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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9. 집



  ‘장수’라고만 말하면 전라도에 사는 사람은 ‘전라북도 장수’를 먼저 떠올리지 싶습니다. 이다음으로는 “오랫동안 산다”는 뜻을 가리키는 한자말 ‘장수(長壽)’를 떠올릴 테고요. 그런데 사전을 살피면  “≒ 노수(老壽)·대수(大壽)·대춘지수·만수(曼壽)·만수(萬壽)·수령(壽齡)·영수(永壽)·용수(龍壽)·하년(遐年)·호수(胡壽)”라고 해서 비슷한말이라는 한자말이 잔뜩 뒤따릅니다. 지난날에 한문으로 글살림을 가꾼 분은 이렇게 갖은 한자말을 썼겠지요. 그러나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아서 쓸 만한 낱말은 하나도 없지 싶습니다. ‘장수’란 한자말조차 ‘오래살다’로 고쳐쓰면 그만입니다. ‘길게살다’나 ‘널리살다’나 ‘튼튼살다’처럼 오늘날 우리 살림살이를 헤아려 새롭고 재미난 말을 얼마든지 지어서 쓸 만하지요.


  사투리란, 우리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서 삶을 가꾸다가 문득 새로 지은 말입니다. 이러다 보니 사투리는 고장마다 다를 뿐 아니라, 고을마다 다르고, 마을마다 다른데다가, 집집마다 달라요. 사투리가 이토록 다른 까닭은, 고장이며 고을이며 마을이며 집집이며 살림이 다 달라서예요. 다 다른 삶맛을 담아낸 말이니, 어느 곳 사투리를 들어도 맛깔나요. 다 다른 살림멋을 길어올린 말이기에, 어느 곳에서 어느 사투리를 들어도 재미있고 알차며 구성지고 신이 나기 마련입니다.


  ‘마병’이란 오랜 한국말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고물(古物)’이지요. 우리 스스로 오랜 살림을 가꾸는 길이었으면 ‘마병장수’라 했을 테고, ‘마병집·마병가게’라 했겠지요. ‘고물장수·고물상’이 아니고 말이지요.


  영어 ‘홈페이지’를 그냥 쓰는 분이 많지만, ‘누리집’이란 이름이 어엿이 있습니다. 누리그물로 들어가서 찾아가는 데가 누리집이에요. 누리판에도 집이 있다는 생각이 참 대단해요. 다시 말해서 ‘집’이라고 하는 오래된 낱말 하나를 오늘날에 새롭게 살려서 쓰니까, 이 쓰임새는 사전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 더 살피면 ‘어린이집’이 있어요. 어린이가 다니는 배움자리인데, 이곳이 ‘집’처럼 포근한 터전이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기도 합니다. 잘 생각해 봐요. ‘어린이집’이라 할 적하고 ‘보육원·보육시설’이라 할 적에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요? 어른들은 어린이한테 어떤 이름을 붙인 터전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이렇게 이어가 보면 집을 놓고서 ‘학교’라 하겠는지 ‘배움집’이라 하겠는지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학교’ 같은 이름을 그대로 써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대로 쓰는 일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나쁘지는 않아요.


  그대로 써도 나쁘지는 않으니 학교를 그냥 학교라고들 할 텐데, 오늘날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삶을 즐겁게 배우면서 살림을 사랑스레 배우기를 바란다면, 어떤 이름을 붙인 터전을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물려주시겠습니까? 마치 집처럼 포근하면서 아늑한 배움자리라는 뜻으로 ‘배움집’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해요. 한자말을 한국말로 고쳐쓰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혀에 얹어서 소리를 내거나 손에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씨를 그릴 적에, 느낌이 환하게 살아나면서 즐겁게 노래처럼 또르르 구르는 이슬같은 이름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새말을 지을 적에는 ‘국어순화’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노래가 되는 이름’을 헤아려서 이렇게도 붙이고 저렇게도 지으면 되어요. 노래로 부르듯이 짓는 이름이니 억지로 꿰맞출 일이 없어요. 나긋나긋 상냥하게 부르듯이 짓습니다. 시원시원 씩씩하게 외치듯이 지어요.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가정’일까요, 아니면 ‘살림집’일까요? 우리는 ‘주택’에 살까요, 아니면 ‘집’에 살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가정’이라면 ‘가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살림집’이라면 ‘살림꾼’이나 ‘살림지기’나 ‘살림님’이나 ‘살림벗’이 있어요. 우리가 살림집에서 산다면, 우리 집 어린이나 푸름이는 ‘살림순이·살림돌이’랍니다. 가시내한테 집일을 도맡기는 얼거리가 아닌, 가시내랑 사내가 어깨동무를 하면서 같이 살림을 가꾸는 ‘살림벗’으로서 살림길을 열 수 있습니다. 자, 어떤 집에서 살고 싶습니까.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아직 해남이란 고장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해남에서 알뜰히 이야기꽃 한마당을 펼 수 있다면 그곳을 찾아가려고 생각합니다. 해남이라는 곳에는 여러 시인을 둘러싸고서 ‘생가’나 ‘기념관’이나 ‘전시관’이나 ‘문학관’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이름, 이른바 ‘생가·기념관·전시관·문학관’을 그냥 씁니다. 이런 이름이어야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어른들 생각입니다. 어른들 가운데에서도 한자말로 된 지식이나 학문을 익힌 사람들 생각이지요. 다섯 살이나 열 살 어린이한테 이런 이름이 마음에 와닿을까요? 열다섯 살 푸름이한테도 그리 안 쉽거나 마음에 안 와닿을 만한 이름이 아닌가요?


