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는 그랬다

 


  1996년 1월에 군대에서 처음 휴가를 받아 강원도 양구를 벗어난 뒤, 지오피 경계근무를 마치고 다른 산속으로 주둔지를 옮기고서 두 번째 휴가를 받았는데, 나를 아끼던 고참 한 분이 한 가지를 부탁했다. 〈이등병의 편지〉 노랫말을 알고 싶은데 바깥에 나가면 알아보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하나 장만하고, 노랫말을 종이에 옮겨적어서 부대로 돌아갔다. 노랫말 적힌 종이를 고참한테 건네고, 그러니까 이이는 전역을 곧 앞둔 병장이었는데, 더듬더듬 노래를 불러 주었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고참은 노랫말을 새기고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김광석이 아닌데 내가 부르는 이 노래로도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는구나.


  고참은 테이프를 받아 이 노래를 몰래 한참 들었다. 김광석 님은 군부대로 공연을 다니시기도 했지만, 내가 있던 부대로 위문공연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있을 무렵뿐 아니라 내 앞에 다른 이들 있을 적에도, 강원도 양구에서도 한참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비무장지대 아닌 ‘완전 무장지대’에서도 영토가 남녘이 아닌 북녘 경계에 있던 우리 부대로는 참말 어느 누구도 위문공연을 오지 않았고, 그런 일도 없었다 한다. 우리 부대에서는 ‘위문공연’이라는 말조차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김광석 님 노래는 부대에서 ‘불온노래’였고, ‘반입금지 물품’ 가운데 하나가 김광석 님 노래테이프였다.


  언젠가 그 고참이 이 노래테이프를 듣다가 하사관한테 걸려서 빼앗겼다. 노래테이프를 부대로 갖고 들어온 나까지 하사관한테 불려갔다. 한참 꾸지람을 듣고 얼마 뒤, 하사관이 이 노래테이프를 들어 보았는지, 아무 말 없이 돌려주었다. 불온노래요 반임금지 물품 목록에 든 노래태이프였지만, 아무 말썽이 없이 지나갔다.


  이 노래테이프는 여러 사람 손을 거치면서 우리 중대에서 그야말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돌아갔다. 이등병에서 일등병이 되고, 어느덧 병장이 되고 여섯 달 뒤에 전역할 무렵, 내가 아끼는 후배한테 이 노래테이프를 물려주었다. 이 노래테이프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늘어져서 못 듣게 되었을까.


  그때에는 그랬다. 이 노래테이프가 걸릴까 걱정한 고참들은 겉에 붙은 스티커를 박박 벗겼다. 이렇게 하면 안 걸릴까 싶어. 그런데, 내무반검사를 하는 행정보급관이나 중대장이나 하사관은 ‘스티커를 벗긴 노래테이프’를 오히려 더 의심하고 빼앗는다. 참말, 그때에는 그랬다.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살아서 바깥으로 돌아가려고 노래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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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 2. 자전거와 함께 살기
― 한 해 동안 주마다 300킬로미터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이오덕 님 글과 책을 만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오덕 님 곁에서 이녁 말씀을 들은 분들 가운데 막상 이오덕 님 넋을 알뜰히 받아먹으며 스스로 마음을 키운 분은 뜻밖에 몹시 적구나 싶었다. 왜냐하면, 이오덕 님은 ‘나를 따르라’ 하지 않았는데, 모두들 ‘이오덕 제자’라는 이름을 내걸며 ‘이오덕 따르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오덕 님은 사람들이 이녁을 ‘스승’이나 ‘선생님’으로 모시는 일을 매우 싫어하셨다. 모두 다른 사람이고 모두 다른 목숨이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살아가는 넋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러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멧골학교에서 마흔두 해를 지내셨다. 그러면, 이 넋과 뜻을 제대로 살피면서 모두들 ‘제자’ 아닌 벗님으로서 ‘어깨동무’ 하는 두레나 품앗이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오덕 님이 쓴 일기를 날마다 읽으면서 새삼스레 생각했다. 이오덕 님 일기책은 2013년 봄에 드디어 ‘다섯 권으로 간추린 책’으로 예쁘게 나왔는데, 이 일기책에는 알짜 이야기가 많이 빠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오덕 님 넋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을 텐데, 이번에 나온 일기책에서 빠진 알짜란 무엇인가 하면, 이오덕 님이 ‘이녁 둘레에서 제자라고 스스로 밝히는 사람(거의 다 현직 교사, 또 거의 다 초등학교 교사)’을 마주하며 느낀 아쉬움을 밝힌 글이다. 한국글쓰기연구회라는 모임을 이오덕 님이 여셨는데, 이 연구회 현직 교사들이 연수모임을 할 적마다 늘 술만 마시고, 제대로 된 공부모임이 이루어지지 않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오덕 님은 이 모임 집어치우고 모임이름을 ‘술 연구회’로 바꾸라는 말까지 자주 하셨다.


