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홀릭's 노트 - 게으른 포토홀릭의 엉뚱하고 기발한 포토 메뉴얼
박상희 지음 / 예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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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똑같은 사진입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44] munge, 《포토홀릭's 노트》(예담,2009)


 어떤 사진기를 쓰든 사진은 똑같은 사진입니다. 기계마다 손맛이 다르다 하겠지요. 그런데 손맛이 달라진대서 사진맛이 달라지는 일은 없어요. 내 삶이 어떻게 흐르도록 가누느냐에 따라 내 삶맛·사진맛·손맛·사랑맛이 거듭날 뿐입니다.

 박상희(munge) 님이 일군 사진책 《포토홀릭's 노트》(예담,2009)를 읽다 보면 “멋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 틈에 있자니 내 손에 들려 있는 초라한 카메라가 창피했다. 손이 부끄러웠다(17∼18쪽).”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온누리에는 멋진 사진기나 초라한 사진기가 따로 없습니다. 온누리에는 오직 사진기 하나만 있습니다. 내 사진기를 멋지다고 여기면 내 사진기는 언제나 멋집니다. 내 사진기를 초라하다고 여기면 내 사진기는 늘 초라해요.

 곰곰이 살피면, 《포토홀릭's 노트》를 일군 박상희 님은 스스로 당신 삶을 초라하다고 느끼는 나머지 당신이 손에 쥔 사진기를 초라하다고 여기고 맙니다. 이리하여 이 초라하다고 여긴 사진기로 찍은 사진을 오래도록 잊었고, ‘초라하다’고 여기며 오래도록 묵힌 사진을 오랜만에 찾아서 들여다보니 ‘뜻밖에 꽤 괜찮은 모습’이 나왔다고 느낍니다.

 이러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스스로 멋지다고 여긴 사진기’에서 ‘스스로 초라하다고 여긴 사진기’로 찍은 사진하고 똑같은 사진이 나왔다면 어찌 생각했을까요. ‘뭐야, 멋진 사진기인데 사진이 왜 이 모양이지?’ 하고 생각했을까요. ‘이 멋진 사진기로는 이런 사진이 나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을까요.

 사진기마다 느낌이 달라, 어느 사진기를 쓰느냐에 따라 사진빛이 달라집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느낌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사진에 싣는 내 이야기와 내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멋진 사진기를 쓰든 초라한 사진기를 쓰든, 사진기를 쥔 나는 내 이야기와 내 삶을 내 사진기를 거쳐 내 사진으로 빚습니다. 박상희 님은 틀림없이 ‘박상희 사진’을 찍을 뿐인데, 《포토홀릭's 노트》 첫 쪽부터 끝 쪽까지 ‘박상희 사진’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요.

 《포토홀릭's 노트》는 온갖 사진기를 두루 만지면서 사랑했던 사진 즐김이 발자국을 보여주는 책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 만지며 사랑했다’기보다는 ‘내 사진이 어떠한 길로 예쁘게 걸어가는가’를 좀처럼 깨닫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줄타기를 하는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박상희 님은 박상희 사진을 찍으면 될 뿐입니다. ‘박상희 아닌 브레송인 척’하거나 ‘박상희 아닌 김기찬인 척’하거나 ‘박상희 아닌 강운구인 척’하거나 ‘박상희 아닌 쿠델카인 척’할 까닭이 없어요. 잘 찍는 사진이 없고 못 찍는 사진이 없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입니다. 사진에 내 이야기를 실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다릅니다. 사진에 내 삶을 담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달라요.

 “문제는 단순히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기분이, 시선이, 설렘이 달라진다는 것에 있다(175쪽).”는 말처럼, 어느 사진기를 손에 쥐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포토홀릭's 노트》라는 사진책이 수많은 사진기를 만지작거린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이런 사진기를 만지작거린들 저런 사진기를 만지작거린들 ‘사진 느낌’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하나이거든요.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에 따라, 이 사진기를 쓸 때이건 저 사진기를 다룰 때이건, 사진마다 담기는 느낌하고 이야기는 엇비슷하거나 똑같습니다. 굳이 사진기 얼거리나 발자취를 꼼꼼히 알아보며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손수 사진을 만드는 이야기를 넣지 않아도 됩니다. 박상희 님은 박상희 님이 ‘즐긴 사진’을 그야말로 ‘즐겁게 풀어놓’을 때에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없는 포커스 아웃은 잘못된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실수였건 우연이었건 의도하지 않은 포커스 아웃은 그 나름의 멋과 의미가 있다(231쪽).”라든지 “한마디로 맛이 다르다. 컬러로 바라본 세상의 맛과, 흑백으로 바라본 세상의 맛이, 그 시선이, 그 매력이, 그 본능이 모두 다르다(349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이 사진책 《포토홀릭's 노트》가 빛납니다. 박상희 님 나름대로 좋아하는 사진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박상희 님 나름대로 즐긴 사진을 보여주면 됩니다.

