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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소매·반바지 차림이면 못 가르칠까?

― 겉치레에 얽매인 낡은 틀을 깨부술 때




  학교는 왜 머리에 구멍을 냈을까


  저는 처음부터 머리카락을 기를 뜻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인데, 제 머리카락이 ‘두발 규정’에서 0.1센티미터 어긋난다면서 어느 교사한테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긴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운 ‘학생 두발·복장 규정’에서 0.1센티미터, 그러니까 1밀리미터가 어긋난다고, 고작 1밀리미터 길이로 머리카락이 길다면서 머리카락을 바리깡으로 쥐어뜯더군요. 이때가 1991년입니다. 전두환이라는 군사독재자는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나 또다른 군사독재자가 대통령 자리에서 으르렁대던 무렵입니다. 이때에 저는 교사한테 딱히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리깡으로 밀린 자리’를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머리통에 구멍이 생기거나 고속도로가 난 동무들은 그날 바로 이발소에 가서 박박 머리를 밀었습니다만, 저는 머리통에 구멍이 난 그대로 ‘학교옷을 멀쩡히 입고 돌아다니’기로 했습니다. 머리통이 바리깡으로 밀린 모습은 저 한 사람한테 창피한 모습이 아닌, 학생을 이 따위 모습으로 몰아세우는 학교와 교사와 어른들이 창피한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구멍난 자리에 머리카락이 새로 나기까지는 오래 걸립니다. 더욱이 저는 머리카락이나 털이 아주 천천히 나는 몸이에요. 이러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에 마지막으로 머리통에 구멍이 난 뒤, 이 구멍을 메우기까지 여섯 달이 넘게 걸렸고, 이동안 제 머리카락은 ‘단발머리’가 되었어요. 1994년이지요. 그즈음 사내 가운데 단발머리인 사람이 매우 드물어, 이 머리 길이를 두고 손가락질하거나 막말을 퍼붓는 사람이 매우 많았어요. 어느 때에는 ‘시내버스 승차거부’까지 받았습니다. 어느 버스 기사는 ‘사내녀석이 머리가 길어서 이 버스에 태울 수 없다’고 하더군요. 안 믿을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이 모든 일을 몸으로 겪었기에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길지’도 않고, 그저 뒷목을 덮을 길이일 뿐인데, 알바 자리를 어느 곳에서도 못 얻었습니다. ‘사내가 뒷목을 덮도록 머리카락을 기르면 불량하다’고 하는 사회의식이 짙게 깔린 1994년이었습니다.


  옷차림 규정을 내세운 강의 취소


  하루하루 흘러 어느덧 2018년입니다. 2018년 6월 어느 날, 전라남도 어느 고등학교에서 불쑥 ‘강의 취소’ 연락을 했습니다. 그 고등학교는 7월 어느 날에 저더러 ‘북콘서트’ 강사로 와 주십사 하고 연락을 했는데, 저한테 ‘강사 복장 규정’을 내밀었습니다. 저더러 민소매 웃옷을 입지 말고, 반바지를 입지 말라 하더군요.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와 달라고 말해요.


  저는 1998년부터 강의를 다녔습니다. 1998년에는 신문배달을 하며 살던 무렵이라, 그때에는 ‘신문배달을 하는 차림새’로 강의를 했습니다. 웬만하면 신문배달 자전거를 타고 강의장으로 가는데, 제 일터하고 강의터 사이가 꽤 멀면 전철로 갔습니다. 신문배달 자전거로 가든 전철을 타고 가든, 저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는 차림새로 멀쩡히 강의를 잘 했습니다.


  이때부터 스무 해 동안 여러 곳에서 강의를 했는데요, 국어교사모임에 강의를 갈 적이든, 국립국어원에서 전국 공무원을 상대로 여섯 달 동안 하던 국어문화학교 강의를 할 적이든, 대안학교나 일반학교 어디로 강의를 가든, 국공립도서관이나 개인도서관에 강의를 가든, 절집에 강의를 가든, 제 차림새는 ‘제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살림을 짓고 일을 하는 차림새’ 그대로예요.


  강의를 한 지 스무 해가 되는 2018년 올해 여름까지, 제 차림새를 놓고 ‘재미있다’거나 ‘놀랍다’는 말은 곧잘 듣지만 ‘그런 차림새로는 강의를 하면 안 된다’는 말로 강의를 취소한 곳은 없습니다.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말


  저는 강의터에 나서서 ‘말과 삶과 넋, 사전과 한국말, 말을 짓는 살림, 시골에서 숲을 사랑하며 새롭게 짓는 말’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한테서 이야기를 들으려는 분은 늘 ‘말이 삶하고 어떻게 잇닿고 만나면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며 어떤 말을 어떻게 쓸 적에 삶이 즐거울 수 있는가?’를 궁금히 여깁니다.


  그렇다면 말과 삶과 넋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이란 무엇이고, 한국말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서로 겉치레로 의사소통을 하면 되는 사이일까요? 겉치레 의사소통으로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열지 않고 서로 겉치레로 나선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만할까요?


  어린이나 푸름이가 거친 말을 마구 쓴다면서 걱정하는 어른이 많습니다만, 어른부터 스스로 말을 ‘안 거칠’ 뿐 아니라, 상냥하고 아름답고 즐겁게 쓰지 않는 터라,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이런 ‘어른들 거친 막말’을 고스란히 따릅니다. 학교에서 청소년폭력이 있기 앞서 사회에 ‘어른폭력’이 도사립니다. 어른 사회에서 어른 스스로 폭력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아요. 어른 사회에 따돌림하고 괴롭힘이 있지요. 이른바 차별입니다. 사회차별이 단단하니, 학교에서도 따돌림하고 괴롭힘이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지 않는다면, 또 아직도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또 학력과 신분과 계급으로 세운 질서를 허물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이 서로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짓도 사라질 수 없습니다.


  말이란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담습니다. 우리 삶터에 흐르는 온갖 모습이 사랑스럽거나 아름답지 않은데, 말만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 수 없어요. 우리 삶터에 흐르는 얄궂거나 아픈 모습을 고치거나 바로잡기보다는 감추거나 숨기려 하는 어른들 몸짓은 ‘말살림’에서도 똑같이 나타나요. 밑바닥을 갈아엎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버릇은, 말살림에서도 속으로 가꾸는 길을 멀리하고 겉으로 예의를 차리는 몸짓으로 불거집니다.


  옷차림을 놓고 따지는 버릇은, 중국 한자말을 섬기던 낡은 버릇하고 맞물리고, 서양말인 영어를 높이던 버릇하고 맞닿아요. 우리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길어올린 삶말·숲말·살림말을 제대로 바라보고 살리면서 마음을 새로 가꿀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소매하고 반바지 옷차림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는 마음이란, 삶을 삶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말을 말 그대로 가꾸지 않는 우리 어른들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는구나 싶습니다.


  강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의에 어긋나는 차림새라서 학생·교사·학부모를 앞에 두고 강의를 시킬 수 없다’고 밝힌 분들한테 한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강사한테 옷차림을 두고 발목을 잡으려 한다면, 무엇을 말하거나 들을 수 있을까요? 강사를 불러서 이야기를 들을 적에 ‘강사 구실을 하는 사람이 이제껏 갈고닦아서 이룬 열매를 속알맹이로 받아들이려는 뜻’인가요, 아니면 ‘겉으로 번드레레하게 보이는 차림새나 얼굴이나 몸매를 구경하려는 뜻’인가요?


  참말로 여쭙고 싶어요. 강의나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어떤 옷차림이어야 잘 가르치고, 아이는 어떤 옷차림이어야 잘 배울까요? 옷차림이나 생김새 때문에 못 가르치거나 못 배우는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을 겉모습이나 몸매나 옷차림으로 따지거나 가르는 일은 얼마나 올바를까요?


  눈이 나쁘거나 아파서 햇볕하고 햇빛뿐 아니라 형광등 불빛을 가리려고 언제나 ‘검은안경’을 써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강의를 하려면 검은안경을 벗어야 할까요?


  긴소매에 긴바지가 예의를 차리거나 지키는 차림이 될까요? 예의란, 옷차림이나 겉모습이 아니라, 몸짓이 아닐까요? 예의뿐 아니라, 참다움 착함 아름다움 모두 겉차림이나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이 아닐는지요?


  인권과 자유를 규정으로 눌러도 될까


  더운 여름에 민소매하고 반바지를 안 입는다고 해서 예의를 차리는 강사 옷차림이 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차림이 되는 탓에 에어컨을 실내에 빵빵하게 트는 살림이란 무엇일까요? 더운 날씨에 맞추어 옷을 가볍게 입고 에어컨을 즐겁게 끌 줄 아는, 이러면서 창문을 활짝 열고 싱그러이 바람을 맞아들이는 몸짓이 될 적에, 우리는 스스로도 숲한테도 ‘참다이 예의를 차리는 즐겁고 아름다우며 상냥한 살림길’이 되지 않을까요?