  연수모임이 아니더라도, 다른 회원(현직 교사)들이 저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가르치고 배우면서 얻은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내놓지 못하곤 했고, 회원들 스스로 저마다 다른 학교와 다른 아이들을 마주하며 느낀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만큼 되어야 하는 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이오덕 님만 혼자서 꾸준하게 글을 쓰고 책을 엮었을 뿐이다.


  이오덕 님 일기를 원본으로 읽고, 책으로 나오지 못한 글을 원고지로 읽고, 이오덕 님이 온삶을 걸쳐 읽어 건사하신 책을 아침저녁으로 나란히 읽고, 이정우 님이 들려주는 아버지 이야기를 귀로 듣고, 《우리 글 바로쓰기》 책을 내려고 모은 엄청난 신문자료를 샅샅이 읽었다. 이러는 동안 곰곰이 생각 하나를 키웠다. 나는 이곳에서 이오덕 님 글을 모두 갈무리한 뒤에는 ‘내 넋을 살찌워 내 글을 쓰고 내 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이곳에서 이오덕 님 글과 책을 만지면서 차근차근 갈무리하는 뜻이 하나도 없겠다고 느꼈다.


  보리 출판사에서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할 적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보리 출판사에서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이 나오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지만, 이 국어사전이 나온 뒤에는 내 나름대로 ‘내 넋을 더 살찌워 한결 아름답고 알찬 새 국어사전’을 혼자서 스스로 만들 만큼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저지른 말썽, 창비 김이구 님이 보여준 안쓰러운 모습, 보리 출판사 옛 동료들이 내 가슴에 새긴 생채기,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속이 쓰려 죽을 노릇이었다. 마음속에서 솟는 눈물과 아픔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즈음, 2004년에, ‘발바리’라는 모임을 알았다. 서울 광화문에서 한 달에 한 차례 ‘떼거리 잔차질’을 하는 모임이다(http://bike.jinbo.net). ‘두 발과 두 바퀴로 하는 떼거리 잔차질’이라서 발바리 모임이다. 서울 한복판부터 자동차를 줄이고 자전거로 살아가자는 뜻을 알리려는 모임인데, 운영자도 주최자도 따로 없다. 스스로 모이고 스스로 달린다. 집회도 시위도 아닌 ‘자전거 타기’이다. 버스가 경적을 울리며 자전거 타는 사람을 윽박지르건 오토바이가 자전거 앞에서 배기가스 춤을 추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또 천천히, 서울 시내 한복판을 한 시간쯤 달리는 모임이다.


  처음에는 이 모임에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서 함께했다. 그런데, 어차피 자전거모임에 갈 바에는 아예 충청북도 충주부터 서울까지 자전거로 달려야 제맛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동안 길눈을 익힌다. 길그림책을 펼쳐서 충주에서 서울로 가는 일반국도와 지방도로를 살핀다. 이정우 님과 서울이나 인천으로 볼일 보러 함께 움직일 적에 지나가는 일반국도와 지방도로를 눈여겨본다. 이러고서, 어느 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새벽 여섯 시 즈음 길을 나섰다.


  얼마나 설레던지. 편도 15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린다.


  처음 자전거로 150킬로미터를 달리던 날, 다섯 시간 반이 걸렸다. 사이에 쉬며 도시락을 먹느라 이만 한 시간이 나온다. 한 번 이렇게 달리니 등허리와 팔다리가 되게 저리고 결리다. 도시락 먹느라 쉰 삼십 분을 빼면 다섯 시간 고스란히 달린 셈인데, 다섯 시간을 거의 쉬지 않고 달리자니, 땀이 물꼭지 틀어 놓은 듯이 떨어진다. 등에 멘 가방은 내 땀으로 젖고, 옷은 벗어서 짜면 땀물이 줄줄 흘렀다.


  팔다리 안 쑤신 데가 없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그래, 이제부터 자전거로만 다녀 보자.

  첫 주는 충주로 돌아가는 길에 시외버스를 탄다. 다음주부터는 오로지 자전거로만 오간다. 충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충주로. 여름, 가을, 겨울, 봄, 네 철을 고스란히 자전거로 달린다. 비가 오건 태풍이 지나가건 눈이 오건 자전거로 달린다.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눈이 오면 눈을 맞는다. 이제 150킬로미터 편도를 달리는 길이 익숙해, 한 번도 안 쉬고 달리면 네 시간 반만에 서울에 닿는다.


