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나's 서울놀이 - 배두나의 일상, 그리고 서울여행
배두나 글.사진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서울이 예쁘면 ‘예쁜 사진’을 보여주셔요
 [찾아 읽는 사진책 34] 배두나, 《두나's 서울놀이》(중앙북스,2008)



 140쪽이 되어서야 비로소 ‘예쁘게 찍어서 보여주려’ 했다는 서울 모습이 나오는 《두나's 서울놀이》(중앙북스,2008)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배두나 님은 “해외여행 후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볼 때면 느끼던, 그 설렘과 반가움, 되돌아와 쉴 수 있는 내 공간의 따뜻함과 편안함을, 사진에 남겨 두고 싶었다(17쪽).”고 이야기하며, “서울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나의 집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고,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곳(50쪽)”이기 때문에 “서울을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이도록 찍으려고 욕심을 부렸다(50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배두나 님이 찍은 《두나's 서울놀이》에 나오는 서울은 참말 ‘예쁜 서울’이라 할 만할까요. 참으로 예쁘게 찍어 사랑스러운 서울이라 할 만한가요.

 《두나's 서울놀이》라는 책에는 ‘예쁜 서울’이 한 가지도 나오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두나's 서울놀이》라는 책에는 ‘배두나 단골가게’가 나올 뿐입니다. 책이름 그대로 ‘배두나가 서울에서 노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 ‘예쁜 서울을 보여줄 만한 이야기’는 없는 책이에요.

 곧, ‘배두나 님 스스로 좋아하는’ 서울이기에 마냥 ‘스스로 예쁘게 바라보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글을 곁들여 묶은 《두나's 서울놀이》예요.

 이리하여, 배두나 님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지하철을 타고 보니, 서울이 다시 보였다(212쪽).”는 말마디마따나, 배두나 님은 ‘여느 사람이 여느 삶을 여느 사람하고 사귀면서 보내는 서울(과 한국이라는 터)에서 퍽 멀리 떨어진’ 채 살아갑니다. 늘 자가용을 타야 할 테니까요. ‘여느 사람’한테 붙잡혀 사인공세에 시달린다든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 일에 시달리기 싫거나 힘드니까요.

 지하철이든 시내버스이든 ‘추억을 떠올리려’고 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일터를 다니든 배움터를 오가든, ‘여느 삶(일상)’으로 타는 지하철이면서 시내버스이고, 이 지하철과 시내버스에서 아침저녁으로 오징어떡이 되도록 시달립니다. 도무지 추억으로 여길 수 없는 메마른 삶이고, 차마 추억을 떠올리기 벅찬 힘겨운 나날이에요. 배두나 님과 여느 사람은 퍽 일찍부터 ‘시달리는 삶’이 다릅니다. 시달리는 삶이 다르니 바라보는 삶이나 누리거나 즐기는 삶이 다릅니다. 누리거나 즐기는 삶이 다를 때에는 생각하는 삶이나 사랑하는 삶 또한 다를밖에 없어요.

 사진기를 쥔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하더라도,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배두나 님은 배두나 님대로 재미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 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재미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 돼요. 그러니까, 《두나's 서울놀이》는 처음부터 굳이 ‘서울을 더 예쁘게 찍어서 내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배두나 님 스스로 좋아하는 삶결대로 서울을 바라보면서 하나씩 담으면 됩니다. 나중에 이 책을 장만해서 사진을 들여다볼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좋게 봐주면 좋게 봐주니 고맙게 여기면 되고, 나쁘게 봐주면 나쁘게 바라보는 대로 나한테 모자라거나 아쉬운 대목을 고맙게 엿들을 수 있다고 여기면 됩니다.

 《두나's 서울놀이》라는 책은, 그예 배두나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예쁘게 다가설 수 있으면 됩니다. 배두나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누군가는 집안일이 힘들지 않으냐며 도우미 아줌마를 써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누군가 나의 살림을 보는 것이 싫다. 그것도 우리 엄마 닮았다. 그리고 집안 청소는, 운동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에겐 아주 유익한 아침 운동이다. 사방이 막혀서 답답한 피트니스 센터에서 러닝머신 위를 하염없이 달리는 것보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적어도 나에겐 더 재미있고 보람 있다(31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로서로 삶을 한껏 사랑하면서 즐기는 길을 찾자고 말머리를 열면 됩니다.

 왜냐하면, 더 예쁜 삶터란 없거든요. 도쿄가 서울보다 더 예쁘지 않고, 런던이 도쿄보다 더 예쁘지 않으며, 파리가 도쿄보다 더 예쁘지 않습니다. 또한, 서울이 파리보다 더 예쁘지 않아요.