  더운 나라에서는 경찰도 공무원도 반바지를 입습니다. 더운 나라가 아니어도 사람마다 몸이 달라요. 누구는 여름에도 긴옷을 입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추위를 타고, 누구는 겨울에도 맨발에 홑옷으로 다닐 만큼 추위를 안 탑니다. 다 다른 사람한테 다 같은 옷차림을 밀어붙이려 한다면, 이는 또다른 폭력, 이른바 인권 침해나 자유 침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적게 먹어야 배가 홀가분한 사람한테 ‘평균 권장 식사’를 들이밀 수 없습니다. 누구는 하루 두끼로도 배가 부르는데, 억지로 세끼를 먹이면 배앓이를 하며 괴롭습니다. 또, 누구는 하루 한끼로도 넉넉한데 억지로 세끼를 먹이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달걀을 못 먹’거나 ‘우유를 못 마시’는 아이한테도 억지로 달걀을 먹이거나 우유를 마시도록 한 학교요 사회입니다. 그러나 2018년이라는, 2020년대를 바라보는 오늘날이라면, 사람마다 다른 몸과 터전과 결을 헤아리면서 ‘다 다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맞아들이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걷는 슬기롭고 즐거운 몸짓으로 거듭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이 그림책은 ‘꽁치’라는 아이가 치마를 매우 좋아해서 늘 치마를 입으려 하는데, 아이 어버이나 학교 교사나 마을 어른은 ‘꽁치가 치마를 입을 적에 매우 못마땅해’ 하는 줄거리가 흐릅니다. 꽁치는 어떤 아이일까요? 이 아이를 ‘꽁치라는 사람’이 아닌 ‘남성·여성’으로 굳이 갈라서 ‘남성 = 바지, 여성 = 치마’라는 틀에 가두어야 할까요? 여성한테 치마뿐 아니라 바지도 마음껏 입을 권리가 있듯이, 남성한테도 바지뿐 아니라 치마를 마음껏 입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평등이자 평화뿐 아니라 민주이자 통일(참다운 통일)입니다. 획일이 아닌 통일이란, 다 다른 결을 다 달라서 아름답구나 하고 여기는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라는 책이 새삼스럽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폭력을 휘두릅니다. 학교폭력이나 성폭력이나 정치폭력도 있습니다만, 민소매나 반바지를 ‘인권과 자유’라고 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서 ‘예의에 어긋난 나쁜 옷차림’이라는 눈으로 옭아매려고 하는 폭력도 있어요.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나라에서도, 서로 다르면서 서로 아름다운 길을 슬기로이 밝혀서 손을 맞잡고 상냥하게 노래를 부르는 배움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고등학교 푸름이가 ‘겉으로 보이는 차림새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거나 가르는 바보스러운 틀’이 아닌 ‘마음을 열어 서로 어깨동무하는 즐거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한말씀을 더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눈을 감고 서로 바라보면 좋겠어요. 정 눈을 감기 어렵다면 눈가리개를 두 눈에 씌워 보고서 서로 이야기를 해 보면 좋겠어요.


  눈을 감고서 말을 하면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요? 눈을 감고 서로 바라볼 적에 겉모습이나 옷차림이 대수로울까요? 눈을 가리고서 이야기를 할 적에 서로 ‘어떤 신분·계급·지위·재산’인가 하는 모습이 대수로울까요?


  값비싼 자가용을 몰면 훌륭하고, 자전거를 달리거나 두 다리로 걸으면 안 훌륭할까요? 까만 양복을 차려입으면 멋지고, 민소매에 반바지를 걸치면 안 멋질까요? 강사나 교사나 교수는 어떤 차림새일 적에 잘 가르칠까요? 아니,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사람은 겉모습으로 학생을 가르치나요, 아니면 마음에 흐르는 슬기로운 생각을 찬찬히 갈무리하여 들려주는 숨결로 학생을 가르치나요?


  듣기 좋게 꾸미는 말을 펼쳐야 학생이 훌륭히 배울까요? 더듬거리는 말씨로 가르치면 학생이 못 배울까요? 말솜씨가 빼어나야 학생이 훌륭히 배울까요? 말을 더듬을 뿐 아니라 목소리가 낮거나 작으면, 또 말솜씨가 없어서 쭈뼛거리는 사람은 학생을 못 가르칠까요? 혀짤배기인 사람은 말할 적마다 소리가 새니까 학생을 못 가르칠까요?


  겉치레라는 낡은 틀을 깨자


  2020년대를 바라보는 이 나라에서, 거짓스러운 우두머리를 촛불로 끌어내린 이 나라에서, 앞으로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운 평등·평화·민주·통일을 슬기롭게 갈고닦으면서 이룰 이 나라에서, 모든 어른하고 교사한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과 몸짓으로 아이들 곁에 서서 손을 맞잡고 배우거나 가르칠 적에 참다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나누면서 살림을 지을 하루일까요?


  민소매·반바지 차림이면 손사래를 치겠다는 교사·교장 모두한테 조용히 말씀을 여쭙니다. 이제, 겉치레에 얽매인 낡은 틀을 깨부술 때입니다. 겉치레를 털어내고 속을 가꾸는 길을 아이들하고 새롭게 가꿀 때입니다. 2018.7.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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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 이름 쓴 지 100년이라는데



  2014년은 전남 고흥군에서 ‘고흥군’이라는 이름을 쓴 지 100돌이라고 한다. 고흥군청에서는 읍내에 ‘전기로 밝히는 등불’을 곳곳에 잔뜩 매달았다. 나는 고흥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아니지만, 고흥으로 삶터를 옮겨 살기에, 이게 뭐 하는 일인가 하고 곰곰이 들여다본다. 2014년으로 100돌이라 한다면 1914년부터 이름을 바꾸었다는 뜻이다. 1914년은 어떤 해인가? 그무렵 한국은 어떤 사회인가?


  1914년에 앞서까지 이곳은 ‘흥양군’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예부터 ‘전남 고흥’이라는 데는, 고흥이 아니라 ‘전남 흥양’이었다는 소리이다. 이 이름이 일제강점기에 억지스레 ‘전남 고흥’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흥양’이라는 이름은 고흥군 곳곳에 남는다. 그러나, 고흥에 있던 ‘흥양초등학교’는 1998년에 문을 닫았다. 고흥이라는 곳을 오래도록 가장 널리 드러내던 이름을 붙인 학교가 문을 닫은 지 꽤 된다. 그러니까, 고흥군에서는 이곳 발자취로 깊이 남고 널리 퍼졌던 이름을 꽤 예전부터 모른 척하거나 없애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에 있는 지자체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억지로 바뀐 일’을 기리면서 큰잔치를 벌이는 곳이 있을까? 게다가 지자체 역사를 고작 100돌 갖고 자랑하거나 내세우려고 하는 움직임이 멋지거나 뜻있거나 남다르다고 할 만할까? ‘우리 고장 제 이름 찾기’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제국주의자가 바꾼 이름 기리기’를 하는 전라남도 조그마한 지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4347.11.26.나무.ㅎㄲㅅㄱ



'고흥군 이름 100돌'과 얽힌 글을 찾아서 읽고 싶다면...

http://www.g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241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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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ngopress.com/PhotoNews.aspx?idx=10318

 

<시민사회신문>에 쓰는 "숲사람 이야기" 여섯째 글입니다. 지난 2월에 신문이 나오고 올 11월에 새 신문이 나오니, 자그마치 아홉 달만이로군요. 아홉 달만에 이 글을 드디어 올릴 수 있네요 ㅠ.ㅜ

 

..

 

  오천 해를 아우른다고 하는 한겨레 발자국에서 ‘인천’이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곁에 있는 ‘서울’이 언제나 앞에 나타나는 한편,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는 말처럼,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나 시골은 서울을 떠받치는 모습이 됩니다. 오백 해에 걸친 ‘씨붙이 임금님’들이 물러난 자리에 제국주의 권력자가 총칼을 앞세워 들어올 무렵, 인천은 뜻밖에 근·현대 역사 한켠에 살짝 얼굴을 비춥니다. 기차, 전기, 전화, 온갖 운동경기, 종교, 상수도 같은 것들을 서울에 들이기 앞서 인천에서 실험하곤 했어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는 몰려드는 사람 많아 끝없이 옛집 허물고 논밭 밀면서 새 집과 건물을 짓습니다. 이와 달리, 서울 곁 인천은 서울로 일하러 오가는 사람들 잠자리 노릇을 하며 서울이나 부산 같은 커다란 재개발은 그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종섬과 용유섬을 메워 소금밭과 갯벌 없애 공항을 짓기도 하고, 연수동과 송도에 있던 논밭이랑 숲을 깎아 아파트를 때려짓기도 하지만, 인천에서 오래된 도심인 중구와 동구와 남구는 재개발 바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어요. 서울로 물건 올려보내는 공장 많고, 서울로 바로 잇는 고속도로와 기찻길 있으며, ‘지옥철’이라는 전철 이름은 인천서 서울로 돈벌러 오가는 사람들한테 붙습니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린이와 젊은이 모두 나가 덩그러니 고요한 인천 옛도심은, 개발업자가 바라보기에 애써 허물고 뚝딱거려 보아야 돈푼 안 나올 곳처럼 보였겠다 싶어요. 그런데, 이런 빛깔 때문에 인천 옛도심은 개화기 무렵, 해방과 한국전쟁 언저리, 1950∼60년대 모습에다가 1970∼80년대 모습까지 골고루 보여주는 ‘근·현대 생활문화 박물관’이 됐어요. 할매와 할배 고향은 다른 데라지만, 인천에서 3대 4대를 살며 새 토박이가 됩니다.

