이야기예요.


.. 그래 맨발로 걸어 보기 숙제를 내어 보았다. 모래흙에도 가 보고, 보드라운 흙에도 가 보고, 자갈밭에도 가 보고, 진흙에도 가 보도록 하자. 우리 아이들은 시멘트, 아스팔트 길도 걸어 보았는데 그런 곳도 한 번 걸어 보도록 하자. 그래야만 흙이 얼마나 포근한 것인가도 알 것이다. 발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져 보기, 혀로 자연의 맛 찾아보기, 눈으로 자연의 아름다움 찾아보기, 코로 꽃향기·자연의 향기 맡아 보기, 흙에 뒹굴어 보기, 풀밭에 뒹굴어 보기, 흙장난하며 놀기, 물놀이 …… 아이들에게 찾아 주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  (133쪽)


  가을볕이 퍽 뜨겁습니다. 마루에 가만히 앉아도 등줄기로 땀이 흐릅니다. 마당에 이불을 내놓으니 아주 잘 마르고, 고우며 따사로운 기운이 듬뿍 뱁니다. 들판을 그득 채운 나락은 가을볕 받으며 누우렇게 잘 익습니다. 이제 시골마을 늙은 흙지기들이 기계를 불러 이 나락을 벨 테지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젊은 딸아들은 한가위를 앞두고 시골마을로 살짝 찾아왔다가 도시로 돌아갈 테고, 시골일은 온통 시골마을 늙은 흙지기 몫으로 남겠지요.


  아이들이 ‘재미있는 숙제’를 스스로 하면서 ‘재미있는 삶’을 깨닫도록 이끌 때에 즐겁고 아름다운 삶을 느낀다면, 어른들한테는 ‘재미있는 시골일’을 몸소 하면서 즐겁고 아름다운 삶을 느끼도록 하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가위 연휴나 휴가를 넘어, 시골마을 가을 들일 하는 ‘가을걷이 휴가’를 얻어야 한달까요. ‘육아 휴가’가 있듯이, 관공서도 학교도 회사도 공장도, 시골마을 가을걷이철에는 모두 시골로 돌아가서 늙은 흙지기 곁에서 기계를 같이 부리든 낫을 손에 쥐든, 바쁜 가을 일손 거들 수 있을 때에, 이 나라에 즐거운 웃음꽃과 아름다운 노래잔치 그득하리라 느껴요.


.. 우리의 옷에 우리의 말이 얼마만큼 씌어 있나 찾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그림이 얼마나 그려져 있는지도 찾아보도록 하면 좋겠다. 또 할 수만 있다면 우리 고유의 모양새가 나는 옷과 그렇지 못한 옷을 견주어 조사해 보고 우리 옷의 멋을 깨닫도록 하는 것도 좋겠다. 또 옷에다 우리 스스로 우리말, 우리 그림을 멋있게 그려 넣어 입어 보는 일도 하면 좋겠다 … 보통 아이들은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놓고 맛있느니 맛없느니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이때 자기가 직접 만들어 먹게 하면 쓰다 달다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어디를 가서 늦게 오거나 며칠 어디에 갔을 때 우두커니 굶고 있지만 말고 스스로 해결할 수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루 세 끼 먹는 밥쯤은 여자든 남자든 스스로 해 먹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나 ..  (152, 162쪽)


  아이들은 학교에서 재미있게 놀 때에 씩씩하게 자랍니다. 어른들은 일터에서 재미있게 일할 때에 튼튼하게 살림을 꾸립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즐겁게 배우고 가르치면서 맑은 넋 건사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마을과 집에서 즐겁게 일하고 놀면서 밝은 꿈 이룰 수 있습니다.


  다 함께 먹는 밥입니다. 다 함께 살아가는 지구별입니다. 다 함께 마시는 물입니다. 다 함께 누리는 바람과 햇볕입니다.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물과 바람과 흙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숲이 푸르게 우거져 맑은 노래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거침없이 뛰놀아야지요. 어른들은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하면서 두레도 하고 마을잔치도 벌여야지요. 아이들은 걱정없이 뛰놀아야지요. 어른들은 근심을 내려놓고 서로서로 아끼는 사랑을 꽃피워야지요.


..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베껴 쓰고 외우는 숙제로만 밀어붙이는 것에서 삶터에서, 자연에서 스스로 부딪히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숙제로 바꿔야 할 것이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국민학교 어린이들에게 그 많고 많은 단편 지식들을 다 집어넣었다 한들 무얼 하겠나. 남보다 더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어 시험점수를 잘 받았더라도 그런 단편 지식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쓸모없게 되기도 하고, 자라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많다 ..  (245쪽)


  보름달 곁에 별빛이 곱습니다. 뭇별 곁에서 달빛이 한결 환합니다. 구름이 흐르는 하늘빛이 티없이 파랗습니다. 다슬기 살아가는 도랑물 둘레에서 개똥벌레 불춤을 곱다라니 춥니다. 논자락 곁에서 달개비꽃과 고들빼기꽃 사이좋게 어우러집니다. 숲길에는 쑥부쟁이 한들거리고, 가을 한복판에도 달맞이꽃은 노란 꽃망울 터뜨립니다. 동백나무는 동백열매를 맺고, 아주 천천히 꽃봉오리 맺으려고 조금씩 조금씩 기운을 그러모읍니다. 이듬해에 피어날 동백꽃 봉오리는 요즈막에 조그맣게 자랍니다.


  시멘트 건물에 갇힌 채 10대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은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시멘트 건물에서 풀려나 들을 달리고 바다와 내를 가로지르며 숲에서 푸른 숨을 마시는 아이들은 온누리를 골고루 배웁니다. 도서관에 깃든 책은 숲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를 옮긴 몇 가지일 뿐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살아요. 아이들과 나란히 즐겁게 살아요.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들노래 숲노래 바다노래 하늘노래 흙노래 꽃노래 풀노래 나무노래 불러요. ‘숙제’라는 굴레를 내려놓으면, 시나브로 슬기와 꿈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4346.9.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썽꾸러기 쏘피
세귀르 백작부인 지음, 원용옥 옮김 / 여름나무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 이 느낌글 쓸 수 있도록 책을 선물해 주신 보슬비 님 고맙습니다~ ^^ ..

 

..

 

어린이책 읽는 삶 38

 


놀면서 자라는 아이들
― 말썽꾸러기 쏘피
 세귀르 백작 부인 글
 오라스 꺄스뗄리 그림
 원용옥 옮김
 여름나무 펴냄, 2005.3.5.

 


  신나게 놀며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땀흘려 신나게 일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립니다. 어릴 적부터 신나게 놀며 자라 어른이 된 사람은, 이녁 아이를 낳아 돌볼 적에 재미나게 놀면서 누리는 즐거움을 물려줍니다. 손발가락을 놀리고 온몸을 놀리면서 자랄 적에 튼튼합니다. 콩콩 뛰고 폴짝폴짝 뛸 적에 씩씩합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나비와 함께 날듯이 내달릴 적에 야무집니다.


  제대로 놀지 못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책상맡에서 주어진 일감을 맡기는 하지만, 스스로 슬기롭게 생각을 빛내며 아름답게 일하지는 못합니다. 스스로 온몸 놀리며 자라지 못한 탓에, 둘레 사람들 삶을 깊이 헤아리지 못합니다. 스스로 온몸 움직여 놀지 않은 버릇이 박혔기에, 교통 정책이나 문화 정책이나 사회 정책이나 경제 정책 모두 재미없을 뿐더러, 이웃을 넓게 헤아리지 못합니다.


  동무네 집을 두루 다니면서 놀 줄 알아야 합니다. 냇물에서 물장구치고, 숲을 쏘다니며, 바다와 들판을 시원스레 가르며 놀 줄 알아야 합니다. 흙을 만지고, 나무막대기를 주으며, 돌을 옮기면서 놀 줄 알아야 합니다. 나무를 타고, 풀을 꺾으며, 꽃을 쓰다듬으며 놀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놀려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숙제를 하거나 시험공부를 하려고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실컷 놀고 기쁘게 웃으려고 이곳에 태어납니다. 어린이집에 가거나 유치원에 가거나 학교에 들어가려고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사랑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교육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먹고 자라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서울로 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야 하지 않아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 되면 재미난 삶 될까요. 의사나 판사나 뭣뭣이 되면 삶이 즐거울까요.


