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ward S. Curtis (Hardcover) - The Women
Christopher Cardozo / Bulfinch Pr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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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5]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the Women》(Buffinch,2005)



 마흔 살 일소와 여든 살 흙일꾼 할아버지가 나오는 영화 〈워낭소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퍽 많은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는 극장이 없고, 극장을 찾아 도시로 마실을 가기도 힘드니까요. 아마 시골마을 여느 흙일꾼도 이 영화를 볼 일은 없겠지요. 〈워낭소리〉를 찍은 영화감독은 이 영화를 시골마을 흙일꾼한테 차근차근 보여줄 마음이었을까요, 도시사람한테 널리 내보일 마음이었을까요.

 새 보금자리를 찾아 온 식구를 이끌고 전라남도 고흥으로 찾아와서 여관에 묵는 동안 여관 텔레비전으로 〈워낭소리〉를 봅니다. 조용한 이야기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며 담은 영화 〈워낭소리〉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늙은 소와 사람이 있고, 이 나라 시골 어디에서나 이처럼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가 애틋합니다. 다만, 이제껏 시골자락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영화로든 연극으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담으려 애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과 권정생 님은 시골자락 일소 이야기를 어린이시로 썼으나, 이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곰삭이며 연속극이나 소설이나 뮤지컬로 일구는 일은 없습니다.

 시골자락에서 소는 한식구입니다. 보배로운 한식구입니다. 시골집 소마다 기나긴 나날에 걸친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듭니다. 〈워낭소리〉는 많디많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한겨레 문화·예술인은 한겨레 일소를 들여다볼 줄 모르면서 갈비를 뜯거나 등심을 먹거나 꼬리곰탕을 즐기는데, 이제 겨우 일소 이야기 하나가 영화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염소 이야기라든지 돼지 이야기라든지 닭 이야기라든지 고양이 이야기라든지 개 이야기라든지 살뜰히 다룬 적은 아직 없습니다. 더욱이, 〈워낭소리〉가 되든 〈트랜스포머〉나 〈아바타〉가 되든, 이들 영화는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봅니다.

 이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도시로 보냅니다. 사람도 도시로 보내고 물건도 도시로 보냅니다. 유기농 곡식이든 화학농 곡식이든 온통 도시로 보냅니다. 물고기도 도시로 보내고 뭍고기도 도시로 보냅니다. 온통 도시에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립니다. 책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읽히다가 도시에서 버려집니다. 사진도 도시에서 찍고 도시에서 즐기며 도시에서 이야기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사진찍기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을 뿐입니다.

 도시는 돈이 샘솟는다는 곳이고, 돈이 샘솟기 때문에 돈을 마음껏 쓰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시골 논밭을 사진으로 담아 시골 논밭에서 사진잔치를 여는 일이란 없습니다. 파란 빛깔 바다를 사진으로 담아도 바닷마을 사람들하고 즐기도록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삶이란, 사람이란, 사진이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the Women》(Buffinch,2005)을 펼칩니다. 2011년 8월 한국땅에서 드디어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책이 《북아메리카 인디언》(눈빛,2011)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낱장으로 몇 장씩 나누어 책이나 신문에 쓰기는 하지만, 이렇게 책 하나로 묶은 적은 처음입니다. 어떤 분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고 함부로 100장 가까이 넣으며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너무 모르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고, 아는 사람은 제대로 헤아리지 않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입니다.

 《the Women》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 빚은 사진 가운데 ‘여성’ 이야기를 간추립니다. 어쩌면, ‘남성’이라든지 ‘어린이’라든지 ‘할머니’라든지 ‘자연’이라는 테두리로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살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 삶자락을 찾아 북아메리카땅을 골골샅샅 누비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니, 토박이 겨레에 따라 사진책을 나누어 살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무슨 사진을 찍은 사람일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은 어느 갈래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틀림없이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겼습니다. 다른 여느 미국사람은 옛 토박이를 눈여겨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옛 토박이를 끔찍하게 죽이거나 모질게 땅을 빼앗습니다.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삶이고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눈길이며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넋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문화인류학’이라는 테두리로 다가설 만합니다.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테두리로 들여다볼 만합니다.

