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해 만애

영화비평을 쓴다.

영화읽기를 안 하는 비평가를 보며 질려서

영화비평을 네 해 동안 안 썼는데

그들이 그러건 말건

어린이하고 푸름이하고 동무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써 보기로 한다.


늑대길잡이 (울프워커스)

[숲노래 영화읽기 089] WolfWalkers 2020



  늑대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꺼리지 않는다. 늑대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들내음하고 숲내음을 잊거나 내팽개치면서 서울내음으로 둘둘 감쌀 즈음부터 슬슬 사람을 멀리한다. 사람들이 호미나 낫이나 쟁기처럼 수수한 흙연장을 내동댕이치면서 총이며 칼을 움켜쥐고서 서로 치고받으며 온누리를 핏빛으로 물들이던 때부터 확 사람을 등진다.


  흔히들 숲에서는 범이 싸움을 잘하고 들에서는 사자가 싸움을 잘한다고 치는데, 숲에서는 곰이 가장 슬기로우며, 들에서는 늑대가 가장 슬기롭다. 사람은 어쩌다가 ‘으뜸싸움이’를 가리거나 따지거나 생각하는 바보가 되었을까? 사람은 어쩌다가 스스로 들내음하고 숲내음을 내버리면서 서울내음으로 스스로 뒤집어씌울까?


  숲마다 곰이 노래하고 들마다 늑대가 노래하던 무렵 흙을 사랑하면서 조촐히 살림을 짓던 사람들은 곰도 늑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범이나 여우를 무서워할 일도 없다. 왜냐하면 서로 삶자리가 다를 뿐 아니라, 서로서로 삶자리를 쳐들어가거나 짓밟거나 괴롭히는 짓을 안 했다.


  숲짐승이나 들짐승은 바보가 아닌 터라, 총칼에 얽매인 사람 곁에는 얼씬을 않는다. 이런 숲짐승이나 들짐승은 사람들이 저희 숲터나 들터를 망가뜨리거나 허물거나 짓밟기에 벼랑에 몰린 끝에 비로소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번뜩이면서 사람을 물려고 달려든다.


  멀쩡히 있는 사람이나 가만히 노는 아이를 덮치는 숲짐승이나 들짐승은 없다. 숲짐승이며 들짐승은 ‘사람이 어떤 빛’인지 알기에 함부로 안 건드린다. 사람이 이 푸른별에서 할 몫을 알기에 섣불리 안 건드린다. 오직 바보짓에 넋나간 채 바보살이를 하는 바보사람한테만 막바지에 달려들 뿐이다.


  그림꽃얘기(만화영화) 〈늑대길잡이(WolfWalkers)〉는 ‘카툰 살롱(Cartoon Saloon)’이란 이름으로 그림꽃얘기를 수수하게(2D) 그리는 아일랜드 이웃님 손끝에서 태어났다. 이들 아일랜드 이웃님은 ‘바닷노래(Song of the Sea)’나 ‘수수께끼 켈스(The Secret Of Kells)’를 그리기도 했다. 2009년에 ‘수수께끼 켈스’로 들빛을, 2014년에 ‘바닷노래’로 바닷빛을, 2020년에 ‘늑대길잡이’로 숲빛을 들려주는 셈인데, 아일랜드란 나라는 바다랑 들이랑 숲이 어우러진 조촐한 삶터이다.


  자, 생각해 본다. 들에 바다에 숲, 이 세 가지는 무엇일까? 들빛하고 바닷빛하고 숲빛은 우리 삶에 어떻게 이바지할까? 들빛이며 바닷빛하고 숲빛이 없는 서울이나 시골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 수 있을까? 사람이 누리는 모든 밥은 들이랑 바다랑 숲에서 오지 않나? 뚝딱터(공장)를 돌리려 해도 들이며 바다이며 숲에서 먹을거리를 얻어서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먹고서 내보내는 똥오줌은 다시 들이며 바다이며 숲으로 돌아가서 고이 삭아야 새 먹을거리가 태어날 흙으로 피어난다.


  숲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숲에서 오는 모든 밥·옷·집을 못 얻을 뿐 아니라 망가진다. 숲을 돌보지 않는다면 숲에서 피어나는 바람(공기)을 맑게 마시지 못한다. 숲을 가꾸지 않는다면 종이도 책도 없을 텐데, 나무하고 꽃하고 풀벌레하고 새하고 벌나비가 사라지는 판이 되면 사람도 더는 푸른별에서 못 산다.


