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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악어가 살지
파비오 제다 지음, 이현경 옮김 / 마시멜로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아이들한테 전쟁 아닌 평화를 가르치는가
 [푸른 책과 함께 살기 97] 파비오 제다,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마시멜로,2012)

 


- 책이름 :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
- 글 : 파비오 제다
- 옮긴이 : 이현경
- 펴낸곳 : 마시멜로 (2012.4.1.)
- 책값 : 12000원

 


  무척 어린 어느 날 일을 떠올립니다. 얼추 서른 해쯤 앞서, 장마비가 장대처럼 푹푹 꽂히듯 쏟아지는 날, 사람들은 집에서 부침개도 부쳐서 먹고, 밥도 해서 먹으며, 수제비도 끊어 먹는다 하지만, 다른 짐승들은 먹이를 어떻게 찾을까 궁금했습니다. 자그마한 참새와 도시에 많은 비둘기를 비롯해, 까치나 까마귀나 제비나 박쥐나 노루나 사슴이나 멧토끼는 어떻게 먹이를 찾을까 궁금했습니다. 풀을 먹는 짐승은 빗물에 젖은 잎사귀를 뜯어먹지 않는다 했는데, 그러면 풀짐승은 장마철에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나 궁금했습니다.


  어린 나는 또 다른 대목이 궁금합니다. 이제 꽁꽁 얼어붙는 겨울입니다. 영 도 밑으로 십오 도나 이십 도 떨어지는 오들오들 떨리는 이 겨울에, 참새부터 멧토끼까지, 모두들 어떻게 추위를 견디거나 겨우살이 먹이를 찾을 만한지 궁금했습니다. 시골마을 어른들은 멧짐승을 걱정해서 멧짐승 먹이를 어느 한켠에 마련해 둘는지 궁금했어요. 예부터 몹시 춥고 시린 겨울에는 멧짐승이 먹이를 찾아 사람들 살림집까지 찾아온다 했는데, 먼먼 옛날 먹이를 찾아 여느 살림집에 찾아온 범이나 여우나 사슴이나 멧토끼를 바라보았을 옛사람은 이들 멧짐승이나 들짐승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궁금했어요.


  궁금한 마음은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장마철이나 겨울철에 으레 ‘내가 토끼라면 어떻게 지낼까?’ 하고 생각하며 토끼 몸이 되어 들판이나 멧자락을 누빕니다. ‘내가제비라면 어떻게 지낼까?’ 하고 생각하며 제비 몸뚱이로 들판이나 멧자락을 누비며 어디에서 먹이를 찾을 만한가 하고 알아봅니다.


..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돼. 누군가 신과 땅, 인간을 모욕하며 네 기억, 네 추억, 네 감정에 상처를 낸다 해도, 권총이나 칼, 돌을 손에 쥐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 … “아프가니스탄인들과 탈레반은 다르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선생님을 죽인 그 사람들의 국적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아요? … 자신들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일들이, 사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예요.” ..  (14, 42∼43쪽)


  개미는 시골에서 살지만 도시에서도 삽니다. 개미는 처음부터 도시에서 살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시골을 밀어 도시로 만드는 바람에 개미는 도시에서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개미한테 ‘자, 이곳을 밀어 없앨 테니 너희 스스로 알아서 떠나.’ 하고 알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개미한테뿐 아니라, 쥐한테도 ‘너희는 새 보금자리로 떠나렴.’ 하고 알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개미나 쥐한테뿐 아니라, 풀이나 꽃이나 나무한테도 ‘이제 너희는 얼른 너희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날려 새로운 터에서 자라 보거라.’ 하고 알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삽차로 밉니다. 사람들은 그냥 땅을 깊이 파고는 시멘트와 쇳덩이를 단단히 박습니다. 이 다음에 사람들은 흙땅에 시멘트를 가득 붓습니다. 개미도 쥐도 풀도 꽃도 나무도, 한꺼번에 떼죽음입니다. 죽는 줄조차 못 느끼며 그냥 죽습니다. 두더쥐도 지렁이도 죽습니다. 참새도 까치도 죽습니다. 아직 깨지 않은 알인 채 죽는 멧새와 들새가 있습니다. 거미도 죽고 메뚜기도 죽습니다. 개구리도 죽으며 뱀도 죽어요. 모두 죽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모든 도시는 숱한 목숨들을 한꺼번에 마구 죽인 뒤에 세운 무덤누리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얼거리를 헤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아니,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이 얼거리까지 헤아릴 겨를이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모두들 너무 바쁩니다. 도시에서는 모두들 밥벌이로 몹시 지칩니다. 도시에서는 내 식구들 작은 보금자리 얻느라 매우 고단합니다. 개미를 생각하거나 쥐를 헤아리거나 풀·꽃·나무를 살필 만한 틈이 없다 할 만해요.


  새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이 아파트를 짓느라 어떤 논밭이나 시골을 망가뜨렸을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오래된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에도 ‘이 아파트가 서기까지 얼마나 예쁜 논밭이나 시골이 무너졌을까’ 하고 돌이키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새 고속도로가 날 적에도, 새 고속철도가 뚫릴 적에도, 새 공항이 생길 적에도, 새 놀이공원이 들어설 적에도, 새 공장이나 발전소가 설 적에도, 사람들은 이런저런 문화와 문명과 시설과 설비 때문에 소리와 이름과 주검 없이 사라지는 목숨들을 헤아리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해요.


.. 내 고향은 아주 좋았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곳도 아니고 전기도 없는 곳이었다. 불빛이 필요하면 석유램프를 사용하곤 했다. 그렇지만 사과가 있었다. 난 사과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내 눈앞에서 사과 꽃봉오리가 터지고 그것이 사과로 변해 갔다 … 사실 우린 더 이상 돈이 없었고 그 브로커는 우리를 국경 너머로 데려다줄 발루치족과 이란인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그 비용은 아주 컸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잘못은 아니었다. 우린 그 사람 자식이 아니니까. 우리를 데려다주기 위해 돈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  (35, 87∼88쪽)


  저녁부터 빗소리를 듣습니다. 장마비는 거센 바람하고 찾아옵니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잦아드는 새벽나절, 멧새 몇 마리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와 후박나무 가지에 앉아 열매를 따먹습니다. 비가 살짝 그은 틈을 타서 고픈 배를 채우고 싶겠지요. 나랑 옆지기는 이 시골집에 후박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집에 들어오기 앞서 이 땅에 집을 짓고 아이들 낳아 살아가던 예전 어른들이 후박나무를 심었어요. 후박나무는 우람하게 자라 가지를 죽죽 뻗으며, 사람한테는 예쁜 그늘과 시원한 바람노래를 들려줘요. 후박나무는 새들한테 좋은 쉼터가 되면서 좋은 잔치밥상이 되어 줘요.


  뒤꼍 뽕나무도 멧새와 들새한테는 좋은 쉼터이자 잔치밥상입니다. 매화나무도 감나무도 멧새와 들새한테는 좋은 쉼터이면서 잔치밥상입니다. 사람도 매화열매를 먹고 새도 매화열매를 먹습니다. 사람도 감알을 먹고 개미도 감알을 먹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골마을 논밭은 시골마을 사람들을 먹일 뿐 아니라 도시마을 사람들을 먹여요. 도시마을에는 논도 밭도 없으니 도시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시골마을 사람들을 먹이지 못해요. 도시마을에서는 시골마을 사람들 먹여살릴 길이 없지만, 이에 앞서 도시마을 스스로 먹여살릴 길이 없어요. 돈을 낳고 돈을 키우지만, 돈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돈은 먹을거리하고 바꿀 수 있는 이음고리이지만, 누군가 먹을거리를 흙에서 거두지 않는다면 아무도 밥을 먹을 수 없어요.


..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들 앞으로 가서 ‘하나만 사 주세요. 제발 하나만 사 주세요.’라고 말하며 파리처럼 귀찮게 달라붙어야 했다. 사람들은 짜증을 냈고 나를 함부로 대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게 싫었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산다는 건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또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일들도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난 학대받는 데애 지쳐 버렸다. 근본주의자들과 경찰이 지긋지긋했다 … 나는 사람들이 신분증이나 종교적 신념에 신경을 쓰지 않고 모두에게 친절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  (74, 81, 82쪽)


  총이나 칼은 평화를 이루지 못해요. 돈이 밥을 만들지 못하듯, 사람이 돈을 먹지 못하듯, 총이나 칼은 평화를 이루거나 부르지 못해요. 총이나 칼은 오직 전쟁을 이루거나 부를 뿐이에요. 총이나 칼은 전쟁을 비롯해 미움과 눈물과 슬픔과 아픔을 이루거나 부릅니다. 총이나 칼을 손에 쥔 사람은 고운 사랑을 꿈꾸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한테 총이나 칼을 손에 쥐도록 이끄는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는 착한 사랑을 꿈꾸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평화를 지킬 뜻’으로 구축함도 만들고 전투기도 만들며 잠수함도 만든다 외치지만, 정작 구축함이나 전투기나 잠수함을 만든 다음에는 전쟁을 꾀합니다.


  한국이랑 이웃한 일본이 ‘자위대’라 하는 군대를 만든 일은 평화를 지킬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하고 싶은 뜻이기 때문에 자위대라는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군대나, 아니 남녘땅에 있는 군대나 북녘땅에 있는 군대도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남녘이나 북녘 모두 전쟁을 꾀하려고 군대를 둡니다.