 이야기를 바꾸어, 어느 한국 사진쟁이가 한국땅 골골샅샅 누비면서 ‘한겨레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긴다면, 이러한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이 또한 문화인류학이나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진과 글을 바라보아야 할는지요.

 사진은,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서로 만나며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부터 스스로 내 삶을 알뜰히 일구어야 무엇을 사진으로 담아 누구하고 사진을 나누려 하는지를 또렷이 깨닫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또한 이들 스스로 당신 삶을 알차게 돌보아야 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름다운 빛줄기가 살가이 깃듭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때에는 그럴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지만, 그럴듯한 그림에 머물 뿐,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자리매기지 못합니다. 서로서로 삶을 사랑하면서 아끼는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가슴 촉촉 이야기’입니다. 서로서로 삶을 보살피면서 일구는 나날을 누릴 때에 바야흐로 고운 꿈이 열매를 맺습니다. 잘 일구는 삶에서 잘 찍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사랑스레 돌보는 삶에서 사랑스레 담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바보스레 팽개치는 삶에서 바보스레 팽개치는 사진이 불거집니다. 겉치레로 꾸미는 삶에서 겉치레로 꾸미는 사진이 맴돕니다.

 《the Women》은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스러운 삶으로 이어가도록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사진쟁이) 삶 또한 사랑스레 돌볼 때에 다 함께 아름다이 살아갈 온누리 무지개빛을 어깨동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기록사진은 사진이 아닌 ‘기록’이고, 문화인류학은 삶하고 동떨어진 ‘학문’이며,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는 삶과 문화와 역사하고 등지는 ‘지식’입니다. 사진은 기록이나 학문이나 지식이 아닌, 그예 사진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찍는 사진이요, 살아숨쉬면서 나누는 사진이며, 살아내면서 사랑하는 사진입니다. (4344.9.3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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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
고영일 사진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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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길을 열 때에 천천히 드러나는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62] 고영일,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한울,2011)


 서울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과 대전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은 둘레 터전이 다릅니다. 찍은 사진을 받아들이는 둘레 사람들 느낌이나 마음이 다르고, 찍은 사진을 곱게 가다듬어 어느 한 자리에 그러모아 조그맣게 잔치를 마련할 자리가 다릅니다. 서울과 인천은 또 다르고, 서울과 목포는 또 다릅니다. 서울과 전주는 또 다르며, 서울과 구례는 또 다릅니다. 서울과 거창은 얼마나 크게 다를까요. 서울과 해남은, 서울과 고성은, 서울과 양양은, 서울과 문경은, 서울과 제천은 또 얼마나 다를까요.

 문화밭이나 예술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울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랑 ‘전라남도 고흥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거나 헤아릴까 궁금합니다. ‘울산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든지 ‘음성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무엇을 살피거나 돌아볼까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과 시골에서 지내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서로 얼마나 어떻게 다르다고 느낄는지요.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과 멧골자락에서 지내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저마다 어떻게 다르다고 어림할는지요.

 ‘사진을 한다’고 할 때에는 이이한테서 무엇을 느껴야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어느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는가를 먼저 살펴야 할까요. 사진학과 아닌 다른 학과를 다녔다면, 왜 사진으로 발을 옮겼는가를 알아야 할까요. 나라밖 어느 곳에서 사진을 배웠는지 알아야 하나요.

 ‘사진을 한다’는 사람이 고등학교만 마쳤다면, 중학교만 마쳤다면, 초등학교만 마쳤다면,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않았다면, 이녁이 하는 사진을 여느 사람이나 예술쟁이나 문화쟁이는 어떤 눈길과 눈높이로 바라볼는지요.