  동무와 놀고 이웃과 사랑할 수 있는 삶이 될 때에 아름답습니다. 동무와 어깨를 겯고 이웃과 사랑을 나눌 때에 웃음꽃이 핍니다.


.. “하지만 햇볕을 받으면 말랑말랑해진단다. 그러면 인형이 망가질 거야. 난 분명히 일러 줬다.” 쏘피는 엄마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형을 뜨거운 태양 아래 눕혀 놓았다 … 엄마가 쏘피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그만 해. 자꾸 이것저것 궁리하지 말고 조용히 해. 다칠지 안 다칠지는 너보다 엄마가 더 잘 알아. 절대로 혼자서 안뜰에 가면 안 돼.” 쏘피는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뾰로통한 표정이었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가야지. 재미있으니까 갈 거야.” ..  (12, 25쪽)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주차장은 그만 닦아야 합니다. 자동차가 넘친다면, 외려 주차장을 줄어야 합니다. 자동차가 넘치니, 이 넘치는 자동차가 찻길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하는 정책을 꾀해야 옳습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주차장을 없애고 놀이터와 쉼터로 바꾸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뛰놀 자리를 마련하고, 어른들이 쉴 터를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은 교사들 주차장으로 빼앗기기 일쑤입니다.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박으면 아이들은 그나마 흙을 만질 땅조차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험공부만 시키니, 운동장에서 개구지게 뛰놀지도 못합니다. 운동장이 넓다 하지만 축구나 야구를 하는 몇몇 아이들 있으면, 그나마 시원스레 놀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학교 운동장에서만 놀아야 하지 않아요. 어느 동네에서나 놀 수 있어야 해요.


  시내나 읍내나 면내 한쪽에 반드시 주차장 아닌 놀이터와 쉼터가 있어야 합니다. 시골마을 한쪽에도 빈터가 있어야 합니다. 빈터에서 아이들이 거리낌없이 놀 수 있어야 합니다. 구슬을 치건 돌을 치건 막대기를 치건, 아이들이 서로서로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즐겁게 웃음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놀이기구나 저런 놀이시설이 꼭 있어야 하지 않아요. 아무 놀이기구 없어도 되고, 어떤 놀이시설 없어도 됩니다. 빈터면 넉넉합니다. 빈터에는 나무그늘 드리워야 하고, 풀밭이 있어야 합니다. 곁에 냇물이 맑게 흐르면 더 좋습니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면 아주 좋습니다. 아이들은 숙제도 공부도 학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푸른 마음 되어 신나게 놀며 하루를 누릴 수 있어야 튼튼하고 참답게 클 수 있습니다.


.. “아가씨, 말을 안 들었으니 매를 맞아야 마땅해요. 하지만 고마우신 하느님이 이미 아가씨한테 이렇게 혼을 내셨어요. 그러니까 내가 내릴 벌은 아가씨가 마을 축제 때 쓰려고 지갑에 넣어둔 동전 5프랑으로 하녀 아줌마의 새 앞치마를 사도록 하는 거예요.” … 엄마들은 그 방을 나왔다. 하지만 쏘피가 발명한 우스꽝스런 식사 때문에 자신들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제 아이들만 남았다. 뽈과 쏘피는 싸운 것이 부끄러워서 서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까미유와 마들렌이 그 둘에게 입맞춤을 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또 서로 화해를 시키려고 했다 ..  (28, 101쪽)


  놀이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노래를 부릅니다. 누구한테서 배운 노래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노래가 샘솟습니다. 가락이 샘솟고 말이 샘솟아요. 노래란, 어떤 가락이나 말을 누구한테서 배워 똑같이 부를 때에 노래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이야기를 제 가락에 맞추어 제 말을 거침없이 터뜨릴 적에 노래입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에는 푸른 숨결이 깃듭니다. 언니가 동생한테 놀이를 물려줍니다. 오빠가 동생한테 놀이를 이어줍니다. 아이들은 서로 놀이를 물려주고, 노래를 가르칩니다. 천천히 천천히 이루어지는 놀이와 노래입니다. 스스로 씩씩하고 놀고 푸르게 자라는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스스로 일을 찾고 스스로 즐겁게 일하며 스스로 기쁘게 노래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루어지며 이어진 ‘일노래’란 바로 어릴 적부터 신나게 놀며 ‘놀이노래’ 부르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부른 노래입니다.


  즐겁게 놀아야 즐겁게 일하지요. 놀지 못한 사람이 일하지 못해요. 노래하며 놀아야지요. 노래하지 놀지 못한 사람이 노래하며 일하지 못해요.


  대학생들을 보셔요. 놀 줄 아는 대학생이란 없어요. 술 마시고 담배 태우고 짝짓기를 하려고 어른 흉내를 내지만, 정작 스무 살 싱그러운 나이를 한껏 빛내는 놀이란 한 가지조차 없어요. 스스로 놀이를 빚지 못하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못해요. 모두 텔레비전이나 책이나 학교나 둘레 어른한테서 기웃거린 빈 껍데기 물질문명만 가득합니다. 오늘날 어른들 스스로 놀 줄 모르고 놀지 않고 노래할 줄 모르며 노래하지 않으니, 이 젊은이들은 놀거나 노래하는 기쁨을 모릅니다. 이 젊은이들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논 적이 없어요. 오직 시험공부에만 파묻힌 채 자랐어요. 주민등록증은 있되 어른이 아닙니다. 술담배는 거리낌없이 할 테지만, 자유도 꿈도 창조도 생각도 일구지 못합니다.


.. 마음씨 고운 뽈도 역시 속상했다. 어떻게 하면 쏘피가 야단맞지 않을까만 생각했다. “가시덤불에서 넘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잠깐만, 두고 봐.” 뽈이 말했다. 뽈은 달려나갔고 쏘피도 뒤따라갔다. 아이들은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뽈이 호랑가시나무 덤불숲 쪽으로 향하더니 그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안에서 잎사귀들의 뾰족한 끝에 얼굴이 긁히고 상처가 나도록 몸을 굴렸다. 그리고 일어섰는데 그전보다 훨씬 더 긁혀 있었다 … “우리 착한 뽈, 너는 정말 착해! 그러면 일부러 넘어졌단 말이야? 많이 아팠을 텐데.” 쏘피가 뽈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니야. 저렇게 낮은 의자에서 넘어졌는데 어떻게 아플 수가 있겠어. 이제 우리 다시 친구가 되었으니 놀러 가자.” ..  (115, 130쪽)


  노는 아이들은 살결이 까무잡잡합니다. 노는 아이들은 뱃살이 나올 틈이 없습니다. 노는 아이들은 눈빛이 초롱초롱합니다. 노는 아이들은 별과 달과 해와 구름을 늘 만납니다. 노는 아이들은 꽃과 풀과 나무를 사랑합니다. 노는 아이들은 물맛과 밥맛을 압니다. 노는 아이들은 여린 동무를 아끼고, 어깨동무를 즐깁니다.


  구슬땀을 흘리며 놀기에 튼튼합니다. 튼튼하게 자랐으니 튼튼하게 일하는 어른이 됩니다. 온몸이 골고루 튼튼히 자랐으니 야무지게 일할 줄 아는 어른이 됩니다. 눈빛이 맑으니 스스로 아름다우면서 착하고 참다운 일거리를 찾고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별과 달과 해와 구름을 읽을 줄 알기에, 밥과 옷과 집을 정갈하며 곱게 건사합니다. 꽃과 풀과 나무를 사랑하듯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지요. 숲을 돌보고 마을을 보살핍니다. 물맛과 밥맛을 알기에 흙을 살찌우고 기쁨 어린 씨앗을 환하게 웃으면서 심습니다. 여린 동무를 아끼면서 이웃 누구나 반깁니다. 어깨동무를 즐기기에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을 힘과 슬기를 모아 이룹니다.


  놀이는 삶입니다. 삶은 놀이입니다. 놀이는 일이 되고, 일은 어느새 놀이와 같습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길은 일놀이가 한동아리 되어 흐르는 웃음꽃과 땀방울에 있습니다. 사랑을 빛내는 착한 꿈은 일놀이 누리면서 함께 부르는 노래에 있습니다.