  전쟁은 옆나라를 치는 전쟁이 있고, 제 나라 여느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전쟁이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는 군대로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는 군대(또는 경찰 또는 전투경찰)를 앞장세워 독재에 맞서려는 사람들을 총과 칼로 찍어 누르곤 합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경찰이 하는 일 또한 군대와 똑같이 ‘여느 마을 여느 사람’을 지키는 일이 아니에요. 여느 마을 여느 사람을 ‘뒤에서 지켜보는’ 일이 경찰들 몫입니다. 정치 지도자와 사회 지도자가 경찰들 힘을 빌어 여느 마을 여느 사람을 억누릅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시골마을에서 경찰이 할 일은 없습니다. 참말 평화롭다 하는 시골마을에서 경찰은 제구실을 못합니다. 도둑이 많은 도시에서 경찰이 바쁘다 하는데, 도시에는 도둑이 많을밖에 없습니다. 도시라는 삶터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웃과 동무가 되어 밥을 나누는 얼거리가 아니거든요.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더 가진 이가 옆사람을 밟고 올라서면서 등치도록 하는 얼거리예요. 1등을 하든 2등을 하든 아무튼 성공을 해야 살아남는 도시예요. 경쟁을 붙이고 싸움을 붙이는 도시예요. 착하거나 여린 사람은 뒤로 밀리다가 굶습니다. 밥을 먹는 일이 전쟁이나 싸움처럼 되고 말아, 도시에서는 도둑이 끊어질 수 없어요. 돈이 더 있으면 떵떵거리며 놀음놀이를 누릴 수 있다는 바보스러운 꿈이 연속극으로든 영화로든 책으로든 자꾸 쏟아지니까, 스스로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만 도둑이 되고 말아요. 밥도 사랑도 삶도 나누지 못하는 얼거리인 도시에서 마음이 다친 이들이 도둑이 되고 말아요.


.. “지금 하자라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저 말 한 마디 때문에, 혹은 의미 없는 어떤 규정 때문에 거리에서 개처럼 죽을 수 있어. 아프가니스탄에서 벗어나게 해 준 네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한다.” …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 보지 못한 것,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곳 쿰에서, 공장 밖으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너무 위험하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난 완벽하게 (떠날) 준비가 됐어.” ..   (141, 151쪽)


  파비오 제다 님이 쓴 푸른책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마시멜로,2012)를 읽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고향마을을 떠나야 살아남을 수 있는 아프며 슬픈 삶자국을 찬찬히 돌아보는 이야기책입니다. 어린 사내아이를 낳아 사랑스레 돌보던 어머니는 이 아이 목숨이 개죽음으로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아, 이 아이를 이웃나라로 데리고 가서는 ‘그곳에 가만히 놓’고 고향마을로 돌아갑니다. 이 아이는 제 목숨이 개죽음으로 사라질는지 안 사라질는지 모릅니다. 아직 온누리를 스스로 널리 겪지 못했거든요. 그렇지만 마음으로는 조금씩 느낍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버리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했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억눌리며 괴로운 여느 사람들이 삶을 붙잡으며 사랑할 수 있는 길이 너무 가늘고 작은 탓에, 이 아이는 이 가늘고 작은 삶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려고 온힘을 쏟아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위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이에서 느껴질 때에도, 우리는 항상 그것이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분명히 말하지만 50유로였다. 할머니는 내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는 아주 이상하고도 친절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  (191, 217쪽)


  푸른책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를 읽는 사람 가운데 이 아이가 겪어야 한 일을 ‘눈앞에서 그리듯 떠올리’거나 ‘코앞에서 지켜보듯 믿을’ 만한 이가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먹는 오늘날 푸름이들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돈 몇 푼 치르면 어디에서든 맛난 밥을 사다 먹을 수 있는 오늘날 공무원들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낱낱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내 이웃은 누구일까요. 나는 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나요. 내 동무는 누구일까요. 나는 내 동무를 얼마나 아끼며 살아가나요.


  내가 입으로 전쟁 아닌 평화를 바란다고 말한다면, 나는 몸으로 전쟁 아닌 평화를 이루려고 어떤 일을 하는가요. 전쟁 아닌 평화가 지구별에 깃들 수 있도록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한국땅에서 전쟁 아닌 평화가 싹터 자랄 수 있도록 내가 품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왜 스무 살 푸르며 빛나는 젊은 사내는 군대에 들어가야 할까 궁금합니다. 푸르며 빛나는 젊은 사내가 군대에서 총칼을 손에 쥐며 배우는 ‘사람 죽이는 솜씨’는 이웃과 동무를 얼마나 아끼거나 사랑하는 길이 될까 궁금합니다.


.. “이탈리아 학원을 6개월 다닌 뒤에 사설학원 학생 자격으로 중학교 3학년 시험을 봤어요.” “그럼 그 전에는?” “아무것도요. 아프가니스탄 고향마을에서 잠깐 학교를 다녔지만 그 이외는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았어요.” 나는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탈레반에 끌려가 아이들 보는 앞에서 총에 맞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그 이전에도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지만 체류허가증을 받고 나서야, 생존에 필요한 안정을 찾고 나서야, 나는 다시 어머니와 남동생과 누나를 떠올린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들을 지워 버렸었다. 내가 사악하거나 몰인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신경을 쓰기 전에 우선 내 자신이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 삶을 사랑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어떤 사랑을 줄 수 있겠는가 ..  (264, 271쪽)


  한국땅 초·중·고등학교는 아직 아이들한테 전쟁 아닌 평화를 가르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한국땅 초·중·고등학교는 이제껏 아이들한테 평화 아닌 전쟁을 가르친다고 느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입시전쟁’과 ‘입시지옥’을 말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입시전쟁을 치르는 병사’와 ‘입시지옥을 가로지르는 전사’를 말합니다. 아이들은 그저 책상 앞에 달라붙어 문제집과 시험지를 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책상 앞에서 군인이 됩니다. 아이들이 손에 쥔 연필은 총이나 칼입니다. 아이들은 동무나 이웃이 아닌 적군을 마주하며 교실에서 부대낍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동무나 이웃을 사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적군을 쓰러뜨리거나 짓밟는 솜씨를 익힙니다.


  고등학교까지 마친 아이들은 대학교에서 새삼스레 적군을 쓰러뜨리거나 짓밟습니다. 대학교까지 마친 아이들은 회사에서 다시금 적군을 쓰러뜨리거나 짓밟습니다.


  서로를 살리거나 사랑하는 길을 익히지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서로를 살리거나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지 않는 어른들입니다. 그래도,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에 나오는 씩씩한 아이는 스스로 죽음길을 가로질러 삶길로 나아갔어요. 미움과 시샘과 따돌림과 우쭐거림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꿈과 빛을 찾아 먼길을 나섰어요.


  슬픈 한국땅에도 미움 아닌 사랑 찾는 아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고단한 한국땅에도 시샘 아닌 믿음 찾는 아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온통 전쟁투성이 한국땅에도 따돌림 아닌 꿈 찾는 아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디를 가나 도시로 바뀐 한국땅에도 우쭐거림 아닌 빛 찾는 아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4345.7.1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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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미디어 - 손석춘 선생님이 들려주는 나를 찾는 미디어 여행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7
손석춘 지음, 김용민 그림 / 철수와영희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신문·방송·책은 왜 있어야 하나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0] 손석춘, 《10대와 통하는 미디어》

 


- 책이름 : 10대와 통하는 미디어
- 글 : 손석춘
- 그림 : 김용민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7.12.)
- 책값 : 12000원

 


  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가면서도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습니다. 굳이 텔레비전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라디오도 딱히 모시지 않습니다.


  더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면, 인터넷도 그리 모실 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쓰는 글을 올리는 인터넷방이 있기는 하지만, 꼭 내 글을 인터넷방에 올려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남한테 읽히려고 쓰는 글이라고도 하나, 내가 쓰는 모든 내 글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 되읽는 글이요, 내가 살아온 나날을 돌이키면서 내 넋을 북돋우는 글입니다. 남이 읽어 남이 새 넋을 일구거나 새 꿈을 키울 수 있겠으나, 남에 앞서 내 넋을 스스로 새롭게 일구고 내 꿈을 어여쁘며 맑게 북돋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글을 쓰는 뜻이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을 가다듬고, 내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내 삶을 가다듬습니다. 내 삶을 가다듬으면서 내 사랑을 가다듬고, 내 사랑을 가다듬으면서 내 손길과 눈길을 나란히 가다듬어요.


  텔레비전이 있는 곳에서 때때로 함께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텔레비전을 볼 때면, 이런 텔레비전이 왜 있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이 있는 곳에서 때때로 신문을 죽죽 들추곤 하는데, 신문을 들출 때면, 이런 신문이 왜 있어야 하는지 영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마을 이야기가 방송이나 신문에 실리는 일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내 마을 이야기가 방송이나 신문에 실리더라도 겉훑기조차 못합니다. 찬찬히 다가와서 사랑스레 보듬는 이야기를 다루지 못해요. 살가이 어깨동무하면서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요.


