笑顔大好き地球の子 (大型本)
田沼 武能 / 新日本出版社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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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하는 사진책은 안 뜨지만, 다른 사진책에서도 이분 사진결을 느끼면 좋으리라 생각해서 다른 사진책에 느낌글을 걸칩니다) 



 지구별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자랍니다.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된 아이는 저처럼 작고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작고 어여쁜 아이는 새롭게 태어나고, 이 작고 어여쁜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다시금 저처럼 작으면서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온누리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아이가 새로 태어나서 자라기 때문에 나라살림을 이룹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때라야 비로소 한 나라 살림을 이룹니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일을 하거나 돈을 벌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오직 놀 수 있을 뿐이요, 어버이한테서 사랑받을 수 있을 뿐인데, 이렇게 여리디여리며 작디작은 아이가 있어야 비로소 어느 나라이든 나라꼴을 갖춥니다.

 잠수함이 없고 군함이 없어도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군대가 없거나 경찰이 없어도 나라를 돌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돌볼 수 없습니다. 아파트가 없고 쇼핑센터가 없어도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어요.

 ‘애국’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내 넋을 사랑하며 내 말을 사랑하는 나라사랑입니다. ‘경제개발 역군’이 되자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작은 살림집을 사랑하고, 내 살가운 살붙이를 사랑하자는 나라사랑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과 걸레질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먹으려고 밥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한테 입히려고 빨래를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오순도순 지내려고 비질과 걸레질을 해서 집안을 말끔히 치웁니다. 오직 사랑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을 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집안에서 살림을 꾸립니다.

 사진책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를 읽습니다. 사진책 《지구별 어린이》는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님이 온누리 숱한 나라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만난 아이들을 담습니다. 한두 나라 어린이가 아니라 백 나라를 훨씬 넘는 수많은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사귑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서도 제법 잘사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멸차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서도 퍽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많디많은 나라 많디많은 어린이를 사진책 하나로 마주하며 곱씹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아이들 웃음꽃은 서로 닮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눈물꽃 또한 서로 닮습니다. 아이들 눈망울은 비슷합니다. 아이들 몸짓은 비슷합니다. 저마다 즐기는 놀이가 다르고, 저마다 낳은 어버이와 키우는 어버이가 다를 테지만, 아이들 살림살이는 엇비슷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아간대서 더 불쌍해 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지낸대서 다 가엾게 보이거나 딱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나라살림이 넉넉해서 돈 걱정이나 배곯이 걱정이 없는 곳에서 지낸다 하는 아이들이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할는지 모릅니다. 주어진 틀에 따라 학교를 다녀야 하고, 시키는 틀에 따라 시험을 치러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하는 아이들이 훨씬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한데다가 고단할는지 모릅니다.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그저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이 아이들 차림새를 살피면 한눈에 이 아이가 살아가는 집안살림이 어떠한지 헤아릴 만합니다. 그런데 ‘집안살림 = 돈 크기’가 아니에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겁거나 오붓하게 지내는 집안이 있습니다. 돈은 있으나 돈만 넘치게 쓸 뿐, 기쁨이나 애틋함하고는 동떨어진 집안이 있어요.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만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은 끼니를 굶을 근심이 없더라도 마음속에 사랑이 피어나지 못합니다.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을 알맞게 나누어 서로서로 살뜰히 맡으면서 집안살림과 집밖살림을 알뜰히 여민다면, 이러한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가슴속 깊이 사랑씨를 뿌립니다. 아이들 웃음꽃이란 아이들을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뿌린 사랑씨에서 비롯합니다. 아이들 눈물꽃이란 아이들을 보살피며 함께 지내는 어버이가 뿌린 미움씨에서 비롯해요.

 새삼스레 《지구별 어린이》를 거듭 넘기고 다시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지구별에서 가 보지 않은 나라가 없겠지요. 모든 나라 모든 아이를 마주하며 사귀었을 텐데, 아마 어느 나라 어느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들 낯빛과 사랑빛과 눈물빛은 매한가지로구나 하고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나라로 찾아가서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지 않더라도 아이들 맑은 눈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더 가난하거나 더 ‘두메’라 하는 데까지 찾아가야 아이들 밝은 웃음빛을 만날 수 있지 않아요. 일본 사진쟁이로서는 일본에서 얼마든지 만나는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입니다. 한국 사진쟁이라면 한국에서 얼마든지 만날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일 테지요.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일본부터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만을 거쳐 지구별을 샅샅이 밟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어느 겨레를 찾아가서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는 아이답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어린이”가 아닌 “일본 어린이”가 되어도, 또 “일본 훗카이도 어린이”가 되어도, 또 “우리 집 내 아이”가 되어도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은 똑같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나한테 있습니다. 사진감과 사진말과 사진꽃과 사진빛과 사진뜻과 사진값과 사진꿈은 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나를 보고 내 삶을 볼 때에 내가 걸어갈 사진길을 깨닫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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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ghanistan (Paperback) - Broken Promise
Moises Saman / Charta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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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꿈 앞에서 흔들리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6]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