.. “가엾은 쏘피. 네가 도둑질을 한 사실을 잊게 할 방법이 뭔지 알아? 그건 사람들이 앞으로는 너를 의심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직해지는 거야.” 뽈이 말했다 … “만약 옷핀에 대해서 말하면 야단맞을 거야. 그리고 당나귀를 뺏어 버리실 거야.” “내가 보기엔, 항상 사실대로 말하는 게 더 나아. 네가 뭔가를 이모님한테 숨기려고 할 때마다 이모님은 금방 아셨잖아. 그리고 네가 사실대로 말했으면 벌을 조금 받았을 텐데, 항상 더 심한 벌을 받곤 했잖아.” ..  (166, 183쪽)


  세귀르 백작 부인이 글을 쓰고 오라스 꺄스뗄리 님이 그림을 그린 《말썽꾸러기 쏘피》(여름나무,2005)를 읽습니다. 무척 오래된 동화책입니다. 서양나라에서 이백 해쯤 앞서 아이들이 어떻게 놀며 자랐나 하는 대목을 헤아릴 수 있는 글입니다. 개구지게 놀던 말괄량이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찬찬히 보여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어른들은 쏘피를 가리켜 ‘말썽꾸러기’라 말하는데, 어린 쏘피로서는 무엇이든 스스로 하거나 겪고 싶을 뿐입니다. 어른들은 예전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겪으며 쏘피한테 ‘이렇게 하지 말라’라든지 ‘저렇게 하라’고 말하는데, 어린 쏘피는 스스로 부대끼면서 하나하나 느끼고 싶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쏘피를 낳아 돌본 어머니도 이녁이 어릴 적에는 쏘피처럼 놀았으리라 생각해요. 모두들 어릴 적에는 쏘피처럼 개구지게 놀았으나, 어른이 되면서 얌전을 떨고 아이들 나무라는 모습이 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리거나 놀면서 자랍니다. 그런데, 때로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쏘피하고 함께 놀면서 놀이를 물려줄 수 있어요.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릴 적 놀며 부른 노래를 쏘피한테 가르칠 수 있어요. 이것은 하지 말고 저것은 하라는 틀을 넘어, 새롭게 놀이를 함께 즐기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인걸요. 아이답게 이런 놀이를 하고 싶은걸요. 아이스럽게 저런 장난을 치고 싶은걸요.

  큰소리로 까르르 웃는 아이더러 조용히 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온몸이 자라느라 온몸이 간지러운 아이들은 펄쩍 뛰고 폴짝 납니다. 이 아이들더러 얌전히 있으라거나 다소곳하게 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흙놀이나 모래놀이 하고픈 아이들을 말리면 안 됩니다. 흙놀이와 모래놀이 실컷 즐기도록 하고는, 다 놀고 나서 옷을 털고 손을 씻도록 이끌면 됩니다. 물놀이 하고픈 아이한테 갈아입을 옷 챙겨 주면 됩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아이한테 숲속 멧새 노래 듣기를 시키고, 풀벌레 노래잔치에 귀를 기울이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아이한테 씨앗을 주고 스스로 심어 보살피도록 하면 됩니다. 바느질을 보여주면서 함께 옷을 기우면 됩니다. 설거지도 걸레질도 같이 하면 돼요. 어린 동생 달래며 재우는 일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어요.


  놀면서 자라는 아이들입니다. 공부하거나 숙제하면서 자라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놀면서 사랑스레 자라는 아이들입니다. 학교를 다니며 사랑스레 자라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놀고 어깨동무하면서 사랑과 꿈을 키우는 아이들입니다. 졸업장과 자격증을 거머쥔대서 아이들 마음속에서 꿈이나 사랑이 샘솟지 않습니다.


  삶터란 일터이면서 놀이터입니다. 놀이터란 일터요 삶터이면서 사랑터입니다. 일터란 삶터이자 놀이터요 사랑터인 한편 꿈터입니다. 우리 보금자리는 싱그러이 빛나는 숲집입니다. 4346.9.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를 키우는 아이 - 아빠 육아, 이 커다란 행운
박찬희 지음 / 소나무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배움책 18] 박찬희, 《아빠를 키우는 아이》(소나무,2013)

 


- 책이름 : 아빠를 키우는 아이
- 글 : 박찬희
- 펴낸곳 : 소나무 2013.2.7. 13000원

 


  마당이 있는 집과 없는 집은 아주 다릅니다. 마당이 있는 집은 마당을 실컷 누리고, 마당이 없는 집은 마당을 하나도 못 누립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다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은 혼자서 신나게 뛰어놉니다.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살면 아이들은 집안에서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놉니다.


  먼먼 옛날을 돌아보면, 아무리 가난하다 하는 집이라 하더라도 모두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나 권력자 빼고는 모두 ‘시골사람’이었어요. 시골사람이던 사람들은 마땅히 시골에서 살았고, 시골에서는 누구나 스스로 흙을 일구면서 밥과 옷과 집을 얻어 살았어요. 이때에는 모든 집이 마당을 누렸을 뿐 아니라, 삽짝문 열면 온통 들이요 숲이면서 놀이터이자 일터였습니다.

  옛날 옛적 아이들은 ‘층간 소음’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학교나 학원이나 숙제나 입시에 들볶이지 않았습니다. 신나게 놀고 즐겁게 일하면서 하루를 누렸어요. 아이답게 놀면서 몸이 자라고, 어버이 일손을 곁에서 거들면서 마음이 컸습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삶을 일구면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삶을 지켜보면서 삶을 배웠습니다. 어른들은 춤과 노래와 이야기로 슬기와 꿈과 사랑을 아이들한테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누리면서 마음속에 빛을 담았습니다.


.. 축하 인사를 받고 술 한잔 하다 어느 순간 아내 얼굴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애는 나 혼자 낳았냐고! 제발 애 키우는 일 좀 도와줘!” … 아내는 내가 야근한다는 말에 한 번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  (5, 78쪽)


  마당이 있는 시골마을 조그마한 집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겼기에 마당을 기쁘게 누립니다. 아이들은 거리끼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있는 힘껏 하늘로 부웅 날았다가 사뿐히 땅에 내려앉습니다. 두 발 높이 들며 척척 걷습니다. 까르르 웃으면서 빙빙 달립니다.


  시골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도시로 나들이를 가면 몹시 힘듭니다. 아무 데에서나 달리지 못하고 뛰지 못하며 노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버스나 기차나 전철을 탈 적에는 목소리를 낮추라는 꾸지람을 끝없이 들어야 해서 싫어합니다.


  참말 갑갑하지요. 여러 시간 꼼짝을 않고 앉되, 떠들지도 말고 노래부르지도 말며 반듯하게 앉아야 한다면, 이 짓은 마치 고문이라 할밖에 없습니다. 어른들한테 이렇게 시켜 보셔요. 좁은 걸상에 척 앉히고는 꼼짝을 하지 말라고 시켜 보셔요. 어느 어른이 몇 시간을 견딜까요. 아니 한 시간을, 아니 삼십 분을, 아니 십 분을 버틸까요.


  우리 어른들은 층층이 겹겹이 포갠 시멘트집을 ‘내 집’으로 장만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뛸 수도 없고, 목청껏 노래부를 수도 없는 아파트를 ‘보금자리’로 삼으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일까요. 마당 있는 집 아닌 아파트에서 살 수밖에 없는 노릇일까요. 다세대주택 아니고는 보금자리를 찾을 길이 없는 노릇일까요. 시골마을 작은 집을 마련해서 마당을 누리고 흙을 만지면서 살아가자면, ‘꿈을 못 이루’거나 ‘돈을 못 벌’거나 ‘이름을 못 날리’는 셈이 될까요.


  생각해 보면, 어른 스스로 놀 줄 모르니 도시에 남는다고 할 만합니다. 어른 스스로 놀 생각이 없으니 층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에 살려고 할는지 모릅니다. 춤추고 노래하는 즐거움을 모르기에, ‘층간 소음’ 때문에 걱정스러운 아파트에서 굳이 살아가려 한달 수 있습니다. 햇볕을 쬐고 산들바람을 마시며 풀노래를 부를 뜻이 없으니, 애써 도시에 남아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노동자 되어 돈을 벌 생각이라 할 만합니다.