.. 인터넷 게임에 몰입하는 10대들을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나무라기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중독 현상이 크게 늘어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전문가들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반복된 생활, 게다가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고 분석합니다 … 자, 그렇다면 사회적 조건이 그러하니 이제 게임에 중독되어도 좋은 걸까요? 내 탓이 아니라 사회 탓이라고 주장하며 즐기기만 해도 될까요 ..  (13, 14쪽)


  교과서가 아이들이 배울 만한 책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합니다. 아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떤 교과서를 손에 쥐어 어떤 이야기를 배우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 교과서는 어떤 구실을 할까요. 오늘날 한국땅 아이들은 교과서만 죽 읽으면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서 씩씩하고 튼튼하며 해맑게 살림을 일구어 살아가는 길’을 익힐 수 있습니까. 갖추어야 할 지식이 아닌 나누어야 할 사랑을 교과서로 익힐 수 있습니까. 그런데, 갖추어야 한다는 지식조차 한쪽으로 쏠린 지식이기 일쑤요, 대학입학 시험공부에 얽매인 지식조각일 뿐 아닙니까.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배운다는 국어 교과서가 참으로 한국말을 한국사람이 알맞거나 사랑스럽거나 즐겁게 쓰도록 이끄는지 알 길이 없어요. 역사 교과서가, 수학 교과서가, 과학 교과서가, 사회 교과서가, 얼마나 아이들 삶길과 눈길과 넋길을 헤아리거나 살피는가 모르겠어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교과서로 배우면 배울수록 더 바보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초등학생을 지나 중학생이 될수록,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생이 될수록, 고등학생을 지나 대학생이 될수록, 대학생을 지나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될수록, 이 나라 사람들은 더더욱 바보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삶도 사랑도 사람도 배우지 않는 학교인데다가, 삶도 사랑도 사람도 아끼도록 이끌지 않는 일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돈을 더 잘 벌 만한 직업(장래희망)만 붙잡도록 하는 학교요, 돈을 더 잘 벌 만한 일만 하도록 이끄는 일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 잘 알겠지만 인터넷 게임에는 칼이나, 총, 흉기로 게임 속 다른 캐릭터를 때리고 찌르거나 죽이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많이 죽일수록 좋지요.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를 … 잘 생각해 보세요. 아빠와 엄마가 직장에 나가며 일하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빠와 엄마가 해고된다면 어떻겠어요? 그뿐이 아니지요. 한국 사회에서 커 가는 10대 청소년들 또한 20대에 들어선 어느 순간에는 취업을 해야지요. 취업을 해서 일터로 나가는데 그곳에서 사장이 마음대로 해고하거나 직원인 노동자를 멋대로 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24∼25, 72쪽)


  인천에서 살며, 충북 음성에서 살며, 이제 전남 고흥에서 살며, 때때로 마을신문을 읽습니다. 인천에서는 인천 신문을, 음성에서는 음성 신문을, 고흥에서는 고흥 신문을 때때로 읽는데요, 인천에서 나오는 인천 신문에는 가끔 ‘운동 기사’가 실리기는 하지만, 음성이나 고흥에서 나오는 마을신문에는 운동 기사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축구이니 야구이니 골프이니 하는 운동 기사가 없어요. 그런데, 세 곳에서 나오는 신문에는 주식시세표가 안 실려요. 음성과 고흥에서 나오는 자그마한 신문에는 방송편성표가 안 실려요. 음성과 고흥에서는 날마다 나오는 신문이 없는 만큼 날씨 소식도 안 실려요.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은 날마다 나옵니다. 날마다 나오는 신문에는 온갖 운동 기사가 실리고, 주식시세표가 큼지막하게 실리며, 부동산 정보가 실리는 한편, 방송편성표나 날씨 소식이 실립니다. 이밖에 날마다 다루는 온갖 지식과 정보가 있어요. 아마 이런저런 것들을 날마다 들여다보라는 뜻일 수 있을 텐데, 서울에서 살아가며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지 않고서야, 굳이 이런저런 대목에 눈길을 두거나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니,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집에 텔레비전을 모신다 하더라도 신문 방송편성표까지 뒤적이며 챙겨서 볼 겨를이 없어요. 아니, 굳이 이렇게 저렇게 챙겨서 볼 만한 방송을 찾기는 어려워요. 아니, 애써 텔레비전을 켜서 이것저것 하염없이 볼 만하지 않아요.


  커다란 도시에서 살아가니까 텔레비전을 보고야 맙니다. 커다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으려 하니까 신문을 읽고야 맙니다.


  누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 한들 대수롭지 않습니다. 정치 이야기, 외교 이야기, 경제 이야기, 문화 이야기, 교육 이야기, 사회 이야기, 운동 이야기, …… 어느 하나 서울이나 커다란 도시에서만 대수롭습니다. 작은 마을이나 시골에서는 삶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일구며 스스로 누립니다. 작은 마을이나 시골에서는 신문이나 방송에 기대어 삶을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짓는 삶은 스스로 읽습니다. 스스로 일구는 사람은 스스로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노래로 부릅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은 스스로 이야기하고 스스로 즐깁니다.


.. 신문이 처음 태어날 때 왕과 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탄생을 축하해 주지 않았지요. 그들 쪽에 서서 잠시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닙니다. 중세 시대 내내 누구의 감시도 없이 정치를 해 왔는데 신문이 자신들의 언행을 일일이 보도하기 시작하니까 불편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신문 발행을 허가하거나 불허하는 권한을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선언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신문에 실리는 내용까지 엄격하게 검열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언론통제를 모든 사람이 고분고분 받아들이리라고 판단했다면 착각이었지요 … 관훈클럽의 진단에 따르면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중산층에 속하기 때문에 중산층을 자연스럽게 대변함으로써 빈곤층이나 소수 계층의 의견과 이익은 배제됩니다. 사실 지상파 방송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소득은 단순히 중산층 수준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미 고소득층이거나 그에 가깝습니다. 빈곤층의 이야기를 담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지요 ..  (50∼51, 112쪽)


  시골마을 아이라 하더라도 도시에 있는 더 큰 학교로 가자면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보아야 합니다. 시골사람 넋으로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요. 도시에서 배우자면 도시사람 넋하고 어깨동무해야 할 테니까요. 대통령이나 시장 이름을 모른다 하더라도 흙을 알고 나무를 알면 넉넉해요. 정치를 모르고 경제를 모르더라도 바람을 알고 구름을 알면 넉넉해요. 인터넷을 모르고 새책 소식을 모르더라도 멧새를 알고 들풀을 알면 넉넉해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무엇을 아는 사람일까요. 오늘날 한겨레는 스스로 무엇을 알려고 애쓸까요.
  신문·방송·책은 왜 있어야 하나 궁금합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사랑이나 삶이나 사람(이웃과 동무와 살붙이)을 읽을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방송을 보는 사람은, 또 책을 읽는 사람은 사랑이나 삶이나 사람을 느끼거나 헤아릴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내 곁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내가 숨을 거두어 내 몸뚱이가 흙으로 돌아갈 때에 내가 들고 갈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어린이로 살거나 푸름이로 살거나 젊은이로 살거나 늙은이로 살 때에 무엇을 손에 쥐면서 누려야 즐겁거나 기쁘거나 아름답거나 신날까요.


  내가 바라볼 것은 무엇인가요. 나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즐거운 삶을 누릴까요.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고, 내 마음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찾아들어야 기쁠까요. 내 생각은 어떤 이야기로 가꾸면서 어떤 꿈을 꾸어야 곱게 빛날까요. 지구별 푸름이들은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한국땅 푸름이들은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알아야 하며 무엇을 느껴야 서로서로 좋을까요.


..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연예인 숭배나 외모 지상주의 세태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왜 방송사들은 문제가 많은 성적 장면들을 무분별하게 내보낼까? 그것이 시청률 경쟁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시청률을 그렇게 중시할까 … 광고를 내려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청자들이 많은 프로그램에 광고하고 싶겠지요. 바로 그렇기에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자극적으로 성적 노출 장면을 내보내거나 폭력 장면들을 방송합니다 …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아름다움을 외적인 것으로만 판단하는 외모 지상주의가 곳곳의 광고들을 통해 한층 강화됩니다. 내적은 아름다움은 가치 없는 것으로 넘깁니다 ..  (95, 98, 99, 141쪽)


  손석춘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미디어》(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오늘날처럼 신문이고 방송이고 인터넷이고 눈부시게 펼쳐진 적이 없는데, 막상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이 어떠한 매체인가 하고 들려주는 책이 참 없구나 싶습니다. 중앙일간지나 지역일간지가 참 많은데, 신문뿐 아니라 잡지도 많고, 방송사도 많은데, 이 많은 매체 일꾼들 스스로 ‘내 이웃과 나눌 매체 이야기’를 차근차근 써서 차근차근 나누려 하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신문사 일꾼은 왜 신문 이야기를 속속들이 밝히면서 나누려 하지 않을까요. 방송사 일꾼은 왜 방송 이야기를 낱낱히 파헤치면서 나누려 하지 않을까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나 인터넷으로 ‘초·중·고등학교 학습’을 시키자고는 하면서, 정작 신문 속내와 방송 속살과 책 알맹이와 인터넷 속셈을 깊이 살피거나 두루 돌아보는 이야기는 왜 밝히지 않을까요.


