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이갑철 지음 / 류가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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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다
 [찾아 읽는 사진책 76] 이갑철, 《가을에》(류가헌,2011)

 


 이 겨울에 대청마루로 스미는 볕살을 누립니다. 우리 집 네 살 아이는 대청마루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쿵쿵 발을 구릅니다. 이리 달리고 저리 내닫습니다. 나무널로 지은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좋을까요. 맨발로 쿵쿵 달릴 때마다 발바닥부터 머리카락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신날까요.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린 날을 돌이킵니다. 인천에서 충남 당진으로 내 어버이를 따라 나들이를 하노라면,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곧장 해를 바라보는 대청마루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운 대청마루입니다. 여름에 발바닥으로 느끼는 마루결이랑 겨울에 발바닥으로 받아들이는 마루결이 사뭇 달라요. 겨울날 쉬를 누러 대청마루에 발을 디디면, 또 신을 꿰려고 대청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저 밑 신발을 찾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쉬를 누고 돌아와 대청마루에 손을 디디면, 이 차가운 기운이 얼마나 파르르 떨리면서 올라오던지요. 얇은 창호종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또 얼마나 차가운데, 방바닥은 뜨끈뜨끈한 불이 올라오던지요.

 

 두 아이와 옆지기랑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돌아봅니다. 이런 시골집에서 살아가리라 생각하지 못했을는지, 꿈꾼 적이 없었는지 돌아봅니다. 어린 날 살던 인천 오래된 아파트는 마루가 나무바닥이었습니다. 방은 시멘트바닥이었으나, 마루는 나무였어요. 5층 작은 아파트는 연탄을 때도록 되었는데, 연탄 한 장 집어넣어 바닥을 덥히더라도 워낙 추워 마루에 난로를 피우고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어요. 우리 집은 툇마루 바깥창이 없었기에 방에 달린 창문에는 언제나 성에가 끼고 얼음이 두껍게 맺혔습니다. 아침마다 얼음을 떼내고 걸레질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렇게 안 하면 창문에 맺힌 얼음이 툭툭 떨어지거나 얼음 녹는 물이 벽을 타고 줄줄 흘렀어요.

 

 아버지 어머니 태어난 시골집으로 겨울 나들이를 가서 스무 날쯤 지내면, 유리 아닌 종이로 댄 창문에 성에가 끼거나 얼음이 얼 일이란 없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은 나무로 불을 때고, 어디를 걷든 달리든 놀든 흙을 밟습니다. 내 어릴 적 내 어버이 시골집은 온통 흙누리였어요. 흙이랑 물이랑 풀이랑 바람이랑 햇살이 골고루 하나로 얼크러졌어요.

 

 인천을 떠나 두 해째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처음 한 해를 보낸 충청북도 멧골자락에서든 올 새 한 해를 보내는 전라남도 시골자락에서든, 마당이나 고샅이나 모두 시멘트길입니다. 애써 도시를 벗어나 시골살이를 누리지만, 흙으로 된 땅을 밟기 만만하지 않아요. 집이며 벽이며 바닥이며 시멘트입니다. 흙이랑 나무로 따로 집을 짓지 않는다면, 하루 내내 시멘트에 둘러싸인 채 시멘트내음을 맡아야 합니다.

 

 흙을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쇠붙이나 대리석으로 덮어야 문명이 될까요. 흙을 밟지 않아야 세계시민이나 문화시민이 되나요. 나는 ‘시민’이 아니라 ‘군민’이고 ‘면민’이자 ‘마을사람’인데, 조그마한 시골마을 사람으로서 흙을 누리는 길은 꽁꽁 틀어막혀야 하나요.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은 흙땅입니다. 어릴 적 으레 갯벌에 놀러다니고, 흙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동무들하고 놀았습니다. 흙이 있어야 땅바닥에 금을 긋고 놉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된 땅바닥에서 놀자면 학교에서 분필 몇 자루 훔쳐야 합니다. 또는 바닥에 대고 그을 때 하얗게 묻어나는 돌멩이를 어디에선가 주워야 합니다.