.. 그때까지 내 주변에서 아빠가 아이를 돌보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런 결정을 하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아이를 보리라고는 꿈꾸지 않았다 … 아내는 계속 피곤했다. 음식은 아내 몫이라는 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렀다 … 이가 삐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문제라는 판단은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이 만들어냈다 … 나부터 건강하고 즐거운 마음을 지녀야 서령이도 밝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  (16, 53, 72, 175쪽)


  우리 아이들은 어떤 사람으로 자랄 때에 아름다울까요. 오늘 이 나라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참말 어떤 사람으로 자랄 때에 사랑스러울까요.


  서너 살도 아닌 두어 살, 또는 한두 살에 유아원에 들어가야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랄까요? 고작 너덧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한글을 떼고 영어노래를 불러야 사랑스러울까요? 일고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기 무섭게 온갖 학원을 다니면서 일찌감치 입시지옥 굴레에 갇혀야 씩씩하게 자랄까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꿈을 펼칠 때에 참다우면서 참답고 아름다운 마음이 될까요? 이 아이들은 밥짓기·옷짓기·집짓기를 어버이한테서 배우지 못하고 스무 살이 되거나 서른 살이 되어도 될까요? 밥도 옷도 집도 스스로 지을 줄 모르는 채, 오직 돈으로 밥과 옷과 집을 사들여서 누리면 될까요?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짝꿍을 만나 새롭게 아이를 낳는다고 할 적에, ‘아이키우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아이들 어버이가 했듯이 똑같이 되풀이하면 될까요? 유아원·어린이집·유치원 찾느라 골머리를 앓으면 어버이 구실 잘 하는 셈일까요? 아이들 태울 큰 자가용 뽑아서 굴리면 될까요? 아이 돌볼 일꾼을 집에 두면 될까요?


  아버지 사랑과 어머니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눈빛이 다릅니다. 할머니 사랑과 할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큰 아이들은 눈망울이 다릅니다.


  아이들은 교육받거나 훈육받거나 훈련받을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사랑받을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사랑을 입으며, 사랑을 누리면서, 신나게 뛰어놀 때에 비로소 아이답습니다. 그러면 어른은? 어른들은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며, 사랑을 꽃피울 적에, 이러면서 즐겁게 일할 적에 비로소 어른답습니다.


.. 아이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말해 주면 아이는 그 상황이 닥쳐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 나의 세상도 서령이를 기준으로 바뀌어 갔다. 집안 물건은 서령이에게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으로 구분하였다 … 서령이는 노래 잘하는 아빠가 아니라 신나게 노래를 불러 줄 아빠를 원했다 … 흔들거리는 서령이 다리가 내 다리에 닿을 때의 기분은 언제나 좋다. 평일 낮에 가고 싶은 곳을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지금쯤 친구들은 회사 일로 정신이 없겠지. 친구들아, 이 기분을 알겠니 ..  (23, 30, 48, 59∼60쪽)


  낭창낭창 노래를 부릅니다. 두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려고 날마다 밤이면 사근사근 노래를 부릅니다. 초·중·고등학교 다니며 음악 실기시험 치를 적에 늘 낙제 점수를 받은 ‘노래 솜씨’이지만, 두 아이를 돌보며 여섯 해째 날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 노래를 들으면서 보드라운 얼굴빛 되고, 아이들은 아버지 노래를 삼십 분이나 한 시간, 때로는 두 시간쯤 들으면서 시나브로 꿈나라로 접어듭니다.


  오늘 문득 내 노래꾸러미에 새 노래를 더 보태야겠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을 재우거나 놀리면서 서너 시간쯤 다 다른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여섯 살 큰아이가 새롭게 들으면서 즐길 만한 노래를 찾아야겠다고 느낍니다.


  마흔 해 살아오며 이제껏 들은 노래를 하나둘 떠올립니다. 대중노래이든 민중노래이든 아이들과 함께 부를 만한 노래가 매우 드뭅니다. 노랫가락이 예쁘다 하더라도 노랫말이 엉터리라거나 어설픈 노래가 아주 많습니다. 나는 노랫가락만 살리고 노랫말을 몽땅 바꾸어 부릅니다. 가을로 접어든 선선한 깊은 밤, 풀벌레가 우리들 새근새근 잘 자라면서 풀노래 불러 준다는 이야기에 가을비 똑똑 듣는 고소한 소리를 곁들이는 노랫말로 바꾸어 부릅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 모두 예쁘며 착하고 사랑스럽다는 노랫말로 고쳐서 부릅니다. 어려운 말은 쉬운 말로 고쳐서 부르고, 일본 한자말이나 중국 한자말은 고운 한국말로 바로잡아서 부릅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즐겁습니다. 아이들 얼굴보다 내 얼굴이 먼저 환하게 빛납니다. 아이들 재우거나 놀릴 적에 삼십 분이나 두 시간이고 쉬잖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힘은 바로 내 마음속에서 샘솟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맑아지고 밝아지는구나 하고 느끼기에 신나게 노래를 거듭거듭 부릅니다. 아이들도 노래를 들으며 즐겁고, 노래를 듣다가 따라서 부릅니다.


  밥을 지어 차릴 적에는 아이들 먹일 밥이면서 나와 옆지기가 함께 먹을 밥입니다. 아이들 살찌우는 밥일 뿐 아니라 내 몸을 살찌우는 밥입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시골마을 작은 집은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 즐거운 놀이터가 되면서, 나로서는 내 마음을 따사롭고 넉넉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일터이면서 삶터입니다.


.. 나에게 놀이터란? 눈치가 보이는 곳이다. 또한 전업주부라는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엄마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주말이나 공휴일, 평일 퇴근 무렵, 혹은 평일이라도 아내가 휴가를 내서 함께 낮에 공원에 갈 때는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주말이나 평일이나 나라는 사람은 똑같은데도 그렇다. 평일 낮에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 가는 아빠란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존재였다 … 죄의식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 엄마들의 책임이 늘면 상대적으로 책임이 줄어드는 사람들. 안타깝게도 엄마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남편이다 ..  (245, 270쪽)


  마음이 맞는 짝꿍을 사귀어 사랑을 속삭이는 일은 사람살이에서 아주 크나큽니다. 사랑을 속삭일 짝을 만날 때에, 스스로 삶을 살찌우면서 가꿀 수 있어요. 짝꿍한테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답게 빛나면서 서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이끄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살포시 모여서 아이가 태어나지요. 사랑하는 두 사람은 두 사람만 있어도 아름다운 나날 누리는데, 이 사이에 아이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래, 우리가 이 아이처럼 우리 어릴 적에 놀랍고 멋진 사랑을 아름답게 물려받으면서 자랐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줄밖에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어린 나날부터 사랑을 물려받으면서 자랐거든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베풀밖에 없습니다. 어버이 된 사람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면서 고운 사랑을 듬뿍 먹으며 컸거든요.


  박찬희 님이 쓴 ‘아빠 육아일기’인 《아빠를 키우는 아이》(소나무,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박찬희 님은 ‘전업주부’가 아닙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한 해 즈음 말미를 얻어 아이하고 ‘놀았’을 뿐입니다.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지어서 아이한테 베풀지 않습니다. 그저 ‘놀았’을 뿐이에요. 놀았다고 해도 제대로 놀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놀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 해 즈음 아이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보내면서 박찬희 님 스스로 ‘많이 자랐’습니다. 아이를 돌본다고, 아니 ‘옆지기가 회사를 다니는 동안 육아 전담’을 한다고 했지만, ‘아이와 조금 놀’면서 ‘아버지 박찬희’ 님은 스스로 많이 자랐습니다.


  이제껏 생각조차 못하던 일을 몸으로 겪으니 하나둘 새롭게 배웁니다. 여태껏 이녁이 맡아서 할 일이라고 여기지 않던 일을 몸소 하다 보니 하나하나 새삼스럽게 배웁니다.


  배워야지요. 박찬희 님이 할아버지 되어 손자 손녀 돌볼 앞날을 헤아려 보셔요. 아이를 사랑하는 길을 바로 오늘 즐겁게 배워야지요. 나중에 할아버지 될 날에 앞서,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사랑스러운 아이’한테 물려줄 사랑을 듬뿍 베풀어야지요. 온통 베풀고 아낌없이 베풀어야지요.