 고영일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한울,2011)을 들여다봅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기자로 일하며 제주 삶터와 사람을 사진으로 담았다고 하는 고영일 님입니다. 한국땅에서 바라볼 때에 고영일 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를 사진으로 담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바라본다면 ‘한국 사진’이지 ‘제주 사진’이 아닙니다. 프랑스나 독일이나 네덜란드나 스위스나 룩셈부르크나 오스트리아에서 바라본다면, 고영일 님 사진은 ‘한국 사진’이면서 ‘동양 사진’입니다. 미국이나 멕시코나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바라본다면, ‘아시아 사진’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네팔이나 티벳이나 버마나 필리핀이나 라오스나 베트남에서 바라볼 때에는 ‘지구별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 따라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은 저마다 달리 느끼거나 받아들입니다. 필리핀 뭇 섬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나고 자라며 사진을 찍은 누군가 빚은 사진책을 읽는다 하면, 이 사진책 하나는 ‘필리핀 뭇 섬 가운데 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보금자리를 곱게 보여준다 하면서, ‘작은 섬 하나를 바탕으로 필리핀이라는 터전’을 드러내는 사진이라고 여기겠지요. 마다가스카르 한켠을 찍은 사진을 읽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라다크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을 살필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을 생각할 때에도 이와 똑같아요.

 고영일 님은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마음은 이른바 ‘개발’ 때문에 사라져 가 버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사실 사진인치고 촬영지로서의 제주도를 한 번이나마 생각 안 해 본 적이 없으리라. 거기서 자연 풍경으로서의 제주도는 언제까지나 이어 줄 것이지만 ‘사라져 가는 제주도’는 바로 지금부터가 가장 이른 출발일 수밖에 없다(6쪽).”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은 고영일 님이 스스로 낸 책이 아니라, ‘예전에 적바림한 글’과 사진이 실립니다. 돌아가신 넋을 기리면서 여민 책이기에 고영일 님이 더 보여주고 싶었을 모습이나, 고영일 님이 더 들려주고 싶었을 이야기까지는 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두툼한 사진책 하나로 ‘제주섬 속살’을 어느 만큼 돌아볼 만합니다.

 그러면, 이 사진책을 손에 쥔 사람들은 어떤 ‘제주섬 속살’을 읽을 만할는지요. 참말 이 사진책을 읽을 때에 ‘제주섬 속살’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사진을 나 스스로 들여다보거나 내 이웃이 들여다볼 때에 가만히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을 사진으로 찍었다 할 때에 ‘오직 인천이라는 터전만 이 사진에 담긴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을 발판으로 삼아 ‘한겨레가 저마다 제 삶터에서 어우러지거나 복닥이는 이야기’가 시나브로 깃든다고 느낍니다. 한겨레가 지내는 모습이 살며시 드러나는 ‘내 인천 사진’이면서, 한 해 두 해 무르익는 동안 ‘인천이나 한겨레 울타리를 넘어’ 지구별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취가 고즈넉히 감돈다고 느낍니다.

 잘 찍었다는 사진이건 잘 못 찍었다는 사진이건 늘 같습니다. 즐겁거나 예쁘다 여길 만한 사진이건, 슬프다거나 어설프다 여길 만한 사진이건 언제나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여삐 어깨동무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이 해코지하거나 바보스레 다투기도 합니다. 어느 사람 사진에는 따스한 사랑이 깃들지만, 어느 사람 사진에는 어줍잖게 겉멋내는 껍데기가 넘칩니다. 어느 사람 사진에는 포근한 꿈이 서리지만, 어느 사람 사진에는 그럴듯한 흉내내기나 그림그리기가 춤춥니다.

 어쩔 수 없어요. 착하며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나, 비싸고 까만 차를 몰며 으스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흙을 일구며 햇살을 받아들이는 일꾼이 있으나, 서울 종로 높은 건물에서 양복을 빼입고는 자판을 두들기는 일꾼이 있어요.

 골목길이나 고샅길 사진만 ‘옛이야기(추억)’가 되지 않습니다. ‘관제 홍보’ 사진 또한 옛이야기가 됩니다. 투박한 사람들 수수한 삶만 옛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교복 차림에 똑같은 머리 모양으로 빼곡하게 줄지어 서서 누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도록 찍는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모둠사진도 옛이야기가 됩니다.