 한국에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알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거꾸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을 알기도 매우 힘들겠지요.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배울 일이란 없습니다. 세계사를 다루는 교과서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를 얼마나 실을까 궁금한데, 몇 줄쯤으로 이 나라 이야기를 다룰는지요. 몇 줄이든 몇 쪽이든 다루어 준다면 얼마나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는 눈썰미로 다룰는지요.

 한국사람은 이웃한 일본에서 ‘아이들한테 역사를 엉뚱하게 가르치는 교과서’를 자꾸 만든다며 나무라곤 합니다. 일본에서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일본 군국주의자하고 똑같습니다. 일본은 ‘일-한 역사 비틀기’를 하고, 한국은 ‘한국사람 여느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신문에 실리거나 방송에 나오는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는 온통 전쟁과 테러와 약탈과 가난과 파병뿐 아닌가 싶습니다. 때때로 ‘여성 권리가 아주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떠돌곤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사랑을 할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밥을 먹을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일을 하고 놀이를 즐기며 살아갈 텐데, 옷을 깁고 집을 지으며 동무를 사귈 텐데, 흙을 일구고 꽃을 사랑하며 나무를 돌볼 텐데, 아이를 낳고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용히 숨을 거둘 텐데, 숱하디숱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기란 참 어렵습니다.

 사진책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페루 리마에서 태어나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진기자나 사진작가로 일하는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님 사진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2004년에 《This is War》(CHARTA)를 내놓은 모이제스 사만 님은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서 아픈 채 살아야 하는 사람과 터전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 어떻게 슬픈지를 사진으로 조용히 보여줍니다. 아픈 채 살아가고 슬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고즈넉히 들려줍니다.

 사람도 땅도 집도 길도 꽃도 들판도 흔들립니다. 절뚝이면서 흔들리는지 모르고, 울다가 흔들리는지 모르며, 고개를 떨구기에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폭탄이 터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고, 탱크가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며, 군인들이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얼핏, 재미나다면 재미나고 무섭다면 무서운 이야기 하나 듣습니다.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군인한테 들이는 돈이 ‘군인 한 사람 앞에 해마다 100만 달러’만큼 된다고 하더군요. 2011년 1월부터 5월까지 들인 돈은 1130억 달러라고 합니다. 1억 원이 아닌 1억 달러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1억 달러라 하면 1000억 원이 넘으니까요. 1130억 달러라 하면 얼마나 큼지막한 돈이 될까요.

 미국 한 나라가 고작 다섯 달 동안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한 곳’으로 보낸 ‘싸움터 군인과 무기와 군사시설’에 들인 돈이 1130억 달러라 한다면, 이제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얼마나 되고, 지구별 곳곳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어떻게 될까 끔찍합니다. 지난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훨씬 끔찍합니다. 소련에 앞서 아프가니스탄하고 이웃한 나라에서 퍼부은 군사비에다가 서양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는지 헤아리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미국이며 소련이며 유럽이며,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보내어 사람을 죽이고 집을 허물며 땅을 망가뜨릴까요.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 가운데 1/10000이라도 아프가니스탄 논밭과 살림집과 어린이와 교육에 보태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지구별 평화와 사랑은 얼마나 달라지거나 거듭났을까요.

 사진책 《아프가니스탄, 깨진 다짐》에 나오는 어린이와 어른이 흔들립니다. 아니, 아프가니스탄 어린이와 어른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손과 눈과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니, 미국에서 살아가며 미국 언론매체에 보도사진을 보내는 노릇을 하는 ‘페루에서 태어나 에스파냐에서 자란’ 사진쟁이 몸뚱이가 흔들립니다.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사람은 아프가니스탄사람대로 살아갑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삽니다. 슬프거나 아프지만 어김없이 사랑이 꽃피고, 메마르거나 무섭거나 차디찬 땅에서도 새롭게 아이가 태어납니다. 더 나은 시설과 문화와 교육을 누리지 못한다지만, 이곳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는 한국 어린이나 미국 어린이하고 똑같이 착한 사랑과 고운 믿음을 온몸으로 예쁘게 맞아들이면서 자랍니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자라는 길에는 한결 맑은 하늘이나 한껏 푸른 들판보다 번쩍거리는 총칼을 휘두르는 군인에다가 쾅쾅 귀를 울리는 폭탄소리가 익숙할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탱크나 전투기나 폭탄이 보이지 않는 서울 시내 어린이는 괜찮은지요. 뉴욕 시내 어린이와 도쿄 시내 어린이는 걱정없는지요. 서울과 뉴욕과 도쿄 시내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는 어떠한 모습을 보고 어떠한 소리를 들으며 어떠한 나날을 보내는지요.