  싸움연모(전쟁무기)를 손에 쥐고서 나라지키기(애국·충성)를 해본들 ‘나라(권력자)’는 지켜줄는지 모르나 우리(마을사람)는 다 죽을밖에 없다. 싸움연모로는 논밭살림도 안 될 뿐 아니라, 들숲바다를 모두 죽이고 마니까. 쾅쾅(폭탄) 터뜨리는 곳에서 나무가 자라거나 고래가 헤엄칠까? 총을 쏘는 곳에서 들꽃이 필까? 참다이 어깨동무(평화·평등)로 가자면 모든 싸움연모를 녹여서 낫이며 호미이며 쟁기로 바꿀 노릇이요, 싸울아비(군인)가 아닌 ‘참어른·참어어버이’로 거듭날 노릇이다. 그림꽃얘기 〈늑대길잡이〉는 어버이가 언제 싸움연모를 내려놓고서 사랑이란 손길로 다시 태어나서 아름답게 숲어른이란 길을 가는가를 들려준다. 틀(제도·규칙)에 갇히면 틀(기계·무기)은 다루겠으나 숲과 사랑을 잊은 바보가 된다.


맛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Zgsfht2YE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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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오브 트롤 - 드림웍스 트롤 공식아트북
안나 켄드릭.제리 슈미츠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밝음에 어둠을 더해 무지개꽃 피는 노래
[영화 읽는 시골 아재 1] 트롤 Trolls, 2016 


  옛말에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했어요. 저는 어릴 적에 이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너무 마땅할까요? 아이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을 어찌 알아듣겠어요.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가끔 이 말을 떠올립니다. 오래 살고 보면 슬프거나 안타까운 일을 몽땅 지켜보아야 하는 때도 있을 테지만, 아름답거나 기쁜 일을 환한 웃음으로 마주하는 때도 있어요. 기쁜 오늘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슬픈 어제를 삭힐 수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내면서 어제는 미처 못 깨달은 대목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거듭날 수 있기도 해요.

  영화 〈트롤 Trolls〉이 나왔습니다. 이 영화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꽤 되었습니다. 언제 나오려나 하고 손가락을 물며 기다렸어요.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지요. 2017년 2월에 한국에서도 극장에 걸리며 드디어 볼 수 있기에 참으로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처럼,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기쁘게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 예고편을 볼 적부터 아이들하고 새롭게 배우는 길에 슬기로운 실마리가 될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주기에 좋겠다고 느꼈어요. 이 영화는 우리 삶을 이루는 두 가지 큰 기둥을 알맞게 어우르지요. 이러면서 두 가지 큰 기둥을 가꾸는 숨결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부드러우면서 재미있게 밝혀요.

  두 가지 큰 기둥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는 기쁨입니다. 다른 하나는 슬픔입니다. 기쁨은 밝음이나 빛으로 나타내고, 슬픔은 어둠이나 고요로 나타내곤 해요. 둘은 얼핏 보면 아주 동떨어진 듯 여길 수 있지만, 참말로는 그렇지 않아요. 둘은 늘 하나예요. 한몸이지요. 한몸에서 나란히 태어나서 자라는 기쁨하고 슬픔이에요.

  밝음하고 어둠도 따로 떨어진 둘이 아니라 하나예요. 빛하고 고요도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요. 그렇지만 정작 둘은 서로 아주 다른 자리에 있는 듯 여기면서 갈라서곤 해요. 게다가 둘은 서로 하나인 줄 헤아릴 마음이 없다 보니 서로서로 살가이 다가서지 못하기까지 해요.

  영화 〈트롤〉을 보면 기쁨덩어리 ‘파피’는 슬픔덩이리 ‘브랜치’ 마음을 조금도 못 헤아립니다. 거꾸로 어둠덩어리 브랜치는 ‘밝음덩어리’ 파피를 하나도 못 헤아리지요. 둘은 동떨어진 남이 아니라 ‘우리’인데 이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아요.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Still remains
Within the sound of silence
(반가워 어둠, 내 오랜 벗
 난 너랑 다시 얘기하러 왔어
 보드랍고 천천히 찾아온 꿈이
 내가 자는 동안 씨앗을 남겼거든
 그 꿈은 내 머리에 씨앗을 심었고
 그대로 있어
 고요라는 소리 곁에)

  서로 못 헤아리는 둘인 파피랑 프랜치인데, 이 둘은 곧잘 부딪혀요. 파피는 프랜치가 꽁꽁 감싼 어둠을 벗겨 주고 싶습니다. 프랜치는 파피가 친친 두른 밝음을 벗겨 주고 싶어요. 파피나 프랜치는 스스로 감싸거나 두른 것은 하나도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서로 ‘제 눈에 보이는 것’만 바꾸어 주어야 한다고 여겨요.