 

 

 

 

 

 

 


 숲사람 이야기 6 - 작은 사람들 작은 사랑
 ― 배다리와 골목과 헌책방거리

 


  골목사람


  인천 옛도심 골목동네는 아주 넓습니다. 높직한 건물 따로 없이 고만고만한 집들 촘촘히 이어집니다. 언덕받이라 할 만한 데에는 으레 예배당 뾰족탑 높습니다. 답동 천주교성당이든 내리 감리교회이든 내동 성공회성당이든, 이런 갈래 저런 쪽 서양종교 예배당이 곳곳에 있어요. 개화기 무렵 서양사람들은 꼭대기에서 ‘한겨레 서민’을 내려다보는 곳에 큰집 지으며 콧대를 높였어요. 아마, 이런 큰집을 놓고 권력이라 일컫겠지요. ‘서민’이라 하는 사람들은 큰집 안 짓거든요. 수수한 사람들은 수수한 집을 지어 수수한 살림 꾸립니다. 골목길이 좁다 하지만, 자동차 지나가기에 좁을 뿐, 사람과 자전거 지나가기에는 알맞습니다. 골목길 거닐다 보면, 햇살이 아침 낮 저녁에 따라 집집마다 골고루 내리쬐는 결을 느낄 수 있어요. 참 촘촘히 붙어 지은 골목집이지만, 서로서로 햇살조각 조금씩 나누어 해바라기 누릴 수 있도록 했어요. 골목집을 가만히 살피면, 땅을 파고 들어가는 집이 없어요. 아무리 작은 골목집이라 하더라도 하루에 한나절 햇볕 골고루 들어옵니다. 이와 달리, 골목집 허물고 빌라나 연립주택 새로 지으면 으레 땅밑집을 만들어 햇살조각 못 들어오는 데가 생겨요. 빌라와 빌라가 서로 햇볕을 막아, 한낮에도 전깃불 켜야 하는 데까지 있어요.


  골목동네에서 살아가기에 골목사람입니다. 이제 인천에도 아파트 무척 많으니, 골목사람보다 아파트사람 더 많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옛도심을 찬찬히 살피면, 옛도심에는 아파트보다 골목집이 훨씬 많고, 아파트사람보다 골목사람이 더 많아요.


  골목사람은 골목길을 거닐며 오갑니다. 골목사람은 골목길 한쪽에 꽃그릇을 두어 골목꽃을 돌봅니다. 어린이와 젊은이 모두 나간 이른아침부터 골목길을 쓸며 치우는 골목할매와 골목할배는, 오래되어 쓰러진 옛 골목집 돌을 고르고 흙을 보듬어 골목밭 일굽니다. 온통 시멘트로 바르거나 아스팔트를 깐 골목길이지만, 골목할매와 골목할배는 조그마한 흙땅 마련해 나무 한 그루 심습니다. 어느 골목동네를 다니더라도, 감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탱자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수수꽃다리 포도나무 들이 씩씩하게 자라요.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튼튼하게 자라는 골목나무는, 골목동네에 푸른 숨결 나누어 줍니다. 골목밭에서 자라는 골목푸성귀랑 앙증맞은 꽃그릇에서 크는 골목꽃은, 골목동네에 푸른 내음 베풀어 주어요.


  큰길에서는 골목을 느끼지 못합니다. 골안, 그러니까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면 비로소 골목을 느낍니다. 큰길에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꼭 다섯 발걸음만 들어서 보셔요. 자동차 소리 잠듭니다. 매서운 겨울바람마저 가라앉습니다. 햇살조각 나누어 누리는 골목집들은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를 막고,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습니다.


  건축학자가 설계한 집이 아닌 골목집입니다. 관청 토목부서에서 개발한 동네가 아닌 골목동네입니다. 수수한 사람들 스스로 수수하면서 투박한 손길 모두어 살가우며 따스한 빛으로 일군 곳이 골목동네입니다. 이 골목동네가 쉰 해 일흔 해 백 해 조용히 살아내며, 스스로 ‘근·현대 생활문화 박물관’이 되어요. 수십 억 들여 이런저런 기념관이나 박물관 짓지 않더라도, 골목동네 골목집이 고스란히 박물관이요 기념관 구실을 합니다.

 

 

 

 

 

 


  헌책방거리


  인천 배다리에는 헌책방거리가 있습니다. 헌책방거리는 창영동과 금곡동이 한길 따라 맞붙은 곳에 나란히 있었는데, 이제 창영동 쪽(철길 지나가는 쪽)에는 헌책방이 모두 문을 닫았고, 금곡동 쪽(철길 지나가는 건너편)에만 헌책방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동 축현초등학교 담벼락 따라 길장사를 했다 하고, 차츰 배다리 쪽으로 옮겨 창영교회 둘레까지 가게를 꾸리다가, 1970∼80년대를 거치며 오늘날 자리에 헌책방거리를 이루었다고 해요. 〈삼성서림〉 〈한미서점〉 〈대창서림〉 〈집현전〉은 예순 해 안팎에 이르는 기나긴 해에 걸쳐 사람들한테 책 하나 나누는 길을 걸었습니다. 〈아벨서점〉은 다른 헌책방 일꾼들한테는 처음에 ‘아가씨 일꾼’이었다 하는데, 어느덧 〈아벨서점〉도 헌책방거리를 마흔 해 남짓 지키는 ‘할머니 일꾼’이 되었습니다.


  헌책방이 거리를 이루어 잇닿기에 헌책방거리입니다. 퍽 아스라한 지난날을 떠올리면, 헌책방 갯수가 많이 줄었다 할 테지만, 헌책방은 꼭 한 군데만 있어도 그곳이 헌책방골목이 되고 헌책방거리가 됩니다. 전라북도 전주시를 보면 〈홍지서림〉과 〈민중서관〉(이곳은 문을 닫았어요)이 있는 데를 ‘홍지서림 골목’이나 ‘민중서관 골목’이라고 가리켜요. 지역사람한테 슬기로운 지역문화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구실 맡는 책방 한 곳이 있어 지역사람은 그 책방 이름 하나 떠올리며 이름을 붙입니다.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다섯 군데 있는 헌책방 가운데 한 곳 두 곳 할매와 할배가 몸이 힘들어 가게를 쉬려 한다 하더라도, 꼭 한 군데 헌책방이 튼튼하게 책살림 꾸린다면, 이곳은 언제까지나 헌책방거리입니다. 전라북도 남원시를 보면, 용성초등학교 옆에 있는 헌책방 〈용성서점〉은 헌책방 아닌 문방구와 구멍가게로 거의 바뀌었습니다. 책은 구석으로 밀려났고, 그나마 먼지만 두껍게 먹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문방구와 구멍가게 구실로 바뀐 이곳에 헌책 하나 놓이면, 이곳은 앞으로도 헌책방이에요. 왜냐하면, 책 하나가 책방이요, 책방 하나가 마을이거든요. 책 하나에 서린 넋을 읽어 온누리를 헤아리고, 책방 하나에 깃든 책을 마주하며 못목숨 숨결을 짚어요.


  작은 출판사에서 작은 책 하나 내놓습니다. 수십만 수백만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천 사람 이천 사람 삼천 사람 즐거이 읽을 작은 책 하나 내놓습니다. 때로는 백 사람 이백 사람 삼백 사람 기쁘게 읽을 더 조그마한 책 하나 내놓습니다.


  백만 사람이 읽어 주어야 ‘책’이 되지 않습니다. 십만 단골 드나들어야 ‘책방’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마음밭 되어 스스로 아름다운 책씨앗 심을 줄 아는 책손 한 사람 두 사람 모여 책밭 일구어요. 책밭 일구는 책손이랑, 책밭 보살피는 책방지기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책마을 빚습니다. 으리으리한 건물 우줄우줄 올려야 책도시나 문화도시가 되지 않습니다. 오래된 골목집 한쪽에 마련하는 책방이 하나둘 모여 책도시 되고 책골목 되며 책문화 이루어져요.