  지구별 푸름이들이 아무쪼록 ‘삶을 밝히는 글’을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한국땅 푸름이들이 부디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살필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이들 낳아 살아가는 어른들부터 ‘삶을 꽃피우는 꿈’을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5.7.9.달.ㅎㄲㅅㄱ)

 


95쪽 아래1 : 확인할 수 있은 것은 => 확인할 수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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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 - 조경선 교육산문집 살림터 참교육문예 4
조경선 지음 / 살림터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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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사나요
 [사랑하는 배움책 5] 조경선,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

 


- 책이름 :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
- 글 : 조경선
- 펴낸곳 : 살림터 (2012.6.10.)
- 책값 : 12000원

 


  학교에서는 ‘내가 어른이 되어 좋은 짝꿍을 보았’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만난 좋은 짝꿍과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짝꿍하고 아이를 어떻게 낳느냐’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짝꿍하고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길’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 큰딸이어서 더 많이 기대했다는 엄마는 끝까지 눈물을 많이 보이셨고, 고흥이라는 낯설고 먼 곳으로 가서 산다는 일방적인 결정에 섭섭함을 감추지 않으셨다. 부지런하고 깔끔한 엄마의 살림솜씨와 지원 덕분에 고생 한 번 없이 공부만 했었던 큰딸이었는데 농촌으로 시집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한 것이 큰 상실감을 주었다고 한다 … 우리 지역(전남 고흥)에서는 일 년에 몇 억 원씩 주고, 서울의 한 사교육업체 강사를 주말에 초빙해 성적이 우수한 200여 명의 중·고생을 대상으로 국·영·수 논술강의를 해 주고 있다 … 대학 진학을 위해 성적이 우수한 소수의 학생들에게는 막대한 예산을 붓고 있지만, 현재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배려는 왜 없는지 몹시 안타깝다 ..  (19, 64쪽)


  학교에서 푸름이한테 ‘성교육’을 시키곤 합니다. 학교 성교육 수업에서는 아이들한테 콘돔을 보여주거나 아예 주기도 한다지만, 막상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이를 낳기 앞서 몸속에 열 달 돌보는 동안 아이 어머니와 아이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아이를 빚기 앞서 아이 어머니와 아이 아버지가 될 사람이 어떤 삶을 일구며 몸과 마음을 건사해야 좋은가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렇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 두 어버이가 아이를 낳고서 이 아이를 알뜰히 아끼고 따스히 사랑하며 예쁘게 보살피는 길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고작 한다는 이야기라면 ‘육아휴직’쯤 될까요. 그런데, 육아휴직은 며칠쯤 얻어야 할까요. 육아휴직은 누가 받아야 할까요. 육아휴직이란 무엇이고, 보육시설은 무엇일까요. 아이를 튼튼하고 씩씩하며 아름답게 보살피는 몫은 육아휴직과 보육시설로 다 풀거나 맺을 만할까요.


  그렇지만 나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던 때에 이런 대목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무렵에는 나 또한 입시문제와 입시공부에 갇혔습니다. 고단한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슬픈 짐과 무게를 어떻게 건사해야 할까 알지 못했습니다.


  어른들은 그저 똑같이 말할 뿐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내 삶에서 지우라고, 여섯 해를 지우고 나면 앞으로는 ‘밝은 앞날’이 있으리라고. 여섯 해 동안 시키는 대로 하고, 오로지 시험문제만 풀면, 비로소 그 다음부터는 ‘너희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 전문계 학생들은 인문계 고등학생과는 다른 소질과 특징이 있는데,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너무 획일적이고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공부 말고 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 전자과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삼성에 취업하고, 그러면 학교 정문 앞에 현수막을 단다. ‘축 삼성 취업’이라며 학교 홍보에 열을 올린다. 하얀 가운과 마스크 등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담임교사나 학부모라도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했던 그곳에서 아이들은 발암물질에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었다 … 한글날의 위기는 나의 내부로부터 나온다. ‘영어 식민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자녀의 영어교육을 걱정하는 이중적인 대한민국 엄마인 나를 고백하며 반성하고자 한다 ..  (22, 43, 78쪽)


  나는 어른들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른들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내 삶에서 여섯 해를 지울 수 있을까요. 내가 백 살을 살는지 이백 살을 살는지 모르나, 나는 고작 열 해를 살거나 스무 해만 살는지 몰라요. 어쩌면 열여섯이 끝일 수 있어요. 한 해이고 두 해이고 나한테는 더없이 아름다운 날입니다. 하루이고 이틀이고 나한테는 가없이 고마운 날입니다. 한 해는커녕 하루도 지울 수 없는데, 어떻게 여섯 해 내 삶을 지우면서 시험공부만 해야 하나요.


  더구나, 여섯 해를 지우고 살더라도, 나중에 나한테 ‘밝은 앞날’이 반드시 찾아오리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손꼽는 대학교에는 위에서 몇 퍼센트만 들어갈 수 있는데다가, 모든 푸름이가 대학생이 될 수 있지 않아요. 대학생이 될 수 있는 푸름이는 40퍼센트입니다. 요새는 숫자가 늘어 60퍼센트까지 될는지 모르지만, 고등학교를 마친 두 아이 가운데 하나는 곧바로 ‘사회’에 뛰어들어 ‘일자리’를 찾아야 해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지우라니요.


  대학교에 안 들어갈 아이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어떻게 보내라고요. 고등학교만 마치고 살아갈 아이들한테 머나먼 앞날은 어떻게 꿈꾸거나 꾀하라고요. 한 사람으로 우뚝 서서 슬기로우며 사랑스레 살아갈 길은 어떻게 찾거나 일구라고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합니다. 한국땅에서 ‘고등학교 마친 모든 푸름이가 대학교에 갈 수 있다’면 모르되, 하나는 가도 하나는 못 간다 하는데, 서로 피가 튀기도록 시험공부만 시키면서 하나는 대학교에 보내고 하나는 대학교에 안 보낸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대학교에 간 아이들은 어떤 삶을 누리면서 이 나라 이웃과 동무를 생각하고, 대학교에 안 가거나 못 간 아이들은 어떤 삶을 즐기면서 이 나라 이웃과 동무를 헤아려야 할까요.


..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가정방문도 언제나 인상적이다. 잠시나마 학교를 벗어나 수평선 따라 소풍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섬에 학교가 사라지고,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 공사를 한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왜 동생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집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기는지, 어떻게 유치원 교사의 꿈을 꾸었는지 가만히 엿보게 된다. 매화 꽃망울이 터진 등암의 골목길을 지나 들어간 마당 한쪽에 아직도 깨끗한 우물이 있다. 그 물로 손빨래를 하는 집 마루에 앉아 이 두 형제들이 어떻게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을 가진 분들인지 바라보게 한다 … 업무가 산더미 같았다. 그렇게 여유가 없이 아이들을 만나니, 아이들도 내 말에 상처를 받았다 ..  (90, 244쪽)


  예나 이제나 나는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대학입시는 ‘입시학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정규수업만 해야 올바르고, 정규수업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만 마친 아이들이 어디에서라도 스스로 씩씩하고 슬기로우며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쁘고 즐겁게 삶을 일구는 길을 보여주거나 이끌거나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가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를 쓸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와 학생 모두 온몸으로 삶을 배우고 온마음으로 삶을 생각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교사 자리에 선 사람은 아이들에 앞서 사회와 삶을 조금 더 누린 만큼,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겪은 삶을 아이들이 앞으로 맞아들일 때에 어떠한 빛과 눈길과 넋으로 따사로이 껴안도록 하면 좋을까 하고 어깨동무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아이들이 더 높다 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어버이라면, 아이들을 학교에 넣으면 안 된다고 느낍니다. 더 높다 하는 대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싶다면,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입시학원에 넣으면 됩니다. 아이들한테 시험문제만 가르치고 생각하도록 이끌어, 열두어 살부터 대입시험을 치르도록 하면 됩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하면 검정고시를 치르면 되지요. 굳이 여섯 해나 학교에서 아이들 푸른 삶을 썩혀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을 학교에 넣는다 하면, 학교가 어떤 배움터가 되도록 어버이 또한 슬기와 힘을 갈무리해야 좋을까 하고 생각해야지 싶어요. 학교가 학교다울 수 있도록 어버이는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농촌의 아이들은 서울이라는 도시로 가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곳은 오히려 경쟁에서 낙오되면 절망이 가득한 소비적인 곳이다. 다시 고흥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 우리는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도시의 학교로, 학교 기숙사로 멀리 떠나보낸다. 진로와 공부에 대한 요구로 갈등을 일으키고, 노동에 대한 체험과 가족에 대한 이해 없이 점점 멀어져 가게 한다 … 짧은 시간 안에 빨리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정성껏 시를 음미하지 못한 채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작품의 특징을 알려고 한다 ..  (107, 136, 193쪽)


  아이들은 좋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비싼 밥이 아닌 좋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밥을 차려서 내놓는 어버이나 어른’들 따사로운 사랑이 깃든 좋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좋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비싼 옷이 아닌 좋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가게에서 비싼값 치르며 장만한 옷이 아니라, 어버이나 어른이 사랑을 들여 빚은 좋은 옷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서 입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좋은 넋과 얼을 배워야 합니다. 높은 지식이나 빠른 정보가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삶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꿈을 짓도록 돕는 좋은 넋과 얼을 배워야 합니다. 손재주를 가르칠 학교가 아니에요. 자격증을 가르칠 학교 또한 아니에요. 학교는 교사와 학생 모두 사랑을 누리면서 사랑을 빛내는 배움터예요.