  그러나 파피하고 브랜치는 여느 동무나 트롤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서로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서로 어딘가 끌리면서 마음을 기울여 주어요. 여느 트롤은 파피한테서 기쁨·밝음·빛만 보려 하고, 브랜치를 볼 적에는 슬픔·어둠·고요가 싫다고 말할 뿐이거든요. 여느 트롤은 두 트롤(파피, 브랜치)이 서로 어떻게 거듭나야 비로소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해요. 그저 ‘트롤을 잡아먹으려 하는 버겐’한테서 벗어나 기쁨잔치만 벌이면 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트롤 나라 공주인 파피가 버겐한테 사로잡힌 동무를 살리려고 먼 길을 나설 적에 브랜치는 파피를 못 본 척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나서요. 이때에 브랜치는 늘 곤두선 마음으로 버겐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느라 ‘아주 고요한 채’ 잠이 들고 싶어요. 파피는 아무리 고되거나 무시무시한 곳에서라도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둘 모두 틀리지 않았어요.

  다만, 브랜치는 파피가 얼빠져 보일 뿐이고, 파피는 브랜치가 딱해 보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런 둘 사이에서 ‘sound of silence’라는 노래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를 보는 한 사람으로서 ‘이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어쩜 이렇게 잘 들어맞는 노래를 기쁨에 가득 차서 부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엄청난 노래를 들은 브랜치는 어쩜 그렇게 기타를 모닥불에 집어던져 불사를 수 있을까요?

Get Back Up Again
(또 다시 일어서겠어)

  기쁨덩어리 파피는 늘 노래합니다. ‘Get Back Up Again’이라는 말처럼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온갖 고빗사위를 넘어서요. 비록 이렇게 고빗사위를 넘어서다가도 열매를 잘못 먹어서 몸이 퉁퉁 붓고 거미줄에 묶여 죽음을 앞두지만, 이런 판에도 ‘Get Back Up Again’을 외쳐요. ‘Get Back Up’만으로도 “다시 일어서겠어!”인데 여기에 ‘Again’을 붙여서 외치지요.

  어쩌면 이 씩씩함을 바탕으로 트롤 나라를 이끄는 공주 노릇을 하는구나 싶어요. 이리하여 파피 공주는 ‘갈무리(scrap)’을 할 수 있어요. 기쁜 일이건 궂은 일이건 모두 갈무리해서 ‘책’으로 새로 엮어요. 이 대목이 아주 남다르지요. 다른 트롤은 그냥 춤추고 노래하고 서로 안을 뿐이지만, 파피 공주는 모든 일을 갈무리해서 책으로 엮고, 이를 어린 트롤한테 가르쳐요. 곧 파피 공주는 ‘브랜치한테서 트롤 나라를 지킬 슬기를 배울 수 있다’면 이 대목도 잘 갈무리해서 다른 트롤한테 알려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브랜치는 파피 공주를 조금은 바라보지만 깊이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니 ‘파피 공주도 여느 트롤하고 똑같이 바보스럽다’고만 여겨요. 나중에 파피 공주가 ‘처음으로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서 시커멓게 바뀌고 나서’야 브랜치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차리지요. 그래도 너무 늦게 알아차리지 않았기에 브랜치는 저 스스로 뒤집어쓴 시커먼 허물을 그때서야 벗습니다. 브랜치네 할머니가 브랜치를 버겐한테 잡아먹히지 않도록 살려낸 까닭은 ‘브랜치가 노래를 스스로 버리고 어둠에 파묻혀 버리라’는 뜻이 아닌 줄을, 브랜치네 할머니는 브랜치가 더욱 기쁘게 노래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를 더 배워서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대목을 목숨을 바치면서 손자한테 남겨 주었다는 대목을 깨달아요.