 이런 사진기로는 이런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을 하거나 사진을 보여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누군가는 ‘이런 사진기를 손에 쥐고 저런 사진을 얼마든지 얻으’니까요. 필름도 그래요. 이 필름을 쓴대서 꼭 ‘이런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 필름을 쓰면서 ‘저런 사진을 일굽’니다.

 사진은 똑같은 사진입니다. 필름사진을 찍든 디지털사진을 찍든 사진은 늘 똑같은 사진입니다. 값나가는 장비를 쓰건 값싼 장비를 쓰건 사진은 언제나 똑같은 사진입니다. 이름난 전문 사진쟁이가 찍건 오늘 갓 사진기를 마련한 사람이 찍건 한결같이 똑같은 사진입니다.

 박상희 님은 ‘사진기’라는 굴레에 얽매이는 바람에 정작 박상희 님 스스로 좋아하면서 즐긴 ‘사진이란 무엇이었지?’ 하는 이야기는 거의 들려주지 못하고 맙니다. 부디, 맨 처음으로 사진기를 손에 쥐어 내 사진 한 장 찍던 날을 떠올리면서 사진삶이 왜 아름다운 삶으로 아로새겨지는가를 적바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4.9.14.물.ㅎㄲㅅㄱ)


― 포토홀릭's 노트 (박상희 글·그림·사진,예담 펴냄,2009.12.1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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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인디언 - 눈빛 아카이브
에드워드 커티스 지음, 이주영 옮김 / 눈빛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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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넋을 사진으로 담다
 [찾아 읽는 사진책 52] 에드워드 커티스, 《북아메리카 인디언》(눈빛,2011)



 해맑게 웃음지으면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해맑게 웃음짓곤 합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어도, 고단한 일에 시달려 지친 몸이었어도, 둘레에서 해맑게 웃음지으면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이 아이들한테서 해맑은 웃음과 기운과 넋과 꿈을 조금씩 나누어 받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옷을 마련해 줍니다. 아이들은 아직 스스로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할 줄 모를 뿐 아니라, 길쌈이나 실잣기나 물레질을 하기 힘듭니다. 오직 어른들이 온갖 일을 치러서 옷을 한 벌 마련한 다음 아이들한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옷을 비롯해 밥과 집을 마련해 줍니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내 아이나 이웃 아이한테 옷과 밥과 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어른입니다. 아이라면 내 어버이나 이웃 어버이한테서 옷과 밥과 집을 얻어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이에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먹어야 하고, 밥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좋은 잠자리를 고마이 얻어야 하며, 좋은 옷을 기쁘게 얻어야 해요.

 한편, 어른들은 아이들한테서 꾸밈없이 자라는 넋을 나누어 받습니다. 어른들 누구나 내 아이나 이웃 아이와 같이 어린 나날이 있은 줄을 되새깁니다. 아이들을 낳아서 돌보든, 이웃 아이들을 사랑스레 보살피든, 이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내 지난날을 되짚고 내 앞날을 돌아봅니다. 내가 걸어온 길과 아이들이 걸어갈 길을 살핍니다. 내가 어른이 되기까지 걸었던 길이 얼마나 아름답다 할 만한가를 짚고, 이 아이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얼마나 아리땁게 건사할 만한가를 가눕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되든, 여느 어버이나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되든, 사진기를 손에 쥐고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이들은 웃습니다. 아이들 해맑은 낯빛을 바라보며 함께 웃는 ‘사진기를 손에 쥔 모든 어른’입니다. 아이들 슬프거나 괴롭거나 고단한 얼굴빛을 마주하며 함께 우는 ‘사진기를 손에 쥔 모든 어른’입니다. 궂은 일을 숱하게 치르며 잔뜩 찌푸리던 어른이라 하더라도, 근심걱정 훌훌 털고 맑게 웃으며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는, 궂은 일을 숱하게 치르며 짓눌렸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집니다. 좋은 일을 끝없이 누리면서 활짝 웃던 어른이라 하더라도, 근심걱정이 잔뜩 쌓여 몹시 슬프고 아프며 괴로운 몸짓을 하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는, ‘내가 이 아이들한테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나란히 나누어 받습니다.