 도쿄는 도쿄대로 예쁘고, 서울은 서울대로 예쁘며, 런던은 런던대로 예쁜 한편, 파리는 파리대로 예쁩니다.

 춘천은 춘천대로 예쁠 테지요. 부여는 부여대로 예쁠 테고, 진주는 진주대로 예쁩니다. 더 하거나 덜 하지 않습니다. 보금자리로 여겨 따순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려는 사람들 몸짓대로 예쁩니다.

 배두나 님은 처음부터 ‘배두나는 예쁜 삶과 예쁜 놀이와 예쁜 사람을 좋아해요’ 하고 한 마디를 읊으면서 나아가면 됩니다. ‘배두나 님 추억이 어린 곳은 배두나 님 눈썰미로는 하염없이 예쁠는지 모르나, 다른 여느 사람한테는 심심하거나 밋밋할 수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나로서는 예뻐 보이는 모습을 남한테까지 예쁘게 여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글에서든 몸글에서든 오붓한 삶과 호젓한 꿈을 사랑스레 즐기면서 머잖아 ‘뉴욕놀이’를 선물해 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그저 ‘배두나대로 논 나날’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두나's 서울놀이》는 ‘배두나대로 논 나날’에도 미치지 못하고, ‘서울을 예쁘게 누리거나 즐긴 삶’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설픈 이야기로 두루뭉술합니다.

 서울이 예쁘면 참말 ‘예쁜 사진’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서울이 예쁘면 이 예쁜 서울 구석구석을 ‘마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내는 사람’으로 보여줄 일입니다. 구경하는 사진은 언제나 재미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습니다. 런던으로 찾아가든 도쿄로 찾아가든, ‘한두 번 찾아간’ 사람이 ‘오래오래 산’ 사람보다 덜 보거나 못 보지 않아요. 거꾸로, 서울에서 태어나 오래오래 살았대서 서울을 더 잘 바라보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4344.6.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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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 Kim : ON-AIR - 뉴욕의 신화가 된 아티스트 김아타의 포토로그
김아타 지음 / 예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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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포토 아트’는 사진이 아닌 예술입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38] 김아타, 《ON-AIR》(예담,2007)



 김아타 님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기를 빌어 예술을 하는 사람입니다. 김아타 님 사진은 사진삶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예술삶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적잖은 이들은 김아타 님을 사진쟁이 테두리에서 바라봅니다.

 옳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고 예술은 예술입니다.

 붓을 들어 글을 썼대서 모두 글이라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붓과 종이를 써서 ‘서예’를 합니다. 말 그대로 예술입니다. 붓과 종이를 빌어 글로 나타내는 예술이 한자말 이름으로 ‘서예’입니다. 김아타 님이 내놓은 숱한 작품은 사진기와 인화지를 빌어 보여주지만, 사진이 아닌 예술입니다.

 “현전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원초적인 성과 폭력과 전쟁과 이데올로기를 끌어내어 내 사적인 박물관 유리 박스에 정착시킴으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기존의 박물관이 ‘죽어 있는 것을 영원히 살게 하는 곳’이라면, 나의 박물관은 ‘살아 있는 것을 영원히 살게 하는 곳’이다(195쪽).”라 하는 말마따나, 김아타 님은 ‘김아타 박물관’을 만드는 예술쟁이입니다.

 예술쟁이가 사진기를 든대서 나무랄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쟁이가 사진 기법을 시늉한대서 탓할 일이 없습니다. 만화쟁이가 사진을 신나게 찍어 뒷그림으로 옮긴다 해서 잘못이라 말할 일이 없습니다. 그림쟁이는 그림에 사진을 쓰고, 만화쟁이는 만화에 사진을 쓰며, 예술쟁이는 예술에 사진을 씁니다.

 다만, 그림쟁이는 사진 아닌 그림을 합니다. 만화쟁이는 사진 아닌 만화를 합니다. 예술쟁이는 사진 아닌 예술을 해요.

 《ON-AIR》(예담,2007)라고 하는 책 겉에도 ‘뉴욕의 신화가 된 아티스트 김아타의 포토로그’라 적습니다. 김아타 님은 영어로 ‘아티스트’입니다. 영어로 ‘포토그래퍼’가 아니에요. 아티스트예요. 한국말로 하자면 ‘예술쟁이’입니다. ‘사진쟁이’도 ‘사진작가’도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오늘날 한국땅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서 사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도 예술을 가르치거나 배우면서 사진을 가르치거나 배운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사진을 배우는 대학생 가운데에는 사진이 아닌 예술을 펼치려 하면서 사진을 배우는 듯 잘못 아는 이가 꽤 많습니다.

