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이갑철 지음 / 류가헌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다
 [찾아 읽는 사진책 76] 이갑철, 《가을에》(류가헌,2011)

 


 이 겨울에 대청마루로 스미는 볕살을 누립니다. 우리 집 네 살 아이는 대청마루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쿵쿵 발을 구릅니다. 이리 달리고 저리 내닫습니다. 나무널로 지은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좋을까요. 맨발로 쿵쿵 달릴 때마다 발바닥부터 머리카락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신날까요.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린 날을 돌이킵니다. 인천에서 충남 당진으로 내 어버이를 따라 나들이를 하노라면,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곧장 해를 바라보는 대청마루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운 대청마루입니다. 여름에 발바닥으로 느끼는 마루결이랑 겨울에 발바닥으로 받아들이는 마루결이 사뭇 달라요. 겨울날 쉬를 누러 대청마루에 발을 디디면, 또 신을 꿰려고 대청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저 밑 신발을 찾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쉬를 누고 돌아와 대청마루에 손을 디디면, 이 차가운 기운이 얼마나 파르르 떨리면서 올라오던지요. 얇은 창호종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또 얼마나 차가운데, 방바닥은 뜨끈뜨끈한 불이 올라오던지요.

 

 두 아이와 옆지기랑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돌아봅니다. 이런 시골집에서 살아가리라 생각하지 못했을는지, 꿈꾼 적이 없었는지 돌아봅니다. 어린 날 살던 인천 오래된 아파트는 마루가 나무바닥이었습니다. 방은 시멘트바닥이었으나, 마루는 나무였어요. 5층 작은 아파트는 연탄을 때도록 되었는데, 연탄 한 장 집어넣어 바닥을 덥히더라도 워낙 추워 마루에 난로를 피우고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어요. 우리 집은 툇마루 바깥창이 없었기에 방에 달린 창문에는 언제나 성에가 끼고 얼음이 두껍게 맺혔습니다. 아침마다 얼음을 떼내고 걸레질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렇게 안 하면 창문에 맺힌 얼음이 툭툭 떨어지거나 얼음 녹는 물이 벽을 타고 줄줄 흘렀어요.

 

 아버지 어머니 태어난 시골집으로 겨울 나들이를 가서 스무 날쯤 지내면, 유리 아닌 종이로 댄 창문에 성에가 끼거나 얼음이 얼 일이란 없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은 나무로 불을 때고, 어디를 걷든 달리든 놀든 흙을 밟습니다. 내 어릴 적 내 어버이 시골집은 온통 흙누리였어요. 흙이랑 물이랑 풀이랑 바람이랑 햇살이 골고루 하나로 얼크러졌어요.

 

 인천을 떠나 두 해째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처음 한 해를 보낸 충청북도 멧골자락에서든 올 새 한 해를 보내는 전라남도 시골자락에서든, 마당이나 고샅이나 모두 시멘트길입니다. 애써 도시를 벗어나 시골살이를 누리지만, 흙으로 된 땅을 밟기 만만하지 않아요. 집이며 벽이며 바닥이며 시멘트입니다. 흙이랑 나무로 따로 집을 짓지 않는다면, 하루 내내 시멘트에 둘러싸인 채 시멘트내음을 맡아야 합니다.

 

 흙을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쇠붙이나 대리석으로 덮어야 문명이 될까요. 흙을 밟지 않아야 세계시민이나 문화시민이 되나요. 나는 ‘시민’이 아니라 ‘군민’이고 ‘면민’이자 ‘마을사람’인데, 조그마한 시골마을 사람으로서 흙을 누리는 길은 꽁꽁 틀어막혀야 하나요.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은 흙땅입니다. 어릴 적 으레 갯벌에 놀러다니고, 흙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동무들하고 놀았습니다. 흙이 있어야 땅바닥에 금을 긋고 놉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된 땅바닥에서 놀자면 학교에서 분필 몇 자루 훔쳐야 합니다. 또는 바닥에 대고 그을 때 하얗게 묻어나는 돌멩이를 어디에선가 주워야 합니다.