 누군가는 ‘나부터 아름답게 살겠습니다’ 하는 다짐을 새기면서 참말 아름다이 살아가려는 넋과 말과 몸짓을 건사하면서 사진을 찍겠지요. 누군가는 먹고살기 팍팍한 나머지, 또는 웬만큼 돈을 벌고 이름을 얻으면서 ‘티없이 꿈꾸던 첫마음’을 잃거나 내려놓은 나머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과 삶을 수수하게 껴안는 넋과 말과 몸짓이 없어진 채 사진을 찍겠지요.

 어떠한 넋과 말과 몸짓이건, 착한 꿈과 참다운 말과 고운 몸짓으로 웃으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 어른’은 아이들한테서 착한 웃음과 참다운 눈물과 고운 삶을 느낍니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서 마음밥을 나누어 받고, 마음옷을 나누어 입으며, 마음집을 나누어 지냅니다.

 미국사람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 빚은 사진과 글을 그러모은 두툼한 사진책 《북아메리카 인디언》(눈빛,2011)을 읽습니다. 그동안 한국땅에서는 북아메리카 토박이를 담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요모조모 가위질해서 내놓는 책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런 책이든 저런 책이든, 북아메리카 토박이 삶과 넋과 말을 다루는 책에서, 으레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조용히 가위질해서 쓰곤 했습니다. 언제나 사진만 살짝 가위질해서 쓸 뿐,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 북아메리카 토박이와 함께 지내면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들어 책으로 일군 땀방울을 깊이 돌아보거나 넓게 살핀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한국땅에서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책이 한국말로 옮겨질 일은 없으리라 여겼습니다. 퍽 비싼 값을 치러야 하지만, 일본에서 나오는 책이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나오는 책을 장만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글판으로 예쁘게 엮은 무겁고 두툼한 책을 만지작거립니다. 일본말과 영어로 된 책만 뒤적이면서 오직 사진만 읽던 책이 아니라, 한글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지작거리다니 마치 꿈만 같습니다. “아이들과 연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인디언들은 아직도 자연 가까이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상업적인 이익을 보여주는 통계수치로 가득한 이야기가 아니라 큰 나무와 키 작은 덤불나무, 태양과 별, 번개나 비와 같은 우주 현상에 따르고 순응하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눈다. 모든 자연의 현상은 인디언들에게는 생명이 있는 창조물이다(12쪽).”처럼 한글로 옮겨진 에드워드 커티스 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고맙습니다.

 책을 덮고 곰곰이 헤아립니다.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북아메리카 토박이들이 서로서로 주고받는 말을 ‘알 수 없’었다고 밝힙니다. 그렇지만 ‘굳이 낱낱이 풀어서 알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북아메리카 토박이가 스스로 자연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에드워드 커티스 님 또한 자연으로 살며시 녹아들면서 마주할 때에는 가슴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말이 있거든요. 당신은 이 마음말이나 가슴말로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목숨이 깃든 아름다운 넋’을 사랑하는 참말 ‘목숨이 깃든 아름다운 넋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옮기면 넉넉합니다.

 예부터 이 나라 옛 어르신이나 북아메리카 토박이는 이야기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얼이 조금씩 빠져나간다고.

 사진을 찍는 나는 늘 느낍니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으로 찍힌 사람 얼이 틀림없이 조금씩 빠져나갑니다. 사진을 찍히는 사람은 제 얼을 조금씩 나누어 줍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내 사진에 깃드는 사람들과 푸나무와 집과 땅과 하늘과 빨래와 벌레들 모두가 고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되새깁니다. 나한테 당신 얼을 조금씩 나누어 주는 사람들 따스한 사랑을 포근하게 껴안자고 되새깁니다. 당신은 나한테 사진에 깃드는 얼을 나누어 준다면, 나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마다 이 손짓에 내 얼을 담아서 고스란히 나누어 주자고 생각합니다. 내 얼과 네 얼이 사진 한 장에 예쁘게 어우러지도록 하자고 다짐합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담긴 사진들을 조용히 바라봅니다. 사진으로 찍힌 사람들 얼이 보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얼이 나란히 보입니다. 두 얼이 서로 만납니다. 두 얼은 즐겁게 만나 기쁘게 춤을 춥니다.

 억지로 멋을 부리려 했다면,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얼을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마음을 닫은 사람을 애써 멋들어지거나 거룩하게 보이도록 찍는댔자, 가슴으로 북받칠 만한 즐거움이나 기쁨이 샘솟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그냥 ‘그럴싸해 보이는 사진’이 ‘만들어졌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은 만들 수 없습니다. 사진은 찍을 뿐입니다. 사진은 애써 꾸밀 수 없습니다. 사진은 수수하게 살아가는 그대로 투박하게 찍을 뿐입니다.