  이름이란 어떤 지식이 있는 어른한테만 쉽거나 와닿는 결로 붙이기보다는, 어떤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거나 가슴으로 맞아들일 만한 결을 헤아려서 붙일 적에 서로 즐거우며 아름답지 싶습니다.


  생각해 봐요. 고정희 시인이나 김남주 시인이 살던 집에는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요? “고정희 살던 집”이나 “김남주 살던 집”이라 하면 되어요. 문학관이라면 “고정희 글숲집”이나 “김남주 글숲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정희 님이 쓴 글을 숲처럼 그러모은 집이란 뜻입니다. 이밖에 “김남주 살림숲집”이라 하면, 김남주 님하고 얽힌 살림길을 찬찬히 밝히면서 보여주는 집이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이 아니어도 “고정희 집”이나 “김남주 집”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일 만해요.


  집이에요. 오붓하게 오순도순 도란도란 즐거이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집입니다. 집이지요. 누구나 기꺼이 맞아들여서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는 너른마당이 정갈하면서 고운 집입니다.


  집을 집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느 집이든 집답게 가꾸는 손길로 나아간다고 느껴요. 집을 집 그대로 바라보기에, 집살림이며 옷살림이며 밥살림을 스스로 정갈하면서 알뜰히 여미거나 맺으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결을 이어서 말살림하고 글살림도 북돋우겠지요.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살림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살림꽃이 바로 말이에요. 기쁘게 주고받은 살림꽃이라는 말을 종이에 살포시 얹으니, 살림열매로 흐드러집니다. 글이나 책이란 살림열매라 할 만합니다. 살림을 고이 지어서 얻었기에 널리 나누는 열매가 바로 글이나 책이거든요.


  아침에 어느 책을 읽는데 ‘아수라장’이란 불교 한자말이 나옵니다. 사전을 뒤적였어요. 딱히 대단한 뜻이 없더군요. ‘싸움판’이라 하면 될 텐데, 불교라는 자리에서는 굳이 이런 이름을 쓸 뿐이네요.


  여기에서도 더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첫걸음은 ‘싸움판’입니다. 다음으로 ‘싸움마당’이나 ‘싸움터’예요. ‘싸움투성이’가 되기도 할 테지요. 마구 싸우면서 어지럽다면 ‘북새통·북새판’입니다. ‘북새마당’도 어울려요. 마구 싸워 어지러우니 ‘어지럼판’이자, 시끌시끌할 테니 ‘시끌판·시끌마당’입니다.


  밀이란, 말이 나오는 결을 살려서 술술 펴고 나누면 되어요. 꼭 어느 한 가지 말만 쓸 일이 없습니다. 삶을 이루는 터전을 바라보면서, 살림을 짓는 손길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말길이 저절로 트여요. 사랑을 하려는 눈빛으로 슬기롭게 마음을 밝히면 갖은 글길이 환히 열립니다.


  책을 사고파는 곳이기에 ‘책집’이 됩니다. 또는 책을 짓는 곳이기에 ‘책집’이에요. 책을 다루는 길을 가니 두 곳이 모두 책집입니다. 갈래를 더 나눈다면, 책을 사고파는 일이란, 책을 나누는 길이니, ‘책나눔집’이라 할 만하고, 책을 짓는 일이란, 책으로 생각을 짓는 길이라서, ‘책짓는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온 한자말이든, 미국에서 들어온 영어이든, 그냥그냥 써도 나쁘지 않아요. 아직 모르겠으면 그대로 쓸 노릇일 터입니다만, 살짝 짬을 내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생각해야 스스로 말을 지어요. 스스로 사랑하면서 생각해야 스스로 살림을 지으니, 우리를 둘러싼 모든 말, 예부터 사투리란, 바로 사랑어린 살림을 짓는 손길에서 스스로 기쁘게 지은 자취로구나 하고 함께 배우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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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8. 장문의 글



  요즈음 분들은 ‘긴글’은 잘 안 읽을까요? 손전화를 오래 손에 쥔 채 하루를 누리다 보니 ‘짧은글’에만 익숙한 채 조금이라도 ‘짧지 않다’ 싶으면 죄다 ‘길구나’ 하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이웃님이 저한테 글월을 띄울 적에 저도 맞글월을 띄워 줍니다. 때로는 다른 일을 하느라 깜빡 잊고서 글월을 놓치기도 합니다만, 바로 글월을 적든 뒤늦게 글월을 띄우든 마음을 기울여서 온힘을 다해 쓰려고 해요. 이러다 보면 이 수다 저 얘기가 넘치곤 하는데, 이런 제 맞글월을 받는 분들이 으레 이렇게 말합니다.


 장문의 글을 답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적마다 적이 어지럽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이 말씨가 요즈음 ‘관공서 말씨’이거나 ‘격식 말씨’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써야 마치 다소곳하거나 얌전하거나 상냥하다고 여기시는구나 싶은데요, 이런 말씨는 하나도 안 다소곳하고 안 얌전하며 안 상냥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씨일 뿐입니다. 이 말씨는 다음처럼 바로잡을 노릇입니다. ‘손질’ 아닌 ‘바로잡기’를 할 말씨예요.


 긴글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글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길게 얘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얘기 고맙습니다


  아직도 퍽 많은 분들은 ‘한자말(일본 한자말+중국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어내면 길어진다고 잘못 알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어내거나 손질하거나 옮기면 훨씬 짧고 단출하며 쉽습니다. 이러면서 부드럽지요.


