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ifornia on the Breadlines (Hardcover) - Dorothea Lange, Paul Taylor, and the Making of a New Deal Narrative
Jan Goggans / Univ of California Pr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사서 읽은 책은 이 <캘리포니아 어쩌고>가 아니지만, 이 사진책에 캘리포니아 모습이 적잖이 나온다. 아무튼, 도로디어 랭 사진책을 '간추린 판'이 아닌 '사진책'으로 사서 읽는다면, 사람들이 흔히 고정관념처럼 아는 사진하고는 다른 이야기를 느끼리라 믿는다. 



 사진 한 장에 담기는 사람들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8] Dorothea Lange, 《Photographing the Seocnd Gold Rush》(Heyday books,1995)


 1895년에 태어나 1965년에 숨을 거둔 도로디어 랭(Dorothea Lange) 님 사진을 바탕으로 새롭게 꾸민 사진책 《Photographing the Seocnd Gold Rush》(Heyday books,1995)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책에는 “Dorothea Lange and the Bay Area at War, 1941∼1945”라는 자그마한 이름 하나 덧붙습니다. 그러니까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요, ‘두 번째 금광찾기’가 된다는 사진이라는 셈입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했는가 돌이킵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였던 이무렵 숱한 지식인과 지성인은 친일부역을 합니다. 나로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살지 못했으니 이때가 얼마나 어떻게 괴로우며 벅찼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만, 옳으며 바른 길을 착하고 맑게 걷기란 몹시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옳으며 바른 길을 착하고 맑게 걷는 모든 길이 꽉 막히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멧골 깊이 들어가 조용히 흙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외딴섬 조그마한 집에서 아주 고요히 바다와 벗삼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흙을 일구어야 먹고살 수 있던 지난날 한겨레인데, 뻔히 일본총독부한테 쌀과 곡식과 푸성귀를 빼앗길 줄 알면서도 흙을 일구어야 하는 삶에서 어떻게 견디거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시골사람은 창씨개명을 할밖에 없으며, 도시사람은 친일부역을 할밖에 없던 슬프며 아픈 나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핑계감으로 삼는 말이 아니라, 참 배고프고 외로우며 아픈 나날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1950년부터 남녘과 북녘은 총부리를 맞대며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짓을 저지릅니다. 왜 한겨레끼리 이토록 죽임질에 목을 매야 했는가 돌아보면 그예 슬프며 아플 뿐입니다. 그런데, 이무렵 1950년부터 몇몇 나라는 군수공장을 펑펑 돌리면서 어마어마하게 돈벌이를 합니다. 이른바 ‘무기 만들고 팔아 금광찾기’를 하는 꼴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노릇이지만, 미국땅에서 1941년부터 1945년은 ‘무기 만들고 팔아 금광찾기’를 하던 나날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일으켜 준 전쟁 때문에 쉴새없이 ‘무기팔이’를 할 수 있었고, 미국에서는 일본이 일으켜 준 전쟁이 있기에 더욱더 힘을 내어 ‘무기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누군가한테는 그야말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짓입니다. 전쟁은 누군가한테는 집도 식구도 돈도 꿈도 몽땅 날아가는 터무니없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또다른 누군가한테는 어마어마한 돈벌이입니다. 전쟁은 누군가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크나큰 훈장이나 이름값입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한국땅에서 마주할 수 있던 사람들 모습에서는 어떤 빛을 읽을 수 있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 만하고, 어떤 웃음꽃이 피어날 만하며, 어떤 꿈이 이루어질 만한지 궁금합니다.

 1942년에도 혼인한 사람이 있겠지요. 1944년에도 태어난 아이가 있겠지요. 1943년에도 글을 배운 아이가 있겠지요. 1945년에도 예순잔치가 있겠지요.