 “에드워드 커티스는 30여 년에 걸쳐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전통과 풍속을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성 높은 사진으로 기록하였고, 1907년부터 1930년에 걸쳐 전 20권의 전집으로 출판하였다. 커티스가 인디언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에는 5년 안에 전 20권을 모두 출판할 계획이었지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게 되면서 작업이 지연되어 193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간할 수 있었다(762쪽).”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좀 달리 느낍니다.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성 높은 사진으로 (북아메리카 토박이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다른 숱한 사진쟁이들하고 다르게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 얼이 나란히 사진 한 장에 깃들 수 있게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사진삶을 누렸습니다. ‘사라지는 북아메리카 토박이 삶’을 ‘적바림(기록)’하는 일을 짊어진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J.P.모건이라는 재벌한테서 돈을 조금 받아서 사진책을 낼 수 있었다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라지만, 누구한테서 돈을 더 받거나 안 받거나 한다고 사진이 달라진다면,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부터 가슴으로 피어날 사랑꽃은 아예 없습니다. 돈이 넉넉히 있거나 값진 장비를 알뜰히 갖추었기에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모자라거나 값싼 장비를 한 가지만 겨우 갖추었대서 사진을 못 찍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부터 내 마음을 사랑씨앗 담아서 내밀고, 나와 마주한 벗이 당신 마음을 사랑열매로 일구어 나눌 때에, 시나브로 사랑꽃 어여삐 오래도록 흐드러지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책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찬찬히 넘기면서 새삼스레 느낍니다. 나한테 있는 에드워드 커티스 님 다른 사진책을 옆에 나란히 펼치고 넘기면서 한결같이 느낍니다. 어느 누구도 등떠밀려 사진으로 찍히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못마땅한 얼굴인 채 사진으로 찍히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싫은데 사진으로 찍히지 않습니다. 떳떳하고 스스럼없으면서 즐거이 사진으로 찍힙니다. 기쁘며 반갑고 예쁘게 사진으로 찍힙니다.

 내 아이를 사진으로 담거나 이웃 아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 노상 느낍니다. 아름다운 넋으로 뛰노는 아름다운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은 어느새 아름다운 넋과 아름다운 손길로 거듭납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때뿐 아니라, 사진기를 손에서 내려놓은 자리에서도 나부터 내 아이와 이웃 아이 모두한테 아름다운 넋으로 아름다운 삶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어른으로 즐거이 꽃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덧붙입니다. 훌륭하게 처음 태어난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사진책 하나 몹시 고맙습니다. 아주 기쁘게 장만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결은 퍽 아쉽습니다.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 애써 삶을 바쳐 찍은 사진이 꽤 많이 ‘새까맣게 죽었’습니다.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얼굴 주름 하나까지 사진으로 담으려 했고, 손으로 지은 옷 무늬와 바느질 결까지 사진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두 올까지 낱낱이 사진으로 담으려 했어요. 그렇지만 한국판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이러한 결과 무늬와 느낌을 많이 죽이고 말았습니다. 너무 오래된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묶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텐데, 판이 작은 사진이든 판이 커다란 사진이든, 더 많은 사진을 차곡차곡 싣는 일 못지않게 사진 하나하나 더 보드라이 매만져야 했다고 느낍니다. 한국판 사진책만 장만해서 읽는 분은 잘 모를는지 모르나, 나라밖에서 나온 여러 가지 사진책을 장만해서 읽은 사람이라면, 한국판이 더없이 아쉽다고 여길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만 한 책이 한국에서 나온 일이 아주 고맙고 기쁩니다. 앞으로 찬찬히 가다듬거나 북돋우면 되지요. (4344.9.11.해.ㅎㄲㅅㄱ)


― 북아메리카 인디언 (에드워드 커티스 글·사진,이주영 옮김,눈빛 펴냄,2011.8.8./2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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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ye for Iran (Hardcover)
Kazem Hakimi / Garnet Pub Ltd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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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무엇을 찍어야 하는가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카젬 하키미(Kazem Hakimi), 《an Eye for Iran》(Garnet,2009)


 사진기를 든 사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찍습니다. 작품을 찍건 예술을 찍건 늘 무엇인가를 찍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 선보일 사진을 찍든 내 살붙이 몇몇만 볼 사진을 찍든 노상 무엇인가를 찍습니다.