 

 학교 운동장 흙땅에서 공차기를 하고 공놀이를 하며 즐거웠습니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조금 까질 뿐, 때로는 피가 살짝 날 뿐, 어디 뼈가 부러지거나 으스러지지 않아요. 사내아이는 누구나 얼굴 몇 군데 흙땅에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며 긁힌 자국이 있습니다. 긁혀 피가 나더라도 모두들 똑같으니 옷섶으로 슥슥 문지르고 끝납니다. 무릎이 까지면 살짝 이맛살 찡그리고 절뚝이다가 어느새 아까와 똑같이 내달리며 놉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연탄공장 바로 곁, 철길하고 이웃한 국민학교에서 맞이한 운동회는 언제나 두근두근 설레는 놀이마당입니다. 운동회를 앞두고 봄부터 가을까지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두어 시간 남짓 해야 했지만, 운동회 하루 놀 생각으로 이 고단한 ‘훈련 같은 연습’을 잘 치렀습니다. 운동회를 한 달 앞두면 연습은 네 시간으로 늘어났고, 각목을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교사들 앞에서 움찔거리면서도 운동장 흙땅에서 온몸이 누렇게 바뀌어도 잘만 뒹굴었어요. 날마다 체육복을 빨아도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하느라 체육복은 너덜너덜 흙투성이가 되고, 연습을 마치면 이 너덜너덜 흙투성이 체육복차림으로 또 몇 시간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어요.

 

 이갑철 님 사진책 《가을에》(류가헌,201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책 《가을에》에 담긴 모습은 시골마을 운동회라 하는데, 시골마을 같지 않은 시골마을 운동회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연대를 살그머니 거슬러오르면, 시골마을 아닌 여느 도시에서도 이와 얼추 비슷한 모습을 쉬 보았으니까요. 1970년대이든 1960년대이든 1950년대이든, 큰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국민학교가 아니라면 으레 작은 동산 한둘쯤 옆에 낀 학교였고, 학교 둘레로 풀밭이나 논밭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여느 도시라면 멧꼭대기까지 빼곡하게 들어차는 다닥다닥 작은 집이 있었어요. 어르신들도 손주 운동회 뛰는 모습을 구경 나오고, 조촐히 동네잔치를 이루었어요.

 

 그러고 보면, 《가을에》는 시골마을 운동회를 담는데, 막상 ‘여느 도시 작은 국민학교 작은 운동회’이든 ‘커다란 도시 큰 국민학교 큼지막한 운동회’이든 알뜰살뜰 사진으로 남겨 이야기자락 하나 빚은 일이 거의 없구나 싶습니다. 이 나라 자그마한 분교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분은 있으나, 이 나라 여느 도시 여느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이는 없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 운동회를 두고두고 다시 찾아가며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모두들 멀디먼 옛날 옛적 이야기만 헤아릴 뿐, 바로 오늘 바로 이곳 바로 우리 아이들 요즈막 웃음꽃과 눈물바람이 깃든 운동회 파란하늘 흙땅을 살피는 사진이야기 피어나기란 너무 벅찬 노릇이구나 싶어요.

 

 사진책 《가을에》는 사랑스럽습니다.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는 사람들 싱그러운 꿈을 느낄 만합니다. 누군가 “겨울에”나 “봄에”나 “여름에”를 뒤이어 빚을 수 있다면, 누군가 저마다 다 다른 자리 다 다른 이야기 서린 다 다른 “가을에”를 예쁘게 바라보며 얼싸안을 수 있다면, 산들바람 부는 가을빛과 눈바람 부는 겨울빛과 꽃바람 부는 봄빛과 햇살바람 부는 여름빛을 곱다시 무르녹일 수 있으면, 참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 얼굴이 흙을 닮아 흙빛일 때에 그지없이 사랑스럽습니다. (4344.12.21.물.ㅎㄲㅅㄱ)


― 가을에 (이갑철 사진,류가헌 펴냄,2011.10.31./4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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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 - 채승우의 사진교실
채승우 지음 / 넥서스BOOKS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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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뜯거나 잘라서 읽으면 안 즐겁다
 [찾아 읽는 사진책 74] 채승우,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넥서스BOOKS,2004)

 


 〈조선일보〉 사진기자인 채승우 님이 낸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넥서스BOOKS,2004)을 되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인천에서 충청북도 충주로 옮긴 책짐을 겨우 다 풀었다 싶을 무렵 다시 책짐을 꾸려 전라남도 고흥으로 옮겼습니다. 살림짐과 책짐을 하나하나 끌르고 갈무리한 지 석 달쯤 되는 오늘 낮, 여러 책상자와 책덩이를 끌르다가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이 보여 다시 한 번 꺼내어 읽습니다.

 

 책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을 처음 장만하여 읽던 때하고 오늘 다시 들출 때하고 어떻게 바라보며 받아들이는가를 되짚습니다. 2004년에는, 2007년에는, 2011년에는 이 책이 나한테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돌아봅니다.