 도로디어 랭 님 사진책 《Photographing the Seocnd Gold Rush》를 넘기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 밑에 붙인 ‘사진 찍은 해’가 없다면, 이 사진을 1941년 사진으로 여길는지, 1951년 사진으로 여길는지, 1961년이나 1971년이나 1981년 사진으로 여길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참말 언제 찍은 사진이라 할 만할까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미국사람한테 1945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가난하다가 갑작스레 살림이 편 미국사람한테 1944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이무렵 일자리라면 아무래도 군수공장이 가장 많았으리라 보는데, 군수공장에서 일거리를 얻어 돈벌이를 하며 집식구를 먹여살리던 어버이들한테 1943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같은 해 다른 자리 사람들 사진은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품을 수 있을까요. 같은 자리 다른 삶 사람들 사진은 저마다 어떤 빛과 그림자를 껴안을 수 있을까요.

 가난해도 밥을 먹습니다. 가멸차도 잠을 잡니다. 못생겨도 사랑을 합니다. 잘생겨도 헤어집니다. 집이 없어도 살림을 꾸립니다. 집이 있어도 텃밭을 못 일구곤 합니다. 돈이 없어도 웃음꽃을 활짝 피웁니다. 돈이 있어도 눈물나무만 자랍니다.

 누군가는 가난하거나 힘겹다 싶은 살림을 꾸리는 사람을 찍은 사진은 어둡거나 퀴퀴하거나 슬프거나 아파야 한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멸차거나 수월하다 싶은 살림을 누리는 사람을 찍은 사진은 어떠해야 할까요. 사진은 돈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까요. 글은 돈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나요. 노래는 돈에 따라 내음이 바뀌는가요.

 더 큰 선물보따리를 받아야 웃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밥그릇을 두서넛쯤 받아야 함박웃음으로 밥을 먹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합니다. 하루 두어 끼니면 배부릅니다. 누구나 조그마한 밥그릇으로 조그마한 사랑을 조그마한 꿈에 담아 누립니다.

 도로디어 랭 님이 농업안정국이라는 데에 몸담으며 사진을 찍었든, 홀가분하게 당신 사진감을 찾아 사진을 찍었든, 두 갈래 사진은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사진쟁이 스스로 읽을 줄 알면 됩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이 사진기를 손에 쥔 사진쟁이한테 무엇을 보여주며 깨우치는가를 알아채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길을 닦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사랑길을 닦을 테고, 누군가는 돈길을 닦을 테며, 누군가는 꿈길을 닦을 테지만, 누군가는 이름길을 닦겠지요. (4344.11.19.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illiam Eggleston (Hardcover) - Democratic Camera; Photographs and Video, 1958-2008
Elisabeth Sussman / Whitney Museum of Art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윌리엄 이글스턴 사진책이 퍽 여러 가지 뜬다. 그러나 내가 가진 책만큼은 좀처럼 안 뜬다 ㅠ.ㅜ 마이리뷰로 올리고 싶어 절판된 사진책에 글을 걸친다. 빛느낌이 새삼스러운 윌리엄 이글스턴 사진책이 잘 읽힐 수 있기를 꿈꾼다. 

 



 사진이 만든 빛, 사람이 살아가는 빛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7]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Los Alamos》(Scalo,2003)


 사진은 빛을 만듭니다. 빛을 담는 그릇이 사진이라 할 텐데, 사진은 빛을 담으면서 스스로 빛을 만듭니다.

 사진이 만드는 빛은 억지스러울 수 있습니다. 사진이 만드는 빛은 사람들 눈으로는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 만드는 빛은 더없이 눈부시거나 더할 나위 없이 고울 수 있습니다.

 사진은 빛을 붙들어매기 때문에 빛을 만들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어느 한때에 멈추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빛을 만드는구나 하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틀림없이 빛을 만듭니다. 다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어야 사진이 빛을 만듭니다. 사진을 찍어 나누는 사람이 있을 때에 사진 또한 빛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제 고운 삶터에서 고운 넋으로 살아갈 때에, 사진은 시나브로 고운 빛을 만듭니다.