  바보짓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재미있다. 네 시간 반을 한 차례도 안 쉬고 엉덩이에 불이 나든 말든 달린다. 비가 와서 온몸과 가방이 옴팡 젖어도 그대로 달린다.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에 손가락과 얼굴과 발가락 모두 꽁꽁 얼어붙어도 그대로 달린다. 한겨울에 너덧 시간 자전거로 달리면, 몸을 녹이는 데에 두 시간쯤 걸린다. 몸을 녹이느라 이불 뒤집어쓰고 새우처럼 몸을 말아 덜덜 떨면 아주 천천히 몸이 녹고, 피가 따스하게 다시 돈다. 이때에 느낀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 숨쉬는 사람이로구나.


  서울에서 충주로 돌아갈 적에는 가방이 터지도록 책을 산다. 자전거 짐받이에 책을 십 킬로그램쯤 묶는다. 이러던 어느 날, 짐받이 붙인 안장 조임쇠가 부러진다. 서울을 벗어나 이제 막 용인을 지나는데 안장 조임쇠가 부러지네. 책이 너무 무겁구나. 아슬아슬한 자전거를 천천히 달려, 여느 날보다 한 시간 반쯤 더디 달려 충주에 닿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아이들 태우려고 마련하는 수레를 장만하기로 한다. 다른 사람들은 수레를 자전거에 붙여 아이를 태우지만, 나는 서울에서 책방을 돌며 책을 200∼300권씩 장만해서 책을 싣는다. 45킬로그램까지 싣는 수레이건만, 나는 60∼80킬로그램쯤 되는 책을 싣는다.


  이제 수레를 단 자전거를 달려 충주에서 서울로 가자니, 가는 데에 네 시간 오십 분 걸린다. 수레에 책을 가득 채워 충주로 돌아가자면 아홉 시간 걸린다. 자전거가 너무 힘들겠지. 내 몸보다 자전거가 벅차겠지. 이렇게 자전거를 달리니, 바퀴가 이내 닳는다. 체인이 끊어진다. 여러 부속을 모두 갈아끼운다. 내 자전거는 몸통을 뺀 모든 부속을 여러 차례 간다.


  충주 무너미마을은 시골이다. 이정우 님과 읍내마실을 다니다가 장날에 신가게 들러 고무신을 함께 사곤 했다. 이무렵, 고무신을 처음 신으며 아주 좋았다. 비로소 내 발이 내 발답게 숨쉬는구나 하고 느꼈다. 남들은 뒷꿈치 까진다며 고무신을 안 신는다는데, 나는 겨울에도 맨발로 고무신을 꿸 적에 참 즐거웠다. 발가락 꼬물꼬물 숨을 쉬고, 발바닥은 땅바닥을 가까이 느낀다. 맨발 고무신으로 자전거를 달리면, 이 발바닥과 앞꿈치로 발판을 굴러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더 싱그러이 살아난다.


  이오덕 님이 이녁 삶을 언제나 글로 꼬박꼬박 적어서 남기셨듯, 나도 자전거로 이 땅을 달린 이야기를 꼬박꼬박 적어 놓는다. 누가 읽어 주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다. 자전거를 타고 충주와 서울을 오가는 동안 겪거나 만나거나 느낀 이야기를 그날그날 저녁에 조곤조곤 적바림한다. 자동차들이 얼마나 자전거를 깔보고, 때로는 갑자기 밀어붙이며 괴롭히는지 적는다. 아주 드물게 ‘자전거를 지켜 주려’고 밤에 내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며 다른 자동차를 막아 주는 분을 만나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화이팅!’ 외쳐 주는 분을 만나는데, 이런 분들 이야기도 적는다. 바보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겪은 만큼, 아름다운 사람들도 많이 겪는다. 그래, 그렇지. 이오덕 님 곁에서 ‘이오덕 제자’라고 내세우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바보스럽게 스스로 삶을 못 가꾸는 사람이 있을 테고, 조용히 아름답게 삶을 잘 가꾸는 사람이 있을 터이다.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에 이를 때마다 슬프다.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아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가?


  자전거로 국도를 주마다 300킬로미터 달리며 느낀다. 어느 국도이든 사람이 걸을 자리가 없다. 사람이 걸을 자리가 없으니 자전거가 달릴 자리가 없다. 국도란, 시골에 난 길이다. 도시 한복판에는 따로 ‘인도’가 있다. 사람들 거니는 자리가 도시에는 있다. 그런데,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사람이 다닐 길’은 송두리째 사라진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할매와 할배가 어디 마실을 다닐라면, 찻길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여야 한다. 시골에서는 자동차가 할매와 할배 들이받아 죽이는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시골 할배들은 자전거에 불을 안 붙이고 밤마실을 다니시는데, 시골 국도에서 사람들은 100킬로미터나 120킬로미터까지 마구 달리곤 하니, 그만 밤에 할배 자전거를 치고는 뺑소니로 사라지는 일이 잦다.