  그도 그럴 까닭이 한국사람이 쓰는 말이 ‘한국말’이니까요. 오랜 옛날부터 한겨레를 이룬 사람들이 쓰던 텃말이 한국말인 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분이 뜻밖에 대단히 많아요. 한문·한자말이란, 임금과 지식인과 벼슬아치 몇몇이 주먹힘을 거머쥐면서 그들 웃자리를 지키려고 쓴 바깥말인 줄 제대로 읽어내는 분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어떤 말을 어떻게 쓸 적에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가를 거의 못 배웠다고 할 만합니다. 어른부터 한국말을 한국말다이 배운 적이 없이 입시공부만 하면서 대학바라기를 하며 자란 터라, 이런 어른이 닦은 사회라는 곳에서 흐르는 말은 ‘삶말, 삶이 숨쉬고 피어나고 자라고 고운 말’이 아니기 일쑤예요. 딱딱한 질서와 메마른 틀과 차가운 계급과 위아래 신분으로 갈린 말씨이기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이러한 ‘사회 어른’이 엮은 교과서를 읽는 어린이·푸름이는 삶말도, 사랑말도, 참말도, 슬기말도, 살림말도, 고장말도, 꿈말도, 믿음말도, 놀이말도, 일말도, 나눔말도, 고운말도 모두 못 듣거나 못 배우곤 하지요.


  한자말을 쓴대서 잘못일 수 없습니다. 한자말을 쓴대서 틀리거나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영어를 섞든 한자말을 섞든 그 낱말이나 말씨가 어떤 뜻이나 결인가를 제대로 짚고서 똑바로 다룰 줄 알 노릇입니다. 그리고, 한국말 아닌 한자말이나 영어는 바깥말이라는 대목을 깨달아, 바깥말로서 제대로 가르치고 배워야지요.


  앞서 “장문의 글”을 보기로 들었는데, 우리가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즐겁고 아름다이 배운 적이 있다면, 말뜻대로 고치는 글 말고 새롭게 써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들어 볼게요. 무엇보다 ‘장문 = 긴글’이니 “장문의 글”은 겹말입니다.


 넉넉한 말씀 고마워요

 넉넉히 들려준 얘기 고맙네요

 푸짐한 이야기꽃 즐거웠습니다

 푸진 글월 반갑군요


  글월을 주고받은 분이 서로 오랜 동무라면 말씨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또 몇 가지를 들어 볼게요.


 넉넉한 말 고마워

 넉넉히 들려준 얘기 고맙구나

 푸짐한 이야기꽃 즐거웠어

 푸진 글월 반갑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말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사람마다 다 다른 삶터에서 나고 자라면서 다 다른 꿈과 사랑을 키우고, 이를 다 다른 말씨로 담아내어 ‘다 다르면서도 다 같은 즐겁고 슬기로운 사랑이 꿈처럼 날개돋이를 하는 이야기’를 펼치는 말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아마, 아니지 싶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살펴도,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살펴도, 하나같이 너무 메마릅니다. 더욱이 말재주 부리기나 어려운 한자말로 논설·논술 펴기가 가득하고, 쉽고 부드러우면서 상냥하고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어깨동무를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꼭지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부디 거꾸로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생이 배워야 하는 교과서를 어른들한테 건네면서 ‘자, 이 교과서로 공부하세요’ 하면 배울 맛이 날까요? 문학을 문학이 아니게 쪼개어 객관식 문제를 내고, 말을 말이 아니게 뒤틀어서 논설·논술로 꾸미는 국어 수업은 삶말하고는 매우 동떨어집니다.


  앞서 보기로 든 “장문의 글”을 다시 고쳐 보겠습니다. 여느 동무가 아닌 마음으로 사귀는 벗님하고 주고받는 글월일 적에는 이처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긴글 좋다

 긴글 좋았어

 긴글 고맙

 반가운 긴글


  우리 삶터에서 바로잡을 곳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느 곳이든 제대로 손보고, 슬기롭게 가꾸며, 즐거이 북돋울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뜻이 같은 줄거리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 마음을 담아내면 스스로 즐겁고 서로 기쁜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길을 이제부터 열어야지 싶습니다.


  더 미루지 말 노릇입니다. 학교에서 정규 과목으로 어렵다면 ‘비정규 과목’으로라도 하루 빨리, 하루 정규 과목을 마치고 날마다 5분이나 10분 틈을 내어, 말을 말답게 가꾸거나 돌보면서 마음을 마음답게 살찌우거나 키우는 이야기꽃을 이 나라 어린이·푸름이가 듣고 익히도록 자리를 열어야지 싶습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모든 말은 마음입니다. 껍데기 아닌, 주파수나 파동이나 소리값이 아닌 마음입니다. 우리 숨결은 잘생기거나 이쁘거나 못생기거나 못난 얼굴·몸매가 아닙니다. 그렇지요? 우리 숨결은 껍데기인 몸이 아니요, 이 몸을 감싼 옷이 아닌, 몸을 입고 옷을 걸친 속에 깃든 넋이요 얼이자 마음이요 꿈이며 사랑이고 생각입니다.