 

 책을 한창 읽다가 빈 자리에 몇 마디 끄적입니다. ‘시를 줄·연에 따라 나누거나 표현법을 살피며 읽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해서는 시를 즐길 수 없습니다. 이래서는 시를 즐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엊저녁, 동시를 쓰는 어느 분이 낸 ‘동시 즐겁게 읽기 책’을 읽고 나서도 이와 거의 같은 느낌으로 글을 한 줄 적었습니다. 시이든 사진이든 읽는 사람 마음이지만, 읽는 사람 마음대로 자르거나 나누거나 가르다 보면, 정작 ‘읽기’부터 참다이 못할 뿐 아니라, ‘즐기기’는 아예 잊기 일쑤요, ‘사랑하기’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지는구나 싶어요.

 

 “책에 사용할 사진을 찍기 위해,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한동안 무척 즐거웠습니다. 동네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임을 다시 알았고, 도로 분리대에 계절 따라 다른 꽃이 핀다는 것도 새로 알았습니다(머리말).”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내 보금자리가 깃든 작은 동네에서 작은 사람이 되어 작은 발걸음으로 조금 짬을 내어 거닐다 보면 재미나게 사진을 즐기곤 합니다. 인도를 가거나 필리핀을 가거나 몽골을 가야만 그럴싸한 사진을 빚지 않아요. 나 사는 동네에서 재미난 사진을 얻고, 나 사는 작은 집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일구어요.

 

 곧, 사진기자 채승우 님은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을 내면서 막상 채승우 님 스스로 ‘재미나게 사진을 누리면서 즐기기’를 못했다고 밝히는 셈입니다. 이제껏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정작 ‘작은 곳을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아끼는 길’을 찬찬히 헤아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쁘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떻게 ‘사진 찍기’를 해내었는지 보는 일이 즐겁습니다(14쪽).”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기자 채승우 님은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에서 사진을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말하지만, 이 사진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뭔가 내가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사진을 찍거나 뭔가 조금 더 잘 보여질 만한 사진을 찍는 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진찍기법’과 저런 ‘사진찍기법’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다르게 사진을 찍거나 누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면서, 가만히 보면 ‘이런저런 사진찍기법’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휴일날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 담아 오는 깔끔한 풍경사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으로 찾아가 본 풍경사진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요? 그보다는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사진이 좋은 사진입니다. 내 생활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나의 가장 치열한 생활 속에 좋은 사진거리가 있습니다(110쪽).” 같은 생각을 알뜰살뜰 여민다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겉치레로 내보이는 사진이 아니라, 내 깊은 사랑을 나누는 사진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에는 안쓰럽다 싶도록 겉멋을 부리는 사진이 적잖이 실립니다. 그러나, 퍽 재미나다 싶은 애틋한 사진 또한 제법 실립니다. 이쪽으로 엉뚱하게 기울어지다가, 즐거운 사진길로 돌아오다가, 이런저런 길헤맴을 되풀이해요.

 

 “느린 셔터일 때,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찍는 걸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201쪽).” 하는 말처럼, 채승우 님 스스로 느린 셔터빠르기로 찍으며 흔들린 사진을 몇 보여줍니다. 일부러 흔들어 찍은 사진이 있고, 애써 안 흔들리도록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은 ‘즐거운 사진길’을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 ‘사진기 다루는 솜씨’ 쪽에 너무 기울어졌다고 하겠어요. ‘사진을 바라보는 마음결’로는 좀처럼 손을 뻗지 못합니다.

 

 그래서, “느낌을 만들어 내는 주된 선들이 있습니다. 그 선들을 점선으로 표시해 봤습니다. 사진은 이런 선들을 화면의 프레임 안에 넣을 것인지, 뺄 것인지, 어디에 넣을 것인지 결정하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25쪽).” 같은 글을 읽으면서 슬픕니다. 사진은 무엇을 넣거나 빼자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저 내 이야기를 담습니다. 무엇을 더 넣은들 무엇을 더 뺀들 사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는 군더더기가 있건 군살이 빠졌든 똑같이 내 이야기예요. 도마질을 하다가 손끝을 베건 도마질을 느릿느릿 하건 언제나 똑같이 내 밥차림이에요. 젓가락질을 잘 해야 밥을 잘 먹지 않아요. 젓가락질이 참 서툴어도 밥은 잘 먹습니다.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고, 찍개로 먹을 수 있어요. 그냥 손으로 먹어도 됩니다.