  왜 국도 한쪽에 시골사람 걸어다닐 자리를 안 만들까. 왜 국도 한쪽에 시골사람이 걷고 자전거로 다닐 자리를 안 만들까. 관광상품으로 ‘자전거 나들이’ 하는 길을 수백 수천 억 원을 들여 짓지 않아도 된다. 아니, 이런 관광상품을 만들기 앞서, 마을사람이 자동차 걱정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다닐 자리를 마련해야 옳지 않은가. 제대로 된 거님길을 마련하면 자전거길은 저절로 생긴다.


  응어리진 마음을 풀려고 타는 자전거였는데, 두 달 넉 달 여섯 달, 이렇게 흐르고 흐르는 동안 외려 마음이 더 아프다. 이 나라 행정과 정치와 문화와 산업 모두,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새삼스레 몸으로 배우니, 자꾸자꾸 아프다.


  뼈빠지게 자전거로 달려 한밤에 충주에 닿는다. 아홉 시간을 달린 끝에 다리힘이 거의 풀려 마지막 오르막을 가까스로 달린다. 땀에 젖은 옷을 벗는다. 알몸인 채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처음 이곳에 오던 일을 떠올린다. 나는 서울에서 무너미마을로 올 적에 시외버스를 타고 생극이나 무극에서 내린다. 되도록 생극에서 내리는데, 생극에서 내리려 한 까닭은, 생극면에서 신니면 광월리 무너미마을까지 걷는 길이 무척 곱기 때문이다. 무극(금왕읍)에서 내려 걸으면, 자동차가 너무 많아 한갓지지 못하다.


  생극면에서 내려 무너미마을까지 오는 데에 12.4킬로미터이다. 빠른걸음이라면 한 시간 사십 분이면 닿는다. 숲바람 마시고 들내음 맡으며 느긋하게 걸으면 두 시간이나 두 시간 반쯤 걸린다. 걸어서 오느라 땀투성이 되면, 보리밥집에서 일하는 노금옥 아주머님이 “전화 하지, 왜 걸어왔어요. 이 더운 날에(또는 이 추운 날에).” 하고 말씀하신다. “길이 좋아서 걷고 싶어서요.”


  이오덕 님 글을 갈무리하던 네 해를 더듬는다. 자가용 안 몰고 버스를 타고 면소재지에 내려 천천히 걸어서 이오덕 님 무덤으로 찾아온 손님이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없다. 모두들 자가용으로 달려오고, 또 자가용을 몰아 무덤 언저리까지 간다. 이오덕 님이 굳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새소리·바람소리·개구리소리·풀벌레소리 누리면서, 숲노래와 풀노래 듣던 넋을 짚거나 헤아리지 않는다. 꼭 글쓰기연구회 교사들한테뿐 아니라, 다른 분들, 이른바 스스로 ‘이오덕 제자’라는 분들을 볼 때면, 부디 큰길가 보리밥집부터 무덤까지라도 걸어서 오십사 하고 바라지만, 이렇게 걷는 사람이 없다. 이오덕 님이 듣던 꾀꼬리 노래를 듣거나 소쩍새 울음을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다. 감잎 지는 빛깔과 구름 흐르는 빛결 받아안으려는 사람이 없다. 자가용 유리창으로 어떤 소리와 빛을 맞아들일 수 있을까. 자가용에서 어떤 이웃을 사귈 수 있을까. 자가용 달리면서 시골 논흙 밭흙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한다. 이오덕 님은 운전면허증을 딴 적 있을까. 아마 면허증을 딴 적이 없지 싶다. 이오덕 님은 자가용을 몬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가만히 보면 처음부터 ‘자가용과 사귀지 않’았다. 그래, 맞구나. 처음부터 자가용하고 사귀지 말아야지. 4346.11.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내가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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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 1. 큰 출판사와 싸우다
― 이오덕 님 책과 한길사·창비·보리

 


  내가 걷는 길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제부터 말할 만한가 하고 헤아려 본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시골에서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한테, 따로 어디에 몸을 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한테, 이름도 힘도 돈도 없을 테니, 내가 걷는 길 이야기란 대수롭지 않을 만하다. 내가 걷는 길 이야기는 내가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들을 아버지 살아온 이야기이다.


  2003년 8월 31일을 끝으로 나는 출판사 일에서 손을 뗀다. 1999년 8월 8일에 보리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출판사에 첫발을 뗐고, 이곳에서 2000년 6월 30일까지 일했다. 이해 11월 30일까지 전화기를 끈 채 조용히 책만 읽으면서 살았고, 2001년 1월 1일부터 보리 출판사 계열사인 토박이 출판사에서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편집장 일을 했다.