 

 학교 운동장 흙땅에서 공차기를 하고 공놀이를 하며 즐거웠습니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조금 까질 뿐, 때로는 피가 살짝 날 뿐, 어디 뼈가 부러지거나 으스러지지 않아요. 사내아이는 누구나 얼굴 몇 군데 흙땅에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며 긁힌 자국이 있습니다. 긁혀 피가 나더라도 모두들 똑같으니 옷섶으로 슥슥 문지르고 끝납니다. 무릎이 까지면 살짝 이맛살 찡그리고 절뚝이다가 어느새 아까와 똑같이 내달리며 놉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연탄공장 바로 곁, 철길하고 이웃한 국민학교에서 맞이한 운동회는 언제나 두근두근 설레는 놀이마당입니다. 운동회를 앞두고 봄부터 가을까지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두어 시간 남짓 해야 했지만, 운동회 하루 놀 생각으로 이 고단한 ‘훈련 같은 연습’을 잘 치렀습니다. 운동회를 한 달 앞두면 연습은 네 시간으로 늘어났고, 각목을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교사들 앞에서 움찔거리면서도 운동장 흙땅에서 온몸이 누렇게 바뀌어도 잘만 뒹굴었어요. 날마다 체육복을 빨아도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하느라 체육복은 너덜너덜 흙투성이가 되고, 연습을 마치면 이 너덜너덜 흙투성이 체육복차림으로 또 몇 시간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어요.

 

 이갑철 님 사진책 《가을에》(류가헌,201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책 《가을에》에 담긴 모습은 시골마을 운동회라 하는데, 시골마을 같지 않은 시골마을 운동회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연대를 살그머니 거슬러오르면, 시골마을 아닌 여느 도시에서도 이와 얼추 비슷한 모습을 쉬 보았으니까요. 1970년대이든 1960년대이든 1950년대이든, 큰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국민학교가 아니라면 으레 작은 동산 한둘쯤 옆에 낀 학교였고, 학교 둘레로 풀밭이나 논밭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여느 도시라면 멧꼭대기까지 빼곡하게 들어차는 다닥다닥 작은 집이 있었어요. 어르신들도 손주 운동회 뛰는 모습을 구경 나오고, 조촐히 동네잔치를 이루었어요.

 

 그러고 보면, 《가을에》는 시골마을 운동회를 담는데, 막상 ‘여느 도시 작은 국민학교 작은 운동회’이든 ‘커다란 도시 큰 국민학교 큼지막한 운동회’이든 알뜰살뜰 사진으로 남겨 이야기자락 하나 빚은 일이 거의 없구나 싶습니다. 이 나라 자그마한 분교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분은 있으나, 이 나라 여느 도시 여느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이는 없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 운동회를 두고두고 다시 찾아가며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모두들 멀디먼 옛날 옛적 이야기만 헤아릴 뿐, 바로 오늘 바로 이곳 바로 우리 아이들 요즈막 웃음꽃과 눈물바람이 깃든 운동회 파란하늘 흙땅을 살피는 사진이야기 피어나기란 너무 벅찬 노릇이구나 싶어요.

 

 사진책 《가을에》는 사랑스럽습니다.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는 사람들 싱그러운 꿈을 느낄 만합니다. 누군가 “겨울에”나 “봄에”나 “여름에”를 뒤이어 빚을 수 있다면, 누군가 저마다 다 다른 자리 다 다른 이야기 서린 다 다른 “가을에”를 예쁘게 바라보며 얼싸안을 수 있다면, 산들바람 부는 가을빛과 눈바람 부는 겨울빛과 꽃바람 부는 봄빛과 햇살바람 부는 여름빛을 곱다시 무르녹일 수 있으면, 참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 얼굴이 흙을 닮아 흙빛일 때에 그지없이 사랑스럽습니다. (4344.12.21.물.ㅎㄲㅅㄱ)


― 가을에 (이갑철 사진,류가헌 펴냄,2011.10.31./4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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