.. 그 이후로 백일장의 입상 결과보다는 글을 쓰는 과정이 한 아이에게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우리 아이들에게 저마다의 삶은 모두 문학 재료가 된다 … 교사도 학부모들도 적극적으로 대학 평준화를 위한 활동을 함께 해 나갔으면 좋겠다 … 무한경쟁보다는 함께 배우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학급이 되면 좋겠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무려 9시간을 한 교실에서 보낸다. 그래서, 따뜻하고 즐거운 학급이 되었으면 한다 … 오늘은 전국학력평가를 보는 날이다. 낮은 등급이 나오는 학생들에게는 벌을 줘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의견이 있었다 ..  (23, 36, 83, 101, 125쪽)


  나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대목을 배웠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교 밖에서 내 삶을 이끌 이야기를 배우려고 애쓸 수 있었구나 싶어요. 책을 찾아 읽으며 내가 배우고픈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좋은 이웃과 동무를 사귀며 내가 알고픈 이야기가 무엇이었나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옆지기를 만나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내가 그동안 못 배운 대목이 무엇이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내가 못 배운 만큼 우리 아이들한테 가르치거나 느끼도록 이끌 만한가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삶을 배우자면 어버이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부터 스스로 삶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꿈을 짓자면, 어버이인 나는 하루하루 어떤 넋과 얼로 누려야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피아노학원에 다녀야 피아노를 칠 수 있지 않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사진강좌를 들어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글쓰기학원을 다녀야 글을 쓸 수 있지 않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집일’과 ‘아이키우기’를 학원으로나 학교에서나 따로 배울 수 없습니다.


  오직 삶이 있습니다. 오직 싱그러운 삶이 있어요. 오직 사랑스럽고 싱그러워 빛나는 삶이 있어요.
  삶을 생각합니다. 삶을 사랑할 길을 생각합니다. 삶을 사랑하며 나와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 모두 즐겁게 어깨동무할 길을 생각합니다.


.. 하지만 다른 반 담임선생님들 중에는 독서를 하지 못하게 하고, 영어와 수학 문제 풀이만이 공부라고 말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 객관식 문제 푸는 공부 기계가 되어 1등급이 된다고 한들, 앞으로 이 아이들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 걸까 … 교사와 학생들은 왜 이렇게 뼈빠지게 학교에 남아 서로를 통제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늦게까지 학교에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  (128, 146, 149쪽)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마친 다음, 전라남도 고흥으로 시집을 오며 고흥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지내는 조경선 님이 쓴 교사일기를 그러모은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를 읽습니다. 조경선 님 교사일기에 드러나는 고흥 시골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거의 모두 고향인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간다고 합니다. 대학교에 가든 일자리를 찾아 공장으로 가든, 으레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대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고등학교까지 다닌 시골마을 고흥에는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같은 젊고 푸른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할 테지요. 왜냐하면, 오늘날 고등학교 가운데 시골 아이들한테 농사짓기나 고기잡이를 가르치는 데는 아주 적어요. 논밭과 바다가 있는 시골마을 고흥에서조차 아이들이 ‘슬기로운 흙일꾼’이 되거나 ‘아름다운 고기잡이’가 되는 길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 없이 흙과 사람과 지구별을 골고루 살리는 흙일꾼 참길을 들려주는 학교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어린 새끼는 바다로 돌려보내고,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바다 둘레에 발전소 따위 안 지으며 깨끗하게 건사하는 넋을 북돋우는 고기잡이 사랑길을 보여주는 학교는 어디에서 만나야 할까요.


  조경선 님은 국어교사가 되어 고등학교 아이들이랑 문학을 노래하는 사랑을 아주 조그맣게 나눕니다. 조경선 님 둘레에 있는 다른 분들은 어떤 교사가 되어 고등학교 아이들이랑, 또 중학교 아이들이랑, 또 초등학교 아이들이랑, 어떤 꿈과 사랑을 날마다 어떤 빛깔과 무늬로 예쁘게 지으며 하루를 빛낼까요. 시골마을 시골학교에서 시골아이 사랑하는 시골교사는 어떤 웃음과 어떤 삶으로 어떤 시골얘기를 엮을 수 있을까요. (4345.6.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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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2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6-12 12:17   좋아요 0 | URL
앗, 그렇군요.
헐레벌떡 바로잡았습니다.
고마워요~ ㅠ.ㅜ
 
열네 살의 철학 - 십대를 위한 철학 길라잡이
이케다 아키고 지음, 김경옥 옮김, 현놀 그림 / 민들레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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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으로 살고, 생각으로 사랑하고
 [푸른책과 함께 살기 95] 이케다 아키코,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

 


- 책이름 : 열네 살의 철학
- 글 : 이케다 아키코
- 옮긴이 : 김경옥
- 펴낸곳 : 민들레 (2006.3.15.)
- 책값 : 9000원

 


  나 스스로 느긋하게 가다듬는 마음일 때에는 책을 읽으면서 무척 느긋합니다. 하루하루 온갖 일을 치르며 바쁘다 하더라도 마음이 느긋하기 때문에 스물네 시간 가운데 잠은 서너 시간 쪽잠으로 자고 스무 시간을 일에 매인다 하더라도 십 분이나 이십 분 말미를 내어 책을 읽으며 참으로 느긋하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느긋하게 가다듬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런 일이 없고 하루 스무 시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할 뿐더러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사랑으로 부풀지 못해요. 마음가짐에 따라 책읽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더 배울 때에도 책을 읽는 눈은 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더 겪은 뒤에도 책을 읽는 결은 달라집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배우거나 더 겪는다 할 때에도, 내 마음으로 느끼며 스며드는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어요. 마음으로 느끼며 스며들지 않고서는 배우지 못하고 겪었다고 여기지 않아요. 마음으로 느끼며 비로소 배우는구나 하고 느끼고 겪는구나 하고 여깁니다.


  곧, 마음가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꿈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달라지며, 사랑이 달라집니다.


  마음을 슬기롭게 쓸 때에, 슬기롭게 책을 읽고 슬기롭게 집일을 하며 슬기롭게 이웃을 사귑니다. 마음을 곱게 쓸 때에, 곱게 말을 하고 곱게 웃음을 지으며 곱게 밥을 차립니다. 마음을 정갈히 가눌 때에, 정갈히 편지를 쓰고 정갈히 밭을 일구며 정갈히 걸레질을 합니다.


.. 산다는 게 멋지다거나 시시하다거나 하는 건 스스로 자기 삶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 … 관념이 현실을 만들지, 현실이 관념을 만드는 건 결코 아이야 … 사회도 바꿔야겠지만 우선 내가 먼저 변하는 게 중요해 … 사회란 사람들 저마다의 관념인 까닭에 각자가 좋아지지 않고서 사회를 좋게 만드는 길은 어디에도 없어 …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지도 알 수 없는 법이지 … 과학의 발달을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란 편리해지는 걸 뜻하는 건가? 과연 진보를 ‘편리해지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을까 ..  (10, 92∼93, 113, 163쪽)


  내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 삶은 그저 흔들립니다. 내 마음이 무겁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내 삶은 그예 무겁습니다. 내 마음이 아프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내 삶은 그대로 아파요.


  마음 한켠에 응어리를 숨긴 채 활짝 웃으며 뛰놀 수 있겠지요. 마음 한쪽에 피고름이 흐르더라도 짐짓 모르는 척 지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마음을 숨기지 못해요.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내 얼굴에 낱낱이 드러나요. 내 몸가짐 구석구석에 마음속 이야기와 움직임이 찬찬히 뱁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어떻게 피어날까요. 내 마음에 따라 내 몸이 움직일까요. 내 몸이 움직이는 결에 맞추어 내 마음이 바뀔까요.


  몸을 튼튼하게 돌보며 마음을 튼튼하게 돌볼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몸 또한 단단히 추스를 수 있을까요. 몸과 마음은 따로라거나 어느 쪽이 먼저라 할 수 없이 함께 흐를까요.


.. 자연이 만들었고 그 자체가 자연인 몸은 새까맣게 잊은 채, 겉으로 보이는 몸만을 몸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누가 태어날지 몰랐는데, 바로 너희들이 태어났다는 이 오묘한 만남의 감동을 잊고 있단 말이지. 단지 타인과 타인이 만났을 뿐이라는 사실은 잊은 채 ‘내 아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거지. 그래서 종종 당신들(부모) 생각대로 너희(아이)들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 (내 몸을) 내다 팔 수도 있다면 진짜로 소중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그럴 경우 마음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냐 하면, 몸을 팔 수 있다는 그 생각이 바로 마음을 파는 것이어서 이것 역시 같은 거지 … 뭐 때문에 사는지 사유하지도 않고 어쨌든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수명을 늘이기 위한 생명 기술만 엄청나게 발전시키고 있지 ..  (59, 81, 123, 168쪽)


  언제부터였나, 나는 늘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개구지게 놀며 ‘다른 동무들과 견주어 힘이 모자라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야구 놀이를 할 때에 동무들은 홈런을 뻥뻥 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칠 힘이 없습니다. 방망이를 짧게 잡고 공을 잘 맞추어 수비가 빈틈으로 보내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축구 놀이를 할 적에 동무들은 으레 공이 있는 데로 우르르 몰리는데, 어차피 축구는 골문으로 가기 마련이니까, 나는 사람도 공도 없는 빈 곳에서 어디로 이 공과 사람이 갈까를 미리 헤아려 좋은 자리를 지킵니다.