.. “핵발전소 이야기가 나오면 여자들은 대부분 귀담아 들어요. 아이가 있으니까. 하지만 시비부터 거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이에요.” 내가 이 말을 받았다. “남자들은 논쟁하기 좋아하죠. 핵발전소 문제가 나오면 대개 ‘그것보다 값싼 전기가 어디에 있느냐, 지금 당장 대체할 전력이 어디 있느냐, 혹은 만일을 위해 핵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식이죠. 반면 여자들, 특히 엄마들은 달라요. 핵발전소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아이를 먼저 생각하죠.” ..  (278쪽)


  웬만한 요즈음 한국 사내들은 ‘논쟁하기 좋아하’지 않습니다. ‘삶을 모를’ 뿐이고, ‘사랑하고 등돌린 채 살아갈’ 뿐입니다. 핵발전소 아닌 화력발전소라 해도 모두 똑같아요. 아이를 생각하고 내 몸을 생각합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나무와 숲과 바다와 바람을 모두 생각합니다. 가장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생각합니다. 가장 사랑스럽게 어깨동무할 길을 생각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교육도 모두 ‘아름다운 삶’과 ‘사랑스러운 삶’이라는 눈길로 바라보아야 할 뿐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면 아주 마땅히 옳고 바르며 참다운 쪽으로 갑니다. ‘사랑스러운 삶’을 생각하면 아주 마땅히 착하고 즐거우며 깨끗한 쪽으로 갑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머니들은 으레 ‘밑힘(본질)’을 읽어요. 아이를 함께 낳았어도 아이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들은 자꾸 ‘밑힘(본질)’하고 멀어져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내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지구별과 숲과 온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을 놓고 생각하면 돼요. 아이 똥오줌을 가릴 적이든, 아이한테 밥을 차려 먹일 적이든, 아이한테 옷을 입힐 적이든, 아이한테 비로소 글을 가르치고 그림놀이 할 적이든,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줄 적이든, 아이를 안거나 업으며 놀 적이든, 언제나 사랑을 한복판에 놓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든 일을 아름답게 이루려는 마음이 되어 사랑을 생각하면 됩니다. 언제나 삶을 즐겁게 짓고 누리려는 몸짓으로 사랑을 내 마음속에서 길어올리면 됩니다. 박찬희 님이 둘째 아이도 낳아서, 둘째 아이는 갓난쟁이일 적부터 돌보면 참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둘째 아이를 낳으려면 삶터도 일터도 모두 시골로 옮기셔요. 돈 아닌 사랑이 있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시골에 더없이 아름다운 보금자리 일굴 수 있습니다. 4346.9.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
야누슈 코르착 지음, 노영희 옮김 / 양철북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들’을 우리에 가두는 어른들

- 배움책 읽기

 


- 책이름 : 아이들
- 지은이 : 야누슈 코르착
- 옮긴이 : 노영희
- 펴낸곳 : 양철북 (2002.12.18)
- 책값 : 8500원

 


 ㄱ. 1942년 8월 6일


  유럽에서 큰 전쟁이 다시 터지고 유대사람이 하나둘 끌려가던 1942년 8월 6일, 야누슈 코르착 님은 아이들 손을 잡고 폴란드 거리를 걸었습니다. 고아원 교사 스테파니아 님도 아이들 손을 잡고 걷습니다. 나라가 보살피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버린 아이들은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책을 손에 들고 단출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 트레블링카 가스실이 마지막역인 화물차에 올랐습니다.


  코르착 님을 아는 동무들은 독일군 손아귀에서 코르착 님이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애를 썼지만, “당신 아이가 아프고 불행하고 위험한데 이 아이를 버리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면서 폴란드 거리 곳곳에 버려진 고아들을 거두어서 보살피다가 가스실로 갔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1904년에 의사 자격을 얻은 뒤 러일전쟁 때 군의관으로 징병된 코르착 님은 전쟁을 겪은 뒤, “전쟁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굶주리고 학대받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국가든 참전하기 전에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다치고 죽고 고아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사회를 개혁하려면 먼저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아이들이 어른들한테 빼앗기고 잃어버린 ‘우러름’, ‘사랑, ‘믿음’을 되돌려 주고자 애쓴 사람이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폴란드사람입니다.


아이가 어른과 다른 점은 단 하나,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생계를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35쪽)


  “아이들을 알려고 하기 앞서 나부터 먼저 알려고 애쓰라”고 말하는 코르착 님입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었으나 의술만으로는 아픈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고 느껴 교육자가 되고, 고아원장이 된 코르착 님입니다. “비밀을 캐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가 누려야 할 권리, 어린이한테 지켜 주어야 할 권리를 말하고, 몸으로 한껏 지키려 애쓴 코르착 님입니다.


아이가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고 있을 때
그 숟가락을 빼앗아 버린다면,
단지 물건 하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던
손의 일부를 빼앗는 것입니다. (38쪽)


  우리들은 무엇을 하는 어른일까요. 우리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누리거나 얻도록 힘을 쓰거나 마음을 기울이는 어른일까요. 아이들 권리조차 지켜 주지 못하면서, 아이들 손가락에서 숟가락마저 빼앗아 버리는 못난이는 아닐는지요. 주먹을 들어 머리통을 내갈기거나 손바닥을 펴서 뺨따귀를 때리는 바보는 아닐는지요.

 


  ㄴ. 아이한테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아주 알뜰히 ‘좋은 책’을 기꺼이 사줍니다. 돈이 얼마가 들든 그다지 마음쓰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 책들을 다 읽어내고 속으로 삭히는지는 그다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들은 깜냥으로 끝없이 책을 사줍니다. 그런데 이런 ‘책 사주기’는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끊어집니다. 이때부터는 학원교재, 문제집, 참고서, 학습지뿐입니다. 이제는 과외비에 돈 대느라 바쁩니다.


  책이 아닌 문제집과 참고서를 어버이한테서 받는 아이들은 대학바라기만 합니다. 아니, 대학바라기만 하라는 뜻으로 아이들한테 문제집과 참고서를 잔뜩 안기는 어버이입니다. 다른 책 들출 겨를을 주지 않습니다. 다른 책은커녕 영화나 연극을 느긋하게 누리도록 이끌지 않는 어버이입니다. 아니, 아이들한테 꽃내음이나 나무내음 맡도록 북돋우지 않는 어버이입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아이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숲에서 멀어지고 들에서 멀어집니다. 바다와 하늘에서 멀어지는 아이들이요, 논과 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까맣게 모르는 채 교과서를 비롯해서 문제집과 참고서에 코만 박는 아이들입니다.


무슨 놀이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노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놀이를 할 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합니다. (42쪽)


  내 어릴 적에, 내 어머니가 책을 사주신 일은 아주 드뭅니다. 아버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책을 얼마 안 읽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느라 바빴거든요. 놀이란 놀이는 다 하면서 놀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좁은 우리에 틀어박혀서 주인이 주는 밥만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짐승과 오늘날 아이들이 무엇이 다를까 잘 모르겠습니다. 좁디좁은 우리에 갇힌 짐승들은 이녁 삶과 달리 ‘사람 눈에는 더럽게 보이고 살도 디룩디룩 찝’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이들은 머릿속에 지식은 많이 들어가지만 사람답게 자라나는 사랑과 꿈은 익히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요.