  ‘마음속’이란 낱말을 제대로 읽고 느끼면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삶터와 배움터와 마을과 집이 되면 좋겠습니다. 겉모습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속을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손잡기를 바랍니다. 이제 가시내 누구나 마음껏 바지를 걸칠 수 있는 자유·민주·평화를 누리듯, 사내 누구나 신나게 치마를 두를 수 있는 자유·민주·평화로도 거듭난다면, 우리 삶터는 매우 재미나면서 웃음이 넘치고 아름다이 깨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바로 껍데기를 벗어야지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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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7. 몰록 깨달은 씨앗



  사투리넋


  오늘 우리는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나날을 살아갑니다. 흔히 쓰는 말이든 더러 쓰는 말이든 낡은 틀대로 헤아릴 까닭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쓴 말을 바탕으로 오늘 새롭게 살려서 쓰는 말결을 북돋우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볼 노릇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바라보면서 알맞게 말을 짓고 가다듬으면 되어요. 생각해 봐요. 요새는 사투리가 차츰 잊히거나 사라지지만, 지난날에는 어느 고장이나 고을이나 마을에서는 홀가분하게 사투리를 썼어요. 사투리란, 고장이나 고을이나 마을마다 다 다른 터전하고 살림하고 숲에 맞추어 다 다른 결을 저마다 스스로 슬기롭게 바라보고 알아보고 깨달아서 지은 말입니다. 손수 지은 삶에서 즐겁게 태어난 말이 바로 사투리예요.


  우리 모두한테는 ‘사투리넋’이 있습니다. 사투리넋이란, 살림을 제 터전에 맞게 슬기로이 지을 줄 아는 넋입니다. 바닷마을 살림하고 들마을 살림하고 멧마을 살림이 다르니, 바닷마을이나 들마을이나 멧마을마다 지어서 누리는 살림살이나 세간이 다르겠지요? 이와 맞물려 바닷마을하고 들마을하고 멧마을마다 쓰는 말도 다를 테고요?


  오늘날 우리 스스로 사투리를 잊거나 잃으면서 서울말이나 표준말에 얽매이거나 젖어드는 까닭은, 이제 서울하고 광주하고 대전하고 부산하고 제주가 거의 똑같은 모습이 되어 가기 때문이라 할 만합니다. 삶터가 비슷하고 살림이 비슷하니 말도 비슷할 수밖에 없어요. 서울하고 시골 모두 아파트가 늘어나고 자동차가 퍼지며, 아스팔트길이 뻗고, 방송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보며 즐기니, 참말로 말이 다 어슷비슷해질밖에 없답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 보지요. 대전 방송국이 대전말로 방송을 한다면? 울산 신문사가 울산말로 신문을 낸다면? 이때에도 살림살이가 엇비슷할까요? 광주에 있는 방송국하고 신문사가 광주말로 방송을 내보내고 신문을 편다면 어떠할까요? 이때에는 대전은 대전스럽고 울산은 울산스럽고 광주는 광주스러운 길을 걷겠지요. 이러면서 저마다 다른 즐겁고 새로우며 재미나고 아기자기한 살림꽃, 바로 문화가 피어납니다.


  씨는 씨앗


  저는 누구를 “아무개 씨(氏)”라고 부르는 일이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누가 저를 보며 “최종규 씨”라고 불러도 썩 반갑지 않았어요. 그런데 엊그제 우리 아이들을 부르는 제 목소리에 “사름벼리 씨, 산들보라 씨”라는 말마디가 새삼스럽다고 깨달았습니다. 아차차, 스스로 거북하게 여긴 말씨를 아이들한테 불쑥 썼나 싶었는데, 그리 거북하지 않았고, 뭔가 다른 뜻이 가슴으로 찌리리 퍼졌어요.


  흔히들 ‘씨’를 ‘氏’로만 여기지만, 아이들은 이를 아직 모릅니다. 게다가 굳이 안 알아도 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아는 ‘씨’란 ‘씨앗’이나 ‘씨톨’입니다. 흙에 묻으면 무럭무럭 자라는 씨앗을 ‘씨’로 알고, 볍씨 한 톨이나 밤 한 톨이나 복숭아 한 톨처럼 말하는 씨톨인 ‘씨’를 알아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한자를 따서 ‘氏’를 적더라도, 한국에서는 씨앗·씨톨을 바탕으로 사람을 가리킨다는 ‘씨’를 수수하게 써도 어울리겠다고 느낍니다. 한국에서 ‘氏’라는 한자를 ‘씨’로 소리내는 결도 어쩌면 씨앗·씨톨하고 맞물릴는지 몰라요. 모든 사람은 가슴에 씨앗이 있으니까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씨앗이니까요. 저마다 아름다운 씨앗을 꿈으로 가꿉니다.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씨앗을 뿌리면서 삶을 짓습니다.


  몰록몰록


  1948년에 《선가구감》이란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요새는 ‘선가귀감’으로 흔히 이야기하는데, 1948년에 나온 이 책은 조선어학회에서 옮김말을 살피면서 ‘해방을 맞이하고 도로 찾은 우리 말을 조금 더 북돋우면서 새로 옮긴다는 넋’을 담았다고 합니다. 한문이 아닌 한글로, 더욱이 불교에서 곧잘 쓰는데 여느 사람한테는 무척 어려운 한자말을 거의 털어낸 책인데, 이 책을 읽다 보면 ‘돈오(頓悟)’하고 ‘점수(漸修)’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이 나올까요? 바로 ‘몰록깨침’하고 ‘오래닦음’입니다.


  ‘몰록’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안 실렸습니다. 예전 사전에도 요즈음 사전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1948년에 나온 불교 경전에는 왜 ‘몰록 + 깨침’이라는 말이 나올까요?


  ‘몰록’은 불교에서 자주 쓰는 한자말 ‘찰나(刹那)’를 가리킨다고 해요. 아주 짧은 겨를을 나타내는 ‘몰록’인데, 말밑을 곰곰이 따진다면 ‘몰르다’하고 맞물릴 만하지 싶습니다. 요새는 ‘모르다’를 표준말로 쓰지만, 사투리를 쓰는 분들 가운데 ‘몰르다’라 말하는 분이 꽤 있어요. 그리고 ‘몰라’라는 말씨는 누구나 씁니다.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다” 같은 글월을 헤아린다면 ‘몰록’이란 말이 예전에 낯설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사전에만 안 실렸을 뿐이지요. 눈 깜빡하는 아주 짧은 겨를이라면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몰르는(모르는)’ 채 지나가기 쉽지요. 곧 ‘몰록’은 ‘불쑥·번쩍·문뜩·단박에·대번에·대뜸·갑작(갑자기)’하고 어우러지는 낱말이에요.