 돈이 넉넉해서 값진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마련하는 값나가는 사진기이든, 돈이 얼마 없어서 값싼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장만하는 가벼운 사진기이든, 어떤 사진기를 손에 들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찍어 사진을 이룹니다.

 언제나 새로운 사진입니다. 오늘날 숱한 예술쟁이가 빚는 예술사진을 들여다보면 으레 지난날 누군가 해 보았던 예술이거나 사진이기 일쑤이지만,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새로운 사진입니다. 한 자리에서 수십 수백 장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이지만, 사진기를 쥔 사람마다 다 다른 삶이기 때문에 다 다른 사진이 태어나 다 다른 예술을 빚거나 다 다른 사랑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대형사진기를 다루며 귀뚜라미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귀뚜라미 코앞까지 다가서며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크게 잡아당기는 렌즈를 써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귀뚜라미가 깃든 자리를 넓게 보여주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귀뚜라미 인형을 손에 든 사람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요.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님이 《붉은 소파》(눈빛,2010)를 빚듯, 누군가는 ‘푸른 귀뚜라미’를 빚을 만합니다.

 카젬 하키미(Kazem Hakimi) 님은 이란사람일까요. 《an Eye for Iran》(Garnet,2009)은 “이란을 바라본 눈길”을 보여주는 사진책일까요. 이란에서 태어났으나 1974년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여러 일을 하다가 사진을 배운 뒤, 2004년에 이란으로 돌아와서 찍은 사진으로 엮었다는 《an Eye for Iran》은 어떠한 삶과 사람과 사랑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책이 될까요.

 이란에서 태어나 내내 이란에서 자라고, 이란에서 일자리를 얻어 이란에서 동무를 사귀며 짝꿍을 만나 혼인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이랑, 어린 나날이나 젊은 나날에 이란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지내다가 이란으로 돌아온 사람이랑, 이란을 바라보는 눈길은 서로 얼마나 비슷하거나 다를까 궁금합니다. 이란에서 태어났던 사람은 이란으로 돌아가서 ‘이란’ 사진을 찍는데, 이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이가 이란 큰도시로 옮겨 지내다가 이란 시골마을로 돌아가서 사진을 찍는다면, 이 이란사람이 담은 ‘이란’이란 어떤 이야기가 깃든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내내 이란에서 머문 사람이 바라보는 이란 모습은 늘 익숙하기에 굳이 사진으로 담을 까닭을 못 느낄 수 있습니다. 내내 이란에서 지낸 사람이 바라보는 이란 모습이야말로 늘 익숙한 만큼 애써 사진으로 담아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란 바깥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이란으로 돌아온 사람이 바라보는 이란 모습은 어린 나날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란 바깥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이란으로 돌아온 사람이 바라보는 이란 모습은 아주 낯설거나 새롭다고 느껴서 이와 같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야겠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이란다운 이란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될까요. 어느 쪽이 사진다운 사진을 찍는 길이 될까요.

 사진기를 쥔 사람이 남자라면 어떤 이란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어떻게 담아낼는지요. 사진기를 쥔 사람이 여자라면 어떤 이란을 어떻게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실어낼는지요. 사진기를 쥔 사람이 할머니라면 어떤 이란을 어떻게 헤아리면서 어떻게 옮길는지요. 사진기를 쥔 사람이 어린이라면 어떤 이란을 어떻게 즐기면서 어떻게 아로새길는지요.

 사진으로 나아가는 길은 따로 없습니다. 사진이 되는 길은 딱히 없습니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사진을 좋아하면 내 손에 쥔 사진기로 수많은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사진 역사에 이름난 사람들 발자국이나 손길을 떠올리면서 ‘내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 예술에 돋보이는 사람들 강의나 책을 살피면서 ‘내 사진 느낌을 다스릴’ 까닭 또한 없습니다.

 ‘연필 쥐기’를 누구한테서 배울 수 있겠지요. 붓글씨를 하듯 글을 쓸 수 있겠지요. ‘사진기 쥐기’를 누구한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을 하듯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커피를 끓이거나 빵을 굽거나 김치를 담는 솜씨를 누구한테서 배워 고스란히 따를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든 “나한테 알맞춤할 사진기를 골라 손에 쥐며 느낄 마음”이든 얼마든지 누구한테서 배울 만합니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 짝꿍을 어떻게 아끼거나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대목을 누구한테서 배울 수 있을는지요. 내 아이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삶길을 누구한테서 배울 만한지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깜냥껏 내 옆지기를 사랑하며 아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내 슬기를 빛내어 내 아이를 사랑하며 아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내 사진기가 가볍든 값싸든 대수로운 일이 아닌 만큼, 내 사진기를 알뜰히 사랑하며 아끼는 몸짓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삶자락을 내 사진으로 일구도록 땀흘리며 어깨동무하면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an Eye for Iran》은 딱 “이란을 바라본 눈길”만큼 사진을 담아서 보여줍니다. (4344.9.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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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황학주 글, 배병우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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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51] 배병우·황학주, 《故鄕》(생각의나무,2007)


 사람이 사진기를 만들었고,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지만, 멀거니 떨어진 자리에서 부산스레 오가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기도 합니다.