 

 밥상 앞에서 밥을 먹는 몸가짐과 마음씨에 사랑을 담습니다. 사진기를 쥔 손으로 어떤 이야기에 어떤 내 사랑을 담느냐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이리하여, “좋은 사진은 세상맛을 충분히 본 사람들이 잘 찍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늦게 시작할 수 있고, 늦게 이루어지는 분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181쪽).” 같은 말은 참 터무니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자면, 동네 어린이한테 사진기를 쥐어 주면서 사진놀이를 할 까닭이 없어요. 로버트 프랭크가 뭐 얼마나 잘났기에 미국사람 사진을 내놓을 수 있었나요. 스티글리츠는 얼마나 나이를 먹은 다음 사진기를 쥐었기에 ‘사람들한테 알려진 사진을 그 나이’에 찍었을까요.

 

 제발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연극이든 춤이든 무엇이든, 내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이야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진장비 때문에 사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렌즈나 필름이나 컴퓨터 때문에 사진이 바뀌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만지는 내 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사진기를 움켜쥐며 바라보는 내 눈길에 따라 사진이 바뀝니다.

 

 〈조선일보〉 기자 아무개와 〈경향신문〉 기자 아무개가 한 자리에 있어도, 둘은 사진을 달리 찍고 글을 달리 씁니다. 〈조선일보〉 기자 저무개랑 〈한국일보〉 기자 저무개가 나란히 회사를 박차고 나와 취재를 하러 떠나더라도 서로 다른 곳에서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이야기를 신문에 싣습니다. 어느 신문사 어느 기자가 옳거나 그르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 다른 사람에 따라 다 다른 사랑을 다 다른 이야기꽃으로 피울 뿐입니다.

 

 살아가는 결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에 따라 사진이 바뀝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을 받아들이는 몸가짐에 따라 사진이 거듭납니다.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은 사진찍기를 즐기려 하는 이들한테 이모저모 도움이 될 만한 ‘사진찍기법’을 여러모로 손쉽게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사진을 사랑하며 좋아하고 아끼는 길은 한 가지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사진이론이나 사진실기나 사진비평이나 사진강의나 사진해설에서 홀가분해지면 좋겠습니다. 사진삶과 사진사랑과 사진꿈을 담는 ‘사진 즐김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고맙겠습니다. (4344.12.16.쇠.ㅎㄲㅅㄱ)


― 사진이 즐거워지는 사진책 (채승우 사진·글,넥서스BOOKS 펴냄,2004.9.20./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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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 Camera Work 16
강운구 사진 / 한미사진미술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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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지 않을 사진이란
 [찾아 읽는 사진책 72] 강운구·김기찬·이갑철,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한미사진미술관,2011)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반화와 빈번한 국제교류전은 한국사진의 패러다임을 다양하게 변모시켰고, 30∼40대 작가들로 하여금 사진의 세계적 추세들을 재빨리 수용케 했다. 특히 영화적 연출 혹은 설치작업에 기반을 둔 사진작업은 그들의 지속적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작가들이 디지털 사진의 열기에 동참하며 창조적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그 결과 미술과 사진의 경계는 사라지고, 조작된 허구와 사진의 실재론은 그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졌다(머리말).”는 이야기로 머리말을 여는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한미사진미술관,2011)이라는 얇은 사진책을 읽습니다. 머리말은 “사진예술의 세계적 추세에 합류하는 한국사진의 열기 속에서 흑백 은염사진, 다큐멘터리에 기반을 둔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위상은 양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사진적 성과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머리말).”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머리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2010년대로 넘어서는 한국땅 사진은 하나같이 ‘설치예술’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출사진’이나 ‘설치사진’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아요. ‘연출예술’이나 ‘설치예술’이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오늘날 한국사진이라는 이름이 붙는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사진기를 쓰고 사진으로 뽑는다 해서 모두 사진이라 할 만한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연필을 손에 쥐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연필을 손에 쥐어 쓰는 글은 말 그대로 글입니다. 이 글은 제품설명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사진비평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사진을 빛내는 사진말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연필을 손에 쥐었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내가 연필을 손에 쥐어 그리는 그름은 말 그대로 그림입니다. 가벼운 밑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신나는 만화가 될 수 있습니다. 살가운 얼굴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투박하지만,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가 그리듯 연필 하나로 이루는 무지개빛 그림이 될 수 있어요.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디수많은 온누리 사진쟁이는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말 그대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있고, 사진기를 빌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으며, 사진기를 써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필을 손에 들고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사진을 빚듯, 사진기를 손에 들고는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며 글도 씁니다. 사진 한 장은 글이 되기도 합니다.