  요즈음 말씨로 ‘몰록깨침’이 살짝 낯설다 싶으면 새롭게 쓸 수 있습니다. ‘불쑥깨침·번쩍깨침·문뜩깨침·단박깨침·대번깨침·대뜸깨침·갑작깨침’처럼 말이지요. 꼭 한 낱말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결이 살몃살몃 다른 여러 말을 알맞게 쓰거나 즐겁게 쓸 만하지요.


  결이 다른 낱말을 이렇게 헤아리다 보면 우리 말밭은 푸짐합니다. 비슷한말이란, 알고 보면 다른 말이니, 비슷하면서 다른 말을 혀에 가만히 얹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본다면, 말에 깃든 맛을 새로 깨우칠 수 있어요. 이른바 몰록깨침하고 오래닦음이 어우러지는 기쁜 말빛입니다.


  더 헤아리면 ‘몰록질’이나 ‘대뜸질’이나 ‘갑작질’이나 ‘번쩍질’ 같은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아주 짧은 겨를에 뭔가 하는 몸짓을 나타내는 말씨예요.


  이런 여러 말씨는 국립국어원이나 국어학자가 알려주는 말이 아닙니다.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스스로 즐겁게 살림을 짓고 삶을 가꾸는 사이에 저절로 피어나는, 문득문득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재미난 말입니다.


  한길하고 외길


  이웃나라에서 새말이 들어오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웃나라에서 으레 쓰는 말씨를 받아들일 적에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쯤은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새말을 짓는 슬기나 재주나 솜씨나 기운이나 마음이나 생각이나 꿈이나 멋이나 손길이나 사랑이 없을까요? 이웃나라 말씨를 모두 끊자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는 왜 우리가 쓸 말조차 이웃나라에서 끌어들여야 할까요?


  언제부터인가 ‘일점돌파’라는 일본말을 글이나 말로 퍼뜨리는 분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일점돌파’는 일본에서, 더구나 칼싸움을 하는 자리에서 쓰던 말입니다. 칼을 쥐고 싸울 적에 한곳만 파고들어 물리치면 길이 열린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한곳을 파고든다면 ‘한곳뚫기’처럼 말할 만합니다. ‘한길뚫기’라 해도 어울리겠지요. 이 얼거리를 생각한다면 ‘옆길뚫기’나 ‘뒷길뚫기’나 ‘왼길뚫기’나 ‘오른길뚫기’처럼 새 쓰임새에 맞는 새말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칼싸움 일본말을 안 써도 됩니다.


  그리고 ‘외길파기·외길뚫기’를 쓸 수 있겠지요. ‘한길’하고 ‘외길’은 길이 똑같이 하나이지만 뜻이나 느낌이 확 다릅니다. 우리는 한길을 걸을 수도, 외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새길을 갈 수도, 샛길을 갈 수도 있어요. 말끝 하나로 확 다르지요? 즐겁게 말길을 트고, 기쁘게 글길을 열며, 새롭게 삶길을 다스리는 하루를 지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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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6. 마


  ‘마!’ 하고 누가 말하면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 “마, 됐다.”에서 쓰는 ‘마’입니다. 둘째, “하지 마.”에서 쓰는 ‘마’입니다. “마, 됐다.” 할 적에는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면, “하지 마.” 할 적에는 마음이 무겁거나 옭매입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출입금지”라 하면 딱딱하면서 힘있어 보인다고 여기는데, “들어오지 마”나 “다가오지 마”처럼 써도 딱딱하면서 힘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흡연금지”라 해야 세 보이는 말이 되지 않아요. “담배 피우지 마”라 해도 세 보이는 말이 됩니다. 또는 “담배 끊어”나 “담배 저리 가”나 “담배 치워”라 해 볼 만한데 “담배 꺼져”라 하면 더없이 세 보이는 말이 될 테지요.


  공공기관이나 공공장소에서 쓰는 말은 부러 딱딱하거나 세 보이는 말을 써야 한다고 여겨 버릇하면서 한자말에 얽매이는 분이 퍽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말로도 얼마든지 세 보이는 말을, 아니 참말로 드센 말을 헤아려서 쓸 수 있어요.


  “절대엄금”이 아니어도 됩니다. “하지 마”라 하면 됩니다. “촉수엄금”이 아니어도 되지요. “건들지 마”나 “건드리지 마”라 하면 되어요. “무단횡단 금지” 같은 알림판이 꽤 많은데요, “막 건너지 마”라든지 “그냥 건너지 마”라든지 “함부로 건너지 마”라 할 만합니다. 부드럽게 쓰고 싶다면 “막 건너지 마요”나 “그냥 건너지 말아요”나 “함부로 건너면 다쳐요”라 해 볼 만해요.


  요새는 ‘묻지마’가 한 낱말로 굳은 듯합니다. “묻지마 투자”나 “묻지마 교육”이나 “묻지마 읽기”처럼 쓸 만해요. 이런 얼거리로 ‘하지마’나 ‘보지마’나 ‘먹지마’나 ‘읽지마’나 ‘가지마’를 써 보아도 재미있고 어울립니다.