No!
I can't think that way cause I know 
That I'm really really gonna be
okay
Hey!
I'm not giving up today
There's nothing getting in my way
And if you knock knock me over
I will get back up again
(아야!
 난 그리 생각할 수 없어
 난 알거든
 참말 참말 난 괜찮은 줄
 봐!
 난 오늘 두 손 들지 않아
 내 앞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날 때리고 또 때려눕혀도
 난 또 다시 일어설 테야)
 

  영화 〈트롤〉은 밝음에 어둠을 더해 무지개꽃 피는 길을 보여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밝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아니 밝음만으로 이루는 것은 반토막이요, 어둠만으로도 그저 반토막을 이룰 뿐이라는 대목을 알려주지 싶어요. 밝음에 어둠을 더해 한결 눈부시게 피어나면서 서로 손을 맞잡습니다. 고요한 어둠에 환한 노래를 입히면서 더욱 차분하면서 사랑스레 깨어납니다.

  버겐은 왜 트롤을 잡아먹어야 기쁘다고 여길까요? 어느 날 문득 트롤을 잡아먹고 말았는데, 미처 트롤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겨를조차 없이 ‘기쁨덩어리가 몸에 들어왔으니 나도 기쁨이 되겠네’ 하고 생각을 굳혀 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 해에 고작 한 번 트롤을 먹을 적에만 ‘기쁨을 누리’고 한 해 가운데 삼백예순나흘은 ‘슬픔에 어둠에 짜증에 괴롭힘투성이’인 채 나뒹굴고 말아요.

  트롤은 그동안 버겐하고 손을 맞잡으면서 서로 북돋우는 길을 몰랐어요. 버겐도 서로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나 버겐 나라를 물려받은 그리스틀은 달랐어요. 버겐 나라에서 부엌데기 일을 하는 브리짓도 달랐지요. 여느 버겐은 ‘기쁨’을 비롯해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을 하지 않으며 ‘주어진 틀’하고 ‘시키는 일’만 했다면, 이 둘은 스스로 무언가 새로 짓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다만 버겐 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오래오래 길든 틀이 단단하다 보니, 틀을 깨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깨어나지 못했어요. 파피 공주가 버겐 나라 부엌데기 브리짓을 도우면서 브리짓 스스로 일어나서 스스로 사랑을 찾도록 이끌어도 브리짓은 자꾸 옛날로 돌아가서 ‘나는 안 돼’ 하고 물러서지요.

  그런데 가만히 살피면, 버겐 나라에서 그리스틀 임금하고 브리짓 부엌데기 둘만 이런 마음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있어요. 다른 버겐은 ‘나는 안 돼’조차 생각하지 않아요. 두 숨결만 ‘나는 안 돼’를 생각하고 ‘내 마음속에서, 바로 가까이에서 기쁨을 찾고 싶어’하고도 생각하기에 두 버겐은 버겐으로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길인 사랑을 찾아서 누리는 길로 나아갈 수 있어요.

And I see your
true clolrs 
shining through

I see your
true clolrs 
And that's why 
I love you

So don't
be afraid
To let them show
your true clolrs
true clolrs
Are beautiful
(그리고 난 네
 참다운 빛깔을 봐
 너한테서 빛나는

 네 참다운 
 빛깔을 봐
 그게 바로 널
 사랑하는 까닭이야

 그래 
 두려워 마
 그 빛깔을 보여줘
 네 참다운 빛깔을
 참다운 빛깔은
 아름다워) 

  한 가지 모습이나 빛깔로는 참다운 모습이나 빛깔로 서지 못합니다. 한 손으로는 종이 한 장을 맞잡지 못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맞잡’으려면 두 손이 있어야 해요. 손뼉을 치려면 왼손 오른손이 나란히 있어야 해요. 괭이를 쥐어 밭을 갈려면, 밥상을 들어서 나르려면, 우리는 두 손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한 손을 내밀어 잡을 적에 비로소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처음부터 하나였기에 둘로 나뉘어 더 커다란 하나가 될 수 있는 숨결입니다. 더 커다란 하나가 되면서 새롭게 둘로 뻗으면서 모두 아우르는 하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해가 내내 뜨기만 하는 낮일 적에는 풀도 나무도 말라 죽어요. 달만 내내 뜨는 밤일 적에는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하고 죽어요. 해가 뜨는 낮에 기쁘게 깨어나고, 달이 뜨는 밤에 고요히 잠들어요. 우리한테는 기쁨잔치 못지 않게 고요한 밤이 있어야 해요. 한 가지 생각이나 마음이나 느낌만 붙잡지 말고, 하나에서 비롯한 두 갈래 생각이나 마음이나 느낌을 크게 아우르며 사랑하는 길로 갈 적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무지개로 참다운 살림을 지을 수 있는 줄 바라보아야지 싶어요.