 

 조그마한 사진책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을 읽습니다. 강운구, 김기찬, 이갑철 세 분 사진을 몇 장씩 그러모은 자그마한 사진책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에 깃든 사진은 앞으로 사라지지 않을 모습이 될까요. 이 사진책에 담긴 사진은 앞으로 잊히지 않을 이야기가 될까요.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가 되면 값지다 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사라지는 이야기가 되면 값없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사라진다 할 때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라지는 이야기라 할까요. 사라지지 않는다 할 때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안 사라지는 이야기라 하나요.

 

 평론가가 잊으면 사라지나요. 대중이나 군중이 잊으면 사라지나요. 사진역사에 아로새기지 못하고, 사진문화를 들먹일 때에 나타나지 못하면 사라지나요.

 

 갤러리나 전시관이나 박물관에 걸리면 사라지지 않을 사진이라 할까 모르겠습니다. 시골마을 작은 집 작은 방에 걸리면 사라지는 사진이라 할까 모르겠습니다.

 

 필름으로 찍었든 디지털로 찍었든, 꼭 한 장만 종이로 뽑아 방문 위쪽에 붙인 ‘내 아이 돌 사진’은 처음부터 드러나지 못하거나 알려지지 못했기에 사진이라 하기 어려운지 궁금합니다. 다큐멘터리라 해서 필름으로 찍으란 법이 없을 뿐 아니라, 흑백필름으로 쓰라는 법이 없습니다. 패션사진이라 해서 값비싼 중형디지털사진기를 써야 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그림은 그예 그림입니다. 글은 그대로 글입니다. 백만 사람이 읽어야 잊히지 않는 글이 아닙니다. 십만 사람이 보아야 잊히지 않는 그림이 아니에요. 만도 천도 아닌 백 사람이 보았대서, 아니 열이나 한두 사람이 보았대서 잊힐 만한 사진이지 않아요.

 

 가슴으로 읽히기에 오래도록 건사하는 글입니다. 300권 가까스로 찍어 50권 겨우 팔았다지만, 이 가운데 꼭 열 사람 가슴에 아로새겼다면, 이만 한 글이라 하더라도 사람들 가슴에 언제까지나 곱게 이어집니다.

 

 강운구, 김기찬, 이갑철 세 분이 빚은 사진으로 엮은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은 사라진 모습을 담지 않습니다. 남은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모습이 남고 이야기가 사라졌을는지 모릅니다. 모습도 이야기도 자취를 감추었는지 모릅니다. 모습이랑 이야기랑 싱그러이 살아숨쉴는지 몰라요.

 

 어느 쪽이든 좋아요. 이 사진을 두루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흐뭇합니다. 이 사진을 오래 아끼는 사람들이 있으면 기쁩니다. 사진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찍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4344.12.13.불.ㅎㄲㅅㄱ)


― 사라진 그러나 남아 있는 (강운구·김기찬·이갑철 사진,한미사진미술관 펴냄,2011.7.28./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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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헌터
이반 로딕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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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예쁜 길
 [찾아 읽는 사진책 71] 이반 로딕, 《페이스 헌터face hunter》(윌북,2011)

 


 사진을 찍는 길이란 내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글을 쓰는 길이란 내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길도, 노래를 부르는 길도, 연극을 하는 길도, 하나같이 내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면서 일구는 길 또한 내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랑스러운 짝꿍을 만나 아이들을 낳고 함께 살아가는 길 또한 내가 살아가는 길이에요. 밥을 차리는 매무새라든지 집안을 쓸고닦는 일 또한 내가 살아가는 길이에요.

 

 읽을 만하다 싶은 책 하나를 살피는 몸짓이든, 책 하나를 찾아서 손에 쥐어 넘기는 몸가짐이든, 언제나 내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을 하고, 살아가며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합니다. 내 모든 모습은 내가 태어나서 이제껏 살아온 발자국입니다.

 

 내가 무엇을 배운다 할 때에도 내가 여태 살아온 흐름에 맞추어 배웁니다. 내가 살아온 발자국을 거슬로 배우지 못합니다. 새롭게 배운다거나 새삼스레 거듭나고 싶다면, 내가 살아온 길을 고쳐야 합니다. 내 삶자락을 새롭게 고칠 때에 나는 새로운 사진결 글결 그림결 노래결을 피웁니다. 내 삶자락을 새롭게 고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넋이나 꿈을 건사하지 못합니다.

 

 지식을 쌓는대서 달라지는 삶이 아닙니다. 내 온몸과 온마음을 바쳐서 삶을 뜯어고칠 때에 비로소 달라지는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다 하는 꿈이 없으면서 삶이 달라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 꿈을 이루고 싶다 하는 뜻이 없으면서 삶이 아름다울 수 없어요.