 사람이 붓과 종이를 만들었고, 사람이 그림을 그립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살붙이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들판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사람이 글을 씁니다. 종이에 글을 쓰든 셈틀 자판을 또닥거리든, 사람이 글을 씁니다. 사람이 쓰는 글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기고, 사람을 둘러싼 너른 자연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담깁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만큼, 이 사람살이를 글로 옮깁니다.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렇게 여섯 가지를 사진으로 담아 큼지막하게 빚은 사진책 《故鄕》(생각의나무,2007)을 읽습니다. 꽃과 바다와 바위와 소나무와 숲과 오름은 배병우 님이 사진으로 담고, 황학주 님이 글을 씁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으로서 바라보거나 마주한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을 보여줍니다. 황학주 님은 황학주 님으로서 느끼거나 맞아들인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사진을 보고 글을 봅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이야기를 담았을 테고, 글은 글대로 이야기를 실었을 테지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꽃은 얼마나 꽃다울까요. 이 바다는 얼마나 바다다운가요. 이 바위는 얼마나 바위답다 할 만한지요. 이 소나무는 얼마나 소나무다운 목숨인지요. 이 숲은 어디에서 숲다운 모습일까요. 이 오름은 어떻게 오름다운 모습일는지요.

 더 톺아보면, 내가 내 살림자리 곁에서 늘 바라보는 꽃은 ‘내가 바라보는 꽃’입니다. 이 꽃들은 내가 바라보지 않더라도, 또 사람들이 ‘꽃’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더라도, 언제나 이곳에서 이 모습대로 살아냈습니다.

 사람들이 꽃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꽃다움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어느 한 사람다움’을 알뜰살뜰 빛내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사진이란 ‘사진으로 담기는 넋 밑삶이나 밑모습을 드러내는 일’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채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을 보여주는 일’에만 가까운지 모릅니다.

 새벽이슬을 머금는 봉숭아랑, 아침햇살 스미는 봉숭아랑, 한낮 눈부신 햇살을 받는 봉숭아랑, 어스름이 깔리는 봉숭아랑, 달빛을 맞아들이는 봉숭아랑, 새까만 깊은 밤 봉숭아랑, 어느 모습이 봉숭아 꽃다운 모습이 될까요. 시골자락 밭뙈기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골목집 담벼락 틈바구니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꽃그릇에서 얌전히 자라는 봉숭아랑,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스스로 자라는 봉숭아랑, 그늘진 데에서 조용히 꽃망울 피우는 봉숭아랑, 어느 꽃자락이 꽃답다 할 만한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사진책 《故鄕》을 펼치면서 거듭 돌이킵니다(거듭 돌이키니, 이 사진책 이름은 ‘故鄕’이지 ‘고향’마저 아닙니다). 이 사진책에 나오는 꽃은 꽃다운 꽃이 될 수 없습니다. ‘고향을 생각하거나 떠올리는 사람 마음에 새겨진’ 모습을 되새기는 징검돌 같은 꽃이 될 뿐입니다. 바다도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바다를 보여주는 바다 사진이 아닙니다. 바위를 보여주는 바위 사진이 아닙니다.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보여주는 소나무 사진이 아니요 숲 사진이 아니며 오름 사진이 아니에요. 언제나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 틀거리에 따라 잘라서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를 헤아립니다. 이름없을 뿐더러 사진쟁이조차 아닌 여느 어버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옮길 때를 돌아봅니다. 어느 쪽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삶’일까요.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분들은 왜 ‘작가’가 될까 궁금합니다. 온누리에 널리 알려졌기에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 사람’이라는 이름표가 붙을 만한가 궁금합니다.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다 하지만, 이 소나무 사진들은 얼마나 소나무다움을 드러낼는지요. 소나무가 이 사진을 바라본다면 소나무로서 ‘그래 그래, 이 사진들은 바로 나, 소나무 삶이로구나.’ 하고 느낄 만한지요.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해야 알맞으리라 느낍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배병우 님 스스로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말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소나무 꽃잎이나 뿌리나 줄기를 찍는 사람은 ‘소나무를 못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위에 뿌리내려 자라는 소나무를 찍든, 민둥산에 한 그루 달랑 남은 소나무를 찍든, 몇 천만 원어치 값을 뽐내며 학교나 체육관이나 회사나 아파트 들머리에 심긴 소나무를 찍든, 어디에서나 ‘소나무를 찍는 사진’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소나무는, 어디에서 자랄 때에 ‘소나무다운 소나무’일까요. 사람 발길이 뜸한 데에서야 비로소 소나무일는지요. 아파트 앞에 심으면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소나무는 경주에서만 소나무요, 서울 남산에서는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나는 생각합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우물을 파고 우물에 갇혔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안쪽에 얽매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길어올리는 사진을 바라보거나 다루거나 비평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들 스스로 우물을 파거나 울타리를 친다 할 만합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이 바라보는 대로 꽃도 찍고 바다도 찍고 바위도 찍고 소나무도 찍고 숲도 찍고 오름도 찍고 할 뿐입니다. 구태여 ‘배병우 아닌 다른 사람 눈길’로 꽃이나 바다나 바위나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찍을 까닭이 없어요. 그런데, 퍽 슬프게도 배병우 님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당신 눈길’이 아닌 ‘당신들이 좋아한다는 배병우 님 눈길’을 좇거나 시늉하거나 따르면서 어설픈 껍데기 사진에 사로잡힙니다. 곧,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 사진을 즐긴다 하지만, 배병우 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한테 ‘자,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즐기는 사진을 마음껏 누려 보셔요.’ 하고 이끌지 못하는 노릇입니다. 온통 따라쟁이만 낳습니다. 온통 흉내쟁이만 키웁니다.