 어른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거나 거머쥐려는 힘센 나라 어른이 벌이거나 부추기는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믿음을 북돋우는 데에 돈을 안 쓰고, 전쟁무기 만들거나 살인훈련 받는 군인을 키우는 데에 돈을 끝없이 쓰는 ‘선진강대국’ 어른들이 저지르는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은 참으로 여리디여립니다. 사진 한 장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사진은 온누리를 바꾸지도 못하고, 아픔이나 생채기를 보여주지도 못하며, 눈물이나 웃음 또한 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그저 흔들릴 뿐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얼룩질 뿐입니다. 깨진 꿈이라기보다 깨뜨린 꿈을 찾거나 보듬거나 다스리기에는 너무도 벅찬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총알 구멍 숱하게 생긴 벽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그나마 이 벽은 폭탄을 맞아 송두리째 사라진다든지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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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사진관
최창수 사진.글 / 북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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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나들이
 [찾아 읽는 사진책 33] 최창수, 《지구별 사진관》(북하우스,2007)


 퍽 젊다고 하는 나이에 지구별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최창수 님이 당신이 찍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담은 책 《지구별 사진관》(북하우스,2007)을 읽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살피면서 꼭 아무개 사진 느낌이 난다 하고 생각했더니, “아무튼 나는 스티브 매커리 사진을 열심히 흉내내기 시작했다. 거장의 작품을 함부로 따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난 그 과정을 통해 내 사진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꼈다(25쪽).”는 말마따나,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을 따라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이 얼마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기에 굳이 이분 사진을 따라하느냐 싶습니다. 아니, 최창수는 최창수이지, 굳이 스티브 매커리 사진 느낌이 나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다큐사진을 찍는다는 어느 분은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이나 요제프 쿠델카 님 사진을 따라하려고 애쓰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참 딱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살가도 님 사진이 좋으면 마음으로 담으면 됩니다. 쿠델카 님 사진이 좋을 때에도 마음으로 옮기면 돼요.

 어쩌면 습작을 하듯이 따라할 수 있습니다. 그림쟁이 고흐 님이 밀레 님 그림을 따라 그리듯이, 얼마든지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이든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이든 따라하며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흐 님이 밀레 님 그림을 따라하며 그릴 때에는 ‘밀레 붓질이 살아나는 그림’이 아니라 ‘고흐 붓질이 춤추는 그림’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그림결을 배우면서 고개를 숙이되, 내 마음과 넋을 알뜰히 살리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사진책 《지구별 사진관》을 넘기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은 ‘최창수 사진인가, 아닌가?’ 하고.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도시보다는 시골을 찾았고, 큰길보다는 골목을 헤맸고, 축제를 쫓아다녔다. 사진 찍는 게 별일이 아닌 잘사는 나라보다는 사진기를 둘러멘 내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쏟아 주는 오지를 여행했다(18쪽).”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합니다. 시골에 찾아간대서 더 낫다 싶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골목을 헤맨들 잔치마당을 찾아나선들 더 낫다 싶은 사진거리를 얻을 수 있지 않아요.

 최창수 님은 ‘오지 여행’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오지’라 하는 ‘두메’란 이 지구별 어디에도 없어요. 두메가 아닌 ‘삶터’입니다. 두메로 찾아가는 사람한테는 참 깊디깊어 멀디멀구나 하고 느낄는지 모르나, ‘두메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내 보금자리에서 내 깜냥껏 즐거이 삶을 일구니까, 이러한 두메 삶자락은 ‘외딴 곳’이 되지 않아요. 살가우며 아름다운 보금자리입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으레 ‘오지 여행’이라 말하지만, ‘여행길을 나서는 사람한테만 멀다’뿐, ‘여행하는 사람이 찾아간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한테는 살가우며 넉넉한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이라면 ‘여행하는 내가 외딴 곳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따숩게 반기는 곳에서 더 따숩게 느낄 만한 사진을 찍을 노릇이 아니라, ‘여행하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 둘레’에서 ‘가장 흔하며 너른 이웃’한테도 더없이 따숩게 느낄 만한 사진을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다운 사진이 됩니다. 스티브 매커리라는 이가 찍은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이겠지요.