 밉거나 슬프거나 아픈 삶을 누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 스스로 모르던 빛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진은 속일 수 있으나 속일 수 없습니다. 사진은 속일 수 없으나 속일 수 있습니다. 짐짓 대단하거나 씩씩하거나 무시무시한 듯 얼굴을 내미는 사람 뒤에 깃든 보드랍거나 따사롭거나 너그러운 빛을 담을 수 있는 사진입니다. 얼핏 사랑스럽거나 예쁘거나 티없다 싶은 듯 얼굴을 보여주는 사람 언저리에 감도는 어둡거나 쓸쓸하거나 힘겨운 빛을 담을 수 있는 사진이에요.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님 사진책 《Los Alamos》(Scalo,2003)를 읽습니다. 여느 사진쟁이들이 까망하양 필름으로 그림자 놀이에 흠뻑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윌리엄 이글스턴 님은 무지개 필름으로 무지개꿈을 누립니다. 여느 사진쟁이들이 까망하양 필름으로 까망과 하양 사이에 얼마나 많은 빛깔이 있느냐고 금긋기를 하는 동안, 윌리엄 이글스턴 님은 사람들 여느 눈으로 바라보는 여느 빛깔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봅니다.

 까망하양으로 담는 사진은 무지개빛 사진하고 견주어 차분하다고들 합니다. 어수선하지 않다고들 합니다. 다큐멘터리로 알맞은 듯 여깁니다.

 사람은 무지개빛으로 이웃과 동무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무지개빛으로 살아갑니다. 흙을 만지며 흙내음과 흙빛을 느낍니다. 밥을 먹으며 나락내와 나락빛을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며 바람내음과 바람빛을 느낍니다. 햇살을 먹으며 햇살내와 햇살빛을 느껴요.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님 사진책 《Los Alamos》는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빛을 살피면서 사진이 만드는 빛이 무엇인가를 느끼도록 이끌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날 사진쟁이들은 굳이 까망하양에 얽매인 채 사진빛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오늘날 사진쟁이들은 으레 무지개빛을 다루지만 막상 사진빛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야기를 살며시 건드립니다.

 사진은 빛을 만듭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빛을 냅니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며 내는 빛을 담습니다. 사람은 사진에 담긴 빛을 들여다보면서 저희 삶을 새삼스러이 다시 바라봅니다.

 사진은 모두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진은 아주 작은 점 하나를 보여줍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주 작은 점 하나를 바라보면서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빛을 누리는 저희 삶을 넓거나 깊게 되새깁니다. 점 하나가 발판이 되어 흐름을 곱씹습니다.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길이를 돌이킵니다. 점에서 비롯해서 점으로 돌아오는 너비를 헤아립니다.

 빛나는 삶입니다. 누구나 빛나는 삶입니다. 무엇을 찍든 빛나는 사진입니다. 이름나며 예쁘장한 모델을 찍어야 빛나는 사진이지 않습니다. 대단하거나 거룩하다는 뜻을 애써 심어야 놀라운 사진이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은 부질없습니다. 다큐사진은 덧없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일 때에 아름다우면서 즐겁습니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빛을 사람내와 사람빛을 깨달으며 시나브로 담을 때에 비로소 사진빛을 이룹니다. 사진빛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람빛을 모른다는 소리입니다. 사진꿈을 꾸지 않는다면 사람꿈하고 등졌다는 소리입니다. 사진넋이 없다면 사람넋하고 동떨어진다는 소리입니다. 사진사랑이란 사람사랑입니다. 사진이야기란 사람이야기입니다. 사진삶이란 사람삶입니다. 사진길이란 사람길입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4344.11.14.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과밭 사진관
신현림 지음 / 눈빛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쟁이 된 능금나무밭에서 사진으로 찍는다
 [찾아 읽는 사진책 67] 신현림, 《사과밭 사진관》(눈빛,2011)



 신현림 님은 사진책 《사과밭 사진관》(눈빛,2011)을 내놓으면서 100쪽에 걸쳐 사진을 보여주고 40쪽에 걸쳐 글을 들려줍니다. 신현림 님은 사진과 글로 함께 이야기합니다. 맨 먼저 “사과꽃이 피고, 빨간 사과가 열리는 곳. 사과밭 쪽을 바라보자, 내게 푸른 바람이 불어왔다. 몹시 따사롭고 정에 넘치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 속에서 사과꽃 하나가 내 손에 사뿐 내려앉았다(105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능금꽃을 신현림 님 사진감으로 삼으면서 하얀 능금꽃과 빨간 능금알이 가슴속으로 어떻게 스며들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푸른 바람을 맞으며 푸른 몸이 되었다면 푸른 사진을 찍습니다. 맑은 바람을 쐬면서 맑은 넋이 된다면 맑은 사진을 담아요. 보드라운 바람을 누리며 보드라운 꿈을 키운다면 보드라운 사진을 이루어요. 사랑스러운 바람을 즐기며 사랑스러운 뜻을 나눌 때에는 사랑스러운 사진을 낳아요.