  처음부터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갈 적에는 통역사나 번역가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내 전공 외국말을 너무 엉터리로 가르치는 바람에, 통역사 꿈도 번역가 꿈도 모두 접었다. 대학교는 다섯 학기만 다니고는 그만두었다.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까웠다. 통역사와 번역가 되는 공부를 하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배웠다. 다만, 나한테 한국말을 가르친 스승이나 교사는 아무도 없다. 오직 혼자서 수백 권에 이르는 국어사전과 수천 권에 이르는 국어학 책을 살피고 뒤지고 읽고 하면서 스스로 가르치고 배웠다. 외국말은 외국말대로 제대로 배우면서 한국말을 한국말대로 제대로 익혀야 통역사나 번역가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외국말 배우는 길이 끊어졌다. 얼결에 한국말 공부만 그대로 했고, 이 공부가 오늘날 내가 하는 일이 된다.


  나중에 토박이 출판사에서 일할 적에 들은 이야기인데, 처음 보리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뽑힐 적에, 윤구병 선생이 나를 한 해만 책마을 현장과 실무를 겪게 한 뒤, 이듬해에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 편집’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했다. 새로운 ‘어린이 국어사전’을 만들자면, 대학 학벌에도 어떤 편견이나 주의주장에도 물들지 않은 젊은 사람이 편집장이 되어 자료를 모으고 갈무리하고 엮어야 한다고 했다.


  국어사전 만드는 일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고 느낀다. 그런데 아직 섣부른 길이었을까. 더 배우고 갈고닦을 배움길이 있었을까. 토박이출판사 사장인 윤구병 님 옆지기 님하고 세 차례 실랑이가 있었다. 토박이출판사 사장을 맡기로 한 윤구병 님 옆지기 님은 회사 관리만 맡겠다 하셨으나 자꾸 편집 일을 넘보셨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며 두 차례 실랑이가 지나가고 세 차례 실랑이가 생기자, 나어린 내가 그만두어야겠다고 깨달았다.


  나이로 치면 책마을에서 더 일할 수 있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어린이도서연구회 간사 자리로 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또 전화기를 끈 채 한 달을 살았다. 전화기를 다시 켠 날,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전화 한 통 왔고, 이튿날 충주 무너미마을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이오덕 님 큰아들인 이정우 님을 처음 만났고, 이 자리에서 “아버지 글을 맡아 줄 수 있겠나?” 하는 말씀을 들었다. “저는 실업자라서 벌이가 없어 이곳을 오가는 찻삯이 없어요. 버스삯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했다.


  무너미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서울로 돌아갔다. 사흘쯤 서울 시내 헌책방들 다니면서 무척 오랫동안 책만 읽었다.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려 했지만, 갈피가 잡히지 않아, 무턱대고 온갖 책을 읽고 살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돌아가신 이오덕 님이 지내던 방에서 일을 했다. 이오덕 님이 지내던 방과 책을 둔 방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처음 일한 때부터 석 달 즈음, 먼지를 닦고 쓸며 치우는 일만 했다. 책에 묻은 곰팡이를 닦고 햇볕에 말렸다. 축축하고 눌러붙은 원고를 모두 바깥으로 내놓아 해바라기를 시켰다. 어릴 적부터 코가 나빴는데, 하루 내내 먼지를 마시다 보니 코가 더 나빠졌다. 그래도 시골바람 마시면서 코와 몸을 달랠 수 있었다.


  한창 먼지와 씨름하면서 이오덕 님 남긴 글과 책을 갈무리하던 11월 10일, 갑자기 큰 일이 하나 터졌다. 큰 출판사 한길사에서 이오덕 님과 권정생 님이 주고받은 편지글을 몰래 함부로 내놓았다. 가을걷이를 마쳤으나, 다른 일이 아직 많은 시골인데, 이정우 님은 열 일을 젖혀 놓아야 했다. 충주에서 안동까지 여러 차례 오가면서 권정생 님과 이야기를 하고, 또 전화로도 한참 이야기를 했다. 나도 원고 갈무리는 멈추었다. ‘말썽을 일으킨 한길사에 보낼 내용증명’을 쓰느라 여러 날 걸렸다. 내용증명을 쓰고 나서 권정생 님한테 전화를 걸어 이대로 할까요 고칠 곳 있나요 하고 여쭈었다. 내용증명을 다 쓰고 나서, 매체에 알릴 기사를 썼다. 기사를 다 쓰고 나서는 권정생 님을 찾아가서 보여 드렸다. 몇 군데를 손질해서 올리기로 했다. 오마이뉴스라는 데에 기사를 올리고, 다른 언론사에 보도자료로 띄웠다.