  배다리 헌책방거리 어귀를 보면 〈나비날다〉라 하는 책집 하나 있습니다. 외국말로 ‘북카페’라 할 수도 있는 책쉼터인데, 〈나비날다〉 1층은 책집이요, 2층은 뜨개집이기도 하고, 찻집이기도 하며, 유기농 물건 다루는 나눔집이기도 합니다. 〈나비날다〉 1층 안쪽은 길손집이기도 합니다. 길손집이란 요즘 떠도는 말로 ‘게스트하우스’입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복판에는 〈시 다락방(배다리 작은 책, 시가 있는 길)〉이 있습니다. 2007년 11월부터 다달이 ‘시 낭송회’를 여는 아기자기한 전시관이자 만남터인 다락방이지요. 시청이나 구청에서는 이처럼 고즈넉하고 어여쁜 문화쉼터를 아직 마련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돈이 없다고만 말합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돈이 없다’ 할 헌책방 일꾼 한 사람이 가게를 장만하고 나무일을 하면서 책꽂이와 나무계단과 전시대 모두 짜고 맞추어 〈시 다락방〉을 열었어요. 참말, 책마을이란 돈으로 짓지 못합니다. 책마을도 책집도 책숲도, 따스한 손길과 넉넉한 마음길과 살가운 사랑길 어우러지면서 천천히 일굽니다.


  〈시 다락방〉 곁에는 〈배다리 사진관〉이 자리합니다. 혜광학교 교사이면서 사진작가인 이상봉 님이 사진잔치와 사진강의를 꾸준히 열어요.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창영초등학교 쪽으로 가면 〈스페이스 빔〉이 미술문화 북돋우는 잔치판을 꾀하고, 조금 더 걸어가면 〈개코막걸리〉 지나 〈마을사진관 다행〉이 있어, 마을사람 사진관이자 이야기쉼터 노릇을 합니다. 〈마을사진관 다행〉 바로 옆에는 〈한점 갤러리〉가 있어요. 이름 그대로 ‘한 점’, 한 뼘, 한 칸짜리 앙증맞은 전시관입니다. 이 모두 배다리 헌책방거리를 조곤조곤 빛냅니다. 작은 사람들 작은 손길 모여 배다리 책밭·사랑밭·삶밭 보듬습니다.

 

 


  배다리와 산업도로


  인천 배다리라는 곳에는 여느 사람들 골목집과 헌책방거리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곳에 지역 문화일꾼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인천시에서 배다리 골목동네 한복판에 너비 50∼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놓고 커다란 고가도로까지 놓으려 하는 막개발을 동네사람 모르게 밀어붙이려 하던 2006년 끝무렵과 2007년 첫무렵부터 비로소 지역 문화일꾼이 차츰 모였어요. 인천시와 주택공사는 송림1동과 송현1동이 맞붙는 수도국산 달동네 골목집을 와르르 밀어 아파트숲을 짓고는 동네사람 모르게 땅굴을 팠지요. 높은 쇠울타리로 가렸으니 드러나지 않았는데, 지자체와 중앙정부와 개발업자는 골목동네 밀어 없애면서 ‘달동네 박물관’이라는 시설을 하나 지었고, 이 밑에 배다리 삶터를 삽차로 깡그리 밀어붙여 쇼핑센터와 새 아파트숲을 올리려 했어요. 관청에서는 지도만 들여다보고 사람은 만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야 해요. 땅을 딛고 하늘을 마시며 이웃과 이웃이 어깨동무하면서 마을을 가꾸어야 비로소 보금자리가 태어납니다.


  인천 배다리는 창영동, 금곡동, 송림1동, 경동, 유동, 송현1동이 크고작게 맞닿으며 이루어진 골목동네를 가리킵니다. 송림1동은 조금씩 뻗으며 송현2동화 화평동과 화수1동으로 이어지고, 창영동과 금곡동도 조금씩 뻗으며 숭의3동과 도원동과 율목동으로 이어지면서, 송림2동이랑 송림3동과 닿습니다. 배다리 한쪽 경동과 유동은 율목동 넘어 신흥동2가하고 신흥동1가로 이어지고, 송현1동은 동인천 쪽으로 뻗으면서 인현동1가와 내동과 신포동까지 닿습니다.


  배다리라고 할 때에는 어느 작은 점 하나가 아닙니다. 지도로 보면 작은 동그라미 하나로 그릴 만하더라도, 작은 동그라미로 그려진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꾸려요. 작은 골목집이 서로 어깨를 기대요. 작은 골목사람이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골목아이가 골목놀이를 하고, 골목어른이 골목걸상이나 골목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잔에 이야기잔치 이룹니다.


  사람들은 연속극이나 영화를 보아야 문화를 누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마을 이웃하고 도란도란 주고받는 이야기 한 자락으로 문화를 누립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어진 옛이야기란 모두 ‘입 문학’, 곧 구비문학이에요. 땅을 밟고 흙을 만지던 사람들이 몸으로 부대끼고 마음으로 아끼면서 빚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입 문학’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골목동네 골목사람이 알콩달콩 복닥이며 빚는 이야기는 ‘오늘이야기’입니다. ‘오늘이야기’는 새 아이들 태어나 새 보금자리 일구며 자라는 동안 시나브로 ‘옛이야기’가 되고, 이 옛이야기는 다시 새 아이들 태어나 입과 입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삶이야기’로 거듭납니다.


  책이란, 오늘이야기가 옛이야기 되고 다시 삶이야기로 거듭나는 길타래를 살며시 담는 이야기그릇입니다. 삶이야기는 사랑이야기이기도 하고, 꿈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노래이기도 하며 춤이기도 합니다. 웃음이기도 하고 눈물이기도 하지요.


  책은, 작은 사람들 삶과 사랑과 꿈과 노래와 춤과 웃음과 눈물을 담아요. 책방은, 작은 사람들 이야기꾸러미 건사한 아름다운 책을 정갈히 모시는 쉼터입니다. 책방거리는, 아름다운 이야기꽃으로 즐거운 이야기잔치 누리는 만남터입니다. 그래서, 인천시와 주택공사와 개발업자가 한통속 되어 인천 배다리에 산업도로 밀어붙이려 할 적에, 골목사람과 책방사람과 지역 문화일꾼 모두 똘똘 뭉쳐 맞서 싸워 끝내 예쁜 삶자락 지킬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숲과 사람숲과 책숲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시 다락방〉을 마련하며 빙그레 웃는 〈아벨서점〉 책방지기 곽현숙 님은 “도시에서는 책방이 숲이에요.” 하고 말합니다. “책이란, 책마다 사람이 자연인 것을 알아 가는 하나의 길이란 말이야, 길.” 하고도 말합니다. 헌책 하나 만져 사람들한테 책내음 짙게 드리운 책방지기 말마디에는 사랑 한 자락 묻어납니다. 책방지기 사랑 한 자락은, 숲에서 아름드리로 자라던 나무들이 종이가 되고 책으로 다시 태어나 책방으로 들어오기까지 어떤 길에 섰느냐 하는 대목을 밝힙니다.


  시골에서는 무엇이 숲일까요. 한국에서는 어디가 숲일까요. 지구별에서는 어느 곳이 숲일까요. 우리 마음에는 어떤 숲이 있을까요. 우리들은 책 한 권 만나며 마음밭에 어떤 나무씨앗이나 풀씨나 꽃씨 한 톨 심는가요.


  책내음은 곧 나무내음이면서 숲내음입니다. 숲내음은 푸른내음이요 사랑내음입니다. 이 나라 골골샅샅 아파트숲만 솟지 말고, 고즈넉한 책숲과 사람숲 짙푸르게 빛나기를 빕니다. 4346.3.2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숲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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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01 08:14   좋아요 0 | URL
지난 3월에 쓴 글을 11월에야 겨우 이렇게 공개해서 올릴 수 있으니 가슴 한켠 싸아합니다. 혼자서 눈물 찔끔 흘리면서 글을 띄웁니다. 이 글 실어 주는 작은 신문이 앞으로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림 이을 수 있기를 빌어요. 이제 "숲사람 이야기" 일곱째 글을 비로소 쓸 수 있을 텐데, 일곱째 글은 언제쯤 공개를 하거나 신문에 실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글을 써 놓았어도, 신문이 나와야 공개를 할 수 있고, 그러니까 책이 나오고 잡지가 나오고 신문이 나와야 글을 두루 나눌 수 있으니, 글쓰기도 글읽기도 모두 '기다리는 일'이 되는구나 싶어요...... 중얼중얼......