 신현림 님은 “나는 사과꽃 풍경 속에서 참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120쪽).”고도 이야기합니다. 능금밭에서 사진을 찍고 놀고 쉬고 일하면서 더없이 사랑받았구나 싶어요. 신현림 님을 낳은 어머님은 어린 신현림 님이 어른 신현림 님이 되기까지 돌보고 아끼면서 사랑씨를 가슴에 살며시 심었겠지요. 어린 신현림 님은 어른 신현림 님이 되어 딸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 딸아이 가슴에 사랑씨를 새롭고 새삼스레 심겠지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못 나누란 법은 없어요. 다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란 없어요.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른 빛깔과 결과 내음과 무늬로 사랑을 받아요.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사랑받는 줄 모르거나 어떻게 사랑받는 줄 못 깨달을 뿐이에요.

 온누리에 넘치는 글은 하나같이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온누리에 흐르는 그림은 한결같이 사랑이 감돕니다. 온누리에 빛나는 사진은 온통 사랑이라 할 만해요.

 신현림 님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나는 사람들에게 자연 그리고 예술과 가까워지라고 말하고 싶다(128쪽).”는 말마디로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사람은 고운 목숨을 아끼며 살아가자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랑을 하기 마련이요, 사랑을 하는 삶을 누리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예술을 꽃피울 수 있어요.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삶이 망가지거나 흔들리는 셈이고, 사랑을 하지 않는 삶으로는 어떠한 예술도 꽃피우지 못해요.

 사진책 《사과밭 사진관》에 나오는 능금나무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어느 능금나무이든 키가 참 작습니다. 죄다 난쟁이 능금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들 난쟁이 능금나무는 가지마다 끈을 묶어 땅바닥에 박아요. 하늘로 뻗지 못하도록 붙잡힙니다. 하늘로 가지를 높일 수 없고, 열매를 ‘하늘을 나는 새’하고 나누지 못해요.

 사람들은 능금알을 맛나게 먹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언제 어디에서라도 퍽 값싸게 장만하면서 능금알을 즐깁니다. 능금알을 즐기면서 이 능금이 어떤 나무에서 어떻게 매달린 채 자라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능금나무가 무엇을 먹고 능금알을 맺는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능금알은 능금꽃이 피어야 맺힐 수 있는 줄 깨닫지 않습니다.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본 사람이라면, 앤이 처음 푸른지붕집 있는 마을로 들어서려고 마차를 타고 달릴 때에 한 마디조차 벙긋하지 못하면서 눈부시게 하얀 능금꽃 흐드러지는 길을 달린 모습을 떠올리리라 봅니다. 앤이 앞으로 살아갈 마을에서는 능금나무가 우뚝우뚝 솟아요. 하늘을 바라보며 자라요. 마음껏 가지를 뻗고 굵다란 열매를 맺습니다. 먼 옛날,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 무대가 되는 마을에서는 농약이든 비료이든 뿌리지 않습니다. 아니, 농약이나 비료나 없어요. 어느 사람도 가지를 끈으로 잡아당겨 땅에 못을 박지 않아요. 스스럼없이 자라나는 능금나무요,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고 능금알을 따며, 이렇게 능금알을 딴다지만 멧새와 들새는 마음껏 날아들어 먹고픈 대로 알맞게 능금알 콕콕 쪼며 나누어 먹어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어른 키보다 높은 능금나무조차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굵직한 능금알만 얼른 잔뜩 매달아야 하는 슬픈 능금나무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손쉽게 능금을 깨물어 먹지만, 막상 능금이 사람한테 베푸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채 능금을 먹고 배를 먹으며 복숭아를 먹습니다. 사랑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수박을 먹고 참외를 먹으며 토마토를 먹습니다. 더 값싸다는 열매를 먹거나 유기농으로 키웠다는 열매를 먹을 뿐입니다.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 사랑으로 보살핀 다음 사랑으로 거둔 열매를 먹지 않아요.