 “난간에 매달리고, 철로나 도로에 뛰어들고, 바닷물이나 빗속을 헤매는 등 갖은 위험한 상황에 온몸과 카메라를 내던졌다. 그러고는 내가 봐도 프로 같은 내 모습에 도취하곤 했다. 사진도 그렇게 찍으니 보답이라도 하듯 잘 나오는 것 같았다(34∼35쪽).”는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프로 같은’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이 잘 나오는’ 듯한 느낌이란 무엇인가요? 사진에는 프로와 아마란 부질없습니다. 아니, 사진뿐 아니라 글이든 연극이든 삶이든 마찬가지예요. 프로 살림꾼이 밥을 잘 할는지요. 여느 살림꾼이 한 밥은 맛이 없을는지요.

 남들이 알아주어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공모전에서 상을 받아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평론가가 손가락을 추켜세워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달력에 깃드는 사진이 되어야 좋은 사진이 아니에요.

 “나는 사진을 통해 그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간의 행복과, 희망, 사랑, 우정. 잘사는 나라가 아닌 가난한 나라에서 피어난 것이라면 더욱 소중하고 순수할 것이었다(39쪽).” 같은 이야기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맙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피어난 사랑이기에 더욱 아름답거나 깨끗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면 어디에서 어떤 사랑이 되더라도 아름답거나 깨끗합니다.

 5만 원을 가진 사람이 6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할까요. 50만 원을 가진 사람이 60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한가요. 500만 원을 가진 사람이 600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하다 할 만한가요.

 가난한 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사랑과 희망과 우정을 이야기하는 사진을 얻는다면, 가난하지 않다는 나라에는 사랑과 희망과 우정이 없다는 뜻이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면, 사랑도 희망도 우정도 없다는 가난하지 않다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가려나요. 사진을 찍은 최창수 님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가난하지 않은 나라’인데, 이 가난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는 사랑이나 희망이나 우정을 찾아볼 수 없이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하기만 할는지요.

 이리하여, 최창수 님은 “나는 프로 사진작가에 비해 실력, 장비, 경비, 일정, 교통수단 등 모자라는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되는 건 단 한 가지, 여행과 사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59∼60쪽).” 하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어쩌면 ‘순수한 열정’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진길을 걷는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웃 일본이나 중국으로조차 마실을 못 가곤 합니다. ‘오지 여행’이든 ‘세계 여행’이든 꿈조차 못 꾸는 프로 사진쟁이가 꽤 많습니다. 참말로 최창수 님한테 더 나은 대목은 ‘순수한 열정’이라 할 만할까요. 최창수 님한테는 ‘순수한 열정’이 있어서 사진여행을 다닐 수 있었을까요.

 “이란 이후에는 대개의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가 그러듯 터키로 향할 계획이었고, 예멘이란 동네는 지구본을 돌려 보지 않는 이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195쪽).” 같은 대목에서도 느끼지만, 지구별 어디에 붙었는지조차 모르는 나라로 간대서 한결 나은 사진을 얻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나라라 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아끼는지를 알 턱이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동무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늘 스쳐 지나가면서 찍는 사진이 되는데, 스쳐 지나가면서 사람들한테 ‘웃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바라거나 웃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꽃을 피울 때에 찍는 사진이란 얼마나 아름답거나 보람차거나 사랑스럽다 할 만한 사진이 될까 알쏭달쏭합니다. 무엇보다, 예멘사람은 예멘사람입니다. 최창수 님은 예멘을 몰라도 예멘사람은 예멘을 압니다. 예멘사람은 예나 이제나 예멘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예멘은 ‘두메’도 ‘먼 나라’도 ‘숨은 나라’도 아닙니다.

 “그(일본 여행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멘 남자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지 뒤통수에 대고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201쪽).” 같은 대목에서도 새삼스레 느낍니다. 예멘사람들처럼 옷을 차려입은 사람이 웃기게 보여서 비웃는다면, 예멘사람들 차림새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안 웃겨 보일는지 궁금합니다. 예멘사람이 입는 옷을 장만해서 몸소 입는 사람하고, 예멘사람 차림새를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사진으로 담는 사람하고, 어느 쪽에 예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느껴 보려고 한달 수 있을까요.

 가장 나은 길이라 한다면, 돈을 주고 예멘 옷을 사 입기보다, 예멘땅 어디에서라도 일자리를 얻어 예멘사람하고 함께 일하면서 시나브로 여느 예멘사람 옷차림으로 스며들 때입니다. 지나가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멈추어 서서 옷을 입은 사람’을 비웃는다면 그야말로 걸맞지 않습니다. 예멘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니까 예멘 옷차림이 어울릴 수 없을 텐데, 어울릴 수 없는 옷차림을 당차게 하면서 거리낌없이 걸어다닐 만큼 고개를 들지 않으면서 얼마나 예멘을 사귀면서 사랑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책을 덮습니다.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에서 느낌을 따왔다는 《지구별 사진관》이라는 사진책을 덮습니다.