페크(pek0501) 2013-11-01 13:25   좋아요 0 | URL
계속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

숲노래 2013-11-01 13:39   좋아요 0 | URL
예쁜 사람들이 그곳에 있어
앞으로도 씩씩하게 뿌리내리며 널리 사랑받으리라 믿어요~
 

 

  부산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다고 합니다. 높다란 아파트가 바닷가에 서기도 하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가 있기도 합니다. 부산 야구장에는 사람들이 꽉 차고, 술집과 찻집과 고기집과 옷집 있는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부산 이름을 앞세운 국제영화잔치가 벌어지며, 영화잔치 곁에는 자갈치시장 있어, 바닷내음 물씬 풍깁니다. 한편, 부산에는 산복도로가 있고, 달동네가 있습니다. 멧꼭대기까지 자그마한 집이 알뜰살뜰 어깨를 맞대어 조그마한 골목으로 이어집니다. 집안 아닌 집밖에 뒷간이 있는 보수아파트가 있고, 이 둘레에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있습니다. 헌책방골목에는 크고작은 헌책방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한국전쟁 무렵부터 자리를 잡은 헌책방이라는데, 예순 해를 지나고 일흔 해가 되도록 책 하나에 깃든 사랑으로 새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책은 묵되 이야기는 새롭습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부산근현대사박물관 곁을 지나고 용두산공원 옆을 스쳐 걸어가면 책쉼터(북카페) ‘백년어서원’이 있습니다. 책이 있고, 차 한 잔이 있으며, 책걸상이 있습니다. 여러 인문학 모임이 이어지고, 시를 나누는 조촐한 자리가 생깁니다. 책쉼터 앞은 찻길이기에 자동차물결 소리로 귀가 아프지만, ‘백년어서원’을 일군 분이 시와 사진으로 아름다운 꿈 한 자락 길어올리는 삶을 걸어왔기 때문인지, 계단 한 칸 두 칸 밟고 책쉼터로 들어서면 어느새 자동차물결은 내 머릿속에서 잊히면서, 책내음과 이야깃소리가 가슴속으로 스며듭니다. 부산사람은 야구 보는 재미로 살아간다고도 하는데, 삶을 밝히는 책빛으로 헌책방골목이 고운 등불 구실을 하고, 삶을 빛내는 책쉼터가 따사로운 횃불 구실을 하는구나 싶습니다.

 


 숲사람 이야기 5 - 이야기 꽃피우는 작은 터
 ― 도서관은 하루아침에 서지 않는다

 


  도서관과 책


  도서관에는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는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허름한 옷차림이라 하더라도, 또 고무신이나 짚신차림이더라도, 아니 맨발이라 하더라도, 도서관에서 책 한 권 빌려 읽을 수 있습니다.


  기초수급생활자이건 차상위계층이건, 또는 장애인이건 어린이이건 할아버지이건, 도서관은 아무도 물리치지 않습니다. 손을 뻗어 책을 쥘 수 있으면, 손에 쥔 책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으면, 누구라도 도서관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다만, 주말 아닌 여느 날에 도서관 나들이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좀 적다 할는지 모릅니다. 여느 날 여느 때에는 일터에 매여 옴쭉달싹 못할 테니까요.


  도서관 건물이 아무리 으리으리한들, 꾀죄죄한 옷차림으로도 씩씩하게 드나듭니다. 도서관 건물이 높고 크다 하니까, 까만 자가용을 타고 찾아가야 하지 않습니다. 책은 알맹이를 읽어 책이지, 겉껍데기를 번드레레하게 꾸민대서 책이 아닙니다. 책읽기란 책에 서린 삶을 읽는 즐거움이지, 책읽기를 해서 지식자랑이나 정보뽐내기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직 이 나라 도서관은 건물만 너무 큽니다. 도서관은 책을 알뜰히 건사하고 다루면서 사람들이 책하고 살가이 사귀도록 돕는 쉼터 구실을 해야 할 텐데, 아직 이 나라 도서관은 입시공부나 시험공부 하는 ‘칸막이 공부방’ 구실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도서관이 ‘공짜 책 실컷 보는 데’는 아닙니다. 도서관이 갖추는 책은 모두 내가 낸 돈(세금)으로 장만합니다. 곧, 내 돈으로 장만하는 책이니, 더더욱 아끼고 보살필 책이요, 나뿐 아니라 내 뒷사람도 즐겁게 만나 기쁘게 읽을 만한 책을 갖추도록 이끌어야 아름답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면서 책을 지키는 곳입니다. 도서관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밝고 푸르며 싱그러운 햇살과 바람을 누릴 만한 데에 지어야 합니다. 아마, 오늘날 도시에서 이런 자리는 도시 변두리쯤 될 텐데, 도서관은 변두리 아닌 한복판에 지어야 하고, 도시 한복판에는 먼저 숲(공원)이 있어야 해요. 숲 곁에 도서관이 있어야 올발라요. 그러니까, 도시 한복판이란 숲과 도서관이어야 올바르다는 소리입니다. 다음으로, 도서관이 책을 지키자면 건물만 커서는 안 돼요. 바람과 볕이 알맞게 드나들도록 짜고, 책꽂이를 좋은 나무로 엮으며, 책손 누구나 책을 고운 손길로 찬찬히 만져야 합니다. ‘대출실적 0’이라 해서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직 사람들이 안 빌리는 책이 있다면, 도서관지기가 이런 책들을 잘 살피고 값을 헤아려 사람들한테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즐거이 읽으며 마음을 빛낼 책인데 못 알아보니까, 이런 책을 알리라는 뜻에서 도서관지기(사서)를 두지요.


  그렇지만, 우리 모습을 돌아보면, 도서관은 책을 지키는 데라기보다 책을 버리는 데입니다. 도서관에서 버린 책은 종이쓰레기 모이는 데로 가고, 헌책방 일꾼이 이곳에서 ‘버려진 책’을 캐내어 찬찬히 손질합니다. 비록 도서관에서는 책손을 만나지 못했지만, 이 ‘버려진 책’을 찾아 애타는 눈길로 아름다운 넋을 일구고 싶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숲과 나무와 종이


  숲이 있어 나무를 얻습니다. 나무를 얻어 집을 짓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로 집을 지은 다음, 나무로 연장을 만듭니다. 나무를 깎아 연필을 만들고, 나무를 잘라 종이를 빚습니다. 나무한테서 얻은 종이를 묶으면 책이 됩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글을 쓰는 사람은 연필과 종이와 책 모두 나무한테서 얻은 숨결로 글쓰기를 하는 셈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숲에서 푸른 숨결 얻어 글쓰기를 하는 삶입니다.


  시를 쓰든 철학을 파헤치든 소설을 쓰든 문화인류학을 살피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이들은 ‘나무를 만지면서 읽는’ 셈입니다. 글쓰기란 삶을 쓰기에 삶쓰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모로 보면 나무쓰기가 됩니다. 책읽기 또는 글읽기란 책이나 글을 쓴 사람 삶을 읽는 일이기에 삶읽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모로 보면 나무읽기가 되곤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룬 글이든 숲에서 비롯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실은 책이든 숲에서 태어납니다. 대입시험을 다루는 문제집이나 참고서도 숲에서 비롯합니다. 토익이나 토플을 치르려고 들여다보는 영어교재도 숲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들은 숲에서 집을 얻고 밥을 얻으며 옷을 입습니다. 여기에, 종이와 책과 연필을 숲에서 얻습니다. 온통 숲내음이고 숲바람이며 숲햇살입니다. 숲삶입니다.


  숲을 생각하지 못하면, 이야기가 슬기롭게 나오지 않습니다. 숲을 사랑하지 않으면, 글 한 줄에 아무 이야기가 안 담깁니다. 숲을 생각하기에,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와 아이들한테 찬찬히 물려줍니다. 숲을 사랑하기에, 글꽃이 피어나고 말꽃이 자라나며 온누리에 사랑씨앗이 퍼집니다.


  지식을 쌓도록 돕는 책이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내 이웃과 동무 삶을 마주하면서 아름다운 꿈을 키우는 길잡이 구실을 하는 책입니다. 내 하루를 기쁘게 맞이하는 어여쁜 웃음꽃 피어나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먼먼 옛날 사람들한테는 종이책이 따로 없었습니다. 임금님이나 권력자나 지식인 사이에는 종이책이 얼마쯤 있었지만, 흙을 일구며 숲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한테는 종이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글 또한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흙을 일구며 숲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은 종이책 없이도 하늘을 읽고 날씨를 읽으며 구름을 읽고 바다를 읽어요. 글 한 줄 모르지만, 물길과 바닷길을 알고, 풀과 새와 벌레를 알아요. 흙을 일구는 흙사람은 흙에 얽힌 모든 이름을 짓습니다. 숲에 깃들어 사는 숲사람은 숲에서 비롯하는 모든 이름을 짓습니다. 땅이름과 마을이름뿐 아니라, 풀이름과 꽃이름과 벌레이름과 나무이름 모두 흙사람과 숲사람이 지었어요. 바람과 비와 눈을 나타내는 이름도 흙사람과 숲사람이 지었어요. 사람 몸 곳곳 가리키는 이름이나 사람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가를 나타내는 낱말도 흙사람과 숲사람이 지었어요. 흙사람과 숲사람은 나무를 잘라 연필이나 종이나 책을 만들지 않았지만, 나무를 잘라 집을 짓고 삶을 지으면서 ‘삶책’이라고 하는 ‘닳지 않고 낡지 않으며 바래지 않는 가장 아름다운 책’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어요.