 김아타 님은 “1980년대 말, 나는 이름 모를 잡초들과 작은 돌들, 흐르는 시냇물과 바람 소리 그리고 태양의 자양분을 대화의 파트너로 삼아 ‘사물과의 대화’를 하면서 나의 실존을 확인해 가는 트레이닝을 하였다. 많은 시간을 하잘것없는 사물들과 대화하면서 사물을 관조하는 방법과, 사물과 하나가 되어 사물이나 혹은 타자에 몰입하는 방법을 익혔다(1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굳이 사물을 말없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누구나 생각을 얻거나 생각날개를 펴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 제 생각길을 걷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김아타 님 ‘생각찾기’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몇 대목이 보입니다.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사물’인지 궁금합니다. 참말로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이 하잘것없다고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지구별은 한결같을 뿐 아니라, 사람이 없으면 지구별은 걱정없습니다. 풀이 없거나 돌이 없거나 물이 없거나 바람이 없거나 햇볕이 없으면 지구별은 몹시 끔찍해집니다. 김아타 님이 사물을 말없이 바라보는 솜씨를 익혔다고 한다면,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을 하잘것없이 바라보는 매무새나 눈길’이 아니라 ‘내 몸뚱이란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하고 견주어 얼마나 하잘것없는가 하고 깨닫는 매무새나 눈길’이어야 알맞지 않았으랴 궁금합니다.

 풀은 풀 그대로 예술입니다. 김수영 님이 〈풀〉이라는 시를 쓰지 않았어도 풀은 풀삶 그대로 예술이자 자연이며 역사입니다. 사람은 풀포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으며 ‘참 멋지구나!’ 하고 말할 테지만, 풀은 풀삶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나타내지 않아도 스스로 참 멋집니다.

 사진이 사진인 까닭이 있습니다. 사진이 사진이기에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진이 눈부신 삶이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김아타 님은 “소호에는 작은 돌들만큼이나 숱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슬픈 사랑 이야기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역사를 길이라 부르는 것은 연결되어 있음이기도 하다(149쪽).” 하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네, 맞습니다. 작은 돌만큼 작은 사람들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다 다른 이야기이고 다 다른 사람이며 다 다른 삶이에요. 예술을 이루는 숱한 갈래는 저마다 다 달리 아름답습니다. 꼭 예술이라는 이름표가 붙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예술이 되어야 아름답지 않으며, 예술로 나아가야 아름답지 않을 뿐더러, 예술을 이루지 않더라도 아름답습니다.

 김아타 님은 인간문화재를 사진으로 담는 일을 하면서 느낀 이야기를 “목포에서 옥 작업을 하던 장주원의 작품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은 적이 있었다 …… 나는 그 작품을 보며 사람의 집념이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그는 커 보였다(167쪽).”고 적습니다. 김아타 님 다른 책 《상像》(학고재,2008)은 사진책이라 할 만하겠지요. 그저 사진으로만 보여주니까요. 그러나 이 책 또한 사진책이라 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으로 찍었대서 모두 사진이 되지 않고, 사진을 그러모았기에 다 사진책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야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이니 사진책입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떠하대서 ‘그래, 눈으로 보기에 이렇게 보이니 이렇다고 해야지’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달걀부침도 틀림없이 달걀부침이겠지요. 그런데, 먹을 수 없는 달걀부침도 달걀부침이라 할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든 꽃도 꽃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만, 참말 플라스틱 꽃이나 종이 꽃도 꽃이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아타 님 책 《상像》에는 《ON-AIR》에서 밝힌 그대로 ‘참으로 무섭다’고 느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러면서 ‘커 보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김아타 님 스스로 ‘참으로 무섭다’고 보인 사람들을 김아타 예술로 담아냈거든요. 그러니까, 《상像》이라는 책은 ‘인간문화재를 보여주는 사진책’이 아니요, ‘인간문화재를 다루는 사진책’ 또한 아닙니다. ‘예술로 보여주는 밑감’으로 인간문화재라는 사람을 골랐습니다. 인간문화재라는 사람들 모습 가운데 ‘참으로 무섭다’라는 대목을 스스로 끄집어내어 아주 또렷하게 붙박은 예술품입니다. ‘김아타 유리 박스에 넣은 예술품’입니다.

 예술을 하든 그림을 하든 만화를 하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글을 쓰든 흙을 일구든 기계를 만지든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탈을 쓰지 않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제 길을 사랑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동네에서 조그맣게 장사를 하는 구멍가게는 구멍가게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구멍가게라서 아름답거나 작은 가게라서 아름답지 않습니다. 구멍가게는 말 그대로 구멍가게로 제 몫을 알뜰히 하니까 아름답습니다.