 지구별은 여행하는 곳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테지만, 지구별은 여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구별은 살아가는 곳입니다.

 지구별에서 사진관을 차릴 수도 있을 테지만, 지구별은 사진찍는 곳이 아닙니다. 지구별은 사랑하는 곳입니다.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쩌다 찾아와서 한 번 스치고 지나갈 뜨내기’한테 ‘고맙게 사진으로 찍혀’ 주는 ‘착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지구별 사진관》은 사진 장비라든지 사진결이라든지, 얼추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결을 닮으려고 애쓴 티가 물씬 납니다. 그러나, 질감이나 빛이나 사진감은 스티브 매커리 님을 따라하지만, 막상 스티브 매커리 님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던 넋을 살피면서 배우지는 못합니다.

 참말, 스티브 매커리 님은 ‘착한 사람을 착한 삶 그대로 껴안으면서 수수하게 보여주는’ 일을 사진찍기로 이루었습니다. 돋보일 까닭이 없는 사진이고, 꼭 이러한 사진결이어야 하기 때문에 스티브 매커리 님은 당신 나름대로 이러한 사진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최창수 님은 겉으로 보이는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 질감과 빛깔만 따라하고야 맙니다.

 더 예쁘게 나올 까닭이 없는 사진이고, 더 멋지게 보일 까닭이 없는 사진입니다. 더 대단하게 보여야 하는 사진이 아니요, 더 널리 팔리거나 내보일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착하게 담는 그릇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부대끼는 나날을 참다이 일구는 호미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어깨동무하는 누리를 곱게 보듬는 손길입니다.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사진을 찍어도 좋습니다. 다만, 더 적은 곳을 돌아다니거나 더 조금 사진을 찍어도 좋아요.

 사진은 남한테 보여주려고 찍을 수 없어요. 찍은 사진을 누군가 본다고 할 테지만, 사진은 남한테 보여줄 마음으로 찍지 않아요. 누구한테 읽히려고 쓰는 글이 아니고,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에요.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아름다움을 붓이나 연필이나 사진기를 쥐어 살포시 옮길 뿐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웃어 줍니다. 웃을 만하니까 웃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시무룩합니다. 시무룩할 만하니까 시무룩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왜 아프가니스탄일까요. 예멘은 왜 예멘이고, 이란은 왜 이란인가요. 중동과 아프리카에 넘치는 무기는 누가 만들어서 누가 팔고 누가 사서 누가 쓸까요. 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왜 강대국과 선진국은 전쟁무기뿐 아니라 사진예술로까지 장사를 할까요. ‘프로 사진쟁이’와 ‘상업 사진쟁이’는 어떻게 다르고, ‘사진쟁이’와 ‘사진 장사꾼’은 어떻게 다를는지요.

 최창수 님이 두 번째 《지구별 사진관》을 내놓을 생각이 있다면, 두 번째 사진책을 내놓을 적에는 두 번째 책에 담긴 사진으로 찍힌 이들한테 돈을 듬뿍듬뿍 주기를 바랍니다. 모델값을 주어야지요. 초상권이 있잖아요.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얼굴사진을 찍힌 다음에 돈을 바라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만큼은 초상권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내주어야 하는 돈입니다. 티벳사람만 ‘사진으로 찍힐 때에 내 넋이 빠져나간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잘 찍은 사진이든 잘 못 찍은 사진이든, 찍히는 사람들 넋이 사진에 스며듭니다.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내준 고운 넋을 사진책으로 엮을 때에는 ‘웃는 얼굴’ 사진만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습니다. (4344.6.1.물.ㅎㄲㅅㄱ)


― 지구별 사진관 (최창수 사진·글,북하우스 펴냄,2007.10.29./12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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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행복을 담는 엄마의 카메라 - Family Photography
장화영 글.사진 / 다빈치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사진기와 함께 사랑을 들어 주셔요
 [찾아 읽는 사진책 32] 장화영, 《엄마의 카메라》(다빈치,2007)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무엇보다도 아이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사진 느낌이 확 갈립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앞서 옆지기와 둘이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기를 쥔 내가 옆지기를 어느 만큼 깊으면서 넓은 사랑으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사진 느낌이 크게 달라져요.

 모델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다큐멘터리를 빚으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모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모델을 얼마만큼 생각하면서 아끼는가에 따라서 사진 느낌이 새록새록 거듭납니다. 다큐멘터리를 빚으며 이야기를 갈무리하려는 사진쟁이는 이녁이 마주하는 사람하고 얼마나 따스하면서 너그러운 넋과 얼로 손을 맞잡느냐에 따라 사진 이야기가 이모저모 샘솟거나 수그러듭니다.