 

 


  책으로 쉬는 터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일꾼들은 작은 손길 그러모아 책잔치를 일굽니다. 2013년에는 어느덧 열 번째 책잔치를 합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 한 자리를 지키는 〈우리글방〉은 ‘책방’으로만 책지기 구실을 하다가, 시나브로 마음을 기울이면서 ‘책쉼터’, 곧 ‘북카페’를 책방 한쪽에 마련합니다.


  헌책방 책살림을 꾸리면서 책쉼터를 마련하는 일이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책 한 권이라도 더 꽂아 책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한다고 여기지만, 〈우리글방 북카페〉는 조금 다른 생각을 책손한테 들려줍니다. 사람들이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이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아름답게 읽으면서 스스로 삶을 곱게 빛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책을 한 해에 백 권 읽거나 이백 권 읽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을 한 해에 열 권 읽거나 스무 권 읽기에 덜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을 한 해에 한 권조차 못 읽는대서 못나거나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먼먼 옛날 흙사람과 숲사람처럼 ‘삶책’을 읽을 줄 알면 됩니다. 삶책을 읽는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삶책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싱그러운 꿈을 나눕니다.


  보수동에 있는 〈우리글방 북카페〉는 사람들이 책과 어깨동무하도록 이끄는 헌책방골목을 조그맣게 밝히는 등불이라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꼭 이런 베스트셀러 저런 스테디셀러를 찾아서 읽으려고 하지 마셔요’ 하고 속삭이는 등불입니다. ‘내 마음에 와닿아 내 생각을 따사롭게 보듬는 책을 읽어요’ 하고 속삭이는 등불입니다.


  부산 동광동에 자리한 인문학 책쉼터 〈백년어서원〉은 산복도로나 달동네 언저리에서 작은 사람들 작은 집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알뜰히 사랑하는 넋을 살포시 들려주는 만남터입니다. 책으로 쉬고, 이야기로 사귀며, 배움과 만남이 어우러지는 이음고리입니다.


  둘레를 살피면, 도시에는 찻집과 밥집과 술집이 많습니다. 시골에는 면소재지쯤 되더라도 찻집이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찻집이 따로 없어도 논둑과 밭둑이 이야기마당입니다. 시골에서는 밥집이 따로 없어도 여느 살림집에서 밥을 지어다가 들밥을 먹습니다. 시골에서는 막걸리 한 사발 떠서 나누면 들판이나 숲 어디에서나 술잔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차나 밥이나 술을 즐기는 곳은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가 되나요. 도시에서는 어디에서 다리쉼을 하거나 동무를 만나 마음을 느긋하게 열어 이야기꽃 피울 만한가요.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야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얼거리입니다.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야 물을 마시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얼거리입니다. 도시에서는 풀 뜯어먹을 빈땅 찾기 어렵습니다. 문명과 물질은 있어도 사랑과 꿈은 뿌리내리기 힘듭니다.

 

 

 


  이야기 꽃피우는 마음


  인문학 책쉼터 〈백년어서원〉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아이들과 다리를 쉬다 보면, 마음도 함께 쉬는구나 싶습니다. 어째서 이곳에서는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쉴 수 있을까요. 〈백년어서원〉에서 2012년 12월에 내놓은 《百年魚》 13호 맺음말을 읽습니다. “백년어는 다시 처음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삽니다.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 다시 공부할 참입니다.”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산다면, 풀이 사는 곳에 사람이 살겠지요. 나무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살고, 구름과 무지개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산다 할 테고요. 달과 별이 사는 곳에 사람이 삽니다. 해와 바람이 사는 곳에 사람이 살아요. 그러나, 오늘날 부산이나 서울이나 크고작은 도시는 물고기나 풀이나 나무나 구름이나 무지개가 살기 어렵습니다. 달과 별과 해와 바람이 살 만한 도시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도시뿐 아니라 시골조차 공장과 골프장을 끌어들이려 합니다.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받아들여 보상금 몇 천억 원 받는 꿈을 꾸는 지자체가 많습니다.


  이야기 스스로 자라날 만한 도시가 없습니다. 이야기 푸르게 숨쉴 만한 도시가 없습니다. 문화예술재단이 있되, 전시와 성과에 얽매이지, 작은 사람들 작은 삶을 작게 사랑할 만한 이야기를 보살피는 길하고는 아직 멉니다.


  도서관은 하루아침에 지을 수 없습니다. 도서관에 건사할 책은 수십 수백 해에 걸쳐 나오는 책입니다. 커다란 새책방에 있는 책을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주문해서 갖춘들 도서관이라 할 수 없어요. 차근차근 책을 갖추어 서른 해나 쉰 해나 백 해쯤 흘러야 비로소 도서관 꼴을 갖추어요.


  보수동 헌책방골목 〈우리글방 북카페〉는 기나긴 나날 책을 만지고 살리던 사랑으로 ‘책쉼터’를 일굽니다. 동광동 인문책 쉼터 〈백년어서원〉은 시인 김수우 님이 기나긴 나날 책을 읽고 보듬던 꿈으로 ‘책나눔터’를 이룹니다. 책으로 길어올리는 이야기꽃은 오래도록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이 감돌아 피어납니다. 책으로 주고받는 이야기꾸러미는 두고두고 천천히 속삭이는 꿈이 깃들며 무르익습니다.


  산복도로나 달동네를 처음부터 애틋하게 눈여겨보던 사람이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마, 얼른 재개발을 해야 할 곳으로 바라보기만 했겠지요. 그런데, 산복도로나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일구었어요. 시가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나며 영화가 태어납니다. 이와 달리, 해운대 높다란 아파트에서 시나 소설이나 영화가 태어나는 일은 아예 없거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해운대 높다란 아파트에서 시나 소설이나 영화가 태어나도 그닥 재미없습니다. 삶도 사랑도 웃음도 눈물도 좀처럼 서리지 못하거든요.


  까르르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산복도로와 달동네에서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숨바꼭질 술래잡기 즐기는 아이들이 산복도로와 달동네에서 이야기씨앗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책을 사랑하면서 책쉼터를 빚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책을 아끼면서 책나눔터를 짓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이 얼마가 되든, 꾸준하게 어루만지며 가꾼 꿈을 책사랑으로 빛냅니다. 빙그레 웃음지으며 읽은 책을 마음밭에 아로새겨 책집으로 선보입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왁자지껄 재미난 ‘도서관 한마당’입니다. 동광동 인문책 쉼터는 고즈넉하니 어여쁜 ‘도서관 다락방’입니다. 4346.1.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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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3-06-12 15:31   좋아요 0 | URL
그런데요~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대요??

숲노래 2013-11-01 07:52   좋아요 0 | URL
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
댓글을 이제서야 보았네요~~
 

  2002년 여름부터 푸른책(청소년책)을 꾸준하게 펴내면서 한국땅 푸름이와 교사와 어버이한테 ‘삶을 읽는 길동무가 되는 책’을 나누는 ‘양철북’ 출판사가 있다. 아주 작은 일터로 처음 문을 연 뒤, 어느덧 열두 일꾼이 책짓기를 하는 책터가 되었는데, 출판사 대표 조재은 님(47)은 어릴 적 시골에서 감자묻이·밀사리를 하고 땔나무를 하며 고구마 빼때기를 하던 일을 즐겁게 되새긴다. “대밭골에 가서 대를 자르고 사카린 네 동가리 나눠서 타고, 막대기 꽂고 뒤안에 갖다 놓으면 시골이 참말 춥거든요. 대나무가 꽝꽝 얼어서 갈라지는데, 하루 자고 이듬날 소죽 쑬 때 갖다 넣으면 바깥만 떨어지고 안만 남아서 쏙 나오는데, 그게 아이스크림이에요. 얼마나 추운지 볼과 손이 빨간 거야. 그리고 소죽에 손을 담그면 때가 불어서 둥둥 뜨는데 소는 그걸 맛있다고 잘 먹어요.” 하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는데, 이 같은 이야기를 그림책이나 청소년소설로 빚으면 퍽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2006년부터 인문책을 차근차근 펴내고 푸른책을 나란히 펴내면서 한국땅 사람들한테 ‘삶을 사랑하는 길벗이 되는 책’을 나누는 ‘철수와영희’출판사가 있다. 처음부터 작은 일터로 열었고, 오늘도 작은 일터로 살림을 꾸리는데, 출판사 대표 박정훈 님(44)은 ‘일하는 사람들이 슬기롭게 사랑을 나누면서 생각을 꽃피울 수 있는 책’을 꿈꾼다. 뚜벅뚜벅 걷는 한 걸음이 모여 천 리 길이 되고, 천 리 길이 만 리 길로 이어지면서 이 나라 골골샅샅 아리따운 이야기 살포시 감돌 수 있으리라. 삶은 사랑으로 누리고, 책은 사랑으로 빚는다.