  이때부터 여러 날 격려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비방선전도 들어야 했다. 내(최종규)가 이오덕 님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고서 ‘잘난 척’한다는 비방선전이었다. 윤구병 님한테서 사랑을 받아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 편집장’이 되더니, 이번에는 ‘이오덕 원고 정리 책임자’가 되어, 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분다’는 비방선전이 뒤따랐다. 이런 비방선전은 내 귀로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정우 님이 이녁한테 이런 비방선전을 알리는 전화가 온다고 말씀해 주었고, 책마을에 있는 선배들이 술 한잔 사 주겠다고 하면서 ‘누가 말했는지는 알려 하지 말고 이런 뒷소문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한길사가 저지른 말썽은 열흘째가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출고정지 안 하겠다’고 닷새를 버티었고, ‘출고정지 하겠다’고 했어도 닷새를 더 책을 팔았다. 이정우 님은 짐차를 손수 몰아 파주로 달려가서, 출고정지를 해서 창고에 그대로 남은 책을 짐칸에 싣고 돌아왔다. 이 책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려고 하다가, 권정생 님이 “정우야 태우지는 말아라. 책이 불쌍하다.” 하고 말씀해서 태우지 못했다. 이정우 님은 “그러면, 무너미에 아버지 생각하며 찾아오는 손님한테 한 권씩 드릴까요?” 하고 여쭈었고, “그렇게 해라. 그 책을 팔지는 마라.” 하고 말씀했다.


  말썽은 가라앉았지만, 책마을에서 나를 두고 입방아 찧는 엉뚱한 소문에 시달렸다. 게다가, 한길사 말썽이 가라앉은 뒤 ‘창작과비평사(창비)’ 말썽이 터졌다. 이오덕 님이 공책에 남긴 일기책을 어느 날 커다란 상자 하나에서 찾아냈는데, 이 일기책을 살피다가 창작과비평사에서 이오덕 님이 낸 ‘아이들 글모음’이 ‘인세 계약’이 아닌 ‘매절’로 낸 책인 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어느 해부터인가 창작과비평사는 《우리 반 순덕이》며 《이사 가던 날》이며 《웃음이 터지는 교실》이며, 모두 다섯 권에 이르는 책 간기(판권)에 저작권을 아예 ‘창비’라 적고, ‘이오덕’이라는 이름까지 지워 없앴다.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로구나 하고 느껴, 저작권심의협의회에 정식으로 여쭈었다. 창비 출판사에서 ‘인세 계약’ 안 한 잘못 하나, ‘저작권 표시 의무 위반’ 잘못 둘, ‘미지급 인쇄 소급 적용’ 안 한 잘못 셋, 이렇게 세 가지로 저작권법을 어겼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창비 어린이책 책임자로 있는 김이구 님한테 내용증명을 보냈다. 이러한 일이 있으니 바로잡기를 바란다고 알렸다. 이때까지 지급을 하지 않은 인세를 지급할 것, 이제까지 몇 권 팔았는지 자료를 보낼 것, 이오덕 님한테서 저작권리 물려받은 이정우 님과 새 계약서 쓸 것, 이렇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창비 김이구 님은 ‘창비는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법정에 소송을 걸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글쓰기연구회 교사들과 둘레 사람들이 ‘죽은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면서 법정 소송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무엇이 먹칠일까. 잘못을 그대로 안고 가는 일이 먹칠일까, 잘못을 밝혀 바로잡는 일이 먹칠일까. 글쓰기연구회 교사들은 한길사에서 낸 책을 절판시킨 일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분들은 ‘잘못 만든 책이라 하더라도, 한 번 나온 책은 그대로 유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 달이었나 두 달이었나 석 달이었나, 이오덕 님 글 갈무리하는 일이 자꾸 뒤로 밀리면서 엉뚱한 소송글과 내용증명을 써야 하니 답답했다. 나는 이렇게 큰 출판사와 싸우려고 무너미마을에 오지 않았는데, 그동안 큰 출판사들이 이오덕 님 책을 놓고 벌인 잘못이 자꾸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일을 맺고 풀 적마다 내 뒤에서 나를 나쁘게 말하는 소문이 커진다.