 사진찍기로 밥벌이를 하지만, 아이를 둘 낳아서 키우는 어머니인 장화영 님이 글을 쓰고 사진을 담은 책 《엄마의 카메라》(다빈치,2007)를 읽습니다. 첫째를 2008년에 낳고 둘째를 2011년에 낳을 살림집에서 집안일과 집밖일을 도맡는 아버지로서 《엄마의 카메라》라는 책은 ‘집안일과 집밖일에 함께 마음을 쓰는 사람’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까 생각하면서 몹시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나오는 사진책을 돌아보면, 어떠한 책이건 ‘집안일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집밖일로 사진기만 쥐는 사람’들 삶과 넋과 말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말에서 “카메라를 들고 아이와 마주했을 때 아이의 눈빛에서 ‘화’를 보기도 하고 ‘슬픔’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조용히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이와 대화를 하기 위해 엄마가 아닌 친구가 되려고 노력합니다(9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몹시 반갑고 기쁩니다.

 그렇지만 친구 아닌 엄마가 되어야지요. 엄마로서 아이하고 사랑스러운 살붙이로 지내야지요. 어머니는 어머니이지 동무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지 벗이 아니에요. 내 아이는 내 아이입니다. 내 아이를 아이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는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예요. 모두 이분들 자리를 옳게 돌아보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제 어머니한테 바라는 무언가 있다면 ‘어머니가 어머니로 나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지, ‘어머니가 동무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리라 느낍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사진찍기를 일거리로 삼아서 살아가자면, 남자이든 여자이든 집안일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집안일에 얽매여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집안일은 다른 누군가 도맡아 주어야 합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은 사진기만 헤아려야 합니다. 사진기만 헤아리더라도 겨룸에서 밀리거나 다툼에서 쓰러질 테니까, 사진기 아닌 다른 사람이나 자리나 삶을 생각한다면, 한국땅에서는 벌써 ‘두 손 든’ 셈이라 할 만해요.

 사진책 《엄마의 카메라》를 쓴 장화영 님은 “카메라 컬렉터가 아니라 사진이 목적이라면, 너무 기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진은 기계 외적 요인(심리적 상태, 의욕, 테마 등)의 역할이 크게 작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33쪽).”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몇 대목 없습니다. 더군다나 기계에 얽매여서 안 되는 만큼 ‘사진쟁이 일을 하는 어버이 삶’에도 얽매여서는 안 되는 줄을 자꾸 잊습니다.

 270쪽에 이르는 책에서 “엄마 사진기”라는 책이름에 걸맞게 ‘엄마가 손에 쥔 사진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 몹시 드뭅니다. ‘그냥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이야기입니다. ‘계급’은 엄마일는지 모르나, 막상 이야기를 펼칠 때에는 ‘엄마 아닌 남자 사진쟁이’라 할 만합니다. 엄마 자리에 서서 이 땅 수많은 엄마들한테 들려주는 사진 이야기라든지, 이 땅 숱한 아이들한테 속삭이는 사진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카메라는 사람의 눈과 유사하지만 결코 같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신이 선물한 우리의 눈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골라 보는 탁월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확대하거나 축소하여 해석하는 재미나고도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눈에 ‘콩깍지’라는 것이 붙기도 하고 ‘미운 털’이 박히기도 합니다(44∼45쪽).” 같은 이야기는 좋습니다. 참으로 좋은 이야기입니다.

 아쉽다면, 이렇게 좋은 이야기는 ‘엄마 사진쟁이’가 아닌 ‘여느 사진쟁이’ 누구나 느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펼치려고 《엄마의 카메라》를 썼다고 한다면 좀 슬픕니다. 《엄마의 카메라》가 어울릴 뿐 아니라 아름답자면, 어머니로서 아이와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얼마나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사진길을 걷는가 하는 이야기가 불거져야 합니다. 더 빼어난 솜씨가 없어도 됩니다. 더 훌륭한 재주가 없어도 됩니다. 사진찍기는 솜씨나 재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솜씨는 있으나 사랑이 없다면, 재주는 빼어나다지만 마음이 가난하다면, 사진장비는 값지지만 삶은 값진 길을 걷지 못한다면, 이러한 흐름에서 ‘사진을 찍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이 마음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진기로 찍지 않습니다. 아니,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기를 써야겠지요. 그런데 사진기가 있대서 사진을 찍지는 않아요. 사진기는 있으나 사랑이 없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어요. 사진기는 없어도 사랑이 있으면 사진을 찍습니다. 다만, 사진기 없이 사랑이 있는 사람은 종이에 뽑을 만한 사진을 얻지는 못해요. 언제나 가슴속으로 아로새기는 사진을 빚고 나누며 즐깁니다.