  중학교로 들어서며 놀이보다는 공부에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중학교부터 저녁 늦게까지 교실에 붙잡아 가두며 입시공부를 시켰어요. 억지로 붙들리며 시험문제만 달달 외워야 하는 시멘트 감옥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지식과 정보가 얼마나 옳으며, 이 지식과 정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갈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대학입시까지 마치면, 이렇게 외우는 지식과 정보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고작 시험 한 차례 치르려고 여러 해 시멘트 감옥에 꽁꽁 묶인 채 바보스레 지내야 하나 싶어 딱했습니다.


  이리하여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책읽기를 생각합니다. 대학입시에서 논술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며 내 생각자리를 넓히려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은 나더러 ‘생각을 하라’ 하고 말했지만, 제도권학교 교사가 말하는 ‘생각’은 내가 품는 ‘생각’과 달라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 생각을 하고 싶지, 시험성적을 잘 낸다거나 바보스레 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 다른 동무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요.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 길이로 바보처럼 되어, 똑같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는 내 꿈과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며 교과서보다 교과서 아닌 책을 가방에 더 많이 챙깁니다.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할 적에도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보다 다른 인문책이나 문학책을 나란히 펼치고 읽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때에도 이런 책읽기는 그대로 잇습니다. 문득문득 돌이킵니다. ‘내가 시험문제 하나를 더 풀어 0.01점을 올리는 일’과 ‘오늘 하루 내 삶을 누리는 책으로 생각을 빛내는 일’하고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 하고 돌이킵니다. 나는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집에서 나섭니다. 새벽버스를 타고 학교로 옵니다. 학교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고요한 시멘트 감옥에서 창가에 앉아 가방에서 ‘교과서 아닌 책’을 꺼내고, 동무들이 오기까지 한 시간 반 즈음 ‘교과서 아닌 책’을 호젓하게 읽습니다. 비록, 창가 자리라 하더라도, 내 고등학교 창문 바깥으로는 화학공장 굴뚝이 가득합니다. 화학공장에서 버리는 쓰레기물을 거르는 처리장 매캐한 연기가 교실로 스며듭니다. 햇살은 조각처럼 쪼개어진 채 들어옵니다. 나는 좋은 햇살 누리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나는 좋은 모습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사랑을 헤아립니다.


..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그 마음도 알지 못하는 건 작은 나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야 … 도둑질이나 폭행, 살인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법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어도 그게 자기를 구속한다고 느끼지 않아. 그 사람의 자유는 조금도 규제받지 않는 셈이지 … 현실을 움직이는 건 관념이어서 관념이 바뀌지 않으면 현실도 바뀌지 않는 거야. ‘더 나은 사회에서, 더 잘 산다’는 관념이 진정으로 뭘 뜻하는지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당을 만들고, 자기 자신이 나아지려는 노력 없이 사회만 바꾸려고 한 셈이야. 설령 그런 사회가 실현됐다 하더라도 내용은 그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  (74, 98, 108쪽)


  고등학교를 마치며 고향이던 인천을 떠납니다. 이제 대학교가 있는 서울에서 지냅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한 해 동안 지옥철을 타고 대학교를 다녀 보는데, 이제껏 왜 ‘지옥철’이라 이름을 붙였는가를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선풍기조차 없이 창문만 열어 더위를 식히는 국철은, 인천에서 잠만 자고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날마다 새벽과 밤마다 오징어떡처럼 찡기면서도 손에 책을 꼭 쥡니다. 새벽전철에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투성이입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밟히면서 나는 책을 펼쳐 꿈누리로 빠져듭니다. 몸은 괴롭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밤전철에는 술에 절은 사람투성이입니다. 여기서 비틀거리고 저기서 시끄럽습니다. 나는 책을 펼쳐 온통 시끄러운 소리와 어지러운 냄새를 잊으려 합니다. 아니, 책을 펼치면 어떠한 소리도 냄새도 나한테 스며들지 않습니다. 나는 책과 함께 사랑누리를 생각합니다.


  서울 이문동에 있는 대학교에서 인천 주안역까지 막전철을 타고 오면 으레 밤 한 시 가깝습니다. 주안역에서 내린 다음 마을버스 마지막차를 기다립니다. 이때에도 가로등 불빛에 기댄 채 책을 읽습니다. 새벽에 전철에서도, 낮에 학교에서도, 저녁에 동아리방이나 과방이나 술집에서도, 밤에 전철과 버스역에서, 어느 누구도 손에 책을 안 쥔다고 느낍니다. 아주 드물게, 이 늦은 막버스 기다리는 주안역에서 누군가 손에 책을 쥔 사람이 보이곤 했는데, 이럴 때면 마음속에서 불이 켜집니다. 나는 외롭지 않다고, 나한테는 이렇게 좋은 이웃이 이름도 낯도 모르지만, 어디에선가 즐겁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불이 켜져 환합니다.


.. 사람들은 곧잘 ‘우정이 깨졌다’고 말하곤 해. 하지만 깨지고 마는 우정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었을 따름이야. 진정으로 중요한 뭔가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기보다 이해 관계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 … 내가 사는 이곳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너희들이 알아야만 하는 건,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바르게 살아갈까가 아닐까 … 나와 인류 전체는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좋아지지 않으면 인류 전체도 좋아지지 않는 거야 ..  (112, 148, 170쪽)


  대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에 아주 인천을 떠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새벽전철과 밤전철로 오가느라 지치기도 지치지만, 찻삯이 아깝습니다. 무엇보다 고단한 전철길에서 시달릴 때에 읽는 책은 마음닦이를 하며 읽더라도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다 느낍니다. 더욱이, 서울에서 잠잘 데 얻어 지낸다면, 서울 곳곳에 있는 헌책방을 두루 돌며, 내가 아직 모르는 더 깊고 너른 책바다에 뛰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린 날, 내 국민학생 적 내 어머니가 부업으로 하던 신문배달을 떠올립니다. 신문사 지국은 먹고자는 사람이 많다고 했지. 대학교 앞에도 신문사 지국 있지 않을까.


  대학교 과방으로 오는 신문에 끼워진 신문값 고지서에 적힌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겁니다. 신문사 지국으로 갑니다. 국민학생 적부터 신문배달을 했다고 말하며, 이곳에서 먹고자며 신문을 돌리기로 합니다. 이러면서 차츰 학교 전공 과목 수업하고 멀어집니다. 교재 한 권을 내가 먼저 혼자서 하루 동안 읽으면 그만일 텐데, 이 작은 교재로 한 학기나 한 해를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내키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대학교와 몸으로 겪는 대학교가 너무 다릅니다. 고등학생 적을 되새깁니다. 그래, 중학교나 고등학교도 교과서 한 권으로 한 해를 가르치잖아. 그런데, 이때에는 교과서 말고도 문제집과 참고서를 얼마나 많이 보는데. 대학교는 수업도 설렁설렁에다가 교재도 너무 얇고. 이래서 무슨 학문을 하지?


  대학교 옆 헌책방에서 온갖 책을 찾아 읽습니다. 대학교 구내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을 합니다. 내 깜냥껏 50분 일하고 10분 쉬면서 틈틈이 책을 읽습니다. 나는 50분 일한 만큼 내 근무기록일지에 ‘50분 일하고 10분 쉼’이라 숫자를 적는데, 어떤 사람은 일도 안 하면서 근무시간을 되게 길게 적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 말고 없는데, 근무기록일지를 보면 이름은 적히되 얼굴이 안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도서관 일꾼한테 여쭙니다. ‘어머, 학생은 그렇게 안 했어요?’ 도서관 일꾼은 근로장학생으로 이름 올린 학생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없어, 늘 그러려니 한다고 말합니다. 구내도서관 근로장학생 일은 석 달만 하고 그만둡니다. 그러고 나서 학교 구내서점에서 일합니다. 학교 구내서점에서는 일하는 티가 금세 드러나고, 일하는 보람을 스스로 뿌듯하게 느낍니다. 그렇지만, 나날이 ‘대학교가 참 싫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 ‘생각한다’는 건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야 … 그렇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일 뿐이지. 자기 스스로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하니, 이상이 현실로 될 수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 누구나 내면을 아름답게 가꿔 가야 해. 겉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면 말이지. 겉만 가꿔서는 안 돼. 전부 얼굴에 드러나니까. 이미 다 드러났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뿐이야 … 사람들의 삶은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말 그대로가 아닐까 … 살인을 저지르거나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게 자기한테 좋을 거라고 여기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러지는 않을 거야 … 나쁜 행귀가 결국은 자기한테도 나쁜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서슴없이 나쁜 행위를 연달아 저지르게 되지 ..  (11, 104, 134, 151, 175, 176쪽)


  강의를 제대로 안 듣고, 강의 교재 말고는 스스로 다른 책을 찾아 읽지 않으며, 근로장학생 이름은 거짓으로 올리고, 시험을 치를 적에 훔쳐보기를 일삼는데다가, 화장과 술과 살섞기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대학교는 몹시 짜증스럽다고 느낍니다. 대학생이 되면 고등학생 때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이 많이 책을 읽을 줄 알면서, 마음과 생각과 꿈과 슬기를 빛내야 하지 않겠느냐 느끼는데, 막상 이렇게 길을 걷는 동무를 만나기 힘듭니다. 선배라 하는 사람은 학년이 위라 하며 높임말을 쓰라고만 시킬 뿐, 모두들 취업이라는 문 앞에서 또다시 영어 공부에만 빠져듭니다. 대학생 선배 가운데 앞사람다운 모습이나 길잡이 같은 매무새나 이슬떨이 같은 넋을 보여주는 이를 만나지 못합니다.