  책을 푸짐하게 사주는 어버이가 그 책들을 아이와 함께 읽고 즐기나요? 아닙니다. 그런 어버이는 아주 드뭅니다. 어린이책에 담긴 깊고 너른 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어버이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아이가 어리니까 사서 읽히게 하는 것’뿐인 어버이가 거의 모두입니다. 교양이니 교훈이니 학습이니, 또 독서훈련이니 글쓰기지도이니 하는 이름에 휘둘려 아이도 어버이도 제자리를 모르고 제길하고 동떨어집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사람다운 길을 모릅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사람다운 길을 잃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스스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과 꿈을 물려받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이녁 스스로 사랑과 꿈을 한껏 즐기거나 펼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집안일조차 안 하면서 큽니다. 아이들은 밥하기나 반찬짓기조차 안 하면서 자랍니다. 아이들은 걸레빨기나 설거지를 제대로 못 배웁니다. 아이들은 씨앗 한 톨 심어서 거두는 손길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구경조차 못합니다. 아이들은 꽃내음과 나무내음을 모르면서 어른이 되는데, 어른들도 꽃내음과 나무내음이 이녁 몸과 마음에 어떻게 이바지하는가를 깨닫지 않아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하늘빛을 보지 않아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바람맛을 살피지 않아요. 어버이가 낳아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커서 어른이 되면 사랑을 어떻게 하고 꿈을 어떻게 키워 이녁 ‘새 아이들’을 만날 때에 즐거운가를 모릅니다. 아이와 함께 누리는 밥과 옷과 집을 어떻게 건사할 때에 아름다운가를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돈을 벌 생각과 돈을 쓸 생각만 하면서 자라는 아이요 어른입니다. 돈에 얽매이기만 하는 하루를 보내는 아이요 어른입니다. 삶이 이루어지는 바탕을 모르지요. 삶을 가꾸는 넋을 모르지요. 삶을 빛내는 눈길을 모르지요.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그 안에는 수백의 다른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 다른 난제이고,
서로 다른 과업이며,
서로 다른 염려와 관심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58쪽)

 


  ㄷ. 사람다운 길


  국제연맹은 1924년에 어린이 인권선언을 뽑고 얼마 뒤에 다시 선언글을 만들지만 ‘말’뿐인 껍데기였답니다. 코르착 님은 국제연맹 선언문이 있기 앞서부터, “선언문은 선의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강요해야 한다. 호의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코르착 님도, 코르착 님네 고아원 아이들도 죽은 지 기나긴 나날이 흘러 1989년, 비로소 ‘어린이 인권협정’이 새롭게 나옵니다. 지구별 여러 나라에서 ‘어린이 인권’을 법으로 다스릴 장치를 마련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인권협정이 있어도 한국에서 살아가거나 자라는 어린이들 모습은 ‘인권을 누리는 모습’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푸름이는 푸름이대로, 또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온갖 짐과 굴레에 갇힌 채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허덕여요. “사실은 어린이들은 인류, 국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고, 현재 여기에 있는 사람들”인 줄 어른들이 모르기 때문일까요.


“엄마는 어른이 차를 엎지르면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엎지르면 화를 내요!”
아이들은 불공평한 대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종종 울음을 터뜨리지만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고 성가신 것으로만 취급합니다.
그리고 무시할 만한 것으로 여깁니다.
“또 칭얼거리고 징징대네!”
이 말은 아이들에게 쓰려고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53쪽)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손길 내밀어 도울 줄 압니다.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 모두 어떻게 지내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이웃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내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입니다. 교육책이나 육아책 백 권 천 권 읽지 않아도 돼요.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 자리에 있던 이들이 책을 많이 읽었기에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나 어른은 아이들 앞에서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누리려 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버이와 어른들 곁에서 물끄러미 삶을 지켜보면서 삶을 배우고, 하루하루 꿈을 키웠습니다.


  풀을 베고 열매를 얻으면서 삶을 배웁니다. 풀노래를 듣고 하늘숨을 마시면서 삶을 익힙니다. 냇물이 들려주는 노래와 바다가 베푸는 잔치를 맞아들입니다. 제비춤과 나비춤을 바라보면서 신나는 놀이를 깨닫습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잘못을 따지는 것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눈치챌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56쪽)


  교사들이 학생들을 때립니다. 교사들은 ‘사랑 매’라느니 ‘체벌’이라느니 하면서, 마치 ‘교육’을 하는 듯 내세우지만, 교사들이 하는 짓은 교육이 아닌 ‘훈육’이거나 ‘훈련’입니다. 그저 아이들을 길들일 뿐입니다. 아이들이 주먹다짐과 발길질에 길들이도록 몰아세울 뿐입니다. 어른이라는 핑계로 아이들한테 낮춤말과 반말을 일삼습니다. 어른이라고 을러대면서 아이들을 때리고 꾸짖고 들볶고 괴롭힙니다.


  그런데, 이런 어른들 모습 가만히 보면, 술 마시고 담배 태우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이 다음으로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극장에 가거나 자가용 몰고 관광지 찾아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우리 어른들은 오늘날 놀이를 즐기지 못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해요. 우리 어른들은 오늘날 이녁 스스로 수렁에 갇힌 채 허우적거리기만 해요. 즐겁게 웃지 않는 어른이요, 기쁘게 노래하지 않는 어른이에요. 삶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스스로 지어서 부르는 어른이 없어요.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대중가요를 따라부를 뿐이에요. 먼먼 옛날부터 어느 시골 어느 마을이건 누구나 일노래를 삶노래와 사랑노래와 꿈노래로 스스로 지어서 불렀는데, 이제 어느 도시 어느 동네에서도 스스로 삶을 노래하지 않고 사랑도 꿈도 노래하지 않아요.


  사람다운 길은 아주 사라졌을까요.

 


  ㄹ. 흐르는 냇물


  코르착 님이 들려준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한테는 예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어요. 윗물, 그러니까 어른들이 맑고 빛나며 아름다워야 아랫물인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고 따르고 우러르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시원한 윗물일 때에 시원한 아랫물입니다. 따사로운 윗물일 때에 따사로운 아랫물입니다. 착하며 참다운 윗물일 때에 착하며 참다운 아랫물입니다.


  청소년범죄는 청소년이 못나거나 말썽만 일으키기에 터지는 범죄가 아닙니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온갖 범죄를 흉내내고 따라하는 범죄입니다. 청소년들이 범죄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터전을 만들고 만 어른들 탓입니다. 남녀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재산차별, 생김새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이 곳곳에 퍼진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면서 자랄까요. 이렇게 ‘차별 넘치는 나라’에서 동무들끼리 따돌리고 괴롭히는 짓이 안 생길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무심한 어른은 화가 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이 물건들을 꺼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머니가 늘어진다거나 서랍 속에 복잡하다는 이유로요. 다른 사람의 소중한 재산을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다룰 수 있나요?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존중하는 마음을 배우겠어요? 그것은 쓰레기통에 들어갈 휴지 조각이 아니라 소중한 물건이고, 눈부신 꿈의 조각입니다. (131쪽)


  아이들을 아이들답게 받아들이고 껴안으며 토닥거리면서 감쌀 수 있는 마음이 소담스럽습니다. 고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할 때에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아이들에 앞서 어른부터 스스로 좋아요.


  고운 마음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어른 스스로 즐겁습니다. 어른 스스로 즐겁게 삶을 누리면, 사회에 어두운 기운 서리지 않아요. 어른 스스로 즐겁게 삶을 누리지 않으니, 이 나라 이 사회 이 마을 이 학교에 갖가지 어두운 기운이 또아리를 틉니다. 어른들 스스로 잔뜩 만들어 놓은 ‘차별’이라는 굴레 때문에 아이들이 슬피 우는데, 이 울음소리를 못 듣거나 안 듣는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낮과 밤, 여름과 가을, 젊은이와 늙은이가 있고,
뜰에는 나비가, 하늘에는 새가 있고,
꽃 색깔이나 사람들 눈 색깔이 저마다 다르듯이
신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만 차이를 싫어하고,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다양성을 불편해 합니다. (146쪽)


  배움책 《아이들》(양철북,2002)에는 코르착 님이 우리한테 건네는 속깊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길 바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허리를 굽히지 말아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서로 같은 키가 되어 같은 눈높이가 되셔요. 아이들은 차별이나 따돌림도 싫어하지만, 허리를 굽실거리거나 알랑거리는 사람도 못마땅해요.


  아이들은 짐승우리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어른들도 짐승우리에서 살고 싶은 생각 없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따순 보금자리에서 살고 싶어요. 어른들도 따순 보금자리에서 살 때에 즐거우리라 느껴요.