  북유럽을 바탕으로 내려오는 ‘트롤’ 이야기에 나오는 ‘트롤’은 우악스럽다고도 하고 무시무시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북유럽 옛이야기에 나오는 트롤은 어쩌면 우리가 ‘한 가지로만 바라본’ 탓에 그 모습으로 굳혀 버렸다고도 할 수 있어요. 영화 〈트롤〉에서 기쁨이랑 어둠이가 남남이 아닌 ‘더 커다라면서 너른 한사랑’이듯이, 껍데기나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과 속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참다운 빛깔로 깨어날 만하다고 느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영화 〈트롤〉은 ‘트롤 다시읽기’를 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우리 모두 스스로 삶을 새롭게 읽고 사랑하는 길을 찾아보자고 북돋운다고 할 만해요.

  그리고 이처럼 참다운 빛깔로 깨어나는 길에는 늘 노래가 있어요. 부드러이 흐르는 노래, 고요히 감기는 노래, 눈부시게 춤추는 노래, 새봄에 움트는 싹처럼 깨어나는 노래, 환한 웃음을 짓는 노래, 그리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눈물짓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노래가 있어요. 노래를 부르기에 깨어나요. 노래를 부르기에 밝음하고 어둠이 만나서 무지개로 피어나요. 2017.2.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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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뤽 베송 감독, 질 를르슈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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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섹은 새길을 걷지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Les Aventures Extraordinaires D'Adele Blanc-Sec, The Extraordinary Adventures


  뤽 베송 감독이 찍었다고 하는 영화 〈블랑섹은 새길을 걷지(블랑섹의 기이한 모험)〉를 문득 봅니다. 이 영화를 아이들하고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이들하고는 함께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집 아이들이 삶을 배우는 길을 꾸준히 걸으면 이 영화를 함께 보면서 서로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블랑섹이라고 하는 스물다섯 살 아가씨가 걷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거든요. 스스로 품는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스스로 짓는 생각에 따라서 새로워지는 살림을 보여줍니다.

  영화에 나오는 할아버지 과학자는 ‘마음을 다스려서 새로운 숨결이 깨어나도록 북돋우는 길’을 알아챕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더더구나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아요. 이와 달리 블랑섹은 이 할아버지 과학자를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블랑섹은 이녁 동생이 그만 스무 살 나이에서 삶을 멈추었고, 이 동생이 다시 깨어나도록 하려고 ‘새로운 배움길(새 공부)’에 나섰거든요. 사랑하는 동생이 다시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어마어마하게 새로 배웠지요. 그래서 ‘미이라 깨우기’를 하려고 들어요.

  미이라를 깨워서 동생을 깨우려고 한다는 블랑섹이 벌이는 길(모험)은 바보스러울까요? 고지식할까요? 어리석을까요?

  바라보는 눈에 따라서 다르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온마음을 기울여서 동생을 사랑할 뿐 아니라, 지난 다섯 해 동안 웃음을 한 번도 짓지 못하고 날마다 울음을 지을 뿐이었다고 하는 블랑섹은 더는 눈물을 짓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웃음을 짓고 싶어요. 그래서 블랑섹은 스스로 배웁니다. 스스로 배운 대로 온몸을 바쳐서 뛰어듭니다. 낙타를 타고 익룡을 타지요. 미이라를 깨우고, 미이라와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리고 마침내 파라오까지 깨울 뿐 아니라, 파라오 곁에 있는 의사한테 동생이 다시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을 밝혀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서 그저 ‘판타지’로만 여길 수 있습니다. 영화는 언제나 우리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기에 이 대목을 곰곰이 헤아리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거나 깨울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읽는 실마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영화를 바라보든 ‘영화를 보는 사람’이 품는 마음에 따라 다르지요. 내가 짓는 삶은 바로 내 길이고, 내가 가꾸는 살림은 바로 내 넋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새길(모험)을 나서지 못합니다. 새길을 나서는 사람은 늘 새롭게 배우고, 늘 새롭게 배우는 대로 다시금 새로운 생각으로 마음을 그득 채울 만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는 대목은 늘 스스로 수수께끼를 내어 스스로 풉니다. 남이 내 수수께끼를 풀어 주지 않습니다. 스무 살에서 삶이 멈춘 동생을 깨우는 몫은 바로 내가 스스로 합니다. 남이 해 주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손이, 내 사랑이, 내 꿈이, 바로 내 모든 넋이 내 삶을 엽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여러모로 재미나면서도 알뜰히 빚은 영화를 봅니다. 블랑섹이라고 하는 아가씨는 ‘모험’을 했을 수 있고 ‘새길’을 스스로 열었을 수 있습니다. 2016.7.2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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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호튼 - 아웃케이스 없음
스티브 카렐 외 목소리, 스티브 마르티노 외 / 20세기폭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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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호튼
Horton Hears A Who!, 2008