 이용금지 → 쓰지 마 / 쓰지 말도록 / 쓰지 말 것 / 안 써요 / 안 씁니다 / 쓰지 말아요 / 쓰지 맙시다

 이용중지 → 못 씀 / 못 써요 / 쓸 수 없음 / 쓸 수 없습니다 / 쓰지 않음 / 쓰지 않아요 / 못 씁니다 / 망가졌어요 / 망가졌습니다


  둘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용금지·이용중지’ 같은 말도 새롭게 손질해서 쓸 만합니다. ‘접근금지’라면 “다가오지 마”나 “다가오지 마셔요”라 할 만한데, ‘물러서라’나 ‘물러서세요’나 ‘물러섭니다’라 해도 되어요.


  ‘촬영금지’ 같은 알림말을 쓰는 곳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찍지 마”나 “찍지 말아요”나 “찍지 마세요”나 “찍으면 싫어요”나 “찍으면 싫어” 같은 말로 알맞게 손볼 수 있습니다. 때하고 곳을 살펴 다 다르게 쓸 만해요. 한국말은 틀에 매이지 않는 결이 좋고, 누구나 재미있고 새롭게 쓰면서 빛나요. 말끝하고 토씨를 살몃살몃 바꾸면서 결을 살릴 수 있으니,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이 대목을 눈여겨보면서 서로 즐거이 말길을 트도록 북돋운다면 좋겠습니다.


  모든 말은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어떤 생각을 나타내고 싶은가 하고 마음에 그리기에 말을 떠올려서 쓸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있기에 이 말을 쓴다기보다, 이러한 생각을 나타내고 싶다고 느끼니 이 자리에 걸맞을 말을 저마다 스스로 새롭게 짓는구나 싶습니다. 아이들하고 기차를 타면서 가게에 들러 주전부리를 살피는데, 빵을 담은 비닐자루에 “소시지 중량 up!”이라 적힙니다. 이 글씨를 들여다보며 생각해 보았어요. 꼭 이렇게 글씨를 담아야 했을까요? 빵을 빚어서 다루는 곳에서는 이런 말이 아니고는 알림말을 알맞게 적을 수 없었을까요?


 소시지 중량 up! → 소시지 무게 늘림! / 소시지 무게 늘렸다! / 소시지 무게 늘렸어요! → 소시지 더 많이! / 소시지 더 넉넉히! / 소시지 더 묵직!


  말끝을 살짝 바꾸면 말결이 살짝 바뀝니다. 말마디를 새로 다듬으면 말빛이 새로 살아납니다. 공공기관이나 학교나 언론사에서도 말글을 알맞으면서 바르거나 곱게 쓰면 좋겠는데, 이뿐 아니라 여느 일터나 자리에서도, 또 물건을 빚어서 파는 곳에서도 알맞으면서 바르거나 곱게 말글을 가다듬으면 훨씬 좋으리라 봅니다.


  경기 수원에 마실을 다녀오며 수원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이 버스에서 “안전을 위하여 정차한 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같은 글월을 보았습니다. 이 글월을 어린이가 잘 알아볼 만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알림글을 적어서 붙일 적에는 더 마음을 기울여서 상냥한 결을 느끼도록 하면 좋으리라 봅니다. 저라면 버스 알림글을 다음처럼 쓰겠습니다.


 안전을 위하여 정차한 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 안전하도록 차가 선 뒤에 일어나셔요 / 안전하도록 차가 선 다음 일어납시다 → 다치지 않도록 차가 서면 일어나요 → 차가 선 다음 일어나서 내려요 / 차가 선 뒤에 일어나서 내리셔요


  우리는 아직 일본 말씨를 곳곳에서 씁니다. 일제강점기는 고작 서른여섯 해였으나 이동안 물들거나 길든 말씨가 매우 깊어요. 더구나 전문 일자리에서는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씨를 써야 하는 듯 여기기까지 해요.


  곰곰이 따지면 영어나 일본말을 쓴들 그리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한테는 한국말이 있기에 한국말을 쓰면 될 텐데, 구태여 영어나 일본말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한국말을 새롭게 살리거나 지어서 쓰기 어렵다면 모르되, 우리 스스로 말결을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길을 닦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을 키우거나 가꾸는 삶이 못 될 수 있어요.


  “민폐를 끼치다”에서 ‘민폐(民弊)’란 무엇일까요? 꼭 이 낱말을 써야 할까요? 이런 한자말이 스며들기 앞서 어떤 말로 이러한 일이나 자리나 결을 나타냈을까요? 생각하고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말썽을 일으키다”나 “골칫일을 일으키다”나 “말썽거리가 되다”나 “골칫거리가 되다”라 할 만합니다. “걱정을 끼치다”나 “걱정거리가 되다”라 해도 어울립니다.


  ‘청렴결백(淸廉潔白)’이라 해야 깨끗하지 않아요. ‘깨끗하다’라 하면 되고, ‘맑다’라 할 수 있으며, ‘티없다’나 ‘티끌없다’라 할 수 있습니다. ‘맑디맑다’라 해도 되지요.


  일본을 거쳐 들어온 아리송한 말 ‘더치페이’는 ‘따로내기’나 ‘나눠내기’라 할 만하고, 밥자리에서 돈을 나누어서 낸다면 ‘도리기’라는 낱말을 살려서 쓸 만합니다.


  어느 책을 읽다가 ‘성자필쇠(盛者必衰)’라는 글월을 보았는데요, 한자를 묶음표에 넣어서 밝혀도 뜻을 모를 수 있어요. 이때에도 생각해 봅니다. “일어나면 스러진다”라 하면 좀 길어도 바로 알아볼 만합니다. “뜨고 지다”나 “뜨면 진다”나 “떴으니 진다”나 “떴다면 진다”라 해도 어울리고, “뜨면 지기 마련”처럼 살짝 늘려서 써도 좋아요. 더 헤아린다면 ‘뜨고지다’를 아예 한 낱말로 삼아도 됩니다. ‘뜨고지다’라는 새말을 지어서 쓰지 말라는 틀이란 없습니다. 앞뒤를 바꾸어 ‘지고뜨다’라는 말을 써도 재미있지요.