 “동네에 들어서면 촬영자가 오히려 구경거리다. 몰려다니며 찍어 달랜다. 다 모아 놓고 막상 찍으려면 오히려 숨는 녀석이 있다. 장년이 되었을 이들 중에 몇이나 이 사진을 반길 형편이 되었을까(7쪽)?” 하는 고영일 님 이야기를 읽으면서 빨래터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제주섬에서 이렇게 수많은 아주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여 빨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두 번째로 봅니다. 맨 먼저 일본사람이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1960년대 첫무렵에 내놓은 ‘세계 문화 여행’ 이야기를 다룬 스물 몇 권짜리 ‘전집 사진책’ 가운데 한국 이야기를 다룬 권에서 ‘제주섬 사람들 여느 삶’을 보여주면서 빨래터 사진을 실었어요.

 1960년대 일본 사진책에서 ‘제주섬 빨래터 사진’을 보고는 입이 쩍 벌어지며 벙 떴습니다. 일본사람은 1960년대에도 한국에 와서 이런 사진을 찍는데, 한국사람은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나 1990년대나 2000년대나 2010년대나 무슨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오늘 이곳’에서 사진으로 담은 적이 있는지 그야말로 알쏭달쏭합니다. 스스로 투박하거나 수수하게 살아가면서 ‘투박하거나 수수한 내 삶’을 비롯한 ‘투박하거나 수수한 내 이웃 삶’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는 길을 찾는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문화를 하건 예술을 하건, 사진길을 열려면 내 삶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먼저 깨닫는 길에 서야 바야흐로 내 사진길이 어느 문화나 예술 갈래에서 빛이 날 만한지를 알아차립니다. 무턱대고 문화길이나 예술길부터 걸을 수 없습니다. 사진뿐 아니라 그림이나 만화나 글이나 춤이나 노래나 연극이나 영화나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내 삶길부터 똑똑히 아로새기고 나서야 문화이든 예술이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못 깨닫고 내 삶을 말할 줄 모를 때에는 아무런 문화도 예술도 말하지 못합니다.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문화이든 예술이든 사랑할 수 업습니다. 내 삶을 꿈꾸면서 일굴 때에 비로소 문화이든 예술이든 꿈꾸면서 일굴 수 있어요.

 고영일 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섬 사람과 터전과 자연을 찬찬히 사진으로 담으면서 시나브로 사진길을 엽니다. 천천히 사진길을 열며 삶길을 북돋우기에 뒷날에는 사진비평을 하는 눈길을 트면서 글 몇 자락 남길 수 있습니다. 삶이 먼저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삶이 첫걸음이요 사랑이 두걸음입니다. 삶에서 샘솟는 따스한 손길이요 사랑에서 비롯하는 넉넉한 사진길입니다. (4344.9.27.불.ㅎㄲㅅㄱ)


―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 (고영일 사진,한울 펴냄,2011.3.30./4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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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그 후 - 사진작가 지영빈의
지영빈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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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동안 찍지 못하는 사진이라면
 [찾아 읽는 사진책 60] 지영빈, 《워낭소리, 그후…》(책이있는마을,2010)



 하루 동안 찍지 못하는 사진이라면, 한 달이나 한 해뿐 아니라 열 해나 스무 해가 걸려도 못 찍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무엇을 찍건 누구를 찍건, 나한테 주어진 겨를만큼 사진을 찍어야, 나 스스로 더 넉넉히 말미를 마련해서 사진을 찍을 때에 제 목소리가 살아숨쉬는 제 이야기가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두 아이를 사진을 담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내가 집에 머무는 겨를이 고작 1분이나 10분이라 하더라도 이동안 사진 열 장이나 서른 장을 찍을 수 있습니다. 찍기 나름입니다. 그냥 마구 눌러대는 사진이 아니라, 내 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마음그릇만큼 사진으로 찍어요.