 사진을 찍겠다고 다짐하거나 생각하는 분이라면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아이라 하든 이웃집 아이라 하든 ‘사진기’라는 장비를 몰라요. 더 나은 사진장비가 되든 무척 값진 사진장비가 되면 아이는 몰라요. 내 자가용이 값싸고 작든 내 자가용이 크며 비싸든 아이는 모릅니다. 아니,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 자가용이 있거나 없거나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이는 제 어버이가 반지하에 사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한테는 사랑이 없으면 젬병입니다. 아이한테 사랑을 나눌 수 없다면 부질없습니다.

 아이가 아닌 어른끼리도 이야기합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겨레도 뭐도 없다고 합니다. 돈있는 사람끼리 사랑하거나 돈없는 사람끼리 사랑하는 일이란 없어요. 마음이 맞거나 마음을 기울여 서로를 아끼는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한국사람이 일본사람하고 짝을 짓든, 한국사람이 네팔사람이나 덴마크사람하고 짝을 맺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참으로 사랑하는 넋이면 돼요.

 아마, 어른 가운데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어른이라면 사랑이 왜 사랑인가를 잘 안다고 할 만하겠지요. 그러면 아이하고도 똑같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아이하고 사진을 찍을 때에는 기계가 아닌 가슴으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아이하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일굴 때에는 기계 아닌 따순 손길로 이야기를 일구어야 합니다. 조리개며 빛이며 기계이며 색온도이며 하나도 마음쓸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인 내가 마음쓸 대목이란 어머니로서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버지로서 아이를 어떻게 믿느냐입니다.

 아무쪼록 사진기라는 기계와 함께 어머니 손길이 듬뿍 밴 사랑을 함께 들어 주셔요. 놀라운 사진이나 돋보이는 사진은 없어도 되니까, 아이하고 오붓한 사랑과 즐거운 믿음을 어깨동무해 주셔요.

 “여러 빛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110쪽).” 같은 말마따나, 날마다 언제나 새로운 아이하고 새 하루를 맞이하는 나날이란 날마다 새로운 사랑을 하는 기쁨이자 놀라움입니다. ‘엄마가 나누려는 사랑’보다 ‘사진쟁이인 엄마가 아닌 사진 지식’ 이야기에 너무 치우치고 말아 아쉽습니다만, 앞으로는 ‘엄마 사진쟁이’가 참말로 《엄마의 카메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이야기책 하나 빚어서 나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4.5.20.쇠.ㅎㄲㅅㄱ)


― 엄마의 카메라 (장화영 사진·글,다빈치 펴냄,2007.12.2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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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페 일기 - 행복이란 분명 이런 것 다카페 일기 1
모리 유지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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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껏 찍으셔요, 사진이니까요
 [찾아 읽는 사진책 31] 모리 유지, 《다카페 일기》(북스코프,2008)



 날마다 집에서 아이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보내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집에서 아이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보내는 나날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침에는 집 바깥 일터로 가서 일을 하고 저녁나절에 느즈막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이러한 삶흐름에 맞추어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여느 날에 아이하고 마주하는 겨를이 적다면, 주말이나 쉬는 때에 아이하고 조금 더 오래 마주하면서 조금 더 많이 사진을 찍자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른바 ‘출사 사진’처럼 아이 사진을 찍습니다.

 여느 날에 아이하고 늘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출사 사진’이 덧없을 뿐 아니라, 출사 사진을 찍을 일도 까닭도 겨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바라보면서 ‘자, 활짝 웃어 보렴!’ 하고 말하면서 찍을 어버이란 없을 테니까요. 아이가 활짝 웃으며 신나게 놀 때에 곁에서 이 모습을 놓치지 않으면서 찍으면 되니까요.

 아이 앞에서든 모델 앞에서든 매한가지입니다. 사람을 마주보면서 ‘자, 활짝 웃어 보셔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찍는 사진은 이름으로는 사진이지만 사진이 아닙니다. ‘자, 이렇게 해 보셔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담는 사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진이지만 사진이 아니에요. 똑같이 ‘얼굴 힘살을 움직인’대서 웃음이 되지는 않아요. 놀면서 짓는 웃음이랑 사진기 앞에서 짓는 웃음은 다릅니다. 놀면서 웃을 때에 곁에서 즐거이 사진으로 담아야지, 다 놀고 나서 쉬는 때에 얼굴빛만 웃으라 하면서 웃음꽃 사진을 빚는대서 ‘사진 한 장에 이야기가 깃들’ 수는 없습니다.