  말이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말이란, 생각을 담아낸 마음입니다. 말이란, 생각을 지어서 가꾸는 마음입니다. 어떤 말을 어느 자리에 알맞으면서 즐겁게 써서 생각을 나눌 적에 마음이 활짝 피어나는가를 헤아린다면, 말은 말대로 자라고 마음도 마음대로 자라리라 느껴요.


  ‘자라다’라는 말을 생각해 봐요. ‘자라다·크다’ 같은 한국말이 있으니, 한자말 ‘성장(成長)’은 꼭 안 써도 됩니다. “성장이 빠르다”가 아닌 “빨리 자란다”라 하면 됩니다. “성장 과정을 살피다”가 아닌 “자란 길을 살피다”라 하면 돼요. “고도 성장”은 “크게 자란·높이 자람”이라 하면 되겠지요.


  무럭무럭 자라라는 뜻으로 ‘자람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자람둥이·자람순이·자람돌이’ 같은 말도 어울립니다. 잘 자라도록 지킨다는 뜻으로 ‘자람지기’가 되고, ‘자람힘·자람꿈·자람놀이·자람글·자람노래’ 같은 말을 하나하나 새롭게 쓰면서, 말도 생각도 삶도 이야기도 넉넉히 자라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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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5. 님놈



  고흥에서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탑니다. 저는 짐을 도맡아 꾸리고 움직이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이 시외버스에 텔레비전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운동경기가 흐르고 광고가 섞입니다. 곁님은 저더러 버스 일꾼한테 텔레비전을 꺼 달라는 말을 여쭈라 합니다. 그렇지만 버스에 타서도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쁘니 곁님이 바로 버스 일꾼한테 텔레비전을 꺼 달라 말합니다. 버스 일꾼은 고맙게 꺼 줍니다.


  우리는 집안에 텔레비전을 안 들이고 살기에, 어디에 갈 적마다 쉽게 마주쳐야 하는 텔레비전이 꽤 성가십니다. 시외버스에서는 텔레비전을 꺼 주십사 여쭐 수 있으나 손님이 많을 적에는 이런 말을 여쭈기 어렵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손님을 헤아려 텔레비전을 켠다지만, 텔레비전을 안 보는 손님을 헤아린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여기에 어린이를 헤아린다면?


  서로 가시버시 사이로 지내는 두 사람은 사랑을 짓는 님이라고 여깁니다. 보금자리라는 곳에 사랑이 흐르도록 살림을 짓는 두 사람은 곁에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리는 길을 걸으니 둘은 서로 ‘곁님’이 되어요. 때로는 벗님이 되고, 삶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니 ‘길벗님’이나 ‘삶벗님’이 될 테지요.


  보금자리에서 서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리는 두 사람이 서로 곁님이라면, 두 곁님이 낳은 아이나 두 곁님을 낳은 어버이는 어떤 사이로 지낼까요? 한집에서 지내는 이들은 가시버시 못지않게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릴 텐데, 함께 삶을 바라보고 가꾸고 짓기를 바라는 마음이 흐르기에 ‘한집님’이나 ‘삶님’으로 어우러지지 싶습니다. 함께 살림을 지어 ‘살림님’이 되기도 할 테고요.


  힘센 우두머리가 나라를 다스리던 무렵에는 임금 한 사람만 ‘님(임금님)’이었습니다. 그무렵에는 벼슬아치를 지내는 이들이 벼슬님 구실을 하며 사람들을 억누르기 마련이었고, 여느 자리 사람들은 ‘평민·백성’ 같은 이름이었지만, 때로는 ‘종(노예)’이나 ‘천한 것(백정)’이라는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윗자리하고 아랫자리로 갈린 곳에 ‘윗님’은 있되 ‘아랫님’은 없었달 수 있어요. 그때에는 ‘윗님·아랫놈’이나 ‘윗분·아랫녀석’으로 갈렸다 할 텐데요, 밑에서 내리눌리다가 크게 성을 내며 들고일어나면 윗님이나 윗분을 어느새 ‘윗놈·윗녀석’으로 여겨 끌어내렸어요.


  생김새는 비슷한 외마디 말인데, ‘님’이 하루아침에 ‘놈’이 됩니다. 때로는 ‘남’이 되어요. 아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님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님이에요. 이와 달리 놈이라면 아끼고 싶을까요? 놈을 사랑할 마음이 생길 만할까요? 남도 비슷해요. ‘남’이 될 적에는 등을 돌리는 사이입니다. 모른 척하기도 하지만 굳이 가까이할 까닭이 없어요.


  이 땅에서 삶을 짓고 사랑을 가꾸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님’이라는 낱말을 지어서 썼을까요? ‘놈·남’처럼 생김새가 비슷한, 또는 소리가 비슷할 수 있던 낱말은 어떤 마음으로 지어서 썼을까요?


  임금님이 서슬퍼렇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무렵에 사람들이 ‘님’이란 말을 아예 못 쓰지 않았습니다. 들을 가꾸면서 들님을 말했고, 비를 반기며 비님이라 했습니다.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님을 섬겼고, 멧골에서는 멧님을 모셨어요. 해를 보며 해님인 줄 알았고, 온누리를 헤아리며 별님을 살폈습니다.