 사진책 《사과밭 사진관》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제껏 능금나무나 능금밭을 사진감으로 삼아 예쁜 사랑을 나누려고 마음을 기울여 살가이 만난 사람이 얼마나 있었나 궁금합니다. 꼭 능금나무가 아니더라도 배나무이든 대추나무이든 석류나무이든 감나무이든, 곁에서 애틋하게 사랑하면서 열매를 얻기도 하고 잎과 꽃과 줄기를 고루 즐기면서 사랑한 사진쟁이는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스스로 나무를 심는 사진쟁이는 있는가요. 스스로 나무 심을 흙땅을 마련하는 사진쟁이는 있을까요. 스스로 나무와 같이 살아가자며 흙을 누리는 시골자락으로 살림터를 뿌리내리는 사진쟁이는 있나요.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신현림 님부터 능금밭 능금나무 그대로 결을 살리는 마을에서 딸아이와 예쁘게 뿌리내릴 수 있을 앞날을 꿈꿉니다. 《사과밭 사진관》을 즐긴 사람들 가운데 다문 한 사람이라도 능금밭 돌보는 흙집이라든지 능금나무 곱게 심어 아이들한테 물려줄 넋으로 살아가는 분이 한 사람이라도 나올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4.11.11.쇠.ㅎㄲㅅㄱ)


― 사과밭 사진관 (신현림 글·사진,눈빛 펴냄,2011.10.4./17000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treeje 2013-04-2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나무를 심고, 나무를 심을 흙땅을 마련하고
흙을 누리는 시골자락 살림터를 뿌리내리는 사진쟁이, 함께살기님 계시잖아요. ~^^
참, 사과나무와 능금나무는 같은 나무인가요~^^;;
저도 프로필 이름을 '능금나무'로 바꾸고 싶네요.^^;;;
 
내 당나귀 벤야민
한스 림머 지음, 레나르트 오스베크 사진, 김경연 옮김 / 달리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이랑 따사로이 어우러질 삶이란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7 : 레나르트 오스베크, 《내 당나귀 벤야민》(달리,2003)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 아이가 하고픈 그대로 바라보아야 할는지 가만히 지켜보아야 할는지 생각해 봅니다. 다칠 만한 무언가를 한다면 말려야 할 텐데, 아이가 만져서 다칠 만한 무언가라 한다면 어른이 만질 때에도 썩 좋다 할 만하기 어려운 한편, 집에 둘 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러한 무언가를 만지기 앞서까지 제대로 못 느끼면서 집에 그대로 두지 않느냐 싶어요. 꼭 아이가 만져서 다칠 만하거나 뭔가 말썽이 생길 만할 때에 깨닫습니다.

 생각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야 비로소 사람이라 할 텐데,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돌아볼 때면, 나는 내 하루를 얼마나 생각하며 지내는가 싶어 슬픕니다. 오늘 하루는 무엇을 했을까요. 어제 하루는 어떤 나날이었는가요. 다가올 새날은 어떤 일을 치러야 하나요.

 아이가 물려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면 어버이로서 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하는 일부터 옳게 할 만해야 합니다. 아이가 곁에서 거들어도 괜찮을 뿐 아니라, 아이를 불러 거들라고 시킬 만해야 합니다.

 새 보금자리를 얻어 손질하면서 생각합니다. 한동안 비었을 뿐 아니라, 늙은 할머님 한 분 살던 때에도 집이 거의 버려진 듯 있었기에 손 가는 데가 많으며, 치우고 버릴 것이 많습니다. 케케묵은 벽종이를 긁어서 벗기고 새 벽종이 바르기 앞서 매캐한 먼지를 쓸고 닦으며 치우는 일부터 만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일을 아이를 불러 거들라고 시킬 수 있을까요. 아이뿐 아니라 옆지기한테 먼지구덩이에서 함께 일하자고 할 수 있는가요.