 사진책 《다카페 일기》(북스코프,2008)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포토넷,2010)하고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같다면 같으나 다르다면 다른 사진책 《다카페 일기》를 곰곰이 살피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다카페 일기》는 ‘집에서 아이하고 함께 지내는 겨를이 긴 사람’이 ‘집에서 언제나 아이하고 복닥이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은 ‘바깥일로 바쁜 사람’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때와 주말과 쉬는 날을 맞이해서 집안 식구 나날을 바지런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윤미네 집》을 좋아합니다. 다만, 《윤미네 집》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사진책에 깃든 좋고 아쉬운 대목을 모두 좋아합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은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로 나뉜 우리네 모습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윤미네 집》을 일군 전몽각 님은 집에 머물 겨를이 거의 없었을 테지만, 아이하고 조금 더 만나고픈 꿈을 사진으로 키웁니다. 아이하고 자주 마음껏 놀 수 없으나, 적어도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자리에는 함께하려고 힘씁니다. 지난날이건 오늘날이건 아이가 학교에서 맞이하는 크고작은 행사에 함께하는 아버지는 그리 안 많습니다. 전몽각 님은 몹시 애쓰고 힘쓰면서 《윤미네 집》을 가까스로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책 《윤미네 집》에는 아이가 하루하루 남달리 자라거나 크면서 으레 바라볼 예쁘면서 밉고, 미우면서 예쁜, 즐거우면서 고단하고, 고단하면서 즐거운 ‘여느 삶 여느 모습 여느 이야기’가 얼마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하거나 저러하거나 사진책 《윤미네 집》에는 집식구를 알뜰히 사랑하는 따사로운 손길이 깊이 스며요.

 사진책 《다카페 일기》를 빚은 모리 유지 님도 바깥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전몽각 님과 달리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몽각 님하고 다르게 ‘집에서 아이하고 복닥이거나 부대끼는 겨를이 퍽 길다’ 여길 수 있습니다.

 《다카페 일기》를 일군 모리 유지 님을 놓고, 옆지기 ‘다짱’ 님은 “남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외부에서 사진 찍는 걸 아주 곤혹스러워 합니다. 망원렌즈를 구입한 뒤에도 바다(딸아이)의 운동회를 비롯해 여러 행사에 참여했지만, 카메라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진과 디자인으로 집식구를 먹여살린다는 모리 유지 님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사진을 못 찍는다고 하니까, 사람을 찍는 사진쟁이는 아니고 물건이나 건축을 사진으로 찍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카페 일기》 끝자락에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될 평범한 날들을 아내와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고, 가끔 토닥거리기도 하면서, 나 나름대로 열심히 보내고, 바다와 하늘이를 잘 키우고, 그날들을 찍고, 일기에 쓰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리 유지 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옆지기와 아이 삶을 늘 부대끼면서 언제나 사진으로 담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잘난 사진이나 뛰어난 사진이나 멋진 사진이나 놀라운 사진을 찍을 마음은 없다는 소리입니다. 날마다 마주하는 사랑스러운 삶자락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품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사진이니까 신나게 찍습니다. 사진이기에 마음껏 찍습니다. 누구 눈치를 볼 까닭이 없습니다. 무슨무슨 ‘사진 경향’이나 ‘사진 조류’에 휩쓸릴 까닭이 없습니다. 어떤저떤 사진 장비를 갖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사진강의를 듣거나 사진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무지개빛 사진으로 찍든 까망하양 사진으로 찍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 한삶을 다큐멘터리처럼 엮는다든지 패션사진처럼 뽐낸다든지 할 까닭이 없어요. 아이를 찍는 사진은 아이를 아이답게 담으면 즐겁습니다. 옆지기를 담는 사진은 옆지기를 옆지기 그대로 담으면 아름답습니다.

 모델 아무개처럼 보이도록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얼짱각도로 찍어야 할 사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꾸밈없이 찍으면 될 사진입니다. 따사로운 손길을 따사로운 눈길로 누리면 될 사진입니다. 마음껏 찍으셔요, 사진이니까요.

 그나저나, 《다카페 일기》에 나오는 어른 두 사람은 ‘일본말 이름’으로 적으면서, 아이 둘은 ‘한국말 이름’으로 적은 대목은 잘못입니다. 아이 이름을 ‘바다’와 ‘하늘’이라 했으나, 일본말대로 적어야지요. 일본사람이 ‘海’와 ‘空’으로 붙인 일본 이름이니까, 이 일본 이름 그대로 읽어야 마땅합니다. 맑은 사진을 바라보며 즐기다가, 엉뚱한 번역 때문에 살짝 낯을 찌푸립니다. (4344.5.18.물.ㅎㄲㅅㄱ)


― 다카페 일기 (모리 유지 사진·글,권남희 옮김,북스코프 펴냄,2008.12.22./15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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