 


  숲사람 이야기 4 - 사랑으로 빚는 책
  즐겁게 책을 빚는 사람들

 


  책 한 권 읽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책을 읽는 사람’ 모습은 차츰 사라지지 않느냐 싶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정부에서도 스마트폰이라 하는 손전화 기계를 널리 알리거나 파는 데에 생각을 기울일 뿐이고, 삶을 다루는 책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초·중·고등학교 교과목은 잔뜩 늘어났고, 대학교 학과는 수없이 생겼다. 그런데, 초·중·고등학교에서나 대학교에서나 교과서와 교재로 지식과 정보를 가르치려 할 뿐, 교과서를 넘는 책이나 교재를 아우르는 책을 밝히지는 않는다.


  교과서와 교재는 ‘온누리를 밝히는 책’ 가운데 알맹이를 간추렸을까.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과서와 교재만 달달 외우면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교과서로 시험공부를 하고 ‘논술에 도움 될 몇 가지 문학책과 인문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는 굴레로 열두 해를 보낸 다음, 더 커다란 회사나 공공기관에서 연봉을 더 많이 받을 만한 자리를 살피도록 등을 떠미는 대학교 네 해를 보내는 아이들은 마음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 오늘날 아이들은 교과서를 읽으며 무엇을 배울까. 오늘날 아이들은 교과서를 살짝 내려놓고 읽는 문학책과 인문책으로 무엇을 느낄까.


  글 한 줄에 서린 넋을 읽으라는 말을 흔히들 읊지만, 정작 제도권 기본교육 열두 해를 거치는 동안, 아이들 스스로 ‘책 한 권 글 한 줄’ 느긋하게 읽으면서 마음 깊이 아로새기도록 풀어놓지 않는다. 글 한 줄을 읽으면서 삶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사랑을 깨우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1년 평균 독서량’은 대수롭지 않다. 노래꾼 ‘싸이’가 한 해에 한 권조차 안 읽는다고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다. 그렇다면, 한 해에 책을 100권이나 1000권쯤 읽는 이들은 얼마나 훌륭하게 삶을 갈고닦는가. 한 달에 책을 10권이나 30권쯤 읽는 이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사랑을 꽃피우는가. 한국에서 똑똑하다는 이들은 얼마나 착하고 참답게 이웃사랑을 하는가. 한국에서 가방끈 길다 하는 이들은 얼마나 어여쁘고 슬기롭게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가.

 

  책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은 하루에 책을 몇 권쯤 읽을 수 있을까. 하루에 책 한 권씩 읽을 수 있을까. 여느 책이라 하면 한 권 읽는 데에 너덧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 걸린다고들 말하지만, 책에 따라 다 다르기에, 어느 책은 5분만에 읽을 수 있고, 어느 책은 다섯 해에 걸쳐 읽을 수 있다.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는 어버이라면, 날마다 그림책 스무 권이나 서른 권씩 읽기도 한다. 같은 그림책 한 권을 하루에도 열 차례나 스무 차례 읽어 주기도 한다.


  아마, 통계에는 ‘어린이책 아이한테 읽히는 어버이’가 날마다 하는 ‘책읽기 부피’까지 담기지 않으리라 본다. 통계에는 안 잡힌다 하지만, 이 나라 숱한 어머니들은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참 많이 오래도록 읽는다. 다만, 어머니 스스로 ‘책을 읽는다’고 못 느낄 뿐이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아이들이 읽는 책’으로 잘못 알거나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림책을 쓰거나 동화책을 내는 이는 모두 어른이다. 어른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어린이책을 빚는다. 이 어린이책은 어른들이 책방에서 장만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린다. 그리고, 이 어린이책은 바로 어른들이 ‘먼저 읽’으며 아이한테 읽힐 만한가 살핀다. 어른들은 먼저 한두 번 읽은 뒤,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 준다. 곧, 어느 어린이책이라 하더라도 어른들은 ‘책 한 권을 백 차례쯤은 되읽는다’고 여길 만하다.


  그나저나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모든 어른이 읽는 책이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모든 어른이 느끼고 깨달으며 생각밭을 북돋우도록 이끄는 책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림책을 들고 아이한테 읽히면서 당신 스스로 ‘책을 읽는’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림책을 읽히면서 ‘당신 스스로 미처 못 느끼거나 모르던 새로운 누리’를 깨닫는다.


  여느 어버이라면, 아버지는 회사에서 돈 벌고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얼거리인데, 여느 아버지들은 회사에서 너무 오래 머무느라 막상 아이들과 ‘아름다운 어린이책을 함께 누리지’ 못하면서 책읽기하고 자꾸 동떨어진다고 느낀다. 나아가, 여느 아버지들은 집에서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아이 삶 읽기’, 곧 ‘아이읽기’와 ‘삶읽기’ 또한 제대로 못 한다고 느낀다.


  책이란 무엇인가. 숲에서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 잉크를 찍어서 실로 묶거나 본드로 붙여야 비로소 ‘책’일까. 누군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서 담아야 비로소 ‘책’일까. 따로 글을 안 쓰고 그림을 안 그리더라도 말로 조곤조곤 들려줄 때에도 ‘책’이지 않을까. 이른바 ‘입말, 이야기말(구비문학)’ 모두 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종이책은 안 읽는다지만,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이웃들과 어깨동무하며 풀과 나무를 보살피는 이라면 ‘책을 읽는’ 셈이리라.

 

 

  책에서 읽는 삶


  삶을 읽으며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삶을 읽는다. 아이들 눈빛을 바라보며 아이한테 서린 ‘하느님 넋’을 읽는다. 숲에서 나무를 쓰다듬거나 숲바람을 쐬면서 숲속에 고이 흐르는 ‘빛과 그림자’를 읽는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이들은 이제 할머니와 할아버지이다.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일찌감치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일꾼이 되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시골을 지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당신 흙일을 당신 어버이한테서 몸으로 보고 듣고 배우고 익혔다. 어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도 ‘농사짓는 길잡이책’을 읽지 않았다. 예나 이제나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책으로 흙일을 배우거나 살피’지 않는다. 언제나 몸으로 흙을 부대끼고 만지고 밟고 쓰다듬으면서 흙일을 배우거나 살핀다.


  ‘모내기 하는 법’을 책으로 읽어야 책읽기일까. 모내기 하는 법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맨발로 무논에 들어가 배울 때에 책읽기일까. 김매기와 피사리는 ‘책으로 읽어’야 알아채거나 깨달을까. 낫질과 호미질과 쟁기질과 삽질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책으로 엮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될까. 몸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말할 때에, 그러니까 낫질을 몸으로 보여줄 때에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 호미질로 풀을 캐는 삶을 굳이 글로 쓰거나 책으로 빚어야 할까.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바라볼 때면, 이분들 누구나 날마다 ‘책을 수십 권’ 읽는구나 하고 느낀다. 할머니들은 풀책을 읽는다. 할아버지들은 나무책을 읽는다. 할머니들은 해책과 달책을 읽는다. 할아버지들은 새책과 벌레책을 읽는다. 할머니들은 물책을 읽고, 할아버지들은 불책을 읽는다. 가을에 나락을 거두며 ‘나락책’을 읽는다. 수수를 털고 서숙을 까부르며 ‘수수책’과 ‘서숙책’을 읽는다. 서숙 한살이를 따로 책으로 써야 제대로 알거나 살필 수 있지 않다. 흙을 만지며 시골에서 한 해를 살면 몸과 마음으로 깊디깊이 서숙을 알거나 살핀다.


  봄에 찾아오는 제비는 ‘제비 그림책’이나 ‘제비 사진책’을 만들어야 제비 한살이를 깨닫도록 돕지 않는다. 제비가 둥지를 틀 만한 물 맑고 바람 좋으며 햇살 따스한 시골마을에서 흙집을 짓고 예쁘게 살아가면, 날마다 제비를 바라보고 인사하고 노래하고 마주하면서 ‘제비읽기’를 한다. ‘제비책’을 읽는 셈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손전화 기계에 푹 빠져 종이책은 잘 안 읽는다고들 한다. 그렇다. 종이책은 잘 안 읽겠지. 그러나, 손전화 기계를 징검다리 삼아 동무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이야기는 덧없는 쪽글질이나 개구진 말놀이가 아니다. 요즈음 아이들 나름대로 ‘마음껏 뛰놀 흙땅’과 ‘걱정없이 뒹굴 빈터’와 ‘사이좋게 얼크러질 놀이터’가 없는 마당에, 손전화 기계라도 붙잡으면서 마음을 열거나 가꿀밖에 없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이책 읽고, 흙땅에서 흙책 읽으며, 동무들과 사이좋게 뛰놀면서 동무책을 읽어야 아름답게 자랄 수 있다.