 

 이반 로딕 님 사진책 《페이스 헌터face hunter》(윌북,2011)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이반 로딕 님은, ‘길거리 멋쟁이’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반 로딕 님은 ‘길거리 멋쟁이’를 사진으로 찍을 뿐이지만,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은 저마다 달리 느껴 받아들입니다. 누군가는 패션사진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군가는 얼굴(초상)사진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군가는 여행사진으로 받아들일 만하고, 누군가는 도시에서 멋을 내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엮는다고 받아들일 만합니다. 그러니까, 《페이스 헌터face hunter》에 담긴 모습은 사진입니다. 패션이나 작품이나 예술이나 상업이나 다큐가 아닌 사진입니다.

 

 “나는 패션잡지 편집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 재미없는 직업모델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지구를 반 바퀴씩 날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만약 나처럼 일한다면 훨씬 쉬울 텐데 말이다. 훌륭한 도시로 여행을 가서 그 동네에 사는 아름다운 멋쟁이를 찾아낸 다음 그녀를 놀이터로 데리고 가서 아이들에겐 사탕을 주면서 저리 가라고 하고 미끄럼틀을 타고 논다. 그런 다음 셔터를 누르면 된다(172쪽).”는 말을 헤아립니다. 이반 로딕 님은 길거리 멋쟁이를 사진으로 담을 테니, 이 사진은 아무래도 패션잡지에 실릴 만하겠지요. 아무래도 패션잡지를 자주 들추고, 패션잡지 편집자를 자주 만날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쓰면서 ‘재미없는 직업모델’을 찍는 이는 패션사진가만이 아니에요. 다큐사진을 하든 얼굴사진을 하든 무슨 사진을 하든, 웬만한 사진쟁이는 으레 틀에 박힌 사진찍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운 삶을 느끼지 못합니다. 곁에서 언제나 어깨동무할 사랑스러운 벗을 깨닫지 못합니다. 꿈을 함께 나누고 사랑을 나란히 즐길 이웃과 동무를 좀처럼 알아채지 못해요. 인도·티벳·네팔·몽골로 가야 비로소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나라로 찾아가 이러한 나라 아이들 웃는 모습을 담아야 다큐사진이지 않습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야만 전쟁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미국으로 가야만 현대사진을 배우지 않습니다. 유럽으로 찾아가야만 예술사진을 느끼지 않아요.

 

 “때로는 한 도시에서 5시간을 헤매고도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할 때가 있다. 정말 놀라운 걸 보지 못했을 때이다. 마침내 찍을 사람을 찾았을 때 나는 사진의 구도를 잡으려고 한다. 보통 주변을 조금 돌아보면서 적당한 배경을 찾는 것이다. 말하자면 즉흥적인 연출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256쪽).”는 말을 돌아봅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은 내 마음밭에서 싹틉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을 느끼며 알아채는 결은 내 가슴속에서 샘솟습니다. 나 스스로 놀랍도록 아름다이 살아가는 나날일 때에야 비로소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어여삐 꾸리는 삶일 때에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서 어여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사진기로 담을 모든 빛줄기는 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려요.

 

 “상업적인 사람들이 하도 거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바람에 21세기에는 더 이상 사진에서 무엇이 진정한 포즈인지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것만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이 두 사람에게 ‘하트를 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278쪽).”는 말을 생각합니다. 참다운 사진은 참다운 삶에서 비롯합니다. 착한 사진은 착한 삶에서 태어납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아름다운 삶에서 스며나옵니다. 사진을 찍는 한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나 스스로 어떤 삶길을 걸어가려 하는가부터 짚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 어떤 꿈을 꾸면서 어떤 사람들하고 어떤 사랑을 나누는 삶을 일구려 하는가부터 살펴야 해요. 삶길을 튼튼하고 씩씩하게 붙잡은 다음에 사진길을 튼튼하고 씩씩하게 붙잡습니다. 삶길을 이루는 사랑길을 어여삐 보살피거나 돌볼 줄 안 다음에 사진길을 이루는 손길을 어여삐 보살피거나 돌볼 수 있어요.