  이제 나는 생각을 굳힙니다. 이런 대학교라면 비싼 돈을 치르며 다닐 까닭이 없다고.


  생각을 갈무리하고 싶어 일찌감치 군대에 들어갑니다. 군대에서는 스스로 아무 생각을 안 하며 살자고 생각합니다. 살아남고 싶으니까, 총칼을 든 살인무기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바보스러운 지식이 깃들지 않기를 바라니까, 군대에서는 생각을 잊기로 합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스스로 생각을 잊은 채 살아가노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하나 끈이 끊어진 듯 갑갑합니다. 가슴이 꽉 막힌 채 무언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습니다. 실타래가 엉킨 듯합니다.


  그래요. 생각을 잊은 채 살다 보니, 나한테 무엇보다 아름다우며 대수로운 ‘꿈’과 ‘사랑’을 찾아볼 수 없어요. 내 눈빛에서 꿈이 사라지고, 내 눈길에서 사랑이 스러져요. 생각을 안 하는 사람한테는 꿈이 없고, 생각을 잊는 사람한테는 사랑이 없어요.


..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바로 마음이 하는 거지. 그래서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건 그걸 만든 사람의 마음가짐,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와 다르지 않아 … 누군가가 자기답게 자기 모습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반했다는 걸 가짜는 알지 못하지.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지 못해서 다른 사람 흉내를 내거나 인기몰이에만 신경 쓰게 되는 거야 … 우주 전체라는 게 어쩌면 사유하는 정신인 내가 그렇게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 누군가 그릇된 사유를 한다면 그것 역시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거야 ..  (140, 141, 159, 203쪽)


  이케다 아키코 님이 쓴 푸른책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을 읽었습니다.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 푸름이들이 생각밭을 키우도록 이끄는 책이라 하는데, 《열네 살의 철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청소년이 생각을 키우도록 하기’에 그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푸른 나날을 보낸 어른 가운데 푸르던 그무렵 생각을 못하던 이들한테 이제부터 즐겁게 생각을 빛내자 하는 이야기를 함께 들려줍니다. 푸른 나날을 보내고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으며 이 아이들이 푸름이가 된 사람한테도, 아이들한테만 읽히는 책이 아니라 푸름이를 돌보는 어버이 또한 나란히 읽으면서 오늘을 사랑하는 생각을 가다듬자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 자기한테도 타인한테도 좋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언론은 자유로워야 해. 자기한테도 타인한테도 좋은 건 누구한테나 옳은 말이야. 누구한테나 옳은 말을 하는 경우에는 그 말을 할 ‘내 자유’를 굳이 주장하지 않아도 돼. 곧, 사람은 옳은 말을 할 자유를 가지지, 옳지 않은 말을 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서 보면 누군가 옳지 않은 말을 할 때면 꼭 ‘언론에는 자유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내 자유다.’ 하고 주장하곤 해 … 느끼지 못하면 알았다고 할 수 없어. 머리로 알았을 뿐인 지식이나 어딘가에서 꾸어 온 지식 따위에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꿀 만한 힘이 담겨 있겠어 ..  (188, 221쪽)


  책을 꼭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꼭 봐야 하지는 않습니다. 회사원이 반드시 되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돈을 반드시 벌거나, 혼인을 반드시 하거나,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 하지는 않아요.


  다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려는 꿈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나누고픈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린이책은 왜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이 붙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책은 누가 읽으라는 책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푸른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 책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쓰는 넋은 무엇이고, 책을 읽는 뜻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목숨을 건사하는 밥 한 그릇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햇살 한 조각을 생각하고, 바람 한 점을 생각하며, 풀 한 포기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기에 살아갑니다. 생각하기에 사랑합니다. 생각하기에 꿈꿉니다. 생각하지 않기에 ‘몸뚱이는 어엿이 있어도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니 사랑은 메마르고 미움과 시샘과 헐뜯기와 비아냥이 춤춥니다. 생각하지 않는 만큼, 어떻게 내 삶을 빛낼까 하는 꿈은 어디에도 자라지 않아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생각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으로 온누리를 빛냅니다. 생각으로 지구별을 보살핍니다. 마음으로 내 몸을 살찌웁니다. 생각으로 내 이웃과 살붙이와 동무를 어깨동무합니다. (4345.6.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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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코짱
노다 미치코 지음, 오타 도모 그림, 김경인 옮김 / 양철북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점글책 없는 도서관, 장님 없는 학교
 [푸른책과 함께 살기 96] 노다 미치코, 《덴코짱》(양철북,2011)

 


- 책이름 : 덴코짱
- 글 : 노다 미치코
- 그림 : 오타 도모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양철북 (2011.10.24.)
- 책값 : 8000원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는 도서관을 딱히 싫어하지 않지만 그리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딱히 도서관에 찾아갈 겨를이 없기도 하고, 도서관을 찾아갈 때에 내가 즐길 만한 책이 얼마나 될까 잘 모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도서관은 새벽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열지 않습니다. 도서관에 있던 책들이 적잖이 버려지며 헌책방 책시렁에 꽂히곤 합니다.


  한국땅 도서관은 처음 건물 하나 지을 때에는 무척 번듯하게 짓곤 합니다. 그렇지만, 나날이 새로 나오는 책을 꾸준히 받아들이다 보면 처음 지은 건물로는 모자라니 책 둘 자리를 꾸준히 새로 지어야 하지만, 막상 새 건물 지으며 책시렁 넓히는 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국땅 도서관은 묵은 책을 버리고 갓 나온 책을 들이며 좁다란 자리를 버티기만 할 뿐이라고 느껴요.


  한국에 있는 도서관이 도서관답지 못하다고 느끼기에, 나는 내 나름대로 서재도서관을 꾸밉니다. 내가 내 돈을 들여 장만해서 읽은 책을 건사하는 내 서재를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서재도서관입니다. 여느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건사하기도 하고, 여느 도서관에서는 갖출 생각이 없으나, 나로서는 좋아하고 바라는 책들을 즐거이 장만해서 건사하기도 합니다. 한국땅 도서관에서는 서른 해나 쉰 해쯤 묵은 책을 찾을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내 서재도서관에서는 쉰 해이건 일흔 해이건 내가 갖추기만 하면 우리 아이들이 언제라도 손으로 만지면서 펼칠 수 있도록 꾸밉니다.

 


.. “제대로 본 거야? 어떤 애였는데?” “완전히 천사 같았다니까!” … 교실로 들어선 설사는, 그러니까 하라이 타로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뒤에 서 있는 여자애를 교실로 불러들였다. “들어와. 여기가 4학년 1반 교실이다.” 눈을 감은 아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  (13∼14쪽)


  나는 손말을 할 줄 모르고, 점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러나, 중학생이던 때에 처음으로 지역 도서관에 찾아가 본 뒤 궁금하게 여겼어요. 나처럼 입으로 말을 하고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펼칠 책 말고,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어야 할 사람이 펼칠 점글책은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요즈음은 이럭저럭 나아져서 점자도서관이 따로 있다고 하고, 여느 도서관 한켠에 점글책을 두기도 한다지만, 눈으로 읽는 사람이 볼 책조차 넉넉히 건사할 자리가 모자라다는 한국땅 도서관 모습을 헤아린다면, 점글책을 얼마나 갖출는지 아리송해요.


  눈으로 읽는 책은 낱권책 한 권이어도, 점글책은 두툼한 열 권이 되기 일쑤예요. 게다가 점글책은 책시렁에 빡빡하게 꽂으면 안 됩니다. 눕혀도 안 됩니다. 한국땅 도서관마다 ‘새로 나오는 책 사들이는 돈’이 적다고 목소리 높은데, 점글책 만들거나 마련하는 돈은 얼마나 들일는지 또한 알쏭달쏭해요. 아니, 여느 출판사에서 점글책을 내놓아 주기는 할까요. 여느 출판사에서 점자도서관 일꾼이나 자원봉사자가 점글책을 만들기 수월하도록 한글파일을 선선히 나누어 주기는 할까요. 점글책과 함께,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즐기도록 말책(녹음책)을 알뜰히 갖추는 도서관은 얼마나 있을까요.


  점글책은 한국땅 도서관에 몇 가지쯤 있을까요. 점글로 된 도감이나 사전은 몇 가지쯤 있을까요. 점글로 된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나 일어사전은 제대로 있을까요.


  말책은 한국땅 도서관에 몇 가지쯤 있을까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말책을 듣겠지만, 눈이 어두워진 사람도 글책 읽기 어려우니 말책을 들으면 좋을 텐데, 말책을 알뜰살뜰 갖추는 도서관이 제대로 있기나 할까요.