  사랑받고 싶은 아이들이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아이들이에요. 어른들도 사랑받을 때에 흐뭇하고, 어른들도 이웃하고 사랑을 나눌 때에 하하호호 웃음꽃 터뜨리면서 삶이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리라 느껴요. 아이들과 걸어갈 길에서 씩씩하게 두 손 맞잡으면서 노래해요. 아이들과 가꿀 길을 맑은 눈빛과 밝은 꿈으로 보듬어요. 4337.11.8.달/4346.8.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3-08-04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 중 하나랍니다. 함께살기님의 이 글도 참 좋네요. 부모가 일방적으로 골라서 사다준 수십권의 책 속에 파묻힌 요즘 아이들보다 어쩌면 책 몇권 없이도 맘껏 뛰어놀고 크던 예전 아이들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 공감하고 또 반성해보게 됩니다.

숲노래 2013-08-04 04:21   좋아요 0 | URL
이 글은 2004년에 처음 썼어요. 그무렵 쓴 글 뼈대는 거의 그대로 두고, 지난 열 해 동안 새로 배운 '우리 말'에 따라 군데군데 손질을 하고 살을 살짝 덧붙였어요. 둘레에 교사가 되고 싶다 하는 사람 있으면, 맨 먼저 이 책을 읽어 보라 하고, 다음으로 이오덕 선생님 책 읽어 보라고 얘기해요.

오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어른들은 모두 어릴 적 즐겁게 뛰놀던 아이로 살았으리라 생각해요. 오늘 행복을 제대로 못 누리거나 잊은 어른들은 모두 어릴 적 즐겁게 뛰놀지 못한 채 학교공부만 죽어라 해야 했던 분들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도 놀아야' 하는걸요... 술 담배 외식 살곶이 관광여행 취미여가 말고, '놀이'를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걸요...
 
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박경희 그림 / 비룡소 / 199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책 읽는 삶 37

 


평론이 할 일
― 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민음사 펴냄,1992.10.20./7000원

 


  아름다움을 그릴 때에 문학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예쁘장한 빛깔이나 무늬가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비싼 보석이나 옷차림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사랑스레 나누는 웃음과 눈물입니다. 아름다움은 살가이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모습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슬퍼서 울지만 씩씩하게 일어서며 새 길 꿋꿋하게 걸어가는 여느 사람들 하루가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환한 노래를 불러 따사로운 마음 나누는 사람들 삶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따사로운 손길이 아름다움이요, 너그러운 눈길이 아름다움입니다. 나뭇가지 뭉텅뭉텅 자르고 이리저리 휘도록 억지로 만든 가녀린 소나무는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이렇게 괴로운 나무는 그만 비싼 값에 사고팔리는 상품이 되고 말아요. 아름다운 숨결 되도록 태어난 나무인데, 바보스러운 사람들 손을 타면서 아픈 생채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아픈 생채기를 보듬는 누군가 있으면, 새삼스레 아름다움으로 거듭납니다. 권력을 노리거나 이름값에 사로잡히거나 돈에 휘둘리는 슬픈 사람들을 살살 타일러 착하면서 참다운 길로 접어들도록 이끄는 누군가 있으면, 이 또한 아름다움이에요.


..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때 그 어린이들은 우리의 새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튼튼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몸을 튼튼히 하면서 정직한 마음들을 가꾸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시절, 전쟁까지 겪으면서도 꺾이거나 절망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가꾸어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훌륭한 나라를 이룩한 어른들이 되었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이 노래를 배우고 즐겁게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 나라는 언제나 싱싱한 새라나이며, 이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는 서로 돕고 정직하게 자라면서 싸움하지 않는 평화의 나라를 지켜 가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하고 훌륭한 노래를 지으신 분도 육석중 선생입니다 ..  (16쪽)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면 평론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줄 때에도 평론이 됩니다. 어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에 따라 재거나 따진다고 해서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동심천사주의도 아니고 사실주의도 아니며 현실주의니 이상주의도 아닙니다. 문학은 그저 문학이지, 문학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해요.


  그림이나 사진이나 노래나 춤을 바라볼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물감으로 그리거나 연필로 그리거나 크레파스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입니다. 붓으로 그리거나 먹으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이에요. 목탄이나 숯으로 그려도 그림이며, 모래밭에 나뭇가지로 그려도 그림이지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 모두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 자락 실어서 보여줍니다. 곧,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적에는 이야기 한 자락 나눌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겉이나 틀, 한자말로 하자면 형식으로는 문학 꼴이나 그림 꼴이나 사진 꼴을 갖추었어도,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면, 문학이 될 수 없고, 그림이 될 수 없으며,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평론이라면,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힐 때에만 문학평론입니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을 놓고 재거나 따지면 연구논문이에요. 이런 글은 학술논문입니다. 이런 글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연구논문은 연구논문이지 평론이 아닙니다. 학술논문은 학술논문일 뿐, 문학평론이 되지 않아요.


  문학평론으로 주고받을 글을 쓰고 싶다면, 스스로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깃든 문학을 읽으면서, ‘문학 즐김이’로서 어떻게 문학을 즐기면서 내 삶에 어떠한 새 이야기 샘솟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면 됩니다.


.. 동요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6·25전쟁 이후까지 활발하게 발표되었으나, 5·16 이후에는 자유시로서 동시가 왕성하게 발표되었고, 동요시는 20년 동안 푹 쭈그러들었습니다. 새로운 동요시의 발표가 없으니 좋은 새 동요 가사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동시는 세련되었으나 어린이들이 쉽게 즐기기엔 무리한 점이 많았고, 새로 불리는 동요 가사들의 대부분은 시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  (62쪽)


  칭찬을 하는 글은 칭찬글입니다. 추켜세우는 글은 추켜세움글입니다. 기리는 글은 기림글입니다.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은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문학작품을 읽고서 참 좋았다고 느껴, 이렇게 좋은 문학작품 내놓은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겠지요, 하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글은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이에요. 이런 글을 쓰면서 섣불리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돼요.


  평론이란 아주 다른 글이에요. 그렇다고 평론은 차갑게 쓰는 글이 아닙니다. 아무나 못 쓰는 글도 아니면서,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글이 평론입니다. 칭찬에도 추켜세움에도 기림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쓸 수 있을 때에 평론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떻게 아름다우며 어떤 이야기인가를 밝히는 한편, 내 삶에서 어떤 아름다움과 새 이야기가 샘솟는가를 드러내는 글에는,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칭찬이나 추켜세움이나 기림이 끼어들지 못하겠지요.


  평론글은 수수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수수한 자리에서 샘솟거든요. 평론글은 투박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즐거이 나누는 이야기란 서로 투박하게 주고받는 말씨에서 자라거든요.


.. 대개 시인은 시를 쓸 때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아껴서 나타냅니다. 깊고 큰 생각이라도 될수록 적은 수의 말로 나타내어야 좋은 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의 시어에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담게 됩니다. 시를 이해하기 힘든 까닭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어렵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해하기 쉬울수록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생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담는 일, 그것이 시를 빚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뜻을 담은 말이라면 속담이나 격언이나 경구나 표어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율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  (74∼75쪽)


  최지훈 님이 한국 동시 작가 이야기를 적은 책 《동시란 무엇인가》(민음사,199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최지훈 님은 1977년에 문덕수·이재철 추천으로 아동문학평론가로 되었다 하며,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1986∼1988년 사이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열다섯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윤석중, 권오순, 신현득, 이오덕, 유경환, 김종상, 박경용, 석용원, 김녹촌, 문삼석, 최춘해, 김구연, 공재동, 전원범, 정두리, 이렇게 열다섯 사람입니다.