  작은 나라를 보셨나요? 아니면, 아주 커다란 나라를 보셨나요? 지구 바깥에 있는 수많은 별을 보셨나요? 아니면, 우리 몸을 이룬 아주 조그마한 별을 보셨나요?

  닥터 수스 님이 빚은 그림책을 바탕으로 새롭게 짠 영화 〈호튼 Horton Hears A Who!〉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이 두 가지 ‘나라(누리·세계·세상)’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오늘 선 이곳만이 ‘나라’나 ‘누리’가 아니라, 우리 눈에 아예 안 보인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조그마한 ‘나라’나 ‘누리’가 있을 뿐 아니라, 너무 커다랗기 때문에 아예 우리가 쳐다볼 수 없을 만한 커다란 ‘나라’나 ‘누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다루어요.

  호튼은 어느 숲에 사는 코끼리입니다. 숲에 사는 코끼리이니 화장실이란 모르지요. 호튼은 어느 날 문득 아주 조그마한 소리를 들었는데, 이 소리는 ‘토끼풀꽃’에 앉은 ‘티끌’에서 들렸다고 해요. 이런 말을 둘레에 하니, 둘레에서는 코끼리 호튼이 “미쳤다!”고 딱 잘라서 대꾸합니다. 어떻게 저 조그마한 티끌에서 소리가 나느냐 하고 되묻지요. 코끼리 호튼은 이런 대꾸에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어요. 다만, 한 마디를 해요. 코끼리 호튼은 틀림없이 티끌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지구라는 별은 넓으면서도 작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라는 별은 이 지구 하나로 ‘온누리’입니다만, 해가 있는 해누리(태양계)에서는 매우 작고, 해누리가 있는 다른 별누리(은하)하고 대면 티끌만큼 작거나 티끌보다 더 작다고 여길 만합니다.

  내 곁에는 누가 있을까요? 내 곁에서는 누가 소리를 낼까요? 나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나는 개미 몸에 깃든 아주 작은 세포에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땅속에서 지렁이가 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진딧물이 풀줄기에 매달려서 풀물을 마시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나비가 알을 낳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 같은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해서 ‘이 같은 나라·누리·세계·세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어마어마한 별누리마다 엄청난 소리를 낼 텐데, 이 소리는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물결(주파수·파장)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 귀에 안 들리도록 너무 커다란 물결이나 소리라 한다면, 이 또한 “없잖아!” 하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호튼〉은 제 귀를 믿습니다. 이러면서 티끌나라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믿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아요. 깨달았고 느꼈기에 몸을 움직여서 함께 하려고 마음을 품습니다. 깨달으며 느끼는 동안 새롭게 배워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이요 몸짓이 되기에 즐겁게 거듭납니다. 이제까지 ‘숲만 알던 코끼리’였다면, 이제는 ‘하늘과 땅을 새로 아는 코끼리’가 되고, ‘티끌과 별을 새로 아는 코끼리’가 될 뿐 아니라, 코끼리인 호튼 스스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두 모습’인 숨결인 줄 배웁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어요. 모든 숨결은 저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줄 알아차리지요. 이리하여 이 즐거운 배움을 혼자 품지 않고 동무랑 이웃하고 나누려 해요. 혼자만 알기에는 더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지식’이기 때문에, 숲마을 이웃하고 동무 모두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새롭게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지요.