 


.. “카렌은 지난달에 미국에서 귀국했다. 다섯 살 때까지는 일본에서 살았어. 일본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해. 점자도 막힘없이 술술 읽을 줄 알지. 못하는 게 없는 친구다.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는다.” … 귀여운 얼굴은 마치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웃고 있는데? 방금 전에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디맑은 목소리가 우리 머리 바로 위에서 노래했는데? ..  (17∼18쪽)


  입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눈으로 읽지 못할 때에는 손말이나 점글을 씁니다. 한국땅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눈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 스스로 제도권학교에서든, 구청이나 군청 같은 곳 문화강의 같은 데에서든 손말과 점글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어쩌면, 어떠한 구청과 군청에서도 구민이나 군민한테 손말과 점글을 안 가르칠는지 모릅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도서관에 점글책 없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막상 ‘왜 손말이나 점글을 제2외국어로 안 가르치는가’ 하는 대목을 궁금해 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고등학교에서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쯤 가르쳤다면, 대학시험에서도 손말이나 점글을 푸는 문제가 나온다면, 온통 대학입시지옥으로 흐르는 한국 삶자락이 조금이나마 달라지지 않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다만, 손말이나 점글은 시험문제가 되어야 하지는 않아요. 삶이 되어야 올발라요. 삶이 될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가 되어서야 제2외국어로 가르칠 노릇이 아니라, 어린이집부터 가르칠 노릇이라고 느껴요. 다섯 살 아이들한테부터 어린이집에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말은 어린이집부터 가르치고, 점글은 초등학교부터 가르쳐야지 싶어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도록 가르치면서, 한국땅 살가운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삶을 사랑하게끔 손말과 점글을 늘 가슴으로 맞아들이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 덴코짱은 점심시간 동안 계속 두꺼운 책만 읽고 있다. 아마도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한 책인 것 같다. 새하얗고 깨알 같은 점들이 두꺼운 종이 위에 가득 튀어나와 있다. 텐코짱은 고개를 약간 쳐들고 자랑스러운 듯 엄청 빠르게 두 검지로 점들을 짚어 나간다. 가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눈물을 닦을 때도 있다 … 그나저나 점자책을 읽을 때 덴코짱의 그 기쁨에 찬 얼굴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보물산에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  (35, 38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나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두 해를 다니면서, 같은 반에서든 한 학교에서든 언제나 비장애인 동무들만 만났습니다. 장애인 동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도 장애인 동무는 하나도 못 보았어요. 언제나 비장애인 동무만 마주했어요.


  더 생각하면, 내가 다닌 학교들 가운데 바퀴걸상을 타고 다닐 만한 건물이던 곳은 없습니다. 목발을 짚고 다닐 만한 건물도 없습니다.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알아볼 만한 건물도 없습니다. 비장애인 학교와 장애인학교가 뚜렷하게 갈려, 서로 만나거나 사귀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깨동무를 할 만한 겨를도 자리도 없어요. 장애인학교와 어깨동무를 맺는 비장애인학교조차 구경하기 힘들어요.


  다시금 생각을 기울입니다. 신문이고 잡지이고 책이고 인터넷이고, 온통 비장애인이 쓰도록 만듭니다. 장애인이 읽을 신문이나 잡지나 책은 얼마나 될까요. 장애인이 쓰기 좋도록 꾸민 인터넷은 얼마나 있을까요.


  그러나, 신문이나 잡지나 책이 ‘점글로도 찍어 준다’ 하더라도 장애인 권리와 삶을 헤아린다 할 수 없어요. 점글로 찍기는 찍더라도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담는 이야기’가 장애인으로 지내는 사람들 꿈과 사랑을 따사로이 어루만지지 않는다면 덧없어요.


  그렇잖아요. 비장애인이 읽는 신문이나 잡지나 책인데, 이런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 이야기가 얼마나 실리나요.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이 읽을 만한 이야기를 얼마나 다루나요. 도시 노동자 말고 시골 흙일꾼이 즐거이 읽으며 새길 만한 이야기는 얼마나 짚는가요.

 


.. “미후네, 넌 손가락으로 글자 읽을 수 있어?” ..  (39쪽)


  아이들과 살아가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군내버스를 탈 때면 그리 바쁘지 않습니다. 군내버스 모는 일꾼은 우리 식구가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시골버스는 자리가 넉넉해, 장날이 아니라면 으레 빈자리 많습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녀올 때 보면, 우리 식구가 탈 때뿐 아니라, 이웃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탈 때에도 버스 일꾼은 오래도록 버스를 멈추어 기다립니다. 버스에 타려고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시든 헐레벌떡 달려오시든 가만히 기다립니다. 어느 할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오실라치면, ‘어차피 기다리는데 뭘 그리 서두르시느냐’고 얘기하곤 합니다.

  아이들과 어쩌다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버스를 타든 전철을 타든 무척 애먹습니다. 도시에서는 우리 식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도시는 어디나 다 바쁩니다. 차를 바삐 몰고 거칠게 몹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느 버스 일꾼이든 택시 일꾼이든 모두 어슷비슷합니다. 어쩔 수 없겠지만, 도시에서 ‘돈을 벌거나 사회활동 한다는 사람은 으레 비장애인 어른’이거든요.


  시골마을은 일흔이나 여든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골버스 일꾼은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어버이가 버스에 타든,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버스에 타든, 아주 익숙하게 누구라도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시동을 다시 겁니다.

 


.. “히로시? 다테노 히로시 말이지? 가까이 오면 고양이 냄새가 나니까 금방 알 수 있어.” 히로시 집에서는 고양이를 다섯 마리나 키우고 있다. “나는?”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오줌 냄새라고는 제발 하지 말아 줘∼. “책 냄새가 나. 그리고 아기 냄새도.” 지난해에 우리 집에 여동생이 태어났거든! … “곧 여름이 오려나 봐!” 덴코짱이 이렇게 말했다. “바람한테서 여름 냄새가 나?” “그럼! 바람도 나무도 흙도. 그리고 파도 소리에서도 나는걸.” ..  (46, 81쪽)


  장애인이라는 이름표가 붙는 아이들과 비장애인이라서 이름표가 안 붙는 아이들은 한 학교 한 교실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아이들한테는 숫자로 매기는 시험성적이 대수롭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우고 사랑을 물려받아야 하거든요. 아이들을 시험점수 기계로 만들자면, 아직까지 안 바뀌는 제도권학교 틀을 그대로 이어야겠지요. 아이들을 대학벌레로 만들거나 대기업벌레로 만들자면, 오직 비장애인 아이들만 한데 몰아놓고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때려잡으며 시험공부만 달달 시켜야겠지요.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넋을 맑으며 슬기롭게 키우도록 북돋우는 배움터라 한다면, 아주 마땅하고 홀가분하게 모든 아이들이 두루 다닐 수 있어야 해요.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배움삯 때문에 골치를 앓으면 안 돼요. 모든 학교는 나라돈으로 대야 해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나라돈으로 대야 해요. 장학금은 따로 없어도 돼요. 나라에서는 군대를 없애야 하고, 부질없는 토목건설을 그쳐야 해요. 나라돈은 써야 할 곳에 아름답게 써야 해요. 아이와 어른 모두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길을 걷도록 도와야 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은 울타리를 걷어야 해요.


  시골 군내버스 일꾼들이 늘 할머니 할아버지 태우며 마주하면서 ‘오래 기다리고 되도록 거칠게 안 몰기’를 몸으로 익힐 수 있듯,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학교와 일터와 삶터 어느 곳에서나 서로 살가이 만나고 얼크러질 수 있어야 비로소 이 나라 한국은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요.

 


.. 촛불이 켜져 있든 꺼져 있든 덴코짱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늘 어두운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 “눈이 보이는 사람은 어둠이 무섭겠지. 근데 내 앞에 있는 건……, 뭐랄까? 어둡지도 밝지도 않아. 그냥 내가 있는 세계일 뿐이야. 그리고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리지.” ..  (109∼110쪽)


  노다 미치코 님이 쓴 푸른문학 《덴코짱》(양철북,2011)을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이라 해도 되고 푸른문학이라 해도 됩니다. 그냥 문학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냥 이야기책이라 해도 좋아요. 아무튼 《덴코짱》은 일본사람 노다 미치코 님이 지난 2009년에 쓴 이야기요, 2009년은 ‘알파벳 점글’을 슬기롭게 빚은 루이 브라유 님이 태어난 지 이백 돌이 되는 해였다고 해요.


.. “내 별명은 덴코짱이라고 해. 점자로 된 책만 읽는다고 친구들이 지어 준 거야.” ..  (22쪽)


  한국땅에서도 ‘점글아이’가 차츰차츰 늘어날 수 있기를 빌어요. 한국땅에서도 ‘손말아이’가 하나둘 늘어날 수 있기를 꿈꾸어요. 아이들부터 점글아이와 손말아이로 거듭나고, 어른들 또한 아이들 사랑을 받으며 점글어른과 손말어른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기쁘겠어요. 따로 점자도서관을 많이 세워도 아름답지만, 이 나라 모든 여느 도서관마다 점글책을 ‘여느 글책’하고 똑같이 알차게 갖출 수 있으면 아주 어여쁘리라 생각해요. (4345.6.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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