 먼지구덩이에 홀로 들어가 먼지더미를 혼자 들이마십니다. 나 홀로 하자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 견디자고 헤아립니다. 이 먼지를 둘이나 셋이 마실 까닭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 홀로 하는 일이라지만, 나부터 할 만하지 않은 일을 힘들게 하는 셈입니다. 나 혼자 고단한 굴레를 짊어지면서 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니, 이렇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집식구와 살가이 부대끼기는 어려운 꼴입니다.

 지나고 돌아보면 아련한 옛일이 될까요.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면서 며칠이나 한두 달을 보내면 되나요.

 문득 내 손금을 들여다봅니다. 손바닥에 새겨진 금 셋 가운데 목숨줄 하나만 바라봅니다. 나는 목숨줄 하나만 읽을 줄 안다고 느끼지만, 어쩌면, 나는 목숨줄 하나만 읽도록 나 스스로를 길들이지 않나 싶습니다. 세 가지 금을 모두 읽을 줄 안다고 여기며 살아가면, 내 삶을 나 스스로 알맞게 다스릴 수 있지 않나 하고 느낍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든지, 안 아픈 채 오래 살아야 한다든지 하지 않아요. 알맞고 바르며 착하게 살아갈 만큼 돈을 벌면 되고, 몸이 아플 일이 없도록 내 일과 놀이를 맞아들일 줄 알면 돼요. 손금읽기란 내 삶읽기이면서 내 앞날읽기예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아름다운가를 톺아보는 일이에요.

 1960년대에 처음 나왔고, 2003년에 한글판으로 옮겨진 사진책 《내 당나귀 벤야민》(달리,2003)을 읽습니다. 나어린 아이가 도시에서 시골로 삶터를 옮긴 다음 당나귀 한 마리를 만나 살가이 사귀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꾸밈없이 찍은 사진인지, 꾸며서(연출해서) 찍은 사진인지 좀 알쏭달쏭합니다. 이야기를 이루려고 이래저래 사진을 갖다 붙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빠하고 당나귀하고 나는 마을로 돌아왔어요. 나랑 아빠랑 엄마가 사는 마을은 지중해의 어느 섬에 있답니다. 전에는 큰 도시에서 살았어요. 그곳에는 자동차와 전차, 빌딩밖에 없어요. 나비며 알록달록 돌멩이들, 뱀, 고기잡이배 같은 건 없어요. 당나귀도 없고요. 나는 이곳이 훨씬 좋아요(11쪽).” 같은 글을 읽으면서 생각에 젖습니다. 도시에는 당나귀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당나귀가 없고 당나귀를 부릴 일이 없는데, 당나귀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나 동화책이나 이야기책이나 사진책이 나와서 읽힙니다. 도시에는 나비가 살지 못하는데, 도시 아이들은 나비 그림책을 읽거나 나비 다큐멘터리를 봅니다. 도시에는 자동차와 건물밖에 없으나, 도시 아이들은 자동차 다큐멘터리나 건물 그림책을 읽지 않아요. 도시 아이들한테 건물짓기를 가르치는 어른은 없습니다. 도시 아이들이 자동차 그림책이나 만화영화를 본다 하지만, 자동차 얼거리를 속속들이 배우는 일이란 없습니다. 자동차가 일으키는 배기가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르치는 사람은 없고, 자동차를 만드는 동안 공해가 얼마나 생기는가를 깨닫는 어른은 없습니다.

 돌멩이 없는 도시입니다. 모래나 흙 없는 도시입니다. 뱀이나 개구리조차 없는 도시입니다. 파리랑 모기는 많은 도시예요. 그래, 바퀴벌레도 많겠지요. 그런데, 정작 파리랑 모기랑 바퀴벌레 이야기를 동화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으로 엮는 도시사람은 없어요. 모두들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쓰고 그리며 찍습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삶이면서 막상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노래하지 않아요. 기계와 전자제품으로 둘러싸인 삶이면서 이들 기계와 전자제품을 꿈꾸지 않아요.