 

 “수많은 스트리트 패션 사진작가들이 자석에 끌리듯 브랜드를 좇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슨 브랜드를 입고 있어요?’라고 묻는다.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난 쇼핑 안내서를 쓰는 게 아니란 말이다(18쪽).”는 말이 좋습니다. 인도에서 찍든 티벳에서 찍든 네팔에서 찍든 몽골에서 찍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찍든 인천에서 찍든 강릉에서 찍든 영월에서 찍든 고흥에서 찍든 여수에서 찍든 대단하지 않아요. 대통령을 찍거나 군수나 시장을 찍는대서 보잘것없지 않습니다. 내 어버이를 찍든 내 아이를 찍든 하잘것없지 않아요. ‘누구를 찍었나’에 앞서 ‘사진을 찍었나’를 살피면 됩니다. ‘어떻게 찍었나’에 앞서 ‘어떤 삶을 어떻게 느끼며 찍었나’를 헤아리면 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나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느끼면 넉넉합니다.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하고 얼크러지면서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사진을 담으면 즐겁습니다.

 

 사진을 찍는 길은 내 꿈을 살아내는 길입니다. 사진을 찍는 예쁜 길은 내 꿈을 살아내는 예쁜 길입니다.

 

 나한테 빛나는 사랑을 알아차려 주셔요. 나한테 값진 꿈을 붙잡아 주셔요. 나한테 소담스러운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아 주셔요. 사진을 이루는 싹은 내가 꾸리는 오늘 하루 조그마한 삶을 밑거름 삼아 돋습니다. (4344.12.13.불.ㅎㄲㅅㄱ)

 

― 페이스 헌터face hunter (이반 로딕 글·사진,박상미 옮김,윌북 펴냄,2011.6.15./1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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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12-13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표지부터 <사토리얼리스트>랑 매우 비슷하네요. 번역자도 같고요. 소개글 찾아 읽어보니 사토리얼리스트의 작가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라네요.
남이 하지 않는 방법이더라도 자기 뜻을 소신있기 펼치는 사람이 귀하지요. 그런 뜻을 알아볼 수 있는 눈들을 그래도 아직 여기 저기 많이 살아있다고 믿어요, 역시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요.
작가는 자기 뜻을 사진으로 나타내고 저는 그의 작품을 보며 이 사람은 이 사진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헤아리고. 저에게 사진책을 보는 재미는 그런데 있는 것 같아요.

숲노래 2011-12-13 08:11   좋아요 0 | URL
사진을 자연스럽게 잘 찍었어요.
사토리얼리스트하고 거의 비슷하지만
퍽 달라요.
사토리얼리스트보다 이 책이 한결 낫구나 싶어요.

다만, 이 책이나 저 책이나 `번역`을 안 하다 보니...
`사토어쩌구`이든 `페이스어쩌구`이든
한국말로 번역을 해야지요 -_-;;;;

사진을 좀 많이 좋아하면서 사진쟁이로 한길을 걸어가려 하는 사람이라면
찬찬히 돌아볼 만하다고 느끼는 책입니다~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 워홀에서 히틀러까지, 688명이 말한 사진
전민조 지음 / 포토넷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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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 모든 삶을 말해 줍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64] 전민조,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포토넷,2011)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야기를 빚습니다. 네 이야기나 남 이야기 아닌 내 이야기를 빚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얼굴을 찍을 수 있을 테지만,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으레 내 모습 아닌 네 모습이나 남 모습을 찍습니다. 그러나 네 모습이나 남 모습을 찍는 사진쟁이는 언제나 내 이야기를 빚습니다.

 네 모습이나 남 모습을 찍는 사진이라지만, 언제나 내가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내가 느끼는 모습이요, 내가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누가 나한테 사랑해 달라 바라기 때문에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사랑이 샘솟기에 찍는 사진입니다. 누가 나한테 사랑을 베풀었기에 고스란히 사진으로 돌려주지 않습니다. 오직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쓰고 엮은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포토넷,2011)는 모두 육백여든여덟 사람이 사진을 놓고 읊은 말마디를 그러모읍니다. 육백여든여섯 가운데에는 사진쟁이가 있고, 그림쟁이가 있으며, 영화쟁이가 있습니다. 사진하고 동떨어진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며, 회사를 꾸리는 사장이 있고, 모델이나 글쟁이가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든,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일구는 이야기를 저마다 다 다른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사진 작업을 하는 이유는 나 자신과 주변 세상에 대해서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나오미 해리스/34쪽).”는 말처럼, 사진쟁이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내가 나누고픈 이야기를 스스로 빚고, 내가 배우고픈 이야기를 기쁘게 배웁니다.

 “사진의 주제는 사진보다 더욱 중요하다(다이안 아버스/49쪽).”는 말마따나, 무엇을 찍느냐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사진이냐 아니냐, 사진문화냐 아니냐, 사진예술이냐 아니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비평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역사에 남아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내가 무엇을 왜 찍느냐 하는 대목을 살필 노릇입니다.