 내가 참말 내 아이를 아끼며 사랑하는 넋이라 할 때에는, 고작 하루 몇 분 사이에 열여섯 장 사진을 찍어, 이 열여섯 장으로 사진책 하나 묶을 수 있습니다. 꼭 백육십 장에 이르는 사진을 열 달이나 열 해에 걸쳐 찍어야 사진책으로 묶을 만하지 않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아이하고 함께 지내는 이야기를 가만히 사진으로 담아 사진책 하나로 묶을 수 있어요. 내 아이가 갓 태어나 학교에 들어가고 어른이 되어 혼인을 할 때까지 사진으로 담아야 사진책 하나 빚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쥔 우리들은 ‘사진으로 이야기를 일구는 일’을 하지 ‘더 많이 찍은 사진’이나 ‘더 오래 찍은 사진’으로 겨루기나 숫자놀이나 등수매기기를 하지 않습니다.

 지영빈 님이 일군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책이있는마을,2010)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지영빈 님은 영화 〈워낭소리〉가 나온 뒤, 이 영화에 나온 할아버지네 막내아들한테서 ‘아버지 사진 찍어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과 봉화를 수 차례 오가며 카메라에 이르신의 모습을 담았다(머리말).”고 합니다.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를 읽다 보면, 참말 “수 차례 오가며” 찍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꼭 이만큼 찍은 사진입니다.

 이를테면, 봉화에서 ‘어르신하고 함께 살면서’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봉화에서 ‘어르신하고 한 달이고 석 달이고 함께 먹고자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어르신하고 몇 달이건 몇 해이건 함께 어울리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 가장 빛나거나 가장 훌륭하거나 가장 돋보이거나 가장 사랑스러울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워낭소리, 그후…》 같은 사진책이 《굴피집》(안승일 사진책)만 한 깊이가 담긴 사진책이 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다만, “수 차례 오가며” 찍은 사진이라면, 이렇게 “수 차례 오가며” 만날 수 있는 깊이와 너비가 어떠한가를 사진쟁이 삶으로 녹이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돼요. 어르신하고 마흔 해를 살아온 이웃처럼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안 됩니다. 어르신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감독처럼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안 돼요. 오직 몇 차례 만날 수 있는 틈에서 살릴 수 있고 살아낼 만한 사진을 헤아리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어르신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기다림과의 싸움이었다. 며칠을 찍었는데도 거의 같은 사진뿐이었다(머리말).”는 말을 되새깁니다. 짧지 않은 나날을 사진을 찍은 지영빈 님이요, 조용필·이광조·장동건·이승연처럼 이름난 연예인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지영빈 님입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조용필·이광조·장동건·이승연처럼 이름난 연예인은 당신들 스스로 ‘아주 바쁜 틈을 내어 사진으로 찍혀야’ 합니다. 봉화마을 어르신이라 해서 안 바쁜 나날이 아니에요. 그러나, 봉화마을 어르신은 ‘당신한테 바쁜 나날에 지영빈 님한테 굳이 틈을 쪼개어 사진으로 찍혀 줄 까닭이 없’습니다. 어르신네 막내아들이 당신 사진을 찍어 주기를 바라건 말건, 어르신으로서는 누가 당신을 찍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일이 없기도 하며, 퍽 귀찮거나 싫을밖에 없습니다. 나하고 사랑스레 만나면서 따스히 어우러질 이웃이나 벗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기 좋은 썩 괜찮다 싶은 사진 몇 장 후다닥 얻어’ 돌아가려는 사람으로 다가온다면, 봉화마을 어르신뿐 아니라 대통령이나 서울시장도 사진 찍히기를 달가이 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써 사진 몇 장 찍더라도 ‘사진을 찍은 사람부터 스스로’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사귀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해야 합니다. 남녀 사이에 살을 섞는 사랑놀이가 아니라,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과 사진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영빈 님은 “똑같은 일상, 똑같은 동선에서 어르신의 변화를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머리말).”고 말하지만, 정작 《워낭소리, 그후…》에는 어르신 하루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드는 ‘하루 삶’을 사진으로 담지 못했어요. 아니, 처음부터 이러한 ‘하루 삶’을 담을 마음이 없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이 ‘하루 삶’을 바라보거나 살피지 않았으니까, 이 ‘하루 삶’을 ‘똑같은 동선’이라고 여길 뿐, 이 움직임과 모습과 삶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샘솟는가를 가슴으로 깨닫지 못해요. 사진으로 꽃피우지 못합니다.