 사진은 사진길을 씩씩하게 걷는 매무새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사진길을 깊이 사랑하거나 아끼는 눈길과 손길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예술이 예술대로 아름답다면, 사람과 삶과 사랑을 저마다 다른 이야기마당으로 엮어 저마다 다른 꿈을 싣는 눈물과 웃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을 사진으로 보여주기에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건 동영상으로 보여주건 예술은 예술입니다. 예술을 두 시간짜리 동영상으로 찍는대서 ‘영화’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백남준 님은 ‘비디오 아트’라는 이름을 떳떳하고 올바르게 썼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는 예술’은 사진이 아닌 예술입니다. (4344.6.18.흙.ㅎㄲㅅㄱ)


― ON-AIR (김아타 글·사진,예담 펴냄,2007.5.25./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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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 최민식의 포토에세이
최민식 지음 / 하다(HadA)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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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젊은이한테 남길 수 있는 사진 선물
 [찾아 읽는 사진책 37] 최민식,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하다,2010)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한테 남길 수 있는 선물은 돈이 아닙니다.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먼저’ 살아낸 나날을 뒤돌아보면서 ‘말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늙은 사람이 남길 수 있는 말씀이란 사랑과 믿음과 나눔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나눔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일굽니다.

 “본래 우리 인간의 신체는 태양, 산과 강, 초목, 대지로 이루어진 자연 속에서 생활하도록 만들어졌다(90쪽).”고 이야기하는 사진수필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하다,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두 아이와 아픈 옆지기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저녁나절 잠자리에 들기 앞서, 오늘도 겨우 하루를 보냈구나 하고 돌아보면서 마무리 똥기저귀 빨래와 집식구 옷가지를 빨래를 하고 나서 책을 펼쳐 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갓 석 주를 살아낸 둘째는 똥기저귀를 날마다 마흔 장 남짓 내놓습니다. 네 살 첫째는 하루 내내 저랑 놀아 달라며 뛰고 달리며 노래합니다. 밥하고 빨래하며 치우기만 하더라도 하루는 아주 짧고 깁니다. 등허리를 누일 틈이 없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최민식 님이 남자 아닌 여자로서 ‘사람을 찍는 사진길’을 쉰 해쯤 걸었을 때에는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라는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지식의 가치란 아는 것의 양이 아니라 올바른 목적을 위해 그것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28쪽).” 같은 말마디는 참으로 옳습니다. 옳기는 옳은데 쉬운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잘 살아갈 수 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해야 여느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나 할머니도 알아들을 만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최민식 님 말씀을 그러모은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라는 책은 ‘한국에서 남자 어른’으로 살아낸 발자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 남자 어른’으로서 젊은이한테 들려주는 말이지, ‘살림하며 살아온 어른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한테 들려주는 말이 아닙니다.

 살림하며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꼭 고전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한자는 우리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말과 사유체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반드시 배우고 알아야만 한다. 변화하는 21세기 정보화시대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자 조기교육과 국·한문혼용을 생활화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한문교육 정책을 하루 빨리 반영하고, 학생들은 독학으로라도 한문을 배워야 마땅하다(44쪽).” 같은 이야기를 펼치지 않습니다. 나라밖 고전을 읽자면 영어나 독일말이나 라틴말을 알아야 할까요? 일본사람은 한자를 몰라도 일본 고전을 알뜰히 읽을 뿐 아니라, 나라밖 옛책(고전) 또한 알뜰히 읽습니다. 왜냐하면, 옛책은 옛말로 되었는데, 옛말을 따로 배워서 읽을 수도 있으나, 뜻있는 옛책이라면 어김없이 오늘날 쉬운 말로 다시 쓰기 마련이거든요. 한자를 함께 쓰자고 틈틈이 외치는 ㅈㅈㄷ 신문조차 신문글을 한자로 적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머릿기사 이름을 뽑을 때에 북녘을 ‘北’으로 적거나 미국을 ‘美’로 적기는 하지만, 신문글에는 ‘북한’이나 ‘미국’이라고만 적습니다. 오늘날 우리 글살림은 오직 한글입니다. 한글을 옳고 바르게 써야 하고, 우리 말삶을 참다이 깨달아야 합니다. 한자는 중국글이나 한국글이 아닐 뿐더러, 한자로 지은 낱말이 많은 까닭은 지난날부터 ‘이 나라 권력자들이 중국글을 빌어 쓰던 낱말이 많았기 때문’이지 ‘이 나라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중국글을 빌어 생각을 주고받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들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밝히는 최민식 님이라 한다면, 이처럼 외치는 이야기는 앞뒤가 어긋날 뿐 아니라 올바르지 않습니다.