 《고향》이라는 사진책은 모두 여섯 갈래로 나누어 고향이라는 삶자리를 돌아봅니다. 고향을 이 여섯 갈래로 나눌 만한지부터 아리송한데, 이 여섯 갈래로 나눈다 할 때에, 어느 한 갈래도 ‘도시하고 가깝지 않’습니다. 여섯 갈래 모두 도시하고 동떨어진 삶자락이요 이야기입니다.

 도시에는 꽃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없습니다. 아니, 도시는 꽃조차 들이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키우는 꽃은 돈이 되는 꽃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 꽃은 모조리 잡풀로 여겨 뽑아냅니다. 그렇다면, 이 사진책에서 밝히는 ‘고향’에서 자랄 꽃은 어떤 꽃인가요. 참말 고향이라는 데에는 꽃이 있을까요.

 이제 사진책 《고향》을 덮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진책 《고향》을 이제 덮습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에서 흘러든 똥물과 쓰레기가 가득한 나머지, 앞바다에서 똥냄새와 쓰레기내음을 피웁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로 올려보낼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이 가득해서, 언제나 매연을 마시고 언제나 짐 가득 실은 짐차 배기가스까지 신나게 마십니다. 나한테 내 고향은 시커먼 빛깔에 가까운 잿빛입니다. 돌도 흙도 햇빛도 물도 바람도 풀도 홀가분하기 어려운 터전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꽉 막힌 데에서도 내 어버이와 내 이웃들은 텃밭을 일구고 꽃밭을 마련하며 웃음눈물을 나누더군요.

 사람은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사진기를 만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잘난 이야기를 길어올리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돈을 벌자며 사진기 단추를 눌러대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람이 찍는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을 담습니다. 사람이 만든 사진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은 ‘사람 얼굴’을 찍는대서 담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골목길’을 찍는대서 실리지 않습니다. 들꽃이나 골목꽃 한 송이를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빛깔을 담습니다. 길바닥에 구르는 돌이나 바가지에 담긴 물을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내음을 싣습니다. 들판을 찍거나 멧자락을 찍거나 바닷물을 찍거나, 누군가 이곳에 얌전히 섰기 때문에 들판 사진이나 멧자락 사진이나 바닷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이 지구별 기스락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을까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람내음은 얼마나 깃드는가요. 사람이 만들어 나누는 사진기란 사람들 사랑을 얼마나 옮길 만한 따스한 연장이 되는가요. (4344.9.6.불.ㅎㄲㅅㄱ)


― 故鄕,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배병우 사진,황학주 글,생각의나무 펴냄,2007.3.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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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비숍 Werner Bischof 열화당 사진문고 7
클로드 쿡맨 지음, 이영준 옮김, 베르너 비숍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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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사진으로 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50] 베르너 비숍·클로드 쿡맨, (열화당,2003)



 1916년에 태어나 1954년에 숨을 거둔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한국땅에서 슬픈 피비린내가 나던 때에 이 나라에 찾아와서 ‘슬픈 피비린내’ 사진이 아닌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랑스러운 삶’ 한 자락과 이 삶 한 자락을 뒤틀려는 가녀린 몸짓을 사진으로 담기도 했습니다.