 “옷 좀 바꿔 입고 찍자고 해도 한사코 당신이 좋아하는 옷만 고집하시던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머리말).”라는 말은 아주 덧없습니다. 시골마을 할아버지를 찍는 사진은 연예인을 찍는 사진하고 다른데, 할아버지한테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하다니요. 이것 참 버르장머리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사진을 찍는다는 사람으로서 밑바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봐, 전투화 코가 벗겨졌잖아. 다른 전투화 신고 와.” 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나요. 다쳐서 어깨를 붕대로 감싼 군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봐, 붕대가 제대로 안 감겼잖아. 다시 감아.” 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능금밭에서 능금을 따는 일꾼한테 “여보시오. 좀 고운 옷을 입고 능금을 따시오. 그래야 사진이 잘 나오지.” 하고 말해도 될는지요. 새마을운동 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라면, 관청에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내세우는 홍보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라면, 할아버지 삶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헤아려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을 텐데, 지영빈 님은 ‘워낭소리 할아버지 삶’을 사진으로 어떻게 보여주도록 그려야 아름다운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가벼운 손재주를 부려 포토샵 사진을 몇 끼워넣기까지 합니다.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는, 영화 〈워낭소리〉가 극장에 걸린 뒤부터 봉화마을 어르신이 얼마나 시달리거나 고달프거나 힘겹거나 짜증스럽게 살아야 하는가를 낱낱이 보여주는 슬픈 얼굴입니다. (4344.9.21.물.ㅎㄲㅅㄱ)


― 워낭소리, 그후… (지영빈 사진,책이있는마을 펴냄,2010.2.23./23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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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McCurry; The Unguarded Moment : Thirty Years of Photographs by Steve McCurry (Hardcover)
McCurry, Steve 지음 / Phaidon Inc Ltd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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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뜰한 사랑을 담는 밥그릇 같은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6]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the unguarded moment》(PHAIDON,2009)


 수천만 대까지 팔린 사진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백만 대 넘게 팔린 사진기는 꽤 됩니다. 일본 니콘이나 캐논에서 만든 사진기 가운데에는 지구별 곳곳에 수백만 대가 퍼질 만큼 널리 사랑받은 사진기가 있습니다. 수백만 대 만들어진 사진기는 수백만 사람 손을 거쳐 수백만을 웃도는, 아니 수억만에 이를 사진을 빚습니다. 수억만이라는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도록 어마어마하게 많다 싶을 사진이 지구별 곳곳에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두루 알려진 작품이 있고, 하나도 안 알려진 작품이 있습니다. 두루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닥 살갑지 못하다 싶은 사진이 있을 테며, 하나도 안 알려졌으나 더없이 살가우며 애틋한 사진이 있을 테지요.