 영어를 아무 데나 함부로 쓰는 젊은 사진쟁이들한테 한자를 배우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얼마나 씨알이 먹힐는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진쟁이는 영어도 한자도 아닌 한글을 바른 우리 말로 가다듬으면서 즐기거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이 알아야 할 말은 한국말이고, 한국사람이 할 사진은 한국사진입니다. 한국사람은 세계말이나 세계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빚은 한국사진을 할 때에, 이 한국사진이 세계사진이 되기도 할 뿐입니다. 미국사람이래서 세계사진을 하지 않고 미국사람은 미국사진을 하며, 독일사람은 독일사진을, 스웨덴사람은 스웨덴사진을 합니다.

 뜻있는 옛책이라지만 오늘날 쉬운 말로 다시 옮기지 못하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뜻있는 옛책이라면 쉬운 요즘말로 찬찬히 옮기기 마련입니다. 정약용이든 이규보이든 홍대용이든 허난설헌이든 쉬운 요즘말로 옮겨서 새롭게 다시 읽습니다. 정약용을 한문으로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더 생각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한글을 쓰는데, ‘훈민정음이 버젓이 있던 조선 끝무렵’ 한국 지식인 가운데 훈민정음으로 쉽고 바르게 글을 써서 펼친 사람은 몹시 드물어요. 삶이 이와 같은데 왜 한자를 배워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여느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 삶과 눈높이를 헤아리지 않으면서 ‘권력자 한문’으로 글을 쓴 사람들 책을 굳이 오늘날 사람들이 애써 읽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거듭 돌아보자면, ‘21세기 정보화·세계화’라 하니까 ‘한자 섞어쓰기(국한문혼용)’뿐 아니라 ‘영어 함께쓰기(영어병용)’를 하자고 외쳐야 할 테지요. 그런데, 정보와 세계를 다루는 새로운 2000년대인 만큼 너나없이 즐거이 나눌 쉬운 말글을 살피며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길은 사진과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진기 다루는 솜씨만 빼어나대서 사진을 훌륭히 찍지 않습니다. 사진틀이 멋들어진다지만 사진이야기까지 멋들어지지 않으니까요. 내 삶을 일구는 매무새가 아름다울 때라야 내 사진 또한 아름답습니다. 곧, “관찰 결과가 쌓일수록 역사도 쌓여 가고, 그렇게 해서 축적된 역사는 다시 관찰력을 결정한다(166쪽).”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내 삶을 얼마나 참다이 일구느냐에 따라 내가 내 삶과 이웃 삶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달라집니다. 내 삶을 참다이 일굴 때에는 사진기를 쥐어 바라보는 눈길 또한 참답습니다. 내 삶을 거짓되이 겉치레할 때에는 사진기를 들며 마주하는 눈매 또한 거짓됩니다.

 착한 사람이기에 착한 사진을 얻습니다. 예쁜 사람이기에 예쁜 사진을 얻습니다. 스스로 거룩하게 살아가지 않고서 거룩해 보이려는 사진을 얻으려 한다면, ‘거룩해 보이는’ 사진은 만들겠지만 ‘거룩한 사진’은 태어나지 않아요.

 사진길을 무척 오래 걸었던 최민식 님은 ‘훈계록’보다는 ‘참회록’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는 오직 꾸짖는(훈계) 말만 가득합니다. 스스로 뉘우치는(참회) 이야기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꾸짖는 말마디조차 자꾸 어긋납니다. 곁길로 새거나 벼랑길로 치닫습니다.

 최민식 님은 “내 사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현실의 생활 형태 속에, 즉 인간 생활 속에 존재한다(259쪽).”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림쟁이 고흐 님 그림을 다룰 때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은 가난한 삶과 힘든 노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노동하는 사람이 대지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인상주의의 화폭에서 부르주아의 감성적 흔들림이 엿보인다면, 고흐의 화폭에서는 무겁고 거칠지만 든든한 느낌이 전해진다(221쪽).”고 이야기합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그림으로 담은 고흐 님 〈감자 먹는 사람들〉인데, 이 그림이 “가난한 삶과 힘든 노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니요? 최민식 님은 고흐 님을 “부르주아의 감성적 흔들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고흐 님 또한 ‘인상주의 그림쟁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흐의 그림에는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221쪽).”고 적으면서 어떻게 가난한 삶과 힘든 일을 꾸밈없이 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난한 삶과 힘든 일을 꾸밈없이 담은 그림이기에, 이 그림에는 가난한 사람과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말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참말 이와 같다고 못박으면서 사진길을 걸어온 나날이 아름답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고흐 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흙일꾼 손’을 보라는 그림입니다. 흙일꾼 손이 얼마나 흙빛을 닮으면서 울퉁불퉁하고 커다란가를 보라는 그림입니다. 시커먼 손이 아닌 흙빛 손입니다. 얼굴도 흙빛입니다. 옷도 집도 신도 밥상도 모두 흙빛입니다. 그런데 감자에서 모락모락 김이 납니다. 웃는 낯도 우는 낯도 아니요, 슬픈 낯도 기쁜 낯도 아닙니다. 그예 하루를 고맙게 돌아보면서 즐거이 끼니를 맞아들이는 낯입니다. 가난하고 힘들다면 가난하고 힘든 그대로 흙일꾼 삶인 〈감자 먹는 사람들〉입니다.