 사진책 《내 당나귀 벤야민》을 천천히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가끔은 산책을 해요. 나는 벤야민에게 우리 마을 골목들을 알려주어요. 우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길도 알려주고요(22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아간다면,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살아간다는 아이인데, 이 아이 삶은 당나귀하고 놀거나 바닷가로 가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데에서 살아간다는 일이나 놀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애써 도시하고 동떨어진 데에서 당나귀랑 만날 까닭이 없어요. 이런 삶, 이런 나들이, 이런 줄거리라면, 그냥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훨씬 재미나면서 볼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도시를 떠나 살아가는 아이가 당나귀 하나를 만난 놀라움과 새로움을 ‘놀라운 사진’과 ‘새로운 사진’으로 보여주어야지요.

 당나귀랑 아이를 예쁘장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라면 사진 노릇을 못 합니다. 흙을 밟고 풀하고 사귀는 사진이 아니라, 집안에서만 당나귀를 쓰다듬는 사진만 잔뜩 집어넣으면, 이 또한 시골 당나귀 사진책답지 못합니다.

 책 하나 꾀한 뜻은 나쁘지 않습니다. 사진 찍은 솜씨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책 하나를 일구는 사랑을 더 살피지 못했고, 사진 하나로 이룰 사랑이 무엇인가를 더 돌아보지 못했어요. 아이들이 함께 읽을 사진책이란, 아니 아이들과 즐거이 읽을 책이란, 아이들이랑 따사로이 어우러질 삶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요. (4344.11.4.쇠.ㅎㄲㅅㄱ)


― 내 당나귀 벤야민 (레나르트 오스베크 사진,한스 림머 글,김경연 옮김,달리 펴냄,2003.6.30./8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프가니스탄 산골학교 아이들 - 참다운 평화를 위한 길
나가쿠라 히로미 글.사진, 이영미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무지개빛으로 바라보면 무지개빛 예쁜 아이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8 : 나가쿠라 히로미, 《아프가니스탄 산골학교 아이들》(서해문집,2007)



 무지개빛으로 곱게 보듬은 사진이 담긴 《아프가니스탄 산골학교 아이들》(서해문집,2007)을 읽습니다. 일본 사진쟁이 나가쿠라 히로미 님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바자라크 멧기슭에 자리한 자그마한 학교 한 곳을 여러 해 드나듭니다. 멧골학교 아이들하고 사귀고, 멧골학교 아이들 어버이하고 만납니다. 온통 무지개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서 무지개빛 넋을 선물받고, 이 고운 선물을 사진 몇 장에 담아 책으로 그러모읍니다.

 사진책 《아프가니스탄 산골학교 아이들》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다큐사진을 찍는다는 분들은 으레 까망하양 사진을 즐겨찍는데, 까망하양으로 찍을 만한 사진이 틀림없이 있을 테지만, 구태여 까망하양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 왜 까망하양 사진으로 찍어야 하는가를 아주 또렷하게 살피면서 알아야 해요. 온 넋과 삶과 꿈이 무지개빛인 사람들과 보금자리를 까망하양 빛깔에서 어떻게 살리거나 살찌울 수 있는가를 환하면서 맑게 깨우친 다음 까망하양 사진을 찍어야 해요.

 사진쟁이 나가쿠라 히로미 님은 “교실에는 창문도 없고 문도 없다. 무더운 날에는 호두나무 잎을 스쳐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상쾌하다. 추운 날에는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에 온몸이 움츠러든다. 이따금 방목하는 소가 들어와 수업이 중단된다(8쪽).” 하고 말합니다. 나가쿠라 히로미 님 《아프가니스탄 산골학교 아이들》에 실린 사진에는 호두나무 잎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이 함께 깃듭니다. 추운 날 매서운 바람이 함께 서립니다.

 멧기슭에 자리한 멧골학교 아이들은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저마다 연장 하나씩 들고 맨손으로 눈을 치웁니다. 아이들이라서 집안에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와 똑같은 일꾼입니다. 이 아이들은 학교로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가지 않습니다. 한두 시간쯤 걸어서 찾아가고, 한두 시간쯤 걸어서 돌아옵니다. 하루에 서너 시간 가벼이 걷는데, 집에서도 늘 서서 일하고 멧자락을 탑니다. 노상 해를 바라보고, 늘 해를 머리에 입니다. 구리빛 아이들은 멧골을 흐르는 물을 떠서 마셔요. 구리빛 아이들은 멧골물을 물지게를 져서 집으로 날라요. 저희 먹을거리를 저희가 일굴 줄 알고, 저희 먹을거리를 이웃과 동무랑 살가이 나눌 줄 알아요. 그러니까, 이 모든 모습과 이야기와 삶이 《아프가니스탄 산골학교 아이들》에 차곡차곡 담기니까, 나는 이 사진책을 읽으면서 아프가니스탄 멧골짝 아이들 꿈을 조용히 그립니다.