 사진기는 많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도 많습니다. 사진 또한 끝없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진기로 일구는 이토록 많은 사진 가운데 사진쟁이 가슴부터 촉촉히 적시는 살뜰한 사랑 깃든 사진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사진기로 찍으면 사진이 만들어집니다. 어떠한 사진이든 모두 사진입니다. 그런데, 찍기는 찍었으되 사랑하는 넋을 담지 못했을 때에도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지 궁금합니다. 책을 읽기는 읽었으되 책에 서린 사랑스러운 넋을 가슴으로 삭여서 내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에도 책읽기라는 이름이 걸맞을 만한가 궁금합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릅니다. 가공식품으로 이루어진 밥이든 손수 일군 곡식과 푸성귀로 지은 밥이든, 어떤 밥이든 먹으면 배가 부릅니다. 어찌 되든 배가 부르면 기운을 차립니다. 좋은 밥을 먹든 나쁜 밥을 먹든 배가 부르면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살림이 팍팍한 나머지 좋은 밥이나 나쁜 밥을 가릴 겨를이 없이 배만 채우면서 일하는지 모릅니다. 배채우기로도 벅차기에 아름다운 삶이나 따사로운 사랑이나 너그러운 믿음을 건사할 겨를이 없다 할는지 모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찍다가는 나와 내 살붙이 모두 굶어죽을까 걱정스러우니까 ‘돈벌이 되는 사진을 찍’든지 ‘돈벌이 되는 다른 일거리를 찾’든지 해야 한다고 여기곤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길을 사진쟁이로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사진밭에 사진꿈을 키우려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님은 《the unguarded moment》(PHAIDON,2009) 같은 사진책을 내놓습니다만, 스티브 맥커리 님이 빚는 사진으로 보이는 ‘빛깔 느낌’을 흉내내거나 따르는 사람만 많을 뿐, 정작 스티브 맥커리 님이 왜 ‘스티브 맥커리 사진 빛깔 느낌’을 선보이면서 이야기 한 자락 나누려는지까지 톺아보지 않아요.

 사진책 《the unguarded moment》는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 하나는 밥그릇 하나와 같을 수 있을 때에 아름답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 하나를 읽을 때에 밥그릇 하나를 비우며 배부를 수 있도록, 마음을 부르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 하나를 찍을 때에 밥그릇 하나에 따순 사랑을 담아 살뜰한 밥차림이 될 수 있게끔 애쓰듯, 마음을 살찌우는 따순 사랑을 담아 살뜰한 사진넋이 꽃피어야 한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내 몸과 마음부터 아끼는 사랑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내 몸과 마음부터 아끼는 사랑을 밑바탕으로 깨달아, 내 이웃사람들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보살피거나 보듬으면서 아끼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하고 헤아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밥 한 그릇 내밀지 못합니다.

 사랑을 느끼기를 꿈꾸면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사랑을 느끼기를 바라면서 밥 한 그릇 소복히 담아서 내밉니다.

 무르익는 가을날, 귀뚜라미는 하루 내내 쉬지 않고 웁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집 둘레 풀밭에서 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하고 뒤섞이면서 내 몸과 마음으로 촉촉하게 젖어듭니다. 사랑스러운 울음소리요, 어여쁜 목숨결입니다. 시골자락 작은 집에서 네 식구 옹기종기 복닥이는 살림을 꾸리는 애 아빠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같은 밥을 차리자고 생각하고, 풀벌레 울음소리와 같은 사진을 찍자고 다짐합니다. (4344.9.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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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
이일우 지음 / 팝콘북스(다산북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살아가는 대로 느끼며 바라보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59] 이일우, 《내 인생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팝콘북스,2006)



 살아가는 대로 느끼면서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살아가는 대로 깨달으며 찍는 사진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을 스스로 어떻게 일구거나 여미거나 다스리거나 돌보는가에 따라, 내 눈길로 읽는 사진과 내 손길로 찍는 사진이 거듭납니다.

 내 눈길이나 손길은 맨 처음에는 아주 서툴거나 엉성하거나 투박할 수 있습니다. 서툴다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서툴 때에는 서툴 뿐입니다. 엉성하대서 모자라지 않습니다. 엉성할 때에는 엉성할 뿐이에요. 투박한 눈길이나 손길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투박하게 읽으면 투박하게 읽는 대로 나한테 기쁘며 좋은 사진입니다. 투박하게 찍으면 투박하게 찍는 대로 내게 보람차며 반가운 사진이에요.