 새벽 네 시 반,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며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쟁이 최민식 님이 ‘더 나은 사진’과 ‘더 가난한 사람들 사진’을 한 장 더 찍으려고 바지런히 다리품을 판 일이 나쁠 수 없습니다만, 사진 한 장을 덜 찍더라도 집에서 아이들 오줌기저귀나 똥기저귀를 손수 갈며 손빨래를 하는 나날을 조금 더 보내면서 집식구 밥상을 손수 차리는 삶을 일구었으면, 최민식 님 글과 사진은 훨씬 달라지거나 사뭇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진은 가르침이 아니요 훈계도 아니며 꾸짖음이나 타이름 또한 아닙니다. 사진은 그저 삶이고, 따스한 삶이며, 따스한 손길로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최민식 님 ‘사진길 마무리’는 예쁘면서 살가운 빛이 감돌면서 착한 사랑이 가득 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4.6.12.해.ㅎㄲㅅㄱ)


―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최민식 글·사진,하다 펴냄,2010.9.17./12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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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 아득하고 신비한 원시림의 세계, 월드원더북스 5
호시노 미치오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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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자연과 살아가며 어여쁜 사진을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6 : 호시노 미치오, 《숲으로》(진선출판사,2005)



 아름답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사진을 찍다가 곰한테 목숨을 앗긴 일본 사진쟁이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이야기 《숲으로》(진선출판사,2005)를 천천히 읽습니다. 먼저 혼자 읽고 나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읽습니다. 아이는 제 아버지처럼 사진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답게 사진을 읽습니다. 아이 눈에 익숙한 모습이 나오면 금세 알아채고, 아이 눈에 낯선 모습이 나오면 “이게 뭐야?” 하고 묻습니다. 모르니까 묻고, 궁금하니까 묻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곰한테 목숨을 앗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호시노 미치오답게 숨을 거두었다’고들 말하곤 합니다. 글쎄, 어찌 보면 호시노 미치오 님답다 할 테지만, 곰곰이 살피면 호시노 미치오 님답지 않을 수 있어요. 어떻든, 호시노 미치오 님은 곰이 살아가는 터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며시 깊은 숲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어린이 사진책 《숲으로》는 “숲이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30쪽).”를 담습니다. 사진으로 이야기를 담고, 글로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 지구별 거의 모든 사람은 밟을 수 없는 곳을 스스로 힘껏 밟으면서 사진을 찍은 호시노 미치오 님인 터라, 당신 아니면 찍을 수 없으며, 당신 아니면 보여주기 어려운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호시노 미치오 님 아니면 찍을 수 없다 싶은 모습이라서 사진책 《숲으로》가 빛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호시노 미치오 님처럼 곰과 곰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넋이 되어 숲으로 깊이 들어서면, 이 사진책처럼 아름다이 빛나는 사진을 얻어서 나눌 수 있어요. 다만, 호시노 미치오 님처럼 곰을 사랑하면서 숲으로 발을 한 발 두 발 살며시 디딘 사람이 몹시 드물 뿐입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깊은 숲이 아닌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사진을 찍었더라도 《숲으로》와 마찬가지로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일구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곳을 찍었기에 아름다운 사진’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눈길로 아름다이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가슴이 한껏 벅차오를 때에 아름다운 마음결이 되어 찍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 살 아이한테 “나무와 이끼, 그리고 바위와 쓰러진 나무들이 서로 의지해서 살아가는 숲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 ‘만일 곰이 다가오면, 그땐 조용히 길을 비켜 주면 될 거야.’ 그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15쪽).” 같은 글을 읽힌대서 아이가 이 글을 잘 헤아려 주기란 어려울 수 있어요. 살짝 말을 바꾸어 읽습니다. ‘나무와 이끼와 바위와 쓰러진 나무가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숲은 커다란 목숨입니다. 곰이 나한테 다가오면 그때에는 조용히 길을 비켜 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읽는 글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짝반짝 빛내는 눈망울로 사진을 말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아이 눈망울이 빛납니다.