  창비 출판사는 드디어 편지를 보냈다. 인세 미지급금으로 500만 원을 주고, 새 계약으로 인세 3퍼센트를 주겠다고 말했다. 잘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너무 하잘것없는 보상금과 인세율을 말했기에, 이정우 님은 “그렇게 할 바에는 아버지 책을 모두 절판시키시오. 이제 창비에서 아버지 책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하고 말했다. 창비아동문고는 이오덕 님이 기획해서 염무웅 님과 함께 만들었지만, 어느새 이오덕 님 이름이 창비아동문고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모두 창비 출판사 스스로 훌륭하고 뛰어나서 이런 책들을 기획하고 어린이문학작가들 글을 모으거나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일하기도 한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이오덕 님 책 가운데 이오덕 님이 ‘출판사 편집부가 내(이오덕) 원고를 허락 안 받고 엉뚱하게 고친 곳이 200군데가 넘으니 바로잡으라’고 보낸 글과 ‘바로잡을 곳을 빨간 볼펜으로 적바림한 책’을 찾았고, 이 글을 바탕으로 보리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편집부 차장과 편집자 한 사람은 내 전화를 비웃으면서 ‘그렇게 안 하겠다’고 했다.


  보리 출판사는 아직도 그 책 그 글을 출판사 편집부에서 임의로 고친 대로 낸다. 나는 많이 지쳤고, 큰 출판사하고 싸울 힘도 마음도 사라졌다. 이정우 님도 나더러 “이러다가 평생 출판사하고 싸우기만 하겠다”고 해서 이오덕 님이 남긴 글과 책을, 무너미마을에서 조그맣게 만들어서 ‘책방에는 배본을 안 하고’ 읽히는 길을 찾기로 했다. 보리 출판사는 이 책 말썽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는 책을 이정우 님 허락을 안 받고 계약서도 안 쓴 채 몰래 펴냈다(처음에는 보리 출판사에서 이 책을 내는 일을 허락하고 계약서를 썼지만, 출간약속을 오래도록 지키지 않아 계약파기를 했다. 계약파기를 한 뒤에 이정우 님이 자비출판으로 작은 책을 만들었는데, 보리 출판사에서 갑자기 무단출간을 해서 책방마다 배본을 했다).


  한길사가 무단출간 말썽을 일으킨 지 한 해가 채 안 되었는데,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를 네 권으로 나누어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방학이 몇 밤 남았나》, 《꿀밤 줍기》, 《내가 어서 커야지》를 내놓았다. 보리 출판사 정낙묵 사장은 책을 내놓고 배본까지 다 끝낸 다음, 책을 들고 무너미로 왔다. 책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잘 만든 책이니 아이들한테 읽혀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훌륭한 글을 바탕으로 잘 만든 책이니 읽힐 값어치가 없다 할 수 없다. 그러면, 제대로 허락을 받고 계약서를 쓸 일이다. 계약파기를 하기 앞서 책을 잘 만들어서 내놓을 일이었다. 책에 실은 그림도 ‘이런 그림을 싣겠습니다’ 하고 알려야 했다. 그러나, 이오덕 님이 아이들 가르치면서 그리도록 한 그림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그림을 이 책에 끼워넣었다. 정낙묵 사장은 이정우 님한테 ‘우리는 출고정지도 절판도 안 합니다’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길사는 출고정지와 절판을 시켰지만, 보리 출판사는 오늘(2013년)까지도 이 책들을 출고정지는커녕 절판조차 시키지 않는다. 그야말로 제멋대로인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멋대로인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힘을 떨치는 책마을이라면, 다시는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탔다. 모든 일을 다 잊고 자전거를 탔다. 충북 충주부터 서울까지 자전거를 탔다. 한 주에 한 번씩, 자전거로 서울로 갔다가, 다시 자전거로 충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꼭 한 해를 이렇게 지냈다. 나는 내가 살아갈 길을 다시 그려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4346.11.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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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1-10 08:08   좋아요 0 | URL
사람사는 곳은 어디든지 그렇게 문제가 일어나고 계속 되는가 싶습니다. 언급하신 출판사도 좋은 책을 많이 내는 곳인데요. 님의 삶이 자유롭게 보여 부러운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협이 없는 삶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언제 뵙고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었으면 하는 맘입니다. 힘내세요.

숲노래 2013-11-10 09:33   좋아요 0 | URL
이런 이야기를 쓸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오늘 밤(1시)에 어느 분 서재에 올라온 어느 글을 읽다가
'이오덕-권정생 편지글을 묶은 책'과 얽힌 이야기를 얼핏 보면서
이 책과 얽힌 이야기가 잘못 퍼지는 일은 없어야겠다 생각하며
몇 가지 글을 갈무리했는데, 이렇게 하다 보니
저절로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왔어요.

책마을 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제 험담과 비방 늘어놓거나 말거나
나는 내 길을 갈 뿐이에요. 엉터리 길을 간다면
저 스스로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럽겠지요.

<이오덕을 읽는다>라는 책을 내려고 올해부터 원고를 모아요.
사람들이 이오덕 님 삶을 제대로 모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왜곡시키기도 하는데,
차근차근 다시 읽으면서 '삶말'을 들려줄 수 있어야겠다고 느껴요.