  집집마다 나물하고 밥하면서 꽃님이며 풀님이며 나무님을 가까이했습니다. 집에는 집님이라고 하는 집지기를 아꼈어요. 철 따라 찾아오는 꾀꼬리나 제비를 보면서 이들 새는 그냥 철새가 아닌 ‘철님’으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이들 새(새님)가 찾아오거나 떠나는 철을 살펴서 해마다 봄가을을 어떻게 건사하고 여름겨울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알았겠지요.


  우리 숨이 되는 바람을 마시니 바람님입니다. 한여름에 시원스레 그늘이 되니 구름님이요, 겨우내 내린 눈으로 들이 새봄에 한결 푸른 줄 알기에 눈님이라 했으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이 사귀는 놀이동무는 그냥 동무가 아닌 동무님이에요. 아이랑 어른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웃은 언제나 이웃님입니다. 나그네나 떠돌이 같은 길손도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나그네님이나 떠돌이님이나 길손님, 또는 ‘길님’이라 할 만해요.


  하늘에 계신, 또는 하늘 그대로 바라보면서 하느님(하늘님·한울님)이 됩니다. 땅에 계신, 또는 땅 그대로 마주하면서 땅님(따님)이 되어요. 마음으로 만나는 사이라 마음님이고, 사랑으로 사귀는 사이라 사랑님입니다. 노래를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불러서 노래님이고, 춤을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추어서 춤님입니다. 요즈음에는 글을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쓰는 글님이 있고, 사진을 놓고서 사진님, 책을 놓고서 책님, 만화를 놓고서 만화님, 연극을 놓고서 연극님도 있어요.


  먼길을 함께 나서는 벗이라면 마실벗처럼 수수하게 이를 수 있고, ‘마실님’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이야기님’이 있어요. 시골에 사는 이웃이라면 시골님이고, 서울에 사는 이웃이라면 서울님이에요. 우리는 한때 ‘시골뜨기’처럼 시골사람을 깎아내렸지만, 이와 맞서 ‘서울뜨기’라고도 하는데, ‘뜨기’보다는 ‘님’으로 서로 만난다면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너른 숲을 놓고 한자말로 ‘대자연’이라 하는데, 저는 ‘숲님’이라는 이름을 곧잘 씁니다. 숲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숲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가 숲을 살뜰히 사랑한다면 사람으로서 ‘사람님’이 되리라 느껴요. 사람답지 못한 짓을 일삼으면 ‘사람놈’으로 굴러떨어질 테고요.


  문득 생각합니다. 굴러떨어지지 말라고,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을 가라는 뜻에서 ‘님·놈’ 두 마디에 ‘남’까지 늘 맞물리지 싶습니다. “고마운 님”이 될 수 있고, “고맙잖은 놈”이나 “고맙잖은 남”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님”하고 “나쁜 놈”은 고작 한 마디에서 갈립니다.


  늘 쓰는 말에서 새롭게 길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요리사나 셰프라고 하는 분을 보면서 ‘밥님’이나 ‘밥살림님’처럼 님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고 싶습니다. 옷을 곱게 지을 줄 아는 분을 보면 ‘옷님’이나 ‘옷살림님’처럼 이름을 붙이고 싶어요. 신나게 놀 줄 아는 아이나 어른한테는 ‘놀이님’이라고, 기쁘게 일할 줄 아는 모든 사람한테는 ‘일님’이라 하고 싶고요.


  마을에 마을님이 있습니다. 나라에 나라님이 있어요. 고을에는 고을님이고, 누리(온누리)에는 누리님이 있습니다. 아, ‘누리님’은 누리그물(인터넷)에서도 쓸 만해요. ‘누리꾼’처럼 ‘-꾼’을 붙이는 이름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누리그물에서 서로 아끼며 돌볼 줄 아는 따사롭거나 살가운 이웃이라면 ‘누리님’이 걸맞아요.


  〈전라도닷컴〉처럼 다달이 나오는 잡지를 사랑하는 이웃님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수수하게 잡지님이나 책님이 있을 테고, 다달이 나오는 책을 ‘달책’이라 한다면 ‘달책님’이라 할 만한데, 이보다는 다달이 벗으로 만난다는 뜻을 살려 ‘달벗님’이라 해도 어울리지 싶습니다.


  어릴 적에는 님이라는 말은 함부로 못 쓰도록 둘레 어른한테 눌려 지냈습니다. 지난날 어른들은 님은 높은 어른한테만 붙인다고, 아이들이 멋모르고 써서는 안 된다고 여겼어요. 이제는 옛날이 아니요, 열린 누리에, 트인 터전이라면, 님을 홀가분하게 풀어놓아야지 싶습니다. 서로 ‘열린님’이 되면 좋겠어요. ‘맑은님’이나 ‘고운님’이나 ‘참한님·참님’이나 ‘밝은님’이나 ‘착한님’이 되어도 좋아요. ‘좋은님’도 될 테고, ‘기쁜님’이나 ‘웃음님’도 될 테고요.


  아이들은 ‘어린님’입니다. 푸름이(청소년)는 ‘푸른님’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어른답게 ‘어른님’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비는 마음으로 ‘비손님’이라는 꿈을 꿉니다. 함께 꿈을 짓는 ‘꿈님’이 되고, 같이 슬기로운 넋을 나누는 ‘슬기님’이나 ‘넋님’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님이 될 만할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으로 부르면서 이웃이나 동무가 될까요? 바보놈이나 멍청놈이 아닌, 걱정놈이나 근심놈이 아닌, 똑똑님·똑님이나 바른님으로, 산들님(산들바람님)·한들님(한들바람님)으로, 상냥님·넉넉님으로 하루를 지어 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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