 “쓰러진 나무 위에는 다람쥐가 먹다 버린 등자나무의 열매 껍질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동물들도 자연의 길로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숲 속의 다람쥐가 된 기분으로 쓰러진 나무 위를 걸었습니다(18쪽).” 같은 글을 읽히면서, 아이 아버지부터 마음이 좋습니다. 다람쥐도 곰도 사람도 똑같이 자연이라는 숲길을 걷습니다. 우리가 걸어갈 길은 바로 이곳, 숲길이에요. 찻길이 아닌 숲길을 걸어야 하고, 시멘트길이 아닌 흙길을 걸어야 해요.

 두 아이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자가용을 몹시 싫어할 뿐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다니면 글을 쓸 수 없고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며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느껴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자가용을 타지 않고 몰지 않으며 장만하지 않는다고 느껴요. 두 다리로 이 땅을 사랑하고, 두 손으로 동무를 사랑하며, 온몸과 온마음으로 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에 바야흐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고 느껴요.

 이리하여, 아이한테 “일생을 마친 수많은 연어들이 강물에 떠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연어가 숲을 만든다.’ 알래스카 숲에 사는 인디언들의 속담입니다. 알을 낳는 사명을 다하고 죽은 연어들이 떠내려오며 숲에 영양분을 준다는 뜻이지요. 나는 살며시 개울을 떠나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27쪽).” 같은 글을 읽고 사진 몇 장 더 넘긴 뒤 책을 덮으면서 따사로운 넋으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입니다.

 사진이란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글이란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삶자국이에요. 덧바르거나 꾸민대서 아름다운 얼굴이 되지 않아요. 옷을 입히거나 이름을 붙인대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아요.

 착하게 살아가면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참다이 어깨동무하면 저마다 아름다운 삶이에요.

 아이들한테 좋은 그림책을 읽혀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그림책을 읽히기 앞서 어른 스스로 좋은 그림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이야기책을 읽혀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이야기책을 읽히기 앞서 어른부터 기쁘게 좋은 이야기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사진책을 읽혀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사진책을 읽히겠다면 어른들이 꾸준히 좋은 사진책을 예쁘게 장만해서 예쁘게 건사해야 합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곰한테 목숨을 앗긴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숲에서 자연스레 숲사람으로 지내다가 자연스러이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 숲으로 (호시노 미치오 사진·글,김창원 옮김,진선출판사 펴냄,2005.8.16./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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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House - 붉은 틀
노순택 사진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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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잊은 사람들 삶을 다큐사진으로
 [찾아 읽는 사진책 36] 노순택, 《RED HOUSE》(청어람미디어,2007)



 다큐사진을 찍는 노순택 님은 《RED HOUSE》(청어람미디어,2007)라는 사진책 머리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도, (그것이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밀도 있는 작업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타인의 작업들을 바라보면서, 또 내 작업을 검토하면서 알게 되었다(10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북녘 이야기와 삶을 사진으로 담든, 남녘 사람들과 사랑을 사진으로 싣든, 깊이 있게 사진말을 나누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어느 사진감을 고르든 똑같습니다. 어느 일을 하든 매한가지입니다. 쉬운 일이란 없고, 쉬운 사진이란 없으며, 쉬운 파헤치기나 사귀기란 없습니다.

 사진책 《RED HOUSE》 머리말에는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겉’뿐이다(9쪽)”라는 이야기도 한 줄 적힙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겉을 찍고 겉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속을 찍고 속만 나눌 수 있어요. 겉과 속을 함께 찍을 수 있으며, 겉과 속을 하나도 못 찍을 수 있어요. 스스로 겉을 찍으려 하면 겉을 찍습니다. 스스로 속을 찍으려 할 때에는 속을 찍어요. 사람을 사귈 때에도 겉치레로 사귄다면 겉훍기로 그칩니다. 사람을 마주하며 속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속사랑을 이루어요.

 사진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모습만 찍지 않습니다. 글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습까지 담지 않습니다. 그림은, 춤은, 노래는, 영화는, 연극은 어떠하다고 할까 돌아볼 노릇입니다. 어떠한 길을 걷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나누는가는 사뭇 달라집니다.

  사진책 《RED HOUSE》를 들여다봅니다. 세 갈래로 나누어 사진을 싣고 보여줍니다.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로 나눈 《RED HOUSE》입니다. 펼쳐들다에서는 “질서의 이면”을 말한다 하고, 스며들다에서는 “배타와 흡인”을 말한다 하며, 말려들다에서는 “전복된 자기모순”을 말한다 합니다.