 조그마한 사진책 《베르너 비숍》(열화당,2003)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작은 사진책은 영국 파이돈(phaidon) 출판사에서 내놓은 책을 옮긴 판입니다. 인터넷책방에서 살펴보니 영국에서 나온 판이 외려 한국에서 옮겨진 판보다 값이 쌉니다. 거꾸로 되었네 싶고, 이런 줄 미리 알았으면 영국 책으로 장만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책으로 찍은 빛느낌이나 종이느낌은 한국 책이 영국 책을 아직 못 따르거든요. 더욱이, 굳이 ‘사진쟁이 삶을 풀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사진마다 옆에 붙인 ‘덧말’을 읽는다 해서 사진을 더 잘 읽어낼 수 있지 않아요. 그래도, “1943년, 비숍은 ‘가난과 싸우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이며, 우리 일생의 임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6쪽).” 같은 글월을 한글로 읽을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비숍은 일부러 어린이들을 택했다. 그 나라 지도자들의 죄가 어떤 것이건 간에, 어린이들은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들이었다. 또한, 핵전쟁의 발발에 위협받고 있는 그들의 미래는 현재보다 황폐할 것 같았다(8쪽).” 같은 글월을 읽을 수 있는 일 또한 고맙습니다.

 다만, 애써 이러한 글월을 읽지 않더라도 ‘사진으로만 보았을 때’에도 베르너 비숍이라는 분이 어떠한 사진을 좋아하면서 어떠한 사진길을 걸으려 했는가를 환하게 느낄 만해요.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읽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나눕니다.

 사진을 읽을 때에는 사진으로 읽습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글로 읽어요. 사랑을 읽을 때에는 사랑으로 읽습니다.

 사랑을 다른 테두리나 눈길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림을 다른 테두리나 눈길로 읽을 수 없어요. 사람은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마주합니다. 내 앞에 선 사람을 이이 그대로 맞아들이며 사귈 뿐, 이이를 다른 누구로 삼거나 여기거나 견줄 수 없어요. 이이는 오직 이이 한 사람이요 이이 한 목숨입니다.

 베르너 비숍 님 사진을 읽으면서 차근차근 느낍니다. 베르너 비숍 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뉴욕을 찍은 사진이든 조개껍데기를 찍은 사진이든 쿠스코로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베르너 비숍 님은 ‘당신이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이들이 무엇을 사랑하면서 껴안는가’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나서 살며시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더 좋다거나 더 나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베르너 비숍 님 당신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착하게 사는 얼거리를 사진을 담습니다. 사람들이 바보스레 살면 바보스레 사는 줄거리를 사진으로 담아요.

 저는 골목길을 천천히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에 늘 느낍니다. 내가 찍는 골목길 사진은 더 예쁘게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찍는 골목길 사진은 이 골목길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쁜 살림 예쁜 빛깔 예쁜 꿈넋 예쁜 손길을 고루 건사하면서 나누기 때문에, 이 모든 예쁜 모습을 내 사진으로 담아 예쁜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을 뿐입니다. 서로서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이웃이기에 나 또한 즐거이 사진을 찍습니다. 예쁜 사랑으로 예쁜 웃음을 짓기에 예쁘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사진입니다. 억지로 예쁜 척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예쁜 그림을 따로 만들거나 꾸밀 수 없습니다. 예쁜 삶은 예쁜 결로 묻어납니다. 만드는 사진은 티가 납니다. 살아가는 사진은 사랑이 묻어납니다.

 자그마한 사진책 《베르너 비숍》에 베르너 비숍 님 모든 삶이나 사진이나 사랑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꼭 이만큼만 깃듭니다. 그런데, 이만큼이든 저만큼이든 삶이나 사진이나 사랑은 달라지지 않아요. 사진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면 더 잘 읽을 수 있겠습니까. 사진을 꼭 한 장만 볼 수 있으면 제대로 못 읽겠습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쟁이는 사진 백 장을 그러모아서 또다른 이야기를 싱그러이 들려줍니다. 꿈을 노래합니다. 빛을 나눕니다. 넋을 보살핍니다. 흙을 사랑합니다. 한국땅 사진쟁이들한테 베르너 비숍이 착하고 해맑게 읽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4344.9.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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