 “대부분의 전쟁 사진가는 전쟁을 즐기고 있다(도널드 맥콜린/66쪽).”는 말 그대로, 전쟁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은 전쟁을 즐길밖에 없습니다. 알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알몸을 즐깁니다. 패션사진을 하는 사람은 패션을 즐깁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사람은 다큐멘터리 주제를 즐깁니다.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날을 즐깁니다.

 “일상의 순간들이 바로 진실의 순간이다(레이몽 르파르동/82쪽).”는 말대로, 어느 하루이고 나한테 아름답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내가 누리는 삶이 참다이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맞이하는 나날이 나한테 가장 기쁘며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빛나는 내 삶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가에게는 비밀이 있다. 너무 따지지도, 너무 집착하지도 않고서 단지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다(마릴린 리타 실버스톤/125쪽).”는 말을 돌이킵니다. 내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기에 내 이야기를 내 결대로 보듬습니다. 내 걸음을 내 다리힘대로 걷습니다. 내 꿈을 내 마음밭대로 일굽니다.

 “초상 사진은 모델을 보여주어야지, 사진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매리 앨런 마크/138쪽).”는 말을 곱씹습니다. 얼굴을 찍는 사진은 얼굴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골목길을 찍는 사진은 골목길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지리산을 찍는 사진은 지리산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대서 사진이지 않습니다. 훌륭한 재주를 선보인대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빼어난 글솜씨로 문학이 태어나지 않거든요. 훌륭한 붓질로 아름다운 그림이 태어나지 않아요. 값진 사진기나 사진장비는 덧없습니다.

 “사진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어야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기 때문이다(보리스 미하일로프/163쪽).”는 말을 가만히 짚습니다. 스스로 사랑이 우러나오는 삶이 아니라면, 사진쟁이로서는 사진기를 들지 못합니다. 스스로 사랑이 우러나올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랑이 우러나오지 않으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지 못합니다. 사랑이 우러나와야 비로소 내 살붙이들 아침저녁을 차립니다. 사랑이 우러나오는 삶이기에 내 살붙이들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사진가로 볼 때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모든 나라들은 자신의 나라가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얀 아르튀스 베르트랑/249쪽).”는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한국은 한국입니다. 일본은 일본입니다. 프랑스는 프랑스입니다. 미국은 미국입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배우든 프랑스에서 사진을 배우든 다를 구석이 없습니다. 일본을 사진으로 담든 미국을 사진으로 담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가 무엇이요, 내가 사랑할 이야기가 어떠하며, 내가 사진으로 나눌 이야기는 어떻게 가꾸는가를 생각하며 느껴야 합니다.

 “특정한 시간에 당신의 마음을 비추는 것, 당신은 그것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조지 타이스/350쪽).”는 말이 좋습니다. 나는 내가 보는 모습만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내가 못 보는 모습을 사진으로 못 담습니다. 곧, 아는 대로 사진으로 담지 않아요. 지식에 따라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낸 발자국만큼 사진으로 담습니다. 내가 온몸으로 부딪히거나 부대낀 나날 그대로 사진을 찍어요.

 “마음이 움직여야만 사진기를 든다(토몬 켄/403쪽).”는 말이 아름답습니다. 값진 장비나 값나가는 장비로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두말할 까닭 없어요. 마음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는 짝꿍입니다. 마음으로 아끼는 내 꿈이요 삶이에요.

 “내가 찍은 최고의 인물 사진은 내가 제일 잘 아는 사람의 사진들이었다(펠릭스 나다르/416쪽).”는 말이 올바릅니다. 유섭 카슈 같은 사람이 ‘잘 찍은’ 사진은 이름난 사람들 얼굴이 아니에요. 유섭 카슈 스스로 ‘잘 알려고 애쓴’ 사람들 얼굴입니다. 마음을 열어 다가섭니다. 마음을 적셔 껴안습니다. 마음을 담아 마주합니다. 마음을 기울여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사진쟁이한테 사진이 모든 삶을 말해 줍니다. 살림꾼한테 집일이 모든 삶을 말해 줍니다. 흙일꾼한테 흙이 모든 삶을 말해 줍니다.

 나는 어디에 선 나일까요. 나는 무엇으로 내 삶을 말할 만할까요.

 한국땅에서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같은 책이 태어날 수 있어 고맙습니다. 다만,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에는 나라밖 사진쟁이 이야기만 실립니다. 나라안 사진쟁이 이야기를 담은 다음 책을 기다립니다. (4344.12.5.달.ㅎㄲㅅㄱ)


―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전민조 글·엮음,포토넷 펴냄,2011.10.1./2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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