 사진을 넘기면서 세 갈래 이야기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가 이러할 수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세 갈래 이야기란 따로 떨어뜨린 셋이 아니라 한몸이고, 세 갈래 이야기는 북녘사람 삶이나 남녘사람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될 수 있지만, 북녘과 남녘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노순택 님은 ‘종이쪽 놀이(카드섹션)’를 하는 북녘사람들을 바라보며 ‘질서 뒤에 가려진 모습을 펼쳐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종이쪽 놀이를 펼치는 10만 어린이와 어른들 움직임을 질서라 일컬을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이쪽 놀이란 질서라 일컬을 수 없을 텐데요. 질서가 아닌 권위이고 권력이며 군국주의라고 느낍니다. 질서일 수 없는 슬픔과 바보짓과 아픔이라고 느낍니다. 질서하고는 동떨어진 눈물이며 생채기인데다가 용두질이구나 싶습니다. 깊이를 따지면, 종이쪽 놀이를 하는 사람은 북녘사람만이 아닙니다. 남녘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른 모습으로 똑같이 벌이는 일입니다. 북녘이나 남녘이나 틀에 박힌 초·중·고등학교 교육입니다. 북녘 군대나 남녘 군대나 틀에 박힙니다. 서로서로 평화를 지키려는 군대가 아니라 평화를 밟고 서로를 더 잘 죽이려는 ‘사람 죽이는 재주’를 길들이는 군대예요. 이는 사진책 《RED HOUSE》 셋째 갈래인 말려들다를 넘기면 숱하게 나오는 ‘군인옷 입은 어르신’ 얼굴을 보면 쉬 어림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그렸다는 김일성 얼굴보다 이 ‘김일성 그림을 들거나 불사르는 군인옷 입은 남녘 남자 어르신들 얼굴’이 훨씬 무시무시하구나 싶어요.

 그나저나, 노순택 님은 왜 “붉은 틀”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 《RED HOUSE》를 내놓았는지 아리송합니다. 북녘 사회가 붉은 틀을 보여주기에 《RED HOUSE》를 찍었다 할 테지만, 정치권력자가 보여주는 붉은 틀이 북녘사람들 삶자락은 아니거든요. 붉은 틀에 가둔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붉게 물들지는 않거든요. 아니, 붉은 틀에 오래오래 가둔 끝에 시나브로 붉게 물들었다지만, 어느 사람이든 붉은 피가 흐르지만 붉은 사람 아닌 흙빛 사람이에요.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흙빛 사람입니다. 입시지옥에 얽매인 채 시험점수만 외워야 하는 남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참으로 슬프며 불쌍한데,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또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대로 참으로 슬프며 불쌍해요. 서로서로 ‘더 낫지’ 않고 ‘더 나쁘지’ 않아요. 둘 모두 아름다움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채 숨을 잇습니다.

 정치권력을 쥔 사람이든 정치권력을 쥔 사람한테 눌리는 사람이든 갓난쟁이로 태어나서 늙은이로 죽습니다. 제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백 살을 튼튼히 살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었더라도 갓난쟁이일 때에는 똥오줌을 못 가립니다. 붉은 틀이란 아직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이에요.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을 사진으로든 그림으로든 글로든 담아서 나눈다 할 때에는,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만 얻고야 맙니다. 다큐사진이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구태여 파헤치거나 들여다보는 일이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다큐사진은 사랑사진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담는 사진이 곧 다큐사진입니다. 그래서 사진책 《RED HOUSE》를 넘기는 내내 노순택 님이 북녘사람과 남녘사람을 바라보며 어떠한 사랑을 무슨 빛깔로 어떤 손길로 담아서 나누려 하는가를 곰곰이 되씹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요”를 까망하양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우리는 행복해요”를 무지개 빛깔로 보여주었다면 어떠한 느낌과 이야기가 되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침나절에, 새벽나절에, 낮나절에, 저녁나절에,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으며 뭇 꽃과 풀이 어여삐 어우러진 학교 문가와 둘레를 살펴본다면, 또 창문턱을 가만히 ‘깊게’ 들여다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샘솟을까 가누어 봅니다.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몸짓 말고,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손가락과 손등과 손바닥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구두코와 발가락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옷깃과 지갑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붉은 틀’에 꽁꽁 싸매 두었다지만, 이곳저곳에 조용히 스며들어 선보이는 ‘사람내음’과 ‘사랑내음’을 곱게 어루만지듯 감싼다면, 무시무시한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울 광화문 큰거리에서 목소리 높이는 어르신들 흰머리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사진책 《RED HOUSE》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새삼스레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더 사랑해 주셔요.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오래오래 내 고운 이웃으로 여겨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큐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삶으로 내 하루하루를 흐뭇하게 웃고 떠들며 즐기지 않을 때에는 다큐사진하고 멀어집니다. 누군가를 붉은 틀이라고 이름붙일 때에는, 이 이름을 붙이는 사람부터 붉은 틀입니다. (4344.6.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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