  영화를 보면서 문득 돌아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새롭게 깨달아서 배운 뒤에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새롭게 배웠기에 나한테도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면, ‘나로서는 처음 들을’ 그 이야기를 얼마나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마음을 열기에 듣습니다. 마음을 열기에 배웁니다. 마음을 열기에 봅니다. 마음을 열기에 가르칩니다. 마음을 열기에 살림을 짓고 삶을 지으며 사랑을 짓습니다. 2016.7.9.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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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형제 (브라더스 오브 더 윈드)

Brothers of the Wind, 2015



  여섯 살, 일곱 살, 아홉 살 아이가 영화 하나에 흠뻑 빠져듭니다. 영화에 흐르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하면서 그저 영화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만화영화도 디즈니영화도 아닌 〈바람 형제 Brothers of the Wind〉는 여러 아이를 한눈에 사로잡습니다.


  “바람하고 형제”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체코 영화에는 몇 사람 안 나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은 어린 사내, 사내를 돌보는 아버지, 숲지기(산림보호원), 이렇게 셋입니다. 깊디깊은 멧골과 숲에는 다른 사람이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한집에 살고, 다른 한 사람은 온 숲을 헤매면서 이 숲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바람 형제’ 가운데 하나인 독수리가 나옵니다.


  암수 한 짝을 이룬 독수리는 알을 둘 낳습니다. 두 알에서 깬 두 새끼 독수리는 처음 깨어날 적부터 ‘너른 숲을 아우르는 우두머리’ 자리를 누가 물려받느냐 하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합니다. 먼저 깬 새끼가 으레 우두머리가 된다는데, 나중 깬 새끼는 그만 둥지다툼에서 밀려서 높디높은 벼랑에서 굴러떨어져요.


  깊은 멧골숲에 아무도 살지 않았다면 이 새끼 독수리는 여우밥이 되거나 까마귀밥이 되거나 개미밥이 되었을 테지요. 그렇지만 이 깊은 멧골숲에는 ‘어린 사내’가 있어요. 아버지한테 한 마디조차 말을 하지 않고 마음 깊이 꽁꽁 갇힌 아이가 새끼 독수리를 찾아요.


  마음에 아픔이 응어리져서 모든 것에 담을 쌓던 아이는 독수리한테 처음으로 말문을 열어요. 독수리한테 모든 기운과 사랑을 쏟으면서 말을 걸고 돌봐 주지요. 그러나 아이는 독수리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가를 잘 모르고, 숲지기 아저씨가 드문드문 아이한테 독수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는 아버지하고 멧골숲에서 스스로 모든 살림을 지으면서 먹고삽니다. 다른 데에서 뭘 끌어들이거나 사들여서 꾸리는 살림이 아니라, 깊은 멧골숲에서 다른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손을 움직여서 짓는 살림입니다.


  싸움에서 밀려 ‘한 번 죽었다’고 할 만한 독수리는 마음에 생채기가 쌓여 ‘한 번 죽었다’고 할 만한 아이하고 멧골숲에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둥지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에만 휩싸였다면 아이하고 지내면서 처음으로 따사로운 보살핌을 누립니다. 아이도 아버지하고만 있는 집에서 벗어나 빈 오두막에서 혼자 독수리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기쁨을 새삼스레 누립니다.


  그러나 아이는 마냥 독수리를 감싸안을 수 없습니다. 숲지기 아저씨는, 독수리를 이제 더 감싸안다가는 이 독수리는 드넓은 멧골숲을 가르거나 하늘을 날지 못한 채 ‘닭’처럼 될 수밖에 없다고 아이한테 얘기합니다. 아이는 곰곰이 생각해요. 사랑스러운 독수리를 품에서 떠나 보내야 하는 일을 생각해요. 왜냐하면 독수리가 독수리다우려면 아이 품이 아니라 하늘을 마음껏 가르면서 바람을 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도 이제는 새로운 몸과 삶으로 거듭나야 할 때예요. 아버지가 차려 주는 밥만 먹고, 아버지가 지어 놓은 집에서만 자는 하루가 아니라,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장작을 패고 밥을 짓고 살림을 가꿀 줄 아는, 바야흐로 철이 들면서 생각을 슬기롭게 빚을 줄 아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독수리가 하늘을 가르며 날 수 있을 때에는 아이도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테지요? 싸움에서 밀렸던 둘째 독수리가 앙갚음을 하지 않고 슬기로운 평화를 새롭게 짓듯이, 아이도 이제는 입을 꾹 다무는 짓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깊은 멧골숲을 고요하면서 포근하게 보듬는 사랑살림을 새롭게 지어야 할 테고요. 2016.7.3.해.ㅅㄴㄹ


http://www.terramater.at/cinema/brothers-of-the-wind/


(숲노래/최종규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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