 

  책은 어디에 있는가


  책은 사람들 가슴속에 있다. 책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책시렁에 있지 않다. 책은 사람들 가슴속에 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책시렁에는 ‘종이꾸러미’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새책방이나 헌책방으로 마실을 다니면서 종이꾸러미를 돈 주고 장만한다. 저마다 장만한 종이꾸러미를 펼치면서 ‘삶을 읽으려’ 마음을 기울일 때에 책읽기가 된다. 스스로 장만한 종이꾸러미를 손수 넘겨 삶을 읽으려 할 때에 시나브로 ‘글마다 감도는 뜻과 꿈’을 살핀다.


  그런데, 글마다 감도는 뜻과 꿈을 살피자면, 종이꾸러미를 장만한 사람 스스로 가슴속에 뜻과 꿈이 있어야 한다. 내 가슴속에 사랑이 없다면 연애소설을 읽는다 하더라도 사랑이든 연애이든 알아채지 못한다. 내 가슴속에 꿈이 없으면 어떤 수필책이나 자기계발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루고픈 꿈이 무엇인가를 헤아리지 못한다. 박경리 님이 쓴 《토지》이든 펄벅 님이 쓴 《대지》이든 톨스토이 님이 쓴 《죄와 벌》이든, 아무나 이 작품을 ‘읽지’ 못한다. 종이꾸러미를 장만해서 줄거리를 살피거나 꿰뚫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나 책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책읽기란 ‘줄거리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읽기란, 책을 쓴 사람들이 살아온 나날마다 스스로 빚은 꿈과 사랑을 읽는 즐거움이다. 《토지》에 담긴 꿈은 못 읽고 줄거리만 욀 수 있대서 ‘《토지》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대지》에 서린 사랑은 못 읽고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꿰찰 수 있대서 ‘《대지》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죄와 벌》이라는 작품을 읽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쉽다. 우리 스스로 ‘《죄와 벌》을 읽을 만한 눈높이와 눈썰미와 눈길과 눈빛과 눈결을 갈고닦으면서 알차게 기르면’ 된다. 삶을 즐겨야지.


  성경책은 아무나 읽어내지 못한다. 불경책은 아무나 곰삭히지 못한다. 종이꾸러미에 찍힌 글자를 소리내어 말하는 일이야 누구나 하리라. ‘글자읽기’는 일곱 살 어린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곱 살 어린이가 글자를 또박또박 읽는대서 ‘너 참 책을 잘 읽는구나’ 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글자를 잘 읽을’ 뿐이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한다는 ‘책읽기’는 책읽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아직 너무 많은 사람들은 ‘글자읽기’에 머문다. ‘줄거리읽기’에서 맴돈다. 책을 읽으면서 삶을 읽어야 즐겁고,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읽어야 즐거우며, 책을 읽으면서 꿈을 읽어야 즐겁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을 하나 읽으며 내가 가꾸고픈 삶을 읽을 때에 즐겁다. 여러 사람이 온삶을 들여 쓴 책을 하나 읽으며 내가 아끼고픈 사랑을 읽을 때에 즐겁다. 숱한 사람이 기나긴 해를 바쳐 쓴 책을 하나 읽으며 내가 이루고픈 꿈을 읽을 때에 즐겁다.

 

 

  책을 짓는 삶


  양철북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하나씩 헤아려 본다. 2002년 7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하이타니 겐지로), 《아이들》(야누스 코르착), 《로빙화》(중자오정), 《부모와 아이 사이》(하임 기너트), 《권력과 테러》(노암 촘스키), 《자라지 않는 아이》(펄벅), 《소녀의 마음》(하이타니 겐지로), 《꼬마 모모》(마쓰타니 미요코), 《사랑의 매는 없다》(앨리스 밀러), 《두 친구 이야기》(안케 드브리스), 《나무소녀》(벤 마이켈슨), 《산다는 것의 의미》(고사명), 《분홍바늘꽃》(질 페이턴 월시), 《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눈물나무》(카롤린 필립스), 《별을 헤아리며》(로이스 로리), 《지로 이야기》(시모무라 고진), 《안 뜨려는 배》(팔리 모왓), 《시타델의 소년》(제임스 램지 울만), 《반칙 선생님》(우다가와 유코), 《여우와 토종 씨의 행방불명》(박경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최종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이상석), 《청소년 인권 수첩》(크리스티네 슐츠 라이스), 《인간의 벽》(이시카와 다쓰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요시노 겐자부로),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진 리들로프),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편지》(파울루 프레이리), 《덴코짱》(노다 미치코), 《원예반 소년들》(우오즈미 나오코), 《태평육아의 탄생》(김연희), 《첫사랑》(구드룬 파우제방), 《가르친다는 것》(윌리엄 에어스) 같은 책을 내놓았는데, 어느덧 150가지 남짓 된다. 이 가운데에는 무척 널리 사랑받는 책이 있고, 좀처럼 사랑받지 못하는 책이 있다. 사람들이 조금 더 눈여겨보는 책과 제대로 눈여겨보지 못하는 책이 있달 수 있는데, 어느 책이든 ‘한 사람으로서 사랑을 꽃피우는 삶에서 스스로 찾는 아름다운 길’을 들려준다고 느낀다.


  철수와영희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2006년 8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우리는 말썽꾼이야》(양승완), 《철들지 않는다는 것》(하종강),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이득재),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박노자·전쟁없는세상·한홍구),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서경식),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안미선), 《길은 복잡하지 않다》(이갑용), 《10대와 통하는 불교》(강호진), 《정당한 위반》(박용현) 《동네 숲은 깊다》(강우근), 《일하는 우리 엄마 아빠 이야기》(백남호), 《덤벼라 인생》(고성국·남경태),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김삼웅),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우리 학교 텃밭》(노정임·안경자), 《사자성어 한국말로 번역하기》(최종규), 《적을 삐라로 묻어라》(이임하) 같은 책을 내놓았는데, 이제 40가지 남짓 된다. 이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여러모로 아끼는 책이 있고, 아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책이 있달 수 있는데, 어느 책이든 ‘한 사람으로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삶을 누리며 꿈을 즐기는 예쁜 길’을 들려주는구나 싶다.


  책을 짓는 삶이란 무엇인가? 한 권이라도 더 많이 펴내는 삶인가,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히는 삶인가. 책을 즐기는 삶이란 무엇인가? 한 권이라도 더 읽으려는 삶인가,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으려는 삶인가. 책을 사랑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책을 많이 읽거나 건사하는 삶인가, 책을 읽으며 삶을 톺아보고 사랑을 나누는 삶인가.

 

 

  책으로 여는 꿈


  책에는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책에서 길을 찾을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는다. 스스로 삶을 짓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은 책을 수없이 읽어도 ‘줄거리 지식’과 ‘등장인물 정보’만 머리에 담을 뿐, 삶을 짓는 길을 느끼지 못한다.


  길을 찾고 싶으면 길을 찾으면서 책을 읽으면 된다.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할 만한 삶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길을 걷다가 책 하나 길동무로 삼으면 된다.


  책으로 꿈길을 열 수 있다. 내 하루를 가장 아름다운 무늬와 빛깔과 결로 보듬으면서 곱게 꿈을 꾸면 된다. 하루아침에 이루는 꿈이 아니다. 한결같이 누리면서 이루는 꿈이다. 오늘 하루 이루면 끝나는 꿈이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꾸준하게 누리면서 이루는 꿈이다. 이를테면, 밥을 한 끼니만 잘 먹으면 되지 않는다. 밥은 날마다 잘 먹어야 한다. 끼니마다 잘 먹을 밥이요, 끼니마다 스스로 가장 맛나게 차리면서 한솥밥을 나눌 때에 즐거운 삶이다.


  삶은 하루만 잘 누리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잘 누릴 삶이다. 어린이와 푸름이하고 즐거이 나눌 책을 짓는 책마을 일꾼은 ‘책 하나만 잘 지으’면 되지 않는다. 새롭게 내놓는 책마다 잘 지어서 내놓을 책삶이요, 차근차근 한 권씩 책살림 늘리면서 이 땅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언제나 살가우며 반가운 마음밥이 될 책밥을 지을 노릇이다.


  책으로 꿈길을 연다면 바로 이 대목에 있지 않을까. 한 번 읽고 나서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고는 오래도록 가슴이 촉촉히 젖도록 이끄는 책이 있으리라. 여러 차례 되풀이 읽느라 책상맡에 늘 두면서 두고두고 가슴이 해맑게 부풀도록 이끄는 책이 있으리라. 올해에 읽고 다섯 해 뒤에 읽으며 열 해 뒤에 읽고, 또 열다섯 해나 스무 해 뒤에 새삼스레 읽으면서, 내 발자국을 튼튼하게 어루만지는 길동무처럼 곁에 있는 책이 있으리라.


  책 한 권 웃으면서 빚는다. 어제도 오늘도 활짝 웃으면서 삶을 사랑으로 누린다. 오늘도 모레도 환하게 웃으면서 책을 사랑으로 빚는다. 웃음 가득한 사랑이 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는 사람은 웃음 어린 꿈을 마음밭에 심을 수 있겠지. (4345.10.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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