 사진길을 뚜벅뚜벅 걷다 보면, 처음에는 서툴던 눈길이나 손길이 차츰 단단해지기도 하고 야물차기도 합니다. 엉성하던 매무새가 짜임새를 갖출 수 있고, 투박하던 사진이 매끄럽거나 멋스러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다 좋습니다. 사진은 반드시 야물차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서툴어도 됩니다. 사진은 꼭 짜임새가 빼어나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엉성해도 됩니다. 사진은 어김없이 멋스럽거나 예뻐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투박해도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느낌은 그닥 대단하지 않습니다. 초점이나 셔터빠르기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흔들려도 좋고 어긋나도 괜찮아요.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때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는 깃들지 않으면서 멋스러이 보이기만 한다면 사진이 아니에요. 빈 껍데기입니다. 이야기를 담지 못하면서 예쁘장하기만 한다면 사진이 되지 않아요. 덧없는 겉치레입니다. 이야기를 즐거이 살아내지 않으면 사진하고 동떨어져요.

 《내 인생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팝콘북스,2006)라는 책을 내놓은 이일우 님은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오고, 독일로 사진을 배우러 다녀왔지만, 처음부터 ‘사진을 알’거나 ‘사진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니, ‘사진으로 살아가지’조차 못합니다. “나는 단지 경제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충무로에 있는 작은 잡지사 사진기자로 취직을 했다(10쪽).”라는 말마따나,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를 뿐더러, 사진으로 삶을 일구는 길을 영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사진을 작업하지 않고 머리로만 공부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11쪽).”고는 느낍니다.

 이리하여, ‘몸(실천과 행동)’으로 찍지 않고 ‘머리(지식과 이론)’로 찍는 사진을 털어내려 애씁니다. 꾸준히 애쓰면서 “‘무엇을 찍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매일 걸어다니는 길 위에 이미 있다(20쪽).” 하고 깨닫습니다. 적어도 ‘사진길 첫걸음’은 떼는 셈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진은 카메라가 찍는 게 아니라 사진가가 찍는다는 사실이다(25쪽).” 하고 다짐하듯, 이제 막 아장걸음을 뗍니다.

 한국에서 사진찍기를 한다는 이들 가운데 이만큼이라도 스스로 털어놓으면서 새로 태어나고자 애쓰는 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느끼며 바라보는 사진인데, 스스로 내 삶부터 얼마나 아름다이 여미려고 힘쓰는지 궁금합니다. 내 삶을 알차고 사랑스레 돌볼 때에 내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알차며 사랑스러울 수 있는 줄 느끼는 분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해요.

 이일우 님은 “자연은 내 노력에 비해 훨씬 큰 것들을 준다(46쪽).” 하고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말을 꺼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동안 이 황량하고 척박한 사막에서 무엇을 사진으로 옮겨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내 앞에 있는 게으름뱅이 낙타처럼 이곳에 존재하는 하나하나의 사물들에서도 사막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12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자연이 얼마나 크나큰 선물을 베푸는가를 조금 깨달았다고 하면서, 막상 사막으로 사진마실을 다녀오는 동안 ‘자연이 베푸는 선물’을 제대로 맛보지 못합니다. 아니, 자연이 선물을 베푼다고 느끼지 못해요.

 무엇을 사진으로 옮겨야 할지 걱정하지 마셔요. 내 가슴으로 느끼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으면 돼요. 낙타가 게으름뱅이라고요? 낙타를 사진으로 담아 이야기 하나 길어올리지 못하는 사진쟁이가 게으름뱅이예요. 낙타한테서, 낙타를 모는 일꾼한테서, 사막에 가득한 모래에서, 사막을 내리쬐는 햇살에서, 뜨거운 바람에서, 작은 샘과 풀포기에서, 차근차근 사막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어떠한 사진넋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내 삶그릇만큼 내 사진그릇입니다. 내 삶길과 같은 내 사진길입니다. 내 삶눈에 따라 내 사진눈입니다. 내 삶넋으로 이루어지는 내 사진넋입니다. (4344.9.18.해.ㅎㄲㅅㄱ)


― 내 인생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 (이일우 글·사진,팝콘북스,2006.10.23./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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