곰곰이 돌아보면, 한길사가 말썽을 일으킨 지 열 해가 된 오늘에서야
제 마음속 앙금과 생채기가 어느 만큼 아물었기에
이 글을 쓸 수 있다고 느껴요.

아직도 가슴은 찌릿찌릿 아프지만요..

그렇게혜윰 2013-11-10 18:24   좋아요 0 | URL
마음이 아프네요. 제가 읽은 책에서는 두 선생님들께 누가되는듯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출판사의 횡포를 알고 있는것같지는 않았어요. 작가들의 권리가 마땅히 지켜지는 출판문화를 보고 싶네요...

숲노래 2013-11-10 19:32   좋아요 0 | URL
오늘에 와서 생각하면,
독자인 우리들은 아름다운 삶을 읽을 수 있어 고마워요.

그러니, 이런 책이 나온 일로 더없이 고맙지요.
저부터 이오덕 님 원고를 정리할 적에
이러한 글과 책을 손으로 만지며 하나하나 오탈자 바로잡으면서
원고 입력을 할 수 있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두 분이 편지를 주고받던
그 독재정권 차가운 때에
서로 따스한 마음을 주고받은 이야기인데,
이러한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려고 한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모르겠어요.

모든 사람이 '순수한' 마음일 수 없다고 하지만,
참말 '순수한' 마음이 아닌 채 살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무엇보다도, 저로서는, 그무렵 돌아가신 한 분 삶을 원고로 만나고,
마지막 삶 잇던 다른 한 분 삶을 몸으로 만나면서,
두 분과 얽히는 책은 이렇게 나올 수 없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독자들은 책을 책으로만 만나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책은 바로 '삶'에서 태어나기 마련이기에,
작가뿐 아니라, 편집자와 출판인 모두
삶이 아름다울 때에 아름다운 책으로 이루어진다고 느껴요.........

이와 같은 글을 써야 하는 저도 마음이 아픈데,
그래도, 열 해 앞서를 헤아리면
조금은 생채기를 씻었기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못 다 한 이야기가 많아요...

oren 2013-11-11 13:57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의 이 글을 읽으니 마음이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신 바 그대로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잘 헤쳐오시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 지금은 그래도 한결 여유롭게 지나간 얘기를 풀어놓으실 수 있다고 하시지만 막상 그 당시로서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닐까도 싶네요. 아무쪼록 앞으로는 그런 어려움들이 커다란 밑거름이 되어 보람있는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싶고, 저도 마음으로나마 열심히 응원하고 싶습니다.

덧) 함께살기 님의 글을 읽다가 '출판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경우가 겹쳐 떠올라 먼댓글을 하나 달아 봅니다.

숲노래 2013-11-11 19:47   좋아요 0 | URL
저는 딱히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그무렵
'최종규는 출판계에 다시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뒷이야기를
여러 사람한테서 자주 들었습니다.

다른 한편, 그런 뒷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이 말썽 밑바닥까지 살피면서
'어느 한 사람을 출판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이들이
출판계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찌 되든,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길을 가되,
내 길이 얼마나 올바르고 아름다운가를 늘 되새기면서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느껴요...

말씀 고맙습니다.

2013-11-11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11-11 19:51   좋아요 0 | URL
ㅇㄹㄷ뿐 아니라 ㅎㄱㅎ 같은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그때에는 그런 일을 뒷전에서 구경만 할 수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스스로 찾아서 해야지요.

법에 따라 지키는 양심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쉬운 한국말로 '착한 마음'에 따라 지키는 '착한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모든 삶을 아름답게 이어가며 가꿀 수 있으리라 느껴요.

나중에 [내가 걷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이 글에 쓸 텐데,
저는 언제부터인가 '나 스스로 1인 신문'이 되자고 생각했어요.
이러저래 해서 글쓰기도 글도 책읽기도 책도
꾸준하게 마음을 기울이면서 다룰밖에 없구나 하고 느껴요.

님도 늘 사랑스러운 마음을 따숩게 보듬으면서
하루하루 아름다운 나날 누리셔요~~ ^^

2013-11-12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2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2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2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yonara 2013-11-16 13:17   좋아요 0 | URL
큰 일을 하려면 큰 시련이 따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큰 일을 아예 도모하지 않나 보네요.
어디나, 언제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절이 싫으면 이렇게 중이 떠나는 건지.....
추운날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길.

숲노래 2013-11-16 18:59   좋아요 0 | URL
음... 작은 일을 하려면 그때에도 똑같이 작은 시련이 올 테니,
어쨌든 시련이란 늘 오겠지요~ ^^;;

sayonara 님도 언제나 즐거우며 따스한 나날 누리면서
가을 끝자락 아름답게 보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