 덧바르려 하지 않는 사진이기에 덧바르며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숨기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 사진이므로 숨기거나 감추듯 읽을 일이 없습니다. 무언가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는 사진인 만큼 티없으면서 산뜻한 꿈결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진이란 이렇지요. 무지개빛으로 바라보면 무지개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웃음을 읽을 수 있어요.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눈물을 무지개빛 손길로 쓰다듬을 때에 무지개빛으로 고운 사진 하나 태어나요.

 “밀 수확이 끝나는 6월, 이어서 옥수수를 심는다. 추수로 바쁜 시기에는 아이들도 학교를 쉬고 집안일을 돕는다 … 가축을 부리고, 가래질을 하고, 잔일을 하느라 꼬질꼬질하고 갈라져 터진 아이들의 손. 그것은 다부진, 노동하는 손이다(35∼36쪽).” 하는 이야기처럼, 아이들 손은 꼬질꼬질하고 갈라져 터졌다 말할 만하지만, 어느 아이나 이와 같은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꼬질꼬질한 손’이 아니라 ‘멧골짝에서 살아가는 손’이에요. 흙을 만지는 손이니까 흙빛 손이에요. 하늘과 햇살을 먹으며 살아가니까 하늘과 햇살 기운 듬뿍 밴 얼굴이에요.

 아이들 삶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아이들 귀여운 얼굴을 귀엽게 담는다든지 가난한 삶을 가난하게 담는 일이 아니에요. 아이들 삶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우는 일이에요. 아이들이랑 먹을거리 하나 나누고, 아이들이랑 품 함께 들여 일을 하고, 아이들이랑 이불조각 나누어 덮는 일이 아이들 삶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에요.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망설일 까닭이 없어요. 무엇을 찍어야 하나 걱정할 일이 없어요. 애써 웃음짓게 하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고, 굳이 어두운 낯빛을 사진으로 담아야 하지 않아요.

 사진쟁이는 “20년 이상이나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지 5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전교생(170명 안팎) 중 48명이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충격이 컸다(65쪽).” 하고 말합니다. 한 집에 너덧 아이가 있다 하니까, 작은 멧골학교 아이들 집안에서 남자 어른 한 사람쯤은 전쟁통에 목숨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슬픈 아픔을 떠올리면, 아프가니스탄 멧골학교 아이들은 어둡고 퀴퀴하거나 서늘한 빛이 어린다고 여길 만하겠지요. 그러나, 어려운 이웃은 어려운 이웃대로 서로 돕고, 조금 나은 이웃은 조금 나은 대로 나누면서 살아가겠지요. 돈을 더 번대서 더 나은 삶이 아닙니다. 돈을 적게 번대서 더 나쁜 삶이 아닙니다.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에 즐거운 삶입니다. 사랑을 나누지 못할 때에 괴롭거나 슬프거나 아프거나 고된 삶입니다.

 나가쿠라 히로미 님은 아프가니스탄땅에서 ‘사랑을 나누는 무지개빛 삶’을 ‘무지개빛 아이들’을 만나면서 깨닫습니다. 즐겁게 깨닫고 신나게 깨달으면서 가슴 벅차게 솟는 따사로운 이야기를 사진으로 옮깁니다. 부자 나라 일본이 가난한 나라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가여이 여겨 돕는 일이 아닌, 사랑어린 손길로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는 징검돌을 사진 한 장으로 놓습니다. 사진은 무지개가 됩니다. (4344.11.3.나무.ㅎㄲㅅㄱ)


― 아프가니스탄 산골학교 아이들 (나가쿠라 히로미 사진·글,이영미 옮김,서해문집 펴냄,2007.6.20./119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