  열다섯 사람을 이야기하며 붙인 글이름을 보면, ‘노래 할아버지 윤석중 선생’, ‘통일을 기원하는 만년소녀의 기도’, ‘동요시의 즐거움’, ‘평화를 갈구하는 시정신’, ‘인간을 살리는 자연’, ‘땀에 젖은 무명치마’, ‘어른은 모르는 불빛과 빛깔’, ‘썩어야 다시 사는 생명’, ‘바닷마을, 산마을’, ‘이슬의 노래’, ‘생명의 젖줄, 흙의 노래’, ‘사랑과 그리움’, ‘별, 풀잎, 이슬 그리고 새’, ‘꿈의 공을 차라’, ‘물음표 시인의 정결한 행복’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동시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자꾸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맙니다. 이 책을 평론책이라 할 만한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작가 작품인가를 떠나, 〈새나라의 어린이〉라는 동요를 어릴 적부터 익히 들었고, 학교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지만, 나는 하나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가 무엇이 좋은지 알 노릇이 없는데, 어느 어린이라 하더라도 잠꾸러기가 될 턱이 없습니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아이들 가운데 잠꾸러기는 거의 없습니다. 아니,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은 늦게까지 놀고, 아침에 또 일찍 일어나서 놉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이 많아 바쁘면, 아이들은 퍽 어린 나이에도 어버이 일손을 거듭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은 스스로 나서서 어버이 곁에서 도우면서 살아요. 나는 국민학생 때부터 〈새나라의 어린이〉 같은 동요나 동시가 거짓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어린이)한테 어른이 들려줄 말이란 고작 이뿐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퐁당 퐁당 돌을 던져라’ 하는 동요를 어른들이 부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부르지만, 도시에는 냇물이 없는데 이런 노래 불러서 뭐 하자는 뜻인지 알 수 없었어요. 냇물에서 누나가 나물을 씻는다니, 이런 모습을 본 적도 없는데, 노랫말만 이쁘장하게 붙인 셈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우리(어린이)를 얕잡거나 낮추어 본다 하더라도 이렇게 바보스레 얕잡거나 낮추어도 되는가 궁금했어요.


  내가 즐기던 동요로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가 있어요. 두 가지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도 도시 아이였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을 이 동요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다만, 어릴 적에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를 쓴 사람 이름을 몰랐고,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동요를 쓴 사람 이름을 제대로 알았으며, 이 동요를 쓴 사람 작품도 어른이 된 뒤에 처음으로 읽었어요.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하는 동요도 재미나게 부르면 깜찍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래는 두 번 세 번 부르면 머리가 아파요. 이야기가 보이지 않고, 그저 이쁘장한 말만 죽 늘어놓으려 하니, 마음으로 와닿지 않아요.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이런 동요 불러 주지 않기도 하지만, 누군가 이런 동요 불러 준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동요는 ‘동심천사주의’조차 아니라고 해야 하는구나 싶어요. 아이들을 철부지나 인형으로 삼는 슬픈 어른들 허수아비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야지 싶어요.


  어린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나는 아이들한테 이원수 님 동시에 가락을 입힌 〈햇볕〉 같은 작품을 날마다 여러 차례 부릅니다. “햇볕은 고와요,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선 빨강이 돼요.” 하는 노랫말에서 이야기를 느끼고 사랑과 생각과 꿈을 읽습니다. 그렇구나, 햇볕이 이렇게 고운 손길로 나무와 풀을 살리고 꽃과 열매를 맺으니, 사람들도 아름답게 삶을 누리는구나, 사람들은 서로서로 햇볕 같은 마음씨로 어깨동무할 때에 즐겁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원수 님 동시 〈겨울 물오리〉도 아이들한테 날마다 들려주는 동요이자 동시입니다.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 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하는 노랫말에서 삶을 느끼고 웃음과 눈물을 함께 깨닫습니다. 그렇구나, 오리들은 한겨울에도 얼음장에서 노는구나,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오리뿐 아니라 다른 짐승들은 어떻게 지내지, 또 풀과 나무는 겨울을 어떻게 나고, 씨앗은 새봄을 어떻게 기다리는가, 하고 곰곰이 헤아려요. 아이들한테 이 동요와 동시를 들려주면서도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자꾸자꾸 틔웁니다.


..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 … 박경용 시인은 동시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일반 자유시도 쓰고 시조도 열심히 발표했기 때문에 그 방면에도 만만치 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어린이를 위한 시조, 이른바 동시조를 처음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조 운동을 열심히 펼쳐 나가기도 했습니다 ..  (127쪽)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에서 이원수 동시를 미처 못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윤동주와 백석, 권태응과 권정생 동시를 아직 못 다루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최지훈 님은 시와 동시를 아이들한테 어떻게 밝히려 하는지 좀 궁금합니다.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75쪽)” 하고 말하는데, 율격이란 무엇일까요. 율격이라 하는 틀(형식)이 없으면 시도 동시도 동요도 될 수 없을까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빚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율격은 어떤 틀을 보여줄까요. 아쉽게도,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갖출 율격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밝히지 않습니다. 3·4조나 4·4조나 7·5조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고, 이러한 율격은 한국말 빛깔과 어떻게 어울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율격을 곰곰이 살피면, 율격은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빚습니다. 낱말 숫자가 4·5나 4·6으로 이루어졌어도, 읽는 사람으로서는 4·4나 3·4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어요. 율격은 글잣수가 아니에요. 율격은 마음으로 그리는 가락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글잣수로는 율격을 따지지 못해요. 글을 쓴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찬찬히 가락에 맞추면서 율격을 누립니다.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율격은 처음부터 따질 까닭이 없기도 하고, 율격은 작가와 독자가 얼마든지 새롭게 지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 작가들이 동요를 널리 짓지 못한다 하더라도 작곡가들이 아름다운 동시에 아름다운 가락을 입히면 아름다운 동시이면서 동요가 돼요. 이런 모습은 백창우 님이 아주 잘 보여줍니다. 율격이나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아름다운 동요 가락을 짓지 않아요. 동시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느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가락으로 옷을 입히니 아름다운 동요가 됩니다.


  평론이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는 글이라고, 또한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주는 글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어요. 동요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가락을 입혀서 밝히면서 태어나는 열매입니다. 아름다움을 그린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를 가락을 입혀서 보여주기에 동요가 태어납니다.


  모든 실마리는 아름다움과 이야기에 있어요. 아름다움을 밝히고 이야기를 찾자는 뜻에서 쓰는 글인 평론입니다. 아름다움인지 아닌지 밝히지 못한 채 칭찬만 한다면 평론이 아닌 칭찬글입니다. 칭찬만 하는 글이란 문단을 이리저리 줄세우기 하듯 쪼갭니다.


  최지훈 님은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127쪽)” 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최지훈 님은 ‘동시 수준’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고, ‘높은 동시 수준’이란 무엇인지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 때에 이 나라 동시 눈높이가 올라갈까요? 동시 눈높이는 왜 높이 올라가야 할까요?


  아이들이 즐겁게 누리면서 어른들은 이 나라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아름답게 일구는 몫 즐거이 맡으면 될 노릇 아닐까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동시라는 그릇으로 나누어 주려는 어른일까요? 동시 평론을 할 적에는 아이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볼 뿐 아니라, 슬기롭게 살펴보면서,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똑똑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시지옥이 고스란히 있고, 사회차별과 분단과 불평등이 언제나 드러나는 이 나라에서,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기운을 내야 하는가를 함께 밝힐 때에 비로소 문학도 되고 평론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어린이는 설움에만 젖어 있을 수 없습니다. ‘미래의 인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새 세계를 열어야 할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이는 아무리 기림을 받고 격려를 받아도 부족합니다. 어린이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날기도 하고, 꽃과 같이 아름다움도 창조하고, 창공 높은 곳에 이상으로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254쪽)


  ‘미래의 인간’과 ‘희망’과 ‘설움’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새 세계’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지훈 님이 《동시란 무엇인가》를 쓴 때는 1986∼1988년입니다. 이무렵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요? 이무렵 한국에서 동시를 쓴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려 했는지요?


  최지훈 님은 책 머리말 첫 줄에서 “나는 여의도 광장 같은 데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활발하게 도는 아이들을 보면 참 건강하고 씩씩하게 보여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5쪽).” 하고 말합니다. 뛰노는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튼튼하고 씩씩해 보일 테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여의도 광장 같은 데 빼고 어디에서 이렇게 놀 수 있나요?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몇 군데 광장 빼놓고 어디에서 홀가분하게 뛰노는가요? 아니,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제대로 뛰놀 겨를조차 없이 학원과 입시에 어린 나이부터 휘둘리지 않나요? 시골 아이들도 시골에서 뿌리내리며 사는 길이 아니라 도시로 내몰리거나 떠나게끔 등떠밀리지 않나요?


  어린이문학평론이라 하는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며 어린이문학과 평론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어떤 길로 나아갈 때에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평론하는 글은 사회와 나라와 교육과 문화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빚을 때에 즐겁게 나눌 만한가 하고 되새깁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어린이문학평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